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느낌, 경험해 보셨습니까?
처음인데도 언젠가 왔던 곳 같은 착각.

저 모퉁이를 돌아서면 교회가 나오고 교회 옆에 조그만 공터가 있었지,

하고 생각하면서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그 생각 그대로 공터가 나왔을 때의 전율감.

이런 초자연적인 느낌을 기시감(旣視感, deja vu)이라고 한다지요?

뉴 멕시코주의 산타 페는 그런 이상한 느낌이 드는 곳입니다.

 

 한 때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황토를 물에 이겨 만든 어도비 벽돌로 집을 짓고 살았던 곳.

                                                                     <어도비 벽돌로 벽을 쌓은 집>

 그로부터 1000년도 넘게 흐른 1607.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수 세기 전에 버리고 떠난 이 곳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해 이전 거주자들의 방식대로 집을 짓고

북미 대륙 개척의 교두보로 삼습니다.

 

 산타 페는 외양부터가 고풍스럽습니다.

20세기에 지어진 것이 분명한 주차장이나 상점들이

좀 과장하면 수 백 년은 족히 된 듯 하구요.

 
 명색이 뉴 멕시코주 주도이자 관광지인데
개발 붐이 왜 일지 않았겠습니까.
그래도 주변 환경과의 조화 속에 개발이 이뤄진 것은
유독 뉴 멕시코주 개발업자들의 안목이 높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고
의식있는 주 의회 의원들이 수 십 년 전
신축 건물의 외관을 철저히 규제하는 법률을 제정한 덕분입니다
.

뉴 멕시코주 의사당 또한
미국의 다른 주 의회 의사당들이 워싱턴 의사당을 본 따
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환경 친화적인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뉴 멕시코 주 의회 의사당>


 의사당은 푸에블로 인디안의
Zia(태양) 상징을 형상화했다고 하더군요.
뉴 멕시코주 州旗에도 들어가 있는 이 상징을 보면

태양을 중심으로 4방향으로 에너지가 방사되는 모습입니다.

 
 푸에블로 원주민들은 숫자 4를 만물의 근본 수로 인식했다고 하더군요.

주역이나 태극기의 4괘와 일맥 상통하는 대목입니다.

수 천 년의 세월과 수 만 마일의 공간을 초월한 인식의 공유이고 보면,

진리는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17세 초반 스페인의 영토가 된 후

스페인령 뉴 멕시코 왕국의 수도가 된 산타 페는

리오 그란데 강 이북 지역 공략을 위한 스페인의 거점 도시가 됩니다.

 

한 손엔 총, 다른 한 손엔 성경

유럽인의 이같은 식민 원칙은

산타 페에도 어김없이 적용됩니다.

1610년 지어진 샌 미구엘 전도소는

스페인 통치 권력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합니다.

 






                 <전도소 내부>

 원주민 전도에 나선 예수회 신부들은

1617 1 4000명의 영혼을 구제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혼신의 열성을 보였으나

1680년 원주민 반란 당시 전도소에서도 불길이 치솟았다 하니

전도가 신사적으로 이뤄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든 어도비 벽돌만은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지금은 관광 명소가 됐습니다.

전도소 안에는 1356년 스페인에서 주조된 종이 전시돼 있는데



 

19세기 초반 이 곳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스페인과 멕시코에서 사용됐다고 하니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 역사를 줄곧 지겨본 산 증인이라 할 만 합니다.

 

 아시시 성당은 산타 페에서,
푸에블로
-스페인 양식으로 건축되지 않은

몇 안되는 건물 중 하나입니다.

 




 아시시의 로마네스크 양식은

푸에블로 건물들의 부드러운 곡선과 산뜻한 대조를 이룹니다.

 아시시 성당 옆에 있는로레토 채플은  '기적의 계단'으로 유명합니다.

 




 360도 회전하면서 올라가는 이 계단에선
그 어떤 버팀목도 발견할 수 없어
어떻게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는지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으레 종교적 일화가 그렇듯,
교회측이 계단 설치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이름 없는 목수가 찾아와선 톱과 망치, T자형 자, 나무 못만 가지고
이 계단을 만든 뒤 홀연히 사라졌다고 전해집니다.

