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타임스는 워싱턴포스트(이하 포스트)에 익숙해 있는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한국인에 의해 미국의 수도를 근거지로 신문사가 창간된 배경이나 신문사들의 도산이 줄을 잇던 시절에 굴지의 포스트에 맞서 20년 넘게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 워싱턴타임스가 옹호하는 가치 등 수많은 점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의문 부호로 남아있을 것이다. 필자는 1995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워싱턴타임스 교환기자와 방문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워싱턴타임스 창간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은 정부와 국민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공화국 미국을 설계하면서 언론은 국민들이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야 하며 그 정보는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충분히 다양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미국의 수도가 워싱턴으로 옮겨온 1800년 이래 워싱턴에는 최소 2개 이상의 신문들이 각축했다. 진보 성향의 신문도 존재했고 보수 성향, 중도 성향의 신문들도 있었다. 워싱턴은 미국과 세계의 미래가 결정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1년 여름 129년 전통의 워싱턴스타가 재정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문을 닫게되면서 워싱턴에는 포스트만이 남게됐다.

 

 워싱턴스타는 1957년 포스트에 추월당했으나 타임 재단의 지원 아래 워싱턴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움직여 온 유력지였던 만큼 워싱턴스타의 몰락은 모두에게 뜻밖의 일로 받아들여졌다. 워싱턴스타의 역사성은 링컨 대통령이 게티스버그 연단에서 내려오면서 "아마 자네는 이걸로 큰 기사를 만들 수 있을걸세"라면서 연설 초고를 건넨 기자가 다름아닌 스타 기자였다는 일화에서도 확인된다. 

 

  워싱턴의 단일 신문체제는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당시만 해도 런던에는 9, 파리에는 13, 로마에는 8개의 일간지가 경쟁하고 있었고 서울이나 도쿄,방콕 등도 마찬가지였다. 워싱턴은 매일 아침 포스트로 뒤덮혔고 포스트가 워싱턴 정책결정자들에게 끼친 영향력도 그 만큼 커졌다. 이런 상황은 건전한 여론 형성을 위해 바람직스럽지 않다는 우려가 확산됐다.

 

 워싱턴과 미국은 루퍼드 머독같은 미디어 재벌이나 뉴욕 타임스 같은 언론 그룹, 보수적인 재력가등의 워싱턴 진출을 고대했다. 포스트의 논조가 1977년 포스트 100주년 기념식에서 포스트家 전기 작가인 찰머스 로버트가 자랑스럽게 말했듯이 '진보적인 미국 민주주의의 강력한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워싱턴타임스 칼럼리스트인 아놀드 바이흐만(후버 연구소 연구원)은 "미국인의 3부의 1이 자신을 보수주의자로 규정하고 단지 17% 만이 자신을 진보주의자로 주장하는 시대에 워싱턴에는 보수주의를 위한 목소리가 사라진 셈이었다. 1980년대는 민주주의의 미래를 비관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소련의 팽창주의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에 방송들은 무기력한 분위기만을 양산해내고 있었다. 가정의 가치와 희생 정신과 자기 절제, 고된 노동과 믿음으로 특징지워지는 민주주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징후였다"고 회고했다. 후에 등장한 보수 성향의 FOX 뉴스 채널은 당시만 해도 루퍼드 머독의 머리 속에 점으로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신문을 창간하기에 좋은 시점이 아니었다. 타임 재단이 소유했던 워싱턴스타마저 쓰러지던 상황에, 그 것도 1877년 창간된 전통의 포스트에 맞서 싸워야하는 부담감이 너무 커서 어느 누구도 선뜻 워싱턴 언론계에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워싱턴타임스 창간(1982 517)은 이런 상황에서 "워싱턴 언론계에 진보의 목소리는 만연한 반면 보수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목소리에 응답한"(창간 사설) 것이었다. 신문의 논조는 보수를 지향했지만 편집국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정치 성향을 지닌 기자들로 채워졌다. 기자 중에는 공화당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다 레이건 행정부에 몸담았던 이도 있었지만 스스로 모택동주의자를 자처한 기자도 있었다.

 

워싱턴타임스 웨슬리 푸르동 주필은 "우리는 신중하게 의견과 뉴스를 구별해 왔다. 사설과 칼럼을 통해서는 공격적이고 분명한 관점을 견지하는 대신 뉴스 칼럼은 최대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고 말했다.

 

 워싱턴타임스는 발행 첫날부터 워싱턴포스트와 경쟁할 만한 규모의 신문사와 인원으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독자들은 최고가 아닌 신문, 뉴스 보도와 분석, 논평에서 깊이가 없는 신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워싱턴타임스는 세속적인 신문을 지향했다. 서구 사회의 오랜 전통인 聖俗 분리 원칙에 충실하기로 한 것이다. 편집국은 기존 언론계에서 활약한 언론인들로 채웠졌고 창간 사설을 통해 "워싱턴타임스에 투자한 이들은 신문이 자유롭고 독립적이지 않는 한 생존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잘 알고 있다"고 천명했다.

 

 그럼에도 창간 초기에는 숱한 편견과 맞서 싸워야 했다.

기존 언론계의 반응 역시 냉담했다. 이코노미스트는 " 'Moonie(Rev. Sun Myung Moon의 추종자)  paper'가 워싱턴스타같은 훌륭한 신문도 실패한 포스트와의 경쟁에 뛰어들었다"고 보도했다. 포스트는 "새로운 신문은  Rev. Moon과 그의 교회를 위한 선전지에 불과할 것"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을 보도하며 견제에 나섰다.
워싱턴타임스 주필을 역임한 아놀드 보슈그레이브
의 회고.


