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교토의 북쪽 언덕 위에 자리한 금각사를 찾았다.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1358~1408)가 부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지은 절이다. 원래 이름은 로쿠온지(鹿苑寺).

요시미츠는 일본 남북조의 분열을 통일한 뒤 막부의 권력을 강화했으며 쇼군에서 물러난 뒤 출가했다. 은퇴라고는 하지만 로쿠온지를 별궁처럼 사용하며 막후에서 실권을 행사했다. 아시카가는 자신이 죽은 뒤 로쿠온지를 선종의 유파인 임제종 사찰로 바꾸도록 명했다.

이후 이런 저런 전란의 와중에 불에 타거나 훼손됐던 로쿠온지는 1950년 7월2일 새벽 젊은 승려인 하야시 쇼켄에 의해 전소됐다.

하야시는 방화 직후 금각사에서 죽으려했으나 2층 입구가 잠겨있자 뒷산으로 올라가 수면제를 먹고 단도로 몸을 찔렀다. 하지만 죽지는 못했다. 다음날 체포된 하야시는 경찰에서 "사회가 제재를 가한다면 감수하겠으나 결코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놀라서 달려온 그의 어머니는 하야시의 성장 과정 등을 진술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공판에서 하야시는 "자기혐오, 미에 대한 질투, 아름다운 금각과 함께 죽고 싶었던 점, 사회에 대한 반감, 방화에 대한 사회의 비판을 듣고 싶다는 호기심에 방화했다"는 검찰의 공소 이유에 "기소 사실 그대로, 별로 할 말이 없다. 정말이라면 정말이고, 정말이 아니라면 정말이 아니다"고 답변했다. 하야시는 징역 7년을 선고받았고 이후 5년 3개월로 감형돼 1955년 10월 만기 출소했다. 이듬 해 폐결핵이 악화돼 사망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로쿠온지는 1955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됐다. 2,3층이 금박을 하고 있어 금각사로 불린다.

금각사는 1963년부터 1965년까지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됐던 일본의 소설가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같은 이름의 소설을 쓰면서 유명해졌다. 미시마는 하야시의 금각사 방화 사건을 5년에 걸쳐 취재했다. 소설 '금각사'는 실제 사건에 토대를 둔 '시사 소설'이면서 미시마 본인의 성장기 체험이 녹아든 '고백 소설'이다.

 

 

 

금각사는 3개 층이 서로 다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법수원(法水院)으로 부르는 1층은 11세기 헤이안 시대 대표적인 건축 양식인 신덴즈쿠리 양식이다. 이 양식은 자연 그대로의 목재를 사용하고 벽은 흰색의 석고로 마감해 주변의 풍경을 돋보이게 만든다고 한다. 조운동(潮音洞)으로 부르는 2층은 무사 저택의 주된 건축 방식인  부케즈쿠리 양식이다. 2층에 불상이 모셔져 있다. 3층은 구경정(究竟頂)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선종 사찰의 전통적인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 곳에는 부처의 사리가 황금 항아리 속에 들어있다. 내부의 바닥과 천장, 벽을 모두 황금으로 발라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설 '금각사'의 주인공 미조구치의 평가. 

"원래 금각은 불안이 세운 건축, 한 사람의 장군을 중심으로 수많은 어두운 마음의 소유자들이 세운 건축이었던 것이다. 미술사가가 양식의 절충밖에 발견하지 못한 3층의 부조화한 설계는 불안을 결정화할 양식을 추구하여 자연히 그렇게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만약 금각이 하나의 양식으로 세워진 건축이었더라면 그 불안을 포섭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붕괴되어버렸으리라"(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허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17, 55쪽)

지붕은 피라미드형으로 얇은 나무껍질을 발라 덮었다. 맨 꼭대기에는 청동으로 만든 봉황 조각상을 얹었다.

'나는 연못 쪽에 서 있었고, 금각은 연못 건너편에서 기울기 시작하는 햇빛을 그 정면에 드러내고 있었다. 수청은 왼쪽 저건너에 절반쯤 가려져 있었다. 물풀 잎사귀가 드문드문 떠 있는 연못에는 금각이 정교하게 투영되어, 오히려 그 모습이 완전하게 보였다. 연못 물에 반사된 석양이 각층의 추녀 밑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원근법을 과장한 그림처럼 고압적인 금각은 몸을 약간 뒤로 젖힌 듯한 느낌을 주었다.'(위 책 38쪽) 

 

소설 '금각사'에는 미시마의 성장통이 섬세한 필치로 묘사돼있다.

