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이후엔 미국 어느 곳을 가나

경비가 삼엄합니다.

미국 의회도 예외는 아니지요.

의회 안팎 가릴 것 없이

총을 든 무장 경찰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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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 옆을 지날 때면

죄 지은 것도 없는데 괜히 주뼛합니다. -_-;;

민의의 전당은 이같은 철통 경계 속에

주인인 국민들에게 개방되고 있습니다.

의회 투어 접수 창구 앞에는

전 세계와 미 전역에서 찾아온 투어 인파로

연일 장사진을 이룹니다.

저는 일반 투어 대신 워싱턴 타임스 인턴 자격으로

하루 짜리 출입 기자증을 발급받아 견학에 나섰습니다.

덕분에 일반 투어객들에겐 출입 제한 구역인

기자실이나 원내총무실 같은 곳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궁금했던 의회 기자실.

제가 가본 곳은 상원 기자실이었는데

흡사 청계천 중고 책방에 온 듯한 느낌이더군요.

백악관 기자실도 협소해서 올 여름 리모델링한다는데,
좁기로는 의회 기자실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 곳은 워싱턴 타임스 부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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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싱턴 타임스 부스 건너 편이

휴게실 겸 행정실이고요.

행정실 안 쪽은 뉴욕 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 같은

이른바 메이저 언론의 부스인데

마이너들이 모여있는 기자실 보다

다소 넓어 보였습니다.

가방 크다고 공부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 메이저 언론의 취재 조건은 마이너에 비해

여러 면에서 유리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자실을 둘러보면서 부러웠던 점은

기자실에서 문 하나만 열고 나가면

곧바로 상원 본회의장 2층 기자석과 연결되도록

배치한 구조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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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 상단 2층이 기자실과 연결된 기자석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국회 출입 시절

본회의장과 기자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불편했던 기억을 갖고 있거든요.
마감 시간 임박해서
본회의장과 기자실 왔다갔다 하다보면
머리에서 연기납니다.

 제가 상원 본회의장을 찾은 날은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 문제로 공화당과 민주당이
대치하고 있을 때였는데
운 좋게도 본회의장에 앉아있는
존 케리 상원의원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때는 어떤지 몰라도

그 날은 상원 본회의장에

케리 의원을 포함해 3명 뿐이더군요.

워싱턴 타임스 상원 출입기자인 스테판 다이난은

상원 의원쯤 되면 워낙 바빠서 평상시 본회의 출석율은

 대체로 저조한데 투표율은 매우 높다 고 설명했습니다.


 여기는 옛 상원 본회의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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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8 3 30일 앤드루 존슨 대통령에 대한

탄핵 표결이 이뤄진 곳으로 유명하지요.

당시 탄핵 표결 과정에서

미 역사상 가장 용기있는 의원으로 평가받는

영웅이 한 명 탄생합니다.(제 블로그의 용기있는 의원 참조)

 

 로툰다 홀로 가는 도중에 들른

톰 딜레이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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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한국 방문 당시
여행 경비를 로비 단체로부터 받았다는

이른바 공짜 여행 스캔들'에 휩싸여 고생 좀 하고 있죠.
그런데 그건 그거고
하원 다수당인 공화당 원내총무로서의 위상은
막강하다는 것이 다이난 기자의 설명입니다
.

초선인 경우에는 민주당 의원들마저도

상임위 배정 등 이런 저런 사안에서

다수당 원내총무의 눈치를 봐야 할 정도라고 합니다.
한국 기자들 용어로 '뻗치기'라는 게 있습니다.
코멘트가 필요한 취재원을 죽치고 기다리는 일입니다.
미국 기자들도 이 문 앞에서 '뻗치기'를 한다는군요.
그러다 취재원이 나오면
거머리처럼 달라붙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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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상원 의원(임기 6)은 주의 크기에 관계없이

50개 주에서 2명씩 100명을 선출하고요,

임기 2년의 하원 의원 수는 인구 비례로 결정되는데

대략 55만 명에서 60만 명 사이에 한 명씩 뽑습니다.

그러다 보니 캘리포니아 처럼 인구가 많은 주에서는

하원 의원이 53명에 이르지만

알라스카나 델라웨어, 몬태나, 노스 다코타, 사우스 다코타,

와이오밍 처럼 인구 밀도가 희박한 주에서는

상원 의원은 2명인데 하원 의원은 1명에 불과합니다.

 

 미 의회를 밖에서 보면

의사당 돔이 상징처럼 다가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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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으로 들어가면 돔 내부의 로툰다 홀이야말로

미 의회의 심장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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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판테온 신전을 본떴다는 로툰다 홀은

천정의 프레스코화가 압권입니다.

로툰다 홀에 서서 180 피트 위의 천정을 바라보면

브루미디 작품인 조지 워싱턴의 승천(昇天)이 아스라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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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을 좀 더 클로즈 업을 하면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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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더 확대하면, 워싱턴이 잘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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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싱턴이 15명의 여자들과 함께 하늘로 오르는 광경인데

2명은 자유와 승리를, 나머지 13명은

독립 전쟁 후 미 합중국에 가입한 13개 주를

상징한다는군요.

