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이뤄지는 일들이 있다. 우연찮은 기회에 머릿 속에서만 맴돌던 생각이 현실이 되기도 한다. 이달 초 관훈클럽 해외문화유적 답사팀의 일원으로 다녀온 러시아 이르쿠츠크, 바이칼 호 여행이 그랬다.
연초 마포 거리에서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과 조우했다.
김 전 위원장과는 과거 금융감독위 출입 기자 시절에 인연을 맺은 뒤 오래 격조했다. 금융위원장 퇴임 이후 우리 민족의 상고사(上古史) 탐구에 나선 김 전 위원장과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필자는 고조선-국사책에서 배운 부족사회 고조선이 아니라 BC 2333년 건국돼 만주 일대를 호령했다는 고대국가 고조선-과 다시 만나게 됐다.
그는 ‘김석동의 대한민국 경제와 한민족 DNA'라는 제목의 저서를 통해 한국인이 과거 유라시아 대초원을 무대로 활약했던 기마유목민의 DNA를 가지고 있으며 그 DNA는 엄격한 자연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용감하고 동시에 유능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들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인간유형에서 유래한다는 것, 이 DNA가 한국을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굴지의 중견국으로 성장시켰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 기마유목민이 주축이 된 기마군단은 약 2500년간 유라시아 스텝지역에서 동서양에 걸쳐 거대국가를 건설한 주역인데 이들은 고대로부터 한민족과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민족이 세운 고조선은 이들 보다 훨씬 앞서 유라시아 스텝 동부 지역에 기념비적인 고대 국가를 건설하고 동북아를 장악하는 대역사를 시작했고 여기서부터 스키타이와 돌궐, 흉노, 위구르, 몽골 같은 유라시아 기마민족의 역사가 태동됐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의 견해는 재야 역사학계의 ‘대(大) 고조선론’과 맥을 같이하지만 고조선의 영역을 평양 대동강 주변으로 보는 강단(대학) 역사학계의 ‘소(小) 고조선론’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바이칼을 한민족이 시작된 곳으로 적고있다.
최근 재야사학 연합체가 출범하면서 상고사 논쟁이 다시 불붙기 시작, 필자는 그 논쟁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대 고조선론’이 사실로 확인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여하튼 김 전 위원장은 바로 이 기마민족이 지배한 영역을 두루 돌아보고 이들의 역사를 재조명하면서 한민족의 성장DNA를 탐구했는데 그의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필자도 후일 기회가 되면 그 지역을 한 번 돌아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관훈클럽이 올해 문화유적 답사지로 바이칼을 선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심 깜짝 놀랐던 것은 바이칼 호의 정령이 된 먼 조상이 필자의 생각에 응답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바이칼 호 주변에서 살고 있는 몽골계 브리야트인들은 한민족과 같은 알타이어계 언어를 사용한다. 브리야트족은 바이칼의 브리야트 공화국을 비롯해 러시아에 약 45만 명, 몽골 헨티주,내몽골 등에 약 5만 명이 살고 있다. 칭기즈칸의 어머니가 브리야트족이다.
서울대 의대 이홍규 교수에 따르면 추위에 적응된 북방계 몽골리안의 체질이 1만 년 전 빙하기 때 시베리아에서 형성됐다면서 한민족의 주류는 바이칼 호에서 온 북방계 아시아인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상고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은 브리야트인들도 자신들과 뿌리가 같은 코리족의 일파가 동쪽으로 가서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믿고 있다고 전했다. 그런 얘기를 듣고 봐서 그런지 바이칼 호 인근 브리야트족 거주지에서 만난 민속박물관 남녀 단원들이 한결 정겹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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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에게 민속 공연을 보여주는 브리야트인들 |
단원들이 선보인 브리야트 씨름은 우리 것과 흡사했다. ‘선조의 영’이라는 제목의 브리야트 가무극은 한국의 전래 동화인 ‘나무꾼과 선녀’와 줄거리가 똑같다고 한다.
브리야트인들의 샤먼(shaman)신앙은 한민족 고유의 무속 신앙과 통한다. 구 소련 시절 샤먼이 공산주의 사상에 배치된다는 이유로 샤먼 수만 명을 처형하는 바람에 살아있는 샤먼은 더 이상 만나보기 힘들다고 안내인은 설명했다. 샤먼은 사라졌지만 바이칼 호 주변 곳곳에서 자작나무에 흰색 광목이 매여있는 ‘신목’(神木)을 볼 수 있다고 안내인은 전했다. 나무에 천을 매단 뒤 소원을 비는 행태는 우리네 풍습과 다르지 않다. 이러니 바이칼이 한민족의 시원(始原)이라는 얘기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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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야트족 민속박물관에 전시된 샤먼 모형 |
지도를 펼쳐보면 바이칼 호는 동시베리아 지역에 초승달 모양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바이칼이 '푸른 눈'(blue eye) 모양으로 보인다고 한다.
