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 사이더’인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미국 공화당의 대선주자로 나서 공화당의 적자(嫡子) 후보들을 잇따라 격파하고 있다.

공화당 지지자들은 지금 공화당 노선이나 전통 따위는 무시한 채 하고싶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트럼프에 열광하고 있다.

 

트럼프를 밀어올리고 있는 주요 지지층은 중장년의 백인들이다. 그 중에서도 경기침체로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인들이 트럼프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들을 향해 불법 체류자들을 모두 추방하고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등의 화끈한 공약을 제시하며 불가사리처럼 몸집을 키우고 있다. 대통령이 되면 민주당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 이민개혁 조치를 전면 무효화하겠다고 약속하며 오바마 집권 8년이 만들어낸 비토층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흡수하고 있다. 트럼프가 기존 정치권을 공화당까지 싸잡아 패대기치자 워싱턴 정치에 신물이 난 정치 혐오세력까지 트럼프 지지자로 돌아서고 있다. 당내 경선에서는 이런 화끈한 후보가 열성 지지층의 선택을 받기 쉽다. 하지만 전체 국민이 참여하는 본선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유타대서 `트럼프 반대` 연설하는 밋 롬니(EPA=연합)
트럼프 비판 대열에 합류한 존 매케인(애리조나) 상원의원. AP=연합
트럼프로는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공화당 주류는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다. 급기야 각각 2008년, 2012년 미 대선의 공화당 후보였던 존 매케인, 밋 롬니까지 나서 트럼프 반대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적전(敵前) 분열도 이런 분열이 없다.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지만, 그 흐름은 반복된다(History Doesn’t Repeat Itself, But It Does Rhyme)”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말이다.

예전에도 트럼프 같은 공화당 대선 주자가 있었다. 1964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던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이다.

1964년 10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유세중인 배리 골드 워터. AP=연합
당시 공화당 주류는 미국 동북부를 기반으로 한 중도파 당원들이었다. 이들은 온건 보수 성향의 넬슨 올드리치 록펠러 뉴욕 주지사를 대선후보로 밀었다. 그는 미국의 대부호인 존 D. 록펠러의 손주다. 유력 가문 출신에 높은 인지도, 그리고 탄탄한 당내 기반. 누구나 공화당 대선후보는 록펠러라고 생각했다. 공화당은 1928년 허버트 후버부터 1960년 리처드 닉슨까지 모두 중도 성향 대선 후보를 내세웠다. 록펠러는 이런 공화당의 전통에도 부합하는 적임자였다.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캘리포니아주 경선이 끝날 때쯤 공화당 대선 후보는 골드워터로 사실상 결정됐다. 록펠러의 혼외 정사 의혹이 변수로 작용하긴 했지만 골드워터를 띄운 밑바닥 동력은 기존 정치권을 향한 백인들의 불만이었다. 백인들은 존 F. 케네디 민주당 행정부가 추진한 흑인차별 철폐 정책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케네디가 암살된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존슨 부통령은 케네디의 유산인 민권법을 완성시켰다. 공화당도 민권법 처리 과정에서 민주당 정부에 협조했다.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 직후 기내에서 대통령에 취임한 존슨 전 미국 대통령. AP=연합
그러자 골드워터가 백인들의 불만을 대변하고 나섰다. 그는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기 직전, ‘민권법’이 상원에 상정되자 반대표를 던졌다. 상원의원 100명 중 반대표를 던진 의원은 8명 뿐이었다. 흑인노예들이 수 세기에 걸친 투쟁 끝에 쟁취한 흑인들의 ‘권리장전’에 반대한 것이다. 골드워터가 민권법에 반대한 이유는 연방정부의 민권법 집행이 주 정부의 권한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결론은 엎어치나 메치나다. 흑인이 어떻게 백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느냐는 인식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었다. 이런 인식은 대다수 백인들의 속 마음이었다.

골드워터는 6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미 공화당 전당대회장에서 다음과 같은 후보 수락문을 읽어내려갔다.