로툰다 홀은 영예로운 시민들의 유해가 조문객을 맞기 위해

잠시 안치되는 장소로도 유명합니다.

2014년 6 5일 서거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추모객을 맞기 위해

며칠 동안 로툰다 홀에 안치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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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브라함 링컨과 케네디, 아이젠하워 대통령,

에드가 후버 FBI 국장, 헨리 클레이 상원의원, 더글라스 맥아더,

1,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한국전에서 전몰한 무명 용사 등이

이 홀에서 추모됐습니다.

 

로툰다홀에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명작들이 다수 걸려있는데요

미국 역사화가 존 트룸벌(John Trumbull.1756~1843)의 '미국 독립 선언'이 유명합니다.

 

 

 미 의회의사당 사이트

 

이 그림은 트룸벌이 미 의회의 주문을 받아 2년 동안 그린 것으로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미 대륙의 13개주 대표들이 독립선언서 초안을 대륙회의 의장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마치 사진을 찍어놓듯이 묘사했습니다.

버지니아주의 토머스 제퍼슨(그림 속에서 독립선언문 초안을 전달하고 있는 빨간 조끼를 입은 인물, 미국 3대 대통령)이 기초한 독립선언문은 장차 전 세계 민주주의 이념의 뿌리가 될 자유와 평등의 이념들을 담았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自明한 眞理로 믿는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된다는 것,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권리를 부여받는다는 것, 그리고 이에는 삶, 자유 및 행보의 추구가 포함된다는 것, 이러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 정부들이 수립되며, 이들의 정당한 권력은 被治者의 同意에서 나온다는 것, 어떠한 형태의 정부라도 그러한 목적을 파괴하는 것이 될 때에는 그 정부를 바꾸거나 없애고 새 정부를 수립하되, 인민들에게 자신들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잘 이룩할 것 같이 보이는 그러한 원칙들에 입각하여 그 토대를 마련하고 또 그런 형태로 권력을 조직하는 것이 인민의 권리라는 것 등이다."

 

이후 미국의 독립투사들은 왕의 정부 대신에 인민의 동의에 토대를 둔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 싸웠고,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이 그림은 '행운의 지폐'로 알려진 2달러짜리 미국 지폐 뒷면에 인쇄돼 있습니다.   

 

 아래는 로툰다 홀의 남쪽에 위치한 옛 하원 회의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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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 미국사에 단골로 등장하는 역사적 현장이지요
,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한 프랑스 정치가 라파예트가
미 의회에서 연설한 첫 외국인이 된 장소이고요
,

제임스 매디슨이나 제임스 먼로, 존 퀸시 애덤스, 앤드류 잭슨,

밀러드 필모어 등이 이 곳에서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특히 '대머리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와 이 곳과의 인연은 각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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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출마한 1824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어느 후보도 과반수 선거인단을 확보하지 못해

헌법에 따라 하원으로 결정권(각 州가 한 표씩 행사)이 넘어갔는데

존 퀸시 애덤스는 1825 2 9일 이 곳에서

13개 주의 찬성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가 퇴임하자 고향 주민들이 하원 의원으로 추대,

17년 동안 하원 의원으로 이 곳에서 봉사했고요,

자신의 의석에서 쓰러져 숨집니다.

지금은 이 곳이 National Statuary Hall로 변해

각 주에서 헌정한 조각상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각자 자신들 주의 대표 선수만을 골라 보낸 조각상들이지요.

버지니아주는 남북 전쟁 당시 남군 총사령관이었던 리 장군,
텍사스주는 텍사스 건국의 아버지 샘 휴스턴.

이런 식으로 50개 주가 2명씩 선발하도록 한 때가 1864년인데

미국 사람들 무슨 일이든 서두르는 법이 없습니다.

50개 주 전부 최소한 1명씩 선발을 마무리한 시점이 1971년입니다.

아직도 5개 주는 나머지 1명을 놓고 고심하고 있답니다.

 

 옛 하원 회의장에서 로툰다 홀로 통하는

 문 위에 눈이 머뭅니다.
 Car of History라는 조각상인데
  역사의 수레바퀴 정도로 부르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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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여신 클리오가 시간의 마차를 타고 있는 모습입니다
.

수 많은 미국사의 주역들이 이 곳을 거쳐갔지만

오직 클리오 만이 덧 없는 인생사를

말 없이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의 태자 무덤가에 서서

신라 천년 사직을 회고한 정비석의 심정이

조금은 공감이 됩니다.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暗然)히 수수(愁愁)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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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의회 견학 과정에서 바쁜 시간을 할애한
워싱턴 타임스 스테판 다이난 기자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합니다.
솔직히 저도 현장에 있을 때
한창 바쁜 시간에 누가 찾아와서 내 시간 축나면
흔쾌할 수 없었거든요.
마감 시간 걱정하면서
총총히 기자실로 향하는 그의 뒷 모습이
좀체 잊혀지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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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체 잊혀지지 않는 취재원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문득 문득 떠올라

동안 상념에 젖게 하는-.

