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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다.

2016년 미국 공화당의 대선후보 선출 경선이 딱 그렇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공화당 주류는 올 대선에서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을 밀어줘야하는 상황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크루즈는 지난 5일(현지시간) 위스콘신주 경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꺾고 천금같은 승리를 거두면서 그런 상황을 만들어냈다.


크루즈가 트럼프의 ‘매직 넘버’(공화당 대선 후보 지명을 확정짓는 대의원 수 1237명) 달성을 효과적으로 막아낸다면 전당대회 경선이 불가피해질 전망이다. 이른바 ‘중재 전당대회’다. 중재 전당대회가 열리면 트럼프와 크루즈, 존 케이식 오하이오 주지사가 표 대결을 할 가능성이 높다. <‘조남규의 미국정치 이야기(6) ‘반란군 트럼프의 운명은’ 참고>


공화당 주류는 지금 크루즈가 좋아서 밀고 있는 게 아니다. 원래 지지했던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와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이 ‘트럼프 광풍’에 밀려 추풍낙엽의 신세가 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크루즈를 선택한 것이다. 공화당 주류로서는 트럼프가 전당대회 전에 공화당 대선후보 지명에 필요한 매직 넘버를 채우지 못하도록 하는 게 급선무다. 크루즈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크루즈가 임무를 완수한 뒤엔? 그 건 그 때가서 보자는 것이 공화당 주류의 속내일 것이다.

크루즈가 남은 경선에서 트럼프와의 격차를 최대한 좁히면 공화당 주류는 크루즈에게 표를 몰아줄 것으로 관측된다. 크루즈가 희망하는 시나리오다.

미국 공화당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지난 3월 워싱턴 연방의사당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겨냥해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인종주의자 또는 인종주의 조직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공화당 주류는 다른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전당대회에서 트럼프도, 크루즈도 아닌 제3의 후보를 ‘추대’하는 방안이다.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나 2012년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 등의 이름이 꾸준히 거론되고 있는 이유다. 현행 공화당 전당대회 규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규정은 성경이 아니다. 공화당 규정위원회에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트럼프 대항마가 부시나 루비오였다면 거론되지도 않았을 제3후보 추대 주장 등이 나오는 것은 공화당 내의 크루즈 비토 기류 탓이다.

크루즈는 왜 그렇게 주류의 미움을 받고 있을까.

우선 그의 ‘독불 장군’ 행태가 반감을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 크루즈는 2012년에 당선된 초선 상원의원이다. 한국 국회도 그렇지만 미국 의회에서도 선수(選數)는 중요한 기준이다. 선수를 기준으로 당내 랭킹이 매겨진다. 상원은 하원 보다 전통과 관행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그런 상원에서 1970년생인 크루즈는 1942년생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인 미치 맥코넬과 맞짱을 떴다. 2013년 맥코넬 대표를 비롯한 공화당 지도부가 백악관·민주당과의 예산안 협상 과정에서 ‘오바마케어’(버락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가 마련한 건강보험 개혁 조치)집행 예산을 포함시키는 타협안을 마련하자, 크루즈는 맥코넬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며 강하게 비판했다. 공화당 지도부는 공화당 유권자의 뜻을 저버리고 오바마 정부에 투항한 인사들로 매도했다.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인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왼쪽)이 5일 위스콘신주 경선에서 승리한 뒤 부인 하이디와 함께 경선 승리 연설을 하고 있다.
밀워키=AP연합뉴스


한국 국회의 막장 드라마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선뜻 와 닿지 않지만 미 의회에서는 동료 의원을 ‘거짓말쟁이’로 부르는 정도의 발언도 큰 논란거리가 된다. 언론도 크게 다룬다. 2009년 공화당의 조 윌슨 하원의원이 상·하원 합동연설을 하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을 향해 “당신 거짓말이야”라고 소리쳤다가 사과 성명을 냈던 일도 있었다. 당시 민주당은 윌슨 의원에 대한 규탄결의안까지 추진했다. 상원 의사규칙은 구체적으로 동료 의원들에 대한 직·간접적인 비난 발언을 하지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니 고참 의원들 눈에는 크루즈의 거침없는 언행이 시쳇말로 ‘싸가지가 없는’ 행태로 보였을 것이다. 공화당에는 지금도 크루즈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의원들이 많다. 어떤 의원들은 크루즈의 공식 사과가 있기 전에는 그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크루즈는 위스콘신주 경선 승리 이후 부쩍 자주 공화당의 통합을 외치면서 동료 의원들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들자면, 크루즈와 공화당 주류의 갈등은 공화당 노선 투쟁의 산물이다.


 


크루즈는 2012년 텍사스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우파 대중운동인 ‘티 파티’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 덕분에 공화당 예비경선 과정에서 텍사스주 현직 부지사를 꺾는 이변을 연출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크루즈는 ‘티 파티의 의회 대사’를 자처하면서 오바마 정부의 건강보험개혁이나 이민개혁, 증세 정책에 결사 반대하는 티 파티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공화당 주류도 오바마 정부의 정책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티 파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화당은 2010년 중간선거 과정에서는 티 파티 운동에 편승, 다수당 고지 탈환에 성공했다. 이 때 티 파티 계열 의원들이 공화당 하원에 대거 유입됐다.

하지만 선명성은 투쟁의 시기에 필요한 덕목이다. 2010년 중간선거 이후 공화당은 비타협 노선으로 일관하는 티 파티 계열 의원들에게 발목이 잡혀서 오바마 정부와는 그 어떤 타협도 불가능한 정당으로 변해갔다. 공화당은 더 우경화됐다. 탈레반같은 티 파티 계열 의원들은 공화당의 골칫거리가 됐다. 원래 티 파티 운동은 과도한 정부 지출에 반대하면서 시작된 시민 운동이었는데 보수 우파가 개입하면서 사실상 오바마 정부에 반대하는 정치 운동으로 변질됐다. 나중에는 종교 우파인 기독교 복음주의와 인종주의 세력까지 티 파티로 흘러들어갔다. 2013년 미국 연방정부 폐쇄 사태를 야기한 주범이 바로 크루즈를 필두로 한 티 파티 계열 의원들이다. 이 때 크루즈는 오바마케어 집행예산을 막기위해 21시간19분 동안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를 했다. 크루즈는 떴지만 공화당은 연방정부 폐쇄 책임론에 휩싸였다.

티 파티의 이런 원리주의적 보수 노선은 공화당 주류가 바라는 진로가 아니다. 공화당 주류는 날로 인구가 늘어나는 히스패닉 등 소수인종이나 중도층을 끌어안지 않고서는 공화당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티 파티 세력은 자신들의 노선대로 당을 운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2014년 6월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를 지역구 당내 예비선거에서 낙선시키는 정치 반란까지 일으켰다. 그 희생자가 2010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을 승리로 이끈 뒤 원내대표 자리에 올랐던 에릭 캔터다. 하원 다수당 원내대표가 예비선거에서 낙선한 것은 미 의회 역사상 초유의 참사였다. 그 것도 정치 신인인 대학 교수에게 졌다. 캔터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공화당 주류와 티 파티 세력의 사이는 더 악화했다. 2008년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그 점잖은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크루즈를 향해 ‘미친 자식(wacko bird)’이라고 욕을 해댔을 정도였다.

두 세력의 불화는 크루즈가 대선후보로 지명되는 과정에서, 크루즈가 공화당 대선후보가 된 이후 본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줄곧 걸림돌로 작용할 전망이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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