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은 11일 '한나라당은 1994년 야당의 태도에서 배워야 한다'는 제목의 논평을 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절 남북 정상회담이 합의됐을 때 야당이던 민주당은 당리당략을 떠나 대승적으로 대응했는데 한나라당은 왜 그러지 못하느냐는 문제제기였다.민주당은 그 증거로 94년 당시 김대중(金大中) 아-태재단이사장과 국민회의(현 민주당)가 남북 정상회담 합의 직후 내놓은 환영 논평과 발언을 소개한 뒤 "민족의 문제는 당파가 아닌 민족의 가슴으로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도 했다. 실제 한나라당은 민주당 주장대로 남북 정상회담을 총선용 정략으로 규정하고 북한과의 이면합의 의혹을 집중 제기하고 있다.

현상만 놓고 보면 민주당의 지적에 일리가 없지 않다. 그러나 민주당은 한나라당을 향해 손가락질하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

13대 대선을 하루 앞둔 87년 12월15일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 주범인 김현희(金賢姬)가 서울로 전격 압송됐을 때 민주당(당시 평민당)은 공작의혹을 제기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14대 대선을 불과 3개월 앞둔 시점에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이 발표됐을 때도,15대 총선 당시 집권당이 북한의 판문점 비무장지대 무력시위 사건으로 위기론을 조장할 때도 민주당은 '선거용'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 때 그 목소리와 지금 한나라당의 외침 사이에는 얼마만한 거리가 있는 것인지,선뜻 가늠이 되지 않는다. 김영삼 정부의 남북 정상회담 합의 발표가 94년이 아닌 96년 15대총선을 코 앞에 둔 시점에 발표됐어도 민주당이 환영 논평을 냈을지는 의문이다. 북한이 국내에서 펼쳐지고 있는 여야간 정상회담 공방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조남규 정치부 기자>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 공화정 초기,귀족이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의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모범을 보였던 점을 높게 평가했다. 그녀는 이를 당시 로마의 정치적 안정에 이바지한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봤다. 귀족이 기득권에 안주,평민에게만 희생을 강요했다면 권리의식에 눈 뜬 평민의 거센 저항에 부닥쳐 급진적인 정치체제의 변동이 초래됐을 것이란 게 그녀의 분석이다.그러면서 그녀는 어린 후계자 한 명만을 남기고 일족 300여명이 모두 전쟁터에 나가 전사한 파비우스 가문을 들고 있다.

그로부터 대략 2000년이 흐른 지금,한국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군대도 안가고 세금 한 푼 안낸 이들이,로마시대라면 시민의 권리도 누릴 수 없는 이가 국민 대표가 되겠다고 앞다퉈 나서고 있다.

선거제도 도입 이후 처음으로 병역과 납세사실을 공개하도록 한 16대 총선 후보등록 결과는 밖에 내놓기 부끄러울 정도다. 등록후보 1040명 중 병역 미필은 220명,소득세 제로는 214명이었다. 병역 미필에 소득세-재산세 0원으로 3개 항목 모두 낙제점을 기록한 후보도 24명이나 됐다. 재산 규모와 재산세 신고 항목에 0이라고 써넣은 후보도 28명이었다. 국민 눈에는 가정이나 제대로 꾸려나갈 수 있는 인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당사자는 나름대로 이유를 대고 있지만 후보등록 내역이 신문에 실린 이후 신문사 편집국에는 거친 톤의 독자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세금도 안낸 사람이 의원이 돼서 국민의 혈세를 받아먹겠다는 것이냐" "군대도 못갈 정도로 결함이 있는 사람이 의원이 돼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냐"는 비난이 대부분이다. 거꾸로 돌고 있는 한국의 지도층 시계는 언제쯤 똑바로 갈 것인지. <趙南奎 정치부 기자>

민주당은 27일에도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선대위 확대간부회의를 열어 때아닌 공천심사를 했다. 법원이 민주당의 전북 군산 공천효력을 정지시키는 결정을 내린 24일 이래 하루도 빠짐없이 개최되고 있는 심야행사다.24일 밤은 전북 군산 강현욱(姜賢旭) 후보의 재공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열렸다. 16대 총선 군산선거구 후보자 공모 및 접수와 강후보 재공천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는 회의가 시작되기 전 이미 짜여졌다. 이를 위해 공직후보로 등록하는 데 제한이 될 사유 등 공천취소사유 발생시 공천을 취소하고 재공천한다는 조항을 당규에 신설했다.

25일 밤에는 이날 하루동안 공모에 응한 신청자를 놓고 심사를 거쳐 공천자를 결정하기 위해 또 모였다. 민주당 후보자 추천규정에 맞게 공천신청기간인 2월1∼7일 군산에 공천신청한 12명 가운데 두 사람이 또다시 신청을 냈지만 들러리에 불과했다.