한나라당 장윤석 의원(아래 사진 오른쪽)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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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노무현 정부 출범 ,

법무부 검찰국장에서 서울고검 차장으로 좌천됐습니다.

서울 지검장을 목전에 두고 한직으로 밀려났으니

검찰사상 전례 없는 수모를 당한 셈이지요.

그래서 설욕하기 위해

2004 총선에 출마했는지도 모릅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저는,

그의 부침을 오랫동안 지켜봤습니다.

17 국회에 입성했으니

다시 떠올랐다고 있겠네요.
그의 부침을 바라보며
인생사를 생각해 봅니다.

아래는 연전에 세계일보 e-기자클럽을 통해

의원의 인생 유전을 소개한 글입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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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정부의 검찰 개혁 태풍이 휘몰아치던 2003 3 13.

장윤석 서울고검 차장검사가 26년의 짧지 않은 검사 생활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나는 친척의 부음 기사를 읽는 기분으로 접할 없었다. 그는 초년병 법조 기자 시절의 기억 속에, 강렬한 인두 자국을 남겨준 검사였기 때문이다.
 1994
4 서울지검 기자실을 들어섰을 나는 입사 4개월 차의 초년병이었다. 검사는 보다 7개월 앞서 서울지검 공안 1부장에 임명됐. 때는 검사도 나도 검찰을 강타한 '5.18' 고소-고발 태풍의 폭풍을 예감조차 못하고 있었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라고 했던가. 종일 발품을 팔아도 화제 박스 하나 챙기기 힘들 정도로,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하리 만큼 평온한 나날이었다.
 

 정동연 광주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 322명이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 35명을 '내란 내란목적 살인'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한 것은 94 513. 김영삼 대통령이 93 5.18 13주기를 맞아 "역사에 맡기자" 취지의 담화문을 발표한 1 만이었다.

 검찰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건 주임 검사를 맡은 검사가 중심에 섰다. 공안1 검사 10 전원이 투입됐고 단일 사건으론 검찰 사상 최대인 269명을 조사했다. 10 2000여쪽(라면상자 400여개 분량) 수사 기록이 작성됐다. 사실 관계 규명에 있어서는 비교적 충실했다는 평을 받았다.

 마침내 95 7 18, 검찰의 결론은 '공소권 없음' 이었다.

 "피의자들이 정권 창출 과정에서 취한 '5.18' 진압 일련의 행위는 헌법질서를 바꾸는 고도의 정치 행위로서 법적 판단의 대상이 없다" 것으로 이른바 '성공한 쿠데타' 처벌할 없다는 논리였다.
 
 
여론의 비난이 빗발쳤다.
 
검사는 "나는 역사학자도 정치학자도 아닌 수사 검사로서 불행했던 과거사의 진상을 밝혀내고 이에 대한 법적 평가를 내리는데 최선을 다했다" "우리의 수사 결론이 15 일에 대한 평가이듯, 우리도 15 뒤에 다시 후세로부터 심판의 대상이 것이라는 생각에서 경건하게 임했다" 말했다.

 그러나 해도 넘기지 못하고 검찰의 결론은 심판대에 올랐다. 당시 집권당이던 민자당이 여론에 밀려 '5.18 특별법' 제정키로 결정한 것이다. 검사는 인천지검 차장 검사실에서 보도를 씁쓸한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그는 "당시 수사진의 입장에서 고소-고발인에 대해 불기소 유예처분을 내린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특별법 제정 자체가 현행 실정법 테두리 내에서는 5·17 군사쿠데타 주역들에 대한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반증 아니냐" 말했다.
 
 
서울지검의 새로운 수사팀은 이제 넉달 내렸던 결론을 스스로 뒤집기 위해 새로운 논리를 개발해 내야 딱한 처지가 됐다. 수사팀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모두가 알고있는 그대로다. 전두환, 노태우씨가 서울 구치소의 3.5 독방 속에 수감되는 동안 '공소권 없음팀' 검사는 '잊혀진 검사' 됐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96 8 26일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재판 1 선고공판이 있던 , 나는 우연치곤 얄궂은 장소에서 그와 조우했다. '전두환 사형, 노태우 징역 22 6' 형량을 선고한 1 재판부(서울지법 형사합의 30,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자) 그날 기자들과 이른바 뒤풀이 회식 자리를 마련했다. 우리들이 보니 곳에 이미 검사가 있었다.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린 당시 서울지검 공안1 검사들과 함께였다.