<Arnaud de Borchgrave>

 

"첫 3년 동안 워싱턴타임스는 'Moonie'라는 형용사와 싸워야 했다. 그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벤 브래들리(당시 포스트 편집국장)는 편집국에서 워싱턴타임스를 보지 못하도록 금지했다.(포스트 역시 워싱턴 지역의 5개 신문중 꼴찌로 시작해 오랫동안 뉴욕타임스로부터 무시당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워싱턴 실력자들이 모이는 오찬 장소인 메트로폴리탄 클럽이나 코스모스 클럽에서는 워싱턴타임스이 반입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인식을 타파하기 위해 개인적인 캠페인을 펼쳤다. 뉴욕타임스가 항상 우리를 'Moonie-owned Washington Times'라고 지칭했기 때문에, 나는 20년동안 알고 지내던 아브라함 로젠탈 편집국장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나는 '우리가 뉴욕 타임스를 지칭할 때 그 소유자의 종교와 함께 논한다면 합당한 일이냐'고 물었다. 얼마 후 그가 'You win'이라고 쓴 답신을 보내왔다. 워싱턴 클럽의 신문 반입에는 24개월이 걸렸고 지금은 포스트나 뉴욕타임스보다 더 많이 찾는 신문이 됐다"


 창간 멤버인 테드 에이그래스 편집 부국장도 비슷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 무엇보다 다른 미디어부터 신뢰도를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창간 초기 뉴스 메이커들이 워싱턴타임스의 편집진과 오찬을 하곤했다. 정부 관료도 있었고 의회 지도자도 있었다. 종종 그 자리에서 특종감인 중대 발언이 나오곤 했다. 내 임무는 워싱턴타임스의 특종 기사가 인용 보도될 수 있도록 통신사 등에 알리는 일이었다.  82년 말인가, 83년 초의 일이다. 레이건 행정부의 고위 관료가 워싱턴타임스를 방문, 편집진과 오찬하면서 새 정책을 발표했다. 빅 스토리였다. 기사 요약본을 AP 통신사에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보도하기를 거부했다. 그 관료가 워싱턴타임스에 있었는지, 있었더라도 그런 발언을 했는지를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기존 언론계의 불신과 오만이 나를 화나게 했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공증인을 고용해서 오찬 도중 오고간 대화들을 모두 기록해서 문건으로 만들어 보냈다. 우리 기사를 못믿겠거든 함께 보낸 대화록을 직접 찾아서 기사를 작성하라는 메모와 함께. 그 때부터 AP는 워싱턴타임스 기사를 인용 보도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는 '이제 기사만 보내도 도 된다'고 말했다. 워싱턴타임스가 신뢰를 획득해 가는 과정에서 거둔 조그만 승리였다


 
혹자는 6개월을, 어떤 이는 6주를 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런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워싱턴타임스는 살아 남았고, 나아가 영향력을 획득했다. 독자들이 호응했기 때문이었다. 월 스트리트 미디어 분석가들은  워싱턴타임스 유가 부수가 2 5000부를 넘지못할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그해 첫 해에 7 5000부에 이르자 당혹스러워했다.  


 워싱턴포스트 성장의 이면에 브래들리가 있었다면 워싱턴타임스에는 보슈그레이브가 있었다. 브래들리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한 밥 우드워드"포스트가 터트린 최대 사건인 워터게이트조차도 편집국을 통괄하던 브래들리가 포스트에 끼친 영향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던 인물로, 65 44세의 나이로 편집국장 대우에 임명된 이래 포스트를 유력지로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Ben Bradlee>

 

 보슈그레이브 25년 동안 뉴스위크에서 경력을 쌓은(브래들리는 뉴스위크 재직 시절 그 밑에서 활동했다) 국제 관계 전문가로 워싱턴타임스는 그가 주필로 재직한 85년부터 91년 사이 주류 언론계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의 임명은 많은 국내외 미디어의 관심을 모았고 그의 재임 기간 유력 언론들은 하나씩 워싱턴타임스를 일원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미디어 관련 잡지들도


"좋아하든 싫어하든 워싱턴 타임스는 유력지 반열에 올랐다"(미디어 위크)
"워싱턴은
다양성을 제공하고 정치권 거물들이 처신을 조심하도록 하기 위해 워싱턴타임스를 필요로 하게됐다"(콜럼비아 저널리즘 리뷰)라고 보도하며 호의적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가 채택한 방식은 '포스트 찌르기'였다. 
그에 따르면, 그들이(포스트) 원하는 기사를 우리가 먼저 우리 신문에 게재하는 방식이다. 브래들리 1996 보슈그레이브 70회 생일에 워싱턴타임스 사옥을 처음으로 방문, "초창기 워싱턴타임스가 어려웠던 시절, 교수형을 앞둔 사람의 집중력이 강해지듯이 그런 자극을 준 인물"이라고 소개됐다.

 

 보슈그레이브가 편집국장에 취임한 첫 해에 워싱턴타임스는 AP통신에 의해 포스트와 뉴욕타임스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신문이 됐다. 포츈지는 1986년 "워싱턴 타임스는 대통령이 오전 9시 첫 회의 전에 읽는 5개 신문 중 하나"라고 보도했다.


 

 보슈그레이브의 유쾌한 두가지 회상.

