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교육까지 서열화

사회경제적 위상, 거주지가 좌우
최근 4년간 서울 집값 평균 5억 올라
주거비 부담에 경기·비수도권 이사 ↑
지방대생들은 취업도 하늘의 별따기
서울 올라와도 경제적 부담에 허덕

서울대생 40%는 강남3구 출신
대학 간판 따라 직업·소득수준 결정
지방서도 ‘교육특구’가 집값 더 비싸
계층 대물림돼 상대적 박탈감 커져
미시적인 지역균형발전전략 세워야

#1. 경기 고양시 일산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정지훈(34)씨는 요즘 치솟는 집값에 일할 의욕을 잃는다. 정씨는 “3년 전 서울을 떠날 때만 해도 2년 정도 악착같이 돈을 모으면 다시 돌아갈 수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락같이 오른 집값에 엄두를 못 낸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정씨는 “내년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서울이 아닌 경기도민으로 계속 살게 될까봐 부모로써 미안한 마음” 이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2. 오는 8월 안동대학교를 졸업하는 구민정(24)씨는 진지하게 상경(上京)을 고려 중이다. 구씨는 이른바 ‘지여인’(지방대에 다니는 여자 인문대생)이다. 취업이 힘들다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췄다. 그는 “고향에서 계속 살고 싶은데 대구·경북 지역에선 일자리가 바늘구멍”이라며 “집세에 식비, 생활비 등 경제적 부담은 크지만 일자리가 많은 수도권에서 일찍 터전을 잡는 게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계층 이동 사다리’가 무너지고 있는 요인 중 하나는 지역격차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서울과 경기·인천, 서울 강남과 강북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사회경제적 위상이 다르고, 해를 거듭할수록 그 격차는 커지고 있다. 대표적 지표는 집값과 일자리, 교육이다.

같은 세금을 내고도 거주 지역에 따라 주거환경과 취업 기회, 교육의 질이 달라지다 보니 상대적 박탈감은 커지고, 국가 발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계층 사다리 복원을 위해서는 지역균형발전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이유다.

◆치솟은 집값으로 서울 떠나는 인구 늘어

정씨의 경우처럼 치솟는 집값 때문에 거주지를 옮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9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따르면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서울 아파트값은 5억원 상승했다. 서울의 30평(99㎡) 아파트값은 2017년 5월 평균 6억4000만원이었는데 2021년 1월에는 11억4000만원으로 폭등했다. 약 4년간 아파트값이 78% 상승한 것인데 이는 노동자 평균 연임금이 2017∼2019년 약 9%(3096만원→3360만원) 오른 것과 대조된다.

5억원은 평범한 직장인이 1년에 1000만원씩 50년을 저축해야 마련할 수 있는 돈이다. 서울 강남3구(강남·서초·송파) 집값 상승폭은 입이 쩍 벌어질 만한 수준이다. 강남 30평 아파트 시세는 2017년 5월 13억원에서 올 1월 22억4000만원으로 올랐다. 비수도권은 물론 같은 기간 5억5000만원에서 9억9000만원으로 오른 서울 비강남권 거주자들에게도 강남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철옹성이 됐다.

서울 강남을 정점으로 집값이 폭등하다 보니 주거비 부담에 경기·인천, 비수도권으로 이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국토연구원이 2019년 사유별 인구이동 현황을 분석했더니 주택이 38.9%, 가족 23.9%, 직업 21.6%, 교육 4.7% 순으로 나타났다. 핵심생산인구(25∼49세)의 시·군·구별 주택에 따른 순이동을 살펴본 결과 경기 고양과 용인, 화성, 남양주, 시흥, 인천 연수구 등 서울 주변 지역에서 순유입이 많았다.

강남의 치솟는 집값과 더 벌어진 지역 격차는 전국을 서열화해 위화감 및 박탈감을 조성한다. 전희정 성균관대 교수(행정학)와 박사과정 김태완씨가 계간지 ‘한국행정연구’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 직업·소득수준과 상관없이 거주지만으로 ‘계층이 상향됐다’고 인식하는 강남3구 주민 비율은 노·도·강(노원·도봉·강북) 주민들보다 1.4배가량 높다. 논문은 “주거지역 간 물리적, 사회문화적 자원의 불균등한 분포는 시장원리에 따라 가격을 중심으로 주거지역으로의 진입장벽을 형성하게 되며 이는 사회집단별 거주지의 분화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서울 강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집값이 높고 주거환경이 괜찮은 지역으로 꼽히는 경기 분당, 용인 주민들의 박탈감도 서울 비강남권 못지않다. 분당에 거주하는 직장인 박모(42)씨는 “분당 집값이 올랐다지만 이곳 60평대 아파트를 팔아도 인근 강남의 30평대 아파트를 사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씨가 분당에 이사온 1990년대 초 강남과 40평대 아파트 매매가 차이는 2억원에 불과했다.

◆서울 일반고 출신 서울대생 40%는 강남3구

집값은 주민의 재산·소득 수준은 물론 해당 지역의 교육·교통·치안·보건·문화 등 제반 주거환경·생활여건의 ‘바로미터’다. 대표적인 게 대입 결과다. 한국은 대학 간판에 따라 어느 정도의 직업과 소득수준이 결정되는 학벌사회다. 입시업체 종로학원하늘교육이 서울대 합격생을 배출한 서울 일반고를 자치구별로 본 결과 강남3구 비율은 2017학년도 45.1%, 2018학년도 38.0%, 2019학년도 44.0%로 절반 수준에 육박했다.

 

비수도권도 비슷한 상황이다. 이른바 ‘교육 특구’를 중심으로 집값이 서열화돼 있다. 학성고, 울산여고 등 명문고와 대형학원가들이 밀집해 있는 울산 남구의 아파트는 다른 지역에 비해 많게는 4000만원 높게 가격이 형성돼 있다. 남구 옥동에 30년 넘은 아파트(22평형)에 전세로 살고 있는 김소영(35)씨는 최근 아파트 가격을 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매매가가 한 달 전보다 1억원 오른 4억원대에 거래되고 있어서다. 김씨는 “부담이 되긴 하지만 교육은 때를 놓치면 안 되지 않으냐”며 “아이가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하는데 ‘영끌’해서라도 집을 사야 하나 싶다”고 말했다.