 화장실에서 만난 검사는 "최종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서울에 오지 않으려 했는데 후배들 심정이 심란할 같아서..."라면서 말을 맺지 못했다. 萬感의 5.18사건이 1 매듭된 같이 고생했던 '공소권 없음팀' 부원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난 자리가 공교롭게도 1 재판부와 기자들과의 회식 자리였던 것이다. 김영일 부장과의 어색한 인사를 마치자 마자 그는 후배 검사들을 동반하고 총총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의 쓸쓸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번째 만남은 내가 4 4개월의 법조 기자 생활을 정리하고 외교부로 발령이 직후였다. 98 여름이었다. 장검사는 서울고검 검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고검 근무는 속칭 ' 먹은' 자리라고 한다. 98 고검 검사에게도 수사권이 부여되고 고검 부장이라는 직책이 신설되기도 했지만 전까지는 대기 발령이나 다름없는 자리로 통했다. 김대중 정권 출범 직후에는 정권에서 나가던 검사들이 줄줄이 고검으로 발령 받았다. 검사의 고검 근무를 '공소권 없음'  결론과 직접 연결짓고 싶지 않지만 딱히 그렇지 않다는 근거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토요일 점심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지검 청사 고깃집에 소주 병을 마주하고 앉았다. 나는 그의 검사로서의 운명을 가른 '공소권 없음' 결론이 내려진 배경을 알고 싶었다.
실제 5.18 수사는 서울지검 공안1 검사들이 했지만 최종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는 김도언 검찰 총장을 비롯한 검찰 수뇌부가 서울지검 간부 주임검사와 합동 회의를 갖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검사의 보고 라인은 한부환 서울지검 1차장, 최영광 서울 지검장- 송종의 대검 차장- 총장이다. 안강민 대검 공안부장과 김재기 대검 공안 기획담당관 등이 측면에서 관여했을 것이다.

"
선배 혼자 결정내린 것은 아니죠"
"
뻔한 묻고 그래"
"
위에서 내려온 主文(검찰의 최종 수사입장을 설명하는 ) 선배 결론과 같았습니까"
"
우리 소주나 하지"
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어느 해인가 법무부 국정감사 취재를 나가 복도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초임 검사장이 흔히 임명되는 법무부 기획관리
실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후에 검사가 서울 지검장 임명 직전의 길목인 법무부 검찰국장에 임명됐다는 기사를 읽었다. 프로필엔 "5.18 사건 공소권 없음 결정 이후 오랫동안 閒職을 머물다...."라고 씌여 있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이제 5.18 사건의 그늘에서 벗어났는가', 라고 뇌었다.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달리, 들려온 것은 그의 퇴임 소식이었다. 것도 검찰국장에서 서울고검 차장검사로 좌천된 후의 퇴장이었다.
그의 퇴임사가 아직도 귀에 울리는 하다.
"
서열 파괴라는 미명 하에 선배를 후배 밑에 앉히는 것은 떠나라는 협박이다. 초연히 사라지는 것이 의연한 알지만 불명예스럽게 서울고검에 부임한 떠나는 것은 스스로 물러서기 보다는 차라리 인사 조치의 총탄에 맞아 죽어 나가기로 마음먹은 때문이다. 법무부 검찰국장을 고검 차장으로 좌천시킨 검찰사 초유의 불합리한 인사를 검찰 정사에 공식 기록화함으로써 다시 있어서는 안될 사건으로 기억하게 하고 역사적 평가를 위한 공식자료로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실상을 모르는 저의 戰死 후배들을 위한 용퇴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려는 뜻도 있다"

 그가 퇴임사를 내게 미리 보여줬다면 나는 歸去來辭 같은 읊조리고 떠나가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그와는 별개로 나는 생각해 본다. 검사가 5.18 수사의 주문 결정 과정에서 당당히 유죄 소신을 폈다면 지금쯤엔 검찰총장이 있을까, 라고.  2003년 3월

 함승희 의원을 다시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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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취재원이라기 보다는

조지타운 대학 연수 동기 말입니다.

그와는 95 여름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햇병아리 기자였고

그는 입만 열면 대서 특필되는 유명 인사였습니다.

당시는 함승희 변호사 시절이었지요.

 

제가 국회 출입 기자가 직후,

변호사도 2000 총선을 통해 의원으로 변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2004 선거에서 낙선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만든 후에도

민주당에 그대로 남아 다가
탄핵 바람에 휩쓸렸습니다
.

잔류는 그의 선택이었으니
결과 또한 그의입니다.

 

그는 다시 변호사로 돌아갔습니다.

제가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입니다.

의원에 대한 평가는

보는 입장에 따라 여러 갈래일 것입니다.

저는 그를 지금도 ‘성역 없는 수사’를 외치던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의 함승희 검사로 기억합니다.

 

초선 의원 함승희의 의정 활동을 지켜보면서도

잣대로 그를 평가해 합니다.

그가 앞으로 어느 자리에 있든

그럴 생각입니다.

‘검사 함승희’의 혼과 기백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검사 함승희’가 궁금하시면

아래 글이 단서가 있겠네요.