"한 번은 워싱턴포스트 그룹 회장인 캐서린 그래엄이 만찬 석상에서 다가와 말했다. '아노드, 나는 당신에게 꼭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신문이 정말 좋아보인다'"


<Katharine Graham>

 

"85년 3월 주필에 취임했을 때다. 취임 첫 날 레이건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뭐 도와줄 일 없을까' 그가 짓궂게 물었다. 나는 '누설된 정보 속에 흠뻑 젖어들도록 만들어주십시요'라고 대답했다. 물론 우리는 결코 그가 흘려준 정보에 젖어본 일이 없다. 모든 특종들은 우리 스스로 땀흘려 일궈낸 것이었다"

 워싱턴타임스의 첫 10년은 냉전의 시대였다. 워싱턴타임스는 이 기간에 언론계 지형을 바꾸고 국가적 아젠다에 영향을 미쳤다. 2004년 선거에서 낙마한 민주당 지도자 탐 대슐(전 상원의원.사우스 다코타) "토론은 민주주의의 소리다. 그것이 내가 워싱턴타임스를 평가하는 이유다. 워싱턴타임스는 창간 이래 워싱턴을 더욱 시끄럽게 만들었고 국가적 토론을 더욱 활성화시켰으며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대슐의 평가대로 워싱턴타임스는 보수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1981년 출범한 레이건 행정부는 군사력 증강을 통한 소련과의 정면 대결 정책을 채택했다. 워싱턴타임스는 출발부터 진보적 언론과 분명한 선을 그었다.  창간 직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가 숨지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그 뒤를 이었다. 워싱턴타임스는 안드로포프를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언론의 태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아놀드 바이흐만의 말을 들어보자.


 "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 의해 안드로포프는 스카치를 마시고 미국 소설을 탐독하는 유쾌한 친구로 묘사됐다. 평화는 곧 실현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두 신문에 의해 조성됐다. 그가 오랫동안 KGB 수장으로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되었다. 그러한 난센스는 워싱턴타임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1983 91일 소련이 사할린 상공에서 대한항공 민간 여객기를 격추시켰을 때 워싱턴타임스의 안드로포프에 대한 평가는 비극적으로 확인됐다"


 워싱턴타임스는 시종 일관 반소비에트,
반 공산주의의 길을 걸었다.

미국 의회와 백악관, 정부 기관에 매일 아침 배달되는 워싱턴타임스의 존재는 미국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워싱턴타임스의 사설과 칼럼은 미국 대통령과 의원을 비롯한 영향력있는 인사의 입을 통해 반복적으로 재생산됐고 그간 묻혀 있었던 보수의 목소리가 분출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시대적으로 타임스는 세계 역사상
중대한 국면에 미국의 수도에 나타났다. 소련의 팽창주의가 그 정점에 달했던 그 시점에 워싱턴타임스는 독자란과 코멘터리란을 작가와 지식인,학자,언론인들에게 개방했다. 독자들은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 새로운 관점, 새로운 의견들을 접할 기회를 얻게됐다.


 다음은 역사학자인 폴 존슨의 진단.


"워싱턴 타임스가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었던 배경엔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임, 1979년 영국 마거렛 대처 수상 집권,
1980년 미국 레이건 대통령 당선이라는 3가지 역사적 사실이 절묘하게 놓여있었다. 역사는 위대한 인물의 의지에 의해 움직여진다. 이들 세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채 소련을 무너뜨리고 독일을 통일시키고 동유럽을 공산 독재의 사슬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2001 3 체니 부통령이 그의 취임 이후 첫 인터뷰를 워싱턴포스트가 아닌 워싱턴타임스와 가졌고 부시 대통령은 그 달 초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유에스에이 투데이,워싱턴타임스 백악관 출입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공화당 대통령과 워싱턴타임스의 연대감은, 작고한 레이건 전 대통령이 1992년 워싱턴타임스 10주년 행사 때 보낸 축하 메세지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미 국민은 진실을 알고있다. 워싱턴타임스의 내 친구들, 당신들은 그 것을 그들에게 말했다. 그 것은 항상 환영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신들의 목소리는 크고 힘이 있었다. 나 처럼, 당신들도 세기의 가장 중요한 고비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우리는 함께 팔을 걷어 붙였고 일했다. 그리고 오 예스, 우리는 냉전에서 승리했다"

 

 민주당 클린턴 대통령과 공화당 원내총무인 뉴트 깅그리치가 워싱턴타임스 보도로 궁지에 몰렸고 레이건 대통령의 핵심 측근은 워싱턴타임스 보도로 사임 후 기소돼 처벌 받았다.

 

 워싱턴타임스의 대표적 탐사 보도는 클린턴 대통령의 아칸소 주지사 시절 부동산 매매 의혹을 파헤친 'White water 사건'이다.

워싱턴타임스 탐사보도 전문기자인 제리 세퍼는  1993 12,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이던 포스터(클린턴 부부의 아칸소 부동산 매매 당시 법률 자문)가 자살하던 그날 밤 클린턴 대통령 측근이 포스터 사무실에서 화이트워터 사건 관련 문건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특종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언론들이 이 기사를 받아 의혹을 제기하자 백악관은 마침내 특별 검사를 임명해 조사하라는 의회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된다. 이 조사가 후일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으로 이어져 그의 탄핵으로까지 비약됐던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후일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그녀의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Living History)에서

워싱턴타임스 보도에 관해 상세히 해명하며 강한 반감을 표시한다.

 중국이 미사일 기술을 시리아와 이란에, 핵무기 기술을 파키스탄에 수출하고 있다는 특종 보도는 1996년 나왔다. 국방 정보 분야 전문기자인 빌 거츠의 보도를 계기로 계기로 클린턴 행정부와 의회는 중국의 대량살상무기 기술 확산 문제에 현미경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거츠에 관해서는 제임스 울시 당시 CIA 국장의 "거츠의 보도가 어디서 흘러나갔는지 알 수 없어 미칠 지경이다. 이제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기 위해 그의 기사를 읽을 수 밖에 없다"는 발언이면 족할 듯 싶다.
 
