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 시절 ‘자유의 전도사’로 활동했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중동정책은 이중적이었다. 부시 정부는 반미 성향의 이란을 ‘폭정의 전초기지’ ‘악의 축’으로 부르며 압박정책을 폈으나 이집트나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같은 친미 독재정권과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자서전 ‘결정의 순간들(Decision Points)’에서 “이란과 시리아, 북한, 베네수엘라의 독재정권 아래서 고통받는 민주 개혁가들을 지원해야 하며 사우디아라비아나 이집트, 러시아, 중국과는 전략적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자유를 옹호해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 들어서도 이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첫해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 이슬람권과의 화해를 역설했으나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정부의 독재엔 눈을 감았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으로 촉발된 이집트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로 무바라크 정권의 몰락이 가시화하면서 미국의 기존 중동정책은 근본적 전환점을 맞게 됐다.

◆“독재자는 미국의 개”

“우리의 임무는 미국의 군사, 경제적 우위를 유지시키는 국제관계를 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체의 감상주의는 배격해야 하며 인권이니 민주화니 하는 모호하고 비현실적인 논쟁은 멈춰야 한다.”

미국의 대외정책을 총괄하는 국무부가 1948년 작성한 정책계획에 포함된 내용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재자는 ‘개××’일지 모르나 우리의 개”라는 말을 했다. 미국은 이런 방침에 따라 1953년 반외세 민족주의 성향의 이란 정부를 전복시킨 쿠데타를 비롯해 수많은 3세계 국가들의 독재정권 출범을 막후 조종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카이로 연설에서 미국의 1953년 이란 쿠데타 개입을 처음으로 공식 시인했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막후에서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짓밟는 독재자들을 후원해온 셈이다. 오바마의 연설은 미국의 패권적 개입 행태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았으나 현재진행형인 독재정권과의 고리를 끊는 지점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이집트의 경우 전임 사다트 정권부터 현 무바라크 정권에 이르기까지 7명의 미국 대통령이 독재정권과 우호적 관계를 맺었다. 인권을 강조했던 지미 카터 민주당 행정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집트는 미국이 중동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수레바퀴 축에 꽂는 린치핀(linchpin)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집트는 미·소 냉전시절 소비에트의 대중동 팽창 전략에 맞선 든든한 동맹국 역할을 수행했다. 이스라엘의 안보와 평화를 지키고 이슬람근본주의를 억제하는 보루이기도 했다. 주카이로 미국대사관은 이라크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3000여명의 직원이 상주하는 중동지역 최대 공관이었다.

◆“공짜는 없다”

미국은 그동안 독재정권을 비호하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자리엔 반미정권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뒤엎고 들어선 호메이니 정부는 이슬람에 기반한 반미 기지가 돼 지금까지 미국을 괴롭히고 있다. 쿠바는 친미성향의 바티스타 정부가 전복된 이후 반미노선을 걷고 있다. 중동 독재정권의 억압통치가 알 카에다 등 이슬람 과격단체의 세력을 키우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는 목소리도 높다.

독재정권을 후원한 미국은 국제적 이미지의 실추를 감수해야 했다. 이란의 팔레비 왕조는 카터 대통령이 팔레비 치하의 이란을 ‘안보의 섬’이라고 추켜세운 지 2년 만에 무너졌다.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은 조지 H 부시 부통령이 마르코스의 민주적 통치를 칭송한 이후 피플 파워에 밀려 권좌에서 쫓겨났다. 이집트는 부시 행정부가 넘긴 테러 용의자를 고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라시드 칼리디 컬럼비아대 교수는 “미국이 이집트로부터 끌어낸 가시적 혜택은 허상에 불과하다”면서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로 연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무바라크의 폭압통치가 테러리즘을 조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칼리디 교수는 “결국 미국의 중동정책은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파산상태에 이르렀다”고 진단했다.

◆미, 중동 민주화 시동?

오바마 정부는 이집트 시위 사태 초반만 해도 ‘안정’에 초점을 맞췄으나 지금은 무바라크 대통령과의 결별 수순을 밟고 있다. 무바라크의 퇴진을 압박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백악관 관계자는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의 국익 손상을 우려하며 지금 같은 혁명적 기회의 순간을 흘려보내려 한다는 인식이 카이로 시내와 다른 지역에서 퍼져나가고 있다”면서 “그런 인식을 차단하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은 ‘조용한 외교’ 대신 이집트 인근 국가 정상들과 전화하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체결 당시 백악관 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무바라크와 손잡은 것은 미국과 이집트 모두에게 괜찮은 거래였다”면서 “이제 무바라크의 시대는 끝났으며, 그가 떠난다고 해도 1979년 이란혁명과 같은 나쁜 상황은 전개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바라크의 퇴진은 향후 미국의 이스라엘 정책을 포함한 중동정책 전반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그 구체적 형태는 무바라크 이후의 리더십이 어떤 식으로 형성될 것인지에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중동에서 불고 있는 자유와 민주의 바람이 미국의 치부였던 독재자 비호 관행을 종식시킬지 주목된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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