수도권에 견줄 만한 기관·기업·대학이 없는 비수도권은 일자리 찾기도 힘들다. 올 초 광주의 한 대학 간호학과를 졸업한 김모(24)씨는 요즘 스트레스성 탈모증세를 겪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수도권 대학병원 4곳에 원서를 냈지만 모두 퇴짜를 맞아서다. 대학 입학 때부터 수도권 병원 취직을 위해 어학성적은 물론 국내외 자원봉사, 관련학과 실습 등 ‘스펙’을 쌓았지만 ‘지잡대’ 문턱을 넘진 못했다. 김씨는 “블라인드 면접에서 ‘서울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황당하고 분했다”며 “수도권 병원마다 간호인력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고 하는데 지방대 출신이 들어갈 자리는 없는 모양”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부가 지역격차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하려는 실질적이고 미시적인 맞춤형 지역균형발전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소진광 가천대 교수(행정학)는 “공간불평등은 사회적으로 정의롭지 않고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지 않으며 환경적으로도 건전하지 않다”며 “성장 몫의 분배기준을 놓고 지역끼리의 갈등으로 표출되면 국가 정체성은 유지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송민섭, 고양·안동·울산·광주=송동근·배소영·이보람·한현묵 기자 stsong@segye.com

지방대 ‘취업 사다리’ 붕괴 위기
부산대 작년 취업률 58.6% 그쳐
서울 소재 대학 쏠림 갈수록 심화
‘지역인재 의무채용’ 있으나 마나
“국립대 통폐합해 경쟁력 강화를”

경북지역 국립대인 안동대를 졸업한 김민석(28)씨는 2년째 취업시장에서 낙방했다. 인턴 자리마저 하늘의 별 따기라 이렇다 할 경력을 쌓지 못했다. 김씨는 “예전엔 지방 국립대를 졸업하면 어느 정도 취업이 보장됐는데 요즘은 서류를 내기 무섭게 탈락한다”면서 “일자리가 워낙 없다 보니 연봉 2200만원에 세금 떼면 실수령액 175만원 남짓한 중소기업도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 따르면 대구·경북지역 4년제 대학 12곳의 평균 취업률은 2019년 기준으로 59.9%다. 이 지역 4년제 12곳 중 취업률이 70%가 넘는 대학은 포항공대(74.1%)와 김천대(72.3%)뿐이었다.

부산을 대표하는 국립대학인 부산대 졸업생들도 역대 최악의 취업난 속에 ‘지방대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지난해 부산대 취업률은 58.6%다. 경남지역 중·소형 조선소 등의 연쇄적인 구조조정으로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들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까지 겹친 지난해 지역 내 일자리는 말 그대로 씨가 말랐다. 일자리를 찾아 청년들이 부산을 떠나면서 지역 공동화가 현실화됐다.

지방대 취업난은 올해 대규모 신입생 미달 사태로 이어졌다. 지난 2월 마감한 정시모집 기준으로 전국 162개교에서 2만6129명의 미달이 발생했다. 국립대에 들어가더라도 지방 출신이면 취업이 힘든 실정이 되자 서울 소재 대학으로 쏠림 현상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비수도권 청년들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된 ‘지역인재 의무채용’도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이 제도는 지방 혁신도시 내 공공기관에 일정비율(30%까지 단계적 상향) 이상 해당 지역 출신 인재를 채용하도록 한 것으로, 권고에서 의무화로 바뀐 지 3년이 지났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전체 채용 시장에서 공공기관이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많지 않은 데다 최근 채용 규모도 축소되면서 지방대 출신 청년이 이 제도에 기대기에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2019년 기준으로 19개 공공기관이 이전한 세종은 지역인재 의무화 전형 채용인원이 0명이었다. 5명 이하를 뽑고 석·박사, 경력 채용 시에는 의무화 규정이 제외되는 탓이다. 강원 원주시(9.2%), 울산(10.2%) 등도 지역인재 채용 비율이 10% 안팎에 머물렀다.

전문가들은 지방 거점 대학을 중심으로 본연의 경쟁력을 높이는 본질적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최호택 배재대 교수(행정학)는 “경쟁력 강화를 위해 지역 국립대 중심으로 통폐합해야 한다”며 “치열한 경쟁을 통해 지방 사립대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국립형 사립대’의 모습을 갖춰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금의 지방대는 정부 평가를 잘 받아 국책사업으로 유지하려다 보니 평가 지표를 높이는 데만 예산을 쏟아붓고 있어 대학 특성화에 소홀하고 교육의 질도 악화한다는 분석이다. 진종헌 공주대 교수(지리학)는 “지역에서 필요한 방식으로 커리큘럼을 바꿔야 한다”며 “지역 특화 산업에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연관 교육 체계를 만드는 등 변화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정지혜 기자, 전국종합 wisdom@segye.com

국민일보가 2021년 3월2일자에 윤석열 검찰총장 단독 인터뷰를 게재했다. 국민일보가 서울 시내에 배달되는 마지막판에 넣은 기사라서 타매체는 온라인에 배포된 기사를 보고서야 국민일보가 단독으로 인터뷰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더불어민주당 일각에서 추진 중인 '중대범죄수사청' 설립을 둘러싸고 여권 일각과 검찰, 검찰과 법무부 입장이 첨예하게 갈린 사안에 대해 핵심 이해당사자인 검찰의 수장이 인터뷰를 통해 입장을 밝힌 것이다. 윤 총장은 여권의 중수청 입법 움직임과 관련, "힘 있는 세력들에게 치외법권을 제공하는 것", "70여년 형사사법시스템을 파괴하는 졸속 입법",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법치를 말살하는 것이며 헌법 정신 파괴"라고 강력 비판하면서 "직을 걸어 막을 수 있는 일이라면 100번이라도 걸겠다"고 밝혔다. 완벽한 단독 인터뷰 기사이고 다른 매체들이 받지 않을 수 없는 기사였다. 종합지들은 모두 3월3일자 1면에 주요 기사로 처리했다. 그런데 소스(기사 출처)를 밝히는 방식은 제각각이었다. 

국민일보 인터뷰가 소스라고 밝힌 신문은 세계일보,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한국일보, 동아일보였다.

조선일보, 서울신문, 매일경제는 '언론 인터뷰'라고 두루뭉수리하게 표현했다.

중앙일보는 윤 총장과 별도 인터뷰를 갖고 처리하면서 기존 국민일보와의 인터뷰 내용은 소스 없이 인용했다. 동아일보는 1면 기사를 국민일보의 윤 총장 인터뷰 기사에 대한 대검의 입장문을 전하는 형식으로 다루면서 소스 없이 국민일보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고 5면 관련 박스에 "윤 총장은 2일 입장문을 내기 전인 1일 현직 검찰총장으로서 집무실에서 국민일보와 언론 인터뷰를 했는데, 그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다"는 문장을 담았다.