필자가 여장을 푼 바이칼호가 바라보이는 호텔
바이칼호 위로 빼꼼이 고개를 내민 바위
바이칼 호를 배경을 선 필자 |
저지대 분지 지역이어서 주변의 물들이 흘러 들어와 호수를 이룬다. 바이칼 호로 유입되는 하천은 모두 336개에 달하지만 바이칼 호에서 빠져나가는 하천은 앙가라 강이 유일하다. 앙가라 강은 예니세이 강과 합쳐져서 북극해로 흘러 들어간다. 앙가라강 상류에는 ‘샤먼 바위’가 있다. 예전에는 강 위로 우뚝 솟아있었으나 앙가라 강에 댐이 생기면서 수위가 높아져서 지금은 윗부분만 물 위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바이칼 호에는 22개의 섬이 있다. 그 중 가장 큰 섬이 알혼섬이다. 알혼섬의 상징인 '부르한 바위'는 최초의 샤먼 의식이 이뤄진 곳으로 유명하다. 북방 기마민족 고유의 전통인 샤머니즘의 시원이다. 브리야트족이 신성시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공주’(公主)라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의 여행사 현지 지사장은 바이칼 호와 샤먼 바위, 앙가라 강, 예니세이 강에 얽힌 무시무시한 전설을 들려줬다. 아버지 바이칼에게는 336명의 아들과 외동딸 앙가라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외동딸을 이르쿠트(이르쿠츠크를 흐르는 강)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예니세이를 사랑한 앙가라가 집에서 나와 도망치려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앙가라를 향해 바위를 던졌는데 그 바위에 맞은 앙가라가 죽어가면서 예니세이를 생각하며 흘린 눈물이 앙가라 강을 이뤄 예니세이 강을 향해 흐른다는 것이다.
바이칼은 타타르어로 ‘풍요로운 호수’라는 뜻이다. 남한 면적의 3분의 1인 3만1500제곱킬로미터 크기인 바이칼 호에는 2500여종의 동식물이 서식한다. 절반 이상이 바이칼 호의 고유종이라고 한다. 전 세계 담수의 20%를 담고있는 바이칼호의 최대 수심은 1742m에 달한다.
바이칼 호 생태학 박물관에는 진기한 어족-그 중 민물에 사는 유일한 물개인 ‘네르파’는 복어처럼 생긴 물개인데 머리털 나고 처음보는 동물이었다-들이 전시돼 있는데, 이는 원래 바다였던 바이칼이 심연에서 융기하면서 바다에서 서식하던 동·식물들이 통째로 호수로 변한 바이칼에 맞게 진화한 때문이라고 한다. 네르파가 어떻게 바이칼호에 유입됐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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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 생태학 박물관 수족관 속의 네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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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호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들
바이칼 호를 배로 달리다 보니 춘원 이광수가 소설 ‘유정’에서 그려낸 최석과 남정임의 순결하고도 애잔한 순애보가 떠오른다.
춘원은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바이칼 호수까지 갔다고 한다. 유정에는 당시 여행 경험에 바탕한 바이칼 호수의 풍광이 그려진다.
"가도가도 벌판, 서리 맞은 풀바다. 실개천 하나 없는 메마른 사막. 어디를 보아도 산 하나 없으니 하늘과 땅이 착 달라붙은 듯한 천지. 구름 한 점 없건만도 그 큰 태양 가지고도 미쳐 다 비추지 못하여 지평선호를 그린 지평선 위에는 항상 황혼이 떠도는 듯한 세계"
소설 속의 최석은 딸 같은 정임과의 연애 사건에 휘말려 바이칼 호반에 은둔했고 정임은 최석을 만나기 위해 병든 몸을 이끌고 바이칼 삼림 지대 사이로 눈썰매를 달린다. 하지만 그녀의 눈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최석의 싸늘한 시신이었다. 최석의 장례가 끝나고 정임은 바이칼 촌에 남았다. 지금도 정임은 바이칼 호반 어디선가, 죽은 최석을 그리워하며 늙어가고 있을 것이다.
바이칼호 여행의 또 다른 묘미는 사우나.
뜨겁게 달궈진 돌 위로 물을 부어 수증기를 만들어내면 사우나 안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후끈 달아오른다. 러시아식 사우나 '반야'다.
바이칼호 인근에 위치한 기념품 가게.
뭐니뭐니해도 바이칼 관광의 참맛은 유람선 위에서 바이칼에서만 산다는 '오물'이라는 생선을 안주삼아 '바이칼' 보드카에 취해보는 것이리라.
별 맛이 없어서 씹는 맛으로 먹어야 하는 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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