 갤러리와 원주민 공예품 상점이 즐비하지만

웬만하면 천 달러 이상를 호가하는 만큼 눈요기로 만족해야 합니다.

 거리 곳 곳에 작품들이 널려 있는 산타 페는




 수 많은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기 위해

모여드는 곳입니다.

근무지인 산타 페에서  ‘벤허’를 출판한  류 월리스를 비롯해
시인 에즈라 파운드
,
여류 화가인 조지아 오키프 등이 산타 페를 찾았고요,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도 10년 넘게 산타 페에서 여름을

보냈다고 하는군요.

 

 황토로 빚은 벽돌에

미국 남서부 특유의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고향에 온 듯한 느낌입니다.

고향을 생각하면 황토색이 떠오릅니다.

노란 물감과 빨간 물감을 절반씩 섞으면 나올 것 같은 색깔.

무능하고 썩어 문드러진 李朝를 엎어뜨리기 위해

동학군이 집결했던 황토현 주변은

산타 페의 풍경을 지배하던 황토색 천지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단골 소풍 장소였던 황토현 가는 길이,

파란 하늘 아래 황토빛 내장을 드러낸 밭떼기들의 잔상이,

지금도 눈에 어른거립니다.

어도비 건물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고 하니

황토 반죽에 볏 짚 섞어 집 벽을 하는

한국의 초가집과 유사합니다.


  메마른 벌판 가운데 들어 앉은 건조한 도시,



 <텍사스 주 엘 파소와 산타 페를 잇는 지선 도로>


 곳곳에 정겨운 빨간 고추가 걸려있는 도시,

 




 마치 전생을 보낸 듯한 낯 익은 도시,

산타 페의 하늘 아래 땅거미가 지고 있습니다.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내셔널 몰(National Mall)에는 토마스 제퍼슨이나 에이브러햄 링컨 등 미국의 역대 대통령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서 있다.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곳은 거대한 링컨의 좌상이 있는 링컨 기념관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제퍼슨 기념관은 내셔널 몰의 중앙에 위치한 워싱턴 기념탑의 남쪽에 위치한 인공 호수 타이들 베이슨(Tidal Basin) 가에 세워져 있다. 봄이 되면 타이들 베이슨 주변에 서있는 3000여 그루가 넘는 벚나무가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연필처럼 서 있는 워싱턴 기념탑 오른쪽이 제퍼슨 기념관.

 

 

제퍼슨 기념관은 고대 로마 양식으로 건축됐다. 열주가 돔 형태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이탈리아 로마의 유적인 판테온과 비슷하다. 기념관 안에는 제퍼슨의 동상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건물 안쪽 벽면에는 제퍼슨이 남긴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새겨져 있다. 'I HAVE SWORN UPON THE ALTAR OF GOD, ETERNAL HOSTILITY AGAINST EVERY FORM OF TYRANNY OVER THE MINDS OF MAN'(나는 신의 제단 앞에서, 인간의 정신을 억업하는 모든 형태의 독재를 영원히 증오하겠다고 약속했다.)

 

 

버지니아주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난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은 2차 대륙회의(1775~1981)에 버지니아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자유와 자치를 중시한 제퍼슨은 자신이 기초한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인간에게는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 그것은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된 자유권, 천부인권, 생명권, 행복추구권이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에서 유래하고 있다. 그는 대륙회의 대표를 지낸 뒤 버지니아주 의원, 미 연방의회 의원, 버지니아 주지사, 프랑스 대사, 국무장관, 부통령을 지낸 뒤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에 이어 미국의 3번째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 재임 기간인 1800년대 초반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강 서쪽의 광활한 루이지애나를 매입한 것은 제퍼슨의 업적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로써 미국은 서부 개척 시대를 열었고 대서양 연안 국가에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대륙 국가로 도약하게 된다. 당시 1500만 달러에 매입한 땅의 넓이는 214만 제곱킬로미터. 현재 미국의 13개주가 당시의 루이지애나에 포함될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그는 고향인 몰티셀로에 묻혔다. 그가 생전에 써놓은 묘비명은 소박하다. '여기 토머스 제퍼슨 잠들다. 그는 미국 독립선언서의 저자이며, 버지니아 종교 자유 법안의 입안자이고, 버지니아 대학의 아버지다.' 그가 거친 수많은 직위는, 심지어 대통령직까지도 새겨져 있지 않다.

