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부시 대통령이 애용하는 유머가 하나 있습니다.

올 초에도 몬태나 주 방문 때 꺼내들었는데

부시 혼자만 웃고 끝나는 바람에 분위기가 썰렁~해졌다는군요.

바로 이 유머인데요,

한 도시내기가 서부의 한 시골을 방문했는데

도통 방향을 종잡을 수 없어 시골 사람에게 길을 묻습니다.

시골 사람이 대답하길,

곧장 가다가 Cattle guard가 보이면 오른쪽으로 돌아가슈

Cattle guard는 소나 말을 가둬두는 목축용 기구입니다.


그랬더니 도시내기가 다시 묻더랍니다.

Cattle guard가 무슨 색 옷을 입고 있습니까?

이 걸로 끝입니다.

정말 썰렁하죠?

 그런데 이 유머와 부시와의 인연이 재밌습니다.

1978년 부시 나이 31살 때입니다.

부시가 하버드 대학 MBA 졸업하고 텍사스로 돌아와서

에너지 관련 사업을 벌이던 도중

텍사스주 의회 의원 선거에 공화당 공천을 받아 입후보했습니다.

그러자 민주당 켄트 핸스 후보가 유세장에서 이런 유머를 하고 다닙니다.


부시 후보가 코테티컷주 번호판이 달린 메르세데스 자동차를 타고

자기네 목장을 찾아가다 길을 잃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부시 후보에게

Cattle guard가 보이면 우회전하라고 일러줍니다.

그랬더니 부시 후보가 뭐랬는 줄 아십니까.

 그런데 Cattle guard가 무슨 색 옷을 입고 있지요?’”


 부시 후보가 코네티컷주 뉴헤이븐 출신에

대학도 뉴헤이븐의 예일대를 다닌 동부 사람이라는 점을

은근히 부각시킨 전략이었습니다.

부시는 낙선했습니다.

당시의 부시는 자신이 조롱거리가 된 이 유머를

무척 싫어했을겁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된 다음에 이 유머를 즐겨 사용하는 것을 보면,

부시는 텍사스 카우보이들의 유머를 잊을 수 없는 모양입니다.


 부시의 텍사스 사랑은 각별합니다
.

대통령 취임식 전날인 지난 1 19일 밤,

TV를 통해 워싱턴 시내 곳곳에서 개최된 축하 무도회를 지켜봤는데

부시는 텍사스 후원자들이 모여있는

Black tie & boots Hall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이더군요.

아마 그 곳이 부시가 가장 말을 많이하고

가장 오래 머문 무도회가 아닌가 싶네요.

부시가 그날 밤,

 샘 휴스턴의 고향인 텍사스의 재선 주지사가 이제 재선 대통령이 됐다는 체니 부통령의 소개로 연단에 선 후,

나는 내 고향을 잊을 수 없다. 4년 동안 봉사한 뒤 텍사스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던 모습이 제게는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텍사스 자랑을 하지 않으면

텍사스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긴 자랑할 게 많기는 합니다.

산이면 산, 바다면 바다, 벌판이면 벌판,

다양한 인종 구성 만큼이나 다채로운 자연 경관,

2000만 명이 넘는 인구에 미 연방에서 두 번째로 넓은 주,

석유를 비롯한 풍부한 자원

솔직히 뻐길 만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텍사스 사람들은 오만한 구석이 있습니다.

마치 고개를 한껏 쳐든 채 서 있는 부시의 모습처럼.
그리고 독립심이 무척 강합니다.

텍사스는 1845년 미 연방의 28번 째 주로 편입됐는데

텍사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쉽게 어울리지 않는 기질이어서

Lone star로 불렀다는군요.

부시의 기질이 바탕하고 있는 텍사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곳이며 사람인지

한 번 가봤습니다.

 

도로 표지판이 없더라도

건조한 풍경만으로도 텍사스 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칠다는 표현은 텍사스를 위해 만들어진 단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타는 듯한 태양과 메마른 대지, 거센 바람.

이런 풍토 속에서도 텍사스 들판에 흔전 만전인 수레 국화와


 
인디언 페인트브러시는



텍사스의 메마른 풍경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듯 합니다.
텍사스의 전갈과 독거미, 방울뱀 등은

적자 생존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입이 얼얼할 정도로 매운 타바스코 소스와

독주 데킬라도 멕시코와의 문화 접변이 빚어낸 텍사스적 요소.

카우보이도 빼놓을 수 없죠.
요즘은 챙 넒은 모자에 네커치프를 목에 두르고 랭글러 진이나 가죽 바지,
그리고  부츠와
拍車로 무장한 전통적 카우보이는 쉽게 만날 수 없습니다.



 현대판 카우보이들은 힘 좋은 미제 픽업 트럭을 타고 먼지 바람을 날리며

질주합니다.

벌판 곳곳에 서 있는 시추기는 20세기 초반 석유가 발견되면서
하루 아침에 벼락 부자가 된 이들의 신화를 말해주는 듯 합니다.


 

 텍사스의 주도인 오스틴은

텍사스의 첫 미국인 식민자, 스테판 오스틴의 이름을 딴 도시입니다.

도시의 스카이 라인은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이전 모습과 달라졌지만

1888년 지어진 주 의사당(워싱턴 국회 의사당을 본떴다는군요)



 텍사스 주립대학의 시계탑은 의연합니다
.


 


                                                     <왼쪽은 저의 신문사 후배로 외교부를 같이 출입한 김치욱씨. 현재
                                                       텍사스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화이팅!!!>
 

 오스틴에서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아파치와 코만치 인디언의 터전이었던 샌 안토니오입니다.

백인 식민자들에 의해 인디언이 쫓겨난 후론

미국 식민자들과 멕시코의 각축장이 된 곳입니다.

1836 3 6,

샌 안토니오의 알라모 요새에서

189명의 텍사스 방어 부대가 산타 안나 휘하의

멕시코군 4000여명에 끝까지 항전하다 전원 몰살당합니다.



 그로부터
6주일 후,

샘 휴스턴이 이끈 텍사스군은 Remember the Alamo!를 외치며

산타 안나의 멕시코군을 불과 18분 만에 격퇴시키는데

역사상 유명한 이 전투가 텍사스 독립의 전기가 됩니다.