어느 매체가 단독 기사를 내보냈을 때 다른 매체가 그 기사를 사실상 받아쓰면서 소스를 밝히지 않는 것은 한국 언론의 오랜 관행이다. 특종한 매체를 숨기면 낙종의 부담이 덜어진다고 보는 것일까. 사실상 콘텐츠 무단 도용에 가깝다. 이런 관행에 대해서는 언론 스스로 기사의 신뢰도를 저하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미국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등은 아주 중요한 기사가 아니면 타 매체의 기사를 베끼지도 않지만, 보도 가치가 있으면 소스를 반드시 밝히면서 인용 보도한다. 한국 언론이 깊이 성찰해봐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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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윤석열 “법치 말살, 직을 걸고 막을 수 있다면 100번이라도 걸겠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취임은 2019년 7월, 그는 이제 임기를 4개월가량 남겨두고 있다. 그간 한국 사회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비리 수사, 청와대의 울산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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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훈저널 2021년 여름호를 읽다가 연합뉴스 편집국장, 사장을 지낸 박정찬 선배의 기고글에서 필자와 같은 문제 의식을 피력한 대목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기자들이 같은 생각이지만 자사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잘못된 관행을 여전히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게 작금의 언론 현실이다.

 

*아래는 관훈저널 2022년 봄호에 실린 안수찬 세명대학교 저널리즘대학원 교수의 '한국 언론의 미개한 관행, 출처 표기 없는 복제 보도'라는 제하의 기고문이다.

19세기에 머물러 있는 한국 언론의 보도 관행 150년 전의 기준과 방식을 오늘에 적용하는 직업이나 분야가 있 다고 상상해 보자. 예를 들어, 19세기 많은 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구체적 물증 없이 추정에 따라 판결하는 법원, 의학적 검사 없이 짐 작에 따라 치료하는 병원이 2022년에도 존재한다고 상상해 보자. 현대성의 외양 아래 봉건적 습속을 적용하는 이들을 우리는 ‘미개하다’고 평가할 것이다.

사회 여러 분야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라잡았다고 평가받는 21세기 한국에 여전히 미개한 분야가 있다. 언론이다. 한국 언론의 보도 관행은 19세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 많은 언론학자는 19세기 중후반 미국의 ‘페니페이퍼’(penny paper)를 현대 언론의 맹아로 평가한다. 대표 신문으로 조지프 퓰리처가 이끈 뉴욕월드가 있다. 이 신문은 매일 최대 100만 부를 발행한 사상 첫 대중 언론이었다. 19세기 초 반의 ‘정파 언론’(partisan paper)과 달리, 칼럼과 사설이 아니라 각종 사건·사고를 주로 보도했고, 스포츠 보도와 정치 만평을 시작했으며, 광고 수익 모델도 처음 도입 했다. 1887년 뉴욕 정신병원 의 실상을 알린 이 신문의 보도는 탐사보도 역사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기념비적 기사다. 다만 뉴욕월드는 한 가지 점에서 현대 언론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아래는 1900년 4월 20일, 금요일 석간에 발행된 뉴욕월드의 1면 머리기사다.

 

'젊고 예쁜 여성이지만, 이 나라에 친구가 없는 것이 분명하고, 불행한 일을 겪어 한 푼도 없는 마리 로살리 다인스(Marie Rosalie Dinse)가 오늘 오후 2시 다리 에서 뛰어내렸다. (중략)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로 물에서 구조됐으나 병원에서 되살아났고, 이내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중략) 그녀는 자신이 음모의 희생양이 되어 조금씩 돈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매우 지쳐 상심했다. 그녀가 다리를 건널 때, 강은 매우 아늑해 보였다. 그것은 평화롭게 보였다. (이하 생략)'

얼핏 보면, 별문제 없는 기사다. 인물 중심의 사건 기사를 문학적 방식으 로 잘 보도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는 현대 언론의 거의 모든 요소를 갖췄던 뉴욕월드가 ‘황색 언론’(yellow journalism)의 대표 격으로 불린 이유를 보여준다. 여성이 다리에서 뛰어내린 것은 사실이지 만, 그녀가 돈을 잃어버렸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정신질환자인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기 힘들다는 점도 기사에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 말했 다’는 문장이 있지만, 언제 어디서 그녀를 만나 인터뷰했는지에 대한 정보도 없다. 정보 출처가 불분명한 내용에 기자의 상상을 덧대어 보도한 것이다.

이것이 19세기 기자들이 1면 머리에 올릴 대표 기사를 작성할 때 적용한 관행의 수준이다. 뉴욕월드가 쇠락하고 뉴욕타임스가 새로운 주류 언론으로 등극한 1920~1930년대는 이러한 ‘선정주의’(sensationalism)에 대한 반성의 시기였다. 여기서 선정주의는 도색잡지의 관능적 선정성이 아니었다. 출처와 근거가 불분명한 정보를 교묘하게 보도하는 관행이 19세기 선정주의의 핵심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 언론이 채택한 규범이자 원칙이 ‘정보 출처의 투명한 공개’다. 취재원(news source)은 누구인지, 언제 어떻게 취재원을 만나거나 확보했는지, 그 정보를 왜 신뢰할 수 있는지 등을 두루 밝혀야 ‘기사의 내용이 조작이나 허구가 아니다’라는 믿음을 독자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투명성은 현대 언론의 본론 언론학자들은 이를 ‘투명성’(transparency) 원칙이라고 부른다. 20세기 초반 이후 오늘의 디지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난 100여 년 동안 이뤄진 현 대 언론의 진화는 투명성 원칙을 더 정교하게 확대 발전시킨 과정이었다. 취재원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인용하고, 취재원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밝히며, 취재기자의 바이라인(by-line)을 적고, 취재의 계기·목적·방법·한계 등을 공개하는 편집자 주를 쓰고, 정보의 원자료 및 관련 아카이브의 링크를 덧붙이는 등의 변화는 모두 투명성의 극대화와 관련이 있다. 현대 언론의 또다른 중요한 규범으로 꼽히는 객관성과 공정성 등은 20세기 이전에도 존재했다. 의견이 아닌 사실을 중시하는 객관성 원칙이 19세기 페니페이퍼 시대에 등장했음은 위에 소개했다.

공정성은 어떨까?기자 양성을 위한 사상 첫 고등교육 기관인 미국 미주리대 저널리즘스쿨은 1908년 개교와 함께 ‘기자의 신조’(journalist’s creed) 8개 조항을 선포했는데, 세 번째 조항을 보면 “분명한 생각, 분명한 진술, 정확성 그리고 공정성이 좋은 저널리즘의 토대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고 적혀 있다. 세기 전환기에 이미 공정성 규범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따라서 객관성과 공정성이 현대 언론의 서장을 열었다면, 투명성은 현대 언론의 본론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언론과 20세기 언론을 구분 짓는 경계에 투명성이 있다. 정보의 출처를 정확하고 투명하게 밝히면 현대 언론이고, 그렇지 않으면 전근대 언론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언론은 19세기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 투명성 원칙이 한국 언론계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세계일보는 2022년 1월 17일자 1면에 〈윤석열 부부와 친분 있는 무속인, 선거대책 본부에서 고문으로 일한다〉는 기사를 단독 보도했다. 국민의힘은 이튿날인 18일, 기사에 등장한 무속인이 활동했던 선거대책본부 산하 네트워크 본부를 전격 해산했다. 그만큼 중대 사안이었다. 다른 신문들도 이를 뒤따라 보도하거나 관련 상황을 보도했다. 그런데 대부분 신문은 ‘무속인이 선대본에서 일한다’는 정보의 출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17일 ‘무속 논란’에 또 휘말렸다. ‘건진법사’라 는 무속인 전모 씨가 선거대책본부에서 고문으로 활동하며 후보 일정과 메시 지, 인사에 개입했다는 한 언론의 보도가 나오면서다. (중략) 보도에 따르면 윤 후보가 전씨를 알게 된 것은 부인 김건희 씨를 통해서이고, 윤 후보가 검찰총장이던 시절 전씨가 대권 도전을 결심하도록 도왔으며, 자신이 국사가 될 사람이 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이하 생략)' (서울신문 1월 18일 지면 기사)