젊은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밤새워 고민해봤을 '미()'의 추구, 인식론적 고민,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치열한 성찰 등에 관한 미시마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우익 사상에 오염되기 전인 미시마의 생각이다. 그의 고뇌는 금각사를 매개로 응집됐다가 풀어지고, 다시 긴장되면서 끝내는 금각사와 함께 불길 속으로 내던져지면서 강렬한 생의 의지로 약동한다.

 

 

미조구치는 왜 금각사를 불태우려 했을까.

'금각을 불태운다면 그 교육적인 효과는 각별하겠지. 그 덕분에 사람들은 유추에 의한 불멸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리라. 단지 그냥 지속되어 왔던, 550년 동안 연못가에 계속해 서 있었다는 것이 아무런 보증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생존을 떠받치고 있는 자명한 전제가 내일이라도 무너지리라는 불안을 배우기 때문이다'(위 책 283쪽)

 

 

  미조구치는 금각사에 불을 지르고 뒷산으로 달려가 불타는 금각사를 바라본 뒤 이렇게 생각한다.

다음은 '금각사'의 마지막 문장.

'일을 하나 끝내고 담배를 한 모금 피우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살아야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끝맺음에 필자는 안도한다. 생의 좌표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우리의 필립(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인 샐리를 선택했을 때처럼.

물론 소설은 소설이다. 현실의 미시마는 나이가 들면서 우익 사상에 경도된 나머지 1970년 11월25일 자신을 따르던 우익단체 '다테노카이'(방패회) 대원들을 이끌고 이치가야 육상 자위대에 난입했다. 이 곳에서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만들 수 있는 헌법 개정과 이를 위한 자위대의 궐기를 호소했다. 그 호소에 자위대원들이 호응하지 않자 미시마는 할복자살했다. 그의 나이 만 45세. "살아야지"라고 생각했던 그 미시마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본 금각사는 금박으로 과도하게 분칠한 모습이다. 불타기 전 세월의 이끼에 덮혀있던 금각사의 옛 모습에 비해 왠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물러나고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 시대가 열렸다. 스가 시대의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까. 

2020년 10월 한국언론재단 '국제뉴스연구회' 포럼 연사로 나온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스가 총리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기회의 창은 쉽게 열리지 않을 것"이라며 "아베가 역대 최장 총리라고 하는데 기억해야 할 것은 스가 역시 역대 최장(7년 9개월) 관방장관이었다는 사실"이라고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가 스가 총리와 뭘 하고 싶다면 다음달 초가 지나기 전에 뭔가를 던져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스가 총리의 국정 추진 동력인 그의 지지율이 떨어지기 전에 일본 정부가 딜을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놔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문재인정부도 내년으로 가면 레임덕이 오고 대선이 다가오기 때문에 지금 밖에는 기회가 없다"면서 "이걸 못하면 한일 교착 국면이 계속된다"고 관측했다.

박 교수는 대표적인 한일관계 전문가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1998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본 정책연구대학원대학 조교수와 외교안보연구원 조교수를, 미국 컬럼비아대, 일본 게이오대, 일본 고베대에서 객원 교수를 지냈다. 2012~2016년 서울대 일본연구소 소장, 2017년 현대일본학회 회장, 2016~2018년 서울대 국제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스가 시대 한일관계를 전망하는 서울대 박철희 국제대학원 교수.

 

서울대 박철희 교수를 초청해 진행된 한국언론재단 '국제뉴스연구회' 포럼.

 

-일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이런 농담이 있다. 미국을 우습게 아는 나라는 멕시코 밖에 없고 중국을 우습게 아는 나라는 베트남 밖에 없고 일본을 우습게 아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증상이 가장 심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농담이다. 이런 농담이 있을 정도로 한국은 일본은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특히 2010년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로 올라서면서 우리 언론은 세계 열강 순위를 과거 미일중러에서 미중일, 이제는 미중이라는 양강 프레임으로 표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G2'(주요 2개국인 미국과 중국)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

사실 일본은 1968년부터 2009년까지 42년간 세계 2위 경제대국(명목 GDP 기준)의 자리를 지켰다. 우리는 그걸 잊고 있고 지금도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일본의 힘은 세계 제1의 기술을 가진 중소, 중견 기업에서 나온다. 이런 기업들은 자신만의 뛰어난 기술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가 못 따라 온다.   

