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마쓰 고분 (高松塚古墳) 가는 길. 일본 나라현 다카이치군 아스카 남쪽 산자락에 위치해 있다. 이 곳 풍광은 한국의 시골을 닮았다. 가야나 백제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자신들의 고향과 비슷한 장소를 찾아 정착한게 아닐까. 필자는 가보지 못했지만 인근에 도래인 백제 출신인 아지사주(阿智使主, 아치노오미)가 정착해 살던 히노쿠마 마을이 있다고 한다. 아지사주의 후손이 아야씨로 불리는 한(漢)씨들이다. 이 마을에 도래인 조상을 모신 오미아시(於美阿志) 신사도 있다. '일본서기'에는 "야마토노아야의 조상인 아지사주와 그 아들 도가사주가 17현의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귀화했다"고 적혀있다. 

 

1972년 발견된 다카마쓰 고분. 이 안에서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발견된 사신도, 별자리 그림, 여인 행렬도가 나왔다.

 

이 고분 아래 쪽에는 '성수(星宿)의 광장'이라는 이름의 별자리 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 별자리 공원은 고분 석실 천장에서 발견된 북극성과 28개의 별로 이뤄진 별자리를 그대로 본 딴 것이다. 1300여년 전 아스카 시대 사람들이 바라보았던 하늘의 모습이 지금도 그대로 현대인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다. 차이가 있다면 현대인보다는 아스카 사람들이 더 자주 하늘을 올려다 봤다는 사실이리라.

 

다카마쓰 고분에서 발견된 여인 군상 그림. 고분 석실의 북면에는 현무 그림이, 동서 벽면에는 여인 군상, 남자 군상, 해를 상징하는 삼족오(三足烏), 달을 상징하는 두꺼비, 그리고 청룡과 백호가 그려져있었다. 고분 석실 천장에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사방에 7개씩 28개의 별이 그려져있었다. 여인 군상의 복식은 고구려 쌍용총에 나오는 고구려식 주름치마인데 풍만한 얼굴과 손에 지물을 든 모습은 당나라식이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문화가 일본에서 섞이며 일본화하고 있는 시기에 조성된 고분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광물질 안료로 그린 이 그림은 발굴 당시 130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마치 어제 그린 것처럼 생생히 전해졌는데 공기에 노출되자 서서히 변색돼갔다. 일본 문화청은 2005년 석실을 해체해서 벽화를 고분 밖으로 꺼냈다.

 

일본 나라현 나라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동대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청동 대불이 모셔져 있다. 일본 화엄종의 대본산이다. 나라 공원에 인접해 있다. 공원에는 약 1천마리의 사슴이 방목되고 있다. 석가모니가 최초로 설법한 녹야원()을 연상시킨다.

남대문 뒤로 동대사 대불전 지붕이 보인다.

 

동대사의 금당. 불교 국가 건설을 꿈꾼 쇼무 천황이 741년 건립 조칙을 내린 것이 동대사의 시작이다.
동대사 금당의 대불. 백제 멸망후 일본으로 건너온 도래인들이 대불 주조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대사 기둥 모형이 실물 크기로 전시돼 있다.

 

일본 야마토 정권의 실세였던 소가노 우마코(550?~626)가 596년 세운 아스카사.

 

청동 불상으로 1196년 벼락을 맞은 아스카사가 불탈 때 얼굴 윗부분과 오른손 일부만 남을 정도로 크게 훼손됐다. 1825년 현재의 본당을 지을 때 이 불상도 복원됐다.

 

아스카사와 한국 수덕사의 자매결연 소식을 전하는 자료.