'(전략) 국민의힘은 ‘건진법사’로 알려진 A씨가 네트워크본부 고문으로 활동 하며 윤석열 후보 선거 캠페인에 관여한다는 의혹을 제기한 일부 보도는 “사실 이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무속 논란이 계속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네트워크본부 해체라는 강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 (이하 생략)' (조선일보 1월 19일 지면 기사)

'국민의힘은 18일 무속인이 윤석열 대선 후보의 선거운동에 개입했다는 논란과 관련해 활동의 근거지로 지목된 선거대책본부 산하 네트워크본부를 해산했다. 관련 보도가 나온 지 하루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조치로, ‘무속 논란’을 조기에 차단하려는 의도다. (이하 생략)' (동아일보 1월 19일 지면 기사)

이들 신문은 ‘한 언론의 보도’, ‘관련 보도’, ‘일부 보도’ 등으로 정보의 출처를 흐렸다. 정간법에 따라 등록된 국내 언론은 2020년 말 현재, 2만 2,700 여 곳이다. 도대체 ‘한 언론’과 ‘일부 언론’이 2만여 언론사 가운데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위 기사들은 모두 지면에 보도됐다. 게이트키핑이 허술한 인터넷 기사도 아니고, 담당 부장, 그리고 편집국장까지 살펴봤을 중대 사안에 대한 지면기사에 정보 출처를 표기하지 않은 내용을 버젓이 보도한 것이다. 이 사안과 관련해 ‘세계일보가 …를 보도했다’는 구체적 정보를 담은 신문은 경향신문과 한겨레 정도였다.

연합뉴스 베껴 쓰는 관행도 저작권법 위반

이런 일은 수시로 일어난다. 연합뉴스는 2월 6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선대본부의 원희룡 정책본부장과 인터뷰했다. 원 본부장은 윤석열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인터뷰에서 주장했는데, 여러 신문이 그 내용을 받아 보도했다. 여기서도 똑같은 관행이 반복됐다. 조선일보는 “이날 국민의힘 원희룡 정책본부장도 언론 인터뷰에서 야권 단일화 후보 필요성을 언급하며 ‘때가 됐다’고 했다”(2월 7일 지면 기사)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국민의힘 원희룡 선거대책본부 정책본부장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초박빙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안 후보와 단일화를 해야 한다’”(2월 7 일 지면 기사)고 보도했다. 정보 출처인 연합뉴스를 표기해 보도한 신문은 중앙일보와 세계일보 정도였다.

이는 일종의 표절이다. 원작자를 밝히지 않고 내용을 옮겨왔기 때문이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표절은 위법 또는 반윤리적 행위로 이해된다. 표절 기사도 마찬가지다. 국내 저작권법 및 국내외 판례를 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을 전달한 기사는 저작물로 보기 힘들지만, 정보 수집과 유통에 상당한 노력과 비용을 투입한 기사의 저작권은 법률에 의해 보호된다. 이를 무단 전재·인용하는 것은 다른 언론의 취재보도 행위에 무임승차하는 부정경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연합뉴스의 보도를 베껴 쓰는 관행도 마찬가지다. 이런 행위는 저작권법은 물론 언론사 간 계약 위반이다. 연합뉴스와 각 언론사가 맺은 전재계약의 핵심은 원칙적으로 통신사의 기사를 그대로 보도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이런 관행을 법률의 힘을 빌려 바로 잡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저작권법 위반은 (상습적 영리 활동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면) 친고죄에 해당한다. 위 사례를 예로 들자면, 세계일보가 직접 다른 신문사를 고발해야 한다. 뒤이어 법원은 세계일보의 첫 기사가 저작권을 인정할 만큼 독창적 보도인지 판단하는데, 이 과정에서 세계일보 측의 적극적 변론이 필요할 것이다. 저작권 침해 결정이 나더라도 손해배상액의 기준은 ‘저작물의 이용 허락의 대가로 지급했을 금액’이다. 그 배상액은 아마 소송비용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법률이 아니라 규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제안해 본다. 불법 행위는 법률에 근거하여 강제로 규율할 대상이지만, 직업적 규범은 직능 단체가 자율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대상이다. 출처 표기 없이 다른 언론 보도를 베껴 쓰는 관행을 해소하는 일은 법원의 판단을 기다릴 만큼 엄청난 일이 아니다.

처방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원래 출처인 언론사를 밝혀 적기만 하면 된다. ‘세계일보가 보도했다’거나 ‘연합뉴스가 인터뷰했다’고만 적으면 된다. ‘한 언론’, ‘일부 언론’ 등 표현은 일종의 ‘주저흔’ 다만 이처럼 간단한 일을 한국 언론이 기괴할 정도로 부자연스럽게 회피하는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한 언론’·‘일부 언론’ 등의 표현은 일종의 ‘주저흔’이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르는 게 창피하므로 잘못의 증거를 조금이나마 숨기려는 ‘집단 심리’가 그 배경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 잘못은 ‘직접 취재’(original report)의 원칙과 관련이 있다.