가 안보가 우선이냐, 독자의 알 권리가 우선이냐는 오랜 논쟁에 대해서는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겠지만, 체니 부통령이 워싱턴타임스 주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거츠의 기사 수위를 낮춰주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워싱턴타임스가 미 언론계에 기여한 또 다른 공로는 전통과 가정, 믿음, 인종 평등, 미국의 기독교 유산을 옹호하는 이들에게 합당한 공간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1991년 부터 타임스는 사설과 칼럼, 기사를 통해 적극적으로 이런 주제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푸루동 주필은 "우리는 다른 신문들이 꺼려하는 주제들을 기꺼이 다룬다. 많은 유력 신문들이 미국의 주류 흐름으로부터 떨어져 있고 그런 탓에 주류에 속한 이들이 누구인지,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단적인 예가 동성연애자들의 군 복무 허용 문제에 대한 보도 태도다. 재선을 노리던 민주당 클린턴 대통령의 이같은 대선 공약과 관련, 타임스는 그의 취임 전부터 이 정책이 군내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게이 병사도 다른 병사와 다를 게 없다는 전제 하에서 클린턴 공약에 동조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2004.12.6

 

 

 


1995년 워싱턴타임스 교환기자 시절

                                                                                     2005~2006년 워싱턴타임스 연수 시절

 

 

*아래는 밴 브래들리 사망 소식을 다룬 조선일보의 2014년 10월23일자 보도.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대통령을 하야시킨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을 지휘했던 벤저민 브래들리(Benjamin C. Bradlee) 전 워싱턴포스트(WP) 편집인이 21일 워싱턴DC 자택에서 93세로 별세했다. 로이터통신 등은 그가 수년 전부터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도널드 그레이엄 전 발행인이 "미국의 당대 최고 편집자"라고 추도하는 내용 등을 포함, 10개 면에 걸쳐 추모 기사를 게재했다. 경쟁지인 뉴욕타임스(NYT) 등 주요 언론도 그가 '신문 편집인의 표본' '용기와 카리스마를 가진 위대한 언론인' '저널리즘의 신화'였다고 애도했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을 하야시킨‘워터게이트 사건’특종을 지휘했던 고(故) 벤저민 브래들리(오른쪽 끝) 워싱턴포스트 편집인이 1973년 동료들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 왼쪽부터 캐서린 그레이엄 발행인,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의 두 주인공인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 기자, 하워드 사이먼즈 편집국장.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을 하야시킨‘워터게이트 사건’특종을 지휘했던 고(故) 벤저민 브래들리(오른쪽 끝) 워싱턴포스트 편집인이 1973년 동료들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 왼쪽부터 캐서린 그레이엄 발행인,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의 두 주인공인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 기자, 하워드 사이먼즈 편집국장. /워싱턴포스트
그가 편집인(1968~1991년)을 맡았던 23년간은 WP의 중흥기였다. '워터게이트'를 비롯한 역사적 특종으로 지역 언론에 불과했던 WP를 미국 대표지로 만들었고, 미국사와 언론사를 다시 쓰게 했다. 특히 1972년 민주당 전국위원회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던 괴한 5명이 체포된 사건을 당시 20대였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기자가 심층 취재해 세계적 특종으로 만든 워터게이트는 "사건을 단순하게 보지 말고 깊숙하게 취재하라"는 브래들리의 철학이 낳은 성과였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위한 음모를 파헤쳐 결국 대통령을 물러나게 했다. 두 기자의 특종은 "탐사 보도의 새 장(章)을 열었다"는 극찬 속에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에 앞서 WP의 입지를 다진 사건은 미국 정부의 베트남전 개입 과정을 담은 1급 비밀 '펜타곤 문건' 보도였다. 특종은 NYT가 했지만 국가 안보를 이유로 닉슨 행정부가 게재를 금지하는 동안 WP가 오히려 앞서갔다. 캐서린 그레이엄 발행인과 브래들리는 워싱턴포스트의 주식 상장으로 권력의 입김에 취약할 때였지만 의기투합해 '원칙을 지키는 언론'이란 인식을 심었다. 브래들리는 조선일보와의 생전 인터뷰에서 "언론과 정부가 너무 사이가 좋으면 뭔가 크게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그가 재임하는 동안 WP는 퓰리처상을 17번 받았다. 줄무늬 셔츠에 흰색 칼라, 걷어붙인 소매가 트레이드마크인 그는 기자들에게 공격적인 기사를 요구하면서도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고 로버트 카이저 전 WP 부국장은 회고했다.

WP의 형식 파괴도 그의 업적이다. 일간지에 잡지 개념을 도입한 섹션면 발행은 거의 모든 세계 신문들이 따라오게 만들었다. 패션과 유행을 다룬 '스타일'이 대표적이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WP의 발행 부수는 두 배인 80만부로 늘었다.


	1971년 무렵의 벤저민 브래들리(오른쪽) 워싱턴포스트 편집인과 캐서린 그레이엄 발행인.
1971년 무렵의 벤저민 브래들리(오른쪽) 워싱턴포스트 편집인과 캐서린 그레이엄 발행인. /뉴시스
위기도 있었다. 1981년 퓰리처상까지 받은 '8세 아동의 헤로인 중독'을 다룬 '지미의 세계'가 허구임이 드러났을 때였다. 브래들리는 퓰리처상을 바로 반납하고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철저하게 조사해 기사화했다.

