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1일, 밤 늦게 도착한 러시아 이르쿠츠크 공항엔 추적 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1652년 코사크 기병대가 점령한 이후로 이르쿠츠크는 러시아의 동방 거점 도시로 발전했다. 러시아 제국은 19세기 초 이 도시에 시베리아 총독부를 두고 극동과 알래스카까지 관할했다.  


 이르쿠츠크 레닌 거리



유럽 어느 지역이든 주요 볼거리는 성당이다. 러시아 정교회 본산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견줄 수 없지만 이르쿠츠크의 성당들도 나름의 사연을 지닌 채 답사객의 눈길을 끌었다. 이르쿠츠크 시내에 위치한 즈나멘스키 수도원을 먼저 찾았다.

 

즈나멘스키 수도원

즈나멘스키 수도원에는 1825년 12월14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뒤를 이은 니콜라이 1세 대관식 당일 새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시베리아로 유배됐던 데카브리스트-‘데카브리(러시아어로 12월) 당원’-들이 묻혀있다. 데카브리스트 묘비들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들의 불꽃같은 삶과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다 속절없이 스러져간 비운의 왕조를 상기시켰다. 



귀족 신분의 청년 장교들이 주축이 된 데카브리스트들은 나폴레옹 황제 치하의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러시아 병사들을 통해 러시아 민중의 애국심과 잠재력을 깨닫게 됐다. 왕정을 타도한 혁명의 나라 프랑스에서 이들은 인민주권을 토대로 한 서구 계몽사조의 세례를 받았고 급기야 국민 주권의 공화정을 꿈꾸기 시작했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든 혁명가들은 있다. 데카브리스트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혁명가였다. 

대문호인 레오 톨스토이의 역작 '전쟁과 평화‘에서 우리는 주인공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을 통해 데카브리스트의 맹아(萌芽)를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와 맞서 싸우면서 황제에 대한 충성심과 민중을 향한 애정 사이에서 번뇌했던 러시아 청년 귀족들의 분투는 백척간두에 서 있는 조선을 구하기 위해 무능한 왕조를 변혁시키려했던 구한말 양반 자제들을 연상시킨다. 만약 니콜라이 1세가 데카브리스트의 충정을 받아들여 농노를 해방하고 입헌군주국으로 러시아를 변모시켰다면, 로마노프 왕조는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시베리아의 황량한 폐광 속에서 볼세비키에 의해 총살당하는 비극적 결말을 피했을지도 모른다. 고종이 김옥균을 필두로 한 개혁파와 손잡고 근대적 개혁에 나섰다면, 독립협회의 공화(共和)적 제도 도입 요구를 수용했다면 조선왕조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부질없다지만 ‘역사의 신’이 있다면 그는 분명 냉혹한 성격일 것이다. 로마노프 왕조도, 제정 러시아의 숨통을 끊은 볼세비키도, 소비에트 공산정권도 수천만 러시아인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데카브리스트들의 숭고한 희생과 고결한 이상만이 살아남아서 후세인들의 가슴에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즈나멘스키 수도원으로 들어서면 철창으로 둘러싸인 석관묘가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트푸베츠코이 공작 부인 묘

 

이 곳에 세르게이 페트로비치 트루베츠코이 공작(1790~1860)의 부인이 세 딸과 함께 묻혀있다. 트루베츠코이는 데카브리스트 쿠데타 당시 황실 근위대 장교였다. 쿠데타가 실패한 뒤 주동자 5명은 처형되고 나머지 106명은 시베리아로 유배됐다. 유배된 이들 중 기혼자는 18명이었다. 부인들은 기로에 섰다. 남편과 이혼한 뒤 재혼해서 귀족의 삶을 이어가느냐, 아니면 귀족 신분과 특권, 재산을 모두 박탈당한 채 시베리아로 가서 유배된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느냐. 11명의 부인들은 고난의 시베리아를 선택했다. 트루베츠코이의 부인 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 트루베츠카야가 가장 먼저 시베리아로 떠났다. 당시 26살이었다. 트루베츠카야는 시베리아에서 28년을 보낸 뒤 남편이 사면받기 두해 전 숨졌다. 지금도 그녀의 묘비에는 변치 않는 사랑을 다짐하는 신혼부부나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르쿠츠크에는 곳곳에 데카브리스트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은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이 된 ‘발콘스키의 집’을 찾고서야 왜 이르쿠츠크가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게 됐는지를 알게됐다. 