2004년 1월 세계일보 e-기자클럽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말도 안돼. 미친 X 염치가 있어야지. 다른 부패한 공무원들은 무슨 명분으로 처벌할 거냐"
검사 출신으로 다혈질인 함승희 의원이 30 오후 비리의원 7 전원에 대한 체포 동의안이 부결되자 국회 본회의장에서 동료 의원들을 보고 쏟아냈다는 말이다. 국민들은 함의원의 발언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스스로 '염치없는 미친X' 길을 택했다.}

 2003
12 31, 인터넷 매체인 '프레시안' 박태견 편집국장이 ‘검찰,즉각 국회와의 전쟁을 선포하라' 제목으로 게재한 위의 데스크 칼럼을 읽어가면서 나는 '역시 함승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한나라당 박재욱, 박주천, 박명환, 최돈웅 의원과 민주당 이훈평, 박주선 의원, 열린 우리당 정대철 의원 7명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전원 부결된 다음날이었다. 특유의 이북 사투리(강원도 양양 출신인 그의 말투는 얼핏 들으면 이북 사투리같다) 섞인 억양으로, 미간을 잔뜩 모은 고성을 지르고 있는 의원의 모습이 앞에 선했다.
의원의 행동을 놓고는, 그래도 명색이 동료의원인데 너무 몰인정하다는 반응에서부터 혼자 깨끗한 ,쇼를 한다는 비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본인도 일원이 정치권을 향해 육두문자까지 동원하며 분노를 토해낸 의원의 행동은 것만 떼놓고 보면 선뜻 접수가 되지 않는다. 그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93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파견 검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93
4 21 저녁 서소문 대검청사. 함승희 검사는 전율했다.
로비 혐의를 잡고 은밀하게 청사로 연행해 안영모 동화은행장 입에서 대어급 로비 대상자들의 이름이 술술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의외의 사태진전이었다. 후일 검사는 "정년 퇴임 때까지 검사로 재직한다 해도 건져 올릴까 말까한 대어급 --재계의 거물급이 낚싯대에 주르르 매달린 셈이었다. 낚싯대가 부러질 같은 예감이 왔다. 희열과 전율이 교차했다" 술회했다. 이른바 동화은행장 비자금 사건은 그렇게 막이 올랐다. 그러나 의원과 전직 장관,전직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대거 연루됐던 사건은 정치논리에 밀려 흐지부지되고 만다. 낚싯대가 부러진 것이다. 당시 수사라인은 함승희 검사, 황성진 대검 중수2과장, 김태정 대검 중수부장, 김도언 대검차장, 박종철 검찰총장,김두희 법무장관이었다.
 그는 "동화은행장으로부터 억원씩의 돈을 받아먹은 전직 장관과 경제수석,청와대 요인,금융계 황제라는 사람들을 소환해 ' 받아먹은 사실이냐' 물어보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물증(수표추적) 없으면 소환도 없다' 해괴한 논리,도대체 형사소송법 어느 조문에도 없고 과거 어느 사건 수사할 때도 선례가 없는,논리라 없는 억지논리가 정상적인 수사진행을 가로막고 나섰다" 분통을 터뜨렸다.


오기가 발동한 검사는 소환 대신 비자금 추적에 나서게 되는데, 과정에서 동화은행장 비자금을 넘어선 재벌기업들의 비자금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쏟아져 나오게 된다. 그의 표현대로 '--재계 부패고리의 총체' 드러난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금맥(金脈) 찾아낸 검사이지만,당시의 정치상황은 그로 하여금 채광(採鑛)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그해 9 서산지청장으로 임명되면서 수사 일선(一線)에서 물러났다. 그의 인사 이동 기사를 보고 공무원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축배를 들었을 정도로 악명을 떨친 특수 수사통이었으나 지청장 발령 이후론 그렇게,이빨빠진 호랑이 신세로 지내다 94 10 옷을 벗게된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함승희 변호사 시절이었다.


그는 변호사가 후에도 뉴스의 초점이었다. 95 8 서석재 총무처장관이 '전직 대통령 4000억원대 비자금 -차명 계좌 보유 발언'으로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후론 "함승희가 찾아낸 계좌가 전직 대통령 비자금 계좌"라는 추측이 나오면서 그는 연일 기자들의 취재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대열의 일원이 되어 서초동 법원청사 앞에 위치한 그의 변호사 사무실을 들락거렸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당시는,서석재 장관 발언의 진위여부를 수사한 대검 중수부가 " 소문이 돌고 돌아 전직 대통령 비자금이 "이라고 서둘러 수사종료를 선언한 점에서 있듯,검찰이 정치권력의 영향력 하에 놓여있던 상황이었다. 김성호 대검 중수2과장이 수사종료 발표를 하면서 "이런 상황을 일본말로는 '나가레(무효)'라고 합니다" 말해 '나가레'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기도 했지만, 해도 가기 전인 10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전직대통령 비자금 계좌번호가 적힌 종이 쪽지를 흔들면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으니, 김성호 과장의 '나가레' 발언을 듣고 함께 웃었던 나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속이 없었다.( 과장은 '나가레' 외칠 당시 전직 대통령 비자금 실체를 상당부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후일 밝혀진다)

 2003 3 28국회 본청사.