1921년 보스턴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브래들리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해군 장교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뒤 뉴햄프셔 선데이뉴스에서 기자 일을 시작했고, 1948년 WP에 입사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 때문에 3년 만에 파리 주재 미국 대사관의 공보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활자의 매력을 잊지 못했던 그는 2년반 뒤 뉴스위크 유럽 특파원으로 언론계에 복귀했다. 이후 뉴스위크를 WP가 인수하는 과정에 관여하면서 WP로 돌아왔다.

브래들리는 조지타운 저택촌의 '이웃사촌'이던 존 F 케네디와 막역했다. 케네디가 암살당한 뒤 재클린 여사를 데려간 사람이 바로 그였다. 케네디가 대통령일 때 여러 특종을 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케네디와의 관계는 저서 '케네디와의 대화'로 이어졌다.

1991년 은퇴하고 WP 부사장으로 있던 브래들리는 2013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 영예인 '대통령 자유메달'을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브래들리는 진정한 언론인이었고, WP를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신문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세번의 결혼으로 자녀 4명, 손자 10명, 증손자 1명을 뒀다. 워싱턴=윤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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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사주받고 기사썼다고?  (6) 2005.09.06
미국 연수 와 보니  (0) 2004.11.01
밤샘조사 없애라  (0) 1997.01.21
심판자의 자세  (0) 1994.11.17
사형수의 최후  (0) 1994.10.08

2004.11.30

워싱턴에서 만난 이상수 전 의원은 편안해보였습니다.
워싱턴 시내의 '조티타운 클럽'
에서 그와 만났습니다. 조지타운 클럽은 로비스트 박동선씨가 창립한 사교 클럽으로 지금도 박씨의 사진이 걸려있더군요.  장소 탓인지, 박정희 정권 시절 미국 정치권을 상대로 한국 관련 로비를 벌이다 구속됐던 박씨의 인생과 노무현 후보의 '대선 금고지기'를 맡은 업보로 구속됐던 그의 행로가 자꾸 오버랩됐습니다.       
 
.

조지타운 클럽에서 만난 이상수 전 의원


 
어떻든 편안한 그의 모습은 내가 그의 처지라면, 그렇지 못할 것 같았기에 의외였습니다.
그는 감옥에 갔다가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여늬 사람 같으면 한 번도 구경해 보기 어려운 감옥을 두 번이나 갔습니다.
한 번은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 갔으니 훈장으로 치부할 만 합니다.
두 번째는 그다지 자랑할 만한 이유가 아닙니다.
대선 자금을 위법하게 모았다는 죄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유죄로 확정된 그의 공소 사실은 기업체로부터 대선 후원금을 전달받고
영수증을 발급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영수증을 발급해 주지 않은 행위는 법적으로 유죄입니다.
후원금을 전달하는 기업체의 요청에 따라 영수증을 발급해 주지 않았던 것도,
또한 당시의 관행이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갈 수 밖에 없었던 정치적 상황이나
대선 자금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지난 대선을 기점으로 열리게 된
상황은 그간의 신문 보도가 전한 그대로입니다.
나는 정치인 이상수가 아닌 인간 이상수가 그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추스렸을지가 더욱 궁금했습니다.
지난 대선의 금고지기만 맡지 않았던들,
노무현 정부가 궤도에 올라선 이 시점에 미국에 머물 이유가 없는 그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의 감옥 생활은?
그는 "지옥 다음"이었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억울하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평소 단련한 단전 호흡이 아니었다면 견디기 힘들었다는 설명과 함께. 여담이지만 그는 딸의 권유로 시작한 단전 호흡이 상당한 경지입니다. 미국 체류중엔 그랜드 캐년 근처에 위치한 세도나에도 다녀왔습니다. 세도나는 볼텍스라는 신비한 에너지가 충만한 곳으로 알려져 세계의 명상가들이 자주 찾는 장소이고 한국의 단학 선원도 세도나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면 그는 결국 2004년 총선에 출마할 수 없게됐습니다.
불면의 번민은 어떻게 정리했을까요.
그는 자신의 희생으로 한국 정치의 고질이었던 대선 자금 문제가 앞으로 보다 투명해진다면 그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자위하며 정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말 대선 자금 모금 당시,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까요.

"노무현 선대본부의 총무위원장 직함은 대선 자금 모금 과정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후원금 모금을 위해 기업체 관계자를 만나면 도대체 총무위원장이 무슨 자리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는 민주당 사무총장이 별도로 있었고 노무현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희박했던 시절이었다. 유력한 기업체들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이미 '배팅'을 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가 이뤄진 후 기업체에서 후원금을 내겠다는 연락이 왔는데 액수는 후에 대선 자금 수사 결과를 보니 한나라당의 10분의 1도 안되는 액수였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SK 수사로 대선 자금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나는 대선 자금 수사를 해도 한나라당이 문제지 우리 쪽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찰이 여야 형평성을 고려하면서 수사할 것이라는 점은 후에서야 실감하게 됐다" 

 그의 바람은?


 "정치적으로 명예 회복을 하고 싶다"

향후 그의 정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인생은 정말 그의 말대로 '다채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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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2004년초, 이상수 전 의원의 구속을 지켜보며 썼던 글입니다.