마르궤즈 제임스가 쓴 ! 알라모라는 소설에

당시 알라모 전투를 지휘한 트레비스의 편지가 소개돼 있습니다.


텍사스 및 전 미국 국민에게.

본인은 산타 안나의 지휘 아래 있는 천 명 이상의 멕시코군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적은 본인에게 항복을 요구했고 만일 항복하지 않을 때엔 요새의 점령과 함께 본인 등은 그들에게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본인은 그 요구에 포탄 한 발로 응수했습니다. 본인은 항복하거나 후퇴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 우리의 국기(텍사스 국기)


 요새 위에서 자랑스럽게 펄럭이고 있습니다. 본인은 지원 요구가 묵살된다 하더라도 국가와 명예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지 않고 군인답게 죽을 것입니다


 최근 영화로도 만들어진 알라모 전투는



 자신들의 땅(물론 인디언에게서 강탈한 것이지만)
자유(역시 인디언들의 자유를 속박한 대가로 얻은 것이지만)를

지키기 위한 텍사스인들의 희생을 상징합니다.

189 4000이면

이길 승산이 제로에 가까운 상황인데도

텍사스인들은 일부의 작전상 후퇴 권유도 마다하고

등을 보이기 보다는 꼿꼿이 서서 죽는 길을 선택합니다.
멕시코군의 총 공격이 임박하자
트레비스는 칼을 뽑아 땅바닥 위에 선을 그어놓고
끝까지 알라모를 사수하길 원하는 자는 그 선을 넘게했는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트레비스의 뒤를 따랐다고 전해집니다.

어리석을 만큼 고집스런 기질입니다.
초기 텍사스인들의 이런 기질이 부시의 혈관에도
흐르고 있는 느낌입니다.
 

 오스틴과 달라스 사이에 위치한

부시가의 크로포트 목장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소가 됐지요.




 오는
6월 한미 정상회담이 '서부의 백악관'으로 부르는
크로포드 목장에서 열릴 가능성이 거론되더군요
.

부시 대통령은 우선 순위가 높은 정상들만을

크로포드로 초청했습니다.
한미 크로포드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그 의미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이 목장을 가보지 못했는데
김치욱 후배가 갔다와서 전하는 말이,
경비가 삼엄해서 접근 불가라고 하는군요.
차 타고 가면서 크로포트 목장의 지붕 정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소 몰이꾼과 총잡이들의 땅이었던 텍사스가
부시 가문 덕분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역사적 현장이 됐습니다.
유일 초강대국의 최고 통치권자인 부시의 텍사스 기질 또한
세계사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벌칸(Vulcan)을 아십니까.

그리스인은 헤파이스토스로, 로마인은 벌카누스로 불렀던

대장간의 신이랍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옛 사람들은 화산에서 분출되는 연기가

 

그의 대장간 풀무에서 나오는 것으로 믿었다는군요.

철강 산업이 발달한 미국 앨라바마주 버밍햄이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17m에 이르는 거대한 벌칸상을 세울만 하지요.

벌칸 2000년 미 대선 당시 공화당 부시 후보 진영의

외교 안보팀이 스스로 붙인 별칭이기도 합니다.

그 팀의 일원이자 버밍햄이 고향인 콘돌리자 라이스 현 국무장관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농담조로 사용한 이 별칭이

 

후에는 공식 호칭으로 바뀌었다는군요.

벌칸팀이 추구하던 외교 정책의 이미지-, 강인함, 탄성, 내구성 등이

벌칸의 이미지와 맞아 떨어진다고 판단한 것이겠지요.

 

바로 이 벌칸팀이 미 본토를 강타한

2001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안보 전략을 획기적으로 개조합니다.

그 과정이 LA 타임스 특파원 출신인 제임스 만의

Rise of the Vulcans에 서술돼 있는데 흥미롭고 시사적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임스 만이 추적한 벌칸들은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 딕 체니 부통령,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표지 앞 줄 왼쪽부터), 폴 월포위츠 전 국방부 부장관,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뒷 줄 왼쪽부터) 등입니다.
집권 2기들어 부시 행정부의 벌칸팀 구성이 좀 변하긴 했지만
정책 기조는 그대로입니다
.
오히려 벌칸팀 내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취했던
파월과 아미티지가 빠지는 바람에
집권
2기 벌칸팀은 집권 1기 보다 더 강성으로 변했다는 분석입니다.


만이 취재한 秘話입니다
.

 

9.11 테러 당일.

파키스탄의 국가정보원장 마흐무드 아마드는

워싱턴에 있었습니다.

그 해 여름 조지 테닛 미 CIA 국장이

오사마 빈 라덴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파키스탄을

비밀 방문한 데 대한 답방이었습니다.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이 아마드를 사무실로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단도직입으로 말했습니다.

Are you with us or against us?(파키스탄은 미국의 친구냐, 적이냐)

파키스탄은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 세력을 비호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의 후원자였기 때문입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한 아마드가

파키스탄과 탈레반 정권과의 오랜 역사를 거론하며

이해를 구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아미티지가 한 마디로 자릅니다.

History starts today(역사는 오늘부터 시작된다)

다음 날 아미티지는 아마드에게 미국의 요구 사항을 전달합니다.

미 항공기와 군인의 파키스탄 통과, 병참 지원, 탈레반과 알 카에다

정보 제공 등.

아미티지는 아마드에게,

협상도 없고 대가도 없다고 통보했습니다.

그간의 외교 관례를 무시한 일방적 요구였습니다.

아마드는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긴급 전문을 띄웁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미국의 요구 사항을

조건 없이 수락합니다.

나아가 탈레반과의 전쟁 기간, 무샤라프 대통령은

미국을 전폭적으로 돕습니다.

친구가 된 무샤라프에게 미국 또한 화끈하게 보답합니다.

이듬 해 무샤라프가 자신의 재임 기간을 5년 더 연장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을 강행해도

미국은 눈 감아줍니다.

민주주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부시의 잣대는

아무래도 고무줄로 만들어진 듯 합니다.

 

 9.11 테러 당일 중국 기자 14명도 워싱턴을 방문중이었습니다.

국제교육재단 초청의 공식 방문이었답니다.

이들은 어느 사무실에서 TV를 통해 무역센터 테러를 알게됐는데

지켜보던 미국인이 경악할 만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일부 기자들이 웃고 환호한 것이지요.

국무부 내에서 이들 기자들의 처리 문제를 놓고 격론이 벌어집니다.