 "
총장 내정자는 검사 생활의 대부분을 대검과 법무부에서 보냈을 , 구체적 사건수사를 통해 검찰혼을 불사른 경험이 없고 상급 관리자로서만 지내왔다. 과거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이 집권세력의 의중파악에만 능해왔듯이 총장 내정자도 윗사람 눈치파악에만 능한 사람들을 모시면서 검찰혼을 불사르려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느냐"

 송광수 검찰총장 내정자가 민주당 함승희 의원의 질문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검찰총장으로는 인사청문 대상이 총장 내정자였다. 의원은 2000 16 총선을 통해 검사 시절 내내 각을 세웠던 정치권에 편입돼 있었다.
 함 의원의 검찰관은 이어졌다.

"살아있는 권력을 치는 검찰혼이 담긴 수사를 해야한다. 정치권력이 검찰을 정략적 도구로 악용하려 검찰혼을 보여줘야 한다. 일본도 54 '조선(造船) 의혹 사건'에서 법무장관이 총장에게 부당한 지휘권 행사로 압력을 행사했다. 대북송금 수사를 정치권에 맡기고 수사를 포기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송 총장 내정자는 "총장이 되면 검찰혼이 담긴 수사를 하겠다" 답변했는데, 지금 대검 중수부가 2002 대선자금 수사와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사건 수사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허언(虛言) 아니었다는 판단이 든다. 다른 한편으로 송광수 총장이나 대선자금 수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검사 함승희에 비해서는 행복한 검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적어도 검사 보다는 정치권력의 간섭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운 상황에 놓여있으므로.

 다음은 '미완의 검사' 함승희가 옷을 벗은 , 자신의 저서('성역은 없다') 남긴 소회다.

"
우리 검찰은 역대 정권 이래 국민으로부터 권력의 시녀라는 인상을 받아왔다. 이유는 99퍼센트의 검사 고유 업무를 해내고 있음에도 1퍼센트에 해당하는 눈에 띄는 정치적 사건 수사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검사 생활을 통해 점이 가장 불만스러웠다. 그런데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났다. '성역없는 수사'라는 무대가 설치됐다. 무대 위에서 나는 동화은행장 사건이라는 평생의 역작을 연출하기로 마음먹고 메가폰을 잡고 검사로서의 나의 운명을 걸었다. 많은 --재계 거물들의 부패 고리를 잡아냈다. 모처럼,아니 검찰사상 처음으로 위에서 지시되거나 여론에 의해 수사가 촉구되지 않은 순수한 검찰 정보로서 우리 사회의 부패 구조를 파헤친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 사회 부패 구조의 '거악(巨惡)'들이 줄줄이 걸려들었다. 누구를 주연으로 삼고 누구를 조연으로 삼아야 될지 모를 정도의 주연급만도 여러 걸려들었다. 그런데 '() 물증확보, () 소환조치'라는 이상한 논리에 밀려 때를 놓치게 되고, 결국 사건을 망쳐버렸다. 내가 아쉬워하는 것은 검찰의 위상을 바로 잡을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점이다. 많은 후배 검사들이 훗날 정치적 사건을 수사하면서 벽에 부딪혔을 '어느 어느 시절, 함승희 검사 수사의 본보기가 있지 않은가'라는 초석을 놓지 못한 점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러나 퍼센트 성공한 사건만이 역사의 귀감이 되는 것은 아니잖는가. 일본의 '조선의혹 사건'처럼 실패한 수사도 나름대로 반성하는 의미에서 귀감이 있는 것이다"

 함 검사가 인용한 조선의혹 사건은 일본 동경지검 특수부가 정치 권력과 대결해 좌절한 사건이다.


일본 해운 회사들이 선박 발주와 관련, 조선 회사에서 받은 리베이트 일부를 국가 융자를 받기 위한 법안 제정 목적으로 정치권에 살포한 것이 사건의 얼개인데, 집권 자유당 거물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간사장( 사무총장)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정조회장( 정책위의장) 연루돼 있다는 점에서 ()-() 대결의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동경지검은 1954년 4 사토가 조선 공업회, 선주 협회로부터 자유당 몫으로 2000만엔, 한노 해운의 마타노 사장으로부터 개인적으로 200만엔을 받은 혐의를, 이케다는 오사카 상선 등에서 200만엔을 받은 혐의를 밝혀내고 우선 사토에 대해 요시다 내각에 체포 허락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사토와 이케다는 전후 일본 정계의 최대 실력자로 부상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왼팔과 오른팔 격으로,후에 모두 총리 대신의 자리에 오르는 수제자였다. 요시다 내각의 법무상(법무부장관) 이누카이 다케루(犬養健)로서는 법무상임에도 내각의 방패막이가 되어 검찰에 맞설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결국 이누카이는 법무상이 개별 사건에서 검찰총장을 지휘할 있는 권한(지휘권 발동)으로 검사총장(검찰총장) 사토 간사장에 대한 체포청구 허가 청훈을 "중요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체포청구를 미루고 임의수사를 하라" 묵살했다. 사토의 소환이 지연된 가운데,돈을 피의자들이 하나 석방되면서 검찰 조사시의 진술을 번복,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당시 일선의 수사검사는 가와이 노부타로(河井信太郞)였다.

