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로봇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500만장 이상 팔린 비디오 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 주인공인 로봇 마커스는 일자리를 잃은 시민들의 질타와 야유를 받는다. 이 게임은 2038년 안드로이드 로봇들로 실업자들이 넘쳐나는 미국 디트로이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용직 노동에서부터 가사, 비서역할, 각종 컨설팅 등 세상 모든 직업군에 로봇들이 들어온 시대, 디트로이트 시민들은 자신의 잃자리를 앗아간 로봇들에게 울분을 토해낸다.

4차 산업혁명 시대, AI와 로봇과 공존하는 세상은 이제 게임이나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서비스직을 중심으로 무인화·자동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생산성은 올라갈 수 있지만 일자리 자체는 없어지거나 노동이 파편화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역행할 수 없는 흐름, 위협당하는 인간의 일자리

6일 IT업계와 학계에 따르면 기술 발전에 따른 ‘일자리 파괴’ 논쟁은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직물기계의 발명과 전기·전화의 발명, 석유의 발견 등 산업혁명이 미국과 유럽에서 진행될 때마다 일자리 파괴는 노동자들의 공분을 불렀다. 또 20세기 말 인터넷의 등장으로 3차 산업혁명이 도래해 컴퓨터·인터넷·온라인 기반의 정보화 사회가 출현했고 이제는 AI·로봇공학을 앞세운 4차 산업혁명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9년 고용 전망 보고서는 한국 근로자의 43.2%가 AI와 로봇이 주도하는 자동화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분석한다.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인공지능 및 로봇의 일자리 대체 가능성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직업종사자의 업무수행능력 중 12.5%는 AI와 로봇으로 대체 가능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비율은 2020년 41.3%, 2025년 70.6%까지 올라갈 것으로 전망됐다.

최근 코로나19의 팬데믹으로 이 같은 AI시대로의 전환은 가속화되고 있다. 임금 상승과 비대면 시대의 바람을 타고 키오스크를 비롯한 단순 노동 업무는 기계화 및 AI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탓이다. 과거 산업혁명이 인류의 역사와 삶을 바꿨듯이 AI의 발전은 이제 시대적 흐름이 됐다. 단순 노동을 비롯한 일부 서비스 등의 일자리는 당장 사라질 위기다. 과거 농업 분야, 제조업 분야가 차례대로 자동화 과정을 거쳤고, 코로나19와 함께 판매, 계산, 배달 등 서비스업까지 확산하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AI시대의 일자리 전환은 역행할 수 없는 트렌드라는 점이다. 정부의 일자리 정책이나 소비자 교육으로 변화할 수 없는 산업혁명과 같은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4차 산업혁명과 지방세제 및 자동화 등을 연구해온 윤상호 한국지방세연구원 지방재정연구실장은 “이 같은 AI시대로의 전환은 역행할 수 없는 트렌드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AI시대의 도래와 직업의 전환은 정부가 나서서 해결할 수 없는 시대적인 변화이고 트렌드”라며 “과거 산업화가 진행된 이후 현재까지 기술의 발전과 일자리와 관련한 논란은 꾸준히 제기된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AI와 로봇의 시대가 오는 것을 인정하고 일자리와 일자리 간 이동이 가능한 능력을 배양하고 AI를 인간의 대체재가 아닌 보완재로 규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AI를 통한 새로운 기회, 인간 중심의 AI로 극복한다

해결책은 인간 중심의 AI 윤리를 적립하고 AI산업을 비롯한 관련 산업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다. AI를 인간과 공존할 수 있는 동반자로 바라봐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를 위해 최근 산업계와 학계를 중심으로 태동하는 AI산업을 위한 윤리 준칙 등이 제정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AI 개발사인 네이버는 서울대와 협력해 네이버 AI 윤리 준칙을 만들고 준수를 다짐했다. 네이버의 AI 윤리 준칙은 모든 구성원이 AI 개발과 이용에서 준수해야 하는 원칙으로 △사람을 위한 AI 개발 △다양성의 존중 △합리적인 설명과 편리성의 조화 △안전을 고려한 서비스 설계 △프라이버시 보호와 정보 보안의 총 5개 조항으로 구성됐다. 네이버는 학계와의 협업을 통해 AI의 사회적 요구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네이버가 AI를 바라보는 관점과 기업 철학도 고려해 준칙을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네이버의 송대섭 책임리더(이사)는 “네이버 AI 윤리 준칙을 수립해 발표하는 것은 이 프로젝트의 시작 단계일 뿐”이라며 “앞으로도 학계와 계속 협업하고 현장에서의 적용 사례를 축적하며 지속적으로 실천 가능한 방향으로 준칙을 더욱 구체화하고 개선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어 “인간을 위한 AI를 바탕으로 보다 윤리준칙을 구체화해서 인간과 AI가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존할 수 있는 환경과 산업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부도 AI윤리 정립에 나서며 AI와 사람이 함께하는 시대를 대비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사람 중심의 인공지능 시대 실현’을 목표로 30개 주요 과제로 구성된 인공지능 법·제도·규제 로드맵을 발표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AI기술 확산으로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융합되면서 AI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경우도 늘었다”며 “로드맵으로 AI의 법적 근거를 명확히 해 개인의 권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세계경제포럼(WEF)은 지난해 낸 ‘미래의 일 보고서’에서 인공지능 활용이 보편화되는 이른바 ‘로봇 경제’의 출현으로 2025년까지 세계에서 창출될 일자리는 1억3300만개이고, 로봇에 의해 대체될 일자리는 그 절반 수준인 7500만개로 예상했다. 로봇이 기존 노동을 대체하기도 하지만, 새롭고 더 복잡한 노동을 만들어내면서 전체 일자리는 늘어난다는 것이다.

