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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언론재단의 후원을 받은
 미국 연수 기간이 끝나갑니다.
 저는 지난해 8월부터 조지타운 대학과
 자매지인 워싱턴타임스에서 연수했습니다.
 평생 기억될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요즘 귀국 준비와 함께
 연수 기간의 마지막 일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미 서부의 광활한 자연 탐사입니다.
 제가 계획한 여정 중 일부 지역은
 200년 전의 미 서부 탐험가 루이스와 클락이
 목숨을 걸어야 했던 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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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의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출발하려 합니다.
 블로그 활동은 8월에나 재개할 수 있겠네요.
 서부 여행기는 귀국 후
 블로그에 게재하겠습니다.
 
 블로그 독자 여러분과는
 만나자 마자 이별이군요. 
 보다 알찬 내용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다시 만날 때까지
 모두 건강하시길.
 멋진 여름 휴가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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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가을,

등려군을 진가신 감독의 영화 '첨밀밀'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중국 방문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중국 외교부 초청으로 이뤄진

한중 기자 교류 차원의 중국 방문이었지요.

영화 속의 여명과 장만옥이 엮어내는

애틋한 사랑 얘기도

좋았지만


영화 속의 주제가

'달빛은 내 마음의 거울'이

더욱 좋았습니다.

그래서 가사를 소리나는 대로 외웠습니다.

물론 중국어는 모릅니다. +_+

중국어를 잘하는 분에게

소리나는 대로 적어달라고 해서

그냥 외웠지요.

그리곤 중국가서

중국 사람들 앞에서 불렀습니다.ㅡㅡ ;;;

가을만 되면 흥얼거려집니다. ♬

중국인들의 영원한 연인인 등려군.

그녀는 1995년 5월 8일,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月亮代表我的心
달빛은 내 마음의 거울

ni問我愛ni有多深 我愛ni有幾分
니 원 워 아이 니 요우 뚜오 션 워 아이 니 요우 지 펀
(당신은 내게 물었죠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냐고)

我的情也眞 我的愛也眞 月亮代表我的心
워 디 칭 예 쩐 / 워 디 아이 예 쩐 , 위에 량 따이 삐아오 워 디 씬
(내 마음은 진심이예요, 내 사랑도 진심이예요. 저 달빛이 내 마음이예요)

ni問我愛ni有多深 我愛ni有幾分
니 원 워 아이 니 요우 뚜오 션, 워 아이 니 요우 지 펀
(당신은 내게 물었죠.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我的情不移 我的愛不變 月亮代表我的心
워 디 칭 부 이 / 워 디 아이 부 삐엔, , 위에 량 따이 삐아오 워 디 씬
(내 감정은 변치않고, 내 사랑 역시 변치 않아요.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죠)

輕輕的一個吻 已經打動我的心
칭 칭 디 이 꺼 원~~,이 징 따 똥 워 디 씬
(부드러운 입맞춤은 내 마음을 움직였고)

深深的一段情 敎我思念到如今
션 션 디 이 뚜안 칭 / 지아오 워 쓰 니엔 따오 루 진
(아련한 그리움은 지금까지 당신을 그리워하게 하네요.)

ni問我愛ni有多深 我愛ni有幾分
니 원 워 아이 니 요우 뚜오 션, 워 아이 니 요우 지 펀
(당신은 내게 물었죠.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ni去想一想 ni去看一看, 月亮代表我的心
니 취 샹 이 샹 / 니 취 칸 이 칸, 위에 량 따이 삐아오 워 디 씬
(머리에 그리며 바라보세요. 저 달빛이 내 마음이예요)

참고:형선생 중국어 교실
 


 펜실베니아에서 고 서재필 박사를 만났습니다.

펜실베니아는 미국의 태반이 묻힌 곳이지죠.

이 곳에서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

영국의 압제에 대항하기로 결의했고

독립선언서와 아메리카합중국 헌법을 기초했습니다.

'Liberty Bell' 도 이 곳에 전시돼 있습니다.

 


 

 

 이 종은 영국이 펜실베니아 식민지 지정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것인데 아이러니칼하게도 미국 독립선언 당시 타종되고

이후에는 '자유의 종'으로 부르게됐다는군요.

종에 균열이 생겨서 1846년 이후론 종을 치지않는다고 합니다.

 

  아래 건물은 어디서 본 듯 하지 않습니까?

 영화 'National Treasure'에서 니콜라스 케이지가

 특수 안경을 찾아낸 인디펜던스 홀입니다.

 이 안경을 써야 독립선언문 뒷 면에 숨겨진

 보물 지도가 보이지요.

 

 


 투어를 신청하면

홀 내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투어는 아래 방에서 간단한 설명을 듣고 시작됩니다.

