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세론’ 제동 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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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독주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는 과연 공화당 후보자리를 거머쥘 것인가.

적절한 시점에 다른 후보들의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은 상황이다. 그렇지만 트럼프라고 약점이 없지는 않다.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이 지난 5일(현지시간) 캔자스주 경선(당원대회)에서 트럼프 후보를 25% 포인트 차로 꺾은 의미는 작지 않다. 더블 스코어 승리였다.

크루즈는 텃밭이나 다름없는 텍사스 경선(크루즈는 텍사스 상원의원이다)에서도 트럼프를 눌렀지만 그 격차는 17.1% 포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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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언론들은 ‘트럼프 대세론’에 제동이 걸린 것은 공화당 주류의 트럼프 반대 캠페인이 주요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2008, 2012년 미국 대선에서 각각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던 존 매케인, 밋 롬니까지 트럼프 반대를 선언했으니 공화당 유권자들의 표심은 흔들렸을 것이다. 

유타대서 `트럼프 반대` 연설하는 밋 롬니(EPA=연합)
하지만 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같은 날 치러진 공화당 경선에서 크루즈는 켄터키, 루이지애나주에서는 트럼프에게 패했고, 메인주에서는 트럼프를 이겼지만 득표율 격차가 13.3% 포인트에 불과했다.

5일(현지시간) 미국 공화당의 대선후보 경선에서 2승을 거둔 테드 크루즈(왼쪽) 상원의원이 아이다호주 보이시의 한 유세장에서 지지자와 악수하고 있다.
보이시=AP연합
캔자스는 왜 크루즈를 압도적으로 지지했을까.

이 질문은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의 답변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우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캔자스의 정치권이 왜 우경화됐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대평원 지대에 위치한 캔자스는 20세기 초반에만 해도 농민조직의 힘이 강했던 진보의 땅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32대) 대통령의 먼 친척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공화당 대통령(26대)을 지낸 뒤 후임 대통령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자신이 정착시킨 혁신 노선을 버리고 보수로 기울자 캔자스주 오사와토미에서 지금 용어로 하면 ‘복지국가’를 뜻하는 ‘신국가주의’를 선포했다. 필자가 워싱턴 특파원 시절인 2011년 12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도 이 곳을 방문해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그때 이곳에서 그 연설을 한 이후 급진주의자, 사회주의자, 심지어 공산주의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그때 그가 주창했던 그 원칙때문에 미국은 지금 더욱 부강한 나라, 강력한 민주주의 나라가 되었다"고 역설했다. 지금도 캔자스에는 ‘래디컬 시티(급진적 도시)’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하지만 도시화, 산업화가 진척되면서 캔자스는 보수화했다. 인구는 줄어드는 가운데 소농은 몰락하고 대농장주만 살아남게되면 대체로 보수로 변한다. 농민이 줄면 농민 조직의 힘도 약화하기 때문이다. 이후 캔자스의 정치는 대체로 공화당이 주도했다. 캔자스는 노예제에 맞서 싸운 자유토지 농민들이 모여서 만든 주였고 민주당은 원래 노예제도를 옹호했던 당이었기 때문이다. 캔자스의 공화당은 대체로 ‘중도 실용’ 보수였다. 1996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된 밥 돌 전 상원의원은 캔자스가 낳은 대표적인 중도 보수 공화당원이다. 

2015년 워싱턴D.C.에서 열린 낙태반대 시위. 연합
그런데 1990년대 초반 캔자스의 정치 지형이 중도 보수에서 우익 보수로 확 바뀌게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낙태 반대 시위다.

전국에서 모인 낙태 반대 시위대는 캔자스주 위치토에 위치한 유명한 낙태 시술 병원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다.(이 병원에서 낙태 시술을 담당했던 조지 틸러 박사는 2009년 6월 위치토의 한 교회에서 낙태 반대론자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이 시위를 계기로 캔자스 주민들은 낙태를 둘러싸고 찬반 양론으로 분열했다. 대다수가 기독교인들인 캔자스 주민들이 대거 낙태 반대론에 가담하면서 이후 이뤄진 각종 선거에서 낙태에 찬성한 공화당 중도파와 민주당 의원들은 캔자스 정치권에서 거의 전원이 축출되고 말았다. 이제 캔자스에는 낙태 반대를 기치로 내건 공화당 우파만 남게됐다. 이 과정에서 ‘복음주의(evangelism)’로 대표되는 기독교 우파가 공화당 우파와 손을 잡았다. 기독교 우파는 학교에서 진화론을 수업하는 것에 반대하고, 학교에서 기도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낙태, 동성결혼에 격렬히 반대한다. 백인 우월주의가 강하고 소수인종이나 여성, 이민자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작은 정부론’을 신봉하고 신자유주의를 선호한다. 공화당 대선주자 중에는 테드 크루즈가 이런 공화당 우파의 대표 주자다.