전창배 한국인공지능윤리협회 이사장은 고객상담, 영업이나 서비스직, 교육훈련 등 인간만이 가진 복잡한 감성과 정서, 직관을 다루는 업무 분야의 경우 일자리가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그는 “AI는 인간을 능가해선 안 되며 정부, 기업, 민간 모두 인간을 위한 AI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정부는 인간을 위한 윤리적인 AI의 개발과 발전을 위한 지원을, 기업은 윤리적이고 안전한 AI의 개발을, 민간은 정부와 기업의 중간자 입장에서 본질적으로 인간과 인류를 위한 AI를 사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건호 기자 scoop3126@segye.com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단기 성과보다 미래를 내다본 일자리 확대 정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미래 일자리 수요에 맞출 수 있도록 직업훈련에 초점을 맞춘 노동정책을 펴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취업지표 향상에 영향을 미치는 직접일자리에만 예산을 집중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6일 고용노동부와 재계 등에 따르면 올해 정부가 예상하는 일자리 예산은 모두 30조5481억원으로 지난해보다 19.8% 늘어났다. 고용장려금은 6조4950억원에서 8조4450억원으로 30.0% 많아졌고, 2조8587억원이 투입됐던 직접일자리 예산은 올해 3조1630억원으로 10.6% 증가했다. 하지만 직업훈련 예산은 1.2% 늘어나는 데 그쳤다. 직업훈련 관련 예산은 지난해 2조2434억원에서 올해 2조2709억원으로 275억원 많아진 게 전부다. 고용부가 한국판 뉴딜 사업의 일환으로 ‘K-디지털트레이닝’을 운영하며 디지털·신기술 분야 실무형 인재 양성에 힘 쏟고 있지만 실제 큰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노동계와 재계에서는 정부의 지원이 직접일자리 확대에 쏠린 건 문제라고 지적한다. 신산업이 등장하면서 기존에 없던 새로운 일자리 수요가 늘고 있지만 정부의 정책은 여기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산만 봐도 취업지원보다 직접일자리에 무게가 쏠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2017년 노동시장정책 유형별 공공지출을 살펴본 결과 우리나라는 GDP의 0.16%를 직접일자리 예산으로 투입했다. 이는 한국노동연구원이 분석한 16개 나라 중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16개 국가의 평균은 0.06%다. 미국과 스위스, 스웨덴, 스페인, 노르웨이, 덴마크, 일본, 호주 등이 직접일자리 확대를 위해 GDP의 0.01%도 투입하지 않은 것과 비교된다. 직업훈련은 반대였다. 덴마크는 GDP의 0.46%를 사용했고 프랑스와 독일은 각각 0.28%와 0.18%를 투입했다. 반면 한국은 직업훈련에 GDP의 0.03%를 지원했다. 이는 16개 국가의 평균인 0.12%보다 낮은 수치다.

김용춘 한국경제연구원 고용팀장은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앱 개발자나 유튜브 크리에이터 등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진 것처럼 역사적으로 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일자리 시장 개방으로 이어져 왔다”며 “새로운 산업이 등장했을 때 일자리와 산업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스매치를 메워줄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필재 기자 rush@segye.com

#1. 사업장을 운영하던 A씨는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확진됐다. 몇 주 뒤 완치해 퇴원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한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직후에는 탈모, 가슴 통 증, 체력 저하 등에 시달렸고, 수개월이 지난 지금도 관절통, 근육통 등이 간헐적으로 찾아온다고 했다. 사업장은 동네에 소문이 나면서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A씨는 “코로나19 후유증을 지속해서 겪고 있다”며 “아르바이트로 먹고사는 등 여전히 생계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2. B씨는 코로나19에 확진된 뒤 가정불화에 실업까지 겪어야 했다. 교회에 다니다 감염됐다는 그는, 주변에서 좋지 않게 보는 시선이 더 아팠다고 했다. B씨는 “11년 일하던 직장에서 꼬투리를 잡고, 잔소리를 심하게 해 관뒀다”며 “남편과 시댁도 좋은 소리를 하지 않아 너무 힘들었다”고 전했다.