가이드가 안내에 앞서 관광객들의 출신 주를 물어보는데

저의 가족이 가장 먼 곳인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 때문에

가장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건물 안에

헌법이 기초된 방이 있습니다.

각 주 대표들이 아래 책상들에 앉아서

미국의 뼈대를 설계했습니다.

 

 



 

 

 미국 대법원은 1935년에야

제 건물을 갖게됐는데

그 전에는 이 곳 저 곳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신세였다는군요.

이 곳은 초창기 대법원 법정.

의자 수를 보니

당시에는 대법원 판사가 6명이었네요.

지금은 9명으로 늘었지요.

 


 


 펜실베니아 방문 길에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습니다.

펜실베니아 미디아시에 있는

서재필 박사 기념관입니다.

이 곳은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한 서 박사가

1925년부터 51년까지 조국의 독립과 근대화를 염원하면서

근거지로 삼고 살았던 집입니다.

 


 저는 한참을 헤맨 끝에 폐관 시간인 오후 5시가 다 돼서야 도착했습니다.

기념관은 인근에 거주하는 한국 유학생이 자원 봉사 형식으로

관리하고 있더군요.

 

 기념관 내부의 모습.

 


 

 유학생은 폐관 시간이 지나고도 오랫동안 저의 가족을 안내했습니다.

감회가 새롭더군요.

국사 시간에 입시용으로 암기했던 서재필이라는 인물을

이역 만리 타국에서 가슴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유학생의 설명에 따르면,

이 저택은 서 박사가 유명을 달리한 이후 첫째 딸이 머물러 살았으나

첫째 딸이 숨진 이후 미국인에게 넘어갈 뻔 한 것을 필라델피아 교민들이

모금 운동을 벌여 인수했다고 합니다.

갑신정변 당시 서 박사의 부인과 자녀들은 모두 참살당하고

서 박사는 미국 망명 시절 미국 여성과 결혼해

딸 둘을 얻습니다.

둘째 딸은 독신으로 남고 첫째 딸은 결혼해 서 박사의 혈육을 남기나

이 혈육은 연락이 두절됐다는 군요.

 

 지금과 같은 기념관으로 개축된 것은 1990년 11월 24일로

서재필 기념재단(1-215-224-2000)의 역할이 컸습니다.

기념관에는 주로 미국 교민들이 방문하고 있을 뿐 한국 관광객의 발길은

뜸하다고 합니다.

정치인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 시절에 한 차례,

대통령 퇴임 후 한 차례 방문했습니다. 이인제 전 민주당 고문의 이름도 보이더군요.

방명록에는 또 민족사관고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방문한 기록이 있어 반가웠습니다.

기념관에 소개된 서 박사의 행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갑신 정변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미국으로 망명,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이자 미국 의사가 됐다.

3.1 운동 직후 제1차 한인회의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

한국 독립의 열망을 전 세계에 알리고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설립해 조직적인 선전활동을 벌였다.

1895년 10년만에 한국에 돌아온 서재필은

1898년 5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등 계몽운동에 헌신했다.

독립협회, 독립문, 독립관을 설립해 자주독립 사상과

민주 민권 사상 고취에 힘썼다.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워싱턴 군축회의 등에 참가,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각국 대표들에게 인식시키는 등

외교적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7년 7월 과도정부 특별 의정관 자격으로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정치 활동 보다는 국민 계몽운동에 헌신했으며

미소 냉전으로 분단이 고착화해가는 상황에서

한민족 통일과 민주적 근대국가 건설에 매진했다.

그 와중에 서재필 초대 대통령 추대 움직임이 일자

정치적 야심이 없음을 공표하고

한국이 통일되어 잘 살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긴채

남한 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48년 9월 한국을 떠났다'

 

 조선의 근대화에 목숨을 걸었던

청년 서재필이 꿈꾸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합하면 조선이 살테고

만일 나뉘면 조선이 없어질테니

조선이 없으면

남방사람도 없어지는 것이고

북방사람도 없어지는 것이니

근일 죽을 일을 할 묘리가 있겠습니까.

살 도리들을 하시오'

 

 말년의 서 박사가 분열된 조국을 향해

유언처럼 남긴 말이라고 합니다.