일본은 노벨상은 24명이나 받았다. 1명(1974년 사토 에이사쿠 총리)이 평화상이고 문학상 2명, 나머지는 기초 학문이다. 경제는 과학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눈에 띄는 점은 노벨상 수상자 중 민간기업의 기술연구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평생 R&D만 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일본의 저력이다. 

일본 군사력을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일본 자위대 전체 병력은 24만5000명(한국군은 총 병력 56만명)으로 우리 절반에 불과하지만 일본은 해,공군이 강하다. 해군은 세계 5위 정도이고 공군은 세계 3위 정도다. 국방 예산은 세계 6위 정도 한다. 특히 일본은 군사장비가 굉장히 좋다. 우리가 독도 문제 열을 내곤 하지만 한일이 맞붙는다고 가정하고 시뮬레이션을 하면 우리가 백전백패다. 일본 문제를 다룰 때 '군사 대국화'의 길을 간다고 표현하지만 이미 '군사 대국'이다. 일본은 1943년 '야마토(大和)'라는 세계 최대 전함(길이 263m, 배수량 7만2000톤, 주포 460mm)을 만든 나라다. 일본은 현재 45톤이 넘는 플루토늄을 가지고 있다. 핵무기 6000~1만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위성을 쏘아올릴 수 있는 기술도 보유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제작도 가능하다. 미국의 위성 발사체에도 일본 부품이 들어간다. 유엔 외교력도 한일간 차이가 크다. 유엔 회의에서 한일이 맞붙으면 20표 정도 차이가 난다는 말이 있다. 

일본은 한국에게만 무시당하는 나라다. 일본은 우습게 보는 나라는 우리빼고 단 한 곳도 없다. 정신 승리만으론 안된다. 조국 전 법무장관이 "죽창을 들자"고 했을 때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죽창 가지고 일본과 싸울 수 있나, 라고 생각했다. 시대감각이 19세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그런 태도로는 절대 일본은 이길 수 없다. 우리는 닥치고 반일(反日)하면 본전은 한다. 일단 반일해서 손해볼 것은 없다. '보통의 일본'을 얘기하면 친일 분자라고 한다. 여론 조사해보면 70~75%는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한국 국민의 정서다.

우리는 한일 관계를 생각할 때 '과거사'와 '영토 문제'가 먼저 오기 때문에 거기에 눈이 가려서 다른 부분을 못 본다. 고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 이사장은 이런 말을 자주했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을 볼 때 3가지 안경을 쓰고 본다. 하나는 '색안경', 또 하나는 '굴절 안경', 마지막으로 '확대경'(일본에서는 큰일도 아닌데 우리만 침소봉대해서 크게 보는 경향)이다."

일본은 바라볼 대는 훈련이 필요하다. 아예 없어질 수는 없다고 해도 굴절되는 각도를 조금 줄이고 너무 확대해서 보지 않고 색깔을 너무 진하게 넣지 말자."

-일본은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나.

"일본이 바뀌고 있다. 과거 일본의 전전(戰前) 세대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 일본의 우위에 대한 확신으로 한국은 한 수 아래니 봐줄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전후 세대가 주류가 된 지금은 '혐한', '반한'이 주류가 됐다. 옛날에는 없던 말이다. 지난해 일본 내 최대 부수(발행 부수 70만)를 자랑하는 월간종합지 '문예춘추'에 특집기사 3개가 실렸는데 '한국과 단교하자'는 내용이었다. 1년에 이런 반한 관련 특집이 세번이나 다뤄졌다. 그만큼 혐한, 반한 내용이 팔린다는 방증이다. 반한 기사를 실은 일본 주간지도 잘 팔린다.

이런 혐한, 반한 분위기가 정치적 이슈나 위안부 이슈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류'가 촉발했다. (이런 주장이 정설은 아님. 여전히 역사 갈등과 한국의 경제 급부상이 일본 내 혐한, 반한 분위기의 원인이 됐다는 주장이 다수임) 일본 여성들이 나이를 떠나 한국 문화에 푹 빠졌다. 아베 신조 총리에게 물어봤더니 부인 아케에 여사가 한국 팬인데 자기도 '제5공화국' 드라마를 다 봤다고 했다. 한번은 '겨울연가'에 출연한 한국 박용하씨와 아베 부부가 골프를 치고 셋이 사진을 찍었는데 아키에 여사가 중간에 있던 자기를 오려내고 두 사람이 찍은 것으로 짜집기 해놨다고 하더라. 일본 내에서 여성들이 한국 문화에 빠지니까 거꾸로 치고 올라온 게 혐한이다. 과거엔 주로 타블로이드 잡지에서만 혐한을 얘기했는데 이제는 너무 퍼져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우파 총리가 나와서 툭툭 치니까 혐한이 더욱 확대됐다. 

