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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러데이'라는 팝송을 좋아했던 지강헌., 그를 가장 존경한다는 지존파, 지존파를 경쟁상대로 삼았다는 온보현.
각자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범죄사에 뚜렷이 남을 만한 족적을 남긴 자들이다. 잔인함과 대담성, 범행에 대한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초연함, 우리 사회는 이들의 범죄로 소설과 영화를 통해 알게 된 냉혈 살인마의 상을 현실화하게 됐다. 특히 지존파와 온씨의 살인행각은 동기없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선진국형 범죄라는 분에 넘치는 명칭마저 부여받았다. 우리도 이제 선진국이 된 모양이다.
이들은 사회에 대한 맹목적인 적대감을 품고 자포자기식 범죄행각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상하게도 공통적으로 미워했던 이들이 있다. 변호사와 검사와 판사들로 구성된 법조계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이제는 사법부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마다 언필칭 들먹여지는 어구다. 이 조어가 우리 사회에서 이토록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아직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단지 지강헌의 유언 때문일까.
지존파 우두머리격인 강동은은 변호사가 죽이고 싶도록 밉다고 했다. 범행 동기로 알려진 가진 자들에 대한 적개심도 여기서부터 싹텄다고 주장했다. 폭력혐의로 억울하게 구속됐을 때 4년 동안 어렵게 번 1500만원을 변호사에게 몽땅 날려야 하는 현실이 싫었다고 한다. 법정 최고형에 해당하는 범죄사실을 순순히 자백한 강동은이 형량을 감경받기 위해 근거없는 주장을 했을까.
택시기사를 하다 억울한 교통사고에 휘말려 벌금형을 선고받고 세상을 사는 마음이 변했다는 온보현은 다들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자신의 나이 만큼 살인을 해 세계 제일이 되고 싶었다던 그이고 보면, 그의 말이 헛소리로 들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의 말이 사실인 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쯤되면 독자들 중에는 나를 살인자들이 던진 끈 떨어진 말들을 주워 담아 논리적 비약이나 일삼는 궤변론자쯤으로 치부해버릴 만 하다.
나의 대답은 한마디로 '노 탱큐'다.
지강헌의 후예들이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외계인이 아닌 바에야 그들도 이 사회 속에서 성장해 온 인간들이다. 사회 각 부문에서 책임을 느끼고 문제점을 개선해 나가려는 노력이 없는 한, 사건만 터지면 언론에서 불어대는 상투적인 진단이니 대책이니 하는 것들이야말로 말 그대로 나발일 뿐이다.
나는 1년도 채 안 된 생무지 기자다. 법원은 6개월 정도 출입했으니 어리보기임이 분명하다. 허나 나는 정신병력도 없고 전과자도 아니다. 지강헌 후예들과 비교해 비난받을 가능성도 적다. 세상살이에 대한 어설픈 눈은 좀 떴으니 허튼 소리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내가 말을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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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법원으로 출입하게 될 무렵 대법원은 타임캡슐에 담길 천운을 타고난 옥동자를 출산했다. 현행범이나 긴급구속 대상이 아닌 이상 영장없는 경찰서보호실 유치는 적법한 공무수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이 판결은 인권보호 측면에서 큰 의의가 있다며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만시지탄이지만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는 분위기였다. 사실 법원으로서야 인권의식이 높아진 피의자들을 더 이상 영장도 없이 철창 안에 감금해 놓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판결 이후 동물원 사자우리 같던 경찰서 보호실 쇠창살이 제거되거나 낮아지고 전화통화도 자유로워졌다. 경찰서 형사계 안에 발을 들여놓는 행위 자체를 범죄 구성요건의 하나로 생각하고 구타도 서슴지 않았던 전력을 지닌 일선 경찰로서야 이 판결을 곱게 보았을 리 없다. 보호실 내에서 발악하는 피의자들을 향해 눈에 쌍심지를 켜며 곱씹었을 말이 귀에 선하다.
"책상물림 나리들 직접 한 번 겪어 보쇼, 그런 판결이 나오나"
허나 어쩔 것인가, 상명하복이 엄정한 조직 내에서 쌍지팡이를 짚고 나설 수 있을 것인가. 절에 간 색시가 되는 수 밖에. 입에 맞는 떡을 만난 듯, 언론은 모두 문민시대 사법부의 인권의식을 반영한 획기적 판결이라고 입을 모았다.
법원과 검찰도 대법원 판결의 뜻을 받들어 수 십 년 동안 지속돼 온 영감님 위주의 영장발부체계를 피의자 위주로 전환시켰다. 철학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견되는 영장발부사의 쾌거라 할 만 했다.
