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정부는 최근 「탈북자는 원칙적으로 북한에 송환한다」는 방침을 정부에 공식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탈북자는 「난민」이 아니므로 북한과 체결한 「월경자 송환협정」에 따라 북한에 넘긴다는 취지다. 탈북자 처리는 전적으로 중국 주권사항인 만큼 「제3자」인 한국정부는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의미도 내포된 것이다.정부는 이에 따라 더 이상 탈북자 송환건을 문제삼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동안 북한 체포조가 적발한 탈북자만 송환하는 등 나름대로 융통성을 보여온 중국정부를 자극해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국정부는 기본적으로 우리정부도 탈북자 문제에 책임을 져야 하며 특히 식량난으로 인한 탈북자는 남한정부가 식량을 지원해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정부는 3월 유엔 인권위원회에서도 탈북자건을 포함, 북한 인권문제는 거론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한다. 공연히 북한을 자극, 남북관계가 악화될 경우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설명이다. 그동안 국제기구를 통해 수없이 문제제기를 해왔지만 소득이 별로 없지 않았느냐, 북한정부가 국제기구의 솜방망이 압력에 도대체 눈썹 하나 까딱하는 나라냐는 등의 현실론을 펴고 있는 셈이다. 현상황에서는 남북관계 개선을 통한 해결책 이외에 달리 취할 방법이 없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다.

북한을 탈출해 정부의 품에 안긴 탈북자 수는 7백명이 넘는다. 굶주림이든 정치적 핍박이든 이런저런 이유로 북한 체포조의 눈을 피해 중국과 북한 접경지역에 떠돌고 있는 탈북자만도 수만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탈북자 문제에 관한한 정부는 속수무책의 상황만을 탓하고 있다. 중국정부의 통보에도 말한마디 하지 못하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趙南奎기자> 1999년 2월18일


윌리엄 페리 미 대북정책조정관 일행이 3박4일의 「역사적」 방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28일 밤. 한국 정부와 언론의 촉각은 페리 일행에게로 쏠렸다. 분단 이후 북한에 간 최고위급 미국 인사,미 대통령 특사 자격 등의 수식어를 넘어,페리 조정관의 방북 성과는 환반도의 장래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한국 정부는 이날 오후 주한 미대사관에 페리-김정일 면담 여부 등 주요 내용을 사전통보해 줄 것을 요청했고 언론도 비상대기했다. 그러나 방북 결과에 대해 다음날 오전까지 미국으로 부터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29일 한-미-일 3자협의회 때 종합 설명할텐데뭘 미리 알려하느냐는 투였다는 것이다. 결국 외교부 당국자들은 자정 넘어서까지 미국의 입만 바라보다 귀가해야 했다. 한 당국자는 『미국은 김정일 면담 여부만 단편적으로 공개될 경우 방북 성과가 왜곡될 수 있어 종합적으로 설명할 때까지 비공개하려는 것 같다』고 선의로 해석했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후 이 당국자의 선의는 무참히 배반당했다. 한국 시각으로 29일 새벽 2시쯤 제임스 루빈 미 국무부 대변인이 김정일 면담 무산을 기자들에게 공식 확인한 것이다. 페리 일행과 미 대사관은 『본국에 보고하기 전 한국 정부에 먼저 말해줄 수 는 없다』고 했으나,29일 페리 조정관 스스로 평양에서 돌아오자마자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윌리엄 코헨 국방장관 등에게 방북 결과를 브리핑했다고 밝혔다.

28일 밤의 상황은 미국의 정보독점 차원을 넘어 대북 협상이 북-미 구도로 이뤄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는 점을 미국은 알아야 할 것 같다.<조남규 정치부기자> 1999년 5월31일

洪淳瑛(홍순영)외교장관이 최근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 서해안 북방한계선(NLL),중국 탈북자 문제 등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노 코멘트」로 대응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논란의 소지가 있는 사안에 대한 질문에는 좀체 입을 떼려하지 않고 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침없이 소신을 피력해 온 洪장관의 「소신 외교」「줏대 외교」가 실종된 느낌이다.

지난 5월 윌리엄스버그 회의 기조연설 때 洪장관은 「한-미는 내년에 선거를 앞두고 있는 바,포용정책은 그 성과를 무한정 기다릴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야당의 거센 반발을 샀다. 『북한에 좋은 기회를 잃지 말라는 경고의 메세지』라는 洪장관의 해명에도 불구,남북관계를 내년 총선에 이용하려 한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한달 뒤 洪장관은 「서해안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북한과 협의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또 한차례 홍역을 치렀다. 당시에도 「NLL 남북 추후 협의」를 규정하고 있는 남북기본합의서 조항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洪장관의 해명은 들끓는 여론에 묻혔다.