새 학교에 입학해서
맨 처음 이름을 교환한 친구 만큼
오래 기억되는 이도 없습니다.
대처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간 저는
지금도 1학년 2반의 첫 날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건
친구 K의 얼굴과 음성,
진짜 일본 사람처럼 생겼던
일본어 선생님이자 담임 선생님...
열린 우리당 이종걸 의원은
고등학교 친구 K와 같은 정치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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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6대 총선 직전에 출입처가 국회로 바뀐 저는
총선 직후 이 의원을 처음 만났습니다.
특색있는 초선의원들을 소개하는
시리즈 기사의 인터뷰였지요.
기자되고 의원 인터뷰는 처음이었고
그 또한 의원된 후 기자와의 인터뷰는 처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자리를 생각해 보면
서먹 서먹했던 당시 감정이 되살아납니다.
그렇게 이 의원과 처음 만나
5년 넘게 지내다 보니
지금은 서먹하지 않은 사이가 됐습니다.
 
 이 의원과의 만남 중에
특히 여운이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일이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어느 가을날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이 선배, 노무현 후보 따라다니기 힘들지 않아요?'
'힘 빠질 때도 있지'
 
 이 의원은 씁쓸히 웃었습니다.
그 해 4월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한 노 후보는
6월 지방선거 참패 이후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월드컵 붐에 편승한 무소속 정몽준 의원은
이미 7월초부터 여론조사 지지도에서
노후보를 제치고 수직 상승하고 있었지요.
당 내에선 '노무현, 정몽준 단일화만이 살 길'이라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어가고 있었습니다.
10월초 발족된 '후보 단일화 추진협의회'의 압박도
날로 가중되는 고립 무원의 상황에
이 의원은 노 후보 고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다 지면 너씽(Nothing)인데 단일화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의원은 말이 없었습니다.
그의 양미간이 잔뜩 좁혀지며 골이 생겼습니다.
곤혹스러울 때마다 보이는 이 의원 특유의 표정입니다.
한동안 민망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저는 화제를 돌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배는 왜 노후봅니까?'
 
이 의원의 대답을 듣고
저는 더 이상 그의 결정을 놓고
왈가왈부할 의욕을 잃었습니다.
 
'나는 노 후보를 끝까지 지지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순전히 개인적 이유인데 말이야, 내가 정치하는 것을 극구
만류하신 아버님과 다짐을 했거든.
정치 활동하면서 할아버님 이름에 누가되지 않도록 하라는
다짐이지. 이러다 안되면 정치 그만 두면 되지 뭐'
 
 그날 나는 이의원의 조부가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게됐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이회영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우당 이회영은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과
역시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의 딸 사이에
태어난 명문대가의 출신으로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되자
온 집안이 만주로 이주,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개화파 지사입니다.
이덕일씨는 저서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
'조선 제일이라는 뜻의 삼한갑족 출신으로
독립운동하다 재산을 탕진,
 딸의 옷까지 팔아먹고 누워 있어야 했던 이회영에게 끌린 것은
우리 역사에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지닌 인물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었다'고 썼습니다.
 
 이 의원의 초심이 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미국 작가인 제럴드 가드너가 말했습니다.
위트가 정치적 성공의 중요한 요소라고.
미국의 정치 체제는 통치를 잘할 사람보다는
당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후보자로 지명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기기 위해서는 심오함이나 행정 능력보다는 매력이나 위트가,
인격이 아니라 카리스마가 요구된다는 것이지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드너의 저서 'The Power of Presidential Humor'에 따르면,
역대 미 대통령 중에서 존 F.케네디와 로널드 레이건이
위트와 재치면에서 발군이었다는군요.
 
 로널드 레이건(40대 대통령. 공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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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취임 당시 만 70세였거든요.
그의 대처 방식은 정공법이었습니다.
자신이 먼저 나이 문제를 거론하면서
이를 희화화하곤 했답니다.

예컨대 1919년 발족된 워싱턴 기자클럽에 참석해서
“창립한 날이 바로 엊그제 같군요”라고 말하거나,
법조인 협회의 105차 연례 회의에서는
'제가 창립 회의에 참석했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는 또
 '앤드류 잭슨(미국 7대 대통령, 재임 기간 1829~37)은
 일흔 다섯 살에 백악관을 떠났는데 그 때까지도 굉장히
 힘이 넘쳤답니다.  그가 내게 직접 말해준 얘깁니다'라고도 했고,
 자신의 일흔 살 생일 파티에서는
 '오늘은 나의 서른 아홉살 생일의 서른 한 번째 기념일”이라고
 익살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레이건은 84년 대통령 재선 운동 당시
민주당 월터 먼데일 후보의 나이 공세를
재치있게 돌파했습니다.

대선 후보 2차 TV 토론장에서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대통령은 이미 역사상 가장 나이 많은 대통령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 미사일 사건 당시
며칠 동안 거의 잠을 자지 않고 버텨냈습니다.
대통령은 그런 상황에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실 수 있겠습니까'
 
레이건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나이를 문제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상대방이 너무 젊다든가 경험이 없다는 것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지는 않을 작정입니다'
방청객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환호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레이건의 재치있는 답변으로
나이 논란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먼데일의 대통령 꿈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단점을 드러내 놓고 웃음 거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레이건의 특기였습니다.
 