지난 5일 실시된 캔자스주 공화당 당원대회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한 표씩 던진 정치 행사였다.

2위와의 격차가 문제였지 크루즈의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었다. 트럼프는 그동안 낙태옹호단체인 ‘가족계획연맹’의 활동을 지지했고 대선주자가 되고 다소 신중한 입장으로 돌아섰지만 과거에는 낙태 합법화를 지지한 전력도 있다.

미국 공화당 대선 경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5일(현지시간) 플로리다 올랜도의 한 대학 유세장에서 지지자가 건넨 그림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올랜도=AP연합
‘인종차별’ 언행을 서슴지 않는 트럼프(2회 ‘인종차별 트럼프의 정치적 스승’ 참고)에게는 불행하게도, 캔자스는 인종차별에 맞서 투쟁한 주였다.

위에서도 설명했다시피 캔자스는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농장주에 맞서 싸운 자작농들이 모여 만든 주다. 1859년 10월16일 노예제 폐지를 위해 무장봉기에 나섰다가 교수형을 당한 존 브라운이 캔자스 출신이다.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를 존속시키려는 남부 연방군이 캔자스를 공격해 유린한 역사는 캔자스 주민들의 노예제 혐오를 한층 더 깊게 했다.

어느모로 보나 트럼프는 애초부터 캔자스의 선택을 받기 힘든 주자였다.

문제는 캔자스의 공화당원만 낙태 반대론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기독교 우파가 공화당 우파와 손잡기 시작한 시점부터 낙태 반대는 미 전역의 공화당원들이 공유하는 가치로 떠올랐다.

크루즈가 틈만 나면 낙태 문제를 쟁점화하고 있는 것은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낙태 문제는 트럼프의 ‘아킬레스 건’인 셈이다.

한국 정서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낙태 문제는 미국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다.

낙태 문제는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대표적인 문화 쟁점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낙태 시술과 관련, 찬성(pro-choice, 낙태를 여성의 선택, 권리에 관한 문제로 보는 관점) 아니면 반대(pro-life, 낙태를 태아 살인 행위로 보는 관점) 입장으로 양분돼 있다. 민주당 성향 유권자는 대체로 낙태를 찬성하고, 공화당 성향 유권자는 그 반대다. 

행진중인 낙태찬성단체들. AP=연합뉴스
미 연방대법원이 1973년 ‘로 대 웨드(Roe v. Wade)’ 소송에서 “임신 첫 3개월간 여성이 낙태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면서 낙태를 합법화하는 판결을 내린 뒤 보수 진영은 이 판결을 뒤집기 위해 사력을 다해왔다. 1980년대 들어 기독교 우파가 적극적으로 지원한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정권이 들어서고 보수 성향 대법관들이 다수를 차지한 것을 계기로 대법원은 낙태 요건을 까다롭게 하는 판결을 잇따라 내놨다. 낙태 시술 과정에서 공공병원이나 시설의 사용을 제한하고 18세 이하의 낙태시 보호자의 승인을 의무화하는 등.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낙태 합법화 판례를 뒤집고 낙태를 금지하는 판결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러자 보수성향 주들은 주 의회 차원에서 낙태를 어렵게하는 법안을 잇따라 제정하면서 대법원 판결을 무력화시키려했다. 미국 대법원이 지난 2일 심리를 개시한 텍사스주의 ‘낙태 제한 법안’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은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의 막바지인 올 6월쯤 최종 판결을 내릴 방침이다. 낙태 문제가 서서히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전의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트럼프 대항마’로 부상한 크루즈는 트럼프의 성채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 지점을 집중 공략할 것이다. 공화당 우파는 이미 상당수가 트럼프 쪽으로 기울었다. 트럼프가 소수 인종을 향해 막말을 해대든, 여성 비하 발언을 하든 그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낙태라면 사정이 다르다. 공화당 우파의 핵심 가치이기 때문이다.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전의 관전 포인트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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