민주당은 다음날에도 전남 함평-영광과 인천 남구갑 등의 공천무효소 제기 대응방안 마련으로 부산했다. 또 한차례 당규를 뜯어고쳤다. 인천 남구갑 공천탈락자가 공천무효청구소송의 근거로 삼은 지구당 대의원대회 절차규정에 '긴급상황이 있는 지구당은 당무위 의결로 그러하지 아니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달았다. 구멍난 부분을 땜질한 셈이다. 민주당은 이같은 과정을 "사법부 판단을 존중, 법적 하자를 치유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일련의 절차상 하자를 잉태한 숙주(宿主)인 밀실공천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 16대 총선공약으로 "공직후보 선출과정의 투명성을 제고, 정당의 민주화를 추진하겠다"고 내건 정당이 맞는지 의심스럽다.<조남규 정치부기자>

중국을 통해 러시아로 들어가려다 실패,중국 정부에 넘겨진 탈북자 7명이 다시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12일 외교통상부 당국자는 "한국 송환을 위해 노력중"이라고 말했다. 13일 우다웨이(武大偉) 주한 중국대사가 이 사실을 통보하기 전까지 했던 얘기를 되풀이한 것이다. 탈북자의 북한 송환은 중국의 일방적 결정,일방적 통보였다. 우다웨이 대사는 북-중 국경조약에 따라 '법대로’처리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국경수비대가 이들 탈북자를 중국으로 추방할 당시 상황도 비슷했다. 정부는 러시아가 모스크바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의 탈북자 접촉을 허용하고 이들에게 출국비자까지 발급한데 안도하고 있다 뒤통수를 맞았다. 러시아 외무부는 "우리도 몰랐다"고 시치미를 뗐으나 예브게니 아파나시예프 주한 러시아대사는 "중-소국경조약에 따른 결정"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탈북자 추방은 이인호(李仁浩)주 러시아 대사가 그리고리 카라신 러시아 외무차관을 만나 협조를 구한 지 3일만에 이뤄졌다. 북한 송환은 홍순영(洪淳瑛)당시 외교통상장관이 탕자쉬안(唐家璇)중국 외교부장관에게 협조서한을 보낸 지 1주일만이다. 한국 정부와 상의는 커녕 사전 통보도 없었다.

외교당국은 그동안 김대중(金大中)대통령 러시아 방문을 계기로 한-러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밀월상태임을 강조해 왔다. 탕자쉬안 부장과는 통상적 외교관례를 넘어 온천욕을 함께 할 정도가 됐다고 자평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자신감도 중요하지만 '외교관이란 자기 나라를 위해 거짓말을 하라고 외국에 보내진 정직한 사람’이라는 정의를 되새겨봐야 할 때가 아닐까.

<趙南奎 정치부기자>

24일 헌법재판소가 일부 재판도 헌법소원 대상이라고 결정한 배경을 살펴보면 헌재와 대법원간의 「권한다툼」성격이 짙다는 생각을 떨어버릴 수 없다. 이 결정은 표면적으로는 대법원이 헌재의 한정위헌판정을 받은 구소득세법 조항을 헌재 결정을 무시한 채 그대로 적용해 판결한 데 대한 반작용으로 나왔다.헌재가 95년 11월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과세할 수 있는 경우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구소득세법은 조세법률주의에 어긋난다』고 위헌결정하자,대법원은 이같은 결정이 법원의 고유권한인 법률해석권을 침해한 것이며 내용상으로도 부동산투기를 방조하는 것이 돼 따를 수 없다고 판단한 것. 당시 헌재는 대법원이 『헌재의 위헌결정은 단순한 견해 표명에 불과하다』고 한 점을 「모독」으로까지 받아들였다.

그 때문인지 헌재 관계자들은 24일 결정 직후 『그쪽(대법원)에서는 돌을 던졌는지 몰라도 우리는 그 돌에 맞아죽는 개구리 처지』라는 등 원색적인 표현으로 결정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대법원이 헌재의 퇴노를 완전히 차단하고 선제공격했기 때문에 헌재로서도 물러설 수 없었다』고도 했다.

이번 결정을 계기로 표면화한 두 헌법기관의 대립양상은 사실상 6공 당시 대법원 외에 헌법재판소라는 또 하나의 최고재판소를 만들 때부터 잠복해 있던 것이다. 법률의 위헌여부 심사권을 갖는 헌재와 명령­규칙 등 하위법률의 위헌심사권을 갖는 법원이 심리과정에서 그 경계선이 모호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90년 10월 헌재가 대법원규칙인 법무사법 시행규칙을 위헌이라고 결정한 것이 그 대표적 케이스다. 당시 헌재에 법무사법 시행규칙에 대한 헌법소원이 접수되자 대법원이 규칙개정을 약속하며 위헌결정 보류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 법원관계자는 『이 일로 대법원이 헌재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돼 헌재와의 갈등 국면이 조성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물론 양자간 견해차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두 기관 모두 국민 기본권을 보장하는 최후보루라는 점을 감안하면,견해차가 지금처럼 권한다툼 양상으로 전개돼서는 곤란하다. 조남규 사회부기자 1997년 12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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