국무부 동아시아국에서 중국 기자들을 즉각 추방할 것을 건의했으나

교육 문화국에서는 반대합니다.

향후 對 중국 관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이들을

추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

베이징 주재 미 대사관도 추방 반대 의견을 피력합니다.

매파와 비둘기파가 갑론 을박,

이 문제가 아미티지에게까지 올라갑니다.

아미티지의 결론은,

Send them home"(집으로 돌려보내)

Those people ought to be on the next plane out of here

(그런 인간들은 당장 추방시켜야 마땅하다)

중국 기자들은 즉각 추방됐고

대외적으로는 중국 기자들의 안전 문제를 우려해

일정이 단축된 것으로 발표됐습니다.

 

 확실히 미국은 9.11 이후 변했습니다.

더 이상 회색 지대는 없습니다.

친구가 아니면 적입니다.

구구한 설명도 듣지 않으려 합니다.

2002 1 29,

부시 대통령이 의회 연설을 통해 미국의 변화된 안보 전략의 일단을

피력합니다.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명명해서

유명해진 연설이지요.

물론 벌칸팀이 작성한 원고입니다.

그 때는 벌칸들이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키기로

결정하고 분위기를 몰아가던 상황이었습니다.

동맹국들의 의견은?

기자 회견에서 나온 폴 월포위츠 당시 국방부 부장관의
답변이 미국의 마이 웨이 방침을 대변합니다
.

그들도 부시 대통령의 연설문을 읽을 수 있지 않느냐"

더 이상 동맹국의 견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동맹국은 미국의 인공위성이 아니다"는 독일 피셔 외상의 불만을,
2차 대전과 냉전 시대를 미국과 손잡고 헤쳐나온 유럽 동맹들은
공유하고 있습니다
.

 

 의회 연설이 있은지 5개월 후에

부시 대통령은 미 육군사관학교 연설에서

선제 공격(Preemptive action)을 골자로 한 새 전략을 공식화합니다.

냉전 시대의 유물인 억지와 봉쇄(Deterrence & containment) 전략을

폐기 처분한 것이지요.

연설에서 부시는

불량 정권들이 미국을 파괴적인 무기로 위협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선포합니다.

이라크가 그 첫번째 제물이 됐지요.

그런데 이라크 공격의 명분이었던 대량 살상 무기가 발견되지 않아

벌칸들이 잠시 궁지에 몰렸으나

그렇다고 다른 명분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집권 2기를 맞은 부시 행정부는 이제

중동 지역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산하겠다고 합니다.

 

 문제는 북한입니다.

2005 4 24일자 워싱턴타임스 보도입니다.

북한이 핵 실험을 준비하고 있는 징후를

미국 정보 기관이 포착했다는군요.

핵 실험은, 핵 보유국이라는 사실을
지금까지의 공갈 수준을 넘어

공식적으로 전 세계에 천명하는 행위입니다.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미국을 협박하고

6자 회담도 보이콧하고 있는 북한입니다.

미국은 이런 북한을 애써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특사에게 핵 보유국이라고
깜짝 선언을 했을 때도
,

북한이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했을 때도,

북한이 국제 원자력 기구의 핵 사찰단을 추방했을 때도,

북한이 핵 무기 원료인 플루토늄 추출을 재개했을 때도,

미국의 반응은 It is not a crisis(아직 위기가 아니다)였습니다.

존재하지도 않은 대량 살상무기를 근거로

이라크를 박살내 버린 미국입니다.

이라크 보다 북한 핵이 더 시급한 문제 아니냐는 주장이

터져 나올 만 하지요.

2004년 대선 당시 존 케리 민주당 후보도 TV 토론에서

이런 논리로 이라크 공격을 비판했습니다.

벌칸은 이런 저런 이유로

북한 만큼은 군사적 해법이 적당치 않다고 말합니다.

중국과 러시아가 인접해 있고

전쟁이 나면 서울이 초토화될 수 있으며

북한 경제난이 북한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고

내부 쿠데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등등..

어떻든 "북한이 위협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라크와는 다른 위협이고 적어도 아직은 외교로 다룰 수 있는 위협"(럼스펠드 국방장관. 아래 사진)이라는 입장이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한편으론 벌칸이

그동안 이라크 전쟁 명분이 퇴색되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북한 위기를 일부러 축소시킨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북한 핵 실험은

미국의 북한 문제 주무 부서를 국무부에서 펜타곤으로
이동시킬 정도의
폭발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벌칸들에게는

그럴 만한 의지와 힘이 차고 넘칩니다.
벌칸이 구상중인 북한 해법이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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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싱턴 D.C.에 새클러 미술관이 있습니다.

국립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아시아관이랄 수 있지요.
1987년 아시아 예풀품들을 기증한
아서 M. 새클러를 기념해 설립한 박물관이랍니다.
이 박물관에는 한국이나 중국, 일본같은 동아시아 뿐 아니라
인도나 아랍 국가들의 예술품이 가득합니다
.
문화재는 공유해야 한다는 새클러의 정신은 존경할만 하지만
석조 불상이 통째로 전시된 모습에선
문화재 약탈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각설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새클러 미술관을 찾았습니다
.

그 분야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수 백년에서 수 천년의 세월을 견뎌온
예술품들을 실물로 확인한다는 데 의미를 둔 견학이었지요
.
그런 정도의 가벼운 마음으로 미술관을 둘러보다
입구에 전시된 대형 설치 미술 작품과 맞닥뜨렸습니다
.


 
 실물 크기의 고깃배가 난파된 형태 그대로 복원된 모습입니다.
고깃배 주위로는
자기 그릇 조각이 수북이 깔려 있고요
.
건성으로 따라 다니던 애들 눈에는
이 작품이 박물관 소품 정도로 보였던지
,
 '아빠는 휴지통도 찍을 것'이라면서 놀리더군요.


 첫 느낌은 뭐랄까,
객지를 떠돌다
생각지도 못한 고향 사람을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고향 인근의 어촌인 줄포나 곰소에서 흔히 봤던,
더 이상 고기 잡이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어
갯벌에 내버려져 있던 폐선의 이미지
.
고향집 장독대 옆에 촘촘히 박혀 있었던 깨진 사기 조각들.
가끔 좋은 음악이나 영화 속의 명 장면 등이 찡하게
와 닿을 때가 있는데 그 작품을 보면서 그런 느낌이었지요
.

