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만 아니면 누구나 괜찮다’(Anyone But Trump)… 공화당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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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공화당의 대선 후보선출 경선에서는 전당대회가 개최되기 수개월 전에 승자가 결정됐다. 그런데 올해 공화당 대선 경선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남아 있는 3명의 주자(도널드 트럼프 후보와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존 케이식 오하이오 주지사) 중 어느 누구도 대선 후보 지명에 필요한 대의원 과반 확보에 실패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선두를 달리는 트럼프 후보가 지금까지 확보한 대의원 수는 738명. 최소 과반인 ‘매직 넘버’(1237명)에 499명이 부족하다. 남은 대의원(848명)의 58.8% 가량을 확보해야 자력으로 대선 후보가 될 수 있다.

트럼프는 그럴 수 있을까. 트럼프가 현재의 지지율을 유지하면 가능하다. 뉴욕타임스의 예측 프로그램에서 트럼프의 향후 지지율을 42%로 설정하면, 아래와 같은 그래픽을 얻을 수 있다. 

트럼프가 남은 경선주 가운데 대의원 수가 많은 뉴욕(95명), 캘리포니아(172명)에서 이기면 매직 넘버 달성은 무난한 것으로 예측됐다. 

그런데 트럼프가 캘리포니아에서 지면 아래와 같은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전당대회는 대선 후보 지명을 축하하는 무대가 아니라 피튀기는 경선장으로 변하게된다. 이른바 ‘경선 전당대회(contested convention)’다.

현행 공화당 룰에 따르면, 전당대회 대의원들은 1차 투표에서 원칙적으로 각 주의 경선 결과대로 표를 던져야 한다. 예컨대 지난 22일(현지시간) 트럼프 후보가 승리한 애리조나주의 대의원 58명은 무조건 트럼프 후보를 찍어야 한다.(일부 예외도 있다) 1차 투표에서 과반 후보가 안나오면 2차 투표부터는 아무 후보에게나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는 대의원들이 늘어난다.(주마다 규정이 다르지만 대체로 3차 투표부터는 거의 모든 대의원이 자유롭게 후보를 선택할 수 있게된다) 이 때부터는 공화당 지도부나 주지사 등 유력 정치인들이 개입, 막후에서 중재에 나선다. 그래서 ‘중재 전당대회(brokered convention)’라고도 부른다.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지난 21일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트럼프와 크루즈의 격차가 크지 않으면 트럼프는 1위를 하고도 후보 자리를 크루즈에게 내줘야 하는 사태를 맞을 수 있다. 트럼프 본인도 언젠가 “협상이라면 나도 자신이 있지만 중재 전당대회는 전적으로 내가 불리하다. 나를 제외한 다른 주자들이 서로 친밀하기 때문이다”라면서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래선지 트럼프는 과거 자신이 1위를 하고도 공화당 후보가 되지 못하면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과연 트럼프다운 협박이다.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인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이 22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브뤼셀 테러와 관련,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로부터 미국을 방어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하지만 공화당 주류는 폭동이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얼마나 트럼프가 싫었으면 밋 롬니(2012년 공화당 대선후보)나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같은 공화당 주류 인사들이 그동안 상극(相剋)이었던 크루즈를 지지하고 나섰을까. 공화당 내부에서는 트럼프에게 당을 넘겨주느니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백악관 입성을 지켜보는 쪽을 택하겠다는 말도 나온다고 미 언론은 전하고 있다. 공화당 상·하원 의원 대다수는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가 되면 대선과 동시에 치러지는 상·하원 선거도 힘들어진다고 푸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공화당 대선 후보는 ‘트럼프만 아니면 누구나 괜찮다’(Anyone But Trump)는 기류다. 공화당 지도부는 전당대회 직전 열리는 전당대회 규정위원회에서 트럼프에게 불리하도록 전당대회 룰 자체를 바꿔버릴 수도 있다.


