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인 6일(현지시간) 미 전역이 레이건의 이름으로 뒤덮였다.

마침 이날은 미국 프로풋볼(NFL) 챔피언 결정전인 슈퍼볼이 열리는 날이어서 더욱 뜻깊은 날이 됐다. 슈퍼볼이 열리는 텍사스주 알링턴 카우보이스 스타디움에서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 대형스크린을 통해 레이건 전 대통령의 탄생을 축하하는 메시지가 방영됐다. 어느 평론가의 표현대로, 레이건 탄생 100주년과 슈퍼볼이 겹친 6일은 ‘기퍼 선데이’(Gipper sunday)가 됐다. 

1940년 영화배우 시절의 레이건은 실화에 바탕한 풋볼 영화 ‘누트 라크니’에 출연한 적이 있다. 영화에서 레이건은 25살에 폐렴으로 숨진 비운의 풋볼 선수 조지 기퍼로 나왔다. 노트르담대학 풋볼팀이 챔피언 결정전을 앞둔 어느 날 병상의 기퍼는 라크니 감독에게 “아무래도 난 죽을 것 같다. 동료들에게 기퍼를 위해 한 번만 더 이겨 달라고 전해 달라”고 유언처럼 말한다. 라크니는 선수들에게 “기퍼를 위해 승리하자”고 독려했고 팀은 승리했다.

그 자신 대학 시절 풋볼 선수로 뛰었던 레이건은 영화 속의 기퍼를 자신과 동일시했다.

                                                                                 대학 시절 풋볼 선수로 활약할 당시의 레이건

그 이후 기퍼는 레이건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 됐고, 레이건은 이 별칭을 무척 좋아했다. 레이건은 1984년 대통령 재선 당시 “기퍼를 위해 한 번 더 승리하자”(Win one for the Gipper)고 호소했다. 미 국민은 ‘기퍼’를 위해 표를 던졌다. 레이건은 전체 선거인단 538명 중 525명을 석권하며 압도적 표 차로 재선 고지에 올랐다. 미국인들은 지금도 그를 주저없이 링컨이나 루스벨트 같은 ‘위대한 대통령’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미국인들은 레이건 특유의 낙관주의에 매료됐다. 레이건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신발 판매원의 아들로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셋방을 전전했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이사할 때마다 집이 작아졌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는 술에 취해 살았다. 레이건의 형은 그런 가난을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레이건은 달랐다. 가난을 비가 개면 사라질 먹구름으로 봤다. ‘대통령을 키운 어머니들’(First Mothers)의 저자인 보니 앤젤로는 “그는 파란 하늘을 보았던 반면 형인 닐은 구름을 보았다”고 평가했다. 인간 레이건의 낙관주의는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의 유전자였다. 대통령 레이건의 낙관주의는 베트남 전쟁의 상흔과 경제 침체로 실의에 빠졌던 미국인들에게 자부심과 ‘할 수 있다는 정신’(can-do spirit)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레이건은 미국 보수주의 진영의 우상이지만 원래는 민주당원이었다. 그의 가족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민주당 정부가 펼친 뉴딜정책의 수혜자였다. 레이건이 공화당으로 전향한 이유 중 하나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었다. 이후 그는 감세와 재정지출 축소, 규제완화 등을 통한 ‘작은 정부’ 정책과 반공산주의 노선 등 보수적 기조를 고수했으나 당파성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민주당 소속의 토머스 오닐 하원의장과 손잡고 사회보장 개혁과 선거공영제 확립을 위해 힘썼다. 민주당은 요즘 레이건의 이 같은 초당 행보를 거론하면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 개혁과 선거법 개혁에 반대하는 공화당을 반격하고 있다. 소비에트를 ‘악의 제국’으로 몰아붙이며 전임 카터 행정부의 데탕트(긴장완화) 정책을 폐기한 그였으나 온건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리더로 부상하자 즉각 조지 H 부시 부통령을 소련으로 급파, 미·소 정상회담을 가동시켰다.

레이건 재임기간 냉전이 종식됐다. 수많은 세계인들이 자유의 세례를 받았다. 역사의 물줄기가 그 혼자만의 힘으로 바뀌진 않았다. 그 역시 결함을 지닌 지도자였다. 국정 현안에 무지했다는 자질론이 거론되고, 재임 시절의 양극화 심화와 재정적자 증가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고르바초프의 등장이 없었다면 냉전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지도 모른다. 저격을 당하고도 살아난 레이건에게는 운이 좋아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온갖 난관과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긍정의 힘’은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이었다. 그의 낙관주의는 반대편 세력까지 전염시켰다. 이로써 그는 보수진영과 미국를 넘어 자유세계의 영웅이 됐다.

조남규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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