이후 洪장관은 대 언론관계에서 다소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 미국을 향해 한국 외교 장관으론 처음으로 불평등 협정인 한-미 행정협정(SOFA)을 조기 개정하라고,주한 미대사관 등이 무상 점유하고 있는 한국 소유 건물을 반환하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었던 배경은 洪장관의 「소신」이었다. 일본에 대해서도 과거의 오명을 벗어던지고 동북아의 책임있는 나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평화헌법상의 의무를 지키라고 준엄히 얘기할 수 있었던 바탕 역시 洪장관의 꿋꿋한 소신이었다고 생각한다. 외교장관이라는 「엄숙한」 자리에서 소신껏 말하고 행동하는 洪장관의 모습이 보고싶다.<조남규 정치부기자> 1999년 9월4일

법원과 검찰이 최근 영장실질심사제(구속전 피의자심문) 운용과정에서 벌이고 있는 공방을 보면 정치판의 성명전을 방불케 한다.양측은 이 제도 시행 한달만인 지난 2월 영장실질심사 대상피의자 유치문제로 맞붙었다.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전까지 법원에 구인된 피의자 신병을 누가 유치해야 하느냐는 문제였다. 당시 양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책임을 떠넘기는 데 급급해했을 뿐 아무런 해결책도 마련하지 못했다.

또 지난 4월엔 대검 총무부가 「구속전피의자 심문제도에 관한 고찰」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영장 발부기준의 무원칙성을 비판하자 대법원이 공보관 명의의 서신으로 반격하고 대검 공보관이 맞받아친 「서신공방」이 벌어졌다. 언론기고 형식의 지상전도 펼쳐졌다.

서울지법 동부지원 윤남근판사가 지난 15일 모일간지에 『검찰이 청구한 영장을 법원이 대부분 발부,피의자가 사실상 인민재판을 받았다』는 취지의 기고문을 내자 서울지검 동부지청 허용진검사가 바로 그 면에 「윤판사 기고에 대한 반론」을 실었던 것.

뿐만 아니다. 검찰은 이날 대법원이 지난 13일 「과감한 법정구속을 통한 불구속재판 원칙의 구현」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한 데 대해 「법원의 법정구속방침의 문제점」이란 반박자료로 응수했다. 적어도 영장실질심사제에 관한 한 양측은 한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는 태세다.

물론 법원과 검찰이 쟁점사안에 대해 각자의 견해를 피력하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일이며 서로 다른 기관의 견해차는 불가피한 일이다. 양측이 영장실질심사제 도입취지인 「국민의 인권옹호」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의견을 수렴해나간다면 견해차는 오히려 이 제도의 정착을 앞당기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제도가 그토록 문제라면 법조인과 법학자,시민이 참가하는 공청회라도 열어 개선방향을 모색하는 게 합당한 처사다. 지금처럼 언론을 매개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하는 양측의 공방전은 국민은 물론 법원과 검찰에 조금도 득될 게 없다. 이 사회의 최고 엘리트집단이라는 법원과 검찰마저 제로섬게임을 펼치는 정치판을 닮아서야 되겠는가.  조남규 기자  1997년 5월23일

7일 오전 8시20분 대한항공 추락사건 희생자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괌 퍼시픽스타호텔 차모로 볼룸.희생자 유족들 사이로 칼 구티에레스 괌 주지사(56)가 들어섰다. 그가 구조작업과 시체발굴 현황을 설명한 뒤 『가톨릭 신자로서 모두를 위해 기도하겠다. 서로 위로하며 고통을 이기자』고 말하자 곳곳에서 흐느낌이 터져나왔다. 그의 눈도 충혈됐다.

그는 사고직후 맨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6일 오전 2시쯤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손전등을 들고 수풀을 헤치며 현장을 찾아갔다. 그와 동행한 사람은 비서 2명과 경찰관 1명이었다. 그는 폭파위험을 경고하며 만류하는 수행비서의 충고를 뒤로 한채 화염에 휩싸인 기체에 다가가 한국계인 마쓰다 리카양(11)등 4명을 구했다. 군부대의 구조반이 도착할 때까지 구조작업을 벌인 후 파김치가 됐지만 병원방문,군부대 및 연방정부와의 공조체제 구축,보도진 사고현장 방문 안내,브리핑 등으로 밤늦도록 뛰어 다녔다. TV를 통해 교민 피해자 유족들을 위로하고 부하들에게 조속한 사고수습을 독려했다.

한인회 홍승일(50) 부회장은 『지난 해 연말 교민들이 자체방범순찰대를 조직했을 때 주지사는 흔쾌히 경찰차에 동승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우리 교민들에게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아가냐 태생으로 72년 괌의회 상원의원으로 뽑힌 이후 내리 8번 당선된 뒤 95년 주지사로 선출된 그는 낙후지역 주민 의료서비스 지원을 목적으로 한 비영리재단 「남을 돕는 사람들」까지 운영하고 있다. 공직자의 바른 자세가 무엇인지를 새삼 일깨워준 그를 보면서 대형사고만 터지면 수행원을 잔뜩 거느리고 나와 브리핑을 받는 한국의 「높은 분」들 모습이 떠올랐다.  괌=조남규 기자  1997년8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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