최근 국내에 번역된 『저널리즘의 기본원칙』 개정 4판을 보면, 저자들은 직접 취재의 원칙을 “투명성과 좋은 짝”(192쪽)이라고 적었다. 그만큼 두 원칙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직접 취재는 다른 언론의 보도를 따라 쓰지 말고, 제 발로 뛰어 직접 사실을 확인해 기사를 쓰라는 원칙이다.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검증하는 방법은 현장·사람·문서 등을 직접 취재하는 것이다. 이 경우의 취재 대상을 ‘1차 취재원’(primary source)이라 부른다. 간접적으로 목격한 사람이나 기록은 ‘2차 취재원’(secondary source)이다. 현장을 보았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람과 인터뷰한다면, 이는 3차 취재원에 해당할 것이다. 1차 취재원에게서 멀어질수록 기사의 정확성과 진실성은 희 박해진다. 이런 경우일수록 취재원을 투명하고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중 요하다. 그래야 독자가 기사의 신뢰성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접 취재 원칙은 투명성 원칙에 의해 보완되고, 투명성 원칙을 최고 수준에서 구현하는 것은 직접 취재 원칙의 극대화와 연결돼 있다. 한국 기자들이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에 소개된 현대 언론의 규범을 얼마나 숙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출처 표기 없이 다른 언론을 복제하는 행위가 직접 취재 원칙에 어긋나는 창피한 일이라는 인식은 제법 널리 퍼져 있는 듯하다. 그래서 ‘한 언론’ 등의 방식으로 최대한 간단하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표기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창피한 잘못을 눙치는 기괴한 관행과 연결된 또 다른 집단 심리가 있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출처 표기와 관련해 ‘이 정도면 됐다’는 인식이 한국 언론계 전반에 팽배해 있다. 이는 소속 언론사 연차·직급·부서 등을 가리지 않는다. 정보 출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아도 뭐라 하는 사람이 뉴스룸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단독 보도한 언론사를 자신의 기사에 표기 하지 않는 것은 투명성 규범 전반을 소홀하게 여기는 한국 언론의 19세기적 관행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예를 들어 앞서 소개한 세계일보의 단독 보도를 보면, 무속인이 선대본의 고문으로 활동한다는 정보의 출처 또는 취재원은 ‘무속인 전모 씨의 지인’과 ‘선대본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로 표기돼 있다. 내부자의 신원을 드러내기 힘들었다 하더라도, 중대 고발 사안에 대한 익명 취재원을 어떻게 표기해야 좋은지에 대한 고심은 부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보 출처 표기, ‘원산지·유통 이력 표기’와 같아

21세기 언론이 투명성 원칙을 구현하는 수준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미국 시애틀타임스는 보잉사의 ‘737 맥스’ 기종의 안전성 문제를 폭로해 2020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대다수 취재원은 보잉사의 엔지니어들이었는데, 실명 인용을 원칙으로 삼는 영미 언론 기사 가운데는 이례적으로 대부분 익명으로 그 증언을 인용했다. 다만 출처 표기 방식은 한국 언론과 다르다.

'수십 년 동안 보잉사에서 일했고, 나중에는 미연방 항공청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자로 일하면서, 737 맥스를 포함한 다양한 기종의 검증 과정에 관여한 베테랑 항공 안전 엔지니어는 연방 항공청의 (제조사에 대한) 안전 검증 위임에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

증언 내용보다 취재원을 설명하는 내용이 더 길다. 그래야 독점 취재한 내용의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사를 상품에 비유하자면, 정보 출처 표기는 ‘원산지 및 유통 이력 표기’와 같다. 언제 어디서 도축 됐는지, 어떤 유통과정을 거쳤는지 등이 표시돼 있어야 소비자는 상품을 신뢰한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원산지 및 유통 이력을 한사코 감춘 상품만 진열대에 올려놓았다. 머지않아 손님들은 이 가게를 찾지 않을 것이다. ‘출처 불명의 불량품’에 대한 나쁜 기억이 많기 때문이다. 출처 표기 없이 다른 언론 기사를 복제해 보도하는 관행은 현대적 외양 아래서 전근대적 습속을 적용하는 한국 언론의 수준을 드러내는 전형이다. 개별 행위 및 사례를 처벌하거나 비판하는 것으로는 문제의 개선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보다는 ‘상품 기준’에 대한 업계의 인식을 전반적으로 바꾸고, ‘제조 공정’에 대한 업계의 표준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정부 개입이나 법적 규율의 힘을 빌리지 않는 자율 규제의 핵심은 언론업계를 이끄는 업체 대표들의 협약과 실천에 있다. 이 글의 게재를 허락해준 관훈클럽이 그러한 자율 규제를 실천할 좋은 직능단체가 되길 바란다.

*아래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간하는 '신문과방송' 2023년 3월호 커버스토리 일부를 소개한 글이다. 안수찬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가 '베끼기 저널리즘'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언론의 복제 보도, 표절 관행을 비판한 것이다.

우연히 들여다본 미국 저널리즘대학원의 교과서에서 '인용과 출처'(Quotation and Attribution)를 20여 쪽에 걸쳐 설명한 것을 읽고, 기가 질려 버렸다. 이게 뭐라고 이토록 자세히 적는가 말이다. 그 무렵, 뉴욕타임스의 취재 보도 준칙(Standards and Ethics)을 읽었을 때는 그저 압도당했다. 10만여 글자를 문서에 옮기는 A4 용지 40쪽이 넘었다. 검증과 인용 등에 관한 일반 사항은 차치하고, '다른 언론 보도의 인용'(Other People's Reporting)에 관한 내용만 일부 옮긴다.

"다른 조직이 수집한 사실을 사용할 때, 우리는 그 출처를 밝힌다. 이 원칙은 뉴스통신은 물론 신문, 잡지, 단행본, 방송에 모두 적용된다.(...) 바람직한 것은, 시간과 거리가 허락하는 한, 우리 스스로 취재하거나, 다른 언론의 기사를 우리가 검증하는 것이다. 직접 확인한 사실에 대한 출처를 다른 언론으로 표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존중(courtesy)과 정직(candor)의 차원에서, 처음 보도한 언론을 우리의 기사에 밝힌다."(Standards and Ethics, The New York Times Company)

낙종했더라도 뒤늦게 따라 보도하더라도, 직접 취재한 것만 쓰되, 이를 먼저 보도한 언론을 존중해 정직하게 그 언론사를 밝히라는 것이다. 무려 존중과 정직이라니, 고귀하고 멋있지 않은가.

*2023년 2월, 조선일보는 세계일보가 1000만원이 넘는 비용을 들여서 집계한 국민의힘 전당대회 후보 지지도 조사를 아무런 출처 표시 없이 무단 게재하는 몰염치한 행태를 보였다. 아래 기사에서 뜬금없이 소개되는 한국갤럽 조사가 바로 세계일보 여론조사다.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이후 캄보디아가 한국 시장에 가장 기대하는 것은 기술 이전입니다.”

롱 디망쉐 주한캄보디아대사는 지난달 18일 서울 중구 주한캄보디아대사관에서 가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2019년 부산에서 열린 한·아세안 정상회의를 계기로 그해 11월 적합성 조사에 들어간 한·캄보디아 FTA는 지난 3일 최종 타결됐다. 한국이 가장 짧은 시간 안에 타결한 FTA다.

디망쉐 대사는 FTA 체결로 한국은 캄보디아의 자동차 시장에서 우위를 갖게 되고, 캄보디아는 한국에 농산물 수출을 늘리게 되겠지만 가장 원하는 것은 ‘기술’이라고 했다. 앞선 기술을 가진 한국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캄보디아의 산업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길 바라는 것이다.

