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관의 나이에 한국전쟁에 참전, 낯선 신생국의 자유를 위해 총을 들었던 워런 H 위드한 ‘미 한국전 참전 기념재단’ 사무총장(사진)은 어느덧 여든 살의 노병이 됐다. 노병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우호적이어서 매우 기쁘다”면서 “하지만 한미 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6·25전쟁이 잊혀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위드한 사무총장을 6월18일 주미 한국대사관 국방무관 이취임 리셉션이 열린 워싱턴 DC 코러스하우스에서 만나 올해로 59주년을 맞는 6·25전쟁의 의미를 되새겨봤다.

 


 ―내년이면 6·25전쟁 발발 60주년이다. 한국전쟁기념재단 차원에서 어떤 행사를 준비 중인가.

“최근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우리 재단과 한국전 참전용사회(KWVA) 등이 맨 앞에서 뛰고 있으며, 다른 참전용사 단체들도 힘을 보태고 있다. 버지니아주 동부의 노퍽 해군기지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인천상륙작전을 재연하는 행사 등을 기획하고 있다. 아무래도 60주년 행사는 한국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는 만큼 조만간 한국을 방문, 한국 정부 측과 협의할 계획이다.”

―한국전쟁은 그동안 미국에서 ‘잊혀진 전쟁’으로 불러왔다. (위드한 사무총장이 기자에 건넨 한국전 참전 기념재단 명함에도 “‘잊혀진 승리’(Forgotten Victory)에 봉사한 용사들을 기억하며”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요즘도 그런가.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지 5년 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엔 너무 많은 2차대전 참전용사들이 있었다. 우리가 한국전쟁을 끝내고 돌아오자 2차대전 참전용사회에선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특별한 구심점 없이 생활인으로 돌아갔고 그러면서 서서히 잊혀 갔다. 그러다가 30년 전쯤 한국전 참전용사회가 결성되면서 조금씩 한국전쟁을 미국 사회에 알리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한국전쟁 5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한국전쟁이 많이 알려졌으나 아직도 젊은이들 사이에선 잊혀진 전쟁이다. 이는 한미 양국이 똑같이 갖고 있는 문제다. 한국전 참전용사회는 고등학교를 방문, 젊은이들에게 자유를 지킨 한국전쟁의 교훈과 의미를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1950년 12월 북한 개마고원 장진호전투 당시 박격포 부대 동료들과 함께 한 위드한 총장(맨 오른쪽).
―한국전쟁 참전 당시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았나.

“나를 포함해 미 해병 1사단 대원들 거의 모두 세계지도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지목할 수 없었다. 대부분 20살 안팎의 젊은이들이었다. 역사시간에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은 있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1950년 8월 부산에 상륙하면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빠르게 알게 됐다.”

―어떤 전투에 참가했나.

“내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 한국은 북한군에 의해 거의 점령되기 직전이었다. 우리는 부산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8월의 한국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습하고 더웠다는 기억이 난다. 어느 날 동료와 함께 캠프로 돌아가는데 박격포탄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찾았을 때 위생병이 내 동료의 죽음을 알렸다. 그의 이름은 찰리였다. 전우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처럼 가슴 아픈 경험은 없다. 부상당한 지 나흘 만에 전장에 투입돼 인천상륙작전과 평생 잊을 수 없는 장진호전투를 치렀다.”

―장진호전투 당시 경험을 얘기해 달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을 수복하고 북쪽으로 진군해 갔다. 1950년 11월 말, 미 해병대는 평양 북쪽(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인근에서 야영 중이었다. 영하 30도 아래로 내려가는 강추위는 내 평생 처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경계를 서고 있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호각과 나팔,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뒤 맞은편 산이 위장 복장을 한 중공군으로 새카맣게 뒤덮였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부대원 모두 깜짝 놀랐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올 크리스마스는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보내자”면서 우리를 격려했기 때문이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우리는 숨진 동료들의 절단된 수족을 트럭에 싣고(미 해병대는 죽음을 무릅쓰고 전사한 전우의 시신을 회수하는 전통이 있다) 흥남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흥남 철수는 많은 민간인들의 생명을 구한 작전으로 유명하다.

“흥남부두에 모인 피란민들은 상상할 수 없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배에 태울 때까지 참고 기다리던 그들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공산주의체제에서 탈출한 기독교인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나.

“1982년 대령으로 예편하고 몇 년쯤 지난 해였다. 갑자기 숨진 전우였던 찰리가 생각났다. 그래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전쟁 당시 폐허였던 부산은 엄청난 규모의 대도시로 변해 있었다. 부산 인근의 전투 현장이었던 언덕에 서서 찰리는 죽고 나는 살아난 이유를 생각해 봤다. 여생을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면서 살아가라는 신의 뜻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현재 미국에 생존해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는 몇 명이나 되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다만 최소 90만명쯤 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난 16일 워싱턴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요즘 한미관계는 어떻다고 보는가.

“개인적으로 한미 양국의 사이가 그 어느 때보다 좋다는 사실에 행복하다. 한미 양국관계는 전 세계 자유국가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모범적이다. 한때 두 나라의 관계가 서먹해진 시기도 있었으나 한국과 미국은 모두 민주주의 국가이다. 나도 모든 미국 대통령들을 좋아하진 않는다. 대통령이 누구냐에 관계없이 양국 관계는 장기적 차원에서 따뜻하고 우호적이었다.”

―한미 양국은 2012년 한국군이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군으로부터 넘겨받기로 합의했다. 적절한 조치라고 보나.

“그 문제는 내가 언급할 사안이 아닌 것 같다. ‘고장나지 않았으면 고치지 말라’는 격언으로 내 답변을 대신하겠다.”

―최근 북한이 한미 양국과 국제사회를 향해 잇따른 도발을 자행하고 있다.

“북한은 무엇이 북한 주민들을 위해 옳은 일인지를 잘 생각해서 행동해야 한다. 지금 북한이 하고 있는 행동은 세계의 어느 나라도 설득시키지 못할 행동이다. 식초보다는 꿀이 더 많은 벌을 모을 수 있는 법이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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