'멕시코 시티에서 연설할 때였죠.
연설을 마치자 청중들이 성의 없이 박수를 쳤고
나는 좀 당황한 채 자리에 앉아 있었지요.
다음 번 연설자는 스페인어로 얘기했는데,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고,
매 문장마다 박수를 받고 있더군요.
나는 당황감을 감추려고 다른 사람보다 먼저,
그리고 다른 누구 보다도 길게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사가 나를 보면서 말하는 거예요.
'대통령님, 저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저 사람은 당신 연설을 통역하는 중이니까요' 라고 말이죠'
 
 해병 부대를 방문한 레이건.
해병들의 용감함을 정말 세련되게 추켜 세웁니다.
이런 유머로 말이죠.

'해병 부대 일부가 소정의 공수 훈련을 받기 위해
육군 부대에 배속됐습니다.
젊은 중위 하나가 모든 과정을 설명해주면서
비행기는 약 800 피트 높이로 비행할 것이라고 설명했지요.
그들은 비행기에서 뛰어 내려서
그 지역의 다른 병력과 합류할 예정이었습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
해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대표 몇 사람이 중위에게 가서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중위님, 비행기를 조금 낮게 비행하면 안될까요?  500피트 정도로 말입니다'
중위는 '그 높이로는 낙하산이 펴지는데
시간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안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해병들이 이렇게 반문했답니다.
 '아, 저희가 낙하산을 메고 갑니까?' '
 
 존 F.케네디(35대 대통령.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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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너무 젊어서 문제가 됐습니다.
61년 취임 당시 만 44세였으니 그럴만도 합니다.
‘케네디가의 사람들’을 쓴 조 매카시에 따르면,
멀리서 보면 호리호리한 체격이나
대학생 같은 덥수룩한 헤어 스타일 때문에
28세 정도로 보였다는군요.
민주당 출신의 전직 대통령인 트루만 조차
'성숙한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그의 대선 후보 지명을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케네디는 이렇게 받아쳤습니다.

'나이를 기준으로 해서
44세 이하의 사람들을 지도자의 자리에서 제외시킨다면
제퍼슨은 독립선언문을 쓸 수 없었을 것이고
워싱턴은 대륙군을 지휘할 수 없었으며
매디슨은 헌법의 아버지가 될 수 없었고
콜롬부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뒤 테오도르 루스벨트, 나폴레옹, 알렉산더 대왕도
젊은 지도자였다고 덧붙였습니다.
 
케네디 만큼 언론의 사랑을 받은 대통령은 없습니다.
언론은 그의 위트와 재치를 사랑했습니다.
 
케네디가 칼럼니스트의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편지 속엔 대통령 사인의 시세표가 담겨있었고요
조지 워싱턴이 175 달러, 루즈벨트가 75 달러,
그란트가 55 달러, 케네디가 65 달러였습니다.
 
케네디가 답장을 썼습니다.
'당신의 편지를 고맙게 생각합니다.
제 사인의 가격이 그렇게 높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군요.
시세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편지에는 사인을 하지 않겠습니다'
 
백악관 기자 회견 한 토막.
 
#기자: 공화당은 최근 당신이 많은 실책을 범했다는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대통령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케네디:나는 그 것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상원 의원 시절 한 소년이 질문했습니다.
 
#소년:상원의원께서는 어떻게 전쟁영웅이 되었습니까.
#케네디:내 본의가 아니었단다. 적들이 내가 탄 배를 침몰시켰거든.
 
케네디는 61년 1월 20일 취임했고
63년 11월 22일 텍사스 달라스에서 오스왈드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그가 백악관에 머물렀던 약 1000일 동안
그의 위트는 찬란한 빛을 발했습니다.
케네디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그의 위트와 유머가 중대한 요소가 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허식과 권위에 대항했던 그의 유머는
우리가 스스로의 환상을 비웃을 수 있게 했습니다.
케네디를 추억할 때마다
저는 뭔가에 깊이 베인 듯 합니다.
한 없이 올라가다
결국은 추락할 운명을 타고난
이카루스가 떠오릅니다.
케네디는 그런 운명을 얼마간 직감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살아있는 동안 만큼은 맘껏 웃어야겠지요?
 
케네디의 다음과 같은
쓸쓸한 고백이 귓전에 울립니다.
 
'세상에는 진실한 것이 세 가지 있는데
그것은 神, 인간의 어리석음, 그리고 웃음이다.
처음 두가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찌해볼 도리가 없으니
세 번째 것 만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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