지금 일본 분위기는 한국에 대한 '체념'과 '불신'이다. 체념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된다. 불신은 한국에서 상황이 바뀌면 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이런 과정에서 불신이 점점 더 커져갔다. 사죄,배상,파기,사죄의 도돌이표 순환을 얼마나 더 반복해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협상할 때마다 한국 정부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말하지만 일본은 그 말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한국을 이해하는 사람들도 우리가 몇 번이나 사과해야하느냐고 물을 정도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혐한, 반한 정서를 가장 잘 이용하는 정치인이고 문제인정부는 반일 감정을 가장 잘 활용하는 정부라서 한일관계가 매우 힘들다. 잘 될수 없는 구조다. 

결론적으로 한국과 일본, 모두 역사의 포로가 되어 있다. 역사의 포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이런 상황을 타개해나가기가 무척 어렵다. 한일 문제는 다층적이고 다차원적이기 때문에 역사는 역사대로 해결하되, 경제나 사회, 문화같은 다른 이슈들에서는 협력을 해나가야 한다."

-스가 시대의 한일 관계는 변화할 수 있나.

"스가 총리가 역대 최장 관방장관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 관방장관은 사실상 넘버2다. 우리나라로 보면 대통령 비서실장, 국정원장,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청와대 대변인 역할을 동시에 한다. 외교를 포함해 모든 정보는 관방장관을 통해 총리에게 전달된다. 관방장관은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5시 두번씩 브리핑을 한다. 이슈가 없어도 한다. 일본의 시스템이 그렇다. 브리핑 도중 말 한마디 잘못하면 정권이 끝장날 수도 있다. 이런 관방장관을 7년 넘게 한 스가 총리는 한일 관계를 깨알같이 알고 있다. 

스가 총리는 (한국 대법원 판결로 한일의 핵심 현안으로 등장한) 강제 징용 문제는 1965년 수교할 때 한일 청구권 조약을 통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생각한다. 이 것을 바꾸면 국제법 위반이기 때문에 한국은 신뢰할 수 없는 나라라고 이야기해왔다. 스가 총리는 취임 연설에서 미일 동맹을 중시하고 중러 양국은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북한과는 납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언급했는데 한국은 언급도 안했다. 스가 총리가 한국을 무시했다기보다는 한국과의 문제를 풀고싶은 속마음이 언급을 안하는 것으로 표출됐다고 본다. 한국과의 문제가 너무 민감하기 때문에 꺼내지 않은 것이다. 한국은 (박근혜정부가 일본과 맺은)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깨버렸다. 그런데 깨는 것까지만 하고 그 다음은 없다. 징용문제도 마찬가지다. 한국 대법원 입장을 존중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상태다. 앞으로 갈 수도, 뒤로 갈 수도 없는 꼴이다. 이걸 풀려면 정치적 리스크를 걸어야 하는데 우리 정부가 이걸 시도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어정쩡하게 가는 상태가 계속 될 것이다."

-한일 관계의 출구는 있는가.

"스가 총리와 뭘 하고 싶으면 다음달 초가 지나기 전에 뭔가를 던져줘야 한다. 스가가 총리됐을 때 지지율이 74%였다. 하지만 지지율은 계속 떨어질 것이다. 총리가 취임할 때 70%대 지지율을 보여도 2,3개월만 지나가면 50%대로 내려온다. 30%대로 내려오면 위험 수위다. 20%대가 되면 슬슬 내려올 준비를 해야한다. 10%대가 되면 당장 그만둬야 한다. 아베 총리는 재직 시절 안보 문제로 2번 정도 위험 수위에 다다른 적이 있는데 리스크를 무릅쓰고 도박을 걸어서 살아났다. 스가 총리 지지율이 내려가기 전에 딜을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줘야 한다. 그런데 한일 이슈 자체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치고들어갈 것 같지는 않다. 문 대통령 스타일상 힘들다. 스가 정부는 1+3년 가능성이 높다. 경쟁자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우리도 내년가면 레임덕 오고 대선 다가오기 때문에 지금 밖에는 기회가 없다. 지금 못하면 이런 상태가 계속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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