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을 때 가끔 눈길이 가는 곳이 있습니다.
거실 한 쪽에 걸려있는 양탄자입니다.
연전에 걸프만에 면해있는 카타르에서 사온 것입니다.
아내나 아이들은 물론 집을 찾는 방문객들마다
"발 매트를 왜 벽에 걸어놨느냐"고
냉소적인 코멘트를 불러일으키는 양탄자이지만
저에겐 각별한 물건입니다.
(이 글은 쓰고 한 참 뒤, 이 양탄자는 결국
아내가 화장할 때 깔고앉는 방석 대용이 되고 말았습니다)

                                                                   <집에 걸린 것 보다 훨씬 정교한 문양의 양탄자> 

언제든 중동 지역을 찾게되면
양탄자를 하나 사야겠다고 마음먹게된 것은,
20대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서머싯 몸의 대표작인
'인간의 굴레에서'를 읽고난 뒤의
결심이었습니다.

그 소설을 읽어본 분이라면
방황하는 청춘의 대명사, 우리의 필립이
인생 선배인 크론쇼에게서
"인생은 페르시아 양탄자"라는 화두를 건네받는 대목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왜 인생이 양탄자인가?

소설이 끝나갈 즈음,
몸은 필립의 독백 형식으로
그 해답을 제시합니다. 

 2007년 3월, 카타르를 찾았을 때
카타르 수도 도하는 갓 잡아올린 물고기처럼
약동하는 힘이 느껴졌습니다.

2006년 아세안 게임을 유치하는 등
적극적인 개방, 개발 정책을 추진하며
'제2의 두바이'를 꾀하고 있는 카타르의 힘이었습니다.


경기도 만한 크기의 카타르
는 세계 최대의 가스전을
보유하고 있는 자원 강국입니다.

 하마드 현 국왕은 1995년 부왕인 칼리파 전 국왕이 스위스로 휴가간 사이에 궁정 무혈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습니다.

 권좌에 오른 하마드는 빈국 카타르를 1인당 국민 소득 20만 달러에 이르는 알부자 나라로 탈바꿈시켰다는군요.

 

 
 양탄자 얘기로 돌아가면,
제 눈을 사로잡은 양탄자는
아랍 전통시장인 '수크'를 배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페르시아 민족의 후예가 운영하는 양탄자 가게는 저를
20대의 아득한 추억 속으로 이끌어갔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페르시아 양탄자에 대한 희구.

 

가게 안에는 다양한 무늬에
현란한 색채의 양탄자들이 즐비했습니다.
이란 여성들이 몇 년에 한 장씩 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수공예 양탄자라면서,
주인은 은근히 저의 구매 욕구를 부추겼습니다.

 이름모를 이란의 여인네가
수놓듯 한 땀 한 땀 그려나간 무늬를 좇다보면
과연 '인생은 페르시아 양탄자'란 말에 공감이 갑니다.
'인생=페르시아 양탄자'라는 공식을
서머싯 몸이 필립의 입을 빌려 풀이한 해답은 이렇습니다.

 크론쇼를 생각하며 필립은 그가 주었던 페르시아 융단을 떠올렸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 것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줄 것이라고 했었다. 갑자기 그 해답이 떠올랐다. 그는 픽 웃었다. 답을 알고 나니 수수께기 문제를 받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중략>

 크론쇼가 페르시아 양탄자를 선물했던 것은 바로 그 것을 말해주려 했던 듯 하다. 직조공이 양탄자의 정교한 무늬를 짜면서 자신의 심미감을 충족시키려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았듯이, 사람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또 사람의 행동이 사람의 선택을 넘어서는 곳에 있다고 믿어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삶도 나름의 무늬를 짜고 있다고. 어떤 행위는 쓸모가 없는 만큼 꼭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것 뿐이다. 살아가면서 겪는 온갖 일들과 행위와 느낌과 생각들로써 그는 하나의 무늬를, 다시 말해, 정연하거나 정교한, 복잡하거나 아름다운 무늬를 짤 수 있다.

 선택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을 지 몰라도, 또한 현상과 달빛을 함께 얽어 짤 수 있는 환상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그렇게 여겨지면 그런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배경으로 하여, 삶의 거대한 날실에(알지못할 샘에서 흘러나와 알지 못할 바다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은), 사람은 다양한 실가닥을 선택하여 무늬를 짬으로써 자기만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장 뚜렷하고,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아름다운 무늬가 하나 있다. 태어나, 성장하여 결혼하고, 자식을 생산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하다 죽는다는 무늬가 그 것이다. 그것들에서도 한결 착잡한 아름다운 무늬를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삶들은-헤이워드의 삶도 그 중 하나이지만-우연이라는 눈먼 무관심에 의해 디자인이 완성되기도 전에 끊겨 버린다. 그래서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위안이 편하다. 크론쇼와 같은 삶은 이해하기 어려운 무늬다. 그러한 삶도 그 나름대로 정당하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관점이 바뀌고 옛 기준은 바뀌어야 한다.

 필립은 행복을 얻고 싶은 욕망을 버림으로써 그의 마지막 미망을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행복이라는 척도로 삶을 잰다면 이제까지 그의 삶은 끔찍했다. 하지만 이제 다른 척도로도 잴 수 있음을 알고 나니 절로 기운이 솟는 듯 했다. 고통도 문제가 아니듯 행복도 문제가 아니었다. 살면서 만나는 행복이나 고통은 모두 삶의 다른 세부적인 사건들과 함께 디자인을 정교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한순간 그는 삶의 우연사들을 넘어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들은 전처럼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무슨 일이든 이제는 삶의 무늬를 더 정교화하는데 보탬이 되는 동기가 될 뿐이다. 종말이 다가오면 그는 무늬의 완성을 기뻐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품이리라. 그 예술품의 존재를 알고있는 사람이 자기 뿐이라 한들, 자신의 죽음과 함께 그것이 사라져버린다 한들 그 아름다움이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립은 행복했다. <'인간의 굴레에서' 민음사, 송무 옮김>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우리의 필립은
수많은 좌절을 겪은 뒤
종국엔 이런 식으로 양탄자 수수께끼를 풀어내고
자신을 사랑하는 샐리와의 소박한 삶을 선택합니다.

 여러분들이 짜고 있는 양탄자는
무슨 무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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