설치 미술은 아내의 사촌 오빠인
전수천씨의 부상을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됐는데
팸플릿을 보니,이 작품을 만든 중국 출신 채국강
(蔡國强. 아래 사진)씨도
전씨와 마찬가지로 베니스 비엔날레를 통해
설치 미술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더군요.



 
폐선은 일본 어느 해변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해서 미국으로 옮겨왔고
 자기 조각은 중국에서 실어왔다고 합니다
.
채씨는 이 작품을 통해
'아시아 문화의 연대감'을 표현하려 했다고
팸플릿에 적혀 있었습니다
.
중국의 자기와 일본의 배,
이 두가지 소재는
두 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유대를 상징한다는군요.
배 안에 있어야 할 자기를 배 밖에 흩뿌려 놓은,
일종의 전도(顚倒)는
과거를 재구성해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려는
작가의 욕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
저는 그런 심오한 예술적 함의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작품의 주제-동아시아 문화의 상호 교류를 표현하려 했다는
대목은 난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허전하죠?
그 작품에는 중
-일 문화 교류의 핵심적 가교 역할을 한
한국이 빠져 있었습니다
.
물론 채씨는 일본에서 오래 활동한 분입니다.
작품에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동아시아 문화의 연대감이 작품의 주제라면,
최소한 한--일이 함께 어우러져야
채씨가 재창조하려 했다는  '역사'에
보다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떻든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 작품을 관람한 수 많은 미국인들은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중심 축이
중국과 일본이라는 인식을 굳힐 것입니다
.

요즘 한국에선 독도 문제로 일본 성토 여론이 들끓고 있지만
워싱턴에서는 벚꽃 축제가 한창입니다.
포토맥 강변의 벚나무들은
1912년 당시 유키오 오자키 도쿄 시장이
워싱턴 D.C.에 3000 그루를 선물로 보낸
아라가와 강변의 벚나무라고 미 언론들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 학계 일각에서는 아라가와 벚나무가 병충해로 죽자
일본이 후에 미국 풍토에 맞는 제주도산 벚나무를 다시 보냈다는
이른바 '한국 원산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어느 주장이 맞든,
올해로 93주년인 워싱턴 벚꽃 축제는 미국과 일본의
우호 관계를 상징하는 행사입니다.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미국 여인들의 화사한 얼굴이
미국과 일본의 밀월 관계를 반영하는 듯 합니다.
진주만 사건 당시 도끼를 들고나와 포토맥 강변의
벚나무 밑둥을 찍어내던 그 미국인들은
이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미국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은
일본 만화 영화를 보며 말을 배웁니다
.
유치한 지적같지만
채씨의 설치 미술전은
일본 화장품 회사인 시세이도가 후원을 했더군요
.
정말 미워만 할 수 없는 일본의 저력입니다.

 며칠 전에 미국 연방 대법원 판사인 앤서니 M. 케네디가
시체말로 사고를 쳤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가 만든 대법원 판례를 스스로 깨고 그와는 정 반대의 판례를 만든 것입니다.
이번 판결의 요지는
범죄 당시 18세 미만의 청소년 범죄자를 사형시키는 처벌은 위헌이라는 것인데
이는 범죄 당시 16세 이상이면 사형시킬 수 있다는 1989년 대법원 판례를
뒤집은 것입니다.
연방 대법원 판사 9명 중 5명이 찬성하고 4명이 반대한 이번 판결은
전적으로 89년 당시 '청소년 범죄자 사형이 합헌'이라고 주장한 진영에 가담했다가
말을 바꿔탄 케네디의 작품입니다.
당시도 5 대 4로 합헌론이 가까스로 우세했으니 만큼
케네디는 양 쪽 끝에 4명씩 앉아있는 시소의 이 쪽 저 쪽을 옮겨다닌 셈입니다.
변신의 辯은 구구했지만 한 마디로 '시대가 변했다'는 것이 케네디의 주장이었습니다.

 

 사형 제도에 반대하는 민주당원과 자유주의자들은 환호했습니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이 어떻게, 왜 다른지는 제 블로그의 '미국의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라는 글을 참고하시압)

반면 공화당원과 보수주의자들은 '케네디가 그럴 줄은 몰랐다'면서 황당해하는 반응입니다. 케네디는 다름 아닌 공화당의 레이건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 판사(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이 인준합니다)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신임 대법원 판사를 임명할 때
될 수 있으면 자신과 정치적 이념적 지향점이 같은 사람을 고르고 또 고르지만
케네디 같은 '마이 웨이'는 나오기 마련인 모양입니다.
저는 케네디 사례를 보면서 그간의 궁금증-공화당 대통령이 임명한 판사들이
대다수인 연방 대법원에서 왜 공화당 노선과 다른 판결이 속출할까?-이 풀렸습니다.
참고로 현 연방 대법원의 인적 구성을 보면,
1972년 닉슨 대통령이 대법원 판사로 임명한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을 비롯,
6명의 대법원 판사가 공화당 대통령에 의해 임명됐습니다.
순서대로 보면 포드 대통령이 존 폴 스티븐스를, 레이건 대통령이 산드라 데이 오코너(여)와 앤터닌 스캘리어, 케네디를, 부시 대통령이 데이빗 해킷 수터, 클레런스 토머스를 임명했습니다. 민주당 쪽은 클린턴 대통령 시절 임명된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여)와 스테판 G. 브레이어 2명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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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줄 좌측부터 긴스버그, 수터, 토마스, 브레이어, 앞줄 좌측부터 스캘리어 , 스티븐스, 렌퀴스트, 오코너, 케네디> 

 그런데 미국 언론의 연방 대법원 관련 기사들을 보면
현 대법원 내에 진보 성향의 판사가 4명이라는 대목이 자주 나옵니다.
산술적으로 공화당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7명 가운데 2명이 변절했다는 말인데
기사만으로는 상황이 왜 그렇게 됐는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도서관을 뒤져봤습니다.
저자의 이름 때문인지 그 많은 책들 중에서 케네스 스타의 'First Among Equals'(평등 속의 최고)에 손이 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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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는 클린턴 대통령 재임 당시 그의 부동산 투기 의혹('워터 게이트 사건')과 성추문 사건을 조사하는 특별 검사를 맡아 이름 그대로 '스타'가 된 인물입니다. 힐러리가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에서 상종 못할 인간으로 묘사한 장본인이지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그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갖고 있는데
인간성은 몰라도 경력은 화려합니다.
스캘리어와 긴스버그가 워싱턴 D.C. 연방 항소법원 판사 시절의 동료였으니
관운만 따랐으면 벌써 대법원 판사가 돼있을 만한 경력이지요.
본론으로 들어가면,
그가 분석한 연방 대법원의 해부도는 이렇습니다.