즈나멘스키 수도원에 있는 모역.  이 곳에 세르게이 페트로비치 트루베츠코이 공작(1790~1860)의 부인이 세 딸과 함께 묻혀있다. 트루베츠코이는 데카브리스트 쿠데타 당시 황실 근위대 장교였다. 쿠데타가 실패한 뒤 주동자 5명은 처형되고 나머지 106명은 시베리아로 유배됐다. 유배된 이들 중 기혼자는 18명이었다. 부인들은 기로에 섰다. 남편과 이혼한 뒤 재혼해서 귀족의 삶을 이어가느냐, 아니면 귀족 신분과 특권, 재산을 모두 박탈당한 채 시베리아로 가서 유배된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느냐. 11명의 부인들은 고난의 시베리아를 선택했다. 트루베츠코이의 부인 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 트루베츠카야가 가장 먼저 시베리아로 떠났다. 당시 26살이었다. 트루베츠카야는 시베리아에서 28년을 보낸 뒤 남편이 사면받기 두해 전 숨졌다. 지금도 그녀의 묘비에는 변치 않는 사랑을 다짐하는 신혼부부나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즈나멘스키 수도원. 러시아 제정 시절 발생한 데카브리스트 혁명가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된 뒤 죽어서 묻힌 곳이다. 

 

'카잔의 성모 성당'으로 불리는 카잔스키 성당. 러시아 정교회 건물로 붉은 색의 벽과 파란색 지붕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러시아에 보존중인 쇄빙선 가운데 가장 오래된 배. 1928년 내전 당시 백군의 대포에 맞아 침몰되었다가 인양됐다. 1991년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마리아 발콘스카야가 1825년 12월 데카브리스트 반란에 실패한 뒤 시베리아로 유배된 남편 세르게이 발콘스키 공작(1786~1856)을 돌보면서 살아간 집. 

 

이르쿠츠크주 청사 뒤편에 위치한 승리광장.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이 지역 출신 병사를 추모하기 위한 광장으로 매일 24시간 동안 불이 타오르고 있다. 당시 이르쿠츠크 출신 참전 용사는 20여만명이었고 이 중 5만여명이 전사했다. 참전 용사 대부분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사했다.

 

 

2018년 9월 오사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4박5일의 짧은 일본 문화탐방 기행을 위해서다. 첫 탐방은 오사카(大阪)와 나라(奈良), 교토(京都) 순으로 찾았다. 돌아올 때는 당시 일본을 강타한 태풍으로 오사카 간사이 공항이 폐쇄되는 바람에 나고야 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덕분에 당초 일정에 없던 나고야 지역 문화 유적도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오사카는 일본 전국시대의 패자(覇者)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거지였고 그의 거성이 남아있는 곳이다. 나라 일대는 옛 백제, 가야,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渡来人)들이 정착했던 곳이다. 지금은 다카마쓰 고분과 아스카사 정도의 유적이 도래인들의 솜씨와 아스카 시대의 편린을 전해줄뿐이다.

유홍준은 저서 '나의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에서 가야, 백제인이 일본으로 건너간 유래를 이렇게 설명했다.

