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에 참여하지 않고 있지만 PSI의 목적과 원칙을 지지한다.”(노무현 대통령)

“PSI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지와 협력에 감사한다.”(조지 W 부시 대통령)

 2006년 11월18일 베트남 에이펙(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계기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이 발표한 PSI 관련 언급이다. 두 정상의 발언만 놓고 보면 한미 양국의 PSI 공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부시 정부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막후에서 한국의 PSI 가입을 강하게 요구했다. 유엔안보리가 북한 핵실험 제재조치(결의 1718호)를 취한 지 한 달여 만에 열린 정상회담이었다.

 부시 정부로서는 한국 정부가 PSI 가입을 통해 북한의 핵확산 차단에 보다 적극적으로 기여해 주길 바랐다. 노무현 정부는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부시 정부의 요구를 거부했다. 당시 정상회담을 취재했던 기자는 양국 정상의 무미건조한 표정을 통해 외교적 언급 이면에 감춰진 냉랭한 기류를 읽었다. 부부 간에 별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 각방을 쓰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흘러 한국에선 보수 성향의 이명박 정부가, 미국에선 진보 성향의 버락 오바마 정부가 출범했다.

 한국 정부 내에서는 PSI에 전면적으로 참여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던 차에 지난 4월 초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는 이명박 정부가 PSI 가입 방침을 사실상 확정짓는 계기로 작용했다. 기자는 2006년 11월 한미 정상회담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오바마 정부의 긍정적 반응을 기대했다. 하지만 고든 두기드 미 국무부 대변인은 한국 정부의 PSI 가입 움직임에 관한 질문을 받고도 “한국 정부가 판단할 문제”라고만 밝혔다.

 미국의 환영 입장 표명이 북한이나 국내 진보진영의 반발에 직면해 있는 이명박 정부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돌연 남북 당국간 대화채널을 복원한다는 명분 하에 PSI 가입 시기 발표를 무기한 연기했다. 현대아산 직원의 북한 억류 사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조치였다지만 미국 정부로서는 당혹스러운 사태의 진전이 아닐 수 없다.

 주미 한국대사관은 지난 12일 워싱턴 주재 한국 특파원들에게 한 통의 e-메일을 발송했다.

 그 메일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당일 마이애미에서 개최된 PSI 운영전문가그룹 회의에서 행한 연설을 발췌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골자는 “모든 국가들이 PSI에 가입하여 영속적이고 성공적인 PSI를 위해 기여해 나가기를 희망한다”는 것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언급은 분명 PSI 카드를 꺼내들었다가 북한과 국내 진보진영의 반발에 직면한 한국 정부에 고무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오바마 대통령의 PSI 연설이 나오자마자 주미 한국대사관이 직접 나서서 득달같이 PSI 홍보에 나선 행태는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외교관이란 자기 나라를 위해 거짓말을 하라고 외국에 보내진 정직한 사람”이라는 영국 외교관 헨리 워턴 경의 유명한 정의가 있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인 게리 윌스는 워턴 경의 정의를 “본국에 보내는 메시지는 신뢰할 만한 것이어야 하나 상대국에 대한 메시지는 모호해야 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PSI 가입은 오바마 정부에게 보내는 ‘선물’의 의미가 있다. 선물은 상대방이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어렵게 구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효과가 극대화되는 법이다.

 동맹국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협상 상대국인 미국을 향해 주미 한국대사관까지 나서서 한국 정부가 PSI 가입을 위해 전력질주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을까.

최근 기자가 만난 고든 플레이크 맨스필드 재단 사무총장은 이렇게 충고했다.

“오바마 정부가 부시 정부의 PSI 정책을 재검토하고 있을 때 이명박 정부 측에 PSI 가입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권고했다. 오바마 정부가 원하고, 관심이 높아졌을 때 가입해야 환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가입한다고 말이 나온 이상 더 이상 정치화하기 전에 결단을 내리는 것이 한국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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