우선 대법원장인 윌리엄 렌퀴스트.
72년 공화당 닉슨 대통령이 그를 대법원 판사로 임명했으니 올 해로 대법원 봉직 34년 째입니다. 워렌 버거 대법원장 시절(1969~86)에는 보수적인 소수 의견을 서슴지
않아 '외로운 감시인'(Lone Ranger)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8 대 1의 소수 의견도 많이 냈다고 하니
그의 고집을 알 만 합니다.
86년 공화당 레이건 대통령이 워렌 버거 대법원장 후임으로 그를 대법원장에
임명했을 당시 상원의 민주당 의원들이 그의 보수 성향을 문제삼았습니다.
렌퀴스트의 상원 인준 표결(찬성 65, 반대 33)을 보면
보수 성향의 대법원장을 맞이하는 민주당의 걱정이 얼마나 자심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렌퀴스트의 영전으로 생긴 공백은 그 보다 더 보수적인
스캘리어가 메웁니다.
레이건 행정부는 진보적인 워렌 버거가 물러가고 렌퀴스트가 대법원장에 임명된데다 보수적인 스캘리어까지 충원했으니 이제 대법원은 보수화할 것으로 잔뜩 기대합니다.
그리고 워렌 버거 대법원장 체제에서 양산됐던 진보적 판례(낙태권 인정 등)를
뒤집기 위한 시도에 나섭니다.
이 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의 반전이 이뤄집니다.
렌퀴스트가 대법원장 취임을 계기로 더 이상 '외로운 감시인'이 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곤 연방 대법원 내 진보파와 중도파의 맏형 역할을 자처합니다.
케네스 스타는 '렌퀴스트는 대법원장이 되고부터 급격한 변화를 꺼리는 실용주의자로 변했다'고 썼습니다.

 수터는 대법원 판사가 된 이후 부시 대통령(아버지 부시)과 그를 적극 추천한 부시 참모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수터가 느닷없이 전통적 보수주의자에서 진보주의자로 전향한 이유는
여전히 미스테리라고 합니다.
75년 포드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스티븐스는 '뉴욕 타임스 사설 편집진의 잣대로
평가했을 때, 가장 이상적인 대법원 판사'(케네스 스타)라고 합니다.
철두 철미한 낙태 지지자이자 사형 반대론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권 운동 변호사 출신인 긴스버그는
아직까지는 임명권자인 클린턴을 실망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제일 늦게(94년) 렌퀴스트 대법원에 합류한 브레이어도 진보 성향으로 분류됩니다.
이번에 대형 사고를 친 케네디는 87년 레이건이 임명한 로버트 보크를
상원의 민주당 의원들이 결사 반대하는 바람에 대타로 임명됐습니다.
보크 보다 덜 보수적이어서 인준을 받았고요.

 스티븐스와 수터, 긴스버그 등 '진보 3인방'에
진보적 중도 정도되는 브레이어, 보수적이라지만 가끔 삐딱선을 타는 케네디,
이전 판례를 가급적 뒤집지 않으려는 렌퀴스트.
공화당 행정부로서는 현 대법원이 마땅치 않을 만 합니다.
그래서 지난해 갑상선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렌퀴스트나
올 해로 만 85세가 된 스티븐스 등이 사임하면,
좀 확실한 공화당 사람을 심겠다는 것이 부시 행정부의 희망 사항인 듯 합니다.
더군다나 지난해 선거에서 공화당이 상원까지 장악했으니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태세입니다.
어쩌면 부시 행정부는 그런 인물을 대법원에 앉힐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연방 대법원이 그 다음 날부터 보수화할지는 의문입니다.

 공화당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53년 대법원장에 임명한 사람은
중도 노선의 공화당원인 얼 워렌이었습니다.
워렌은 그러나 대법원장이 되고부터 '진보주의 깃발을 들고 거침없이 진군하는 십자군'으로 돌변했습니다.
흑백 차별을 금지하고 피의자 인권을 보호하는 역사적 판례가 바로 워렌 대법원(1953~69)에서 무더기로 만들어집니다.

 미국의 건국 헌법은 '살아 있는 문서'로 부릅니다.
연방 대법원의 끊임 없는 해석을 통해 성장을 거듭하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연방 대법원 판사들 역시 임명되는 순간부터
임명권자에 얽매이지 않은 채
'살아 있는 헌법 기관'이 되고 싶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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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한국 대법원의 판결 성향을 분석한 동아일보 2020년 9월23일자 A4면 보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을 지냈던 김선수 대법관, 진보성향 법관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에서 활동한 박정화 노정희 대법관,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의 김상환 대법관, 젠더법연구회 회장 출신인 민유숙 대법관….

김명수 대법원의 판결 분석 결과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진보 성향인 ‘신(新)독수리 5형제’의 등장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 2년 차인 2017∼2018년 임명한 5명의 대법관을 말한다. 이들은 전원합의체 판결 10건 중 7건에서 같은 의견을 내며 두터운 ‘진보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을 지냈던 김명수 대법원장과 역시 우리법연구회 출신으로 이달 8일부터 임기를 시작한 이흥구 대법관을 더하면 전원합의체 과반(7명)이 확보된다.

○ 진보법관 5명, 전합 판결 71% 일치


김명수 대법원의 진보 성향이 커지고 있다는 인식은 동아일보가 서울대 한규섭 교수팀과 함께 최근 15년간 전원합의체 판결 274건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로 확인된다. 현직 대법관 14명 중 5명이 진보 성향으로 나타났으며 이들 중 김선수 대법관이 가장 진보적이었다. 김선수 대법관은 분석 대상이 된 전·현직 대법관 46명 중 진보 4위였다. 박정화, 김상환 대법관이 전체 진보 6, 7위로 뒤를 이었다. 민유숙, 노정희 대법관도 진보 9, 14위로 분류됐다.