코로나19 사태는 확진자든 비확진자든 심신의 건강이나 경제활동 등 다방면에 큰 상처를 남긴다. 확진자들은 신체적 후유증을 겪는 것은 물론, 직간접적인 눈총에 시달리거나 실업 등 경제적 타격도 입는다. 이를 지켜보는 비확진자들도 혹시 모를 불안감을 안고 산다. 사회 전반에 ‘코로나 우울’이 번지는 이유다. 우울한 분위기를 해소하는 것은 코로나19 이후 일상 회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코로나19 확진 후 후유증·실업 고통

21일 국립중앙의료원과 중앙방역대책본부에 따르면 코로나19 회복 환자 40명의 후유증을 조사한 결과 피로감(43%)과 운동 시 호흡곤란(35%), 탈모(23%), 가슴 답답함(15%), 두통(10%) 등을 호소했다. 정신과적 후유증으로는 우울감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이 나타났다.

C씨도 코로나19에서 완치했지만 일상을 회복하지 못한 사람 중 하나다. 일단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없어 물리치료를 받고 있고, 아직 냄새를 잘 맡지 못한다. 코로나19로 남편을 잃은 슬픔은 그를 더욱 괴롭힌다. C씨는 “남편이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났다”며 “당시만 생각하면 안타깝고, 원망스럽고 그렇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고 말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코로나19 감염을 이유로 해고되기도 한다. 김웅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해 건강보험관리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코로나19 확진 이후 직장가입 상실 현황’을 살펴보면 지난해 2월 1일부터 9월 23일까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아 진료비 승인을 받은 2만3584명 중 직장보험 가입자(6635명)의 19.7%인 1304명이 퇴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대기업 임원인 D씨는 “임원이 코로나19에 걸리면 방역에 철저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줘 곧바로 집에 가야 할 수 있기에 더 많이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며 “손 잘 씻고, 체온 자주 측정하고, 꼭 KF94 마스크를 쓰는 등 조심하고 있다”고 전했다.

◆‘코로나 우울’ 확산…마음건강 돌봐야

코로나19에 감염되면 피해가 크다 보니, 걸리지 않은 사람들도 두려움에 시달린다.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건강은 악화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가 조사한 ‘코로나19로 인한 정신건강실태’를 보면 지난해 3월 조사에서 5.1점(27점 만점)이던 우울 점수는 5월 5.12점, 9월 5.86점, 12월 5.52점으로 높아졌다. 2018년 지역사회건강조사에서 나타난 우울 점수 2.34점보다 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우울감으로 인해 피로 0.99점, 흥미와 즐거움 없음 0.87점, 수면문제 0.83점 등의 문제가 드러났다.

10점 이상일 때 분류되는 우울 위험군도 5월 18.57%, 9월 22.1%, 12월 19.97%로 조사됐다. 조사 대상 응답자 중 자살 생각을 했다는 비율은 3월 9.66%에서 12월 13.43%로 급증했다. 특히 활동이 많은 19∼29세 연령에서 상승폭이 컸다.

코로나19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사회의 노력이 필요하다.

사업장이 코로나19 감염 이력을 이유로 인사상 불이익을 주거나, 재택근무, 연차사용, 퇴사 등을 강요하는 것은 근로기준법 위반이다. 정부는 근로자 보호에 힘써야 한다.

심리 지원도 있어야 한다. 정부는 전국 권역별로 트라우마센터를 설치해 심리 치유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했다. 코로나19 후유증은 선진국 사례와 후유증·격리해제 후 치료비 지원대상 및 규모, 재정 영향, 다른 감염병과의 형평성 등을 고려해 지원대책을 고민하고 있다.

‘코로나 우울’ 극복을 위해서는 일상을 유지하면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백종우 중앙자살예방센터장(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코로나19가 준 선물이 있다면 시간”이라며 “쓸데없는 모임이나 회식으로 낭비했던 시간을 찾았다고 생각하면 좋다.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못 했던 것들을 지금 해보라”고 권했다. 이어 “코로나19로 직장을 잃었거나 외식업, 여행업 종사자들 주변에 힘든 사람이 많다”며 “정부가 지원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이라면 (주저하지 말고) 지원요청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英, 완치 후에도 ‘후유증 클리닉’서 치료·재활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감염병은 완치자들에게도 신체·정신적 후유증, 트라우마를 남긴다. 이 때문에 해외 주요국들은 지역사회 등과 연계한 사후관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최근 백신 접종에 속도를 내 코로나19와의 싸움에서 전세 역전에 성공한 영국이 비교적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무엇보다 병원을 퇴원한 뒤 집에서도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돕고 있다.

영국 보건부는 지난해 8월 재가 서비스가 필요한 퇴원자들을 위해 5억8800만파운드(약 9152억원)를 투입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의 국민건강보험 격인 국민보건서비스(NHS) 심사를 거쳐 최장 6주간 관련 비용을 지원한다. 전체 퇴원자 45%가 지원 대상이다. 나머지 절반은 자원봉사자와 지역사회 도움을 받아 회복할 수 있게 한다.