코로나19 확산 전까지 매년 약 7%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던 캄보디아의 올해 목표는 이 수준을 회복하는 것이다. 디망쉐 대사는 “캄보디아는 지난 10년간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해왔다”며 “2030년까지 상위중소득국가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한국과의 협력은 그 디딤돌이다.

캄보디아는 1999년 아세안에 가입해 10개 아세안 국가 중 가장 늦게 회원국이 됐다. 디망쉐 대사는 캄보디아가 아세안 회원국이 됨으로써 “정치적 독립을 얻었고, 주변국들과 경제적 관계를 확장했으며, 정체성을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아세안은 강대국들의 ‘코끼리 싸움장’이 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우리 주변에는 생각보다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살고 있다. 5만여명의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들과 1000여명의 결혼이주여성이 그들이다. 디망쉐 대사는 “이들은 한국과 캄보디아의 다리”라며 한국 사회의 관심을 당부했다. 다음은 디망쉐 대사와의 일문일답.

―FTA 체결 후 한국과 캄보디아 관계도 더 발전할 것 같다.

“아세안에 대한 한국 정부의 관심에 감사한다. FTA는 이 같은 분위기 속 양국 관계의 큰 성과다.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의 첫 국빈 방문은 양국 관계 발전의 이정표였고 깊은 정치적 신뢰와 실질적 협력의 증거가 됐다. 올해 5월 30, 31일 한국에서 열리는 P4G(녹색성장 및 글로벌 목표 2030을 위한 연대) 정상회의가 대면으로 개최되면 훈센 캄보디아 총리도 참석할 것이다. 이어서 6월1일 프놈펜에서 아셈(ASEM·아시아유럽회의)이 열리는데, 문 대통령도 참석할 것으로 기대한다. FTA 협상이 체결된 뒤 두 정상이 만나는 계기가 이 시기에 만들어질 것이다.”

―한·캄보디아 FTA 체결 이후 전망은.

“2018년 한국과 캄보디아 사이 교역은 10억달러에 달했다. 캄보디아의 대한국 수출은 3억달러, 한국의 대캄보디아 수출은 7억달러다. 여기에 FTA 체결로 양국 간 교역과 투자가 한 단계 더 발전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금융, 인프라 구축, 농업, ICT(정보통신기술) 분야에서 교역과 투자가 늘어날 것이다. 가장 기대하는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의 ICT 분야 투자와 기술 이전이다. 한국의 ‘노하우’를 전수받고 싶다. 한국 역시 캄보디아의 자동차 시장 접근 확대를 통해 이익을 얻을 것이다.”

―캄보디아의 경제성장률은 매년 7%에 달한다. 동력은 뭔가.

“지난 20년간 캄보디아 경제는 중요한 전환기를 겪었다. 2015년에 하위중소득국가가 됐고, 2030년까지는 상위중소득국가가 되는 게 목표다. 2000∼2010년 매년 경제성장률이 8%가 넘었고 2011년부터 코로나19 전까지 7% 정도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경제다. 현재까지는 관광, 섬유, 건설, 농업, 부동산 분야가 이를 이끌어왔다.”

―캄보디아는 1999년 아세안에 마지막 회원국으로 합류했다. 캄보디아는 아세안 회원국이 되어 무엇을 얻었나.

“아세안은 외부 침략과 간섭으로부터 캄보디아의 주권과 독립을 지켜줬다. 캄보디아는 아세안을 통해 경제적 영역도 확장했다. 지난 11월 캄보디아는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에 서명했는데, 현재 캄보디아에 가장 중요한 다자무역체제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아세안은 캄보디아가 지역 차원뿐 아니라 세계 차원에서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아세안 내부에도 남중국해 갈등 등 여러 갈등 요인이 있지 않나. 캄보디아도 그중 하나로 알고 있다.

“아세안에는 10개 나라가 모인 만큼 각자의 국가적 이익에 따라 모두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세안에도 국경 분쟁 등 여러 문제가 있다. 하지만 아세안은 동남아시아 우호협력조약에 의해 단합을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세안은 다양한 문화를 존중한다. 종교도 다르고 체제도 다르지만,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

―미국, 중국 등 강대국들은 아세안과 그 안의 나라들에 관심이 많다. 그들이 아세안의 단합을 해치지는 않을까.

“우리가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캄보디아 속담에 코끼리가 싸우면 작은 동물이 다친다는 말이 있다. 캄보디아는 작은 나라지만, 캄보디아와 아세안은 이 지역을 ‘코끼리 싸움장’이 되도록 하지 않는다. 각 나라의 외교정책에 달린 일이겠지만, 적어도 전체로서의 아세안은 유연할 필요가 있다.”

―그럼 캄보디아의 방향은 어떤가.

“캄보디아 역시 국제질서가 다자주의 중심으로 바뀌는 시점이라고 인식하고 이에 맞춘 외교정책을 펴고 있다. 오랜 친구 관계는 유지하고, 새로운 친구는 만들어 나가는 정책이다.”

―한국에 있는 캄보디아인들에 대해 듣고 싶다.

“2006년 11월 두 나라가 외국인고용허가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이래 5만4300명 이상의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한국 땅을 밟았다. 이들은 대부분 농업, 건설업, 제조업 분야에서 일하고, 월 130만원에서 190만원 정도의 임금을 받는다. 이들이 벌어들이는 소득은 캄보디아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불법이주노동자들은 전체의 10∼15% 정도 된다. 한국에는 1000여명의 캄보디아 출신 결혼이주여성들도 살고 있다.”

―한국 사회가 그들을 정당하게 대우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법적 보호를 받는 노동자들의 경우 대부분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시민단체들도 이들을 돕는다. 다만 불법이주노동자들은 고용주로부터 폭력에 노출되거나 임금 체불 등을 겪는 경우가 더러 있다. 결혼 이주 여성들의 경우 대개는 잘 적응하며 지내지만, 한국인 가족에게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부의 여성들을 보면 안타깝다. 한국에는 여성인권 관련 법률이 잘 정비돼 있지만, 이들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캄보디아 정부는 결혼 이주 전 한국인 남편의 신상과 범죄 기록 등을 검토하고, 이주 전후 여성뿐 아니라 이들의 한국인 남편들의 다문화 이해 교육을 장려하고 있다. 1000여명의 캄보디아 여성이 한국에 사는데,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의 자녀들이 한국에서 살아가겠나. 캄보디아 대사관은 한국 내 이주민센터와의 협력을 통해 캄보디아인들의 자녀들에 캄보디아어 교육도 하고 있다.”

―주한 캄보디아 대사로서 어려움을 겪는 이주자들에 대한 걱정이 많을 것 같다.

“코로나19 전에는 주말마다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들을 만나러 한국 곳곳 안 다녀본 곳이 없다. 주중엔 대사 직무로 바빠 시간을 낼 수 없어서 주말에 다녔다(웃음).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등 한국 단체들과의 협력을 통해 그들을 돕고 있다. 코로나19 이후엔 임금 삭감, 출입국 지연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다.”