이들 5명의 대법관은 정치 성향이나 이념에 따라 찬반이 갈릴 수 있는 사건에서 대부분 한목소리를 냈다. 2018년 12월∼2020년 9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38건 가운데 27건(71.1%)에서 같은 의견을 냈다. 행정이나 노동 등 특별 재판으로 분류된 사건에선 10건 중 9건에서 의견이 같았다. ‘진보 톱3’인 김선수, 박정화, 김상환 대법관은 전체 40건 중 32건(80%)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5명의 대법관은 ‘여순 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한 민간인의 유족이 재심을 열어달라며 낸 소송에서 “재심을 열 수 있다”는 다수 의견을 냈다. 재심은 판결이 확정된 사건의 재판을 다시 연다는 뜻이지만, 이 사건은 확정 판결문이 남아있지 않아 재심 대상인지 불분명했다. 김선수 대법관은 “유족을 특별법으로 구제해야 한다는 이유로 재심 청구를 거절할 수 없다. 더 나은 입법을 기다린다며 사법의 역할을 포기해선 안 된다”며 보충 의견도 냈다.

김선수 대법관을 제외한 4명의 대법관은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된 이재명 경기도지사에 대한 상고심에서 “질문에 답했을 뿐 적극적으로 허위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며 올 7월 함께 무죄 의견을 제시했다. 중도 성향인 권순일 전 대법관, 김재형 대법관이 같은 의견을 내면서 유죄를 선고한 원심이 파기 환송됐다. 4명의 진보 대법관은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 부부가 정치 평론가 변희재 씨 등을 상대로 “종북, 주사파라고 비방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낸 소송에서도 “보수 정권기에 종북, 주사파로 낙인찍히는 건 상상 못할 공포”라며 이 전 대표 측 손을 들어주는 소수의견을 함께 냈다.

○ ‘보수 4형제’는 반대의견 결집


대법원 구성원 과반이 진보로 기울면서 ‘보수 4형제’가 반대의견에 결집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현직 대법관 중에선 노태악, 이기택, 안철상, 이동원 대법관이 보수 성향이었다. 46명의 전·현직 대법관 가운데 각각 6, 12, 15, 16번째로 보수적이다. 현직 보수 1위인 노태악 대법관이 올 3월 4일 임기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조희대 대법관과 이기택, 안철상, 이동원 대법관 순서로 대법원 안의 ‘보수 4형제’ 역할을 했다.

노태악, 이기택, 안철상, 이동원 대법관은 박상옥 대법관과 함께 이재명 경기도지사에 대한 상고심에서 이 지사의 혐의를 유죄로 봐야 한다면서 “TV토론회에서의 허위 발언을 처벌할 수 없다는 듯한 다수의견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대법원이 확립해온 태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해 화제가 됐다. 이기택, 이동원 대법관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대한 법외노조 통보를 무효로 본 다수의견을 비판하면서 “완벽한 법체계를 애써 무시하면서 입법과 사법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판결 성향 지수로 보면 ‘보수 4형제’는 임기 도중 점점 보수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중도 성향을 보이던 조희대, 이기택 대법관은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이후인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지속적으로 보수 방향으로 기울었다. 이동원, 안철상 대법관은 취임 후부터 매년 보수 쪽으로 이동했다. 김명수 대법원의 ‘진보화’ 여파로 중도와 보수 성향을 오가던 대법관들이 오히려 보수 쪽으로 결집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내년부터는 전체 대법관 14명 중 진보 성향 대법관이 10명에 이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돼 각각 중도, 보수로 분류된 박상옥, 이기택 대법관은 내년 5월과 9월 퇴임한다. 박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이 2명의 공석을 포함해 대법관 총 13명을 임명할 수 있게 됐다.

고도예 yea@donga.com·유원모·박상준 기자

 

최근 숨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 성향 분석에서 재직 기간 27년 내내 진보 성향 1, 2위를 꾸준히 유지했다. 가장 많은 소수 의견을 낸 것도 긴즈버그의 몫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미국 사법부 ‘진보의 상징’으로 불렸다.

한국은 2004년 “여성과 소수자 보호를 위한 시대적 요청”이라는 이유로 김영란 전 대법관이 첫 여성 대법관으로 발탁됐고 현재까지 7명의 전현직 여성 대법관이 임명됐다. 김 전 대법관을 포함한 전수안 박보영 김소영 전 대법관, 박정화 민유숙 노정희 대법관 등 전체 여성 전현직 대법관 7명은 모두 ‘진보 대법관’ 상위 20위 안에 위치했다. 여성 대법관 2호인 전수안 전 대법관은 김영란 전 대법관에 이어 전체 대법관 중 진보 성향이 2위였다. 진보 성향으로 순서를 매기면 김소영 전 대법관은 전체 대법관 가운데 16위, 박보영 전 대법관이 18위였지만 전체 대법관의 판결 성향으로 보면 진보에 가깝다. “대법원 내부의 서열화를 없애고 소수자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여성 대법관의 발탁이 더 필요하다”는 법원 안팎의 여론이 판결 분석만으로 본다면 일리가 있는 주장인 셈이다.

전체 대법관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성향을 보인 김영란 전 대법관은 여성 대법관 중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가장 두드러진 판결을 남겼다. 김 전 대법관은 2008년 ‘제사 주재자 승계’ 판결에서 소수의견을 통해 ‘장남이나 아들만 제사 주재자를 승계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밝혔다. 2009년엔 13명의 대법관 중 유일하게 소수 의견을 내며 성폭력 피해 아동 본인이 처벌 의사를 철회했더라도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후 김 전 대법관의 소수의견은 국회에서 입법화됐다.

‘김명수 코트’에서는 여성 대법관이 3명으로 역대 최대다. 김 전 대법관이 퇴임 전인 2010년 “적어도 여성 대법관이 3명은 돼야 한다”고 했던 바람이 이뤄진 것이다.

현직 여성 대법관 3명은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했지만 박정화 대법관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제청, 민유숙 노정희 대법관은 김명수 대법원장의 제청을 거쳤다. 현직 중에서는 박 대법관이 전체 대법관 중에서 진보 성향이 6위, 민 대법관은 9위, 노 대법관은 14위였다. 박 대법관과 노 대법관은 진보 성향의 법관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다. 민 대법관과 노 대법관은 양성 평등을 연구하는 모임인 젠더법연구회 회장 출신이다. 한 법조계 인사는 “현직 여성 대법관들에게 긴즈버그 전 대법관과 같은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판결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있다”고 말했다.