며칠 전 공개된 미국 폭스뉴스의 미 대선 가상 양자대결 여론조사 결과는 이런 반(反) 트럼프 정서에 기름을 부었다.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의 양자 대결에서 크루즈와 케이식은 각각 47% 대 44%, 51% 대 40%로 클린턴을 앞섰지만 트럼프는 49% 대 38%로 클린턴에게 밀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텃밭인 오하이오 1승으로 143명의 대의원을 확보한 게 전부인 케이식 주지사가 당 내의 경선 포기 종용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버티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겉으로는 “내가 빠지면 트럼프가 대선 후보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진짜 이유는 ‘중재 전당대회’로 가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온다고 굳건히 믿고 있기 때문이다. 공화당 전당대회 규정에 ‘최소 8개 주(미국령 포함)에서 1위를 하지 못한 주자는 대선후보로 지명될 수 없다’는 규정이 있긴하다. 이 규정을 그대로 적용하면 케이식은 컷오프 대상이다. 하지만 공화당은 전당대회에 앞서 이런 제한도 없앨 수 있다. 당이 하려고만 한다면 트럼프를 떨어뜨리기 위해 1차 투표부터 자유 투표 경선을 실시하도록 룰을 바꿀 수도 있다.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 존 케이식 오하이오 주지사가 지난 15일 오하이오 주 베레아에서 열린 경선승리 집회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자축하고 있다.
AP=연합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이 외쳤듯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의 시대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느냐고 묻는 독자가 있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게 정당의 운영 논리다. 공직선거 후보자를 어떻게 선출하느냐는 오롯이 정당의 권한이다. 국민참여 경선이든, 여론조사 경선이든 당이 그렇게 하자고 룰을 정하면 그렇게 가는 것이다. 컬리 호그랜드 공화당 전당대회 운영위원이 얼마 전에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일반인들은 국민이 대선후보를 선택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오해다. 대선후보는 당이 지명한다”

경선 1위 주자라고 해도 당의 정체성과 맞지 않으면 당이 그 주자를 버리고 다른 후보를 세울 수도 있다는 얘기다. 크루즈나 케이식처럼 후발 주자로 달리다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된 대표적 인물이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1860년 5월 공화당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시카고 전당대회가 열렸을 때 링컨은 최약체 후보로 평가됐다. 링컨의 경쟁자였던 윌리엄 헨리 슈어드와 새먼 P. 체이스는 주지사와 상원의원을 역임한 관록의 정치인이었고 에드워드 베이츠도 미주리의 원로 정치인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인물이었다. 도리스 컨스 굿윈은 저서 ‘Team Of Rivals’(권력의 조건,21세기북스)에서 “슈어드가 처음부터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며 선두를 달렸고 체이스와 베이츠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면서 “이를 잘 알고 있던 링컨은 그 누구도 공격하지 않는다는 전략을 세웠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1차 투표에서 슈어드에 이어 깜짝 2위에 오른 링컨은 2차 투표에서 슈어드를 간발의 차로 따라 붙었다. 결국 3차 투표까지 거친 끝에 링컨은 공화당 대선후보로 지명됐다. 어렵게 공화당 후보가 된 링컨은 그 해 대선에서 승리, 위대한 대통령의 반열에 올랐다.

 

1976년 공화당 전당대회도 유력 대선주자였던 제럴드 포드와 로널드 레이건이 모두 과반 대의원 확보에 실패, ‘경선 전당대회’로 치러졌다. 포드는 현직 대통령이었고 레이건 보다 더 많은 대의원을 확보했는데도 포드를 추대하지 않았다. 포드는 가까스로 레이건을 꺾고 후보가 됐지만 본선에서는 민주당 지미 카터 후보에게 패배했다.

포드의 사례를 보면 경선 1위 주자를 대선 후보로 내세운다고 해서 본선 승리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공화당 주류가 트럼프를 흔들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경선 1위가 트럼프의 대선 후보 지위를 보장하는 충분 조건은 아닌 셈이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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