"법원과 검찰 당직실은 항상 여러분에게 개방돼 있습니다. 24시간 언제든지 안심하고 영장을 신청하고 발부받을 수 있는 곳, 바로 이 곳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렇듯 확실히 달라진 경찰서 보호실에서 한 피의자가 철사를 삼키고 쇠창살에 머리를 박았다. 어차피 구속되기는 일반이니 꺼리고 사리고 할 것이 없다고 칼 물고 뛰엄뛰기로 취한 행동이 아니었다. 절도 혐의로 연행된 한 피의자가 "구속영장이 발부되지도 않았는데 왜 죄인 취급을 하느냐"며 자해소동을 벌인 것이다. 이 피의자에 대해 신청된 구속영장은 연행된 지 26시간 만에 발부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미 대법원 판결의 존재와 의미를 잘 알고 있던 '의식화된' 피의자는 견딜 수 없었으리라. 눈 앞에 보이는 경찰이라면야 인권을 방패삼아 대거리라도 해 보겠지만 높은 곳에 계시는 영감님들을 어쩔 것인가. 만 하루가 넘도록 보호실에 억류돼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할 이들을 향해 경종을 울릴 수 밖에. 자신의 머리를 이용, 무관심이라는 이름의 종을-. 댕 댕 댕.
피의자 인권보호라는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보호실 창살 뜯어내기 공사쯤으로 이해했던 이들에게 이 피의자는 다기지게 머리를 창살에 짓찧어 가며 고행의 설법을 한 셈이다. 내년도 시민인권상은 살실성인한 이 사람 몫이 아닐까 싶다.
법원과 검찰은 이 사건 이후 영장 발부가 늦어진 데 대한 책임소재를 둘어싸고 무의미한 논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양측 당직달의 발걸음도 예전에 비해 빨라졌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24시간 영장발부체계는 의욕적 출발에도 불구, 가동 6일 만에 A/S를 받아야 할 불량품으로 낙인찍혔다. 우-째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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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법원을 출입한 지 한 달이 채 안됐을 무렵인 4월. 아직 수습이 덜 떨어진 나로서야 잔인한 일이 어디 한 두 가지 였겠는가 마는, 당시 가장 어려웠던 일은 잠자리였다. 창문을 열면 천마산스키장이 훤히 내다보이는 데 둥우리를 틀었던 탓에 입사 이후 계속해서 동가식 서가숙하는 처지였기 때문. 경찰서 기자실에 아예 한 살림 차리고 생활했던 나는 밤만되면 적막강산인 법원으로 옮겨진 후 고독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해 보이듯 피고인 역까지 자청한 모 대기업 회장 같은 야망이 없던 나에게 서울지방법원 기자실은 너무 넓고 할 일은 별로 없던 탓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이 날도 나는 각 신문사 사회부 야근자들이 마지막 종착지인 강남 경찰서 기자실로 다 떠나간 후 기자실과 당직실을 바장이며 혹시 들어올지 모르는 특종감을 기다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각 사 사회부에서는 매일 두 사람씩 서울을 동서로 갈라 오전 3시쯤까지 야근을 한다. 밤 동안 생긴 상황을 시내판 신문에 반영하기 위해서다. 그 중 법원 당직실의 구속 영장 체크는 동쪽 라인 야근자의 몫이다. 이전에는 경찰서에서 오전 10시쯤 영장을 일괄신청할 뿐이었으므로 야근자들이 신청된 영장을 체크할 수 있었다. 이제 24시간 영장을 신청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었기 때문에 야근기자가 떠난 당직실에서 내가 생쥐 입가심할 것이라도 챙겨 볼 요량으로 법원 당직자에게 눈치를 보이며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오전 1시쯤 당직실에 영장 4건이 접수됐다. 혐의 만으로도 기사가 될 만한 영장이 있었다. 나는 받아 논 밥상이라 행각하고 더뻑 달라 붙었으나 당직자는 판사에게 가져가야 한다며 조모를 생파리 잡아떼듯 물리치고 황급히 줄행랑을 놓았다. 잠시 후 자동차 시동거는 소리가 울렸다. 코를 떼인 나는 자정 이전 잠을 청하던 습성이 아직 가시지 않은 당직자가 야밤의 불청객들로 인해 심기가 불편해진 탓이리라 마음을 다독거리고 면박당한 부끄러움을 주리참듯 견뎌냈다. 그렇다고 어데다 발괄을 할 데도 없지 않은가.
낭패를 본 나는 법원 청사 기자실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쉬 잠이 들지 않아 뒤척이다 일어나 앉았다. 여운처럼 귓가에 맴도는 시동소리가 환청인 듯 들려왔다. 당직자가 나간 후 들여왔던 자동차 소리. '당직 판사'는 법원에 없었다. 그래서 법원 당직자는 차를 타고 법원 밖으로 나간 것이다. 며칠 전 법원 청사와 붙어있는 서울지검 당직 검사가 귀띔해 준 말이 사실이었다.