박상준 기자 speakup@donga.com

 

0.021(이용훈)→0.166(양승태)→―0.391(김명수).

최근 15년간 대법원 전원합의체 재판장인 이용훈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김명수 대법원장의 판결 성향지수는 당대 대법원의 지향점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전 대법원장은 분석 대상 46명의 중간 지점인 왼쪽에서 23번째, 오른쪽에서 24번째에 위치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오른쪽에서 19번째로 보수 성향을 보였고, 반대로 김 대법원장은 왼쪽에서 13번째로 진보적인 색채가 뚜렷했다.

대법원장은 전합에서 맨 마지막에 표결을 하고, 관례적으로 거의 다수의견에 선다. 최고 법률심인 전원합의체의 재판장이 소수의견에 설 경우 생길 수 있는 사회적 혼란을 줄이자는 취지다. 그런 점에서 대법원장의 판결성향지수는 해당 대법원의 성격을 대변하는 가늠자로 볼 수 있다.

○ 대법원장 주관 드러나는 ‘7 대 6’ 사건


전합은 대법원장과 12명의 대법관(법원행정처장 제외) 등 13명이 참여해 다수결로 결론을 낸다. 보통 토론과 합의를 통해 중론을 모으는 방식을 취하지만 대법관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나뉘어 최종 의사를 표명하는 대법원장에 의해 결론이 좌지우지되는 ‘7 대 6’ 사건도 종종 발생한다. 이 전 대법원장은 3건, 양 전 대법원장은 5건, 김 대법원장은 2건의 7 대 6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장의 판단이 뚜렷이 드러나는 이 같은 사례를 통해서도 해당 대법원의 성향을 짐작해볼 수 있다.

김 대법원장 재임 때 가장 의견 대립이 치열했던 전합 재판은 ‘백년전쟁’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부도덕한 플레이보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스네이크 박’이라고 비방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 제재의 부당성을 따진 사건이다. 진보 대법관 성향과 중도·보수 성향 대법관이 6 대 6으로 팽팽히 나뉜 가운데 김 대법원장은 “정치인 등 공인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으로 인정돼야 한다”며 진보 대법관들의 손을 들어줬다.

반면 양 전 대법원장은 2012년 시국선언에 참여한 전교조 교사에 대한 형사처벌 가능성을 따지는 재판에서 “공무원의 중립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며 보수 의견에 섰다. 이 전 대법원장은 MBC ‘PD수첩’의 광우병 보도에 대해 언론의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허위사실에 대해선 정정보도의 대상이 된다며 7 대 6 결정을 내렸다.

○ 김능환, 고영한, 권순일은 캐스팅보터


각 대법원별로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 대법관들의 판결 성향을 통해서도 각 대법원의 상대적 이념 분포를 가늠할 수 있다. 이 전 대법원장 때는 김능환 전 대법관, 양 전 대법원장 시기에는 고영한 전 대법관, 김 대법원장 때는 이달 7일 퇴임한 권순일 전 대법관이 중도에 위치했다. 대법관들의 의견이 갈리는 사건에서 캐스팅보터 역할을 자주 하는 이들 3명의 공통점은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나 법원행정처 차장 등을 거치며 법리에 밝고 대법원 사정에 정통하다는 점이다.

권 전 대법관은 진보에서 21번째이자 판결성향지수가 ―0.010으로 46명의 대법관 가운데 평균값인 0에 가장 근접한 대법관이다. 강제징용 재상고심 사건에선 다수의견과 달리 일본 측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보수적 판결을 내리기도 했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판결 등에선 진보 쪽에 섰다.

고영한 전 대법관은 양승태 원장 때 8 대 5로 나뉘었던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혐의 유죄 인정 재판 등에서 캐스팅보터 역할을 하며 보수적인 결론에 손을 들었다. 김능환 전 대법관은 종교학교에 배정된 학생들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 등에서 다수의견에 섰다.

○ 대통령 바뀌면 이념 분포 넓어져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변화에 따라 대법관들의 판결 성향이 달라지는 경향도 발견된다. 이, 양 전 대법원장은 6년 임기 중간에 대통령이 바뀌었는데 자신을 임명하지 않은 대통령과 공존하는 후반부로 갈수록 대법관들의 의견이 보다 다양해지는 패턴을 보였다. 정권 변화에 따라 판결 성향이 달라지는 것은 대법관이 대법원장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식이어서 일부 정치적 영향을 받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한 전직 대법관은 “대법관들은 한쪽으로 경도되지 않고 균형을 찾아가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시대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보수로 쏠리면 진보로, 진보로 뭉치는 것 같으면 보수로 균형을 잡으려는 특성이 반영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유원모 onemore@donga.com·박상준·고도예 기자

 

동아일보는 2005년 9월부터 2020년 9월까지 약 15년 치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 274건을 입수했다. 여기엔 전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 등 총 46명이 참여했다. 각 사건별로 과반수의 다수의견과 반대의견, 다수의견과 결론은 같지만 논리가 다른 별개의견으로 분류했다.

서울대 폴랩(한규섭 교수 연구팀·사진)은 이 자료를 앤드루 마틴 미국 워싱턴대 교수팀이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 성향 분석에 사용한 기법으로 분석했다. 가령 10 대 3 판결에서 A, B, C 세 대법관이 반대의견으로 함께 판결한 뒤 다른 판결에서 A, B 두 대법관이 11 대 2로 함께 반대의견을 냈다면 A와 B 대법관이 가장 유사한 점수를 부여받게 된다. 7 대 6 판결에서 6명의 의견에 동참하는 것보다 11 대 2 판결에서 2명의 의견에 함께한 것이 진보나 보수 성향 점수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에서 같은 수의 정답을 맞혔더라도 남들이 많이 틀리는 문제에서 정답을 맞혔을 때 더 높은 점수를 부여하는 원리와 같다.

분석값은 점수가 낮을수록 진보, 높을수록 보수 성향이다. 기준이 되는 0점은 전체 분석대상인 대법관 46명의 평균값이다. 통계기법의 원리상 판결 성향 점수의 진보와 보수가 이념적 성향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러 조합의 대법관들끼리 얼마나 같은 의견을 냈는지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때문에 소수의 가치관을 지향하는지 등의 포괄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무수한 서로간의 유사도에 근거하여 상대적 위치를 측정하기 때문에 같은 시기에 함께 대법관을 하지 않았더라도 비교가 가능하다.

