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버지니아주 포토맥 강변에 위치한 마운트 버논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땀흘려 일군 농장이다.
조지 워싱턴은
이복 형인 로렌스 워싱턴에게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마운트 버논에서
45년 동안 살았으며, 죽어서는 그 곳에 묻혔다.
조지 워싱턴과 부인 마사 워싱턴이 안장된 곳
조지 워싱턴의 마운트 버논 사랑은 유명하다.
미 대륙군 총사령관을 맡아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가
“왕이 되어달라”는 일부 참모들의 권고를 뿌리친 채
총사령관직을 내놓고 말을 몰아 달려간 곳도,
재선 대통령 임기를 마친 그가
“3선 대통령이 되어달라”는 주변의 요청을 물리치고
서둘러 되돌아간 곳도
마운트 버논이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인 1790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통령 관저에서 유럽 국가들의 대표단과 마주 앉기 보다는
마운트 버논 고향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고 싶다”고 썼을 정도다.
휴가를 맞아 최근 다녀온 마운트 버논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저택 식당 천장에는 농기구와 곡식들이 새겨져 있었고
벽난로 외벽에는 농장 풍경이 조각돼 있었다.
자원봉사 안내원은
“한 국가의 번영은 개명한 농사꾼들의 손에 달려있다고 믿은 워싱턴은
스스로를 농사꾼으로 생각하며
마운트 버논에서 새로운 품종 및 농법 개발에 힘썼다”고 설명했다.
안내원은 1층 서재에 놓인 소박한 의자를 가리키며
“워싱턴이 대통령 시절 사용했던 의자”라면서
“군주제가 대세였던 시절, 워싱턴은 이 의자에 앉아 대통령 임기를 고민했다”고 말했다.
Life magazine (저택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
3선 대통령의 유혹을 거부한 워싱턴의 결단은
후임 대통령들이 재선을 끝으로 퇴임하는 관행으로 굳어졌다.
2008년 한햇 동안 마운트 버논을 찾은 이는 130만 여 명.
이 곳이 일반에게 본격적으로 공개된 1860년대부터 계산하면,
총 방문객은 약 750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매표소측은 밝혔다.
워싱턴이 심었다는 포플러 나무
마운트 버논은 1799년 워싱턴이 자손을 남기지 못한 채
숨을 거둔 이후 서서히 쇠락해갔다.
농장을 상속받은 조지 워싱턴의 조카는
시장 환경의 변화로 더 이상 농장 유지가 어려워지자
농장을 분할 매각하기 시작했다.
그 후손들은 마운트 버논을 보존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1853년 미 연방 정부와 버지니아 주 정부에 마운트 버논 매입을 요청했으나
그 마저도 거절당했다.
이 때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살고 있던 여성인
앤 파멜라 커닝햄이 마운트 버논 지키기에 나섰다.
그가 창설한 ‘마운트 버논 여성협회’(이하 협회)가
전국적으로 모금한 20만 달러로 1858년 12월
마운트 버논 저택과 인근 부지를 매입하지 않았더라면,
마운트 버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협회가 저택을 매입했을 당시 워싱턴 대통령의 유물은
채 12점도 남아있지 않았으나
협회의 꾸준한 복원 노력 덕분에
저택 가구의 40% 정도가 워싱턴이 실제 사용했던 가구들이라고
안내원은 말했다.
저택 뒤뜰에서 포토맥 강을 바라보면
강 건너편으로 메릴랜드주가 보인다.
워싱턴은 이 풍경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안내원에 따르면,
1950년대 개발 바람에 휩쓸려 이 풍경이 빌딩 숲으로 뒤바뀔 뻔 했으나
협회의 노력으로 워싱턴 생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됐다.
협회는 지금도 미 연방 정부나 주 정부의 자금 지원 없이
마운트 버논 입장료와 기념품 판매, 기부금 등으로
마운트 버논을 관리해나가고 있다.
2006년 마운트 버논 부지 내에 건립된 도널드 W 레이놀즈 박물관 및 교육센터도
국민들의 성금으로 건립됐다.
예비역 장성 출신으로 박물관에서 자원봉사하고 있는 테드 게이는
“마운트 버논 여성협회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조지 워싱턴과 보다 친숙해질 수 있도록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제공하자는 차원에서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다”면서
“25 달러 이상 기부한 이들의 명단만 해도 전화번호부 몇 권 분량이 된다”고 말했다.
마운트 버논을 둘러보면서,
“이 곳을 찾는 미국인들은 ‘국부(國父)‘ 워싱턴에 대한 존경심에
자부심까지 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미 국민들은 워싱턴이 사랑했던 마운트 버논을 정성껏 관리하고 있었다.
마운트 버논에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한 채 망명지에서 숨을 거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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