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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미국 의회의 정쟁 사례(증세)

“더 이상 새로운 세금은 없습니다”

이렇게 장담한 사람은 1988년 미국 대선 당시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로 지명된 조지 H.W. 부시(이하 부시)였다.

부시는 1988년 8월19일,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면서 대통령이 되면 재임 기간에 어떤 형태의 증세 조치도 단행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상대 후보(민주당 대선후보인 마이클 듀카키스)는 세금 인상안을 배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단호히 배제하겠습니다. 의회가 세금을 인상시키라고 압력을 가할 테지만 나는 안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또 압력을 가하겠지요. 나는 또 안된다고 말할 것이고, 그러고도 또 압력을 가하면 나는 '내 입술을 보시오. 새로운 세금은 더 이상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좀 세게 나간 느낌이 든다면 정확한 진단이다.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부시는 온건파로 분류된다. 레이건의 후광에 힘입어 대선 후보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권 8년 동안 보수 진영의 영웅이 된 레이건과 비교할 때 카리스마도 약하고 정체성도 불분명한 미적지근한 후보였다. 특히 레이건 집권기에 증세 필요성을 제기했다가 공화당 우파의 미움을 샀다. 부시는 본선을 앞두고 공화당 우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증세는 없다’는 화끈한 공약을 던진 것이다.

<조지 H.W.부시 전 대통령과 빌 클린턴 전 대통령(좌측)>

 

공화당 온건파니, 우파니 하는 용어가 혼선을 야기할 수 있겠다.

이 대목에서 잠시 공화당 계보를 따져보자. 지금 공화당을 장악하고 있는 우파의 시조(始祖)는 1964년 대선 당시 공화당 후보였던 배리 골드워터다. <3회, ‘인종차별 트럼프의 정치적 스승' 참고> 골드워터 보다 더 보수적인 공화당원들은 이전에도 많았지만 골드워터는 우파의 이념을 체계화하고 우파 진영의 전사들에게 영감을 제시한 첫번째 인물이다. 골드워터는 사회 부문에서는 흑인의 권리 증진을 위한 민권법에 반대했고 경제 부문에서는 보수적 자유주의자였다. 피닉스에서 백화점을 운영했던 조부처럼 그도 ‘작은 정부론’을 신봉했다. 골드워터는 저서 ‘한 보수주의자의 양심(The Conscience of a Conservative)’에서 “정부 효율을 높이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정부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다”고 주장했을 정도로, 연방 정부의 개입과 간섭을 혐오했다.

무명의 레이건은 골드워터 덕분에 일생 일대의 기회를 잡게된다. 1964년 10월27일 저녁 레이건의 골드워터 후보 지원 연설 ‘선택의 시간(Time for Choosing)’이 미 전역에 방송되면서 레이건은 단숨에 미 보수진영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보수 진영은 2년 뒤 레이건을 캘리포니아 주지사 후보로 밀었다. 레이건은 민주당 소속의 재선 주지사를 대패시키며 공화당 대선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다. 골드워터 지원 연설이 1980년 레이건 대통령 탄생의 시발점이 된 셈이다.

레이건은 골드워터 지원연설에서 미국인의 세금 부담이 너무 과중하다고 역설했다. 정부의 경제개입 정책으로 경제가 망가졌으니 이제 개인과 시장에 더 많은 자유를 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정부의 복지 정책은 국민의 근로의욕을 감퇴시키고 도덕적 해이를 초래한다고 했다. 이날 연설의 주제였던 작은 정부, 경쟁, 감세 등은 후일 레이건 행정부의 국정 기조가 됐다. 1980년 대선에서 승리한 레이건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정부는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해답이 아니다. 정부가 오히려 문제다”라면서 자신이 골드워터의 후계자임을 공식 선언했다. 골드워터가 뿌린 씨앗은 16년 뒤 레이건 시대가 열리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레이건이 골드워터의 후계자라면 부시는 온건 보수 성향의 넬슨 올드리치 록펠러의 후계자로 볼 수 있다. 골드워터가 64년 공화당 대선후보 선출 경선에서 록펠러를 누른 배경은 <3회, ‘인종차별 트럼프의 정치적 스승' >에서 소개한 바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온건 보수는 이념 보다는 현실을 중시하는 실용파다.

대통령에 당선된 부시의 국정 기조는 실용주의였다. 보수주의자들이 선호하지 않는 환경이나 장애인 보호 정책을 추진했고 민주당 의원들의 도움을 받아서 관련 법안들을 입법화했다. 실용 대통령 부시는 집권 후 ‘증세는 없다’는 공약을 지키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90년 여름 미국을 강타한 경기침체는 좀체 회복되지 않았다.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정부의 지출을 줄여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미국 정부 지출에서 가장 큰 덩어리가 저소득층과 고령층 위한 의료보장예산(메디케어, 메디케이드)과 사회보장 예산이다. 백악관과 의회의 재정 지출 삭감 협상 과정에서는 항상 이런 복지 예산 삭감이 주요 이슈가 된다. 이런 복지 정책은 역대 민주당 정부가 도입한 것으로 민주당이 가급적 손대지 않으려하는 성역이다. 그런 만큼 복지 예산을 삭감하기 위해서는 민주당에 뭔가를 양보해야 한다. 민주당 의원들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카드가 바로 증세다.