한 교수는 “미국은 대법원 구성에 따라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임명권자인) 대통령 선거 때부터 큰 관심사”라며 “한국의 대법관 임명 과정은 인상 평가나 진영 논리로 얼룩졌는데 앞으로 계량적인 성향 분석을 통해 합리적인 논의와 검증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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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스코트 피츠제럴드를 아십니까.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입니다.
한 여자를 지독스레 사랑하다

끝내는 그 사랑 때문에 파멸해버리는 남자 개츠비.
저는 고등학교 친구 자취방에서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제 나이 스무 살이었습니다.
영문학도이던 그 친구는

'교수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천한 책'이라면서
일독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저

'돈 걱정 없는 미국 유한(有閑)층의

팔자좋은 사랑 타령'이었습니다.
그 때는 고리끼의 '어머니'나

조정래의 '태백 산맥'같은 소설이

가슴을 더 뛰게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십 몇 년이 흘렀습니다.
제 나이도 삼십대 중반이 됐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개츠비 열풍이 불더군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일본 작가가 일으킨 바람이었습니다.
그의 소설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와타나베)이 '위대한 개츠비'를

최고의 소설로 추켜세운 때문입니다.
언제 읽어도,
단 한 페이지도 시시한 대목은 없다는 극찬을 하면서.
와타나베의 선배라는 친구는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하고는

친구가 될 수 있다'고 거들더군요.

그는 또 죽은지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에는

손도 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데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인 피츠제럴드 만은

예외라고 말했습니다.
난데없는 하루키 열풍에

개츠비도 덩달아 스타가 된 셈입니다.
그런데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를 통해

말하려고 했다는 주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나는 정작 그의 책에서는 찾지 못했습니다.
대신 하루키 덕분에 다시 만나게 된 개츠비를 통해

그 의미를 알게됐습니다.
그 후 '위대한 개츠비'는 저의 애독 소설이 됐습니다.

 또 몇 년이 지났습니다.
올 해로 제 나이 마흔 살이 됐습니다.
하루키가 고백했던 것 처럼

스무 살 청년이 20년이 지나면

마흔 살이 된다는 사실을,
저 역시 실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올 해 마흔입니다.
서른 살 되던 해,

저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주절거리고 다녔는데
마흔 살이 되니 노래 따위는 부르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신문을 뒤적이다

피츠제럴드가 메릴랜드주 락빌에 묻혀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차로 30분 거리 밖에 안되는 가까운 곳에 그가 묻혀있다니-.
갑자기 그의 묘소에 가고 싶었습니다.


 

 

무슨 청승이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 한 구석엔 혹시 그가

마흔 살의 의미에 대해 뭐라고 한 마디 던져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역시 마흔 살의 인생은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으니 말입니다.

 마흔 살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 젤다 세이어와 별거 상태였습니다.

 

 아내의 정신병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육신도 과도한 음주와 질병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습니다.
그 해 MGM 영화사는

그와 맺은 전속 대본가 계약을 중단했습니다.
아내의 병원비로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피츠제럴드가 심장 마비로 비명 횡사하기 4년 전,
그의 나이는 마흔이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끝까지

자신을 실패한 인생으로 믿고 죽어갔습니다.
당시만 해도 아무도 그가

위대한 미국 작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피츠제럴드의 분신인 개츠비도

데이지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데이지의 배신으로 개츠비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꿈꾸는 자는 그의 꿈이 사라진 이상,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는 것이기에.

 '위대한 개츠비'는 피츠제럴드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소설 속의 개츠비가

그의 연인 데이지를 만나 사랑에 빠진 그 즈음,
현실의 피츠제럴드는 1918년 여름 어느 무도회장에서
젤다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절,
개츠비와 피츠제럴드는 군인이었습니다.
상류층인 데이지의 가문이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개츠비에게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다가왔듯이
앨라바마주 대법원 판사의 딸인 젤다의 신분 또한
세일즈맨 아버지를 둔 피츠제럴드를 주눅들게 했습니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얻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벌었듯이
피츠제럴드는 젤다와 결혼하려는 열망으로

소설에 매달렸습니다.
가난한 샐러리맨과는 살 수 없는 기질의 젤다가
그와의 약혼을 깨버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의 피츠제럴드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1920년 3월 26일은 피츠제럴드가
하룻 밤 사이에 유명해진 날입니다.
그의 처녀작 '낙원의 이 쪽'(This Side of Paradise)은
그를 단숨에 문단의 총아로 만들어놓습니다.
일주일 후 젤다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1919년 봄,

젤다가 앨라바마에서 군 제대 후 뉴욕으로 간 피츠제럴드에게
보낸 편지(아래 사진)에는
'내 예감에 우리는 함께 죽을 거야'라고 적혀있습니다.
이 편지는 그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들어
피츠제럴드가 '낙원의 이 쪽' 마지막장에

그대로 인용했다고 합니다.



 재능많고 아름다운 젊은 부부는

10년 동안 행복합니다.



 그 시절은 '위대한 개츠비'가 집필된

피츠제럴드의 황금 시절입니다.
피츠제럴드는 아내와 함께 묻혔습니다.


 <피츠제럴드가 묻힌 세인트 메리 교회. 교회 왼쪽이 공동 묘지>




<젤다의 편지>


그가 죽고 8년 뒤에

아내는 정신병동 화재로 숨졌습니다.

기구한 운명의 두 사람입니다.


그의 묘비 앞 석관 뚜껑 위에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이 새겨져있습니다.

 




"So we beat on,(우린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boats against the current,(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듯)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끝없이 과거 속으로 물러서면서)"

 

 

 

 

 

끊임없이 그의 과거를 넘어서려고 발버둥쳤던 개츠비의 노력은

끝내 헛된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러나 강물을 거스르려했던 개츠비의 노력을 피츠제럴드는
인간의 숙명이라고 봤습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별 도리없이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붙여야 하는 시지프스의 운명처럼.
피츠제럴드를 만나고 와도 삶은 명쾌해지지 않습니다.
마흔 살이
불혹(不惑)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닌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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