이 곳은 마리아 발콘스카야가 시베리아로 유배된 남편 세르게이 발콘스키 공작(1786~1856)을 돌보면서 살아간 집이다. 

세르게이 발콘스키 공작과 부인 마리아 발콘스카야


세르게이 발콘스키 공작의 집

 

 

 

 

 

 

마리아가 쓰던 피라미드형의 포르테피아노


마리아는 어린 아이를 친정에 맡겨놓고 유배된 남편 곁으로 갔다. 광산 갱도에서 노역중인 남편과 상봉한 마리아는 무릎을 꿇고 남편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에 입을 맞췄다고 한다.  

처녀 시절 마리아 발콘스카야의 연인이었던 시인 푸시킨은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에게 ‘젊은 데카브리스의 사랑’이라는 시를 헌사했다.

‘시베리아 깊은 광맥 속에/그대들의 드높은/자존심의 인내를 보존하소서/그대들의 비통한 노력과/높은 정신의 지향은 사라지지 않으리니./불행의 신실한 누이/희망은 암흑의 지하 속에서/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리니/그날은 오리니/중략/무거운 사슬이 풀어지고/암흑의 방은 허물어지고-자유는/기쁨으로 그대들을 마중 나오리니/그리고 형제들은 그대들에게 검을 건네리니.’ 

세르게이 발콘스키는 톨스토이의 외가쪽으로 6촌 아저씨뻘된다.

톨스토이의 어머니 마리아는 발콘스키 가문 출신이다. 트루베츠코이도 톨스토이의 외가쪽 친척이다. 어려서부터 발콘스키 가문 출신의 장군들에 대한 무용담이나 데카브리스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톨스토이는 세르게이 발콘스키를 모델로 장장 6년에 걸쳐 ‘전쟁과 평화’를 집필했다. 

세르게이 발콘스키의 분신인 소설 속의 안드레이 볼콘스키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과 조국 러시아에 대한 애국심으로 불타는 열혈 청년 귀족 장교다. 1805년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에 맞서 러시아 황제가 전쟁을 선포하자 안드레이는 부인과 여동생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마병으로 자원 입대했고 러시아 군대가 모스크바를 불태우고 퇴각한 1812년 전쟁의 와중에 장렬히 전사한다.

그는 죽기 직전 ‘인간에 대한 감격에 찬 연민과 사랑’을 깨닫게 된다. “형제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 적에 대한 사랑, 그렇다, 이것은 신이 이 땅 위에서 가르친 사랑이다. 누이인 마리야에게 가르침을 받고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 사랑이다.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나는 삶에 미련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살아 남을 수만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나에게 남겨진 유일한 것인데. 아아! 그러나 나는 이미 늦었다. 나는 그 것을 잘 알고 있다.”(‘전쟁과 평화’, 박형규 역, 삼중당문고)

톨스토이가 안드레이의 입을 통해 밝힌 이 각성이 현실의 수많은 발콘스키들을 러시아 전제정 타도를 위한 혁명의 길로 내몰게 된다.  

톨스토이가 원래 3부로 기획했던 ‘전쟁과 평화’는 1805년~1812년의 이야기만을 다룬 채 미완으로 끝나 제2부에서 다룰 예정이었던 ‘데카브리스트 쿠데타’와 제3부 ‘데카브리스트들의 귀환’은 감상할 도리가 없게 됐다. 2,3부가 집필됐다면 이르쿠츠크 여행이 톨스토이 문학기행을 겸할 수 있었을텐데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유형 생활이 10년을 넘어서자 유배된 데카브리스트들의 처우가 개선됐다. 이제 이들은 이르쿠츠크에서 가족(처음엔 부인 혼자 왔지만 시베리아에서도 자녀들은 계속 태어났다. 위대한 사랑의 힘이여, 트루베츠카야는 시베리아에서 무려 7명의 자녀를 뒀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됐다. 당대의 일급 교양인이었던 데카브리스트들은 집에서 토론회나 시낭송회, 음악회, 연극공연을 열었다. 발콘스키의 집은 데카브리스트들의 유배형을 감독하는 시베리아 총독도 즐겨 찾는 명사들의 사교장이 됐다. 변방 도시였던 이르쿠츠크에서 르네상스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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