영국 NHS는 ‘롱 코비드’(Long Covid)로 불리는 코로나19 장기 후유증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태스크포스(TF)를 꾸렸다. 웹사이트엔 장기 후유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찾아갈 수 있는 영국 전역의 클리닉 69곳 목록을 정리해놨다. 이 클리닉에선 의사와 간호사,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의 신체·정신 평가를 기반으로 한 치료와 재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미국도 코로나19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전문 클리닉이 설치돼 있다. 특히 확진자나 완치자를 위한 풀뿌리 단체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난 점을 주목할 만하다. 생존자 군단(Survivor Corps), 보디 폴리틱(Body Politic)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단체는 코로나19에 걸려 힘들었던 점이나 코로나19를 이겨낸 경험 등을 공유하고, 온라인으로 국제적 연대도 도모한다. 영국에도 코로나19 후유증을 겪는 당사자들이 만든 롱 코비드 서포트(Long Covid Support)란 단체가 있다.

인구대국 인도는 지난해 9월 마련한 ‘포스트 코로나19 관리 프로토콜’에 따라 사후관리를 하고 있다. 퇴원 뒤 7일 이내에 반드시 병원을 찾거나 전화 상담을 받아야 한다.

캐나다는 코로나19 완치자뿐 아니라 사태 장기화에 따른 스트레스나 우울감 등 전 국민의 정신건강 관리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웰니스(Wellness, 웰빙·행복·건강 합성어) 투게더 캐나다’란 포털사이트를 통해 자가 진단, 온라인 코칭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24시간 동안 매일 전문 상담사와 전화나 문자 무료 상담이 가능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 후유증이 전 세계 보건 시스템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고 퇴원자나 급성 증상이 호전된 사람들의 임상 데이터를 수집하는 중이다. WHO의 재닛 디아즈 박사는 지난 2월 “롱 코비드로도 불리는 포스트 코로나19 증상은 급성 증상이 있은 뒤 한 달, 심지어는 6개월 뒤에 나타날 수 있다”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진경·정필재·박유빈·박진영 기자 ljin@segye.com

서울 강남구에 사는 한모(29)씨는 최근 3년3개월간 다닌 회사를 과감하게 그만뒀다. 남들이 부러워하던 금융회사였지만 한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성공한 재테크로 확 불어난 재산 덕분에 부담 없이 퇴사할 수 있었다. 한씨는 ‘하이 리스크-로 리턴’이라는 소신 아래 그동안 월급 대부분을 예·적금보다는 주식과 암호화폐 등 위험성 자산에 투자했다. 한씨는 “지난해 1월 보유주식과 암호화폐 계좌잔고가 1억3000만원 정도였는데 코로나19를 거치면서 21억원으로 크게 불어났다”면서 “이제는 지인들과 투자회사를 차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코로나 디바이드’(Corona Divide).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사회의 양극화가 심해지는 현상을 일컫는 신조어다. 코로나19는 사회 전반을 변화시켰지만, 그 변화 양상을 체감하는 정도는 계층에 따라 다르다. 영세 자영업자나 소상공인, 고용 형태가 불안한 비정규직들에겐 코로나19의 피해가 더 치명적이다. 반면 기존에 일정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이들은 소득이나 생활 수준이 변함이 없거나 오히려 더 불어나는 기회가 됐다.

◆코로나19는 빈부격차의 ‘부스터’

코로나19로 인해 실물경제는 한순간에 붕괴됐다. 한국은행은 코로나19의 충격 최소화를 목표로 시중에 풍부한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해 지난해 3월과 5월 두 차례 기준금리를 낮췄고, 기준금리는 1.25%에서 0.50%까지 낮아졌다. 저금리 속에 풍부해진 유동성은 자산시장의 버블을 키웠다. 버블에 올라탈 수 있는 이들은 자산가나 안정적인 고용을 누리는 기득권층이었다. 한씨도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해 4월에는 보유 주식과 암호화폐 가치 폭락으로 지옥을 맛봤지만 이를 반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두둑한 월급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금융회사에 다녔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취업준비생이나 비정규직 일자리로 하루를 연명하는 이들에게 코로나19는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2년째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김모(28)씨는 “코로나19로 인해 기업의 채용은 더욱 줄어들면서 취업준비생들은 더욱 힘들어졌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식당이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이 자리마저 경쟁이 치열해졌다. 2020년은 내게 ‘산다’라기보다 ‘버틴다’라는 단어로 기억될 한 해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빈부격차는 통계 지표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순자산 지니계수는 3월 말 기준 0.602이었다. 순자산은 자산에서 부채를 뺀 개념으로, 지니계수는 ‘1’에 가까워질수록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간 격차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2013년 0.605를 기록한 이후 2017년까지 떨어지던 순자산 지니계수는 2018년부터 다시 오르기 시작했고, 코로나19가 발발한 지난해 다시 0.6을 넘어섰다.