 

 

 

  

 

 

 

 

 

 

 

 

 

 

 

 

  

 

 

 

 

 

 

 

 

 미 부시 대통령이 애용하는 유머가 하나 있습니다.

올 초에도 몬태나 주 방문 때 꺼내들었는데

부시 혼자만 웃고 끝나는 바람에 분위기가 썰렁~해졌다는군요.

바로 이 유머인데요,

한 도시내기가 서부의 한 시골을 방문했는데

도통 방향을 종잡을 수 없어 시골 사람에게 길을 묻습니다.

시골 사람이 대답하길,

곧장 가다가 Cattle guard가 보이면 오른쪽으로 돌아가슈

Cattle guard는 소나 말을 가둬두는 목축용 기구입니다.


그랬더니 도시내기가 다시 묻더랍니다.

Cattle guard가 무슨 색 옷을 입고 있습니까?

이 걸로 끝입니다.

정말 썰렁하죠?

 그런데 이 유머와 부시와의 인연이 재밌습니다.

1978년 부시 나이 31살 때입니다.

부시가 하버드 대학 MBA 졸업하고 텍사스로 돌아와서

에너지 관련 사업을 벌이던 도중

텍사스주 의회 의원 선거에 공화당 공천을 받아 입후보했습니다.

그러자 민주당 켄트 핸스 후보가 유세장에서 이런 유머를 하고 다닙니다.


부시 후보가 코테티컷주 번호판이 달린 메르세데스 자동차를 타고

자기네 목장을 찾아가다 길을 잃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부시 후보에게

Cattle guard가 보이면 우회전하라고 일러줍니다.

그랬더니 부시 후보가 뭐랬는 줄 아십니까.

 그런데 Cattle guard가 무슨 색 옷을 입고 있지요?’”


 부시 후보가 코네티컷주 뉴헤이븐 출신에

대학도 뉴헤이븐의 예일대를 다닌 동부 사람이라는 점을

은근히 부각시킨 전략이었습니다.

부시는 낙선했습니다.

당시의 부시는 자신이 조롱거리가 된 이 유머를

무척 싫어했을겁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된 다음에 이 유머를 즐겨 사용하는 것을 보면,

부시는 텍사스 카우보이들의 유머를 잊을 수 없는 모양입니다.


 부시의 텍사스 사랑은 각별합니다
.

대통령 취임식 전날인 지난 1 19일 밤,

TV를 통해 워싱턴 시내 곳곳에서 개최된 축하 무도회를 지켜봤는데

부시는 텍사스 후원자들이 모여있는

Black tie & boots Hall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이더군요.

아마 그 곳이 부시가 가장 말을 많이하고

가장 오래 머문 무도회가 아닌가 싶네요.

부시가 그날 밤,

 샘 휴스턴의 고향인 텍사스의 재선 주지사가 이제 재선 대통령이 됐다는 체니 부통령의 소개로 연단에 선 후,

나는 내 고향을 잊을 수 없다. 4년 동안 봉사한 뒤 텍사스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던 모습이 제게는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텍사스 자랑을 하지 않으면

텍사스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긴 자랑할 게 많기는 합니다.

산이면 산, 바다면 바다, 벌판이면 벌판,

다양한 인종 구성 만큼이나 다채로운 자연 경관,

2000만 명이 넘는 인구에 미 연방에서 두 번째로 넓은 주,

석유를 비롯한 풍부한 자원

솔직히 뻐길 만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텍사스 사람들은 오만한 구석이 있습니다.

마치 고개를 한껏 쳐든 채 서 있는 부시의 모습처럼.
그리고 독립심이 무척 강합니다.

텍사스는 1845년 미 연방의 28번 째 주로 편입됐는데

텍사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쉽게 어울리지 않는 기질이어서

Lone star로 불렀다는군요.

부시의 기질이 바탕하고 있는 텍사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곳이며 사람인지

한 번 가봤습니다.

