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치러지는 미국 대선이 초반부터 이변을 연출하고 있다.
민주당의 경우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자마자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대세론이 무너졌다. 뉴햄프셔주 경선에서 클린턴을 큰 표차로 누른 샌더스 상원의원은 사실상 민주당원도 아니다. 민주당 경선에 참여하기 전까지 30년 넘게 무소속으로 정치를 해왔다. 클린턴이 누구인가. 남편인 빌 클린턴과 함께 지난 수십년 동안 미국 정치를 쥐락펴락해온 여걸이다. 퍼스트레이디와 연방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지낸 클린턴 전 장관이야말로 ‘워싱턴 정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공화당 경선에선 더 기이한 드라마가 상영되고 있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부동산 재벌(도널드 트럼프)이 현직 상원의원(테드 크루즈, 마르코 루비오)과 전직 주지사(젭 부시) 경력의 주자들을 2위 자리를 놓고 다투는 군소후보들로 만들어버렸다. 민주,공화당 공히 ‘워싱턴 정치’, ‘기성 정치’에 발을 담근 주자들은 고전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국민들이 그 만큼 정치권을 불신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버니 샌더스(왼쪽), 도널드 트럼프. |
2008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도 ‘워싱턴 정치’가 도마 위에 올랐다. 초선 상원의원 임기 중에 대선 출마를 선언했던 버락 오바마 후보는 워싱턴 정치를 ‘변화(Change)’시켜 미국 사회에 ‘희망(Hope)’을 불어넣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고 외쳤고, 많은 국민들이 그 목소리에 공감했다. 그 결과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 2012년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는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오바마 집권 기간 워싱턴 정치는 변화했는가. 미국 국민들이 기성 정치의 반대편에 서있는 샌더스·트럼프에 환호하는 걸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워싱턴 정치는 언제부터인가 국민의 삶과 유리된 채 정쟁(政爭)을 일삼고 있다. 한 때 선진 민주주의의 표상이었던 미국 정치가 왜 이 지경이 됐을까. 미국 연방의사당을 감싸고 있던 타협과 관용의 문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정치의 난맥상이 한국 정치에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앞으로 풀어낼 이야기들은 이런 의문들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필자는 워싱턴타임스 교환기자와 조지타운대 방문연구원, 워싱턴특파원 시절 미국 정치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국회와 청와대, 총리실 등을 취재했다. 지금은 세계일보 국제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올해 미국에선 11월 대선이 예정돼 있다. 이를 계기로 미국 정치의 흥미로운 지점들을 들여다 보자는 것이 이 코너를 기획한 취지다.
첫번째 주제는 미국 정치의 고질(痼疾)이 돼가고 있는 정치 ‘양극화(polarization)’ 문제다.
미국의 시사주간 내셔널 저널이 1982년부터 30년 넘게 매년 내놓고 있는 'annual vote ratings'이란 통계가 있다.
말 그대로 미국 연방의원들의 투표 성향을 분석한 자료다. 미 상원의원 100명, 하원의원 435명이 1년 동안 투표한 기록을 토대로 누가 어느 정도 보수(진보)적인지를 상대적으로 계량화한 통계치다. 정치분석가인 빌 슈나이버가 1981년 고안했다는 이 평가 방식은 최근 들어 미국 정치의 ‘양극화(polarization)’가 부쩍 심화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가장 진보적인 공화당 의원과 가장 보수적인 민주당 의원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의원이 포진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그래픽은 미국 의회의 양극화 정도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워싱턴포스트 |
위 그래픽이 보여주듯이, 1982년 의회만 해도 가장 보수적인 민주당 의원과 가장 진보적인 공화당 의원 사이에는 344명의 의원이 포함돼 있었다. 중간 지대에 포진한 이들 의원은 정확한 개념은 아니지만 이른바 '중도파 의원'(물론 상대적 개념이다)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중간 지대 의원들의 숫자는 해가 갈수록 줄어들더니 2013년엔 4명으로 쪼그라들었다. 공화당 의원들은 더 보수화하고, 민주당 의원들은 더 진보화한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어떤 이들은 게리맨더링(특정 정당이나 특정 후보자에게 유리하도록 자의적으로 부자연스럽게 선거구를 정하는 일)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가령 보수적인 백인 거주 지역만을 묶어서 선거구를 만들면 그 선거구에서는 공화당 후보만 당선될 수 있게된다. 그러면 이 선거구에서는 공화당 후보 경선이 사실상 본선이나 다름없게된다.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는 누가 더 보수적이냐는 선명성 경쟁이 불가피해진다. 그렇게 당선된 의원이 의정 활동을 하면서 더 보수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 이 것만으로는 정치 양극화의 원인을 선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 주(州) 전체가 선거구(미국 상원의원은 주마다 2명)여서 게리맨더링이 개입할 수 없는 미국 상원에서도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워싱턴포스트 |
위 그래픽은 상원의 '중도파 의원'이 2012년부터는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미국 사회의 이념적 분열이 이전 보다 심화되고 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미국에선 양당 모두 공직 후보를 당원이나 주민들이 상향식으로 선출한다. 갈수록 보수적인 주에서는 보수 성향이 더 강한 후보를, 진보적인 주에서는 진보 성향이 짙은 후보를 선출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정치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추론이다. 실제 공화당은 1980년 레이건 정부를 출범시킨 이후 지속적으로 우경화하고 있다. 2016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공화당의 우경화는 확인된다. 전국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에 이어 2위에 랭크된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공화당 우파가 밀고 있는 후보다. 공화당 지도부를 비롯한 중도파가 밀고 있는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미국의 보수진영이 과거 보다 더 오른쪽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민주당이라고 다르지 않다. 민주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샌더스 의원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판을 흔들고 있는 상황이 상징하듯 미국의 진보 진영도 점점 더 왼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보수든, 진보든 화끈한 후보가 먹힌다.
더 진보적인 민주당 의원과 더 보수적인 공화당 의원이 많아지면 의회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민주당 의원은 보수적인 모든 정책을 반대한다. 반대로 공화당 의원은 진보적인 모든 정책을 반대한다. 중간은 없다. 양당의 공통 분모는 제로에 수렴된다. 쟁점 법안은 여간해선 절충되지 않는다. 타협하면 배신자로 찍힌다. 협상론자인 공화당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그러다가 당내 우파 세력에 의해 사실상 축출됐다. 대통령, 부통령(상원의장)에 이어 미국 권력서열 3위인 하원의장도 그런 수모를 당하는 판인데 어느 의원이 총대를 메고 백악관이나 민주당 지도부와 협상할 수 있을까. 민주당 지도부도 당내 강경파에 휘둘리기는 마찬가지다. 민생과 직결된 법안도, 대외 신인도를 좌우하는 예산안도 제 때 처리되는 법이 없다. ‘식물 의회’가 따로 없다. 그래도 의원 수당과 활동비(세비)는 꼬박 꼬박 나온다. 식물 의회가 야기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다. 먹고살만하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미국 중산층과 서민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정치인을 바라보는 국민의 눈초리가 사나워질 수 밖에 없다. 샌더스와 트럼프를 띄우고 있는 것은 국민의 정치 불신이고 그 원천은 수십년 동안 서서히 진행돼온 정치의 ‘양극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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