상위 20%(5분위) 가구의 평균 순자산을 하위 20%(1분위)의 평균 순자산으로 나눈 값인 ‘순자산 5분위 배율’도 2017년 99.65배에서 지난해 166.64배로 크게 뛰었다. 지난해 3월 5분위 가구의 평균 순자산은 11억2481만원으로 1분위 가구(675만원)보다 11억1000만원 이상 많았다. 이러한 통계지표는 올해 더욱 악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산업 간 격차도 커졌다

코로나19에 따라 업종 간 경기침체 편차도 다르게 나타났다. 정보기술(IT) 업종 등 언택트 관련 산업은 성장가도를 달리지만 중소상공인 비중이 높은 음식숙박업과 여객운송업 등은 심각한 침체를 겪고 있다.

한국은행경제통계시스템(ECOS)에 따르면 지난해 2분기 산업별 부가가치 성장률은 문화서비스·운수업에서 전년 동기 대비 20% 줄어든 반면 금융보험업과 정보기술 등은 성장세를 유지했다. 제조업은 전체 성장률이 5%가량 감소했다. 그러나 제조업 세부업종별로 보면 언택트 산업으로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반도체 부문의 생산은 23%가량 급증했다.

국내 IT 기업들은 코로나19로 비대면 서비스가 각광받으면서 더욱 위상이 높아졌다.

카카오와 엔씨소프트, 네이버는 폭발적인 성장에 힘입어 지난해 임직원 평균 연봉 ‘1억원 클럽’에 처음 합류했다. 카카오의 직원 평균 연봉은 1억800만원으로 전년 대비 35%가량 급증했다. 네이버와 엔씨소프트의 평균 연봉은 각각 1억248만원과 1억550만원으로 각각 20%, 22% 상승했다.

반면 비대면 서비스 도입이 쉽지 않은 중소상공인의 어려움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산업연구원 강두용 선임연구위원은 “감염병 위협의 영향이 가장 큰 대면형 서비스 업종은 영세자영업자의 비율이 높아 이번 위기에서 영세자영업 종사자와 같은 상대적 취약계층이 큰 타격을 받는다”며 “부문 간 침체의 편차가 크기 때문에 정부가 정책 대응을 할 때 전방위적 보편 지원보다는 피해가 상대적으로 큰 취약 계층에 지원을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어 “경기침체 속 호황을 누리는 업체가 있다는 것은 신규 고용의 잠재 수요가 있다는 의미인 만큼 고용유지 지원금과 같은 해고억제 정책뿐만 아니라 고용확대를 유인하는 채용촉진 정책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교육 격차 부추기는 비대면 교육

코로나19 여파로 교육의 중심추가 ‘비대면’으로 이동하면서 교육격차도 더 커지고 있다. 공교육이 원격수업 위주로 진행되며 가정환경이 학습 수준에 미치는 영향은 이전보다 커졌다. 학생들이 교실이라는 동일한 환경에서 수업을 듣던 때와 달리 각자 집에서 온라인 학습을 하며 디지털 설비나 돌봄 인력 유무 등이 중요한 변수로 떠오른 탓이다.

실제로 비싼 주거지역에 거주하는 경제력이 좋은 집안 학생일수록 학습 시간이 길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지난 1월 학술지 ‘공간과 사회’에 게재된 ‘코로나19 이후 거주환경의 차이가 초등학생의 학습, 게임, 놀이 시간에 미치는 영향 분석’ 논문에 따르면 주택 가격이 높은 지역 학생일수록 원격수업에 들이는 시간이 더 긴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7~8월 경기 부천 지역 초등학교 3곳의 학생 44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주변 주택 시세가 평당 1410만원인 A초등학교 학생은 하루 평균 155분을 원격수업에 할애했지만, 주변 주택 시세가 989만원인 B초등학교는 127분, 주변 주택 시세가 평당 710만원인 C초등학교는 83분을 원격수업에 투자했다. 반대로 하루 중 게임을 하는 데 쓰는 시간은 주변 주택 시세가 높은 지역 학생일수록 적었다.

사교육비 지출 실태 조사에서도 교육격차 심화가 드러난다. 지난 9일 교육부와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초·중·고교 사교육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교육비 총액은 9조3000억원으로 전년도 10조5000억원보다 11.8% 줄었고 1인당 평균 사교육비 역시 32만2000원에서 28만9000원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사교육을 받은 학생들로 범위를 좁힐 경우 월평균 사교육비는 43만4000원으로 전년도(43만3000원) 대비 0.3% 늘었다.