"왜에 집단으로 건너간 한반도 도래인은 5세기 초 가야 사람들이었다. 삼국이 날카롭게 대립할 때 가야는 백제와도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러다 400년, 백제가 부추기는 통에 가야는 왜와 함께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서라벌 가까이까지 쳐들어오게에 이르렀다. 신라는 자신들이 오래전부터 고구려의 신민(臣民)이었음을 강조하며 고구려에 원군을 요청했다. 저쪽 동네 애들이 패를 지어 때리니 좀 도와 달라는 식이었다. 광개토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하고 낙동강 하구까지 쫓아가 가야와 왜를 섬멸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이때의 일을 '임나가라(任那伽羅)의 종발성(從拔城, 경남 김해로 추정)'까지 진격했다고 했다. 이후 금관가야는 쇠약해지고 여러 가야국들도 큰 타격을 입으면서 전기 가야연맹은 와해되고 말았다. 이때 김해 지역에 살던 많은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이민을 갔던 것이다. 가야 도래인들이 가져간 문명의 선물은 야철(冶鐵) 기술과 가야 도기였다. 이제 왜에서도 비로소 철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5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일본 열도 중부지역에 야철소가 퍼져나간다.(중략) 가야 도래인들은 가야 도기와 똑같은 질의 도기를 만들어 일본 도자사에서 일대 기술혁신을 이루었다. 이를 스에키(須惠器)라고 한다. '스에'는 '쇠'의 한자음을 빌려 표기한 것이다. (중략) 가야의 도래인들이 처음 스에키를 만든 곳은 가까운 아스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사카 남부 이즈미(和泉) 지역이다. (중략) 스에키는 김해 지역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가야와 왜는 여전히 친형제처럼 지냈다. 4세기 이래로 왜는 백제와도 아주 가깝게 지내서 형제나라 이상으로 친했다.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나게 된 배경에서도 그 친연관계를 볼 수 있으니, 왕손끼리 통혼을 할 정도였다. 왜는 끝까지 백제의 우방이었다. 4세기 중엽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년) 시절에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 박사는 왜에 말(馬)과 한자를 전해주었다.(중략) 왜에 간 왕인은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왜왕의 요청에 따라 신하들에게 경(經)과 사(史)를 가르쳤다. 왕인의 후손들은 후미노오비토(文首)라는 성씨를 하사받고 가까운 아스카에 살면서 공무 기록, 재정 출납, 징세 사무,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업무에 종사했다. 또 도래 씨족으로 전하는 아치키노후비토(阿直史)는 아직기의 후손이라 생각된다. 6세기까지 야마토 조정에서 한문을 해독하고 문장을 작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대부분이 도래인들이었다."

이들 도래인은 4세기초 형성된 일본 고대국가인 야마토(大和) 정권과 협력하면서 한반도에서 가져간 기술과 기능을 통해 일본 고대 국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은 야마토 정권부터 일본 천황의 전신인 오키미(大王)가 귀족 계급과 통치하는 권력 체제를 구축했다. 도래인들은 아스카 지역에서 모여살면서 건축과 토목, 제철, 양잠 기술과 예능 분야에서 활동했다. 농지 개간과 관개 사업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아스카 시대 명문가로 자리잡았다. 칼과 도자기, 비단, 마구, 출납이나 외교문서 등을 담당한 전문 직종도 도래인들이 담당했다. 특히 도래인으로 추정되는 소가씨(蘇我氏)는 6세기에 도래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유력 호족으로 성장해 쇼토쿠(聖德) 태자와 손잡고 아스카 시대를 이끌어갔다. 쇼토쿠 태자의 어머니도 소가씨였고 스이코 여왕의 어머니도 소가씨였다. 소가씨는 7세기 전반까지 4대에 걸쳐 야마토 정권의 대신을 지냈다. 710년 겐메이 천황(元明天皇)이 헤이조쿄(현재의 나라현)로 천도하면서 야마토 시대가 끝나고 나라 시대가 개막됐다. 나라 천도 이후 아스카 지역은 쇠락해갔다. 지금도 아스카 지역을 둘러보면 나지막한 야산과 마을의 풍경이 한국의 여늬 시골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고향을 떠난 도래인들이 왜 이 곳에 정착했는지 그 마음이 천년이 넘는 세월을 넘어 느껴진다.

 

 

일본 나라현 이코마군 이카루가정에 위치한 법륭사( 法隆寺). 일본어로 호류지(ほうりゅうじ). 성덕종의 총본산이다. 쇼토쿠 태자가 601년 지은 궁에서 연원한 사원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금당과 오중탑이 있다. 법륭사 건축물은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법륭사 남대문. 주차장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진입로 양편에는 한국의 산사처럼 곰솔로 조성돼 있다. 남대문은 본래 서대문을 지금으로부터 570여년 전인 무로마치 시대에 옮겨놓은 것이다. 원래 맞배지붕이었는데 옮기면서 팔작 지붕으로 개조됐다. 그래도 나라 시대의 목재가 사용됐다는 점 등이 고려돼 국보로 지정됐다.