2004년 2월8일

 立春도 지난 2001년 2월 9일, 때 아닌 폭설이 내렸다. 처음엔 가루눈이 날리더니 점점 눈발이 드세어졌다. 오전부터 내린 눈은 점심 때가 되자 국회 의사당 주변 도로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차량들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국회의사당에서 나와 민주당 이상수 원내총무 당선 축하연 장소인 국민일보 빌딩까지 함박 눈을 맞으며 걸었다. 철 지난 겨울 정취에 조금은 감상에 젖어. 방금 전에 실시된 민주당 총무 경선은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나오지 않아 결선 투표까지 치러야 했을 정도로 접전이었다.
오찬 행사 중 문제가 발생했다. 초청 성악가가 노래를 부를 순서가 됐는데 폭설로 반주자가 도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초청 성악가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사이, 이 의원이 무대 위로 올라가 우정 출연을 자원, 먼저 무반주로 가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 실력은 수준급이어서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꿔 보려던 그의 시도는 예상 외의 호응을 받았다. 여기 저기서 앵콜 요청이 터져 나왔다. '정치인 이상수'가 아닌 '로맨티스트 이상수'와의 첫 遭遇였다.

그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동료 의원들과 같이 로마 여행을 갔을 때는 베니스 거리 가요제에 특별 출연, '오 솔레미오'를 불러 열렬한 앵콜을 받았을 정도다. 당시 동료 의원들은 모자를 벗어들고 거리의 여행객으로부터 돈을 거두는 촌극을 연출했다고 한다. 변호사 시절엔 광화문 근처의 한 다방에 들렀다가 마테 알테리라는 소프라노 가수가 자신의 애창곡인 토셀리의 세레나데를 애절하게 부르는 것에 감동, 그 음반을 백방으로 찾아다니다 끝내 구할 수 없게 되자 그 다방 주인을 찾아가 다른 음반 30장을 사주는 조건으로 그 음반을 손에 넣을 만큼 노래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총무 담당이었던 나는 이런 저런 자리에서 그가 가곡을 반주도 없이 열창하는 모습을 유쾌한 심정으로 지켜보곤 했다. 애창곡은 '청산에 살리라'로 김연준 전 한대총장이 윤필룡 사건에 연루돼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면서 자신의 비장한 심회를 노래한 것인데 가사도 좋고 곡조도 맘에 들어 18번으로 정했다고 한다.
충무경찰서 유치장 가수로 데뷔한 일화는 2002년 발간한 에세이집에 남겼다. 그가 87년 6.29 선언 직후 인권 변호사로 대우조선 노조 생존권 투쟁에 동참했다가 구속됐을 당시 얘기다.


"충무경찰서 유치장은 근처에 구치소가 없어 상당히 오랜 기간 구금생활을 하는 수감자가 많았다. 그래서 가끔 교도관들이 수감자들의 기분 전환을 이유로 유치장 방별 노래자랑을 개최했고 1등한 방에는 유치장 최고 특식 중 특식인 담배를 한 개비씩 나눠 줬다. 수감자들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결사적으로 대회에 임했으나 우리 방은 계속 등외로 밀리곤 했다. 보다 못해 어느 날 내가 선수로 나가보겠다고 제안했다. 사실 그 날은 마음도 울적해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한껏 감정을 넣어 열창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 날 노래가 잘 되는 날이었고 결국 일등상을 받아 스타로 부상했다"

이 의원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드러누워 문학작품을 읽을 때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편하고 즐겁다"고 말하는 문학 애호가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그를 취재한 수첩을 펼쳐보면 군데 군데 '인생 讀本'에나 실려 있음직한 말들이 눈에 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인생은 悽然하나 多彩롭다'는 말이다. 인생은 유한하기 때문에 처연하고, 처연하지 않기 위해선 다채로워야 한다는 취지였던 것 같다.

그의 말이다.

 "서머셋 몸은 '인생은 페르시아의 융단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융단을 짜는 사람의 기호에 따라 융단의 무늬가 달라지듯이 우리 인생도 결국 그 것을 그려가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다양하게 채색될 뿐 절대적인 기준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훗날 인생이란 저울에 달았을 때 누구의 무게가 더 나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인용한 대목도 있는데, 파우스트로 변장한 메피스토펠레스가 배움의 열정에 넘쳐 파우스트 박사를 찾아 온 학생에게 건넨, '이론이란 모두 회색 빛이고 푸른 건 인생의 황금나무'라는 유명한 말이다. "나도 푸른 생을 추구하며 삶의 여정을 달려온 것 같다"고 이 의원은 말하곤 했다.

고려대 법대 재학 시절, 그는 독서 서클인 '호박회(虎博會)' 멤버였다.

"최인훈의 '광장'을 토론하며 분단 상황에 처해있는 지식인의 고뇌를 이해하려 노력했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논하며 초인 정신을 흠모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토론을 끝내고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학교 앞 콩나물 밥집이나 세느 주점을 찾아 뒤풀이 토론도 벌였다. 안암동 실개천을 세느 강으로, 그 위 다리를 미라보 다리로, 천변 술집을 세느 주점으로 삼아 우리는 술에 취해 기욤 아뽀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를 크게 암송하며 젊은 날의 꿈과 낭만을 만끽하곤 했다"

대학 시절, 정체 모를 열정에 휩싸여 1년 동안 학교를 自罷한 경험이 있는 나는, 이 의원의 이런 낭만성에 이끌려 한결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검찰에 몇 차례나 출두하여 조사를 받고, 특히 그 때 마다 TV에 마치 비리 정치인처럼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착잡한 심정을 가눌 길 없었습니다. '왜 대선 자금의 금고지기를 맡아 이 곤욕을 치르는가'라고 자문하면서 회한의 밤을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대선 사상 가장 깨끗한 선거를 치렀다고 자부하고서도, 지금은 왜 이토록 돌팔매를 맞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가눌 길 없는 억울한 심정으로 괴로워한 때도 많았습니다"