김경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등교수업이 줄면 가용 시간이 늘어나 경제력이 있는 집안 학생들은 더 많은 사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에 반해 저소득층 학생은 제대로 돌봐주는 사람도 없이 비대면 수업에만 의존하게 되니 학습의 질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최소한 디지털 환경 격차라도 줄여주기 위해 공공도서관 등에 더 투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남정훈·이우중·남혜정·박지원 기자 che@segye.com

직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의 취업 사다리가 사라지거나 취약해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경기 불황이 심화한 데다 섣부른 현장실습 제도의 변화 등이 고졸 일자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또 임금과 직장 내 차별 등 대졸과 고졸 계층 간 격차가 커지면서 직업계고 학생들이 취업보다 진학을 선택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직업계고 졸업생, 취업보다 대학 진학에 발길 돌려

23일 교육계에 따르면 지난해 특성화고 461개교와 마이스터교 45개교, 일반고 직업반 70개고를 포함한 전국 576개 직업계고 졸업생 8만9998명 중 2만4938명만 직장을 얻는 데 성공했다. 졸업자 취업률은 27.7%에 불과했다. 이 비율은 2009년 16.7%에서 2017년 50.6%로 꾸준히 상승한 뒤 하락세로 돌아섰다. 반면 직업계고 학생들의 대학 진학률은 꾸준히 높아졌다. 지난해 대학 진학을 선택한 학생은 취업자보다 많은 3만8215명이었다. 비율로 따지면 졸업자 중 42.5%가 대학을 선택했다. 취업자보다 14.8%포인트나 높다.

직업계고는 고졸 학생들의 취업을 지원할 목적으로 설립된 만큼 일자리 미스매치 해소와 청년실업 문제 해결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됐다. 예컨대 특수목적고에 속하는 마이스터고도 졸업 이후 우수 기업 취업을 목적으로 설립된 산업수요 맞춤형 고교다. 하지만 취업률이 낮아지고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직업계고 졸업생들이 대학을 선택하는 이유는 우선 오랜 경기 침체와 다닐 만한 직장의 취업 문턱이 높아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재계에서는 특히 문재인정부 들어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등 사업체의 경영 부담을 가중 시킨 것도 고졸 채용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고졸 채용 시장의 한 축인 중소기업 현장만 해도 매출은 제자리인데 실습학생의 교육비용과 정규직 채용 후 급여를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서 최저임금이 2018년 16.4%, 2019년 10.9%나 오르는 등 채용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기술인력을 육성하자는 정부의 취지에는 동감하지만 최저임금이 급격하게 인상되면서 고졸 신입에게 줘야 할 급여가 부담스러운 수준까지 높아졌다”며 “정규직 청년을 고용하면 평생 책임져야 하는데, 정부는 2∼3년 급여 일부만 지원해주고 있어 기업 입장에서는 채용할 엄두가 안 난다”고 말했다.

실습형 현장학습이 학습형으로 전환된 이후 기업에서 채용을 줄였다는 평가도 나온다. 보통 현장학습은 채용으로 이어져 왔다. 정부는 2017년 11월 제주도에서 현장실습생 이민호군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뒤 현장실습 제도를 전면 개편했다. 복잡하고 깐깐한 현장 점검이 늘었고 현장실습에 참여하는 절차도 까다로워졌다. 그 결과, 2016년 6만16명이던 현장실습 참여 학생은 2019년 2만2479명으로 줄었다.

◆학력 차별 여전한 기업문화도 문제

학력에 따른 처우 등의 차별이 여전한 기업문화도 직업계고 졸업생이 대학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 원인으로 지목된다. 최서현 전국특성화고졸업생노조 실천단장은 “어디를 가나 인력을 정리할 때 고졸부터 자른다고 얘기를 한다”며 “똑같은 직무를 하더라도 고졸자와 대졸자의 월급에 차이가 나고 승진과 승급 체계가 다른 경우도 많다”고 토로했다. 실제 고졸과 대졸의 평균 임금 차이는 벌어지고 있다. 2015년 정규직 기준 고졸과 대졸의 월급 차이는 98만2000원이었지만 2019년에는 104만9000원으로 늘어났다.

지방의 한 업체에서 생산직으로 근무했던 백모(24)씨는 “마이스터고 졸업과 동시에 취업에 성공했지만 군대 문제로 핀잔을 받았고, 신입사원 회식 땐 ‘애들은 오지 말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며 “군 전역 후에 기능대학에 입학했고 졸업 후 취업에 다시 도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낮아진 대학 문턱도 영향을 미쳤다. 임성호 종로학원하늘교육 대표는 “대학에서 직업계고 학생들을 정원외로 선발해 같은 조건의 학생들끼리 경쟁하는 데다가 선택과목도 직업탐구여서 일반계 고등학생들보다 성적을 내기 유리하다”며 “내신 관리만 어느 정도 돼 있다면 수능에서 6∼7등급을 받아도 중위권 대학 이상은 충분히 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취업이 어려운 대졸자들이 소위 ‘하향취업’을 하는 바람에 직업계고 졸업자들의 취업률에 부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해석도 나온다. 하지만 한국교육개발원은 그럴 가능성이 작다고 분석했다.