 

 

남대문을 지나 중문으로 가는 길. 양측 담장 사이로 길이 나 있어 골목길을 걷는 듯한 분위기다. 양편에 스님들의 거처와 불사를 보는 사무소 등이 있다.

 

법륭사 담장들은 에도, 메이지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담장이 사다리꼴 형태다.

 

 

중문을 들어서면 일본 아스카 시대 건축을 대표하는 금당이 보인다. 고구려 출신 화가 담징이 벽화를 그렸다는 바로 그 금당이다. 필자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그렇게 배우고 외웠는데 지금은 논란이 있다. 유홍준은 저서 '나의문화유산답사지'에서 "담징이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채색, 지묵, 연자방아의 제작방법을 전했다는 시기는 610년이다. 법륭사가 불탄 것은 670년이니 그렸다 해도 이 작품은 아니다. 담징이 그렸다는 전설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일본에는 그렇게 전하지 않는다."고 썼다.

 

금당 안에는 청동석가삼존상이 있다. 622년 정월 쇼토쿠 태자와 태자비가 병으로 몸져 눕게되자 왕후와 왕자, 신하들이 이들이 완쾌할 수 있도록 기원하기 위해 석가상 제작을 도리 불사에게 명했다. 태자와 태자비는 그 해 2월 숨졌다. 석가삼존상은 623년 3월 완성됐다. 이 불상의 제작자는 도리 불사다. 그는 백제에서 건너온 도래인 후손으로 추정된다. 일본 미술사가들은 아스카 시대 불상을 도리 불사의 작품을 기점으로 도래 양식과 도리 양식으로 구분한다. 도리 불사라는 창조적 장인이 백제풍 불상을 답습하던 기존 불상과 다른 독창적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도래 양식은 뒤에 나오는 백제관음상이 대표적이다. 도리 양식은 도래 양식에 비해 불상의 얼굴이 직사각형으로 길다.

 

법륭사 대강당. 화재로 소실된 것을 헤이안 시대에 재건했다.

 

청동 등롱은 에도 시대인 1694년 5대 쇼군 츠나요시의 어머니인 케이쇼인이 시주한 것이다.

 

법륭사 목조 오중탑. 아스카 시대 건축미가 집약된 탑이다. 법륭사 경내 바닥은 하얀 모래가 깔려 있다. 오중탑 오른쪽으로 회랑이 보인다.

 

오중탑 내부 네 면에는 소조상이 있다. 동쪽면은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이 대화하는 장면, 서쪽면은 사리를 배분하는 장면, 남쪽면은 미륵하생 장면, 북쪽 면은 부처 열반 장면이다. 특히 북쪽 면의 소조에는 부처의 제자들이 오열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조각돼 있어 '우는 부처'라는 별칭이 붙어있다.

 

 

회랑. 아스카 시대 건물이다. 법륭사 서원 가람의 안팎을 이 회랑이 나누고 있지만 나무 창살이 닫힌 듯 열려 있다.

 

 

회랑을 거쳐서 서원 가람을 빠져나오면 성령원과 만난다. 원래 승방이었는데 가마쿠라 시대에 앞부분을 개조해 쇼토쿠 태자를 모시는 전각으로 만들었다. 안에는 쇼토쿠 태자상이 모셔져 있다.

 

멀리 오중탑과 금당이 보인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두 건축물의 지붕선이 붓칠하듯 그려져 있다. 관광객이 들어가고 있는 건물은 백제관음상(百濟觀音像)이 안치돼 있는 대보장전.

 

백제관음상

 

교신 스님이 숨진 쇼토쿠 태자를 그리워하며 739년 건립했다는 몽전. 쇼토쿠 태자가 이 곳에서 명상을 하던 도중 부처를 만났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몽전 감실에는 쇼토쿠 태자를 모델로 만들었다는 구세관음상이 봉안돼 있다. 구세관음상은 녹나무를 깎아 만든 아스카 시대의 대표적 불상이다. 특별 전시기간에만 일반에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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