\홍주형 기자 jhh@segye.com

 

#1. 직장인 박모(35)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금수저’로 통한다. 2018년 결혼한 박씨는 서울 동작구의 한 아파트를 매입해 신혼살림을 차렸다. 살 때만 해도 7억원대였던 박씨의 아파트는 현재 14∼15억원을 오가고 있다. 집값이 3년 만에 두 배 오른 셈이다. 박씨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모님이 아파트를 사주셨다. 부모님의 노후자금을 조금 갉아먹은 셈이지만, 부모님 덕분에 출발선이 다른 이들보다 좀 앞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고 말했다.

맞벌이를 하는 박씨 부부는 월 급여의 70%를 저축과 주식·펀드 등 금융투자에 쓰고 있다. 신혼부부의 가장 큰 부담이 신혼집 마련 관련 대출금 상환인데, 박씨 부부는 이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재산을 불려가고 있다. 박씨는 “딸이 갓 돌을 지났다. 새로운 목표가 있다면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강남으로 이사하는 것이다. 지금 사는 집 가격이 더 오르고, 저축과 투자가 잘 풀리면 얼추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2. 직장인 전모(38)씨는 지난해 11월 경기도 김포로 이사했다. 2017년 결혼한 전씨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처음 시작을 경기도에서 하면 절대 서울로 다시 올 수 없다’는 조언을 듣고 서울 마포구에 신혼집을 얻어 이사 전까지 살고 있었다.

결혼 당시 양가 부모들로부터 거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전씨 부부는 모은 돈과 은행 대출을 최대한 받았지만, 서울 도심에 전세를 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전씨는 “아내의 직장은 여의도, 내 직장은 광화문 근처라 마포구가 동선상도 그렇고, 가격적으로도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그에 따라 전셋값도 덩달아 크게 오르면서 4년간 살았던 신혼집을 포기해야 했고, 주변 동네로는 이사도 쉽지 않았다.

전씨는 “서울을 벗어나지 말자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아내의 출퇴근이 최대한 용이하면서도 광화문행 광역버스가 갖춰져 있는 김포로 이사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사를 하며 ‘다시 서울에서 살 수 있을까? 서울에 나와 아내 명의의 집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서글펐다”고 털어놨다.

대한민국에서 집값이 문제가 되지 않은 적은 없지만, 최근에는 아예 “집 사기를 포기했다”며 낙담하는 직장인들이 적지 않다. 집이 있어도 다 같은 집이 아니다. 지방과 서울, 서울 중에서도 강남 등 특정 지역과 다른 지역의 격차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이 빈부 격차를 벌리며, 계층 간 사다리를 끊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23일 한국은행과 통계청의 ‘2020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소득분배지표인 지니계수, 소득 5분위 배율, 상대적 빈곤율은 모두 개선됐다. 그런데 이 같은 수치는 실제 국민들이 체감하는 빈부 격차를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계란과 채소 가격 등이 치솟았음에도 변함없는 소비자물가지수가 국민의 장바구니 사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같은 조사, 다른 통계를 살펴보면 전혀 다른 상황이 포착된다. 지난해 3월 순자산(자산에서 부채를 뺀 금액) 보유 기준 상위 20%인 5분위 가구의 평균 순자산은 11억2481만원으로 하위 20%인 1분위 가구(675만원)보다 11억1000만원 이상 많았다.

5분위 가구의 평균 순자산을 1분위 가구의 평균 순자산으로 나눈 값인 ‘순자산 5분위 배율’은 무려 166.64다. 이 수치가 클수록 자산 불평등이 심하다는 의미인데, 2019년 125.6보다 격차가 더 커졌다. 이 배율은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2017년에는 99.65으로 매년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지니계수가 2018년 0.345에서 2019년에는 0.339로 떨어져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내세운다. 소득이 어느 정도 균등하게 분배되는지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소득분배지표인 지니계수는 1에 가까울 수록 불평등, 0에 가까울 수록 평등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부가 개선됐다고 밝힌 이 지니계수는 시장소득에서 공적이전소득, 즉 정부 지원금은 더하고 세금 등을 뺀 처분가능소득을 기준으로 한 수치다. 순자산만을 따진 지니계수는 0.602로 오히려 전년이 비해 0.005 증가했다.

각종 소득분배지표가 개선될 수 있었던 것은 저소득층에 대한 정부 지원 영향이 크다. 지난해 1분위 가구 소득 중 42.8%가 정부 지원(공적이전소득)에서 나왔다.

국내 가계 자산 대부분은 부동산이 차지하는데, 정부 보조에 크게 의존하는 저소득층이 집을 사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정부가 서민을 위한 정책을 강조했지만, 집값 잡기에 실패하면서 자산 격차를 키운 꼴이다.

 

집값 폭등은 심지어 집을 가진 사람들 간의 격차도 벌리고 있다. ‘똘똘한 강남 아파트 한 채’와 ‘서울의 저가 빌라 또는 외곽 아파트’의 매매가 차이는 많게는 수십억원이다.

이런 부동산 시장 상황은 주택 보유 여부는 물론, 사는 지역, 주택 브랜드 등을 기준으로 ‘보이지 않는 계급’을 만들고 있다.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임대주택에 거주하는 학우를 ‘엘거’(LH 임대주택 거지), ‘휴거’(휴먼시아 거지)라고 칭하며 조롱하는 일이 벌어지고, 임대주택 거주민이 민영 주택 지역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는 현실은 주택으로 계급화된 우리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다.

엄형준·남정훈 기자 ting@segye.com

 

 

“필리핀과 한국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피로 맺어진 단단한 연대가 두 나라 사이에 있습니다.”

크리스티안 헤수스 주한 필리핀 대사대리는 지난달 28일 화상으로 가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헤수스 대사 대리는 특히 ‘동맹(alliance)’, ‘형제’라는 표현으로 긴밀한 양국 관계를 강조했다.

양국의 외교관계 수립은 올해로 72주년을 맞는다. 군사적 연대관계를 의미하는 동맹은 아니다. 헤수스 대사대리가 동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만큼 두 나라의 관계가 가깝고 깊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필리핀은 태국과 함께 6·25전쟁에 참전해 한국을 지원한 나라다.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10개국 중 2개국이 당시 한국을 지원했다. 필리핀은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지상군을 파병한 나라이기도 하다.

헤수스 대사대리는 “필리핀은 아세안 중심국이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정중앙에 있는 나라”라고 강조했다. 헤수스 대사대리의 말처럼 필리핀은 아태지역 정중앙에 자리해 오랫동안 미국의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 그러면서도 최근엔 중국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그는 미·중 갈등에 대한 질문엔 답하지 않았다.

