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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최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일단을 내보인 외교안보 구상은 파격(破格)이었다.

한국 부분만 살펴봐도, 우리가 방위비 분담금을 올리지 않으면 주한 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고 협박했고, 북한의 위협 때문에 한국은 핵무장을 시도할 것이라면서 사실상 한국의 핵무장을 용인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대로 된 참모를 둔 정상적인 후보라면 ‘주한미군 철수’나 ‘한국 핵무장’ 같은 민감한 이슈를 그런 식으로 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는 자신의 발언이 도마 위에 오르자 슬그머니 핵무장 허용 발언은 거둬들이고 있다. 더욱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대외정책을 구상하고 있다는 트럼프이고 보면, 그의 발언을 진지하게 다룰 가치가 있을까, 회의도 든다.

하지만 문제는 트럼프가 대다수 미국인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미국의 한 유력 싱크탱크가 공개적으로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펴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자유의지주의(libertarian)’를 표방한다는 케이토 연구소였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자유의지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이념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자유시장 경제를 신봉한다. 미국 보수를 대표하는 공화당과 유사하지만 대외정책은 공화당과 크게 차별된다. 예컨대 이들은 미국의 대외 개입정책을 긍정하는 공화당과 달리 미국은 국제분쟁에 발을 담그지 말라고 주장한다.

론 폴 전 하원의원. 사진 = Getty Images

 

2008년 미 공화당 대선주자로 나섰던 론 폴 전 하원의원이 대표적 자유의지주의자다. 당시만 해도 론 폴의 목소리가 미약했지만 지금은 론 폴처럼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다.

공화당 유력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이런 기류에 올라탔다. 트럼프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쉽게 풀어보면 이런 식이다.

‘부자였던 미국이 다른 나라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미국 연방정부 부채가 19조 달러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한국과 일본, 독일, 중국은 부자가 됐다. 기존의 동맹 조약은 일방적이고 낡은 조약이다. 미국에 유리하게 고쳐야 한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이 아니다. 우리가 왜 우리 돈 써가면서 다른 나라를 지켜줘야 하나. 중국은 미국에서 번 돈으로 군사력 키워서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대통령이 되면 이런 상황을 바로잡아서 미국과 미국인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

위스콘신 유세 나선 도널드 트럼프 AP=연합

 

트럼프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해외주둔 미군은 미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한 세계전략 차원에서 배치된 것이지 주둔국에서 자원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가난한 나라’라는 말도 궤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먹고살기 힘들어진 대다수 미국인은 트럼프에 환호하고 있다. 트럼프가 그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포퓰리스트다.

트럼프가 미처 못한 말은 케이토 연구소의 더그 밴도 선임연구원이 대신해주고 있다.

“지금 펜타곤(미 국방부)은 세계적으로 부유한 나라들의 국방비를 떠안고 있다. 해마다 미국인들은 수천억 달러의 비용을 부담하고 있지만, 정작 미국은 덜 안전해지고 있다. 이들 부유한 나라는 국내총생산(GDP)의 1%를 비용으로 내야 한다. 군사적 대치상태에 있고 미국으로부터 핵우산을 제공받는 한국은 더 부담해야 한다. 1950년 6·25전쟁 때 만들어진 한·미동맹은 시대착오적이며 전적으로 일방적인 동맹이다. 한국은 수퍼파워인 미국에 의존하며 돈을 아끼고 있다”

외교라는 것이 본래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영국의 누군가 외교관을 ‘국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도록 외국에 파견되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정의했듯이,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가 국익에 부합한다면 언제든 철수할 것이다. 민주당 지미 카터 대통령이 1976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주한미군 철수 공약을 실행하려했다. 미국 의회와 미군 사령부가 카터를 설득하지 않았다면 사태는 주한미군을 일부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지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의 말을 듣다보면 얼핏 ‘고립주의’ 성향이 엿보인다.