 
함승희 검사가 '동화은행장이 직원들 시켜 시중 백화점,호텔에서 영수증을 모으게 한다고 구설수'라는 내용의 동향 보고서를 단서로 동화은행장 비자금 사건의 물꼬를 텄듯이,가와이 검사 또한 해운회사 사장실에서 발견된 'S 200, I 300··'(후일 S 사토, I 이케다 임이 밝혀진다) 라고 적힌 암호 메모를 추적,권력 핵심의 비리를 밝혀냈다는 점에서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 또한 검찰혼을 불사른 수사의 막바지에 정치 권력의 압력으로 좌절의 쓰라린 패배를 맛본 검사로서의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조선의혹 사건에서 검찰의 허를 찌른 법무상의 지휘권 발동이라는 묘안을 검찰 내부 인사가 요시다 내각에 전달, 검찰 우위의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켰듯이 동화은행장 사건에서도 당시 검찰 수뇌가 정치권의 수사 중단 요구에 부응했다는 점에서도 가와이 검사와 함승희 검사는,시대와 국적을 넘어 검사로서의 동질적인 분노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있다.

독자들은 이제,동료의원의 체포동의안 부결 직후 표출된 함승희 의원의 분노에 공감할 있는지... 2004 1 18

 

 

 이런 느낌, 경험해 보셨습니까?
처음인데도 언젠가 왔던 곳 같은 착각.

저 모퉁이를 돌아서면 교회가 나오고 교회 옆에 조그만 공터가 있었지,

하고 생각하면서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그 생각 그대로 공터가 나왔을 때의 전율감.

이런 초자연적인 느낌을 기시감(旣視感, deja vu)이라고 한다지요?

뉴 멕시코주의 산타 페는 그런 이상한 느낌이 드는 곳입니다.

 

 한 때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황토를 물에 이겨 만든 어도비 벽돌로 집을 짓고 살았던 곳.

                                                                     <어도비 벽돌로 벽을 쌓은 집>

 그로부터 1000년도 넘게 흐른 1607.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수 세기 전에 버리고 떠난 이 곳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해 이전 거주자들의 방식대로 집을 짓고

북미 대륙 개척의 교두보로 삼습니다.

 

 산타 페는 외양부터가 고풍스럽습니다.

20세기에 지어진 것이 분명한 주차장이나 상점들이

좀 과장하면 수 백 년은 족히 된 듯 하구요.

 
 명색이 뉴 멕시코주 주도이자 관광지인데
개발 붐이 왜 일지 않았겠습니까.
그래도 주변 환경과의 조화 속에 개발이 이뤄진 것은
유독 뉴 멕시코주 개발업자들의 안목이 높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고
의식있는 주 의회 의원들이 수 십 년 전
신축 건물의 외관을 철저히 규제하는 법률을 제정한 덕분입니다
.

뉴 멕시코주 의사당 또한
미국의 다른 주 의회 의사당들이 워싱턴 의사당을 본 따
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환경 친화적인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뉴 멕시코 주 의회 의사당>


 의사당은 푸에블로 인디안의
Zia(태양) 상징을 형상화했다고 하더군요.
뉴 멕시코주 州旗에도 들어가 있는 이 상징을 보면

태양을 중심으로 4방향으로 에너지가 방사되는 모습입니다.

 
 푸에블로 원주민들은 숫자 4를 만물의 근본 수로 인식했다고 하더군요.

주역이나 태극기의 4괘와 일맥 상통하는 대목입니다.

수 천 년의 세월과 수 만 마일의 공간을 초월한 인식의 공유이고 보면,

진리는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17세 초반 스페인의 영토가 된 후

스페인령 뉴 멕시코 왕국의 수도가 된 산타 페는

리오 그란데 강 이북 지역 공략을 위한 스페인의 거점 도시가 됩니다.

 

한 손엔 총, 다른 한 손엔 성경

유럽인의 이같은 식민 원칙은

산타 페에도 어김없이 적용됩니다.

1610년 지어진 샌 미구엘 전도소는

스페인 통치 권력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합니다.

 






                 <전도소 내부>

 원주민 전도에 나선 예수회 신부들은

1617 1 4000명의 영혼을 구제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혼신의 열성을 보였으나

1680년 원주민 반란 당시 전도소에서도 불길이 치솟았다 하니

전도가 신사적으로 이뤄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든 어도비 벽돌만은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지금은 관광 명소가 됐습니다.

전도소 안에는 1356년 스페인에서 주조된 종이 전시돼 있는데



 

19세기 초반 이 곳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스페인과 멕시코에서 사용됐다고 하니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 역사를 줄곧 지겨본 산 증인이라 할 만 합니다.

 

 아시시 성당은 산타 페에서,
푸에블로
-스페인 양식으로 건축되지 않은

몇 안되는 건물 중 하나입니다.