박근영 교육개발원 교육통계센터소장은 “직업계고 학생들은 특정 기술과 관련된 취업을 하는 경우가 많고 대졸자들의 하향취업은 전문지식이나 기술과 상관없이 누구나 진입할 수 있는 직종에서 다수 발생하고 있다”며 “구직시장에서 대졸자와 직업계고 졸업생이 겹치는 부분이 크지 않기 때문에 직업계고 학생들의 취업률에 미치는 영향 역시 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민관, 취업지원 협력체계 구축… 기업문화 개선해야

일자리 미스매치와 청년실업 문제 해소를 위해 등장한 직업계 고등학교가 제 역할을 하게 할 방법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정부와 민간의 취업지원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고졸 근로자에 대한 차별적 기업문화와 사회적 인식개선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23일 교육계에 따르면 정확한 직업계 고등학교 학생 관련 통계는 지난해부터 작성됐다. 교육부가 지난해 국가승인통계로 전환하면서 직업계고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는 데 필요한 정확한 통계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그 전에 고졸 취업률은 일선 교사들이 직접 수기로 작성한 통계를 교육부가 취합한 형태였다. 일선 학교에서는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취업 약정서를 받아만 와도 취업으로 구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교육부 관계자는 “그동안 실제 졸업생의 취업 여부 검증이 어려웠다”며 “2017년 사회장관회의에서 공공데이터베이스(DB)를 활용한 방식으로 전국 직업계고 졸업자의 졸업 후 상황 조사체제를 개편하기로 결정됐고 이를 토대로 지난해 처음으로 통계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교육부는 통계 개편 중이던 2018년과 2019년 직업계고 학생들의 취업률을 공식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관계자는 “교육부와 인사처, 행정안전부 등 다양한 관계부처가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점검하는 체계가 미흡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직업계고 학생들의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가장 먼저 사회적 인식이 개선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고졸 취업의 성공사례를 적극 홍보하고, 직업계고를 졸업했어도 체계적인 커리어 관리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실제 그렇게 되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간관리자나 고위직으로 진출할 때 직업계고 출신이 유리천장에 직면하지 않도록 하는 등 노동시장에서 학력 위주 승진 관행 개선도 시급하다.

좋은 일자리는 기업에서 나오는 만큼 민간에게 고용을 장려할 ‘당근’을 제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재계 관계자는 “사회적으로 과잉학력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한 만큼 민간에 재정지원 강화가 필요하다”며 “특히 중소기업에서 신규인력 운용이 원활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 제공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필재 기자 rush@segye.com

지자체마다 공공병원 추진 활발
신·증축 통해 5000병상 추가 확보 계획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국고 지원 확대
부산·대전·광주·울산 등 설립 적극 나서
시설·장비 등 열악해 부정적 인식 팽배
기존 문제점 해결 없이는 확충에 한계
위기 때 거점병원 역할 못 하면 무의미
“공공의료 확대 신중 접근을” 목소리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을 계기로 공공의료 강화에 힘이 실리고 있다. 정부는 공공병원을 신·증축해 5000개 병상을 추가로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공공병원 신축 시 예비타당성(예타) 조사를 면제하고, 공공기관이 민간의료기관을 매입할 수 있도록 했다. 각 지방자치단체는 공공병원 설립을 적극 추진하고 나섰다. 공공의료 강화 움직임에 대해 내실 있는 추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공병원 예타 면제… 부산·대전·광주 등 설립 움직임

정부는 지난해 12월 공공의료체계 강화방안을 발표했다. 400병상 규모의 지방의료원을 2025년까지 20개 내외로 확충해 5000병상을 확보한다는 게 핵심이다.

10일 이 방안에 따르면, 진료권 내 적정 규모의 병원이 없는 지역을 중심으로 앞서 신축한 6곳을 포함해 의료원 최소 9곳을 신축한다. 이를 통해 약 3500개 병상을 늘린다. 11곳은 증축할 예정이다. 적십자병원을 비롯한 지방의료원은 전국 41곳, 병상은 1만450개다. 이 중 11곳을 증축해 2022년까지 병상을 약 1700개 추가한다. 이들 지방의료원은 감염병 및 중증응급의료의 대응이 가능하도록 설비와 시스템을 갖춘다.

정부는 공공병원을 신축할 때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하기로 했다. 지방의료원 신·증축에 대한 국고 지원도 도(특별자치도 포함)와 시·군·구에 한해 3년간 한시적으로 50%에서 60%로 확대하고, 165억원으로 설정된 의료원 신축 국고보조 상한액은 상향하기로 했다.

지난달에는 지방의료원을 신설, 매입 등의 방법으로 설립할 수 있도록 규정한 지방의료원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통과가 어려운 공공의료원 설립의 최대 관문인 예타 조사가 면제되자 공공병원 설립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부산시는 사하구 신평동 신평 지하철역 공영주차장 부지에 서부산의료원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경영난으로 파산한 민간병원을 인수해 동부권 공공병원으로 전환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대전시는 동구 용운동 17만8000㎡ 규모에 310여개 병상을 갖춘 대전의료원 설립을 진행하고 있다.

진주권에도 2013년 진주의료원 폐업 8년 만에 공공병원 설립이 본격화하고 있다. 경남도는 서부경남 공공병원 설립 후보지로 진주시 정촌면 옛 예하초등학교 일원을 선정했다. 오는 8월까지 설립 운영계획과 타당성 조사를 완료하고, 9월 사업계획서를 제출한다는 계획이다.

