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스톤 국립공원 인근에 그랜드 테턴 국립공원이 있다. 잭슨 호수를 품고 있는 그랜드 테턴은 침엽수림과 호수, 4197m의 그랜드 테턴산이 만들어낸 절경으로 유명하다. 미국에서 제작되는 달력의 배경 사진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경관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필자가 찾아간 날에는 낮게 깔린 구름이 그랜드 테턴산을 가리고 있었다.
미국 북서부에 위치한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1872년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1만4000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면서 빙하는 계곡과 호수를 만들면서 북쪽으로 물러났다. 1만 전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블랙핏 등 여러 인디언 종족들이 옐로스톤을 무대로 살아왔다. 이들은 1700년대 초반 말(horse)을 획득했는데 이로써 인디언들의 삶이 크게 변화했다. 옐로스톤을 세상에 알린 비원주민은 미국의 탐험가인 윌리엄 클락과 루이스였다. 그들은 1804~1806년 동안 북미 북서부 지역을 탐험했다. 클락은 탐험을 마치고 돌아와서 "천둥같은 소리가 들리고 땅이 흔들리는 지역이 있다"는 인디언의 진술을 전했다. 하지만 루이스와 클락은 옐로스톤 지역을 직접 가보지는 않았다. 당시 탐험대에 속해있던 존 콜터가 1807~1808년 지금의 옐로스톤 지역을 답사한 뒤 세인트 루이스로 돌아와서 간헐천 등으로 뒤덮힌 옐로스톤의 몽환적인 자연 환경을 전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이 곳도 금을 찾는 사람들의 손을 타게됐다. 다행히 금이 발견되지 않은 덕분에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게 됐다. 이 곳을 지키려는 일군의 사람들이 나선 끝에 미 지질조사국장이던 퍼디난드 레이든 박사가 옐로스톤 탐사팀을 발족시켰는데, 의회를 설득하기 위한 자료의 일환으로 당대의 유명 화가인 토마스 모란과 풍경 사진가인 윌리엄 헨리를 팀에 합류시켜 옐로스톤 풍경화와 사진을 남기도록 했다. 이들의 탐사 보고서를 받아든 의회는 1872년 3월1일 210만 에이커에 달하는 지역을 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텍사스 사람들은 혼자 있길 좋아한다고 해서 'Lone Star'라는 별칭이 붙은 텍사스주. 멕시코에서 독립한 주이다. 텍사스주 휴스턴은 텍사스가 멕시코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할 때 독립군을 이끌었던 샘 휴스턴의 이름을 딴 도시다. 오스틴은 텍사스 초기 정착 미국인들을 이끌었던 스티븐 오스틴의 이름을 딴 도시다.
샌 안토니오의 대표 관광지는 알라모 전투 현장이다. 19세기 초반 오스틴의 영도 아래 당시 멕시코 땅이었던 텍사스에 정착한 미국인들은 1930년대에 이르자 멕시코인들의 수를 넘어서게 됐다. 그러자 멕시코 대통령 산타 안나는 1836년 멕시코 전역에 효력이 미치는 헌법을 공포했는데 그 대상 영역에는 텍사스도 포함됐다. 텍사스인들이 멕시코에서 탈퇴하기로 결정을 내리자 산타 안나는 텍사스인들을 응징하기 위한 공격을 감행한다. 그는 3000명의 병력으로 샌 안토니오를 공격했는데 그 곳에는 윌리엄 트라비스 대령이 지휘하는 텍사스인 187명이 지키고 있었다. 텍사스인들은 알라모 선교본부의 담을 등지고 앉아 방어 태세를 갖췄다. 이들은 산타 안나의 대군을 열흘동안 상대하다 3명을 제외하곤 전원 전사했다. 이 3명은 수잔나 디킨슨이라는 병사의 아내와 15개월된 그녀의 아기, 트라비스 대령의 노예 조다. 산타 안나는 이들을 살려서 텍사스 군사령관인 샘 휴스터에게 계속 저항하면 샌 안토니오 꼴이 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1836년 3월 텍사스군과 산타 안타의 군대가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텍사스군은 숫적으로 밀렸으나 자만으로 방심하고 있던 산타 안나 군대를 기습했다. "알라모를 기억하라"고 외치면서. 멕시코 군은 산타 안나까지 포로로 잡히는 대패를 당하고 리오그란데 강 너머로 퇴각했다. 텍사스인들은 곧바로 헌법으 제정하고 휴스턴을 새로운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후 미국에 텍사스 병합을 신청했다. 텍사스는 이제 미국 땅이 됐다.