2004년 1월 27일, 이상수 의원은 '대선 자금 수사에 대한 입장'이라는 제목의 e-메일을 발송했다. 그 날은 2002년 대선자금 수사를 진행중인 대검 중수부가 이 의원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한 날이었다. 영장 요지는 이 의원이 2002년 대선 당시 민주당 노무현 후보 선대위 총무본부장으로서 한화와 금호그룹에서 각각 10억원, 6억원을 받고 영수증을 발급하지 않은 부분과 SK 10억원, 현대 6억6000만원에 대해 임직원 명의로 영수증을 발급한 행위가 정치 자금법 위반에 해당된다는 것. 이 의원은 금호와 한화 부분에 대한 위법 혐의는 시인하면서도 SK와 현대 부분은 수긍할 수 없다는 취지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확실히 이 의원은 용의주도하거나 노련한 정치인은 아니었다.

 그가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이 되어 당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던 2003년 3월 7일의 일이다. 필자를 포함한 일부 기자들과 점심 식사 자리에서 그는 "지난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후원금 모금을 위해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돌아다녔고 전부 120억원을 모금했다. 만나 보니 괜찮은 사람들도 많더라" 고 자랑스레 얘기했다. 당시만 해도 그와 단짝이던 김경재 의원이 아연해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선 당시 노무현 선대위 총무본부장으로서 캠프 살림을 떠맡은 장본인의 언급치곤, 너무나 천연스런 말투였다. 이 발언이 문제되자, 그는 부랴부랴 "120억원 중 노사모 돼지 저금통으로 모금한 80억원, 서울·경기·인천지역 후원회를 통해 모금한 6억원을 제외한 나머지 34억원이 기업체 등의 합법적인 후원금"이라고 해명했다. 이 의원은 이 발언으로 '철이 덜 들었다'느니, '순진하다'느니 하는 당내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당과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어떤 기업에서, 얼마 만큼의 후원금을 받아 무슨 용도로 사용했는지 낱낱이 공개해야 한다"고 강도높게 촉구한 것은 후일 검찰 수사를 통해 500억원이 넘는 불법자금을 끌어들인 것으로 밝혀진 한나라당이었으니, 정치의 세계는 우스운 구석이 있다.
.
나는 그의 e-메일을 받고 착잡한 심정이었다. 진위 여부야 법정에서 따질 일이다. 이 의원이 기업에서 받은 돈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것이 아닌 바에야, 개인 차원의 문제로 치부할 문제도 아니다. 내 마음이 심란해진 이유는 '로맨티스트 이상수'와 '대선 자금의 금고지기'가 양립할 수 없는 우리의 정치 현실 탓이었다.

"정치가의 주머니는 돈이 일시 지나가는 정거장이 되어야지, 돈을 언제까지나 보관하는 금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 있다. 정치가에게 있어서 돈은 활동의 수단이지, 치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평생 쌓아올린 명예를 하루아침에 잃고 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린 듯이 검찰청을 빠져 나오는 노태우씨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인생살이가 처연해지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언젠가 비자금 사건에 연루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지켜보며 피력한 이런 '돈과 인생'의 철학이, 본인이 연루된 대선 자금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던 것이다. 서울구치소의 차가운 감방 안에서, 냉혹한 정치 현실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을 그는 지금, '로맨티스트 이상수'와의 결별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주와 테네시주 접경에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이 우뚝
서 있습니다.

 모든 게 다 큰 미국 사람들이 산 이름 앞에 'Great'를 붙여 놨으니 오죽 크겠습니까.
산 중간에 위치한 안내소에서 출발해 차로 꼬박 한 나절씩을 달린 끝에야 동쪽 끝과 서쪽 끝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산 정상 인근에 설치된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모습.

 


 

       
     

          

 스모키 마운틴에서 사 나흘 머물기에는 이런 통나무 집이 제 격. 저는 함께 연수중이던 한국일보 고태성 선배 가족과 같이 여행을 떠났는데 두 세 가족이 함께하면 저렴한 비용으로 렌트할 수 있습니다.


                                                      

 스모키 마운틴의 구불구불한 길을 초기 개척자들은 말을 타고 다녔을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엔 인디언들의 길이었겠지요.
바로 체로키 인디언의 삶터였습니다.
지금은 박물관과 보호구역에 유폐된 체로키족말입니다.


   
 아무리 백인 정착민과 인디언의 역사는 피로 써내려 갔다고는 하지만 체로키족의 경우에는 좀 심했습니다. 체로키족은 그들 스스로 백인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학교도 세우고 교회도 짓고 대표자도 뽑았으나 끝내 추방당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히려 싸우다 죽은 인디언 보다 더 비참한 종말을 맞았습니다.
  조지아에서 쫓겨난 체로키족은 테네시와 캔터키를 지나 오클라호마로 이동하는 중에 4000여명이 죽어갔습니다.  후에 '눈물의 발자국'으로 널리 알려진
죽음의 이주입니다. 나치의 유태인 말살 정책을 연상시키는 이전책입니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체로키족 족장들은  대서양을 건너 영국왕 조지3세를 찾아갔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의 영토까지는 백인 식민자들이 넘어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문서를 받아왔으나 결국 휴지가 되고 만 셈입니다.
 아래 사진 속의 인물들이 대서양을 건넌 분들인데 그 때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내쫓기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싸우다 죽자는 부족민도 있었고,

 



 백인과 협상하자는 이들도 있었지만,



 결과는 같았을 것입니다.
 몇년 전 미국 의회는 자신들이 인디언들에게 했던 수많은 약속들을
 헌신짝 버리듯 어긴 점을 사과해야 한다는 안건이 상정되자
 이를 부결시킨 바 있습니다.
 역사는 냉혹한 동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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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인디언 조각상.