울산과 광주도 예타 조사 면제를 기대하며 공공병원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인천에서는 적자를 호소하는 인천적십자병원을 인수해 제2인천의료원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양적·질적 갖춰져야 공공의료 역할 수행”

전문가들은 공공의료를 강화하려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제대로 갖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공의료기관에는 취약계층과 취약지역에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건강보험 적용 진료를 통해 질병에 따라 환자에게 가장 적합한 표준진료를 민간병원에 제시하는 역할이 요구된다.

하지만 현재의 공공의료기관은 비효율적이고, 시설과 장비, 인력 상황도 열악해 의료의 질이 낮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이처럼 인력난과 적자경영 같은 기존 지방의료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병원 수만 늘린다고 공공의료가 확충되는 것은 아니다.

서울대 의과대학 의료관리학교실 김윤 교수는 “정부의 공공의료체계 강화방안은 관련 법과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며 “실행력을 담보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취약지 공공병원은 몇 개가 필요한지, 얼마의 예산을 들일지 책임성이 필요하다”며 “병상 수를 지금보다 늘려 공공의료가 전체 의료시스템 내에서 발언권을 가지고, 안전장치로 존재감이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전진한 정책국장은 “지방의료원 중 300병상 이상은 6개밖에 없다. 정부 계획에 따라 증·신축해도 300병상 이상 병원은 15개 정도에 그친다”며 “공공의료시스템 강화를 위해서는 양적으로 더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공공의료 확대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더구나 감염병 대응을 위해 추진되는 것이라면 공공병원 설립만이 답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연세대 의과대학 예방의학과 박은철 교수는 “감염병은 올림픽 주기와 비슷하게 발생한다. 감염병 대응을 이유로 공공병원을 만들게 되면 평창동계올림픽 후에 방치되는 슬로프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고 꼬집었다. 코로나19처럼 대규모 감염이 벌어질 경우 공공병원이 거점병원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일반병원과의 차별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민간병원은 악이고, 공공은 선이라는 프레임은 나쁘다”며 “중요한 것은 현재 있는 공공병원이라도 병원답게 만드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공공병원이라고 세금 더 쓰면서 코로나19 같은 사태가 터지면 그냥 일반병원처럼 운영되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진경·정진수 기자 ljin@segye.com

“지역 간 불균형… 의사 수 확대” vs “기존 인력 균형 배치가 우선”

공공의료 확충과 지역 의료 시스템 강화 논의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인력’ 문제다. 병원을 추가로 짓고, 병상을 확충해도 의료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 이를 위해 정부는 의사 수 확대가 필요하다고 본다. 반면 의료계는 기존 인력의 균형 배치가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코로나19 이후에도 의사 수 확대 문제는 정부와 의료계 간 핵심 이슈가 될 전망이다.

10일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지난해 8월 현재 35개 지방의료원 중 26곳은 의사 수가 부족한 것으로 조사됐다. 간호사가 부족한 공공의료원은 35개 중 34개에 달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2006년 이후 3058명으로 동결된 의대 정원을 늘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22년학년도부터 10년간 의대 정원을 400명씩 증원해 총 4000명을 양성하겠다는 것이다. 부족한 지역의사 인력을 확충해 수도권과 지역 간 의료 서비스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다.

지역 내 의료 이용률을 보면 2017년 기준 서울은 93%이지만, 경북은 23%이다. 치료 가능한 환자 사망률도 서울은 인구 10만명당 40.4명인데, 충북은 53.6명으로 차이가 있다. 소아외과, 역학조사관 등 필수·특수분야 인력은 더 부족하다.

시민사회단체도 의사 확충이 시급하다고 촉구한다. 민관 협의체인 ‘이용자 중심 의료혁신협의체’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은 전체 의사 숫자가 부족해 지역과 공공분야의 의료공백이 발생하는 만큼 의대 증원과 국립의전원 등 공공분야 인력 확충이 시급하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의료계는 의료인력·서비스의 지역 간 불균형 상황에 동의하면서도 의사 수 확대가 능사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의료계는 우리 국민의 1인당 의사 외래진료 횟수가 연간 16.6회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7.1회)의 2배가 넘는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의사 1인당 환자 진료 횟수도 OECD 평균(2181회)의 3배가 넘는 7080회다. 의료계는 지역, 전공, 병·의원 등이 불균형하게 배치된 것이 문제라며 의사들이 자발적으로 비수도권과 해당 분야에서 일하도록 더 높은 의료수가를 적용해주는 등의 유인책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의료계 파업으로 정부가 한발 물러서면서 의대 정원 확대 논의가 의정협의체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양측 의견 차로 평행선만 달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1차 회의 후 지금까지 7차례 회의를 했지만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복지부는 올해 최근 다시 의대 정원 확대 논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지만, 의료계는 코로나19 안정화 이후에 논의하자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진경 기자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