 




 아시시의 로마네스크 양식은

푸에블로 건물들의 부드러운 곡선과 산뜻한 대조를 이룹니다.

 아시시 성당 옆에 있는로레토 채플은  '기적의 계단'으로 유명합니다.

 




 360도 회전하면서 올라가는 이 계단에선
그 어떤 버팀목도 발견할 수 없어
어떻게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는지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으레 종교적 일화가 그렇듯,
교회측이 계단 설치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이름 없는 목수가 찾아와선 톱과 망치, T자형 자, 나무 못만 가지고
이 계단을 만든 뒤 홀연히 사라졌다고 전해집니다.

 갤러리와 원주민 공예품 상점이 즐비하지만

웬만하면 천 달러 이상를 호가하는 만큼 눈요기로 만족해야 합니다.

 거리 곳 곳에 작품들이 널려 있는 산타 페는




 수 많은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기 위해

모여드는 곳입니다.

근무지인 산타 페에서  ‘벤허’를 출판한  류 월리스를 비롯해
시인 에즈라 파운드
,
여류 화가인 조지아 오키프 등이 산타 페를 찾았고요,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도 10년 넘게 산타 페에서 여름을

보냈다고 하는군요.

 

 황토로 빚은 벽돌에

미국 남서부 특유의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고향에 온 듯한 느낌입니다.

고향을 생각하면 황토색이 떠오릅니다.

노란 물감과 빨간 물감을 절반씩 섞으면 나올 것 같은 색깔.

무능하고 썩어 문드러진 李朝를 엎어뜨리기 위해

동학군이 집결했던 황토현 주변은

산타 페의 풍경을 지배하던 황토색 천지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단골 소풍 장소였던 황토현 가는 길이,

파란 하늘 아래 황토빛 내장을 드러낸 밭떼기들의 잔상이,

지금도 눈에 어른거립니다.

어도비 건물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고 하니

황토 반죽에 볏 짚 섞어 집 벽을 하는

한국의 초가집과 유사합니다.


  메마른 벌판 가운데 들어 앉은 건조한 도시,



 <텍사스 주 엘 파소와 산타 페를 잇는 지선 도로>


 곳곳에 정겨운 빨간 고추가 걸려있는 도시,

 




 마치 전생을 보낸 듯한 낯 익은 도시,

산타 페의 하늘 아래 땅거미가 지고 있습니다.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내셔널 몰(National Mall)에는 토마스 제퍼슨이나 에이브러햄 링컨 등 미국의 역대 대통령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서 있다.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곳은 거대한 링컨의 좌상이 있는 링컨 기념관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제퍼슨 기념관은 내셔널 몰의 중앙에 위치한 워싱턴 기념탑의 남쪽에 위치한 인공 호수 타이들 베이슨(Tidal Basin) 가에 세워져 있다. 봄이 되면 타이들 베이슨 주변에 서있는 3000여 그루가 넘는 벚나무가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연필처럼 서 있는 워싱턴 기념탑 오른쪽이 제퍼슨 기념관.

 

 

제퍼슨 기념관은 고대 로마 양식으로 건축됐다. 열주가 돔 형태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이탈리아 로마의 유적인 판테온과 비슷하다. 기념관 안에는 제퍼슨의 동상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건물 안쪽 벽면에는 제퍼슨이 남긴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새겨져 있다. 'I HAVE SWORN UPON THE ALTAR OF GOD, ETERNAL HOSTILITY AGAINST EVERY FORM OF TYRANNY OVER THE MINDS OF MAN'(나는 신의 제단 앞에서, 인간의 정신을 억업하는 모든 형태의 독재를 영원히 증오하겠다고 약속했다.)

 

 

버지니아주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난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은 2차 대륙회의(1775~1981)에 버지니아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자유와 자치를 중시한 제퍼슨은 자신이 기초한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인간에게는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 그것은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된 자유권, 천부인권, 생명권, 행복추구권이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에서 유래하고 있다. 그는 대륙회의 대표를 지낸 뒤 버지니아주 의원, 미 연방의회 의원, 버지니아 주지사, 프랑스 대사, 국무장관, 부통령을 지낸 뒤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에 이어 미국의 3번째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 재임 기간인 1800년대 초반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강 서쪽의 광활한 루이지애나를 매입한 것은 제퍼슨의 업적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로써 미국은 서부 개척 시대를 열었고 대서양 연안 국가에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대륙 국가로 도약하게 된다. 당시 1500만 달러에 매입한 땅의 넓이는 214만 제곱킬로미터. 현재 미국의 13개주가 당시의 루이지애나에 포함될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그는 고향인 몰티셀로에 묻혔다. 그가 생전에 써놓은 묘비명은 소박하다. '여기 토머스 제퍼슨 잠들다. 그는 미국 독립선언서의 저자이며, 버지니아 종교 자유 법안의 입안자이고, 버지니아 대학의 아버지다.' 그가 거친 수많은 직위는, 심지어 대통령직까지도 새겨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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