 이제 신대륙의 주인이 된 식민자들은

 인디언에게 화해하자고 제안합니다.

 식민자들과 인디언의 우정을 상징하는 불꽃이랍니다.

 지금도 타고 있습니다.

 물론 가식적인 가스불에 불과하지만.



 


존 덴버 아시죠?



 저처럼 386세대라면

 학창 시절 꽤나 흥얼거리고 다녔던 노래가

 그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였을 겁니다.
 

 이 노래는 논두렁따라 학교를 다닌 제가


 가사를 외우고 있는 몇 안되는 팝송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미국산인데도 마치 민요처럼 정겹게 느껴졌던 노래요,

 이웃집 시골 아저씨같은 가수였습니다.

 그래서 어딘지도 모르고 십 수 년을 따라 불렀던 곳을

 직접 가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솔직히 블루리지가 고유명사인 줄은 이번에야 알았습니다.

 버지니아주의 유일한 국립공원 쉐난도어와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블루리지 모습을 담아 왔습니다.

 블루리지 파크웨이는

 쉐난도어와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국립공원을 잇는 길로

 도로의 평균 고도가 3000 피트를 넘고

 최고 고도가 6000 피트를 넘는 Sky Line입니다.

 오죽하면 존 덴버가 천국에 가깝다고 표현했겠습니까.

 그럼 존 덴버 노래가 묘사하고 있는 풍경들을 감상해 보시죠.  

Almost heaven west Virginia ♬♪


                                                      <쉐난도어 능선에서 바라본 웨스트 버지니아>

 

Blue Ridge mountain ♩♪



 


                                                  <너무 멀어서 개울처럼 나왔지만 쉐난도어 강 맞습니다>

 블루리지따라서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으로 연결됩니다.

 






 정상에서 기념 사진 한 장.


 




운이 좋으면 차 타고 가다 길 가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는

 엘크를 볼 수 있습니다.





 


미국 연수가 결정된 이후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좋겠다는 부러움 섞인 축하의 말을 들었습니다.

3개월 가까이 지내보니

정말 좋긴 좋더군요.

무엇보다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그렇고요.

기자 생활 10여년 동안 가족에게 빚진 것을 일거에 만회할 수는 없겠지만,

있으나마나 한 남편과 아버지로 낙인 찍혔던 저도

얼마든지 가정적인 남편, 자상한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가족들에게 인식시킬 수 있어 좋습니다.

기자가 된 이후로는

데드라인(기사 마감시간)이 없는 편안한 세상을 살아볼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연수 와서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도

일종의 보너스입니다.

1년이면 도피하고 싶어질 만큼 자유가 부담스러워지지도 않을 정도의 기간이니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뒀던 일들을 원없이 해보려 합니다.

그러나 미국도 사람이 사는 땅인지라

살림살이의 무거운 짐은 한국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역만리의 객지 생활은

까딱 잘못하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성냥개비 집처럼

취약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가족은 얼마 전 여행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예상치 못한 정신적·물질적 손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연수는 엄연한 현실이더군요.

각설하고,

제가 미국연수 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독자 여러분 덕분이었습니다.

기자의 해외 연수를 지원하는 기관은 많지만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은

저를 선정해준 한국언론재단뿐이거든요.

이 대목에서 독자 여러분은 묻겠지요.

내 혈세를 축내가며 미국엔 뭐하러 갔느냐고.

그래도 명색이 국비 장학생인데

허송세월하고 오진 않을 각오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는 점을 우선 밝힙니다.

제가 연수기관으로 선택한 곳은

워싱턴 DC에 위치한 조지타운 대학과 워싱턴타임스입니다.

 

 

 

 

 

 물가도 비싼 워싱턴을 굳이 연수지로 택한 것은

오는 11월의 미국 대통령 선거를

이왕이면 미국 정치의 중심지인 워싱턴에서 지켜보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막상 와서 보니 공화당 후보인 부시 대통령이나 민주당 케리 후보 모두 전국 순회 유세에 나서,

오히려 워싱턴에서는

그들의 모습을 TV를 통해서나 볼 수 있긴 했지만요.

그래도 ‘남부 촌놈’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백악관 시절

워싱토니안들에게 한 번도 친구 대접을 받아보지 못했다고 고백했던

그 콧대 높은 워싱턴,

미국과 세계를 움직인다는 자부심과 엘리트 의식이 가득한

오만한 워싱턴이야말로

기자로서 부딪쳐 보고 싶은 미국이었습니다.

‘바람둥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학부 과정을 마친 조지타운 대학은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사립 명문입니다.

저도 대학 졸업 14년 만에 다시 캠퍼스를 밟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대학측은 세계 각국의 연수생들을 위해

다양한 특강과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어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워싱턴타임스는 워싱턴에서 발행되는 두 신문 중 하나로

세계일보의 자매지입니다.

워싱턴포스트의 다소 진보적 성향의 논지와 차별화하며

1982년 창간된 워싱턴타임스는

이번 대선에서도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을 사설로 지지한

보수적 논조의 신문입니다.

 한국에서는 워싱턴포스트에 비해 저평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워싱턴 정가에서는 워싱턴포스트 못지않게,

특히 공화당 내에서는 포스트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신문입니다.

저의 좌충우돌 미국 체험기는 세계일보 기자 블로그에 연재되고 있으니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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