필라델피아는 조지 워싱턴과 벤저민 플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등 미국 건국 주역들이 활동했던 주 무대다. 영국에 대항해서 미국 독립의 기초를 마련한 제1회 대륙회의가 열린 곳이고 독립선언문과 헌법이 제정된 곳이다. 신생 미국의 산파 역할은 한 도시다. 1800년 미국의 수도가 워싱턴D.C.로 옮겨가면서 비중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다.
노 대통령은 2006년 9월14일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에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제6차 한미 정상회담을 갖고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등 현안을 놓고 의견을 교환했다. 양국 정상은 한미 관계가 공동의 가치를 바탕으로 포괄적, 역동적, 호혜적 동맹관계로 발전하고 있다는데 인식을 같이 했다. 특히 부시 대통령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은 한국군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주한미군의 지속적인 주둔과 유사 시 증원 공약에 바탕을 두고 추진할 것을 확인했다. 전작권 전환에도 불구하고 유사 시 미국의 대한 방위공약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부시 대통령의 직접적인 의사가 확인됐으며, 나아가 양국 간의 동맹이 현대화 조정을 거치면서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 기회였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양 정상은 20여명의 취재진이 참석한 가운데 언론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은 전작권 전환 논란에 대한 입장을 묻는 한국 기자의 질문에 "이 문제는 정치적 문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단호한 메시지를 던졌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아주 좋은 대답이었다.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에 부시 대통령은 "모든 사람이 다 동의했으면 좋겠다"고 화답했다. 언론회동 이후 이어진 양국 정상 오찬에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가 주된 의제였다.
노무현 정부의 일곱번째 한미 정상회담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최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 한국의 비자면제프로그램 가입 논의가 주 의제였다. 이와함께 1개월 전에 이뤄진 북한의 핵실험으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해법 모색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부시 대통령은 "앞으로 북핵 문제 해결에 집중하겠다"면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한다면 남북한과 미국이 만나 한국전쟁을 최종적으로 종결시키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의 '북핵 문제 집중 약속'은 이후 2006년 11월 말 이뤄진 북미중 베이징회동과 12월 6자회담 재개, 2007년 1월 북미 베를린 회동, 그리고 2.13합의에 이르는 일련의 북핵 협상의 토대가 됐다.
2007년 9월 호주 시드니에서 개최된 APEC 정상회의 계기로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미국 부시 대통령은 두달 전 개최된 남북 정상회담 지지 입장을 밝히면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6자회담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부시 대통령은 "한국전쟁 종결을 위한 평화협정을 김 위원장과 체결할 용의가 있다"는 입장을 재확인하고 이를 위해서는 북측이 핵폐기를 이행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런 입장을 김 위원장에게 전달해달라고 노 대통령에게 요청했다. 한미 양자 현안과 관련해서는 "한미 FTA는 노 대통령님의 역사적 업적이며, 자신은 한미 FTA 비준을 위해 의회와 투쟁하겠다"면서 "한국이 먼저 한미 FTA를 비준해주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임기 내 처리를 목표로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2007년 4월 타결된 한미 FTA는 한미 관계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이로써 우리는 국제사회의 블록화, 지역화 추세에 적극 대응할 수 있게됐다. 당시 우리나라 총수출의 15%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 시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선진기술 도입 및 선진국 기업과의 경쟁여건 조성으로 대외 경쟁력을 강화하고 경제 시스템을 선진화해 세계 일류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미 FTA 타결로 우리는 동북아 국가 중 미국과 FTA를 체결한 첫 나라가 됐다. 향후 중,일,EU 등과의 FTA 추진시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APEC 정상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여수박람회 유치에 공을 들였다. 2012년 여수박람회 유치 시 우리 정부가 1000만 달러를 출연하겠다는 '여수 프로젝트' 계획도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