갑자기 나도 둥지가 그리워졌다. 한 달 가깝게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누구나 밤이 되면 들어가 쉴 수 있는 둥지가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부모품을 벗어날 때가 되면 짝을 찾아 새로운 둥지를 트는 것이 아닌가. 일사으이 삶의 법도가 이러할진대 인지상정이라 했다. 경찰서 보호실에서 결과를 기다리며 새우잠을 자고 있는 피의자의 심정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도 헤아려줄 수 있는 금도를 지닐 수는 없는가. 더구나 이들은 혐의자다. 법률에 문외한인 나는 '혐의'를 의심이라고 생각한다. 기기자들도 '혐의'라는 단어 하나를 기사에 붙여 놓으면 뒤탈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혐의자를 선량한 시민과 거의 진배없이 취급한다. 기소된 피고인도 무죄로 추정하는 법원칙이 있는 마당에 심야영장접수 행위를 경찰의 법원, 검찰 엿억이기 작전으로 매도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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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당직실에 놓여있는 원부 중에는 '구속영장 처리부'라는 게 있다. 철사를 삼킨 피의자 문제가 검찰과 법원 간의 영장접수 시간 문제로 비화되자 법원에서 차후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영장접수 시간과 판사실로 넘어간 시간, 결정이 끝난 시간과 교부 시간이 정확히 적혀있다. 법원은 면피용으로 만들었을지 몰라도 내가 보기엔 자승자박이 될 장부였다. 장부에 적힌 시간들은 당직판사가 법원에 남아있을 때와 떠났을 때의 차이를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장접수 시간과 판사실 회부 시간 사이의 간격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남아 있을 때 5분 정도인 이 시간이 반대의 경우엔 법원과 판사 자택 사이의 거리와 정비례해 늘어난다. 10분이면 처리될 영장이 4시간 10분이나 걸린 경우도 있었다. 긴급구속된 피의자에 대한 사후영장이 이러한 연유로 뒤늦게 발부돼 검찰과 경찰이 곤란을 겪은 일도 있었다.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하찮게 보이는 이 시간차. 내가 너무 옹졸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법원으로부터 매일 일용할 양식을 배급받아 먹고사는 자다. 두남두자는 것은 아니지만 법원의 입장도 밝히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가 되리라. 또 하나 기자들이 서운해 할 기사를 써도 후에 찾아가면 말살스럽게 대하지 않는 항상 넉넉한 모습의 만수받이 Y판사를 생각해서라도.
당직근무에 대한 첫번째 입장은 효율성에 대한 고려다. 자정 이후 몇 건 안되는 영장을 기다리며 굳이 법원에서 날 밤을 새워야 하는냐는 것이다. 다음은 형평의 문제다. 전국적으로 법원 숙직을 실시할 경우, 지방법원 판사들은 가뜩이나 열악한 환경에 당직 업무에서까지 불이익을 당하게 되고, 그렇다고 서울에 있는 법원만 실시하게 되면 지방에 사는 사람은 인권도 없느냐는 지적이 나오게 된다는 주장이다. 셋째, 영장발부가 늦어지는 것은 법원 만의 책임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경찰이 연행해온 피의자 신문을 미룰 수도 있고 검찰이 신청된 영장심리를 지연시키다가 뒤늦게 청구할 수도 있는데 왜 법원만 물고 늘어지느냐는 하소연인 셈이다.
모두 일리 있는 해명이다. 좀 더 말하면 모두가 퇴근하는 것도 아니고 퇴근한다고 해서 영장처리를 못하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이전보다는 힘들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일견 수긍이 가는 이 말들을 듣고나면 왜 가슴이 허전해지는가. 결코 당직실 보다 편하지 않은 보호실에서 일각이 여삼추로 결과를 기다리는 피의자들이 있어서일 게다. 개중에는 구속 사안이 아닌 피의자도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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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직판사 재택근무에 대한 기사가 나간 뒤 서울지방법원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이 문제가 논의됐다 한다. 가뜩이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형사법원 판사들을 더욱 힘들게하기 위해 기사를 쓴 것이 아닌 만큼 대법원의 합리적 방침을 기대해 본다.
나는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든든한 보루를 사법부라 생각한다. '立身揚名以顯父母'라 하여 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개인적인 입신을 넘어 효도의 방편이라는 생각이 일반화돼 있기는 하지만 출세나 신분상승의 수단으로서만 고시를 시작하지는 않았으리라.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부패들을 접하며 정의의 구현을 위해 몸바치겠다는 다짐들이 있었을 것이다. 법이라는 도구를 통해 보다 인간적인 사회건설을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보겠다고 젊은 가슴을 불태워 본 적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매년 기 백 명씩 배출되는 고시 합격생들에게 한 번도 빠짐 없이 박수를 보내왔다. 피나는 노력과 절제가 없이는 이르지 못할 위치이기에 사회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해주고 있다.
그러나 해가 지나면서 눈 빛이 흐려져가는 이들을 볼 때 우리는 회의하게 된다. 영광된 자리는 얻기보단 지켜나가기가 더 어렵다고 한다. 법전을 넘겨가며 밤을 새우던 그 시절,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는 법언을 되뇌였던 그 시절의 생각을 지켜나가는 법조인을 보게될 때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내가 말머리에 소개했던 지강헌 등의 사법부에 대한 불만들이 단지 "증거 없다"는 이유 만으로 흘려 넘겨져서는 안된다고 본다.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 할지라도 경철해주는 자세가 아니고서는 그들을 심판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목숨을 빼앗는 심판에 있어서랴.
*서울지방변호사회가 발행하는 월간'시민과 변호사" 1994년 11월호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