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나들이에 겨울 옷을 입고 나온 젭 부시

정치명문 부시가(家)의 세번째 대통령을 꿈꿨던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그는 시대착오적인 돈키호테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친형인 조지 W. 부시(아들 부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2000년 대선의 매뉴얼을 들고 2016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그 매뉴얼이 효과를 봤다. 민주당에서 대세론을 형성해가던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맞수로는 젭 부시가 제격인 듯 했다. 그러자 선거자금이 쏟아져들어왔다. 그가 대선 출마를 선언할 당시 어느 후보도 그 보다 많은 선거자금을 확보하지 못했다. 청신호였다.

미국 대통령선거 공화당후보 경선에 나섰던 전 플로리다 주지사 젭 부시가 20일(현지시각)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컬럼비아에서 열린 사우스캐롤라이나 공화당 프라이머리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
그런데 막상 경선이 시작되자 안개가 걷혔다. 부시는 거인으로 알고 돌진했지만 알고보니 풍차였다. 미국 국민들은 더 이상 그의 아버지(조지 H.W.부시)와 형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던 그 국민들이 아니었다.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다시 돌릴 수 없는 법이다. 부시 전 주지사는 아이오와와 뉴햄프셔,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돌며 ‘응답하라 2000’ 드라마를 상영했다. 드라마가 뜨지 않자 형(아들 부시)를 카메오로 출연시켰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대통령이었던 형을 금융위기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국민 앞에 내세운 장면은 한편의 블랙 코미디였다.

부시 전 주지사의 시대착오는 선거자금 모금 행태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미국 정치에서 선거자금 모금액은 후보의 경쟁력과 동일시된다. 50개주가 제각각인 미국 대선은 사실상 50개 나라를 돌며 선거를 치르는 것과 비슷한 부담을 후보들에게 안긴다. 일단 ‘실탄’이 풍부해야 한다. 돈이 없으면 제 아무리 훌륭한 후보라도 그 넓은 지역을 돌며 그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충분히 홍보할 수 없다. 미디어를 활용하든, 발로 뛰든 천문학적 단위의 돈이 들어간다. 선거자금 확보는 대권에 이르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젭 부시는 그 조건을 넘치게 충족시켰다. 정치 자금 추적 단체인 '오픈시크릿'이 집계한 아래 그래픽은 부시 전 주지사가 지난 20일(현지시간) 경선 포기를 선언할 때까지 모금한 선거자금 현황이다. 

                                                       OpenSecrets.org

그래픽의 윗쪽 막대선은 선거캠프 밖에서 모금한 자금이고 아랫쪽 막대선은 선거 캠프에서 자체적으로 모금한 자금이다. 외부 자금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외부의 누군가 돈을 모은 뒤 젭 부시를 위해 사용했다는 의미다. 그 사람들이 누구일까. 대부분이 월가의 대형 금융회사나 대기업, 아니면 보수 진영의 ‘큰 손’들이다. 이들은 젭 부시를 위해 돈을 모은 뒤 그를 홍보하는 광고 등에 수천만 달러를 쏟아부었다. 후보의 선거캠프 바깥에서 활동하는 정치활동단체들은 캠프 보다 훨씬 자유롭게 정치자금을 모을 수 있다. 이른바 ‘슈퍼 팩(Super PAC)’이라는 정치활동위원회는기업 등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무제한으로 기부받을 수 있다.

하지만 ‘공짜 점심은 없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유권자들이 분명히 알고 있다. 젭 부시에게는 안타깝게도, 많은 국민들은 정치권에 흘러든 뭉텅이 돈이 ‘워싱턴 정치’를 왜곡시켰다고 생각한다. 그 돈에 포획된 정치인들 탓에 자신들의 삶이 더 힘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미 의회가 2009년 뱅크오브아메리카(BOA)와 JP모간체이스, 골드만삭스, 씨티그룹, 웰스파고 등 대규모 월가 금융기업에게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국민들의 분노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보수, 진보가 따로 없었다.

한 쪽에선 국민의 세금으로 금융기관을 구제하지 말라는 항의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이 운동은 갓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의 복지 확대 등 ‘큰 정부’ 정책을 비판하면서 정치세력화하더니 2010년 중간선거 때는 공화당 내부 경선에서 ‘작은 정부’를 주창하는 강경파 후보들을 다수 당선시켰다. 지난해 존 베이너 하원의장의 사퇴를 압박했던 의원들이 바로 그 때 의회에 입성한 티 파티 그룹 의원들이다. 이런 흐름과는 정반대로 “금융위기 주범인 금융기관들은 도와주면서 주택담보 대출금을 갚지 못해 길거리에 나앉게 된 서민들은 왜 방치하느냐”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최근 ‘싸울 기회(The Fighting Chance)’라는 자서전을 펴낸 엘리자베스 워런이 이런 목소리들을 대변하면서 진보 진영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평범한 주부였던 워런을 연방 상원의원으로 만든 힘은 월가를 향한 국민의 분노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정황 속에서 젭 부시의 선거자금 모금 그래픽을 다시 들여다 보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후보,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왼쪽부터)이 아이오와주 유세장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아래 그래픽을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대선 주자들은 나름대로 소액 모금 방식을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듯한 흔적이 엿보인다. 물론 그들이 과거보다 청렴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국민들이 이익단체들의 로비 자금에 잔뜩 화가 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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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래픽에서 젭 부시나 비슷하게 선거자금을 모은 클린턴은 캠프 모금액이 더 많다. 클린턴은 2008년 대선에서 큰 손들이 기부한 거액 후원금에 의존하는 등 전통적인 방식으로 선거에 임했다가  기존의 틀을 깨고 나온 버락 오바마 후보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 오바마는 온라인을 통한 ‘풀뿌리 모금’ 방식 등 혁신적인 선거운동을 선보이며 젊은 층을 중심으로 ‘오바마 바람’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2008년 2월쯤 오바마 후보는 이미 100만 명이 넘는 소액 후원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와신상담 끝에 대권 재수에 나선 클린턴은 오바마를 벤치마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100달러 이내의 소액 후원 부문에선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에게 밀리고 있다. 

샌더스는 클린턴을 “월가와 다른 이익단체에 의존하는 후보”로 몰아붙이며 자신이야말로 평범한 미국인을 대표하는 후보라고 강조한다. 참다못한 클린턴은 최근 유세에서 “나는 75만명이 넘는 후원자를 갖고 있다. 대다수가 소액 기부자”라고 항변했지만 클린턴이 주류 정치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외부 모금이 많은 공화당의 마르코 루비오나 테드 크루즈도 나름대로 소액 후원금 모금에 힘을 쏟고있다. 그 것이 지지층을 넓히고 국민의 반감을 희석시킬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큰 손인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는 아예 자기 지갑에서 돈을 꺼내쓰고 있다. 거액의 로비자금과 그 돈으로 굴러가는 정치에 신물이 난 국민들은 자기 돈 써가면서 국민이 하고싶었던 얘기들을 거침없이 대변해주는 트럼프에게 환호할 수 밖에 없다. 선거자금 모금행태를 놓고 보면 젭 부시만 봄 나들이에 겨울 옷을 입고 나온 꼴이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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