미국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대선후보(이하 힐러리)는 미국인의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히 갈리는 정치인이다.  

힐러리가 2016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후 실시된 각종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그가 싫다고 답변했다. 지난 8월 말 실시된 워싱턴포스트·ABC방송 조사에서는 비호감률이 56%에 달했다. 호감률은 41%에 그쳤다. 트럼프에 대한 비호감률(63%)도 만만치 않았다. 유권자들에게 2016년 미 대선이 ‘덜 나쁜 후보’를 선택하는 선거가 됐다. 트럼프는 극단적인 인종,성 차별 행태로 미국인들, 특히 소수 인종과 여성 층의 반발을 샀다. 트럼프가 선거 전략 차원에서 그랬든, 원래 그런 성향이었든 트럼프가 미움받은 이유는 쉽게 이해가 된다. 힐러리는 그렇지 않다. 왜 비호감 후보가 됐는지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 힐러리가 싫다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거짓말쟁이라서, 비리 스캔들이 많아서, 너무 진보적이어서, 남편이 바람둥이여서···. 모두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정치인 힐러리의 역대 지지율 추이를 살펴보면 일관된 패턴이 발견된다. 힐러리가 정치적 야망(특히 대통령 꿈)을 드러낼 때마다 지지율이 하락했다. 힐러리의 지지율은 상원의원 재직 시절(2001년 1월∼2009년 1월)에는 상승 곡선을 그리다가 대선 출마설이 솔솔 피어오르는 시점부터 꺾이기 시작해서 2008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기간 내내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 해 경선에서 버락 오바마에게 패배한 뒤 힐러리의 지지율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힐러리의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시기는 오바마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으로 묵묵히 일할 때다. 장관 재직기간 지지율이 66%(갤럽)까지 치솟았다. 그런데 힐러리가 2013년 2월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다시 대선 출마 움직임을 보이자 그의 지지율은 50%대로 뚝 떨어졌다.


힐러리 지지율 추이
  

힐러리가 정치적 도전에 나설 때마다 지지율이 떨어지는 이유는 뭘까. 바로 ‘섹시즘’(Sexism)이다. 여성은 체질이나 성격, 능력 면에서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인식(또는 잠재 의식) 하에 이뤄지는 온갖 차별적 행태인 섹시즘 말이다. 건국 이후 미국의 대통령은 모두 남성이었다. 감히 그 자리에 여성이 도전한다니, 어떤 사람들은 힐러리의 대선 도전에 뺨이라도 얻어맞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힐러리가 정치를 시작하기 전에도 여론은 그녀가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려할 때마다 매를 들었다. 1993년 퍼스트 레이디 힐러리가 백악관 이스트 윙(퍼스트 레이디 집무공간) 대신 웨스트 윙(대통령 집무 공간)에 사무실을 마련했을 때, 건강 보험 개혁을 진두 지휘했을 때 힐러리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웨스트 윙에 자리잡은 퍼스트 레이디는 힐러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다 힐러리가 건강 보험 개혁 반발에 따른 1994년 중간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국정 일선에서 물러나 이스트 윙에 다소곳이 머무르자 힐러리의 인기가 높아졌다.  

미국 정치권에서 섹시즘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는’ 행위로 금기시된다. 그런데 트럼프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따위는 무시한 채 거침없는 성·인종 차별 행태로 여론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공화당의 핵심 기반인 백인 남성표를 결집해 결국 대선후보가 됐다. 힐러리가 민주당 후보가 되자 트럼프는 본선 선거운동 과정에서 중도파와 민주당 진영의 백인 남성들을 힐러리와 갈라놓기 위한 섹시즘을 구사했다. 트럼프가 폭스뉴스의 여성 앵커 메긴 켈리에게 가한 섹시즘은 압권이다. 트럼프는 2015년 8월 공화당 대선후보 첫 TV토론에서 그의 여성 비하 발언을 지적한 메긴을 ‘빔보’(bimbo·예쁘지만 머리가 빈 여자)로 비하했다. 그가 메긴을 겨냥해 “토론회를 진행하던 그녀의 눈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다른 어디에서도 피가 나오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여성들은 경악했지만 백인 남성들의 트럼프 지지는 더 견고해졌다. 트럼프가 올해 9·11 추모행사장에서 휘청거린 힐러리를 겨냥해 “(힐러리) 클린턴이 또 하루를 쉰다. 그녀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트윗을 올린 것도 섹시즘의 일종이었다. 이 트윗의 이면에는 여성은 남성보다 신체적으로 열등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힐러리는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도 섹시즘의 장벽을 넘어서야 했다. 올해 민주당 경선에서 백인 남성들은 힐러리 대신 버니 샌더스 후보를 밀었다. 샌더스가 힐러리 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힐러리가 여성이어서 그랬다. 흑인 오바마와 여성 힐러리가 겨뤘던 2008년 민주당 경선 때도 남성들은 ‘여성 대통령’ 대신 ‘흑인 대통령’을 선택했다.  

남성 정치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가 여성 정치인에게는 단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힐러리가 기침을 멈추지 않거나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삐끗해서 경호원의 부축을 받거나 어지럼증으로 휘청거리기라도 하면 그 때마다 미디어는 법석을 떨었다. 2015년 가을 샌더스가 탈장 수술을 받았지만 미디어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갤럽이 2014년 3월 미국인들에게 ‘왜 힐러리는 대통령감이 아니냐’고 물었다. ‘힐러리가 대통령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힐러리는 재선 대통령의 퍼스트 레이디 경험을 갖춘 재선 상원의원, 국무장관 출신이다. 남성 정치인이 이 정도의 경력이라면 자격 논란은 일지 않았을 것이다. 자격 시비는 공연한 주장이고 ‘여성 대통령을 원하지 않는다’는 두 번째 답변이 오히려 솔직한 답변일지도 모른다. 결국 힐러리가 Y염색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백악관에 재입성하는 모습을 보기 싫다’는 응답도 나왔다. 남편의 불륜도 힐러리 책임이라는 말이다. 부인의 불륜으로 추궁받은 남성 정치인은 없었다. 이런 게 섹시즘이다. 섹시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다. 섹시즘은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의 표현을 빌리면 ‘알려진 무지’(known unknowns)의 영역이다.  

앞서 나가는 힐러리가 왠지 불안해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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