“자유를 지키기 위한 ‘극단주의’는 악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오히려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온건주의’야말로 미덕이 아니다.”

 

당내 온건파들은 골드워터를 대선후보로 인정하지 않았다. 공화당은 이제 온건 록펠러파와 강경 골드워터파로 쪼개졌다. 본선을 앞두고 자중지란에 빠진 것이다.

골드워터는 후보가 되고서도 기존 대선후보와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였다. 통상 대선 후보로 지명된 뒤에는 중도층이나 부동층인 ‘산토끼’를 잡기위한 전략을 구사하는데 골드워터는 당내 경선 때나 마찬가지로 골수 지지층인 ‘집토끼’만 바라보고 선거운동을 펼쳤다.

남북전쟁 이후 100년 동안 민주당을 지지했던 남부의 ‘딥 사우스’(Deep South.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앨라배마) 지역이 64년 대선에서 돌연 공화당 지지로 돌아선 것은 골드워터의 민권법 반대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모두 알고있듯이 공화당은 노예제 폐지의 기치 아래 다수의 정파들이 모여서 창당한 정당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새로 창당된 공화당에 합류해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남부가 미 연방에서 탈퇴하자 링컨의 공화당 정부는 전쟁도 불사했다. 그리고 남북 전쟁에서 승리한 뒤 노예제를 폐지했다. 흑인들의 투표권을 인정하는 등 흑인의 법적 권리를 강화하는 수정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렇지만 남부 주에서는 유무형의 흑인차별이 지속됐다. ‘KKK(쿠 클럭스 클랜)’로 대표되는 백인우월주의 단체들은 흑인들에 테러를 일삼았다.

미국 공화당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1일(현지시간) 워싱턴 연방의사당에서 백인 우월주의단체인 ‘KKK’연루 의혹을 산 대선 경선 주자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겨냥해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인종주의자 또는 인종주의 조직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최근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를 찍겠다고 선언한 바로 그 KKK단이다. 트럼프는 흑인과 히스패닉 등 소수인종을 향해 독설을 퍼부으면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환호를 이끌어내고 있다. 미국의 안보를 위해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원천 봉쇄하겠다고도 했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 사회가 오랜 시행착오 끝에 세워놓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란 원칙이 있다. 위키백과는 이를 ‘다민족국가인 미국 등에서, 정치적(Political)인 관점에서 차별·편견을 없애는 것이 올바르다(Correct)고 하는 의미에서 사용되게 된 용어’라고 설명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 정치권이 관행으로 정착시킨 이 원칙을 마음껏 조롱하고 있는 셈이다.

골드워터가 대선에서 승리한 주는 딥 사우스를 제외하면 그의 고향인 애리조나가 유일하다. 64년 대선을 계기로 링컨의 공화당을 원수로 생각했던 미국 남부는 서서히 공화당의 아성으로 변해간다.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실시되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고등학생 때는 골드워터 광팬이었다는 것. 클린턴은 64년 대선에서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골드워터 후보의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했다. 골드워터 지지를 접고 민주당으로 전향한 것은 대학생이 된 이후였다. ‘역사의 신(神)’이 골드워터 후예인 트럼프에 대적시키기 위해 클린턴의 정치 성향을 바꿔 놓은 것일까.

골드워터는 64년 대선 본선에서 민주당 린든 존슨 대통령과 맞붙었다.

존슨 대통령은 44개 주에서 승리하며 486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다. 골드워터가 승리한 주는 6개주(선거인단 52명)에 그쳤다. 일반 유권자 투표 수는 4312만9484(61.1%) 대 2717만8188(38.5%). 486 대 52. 미 대선 역사상 기록적인 참패였다.

 


올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는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출돼 골드워터의 전철을 답습할 것인가. 정치는 생물이라는데 그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적어도 공화당 주류는 트럼프가 민주당 클린턴과의 맞대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공화당 지지자들이 열광하는 대선 주자를 공화당이 대놓고 반대할 까닭이 없을테니 말이다.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