원래 미국 대외정책에서 고립주의는 다른 나라와 동맹도 맺지않고 다른 나라들의 분쟁에도 개입하지 않는 정책이다. 미국은 건국 이후 한동안 고립주의로 일관했다. 1,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마지못해 참전한 것도 그런 전통 때문이었다. 그런 미국의 대외정책은 2차 대전을 거치면서 ‘국제주의(개입주의)’로 전환된다. 만약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2차대전 종전 이후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에 고립주의 정책으로 대응했다면 세계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트루먼은 터키와 그리스가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갈 위기에 처하자 미국이 공격받지 않는 한 중립을 지킨다는 전통적인 고립주의를 버리고 적극적인 개입주의를 채택했다. 트루먼은 미 의회에 터키와 그리스에 대한 원조 승인 법안을 요청하면서 “나는 자유민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역설했다. ‘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린 이 국제주의 원칙은 미국 대외정책 기조가 되었으며 향후 북대서양조약으로 구체화했다.

트럼프의 외교안보 기조는 이런 전통적인 고립주의와는 다르다. 동맹을 유지하거나 국제 분쟁에 개입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에 따른 금전적 부담을 최소화하겠다는 차원의 고립주의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는 데이비드 생거 뉴욕타임스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나는 ‘고립주의자’가 아니라 ‘미국 우선주의자’”라고 밝혔지만, 필자는 트럼프의 외교안보 구상이 정치학자 이삼성이 이름붙인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에 가깝다고 본다.

이삼성에 따르면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자는 미국의 대외개입 정책이 미국의 국익에는 별로 기여하지 않으면서 미국의 자원을 낭비하는 경향이 있다고 인식한다. 트럼프가 공화당 주류와 달리 조지 W 부시 공화당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자는 미국이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이 ‘세계 경찰’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반대한다. 트럼프도 “우리는 더 이상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이라크는 물론이고 우크라이나와 시리아 사태 등에 미국이 왜 개입해야하느냐고 반문한다. 미국의 개입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 만큼 그런 돈이 있으면 미국인들을 위해 쓰자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대외 개입에 소극적인 버락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의 입장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2008년 3월 미국 워싱턴D.C.의 백악관 앞에서 이라크전에 반대하는 시위집회가 열리고있다. EPA=연합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자는 국제 기구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트럼프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미·일동맹 등은 미국에 불리하게 체결된 조약이므로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미국은 NATO 회원국이나 일본이 공격받으면 자동적으로 미군을 보내 도와줘야하느냐고 트럼프는 반문한다. 유엔 등 국제기구를 우습게 보고 미국 마음대로 하겠다는 일방주의적 행태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비슷하다. 하지만 미군의 해외 파병은 극히 예외적이고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트럼프는 부시의 ‘근육 외교’와 대조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트럼프는 군사력 행사를 기피하는 비둘기로 보인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는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미군을 파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의 국익이 침해받으면 군사력 행사도 불사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적대감을 드러냈다. 트럼프는 1999년 북한의 핵 의혹이 불거지자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를 통해 북한이 계속 핵무기 개발에 나서면 선제 공격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미 북한은 트럼프가 공언했던 선제 타격의 조건을 충족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핵 위협을 고조시키고 있다. 북한 김정은에 대해서도 “중국이 그 인간(김정은)을 어떤 식으로든 사라지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암살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그 것(암살) 보다 더 나쁜 짓에 대해서도 들어봤다”고 답변할 정도로 충동적인 성향을 내보였다.

공화당 경선 후보들의 6차 TV토론 중의 트럼프(사진 가운데). AP=연합

 

우리에게 가장 큰 ‘트럼프 리스크’는 그가 예측 불가능한 인사라는 점이다. 그는 주요 외교안보 현안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동안 미국은 너무 속내를 보여왔다”면서 “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대방(상대국)이 알지 못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곤 한다. 좋게 말하면 전략적 모호성이다. 이런 태도가 때론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특정 국가와의 긴장 상황에서 이해 당사국들이 상대국의 의도를 오해하게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예측 불가능한 김정은이 핵을 흔들며 미국에 맞서고 있는 지금, 미국에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다면 한반도와 동북아의 긴장 수위는 급격히 상승할 것으로 관측된다. 설사 한반도에서 무슨 일이 터져도 한 푼을 아까워하는 트럼프 정부가 흔쾌히 지원할 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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