한국과 필리핀은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헤수스 대사대리는 FTA 협상이 마무리되면 더 많은 한국 기업들이 필리핀에 투자하고, 양국 사이의 무역이 늘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한국에 원하는 것은 공적개발원조(ODA) 기여다. 그는 “역대 한국의 대필리핀 ODA 사업 중 두 번째 규모였던 팡길만(Panguil Bay) 교량 건설 사업이 다리 양쪽을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2시간30분에서 단 7분으로 단축시켜놨다”며 이 같은 기여가 늘어나길 기대했다.

―한국과 필리핀 관계의 잠재성에 대해 설명해달라.

“한국과 필리핀의 관계는 매우 견고하고 또 역동적이다. 우리는 가까운 동맹일 뿐 아니라 형제다. 필리핀과 한국은 역사를 공유하며, 피로 맺어진 단단한 연대를 갖고 있다. 오는 3월 두 나라는 양자관계 수립 72주년을 맞는다. 양국 관계는 서로의 경제성장과 번영에 크게 기여했다.”

 

―‘피로 맺어진 연대’는 6·25전쟁 참전을 의미하나.

“필리핀은 6·25전쟁에 가장 먼저 참전한 나라들 중 하나로, 아세안에서는 태국과 필리핀 두 나라만 참전했다. 참전은 필리핀의 한국에 대한 우정과 희생의 상징이다. 또 현재 한·필리핀 양자관계에 가장 강력한 주춧돌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필리핀 참전용사 7420명의 용맹을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다. 한국 정부도 필리핀 참전용사들 지원에 적극적이다. 한국정부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국면에서 참전용사들에게 마스크, 진단키트 등을 보내줬다. 부임한 뒤 노년의 한국인들을 만나면 필리핀이 전쟁에서 도와줬다는 얘기를 먼저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필리핀이 한국과의 관계에서 바라는 것은.

“경제적 협력관계를 심화하는 것이다. 필리핀과 한국의 경제협력은 금융, 농수산 식품업, 관광, 석유화학, 선적, 철강 산업 등 광범위하게 발전해왔다. 특히 한국은 코로나19 전까지 필리핀에 가장 관광객을 많이 보내는 나라 중 하나였다. 보라카이에 갔다가 한국어만 가득한 거리를 보고 ‘내가 한국에 있나’ 하고 헷갈렸던 경험이 있다(웃음).”

―특별히 한국에 더 원하는 경제협력이 있다면.

“한국이 필리핀의 경제 개발에서 ODA를 통해 상당한 기여를 해주기를 기대한다. 한국의 ODA는 필리핀의 관개수로, 발전, 도로, 공항 등 주요 인프라 건설을 위한 주요 프로젝트에 투입됐다. 필리핀 팡길만에 건설된 교량이 대표적이다. 팡길만과 탄굽시를 연결하는 다리는 두 지역을 오가는 데 2시간30분이 걸리던 것을 7분으로 단축시켰다. 또 지난해 한국정부는 필리핀 정부가 코로나19에 맞서는 데 아주 긴요했던 인도적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양국 사이에 FTA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2019년 11월 한·아세안 정상회의 중에 필리핀 정부와 한국 정부가 FTA 협상 공동성명에 서명하면서 협상이 시작됐다. 당시 2020년 상반기까지 협상을 마무리짓기로 했는데, 아직은 협상 진행 중이다. 협상이 마무리되면 양국 간 무역과 투자에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필리핀은 연구개발(R&D), 기술 혁신 분야에서 한국과의 더 큰 협력을 기대한다.”

―필리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대체로 어떻게 일하고 있나.

“1990년대 초부터 많은 중소기업들이 필리핀 시장에 투자를 해왔고, 지금도 매우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1990년대 필리핀에 진출한 대덕전자가 대표적이다. 또 필리핀에서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 한국인들도 많다. 필리핀은 현재 제조업 부활기를 맞고 있고, 이를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특히 자동차, 항공우주산업, 전자산업에 새로운 기회가 열려있다. 중장기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도 수주 중이다. 우수한 기술력과 자본을 가진 한국 기업들이 이 기회를 잘 활용해주길 바란다.”

―필리핀이 갖고 있는 투자처로서의 매력은 뭔가.

“필리핀은 급속성장 중인 1억명 규모의 시장을 갖고 있다. 또 평균 연령이 젊다. 중위연령(총인구를 연령순으로 나열할 때 정중앙에 있는 사람의 연령)이 23세에 불과하다. 또 풍부한 해양자원과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특히 지리적 위치가 좋다. 아태지역의 정중앙에 있는 장점은 크다.”

―한국 정부가 아세안에 관심이 많은데.

“한국정부에 감사한다. 지난해 말 발표된 신남방정책 플러스가 그간의 신남방정책의 성과를 이어나가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지금이 특히 아세안과 한국의 관계가 긴밀해야 할 때다. 코로나19 위기가 길어지면서 국가들의 경제적 피해가 크다. 또 인적 교류도 급감했다. 기업인과 필수인력에 대한 여행 제한 완화를 통해 이 같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필수적 교류 지속은 위기 속에서 최소한의 경제성장 동력을 살리기 위해 긴요하다.”

―한국과 필리핀 간 공통 가치로 무엇을 꼽겠나.

“깊은 애국심,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깊은 연대를 꼽고 싶다. 필리핀에 ‘바야니한(Bayanihan)’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목표를 위해 함께 뭉친다는 뜻이다. 한국과 필리핀과의 관계가 특히 바야니한으로 설명된다. 필리핀이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 2013년 태풍 하이옌으로 필리핀이 큰 피해를 본 뒤엔 한국의 아라우부대가 재건지원을 위해 파견됐다.”

―한국에 있는 필리핀인들은 잘 지내나.

“약 5만명의 필리핀인들이 한국에 살고 있다. 대부분 고용허가제(EPS)로 일하거나, 한국인들과 결혼한 이주민들이다. EPS 시스템이 정착된 이래로 필리핀 노동자들의 근로여건이 많이 개선됐다. 결혼이주의 경우에도 한국정부가 이주민 지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점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다만 가족들 사이에선 다문화 이해가 더 정착돼야 한다. 또 이주민 자녀들의 경우 사회와 학교의 다문화 교육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차별 문제를 겪고 있다. 한국사회의 인구 구성이 다양해지는 만큼 다문화 환경 이해에 더 익숙해지길 바란다.”

―필리핀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한류의 영향을 체감한다. 한국 음악, 드라마, 패션, 음식에 대한 관심이 최근 몇 년 최고조였다.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필리핀인들이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에 더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다. 젊은 세대 중엔 한국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다. 나도 BTS(방탄소년단) 팬이다.”

 

홍주형 기자 jhh@segye.com

 

크리스티안 헤수스 주한 필리핀 대사대리는… ●1969년 필리핀 출생 ●필리핀대학교 정치학 졸업 ●아테네오 데 마닐라대학 법학박사(JD) ●주홍콩 필리핀 부총영사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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