 

부시는 고심 끝에 증세 카드를 꺼내들게 된다. 공화당 대통령 부시는 야당인 민주당과의 협상을 통해 1990년 10월5일 고소득자의 소득세율을 인상하는 내용 등을 담은 예산법안에 합의했다. 그러자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였던 뉴트 깅리치를 중심으로 한 공화당 우파는 벌떼처럼 몰려들어 부시를 공격했다. 공화당 의원 173명 가운데 찬성표를 던진 의원은 10명 뿐이었다. 91년 걸프전 승리 직후 90% 가깝게 치솟았던 부시 대통령 지지율은 92년 여름쯤에는 30% 밑으로 추락했다. 그 해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은 아칸소 주지사 출신의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게 완패했다. 클린턴 캠프에서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었을 정도로 당시 최대 쟁점은 경제였다. 그렇지만 부시의 패인이 경제 변수 뿐이었을까. 필자는 공화당의 내분이 또 다른 패인이었다고 본다. 성경에도 나와있듯이 분열한 가정은 바로 설 수 없는 법이다.

깅리치는 그런 식으로 부시를 물어뜯으며 성장했다. 깅리치는 공화당 온건파를 상대로 한 내전에서 승리한 뒤 94년 중간선거에서 깅리치 사단을 대거 당선시켰다. 의회를 장악하고 결국 하원의장의 꿈을 이룬 깅리치의 다음 공격 대상은 클린턴 민주당 행정부가 됐다. 깅리치와 클린턴의 기 싸움은 연방정부 폐쇄로 이어졌다.

90년 10월 증세를 둘러싼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 우파의 갈등은 21년 뒤 버락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에서 주역만 바뀐 채 그대로 반복됐다.

금융위기 여파 속에서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공화당과의 협상 과정에서 번번이 벽에 부닥친다. 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증세 문제였다. 양 측은 재정적자를 줄이자는 총론에는 동의했다. 그렇지만 재정적자를 어떻게 줄일 것인지를 놓고 각론에서 충돌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체로 공화당이 부유층·고소득자 증세(정확히는 이들에 대한 이전 정부의 감세 조치를 추가로 연장해주지 않는 것) 방안을 수용하면 복지 지출을 삭감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공화당은 오바마의 부유층·고소득자 증세안에 결사 반대했다. 2011년 정부부채상한 인상 협상 과정에서는 공화당이 미국의 부도(디폴트)를 볼모로 잡은 벼랑 끝 전술을 동원했다. 정부부채상한 인상 협상은 오바마 대통령이 증세 없이 정부지출을 줄이기로 양보하면서 극적으로 타결됐지만 그 과정에서 정치권이 보여준 극한 대결 행태가 결국은 국가 신인도에 악영향을 미치게 됐다.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가 시급한 국가적 현안을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권의 행태를 문제삼으면서 사상 처음으로 미 연방 정부의 신용등급을 강등시킨 것이다.

 

                           <2011년 7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공화당 존 베이너 하원의장과 에릭 캔터 하원 원내대표를 백악관으로 불러 설득하고 있다.  
                           왼쪽부터 베이너, 조 바이든 부통령, 오바마, 캔터.>  백악관 홈페이지

 공화당 우파는 왜 사생결단으로 증세에 반대하는 것일까. 부시 집권 시절 부통령을 지낸 댄 퀘일이 고소득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누진세를 비판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왜 최선의 사람들이 벌을 받아야 하나” 이게 공화당 우파의 기본 인식이다. 돈 많이 번 사람들은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다. 남들 놀 때 일하고 남들 돈 쓸 때 아끼면서 재산을 모았다고 보는 것이다. 부자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투자해서 일자리도 만들어낸다. 고소득자는 소비를 통해 경기를 되살아나게 한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에게 국가가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세금을 왕창 부과하는 것이 옳은 일이냐고 공화당 우파는 묻는다. 공권력을 행사해서 그런 못된 세금을 거두는 주체가 정부이기 때문에 우파는 정부의 규모가 작으면 작을수록 좋다고 본다.

다시 부시의 증세 결단으로 돌아가면, 그의 선택을 놓고는 ‘희대의 공약 뒤집기, 공화당 행정부 최악의 결정'이라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국가경제를 위해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희생한 결단'이라는 평가도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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