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여행지 보다 사람이 추억될 때가 있다.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한 참을 잊고 지내다
불현듯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이 생각날 때가 있다.
사진을 정리하다 만난 북구의 소녀가 그런 경우다.
에스토니아로 향하던 페리 선상에서
에스토니아의 슬픈 역사를 들었다.
그들의 나라는 강대국들에 여러 차례 유린됐다.
러시아와 독일, 소련이 그들의 나라를 차례로 복속시켰다.
그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이후에야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그들의 지정학적 조건이
강대국의 식욕을 자극했으리라.
발트해를 달리는 페리 위에서 나는,
조금씩 다가오는 에스토니아 땅을 바라보며
동병상련의 심정이 됐다.
<페리에서 바라본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발트해에서 바라본 풍경이 다가갈수록 환해졌다.
짙은 오렌지색 지붕들이 독특하다.
소녀를 만난 곳은 광장이었다.
탈린 한 복판에 자리잡은 광장은 관광객들도 인산인해를 이뤘다.
관광객을 유인하려는 식당들의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내가 찾은 식당은 아름다운 소녀와 아코디언 연주자를 전면에 내세웠다.
레스토랑 사장님의 고명 딸일까,
아니면 동생 학비를 벌기위해 생업 전선에 나선 가난한 집의 착한 누나일까.
나그네의 궁금증은 아랑곳 없이
이국의 소녀는 쉴 새 없이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에스토니아 소녀를 보며
시인 백석이 노래한 '나타샤'를 떠올렸다.
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백석이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고,
읊었던 바로 그 나타샤.
나타샤는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 여주인공 이름이지만
백석은 북구의 소녀를 통칭하는 보통명사로 나타샤를 사용했다는 것이,
시인 신경림의 해석이다.
이름도 모르는 소녀 만큼이나
탈린의 풍광은 정갈한 이미지로 남았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출출이: 뱁새
*마가리: 오막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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