 

도로 표지판이 없더라도

건조한 풍경만으로도 텍사스 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칠다는 표현은 텍사스를 위해 만들어진 단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타는 듯한 태양과 메마른 대지, 거센 바람.

이런 풍토 속에서도 텍사스 들판에 흔전 만전인 수레 국화와


 
인디언 페인트브러시는



텍사스의 메마른 풍경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듯 합니다.
텍사스의 전갈과 독거미, 방울뱀 등은

적자 생존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입이 얼얼할 정도로 매운 타바스코 소스와

독주 데킬라도 멕시코와의 문화 접변이 빚어낸 텍사스적 요소.

카우보이도 빼놓을 수 없죠.
요즘은 챙 넒은 모자에 네커치프를 목에 두르고 랭글러 진이나 가죽 바지,
그리고  부츠와
拍車로 무장한 전통적 카우보이는 쉽게 만날 수 없습니다.



 현대판 카우보이들은 힘 좋은 미제 픽업 트럭을 타고 먼지 바람을 날리며

질주합니다.

벌판 곳곳에 서 있는 시추기는 20세기 초반 석유가 발견되면서
하루 아침에 벼락 부자가 된 이들의 신화를 말해주는 듯 합니다.


 

 텍사스의 주도인 오스틴은

텍사스의 첫 미국인 식민자, 스테판 오스틴의 이름을 딴 도시입니다.

도시의 스카이 라인은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이전 모습과 달라졌지만

1888년 지어진 주 의사당(워싱턴 국회 의사당을 본떴다는군요)



 텍사스 주립대학의 시계탑은 의연합니다
.


 


                                                     <왼쪽은 저의 신문사 후배로 외교부를 같이 출입한 김치욱씨. 현재
                                                       텍사스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화이팅!!!>
 

 오스틴에서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아파치와 코만치 인디언의 터전이었던 샌 안토니오입니다.

백인 식민자들에 의해 인디언이 쫓겨난 후론

미국 식민자들과 멕시코의 각축장이 된 곳입니다.

1836 3 6,

샌 안토니오의 알라모 요새에서

189명의 텍사스 방어 부대가 산타 안나 휘하의

멕시코군 4000여명에 끝까지 항전하다 전원 몰살당합니다.



 그로부터
6주일 후,

샘 휴스턴이 이끈 텍사스군은 Remember the Alamo!를 외치며

산타 안나의 멕시코군을 불과 18분 만에 격퇴시키는데

역사상 유명한 이 전투가 텍사스 독립의 전기가 됩니다.

마르궤즈 제임스가 쓴 ! 알라모라는 소설에

당시 알라모 전투를 지휘한 트레비스의 편지가 소개돼 있습니다.


텍사스 및 전 미국 국민에게.

본인은 산타 안나의 지휘 아래 있는 천 명 이상의 멕시코군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적은 본인에게 항복을 요구했고 만일 항복하지 않을 때엔 요새의 점령과 함께 본인 등은 그들에게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본인은 그 요구에 포탄 한 발로 응수했습니다. 본인은 항복하거나 후퇴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 우리의 국기(텍사스 국기)


 요새 위에서 자랑스럽게 펄럭이고 있습니다. 본인은 지원 요구가 묵살된다 하더라도 국가와 명예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지 않고 군인답게 죽을 것입니다


 최근 영화로도 만들어진 알라모 전투는



 자신들의 땅(물론 인디언에게서 강탈한 것이지만)
자유(역시 인디언들의 자유를 속박한 대가로 얻은 것이지만)를

지키기 위한 텍사스인들의 희생을 상징합니다.

189 4000이면

이길 승산이 제로에 가까운 상황인데도

텍사스인들은 일부의 작전상 후퇴 권유도 마다하고

등을 보이기 보다는 꼿꼿이 서서 죽는 길을 선택합니다.
멕시코군의 총 공격이 임박하자
트레비스는 칼을 뽑아 땅바닥 위에 선을 그어놓고
끝까지 알라모를 사수하길 원하는 자는 그 선을 넘게했는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트레비스의 뒤를 따랐다고 전해집니다.

어리석을 만큼 고집스런 기질입니다.
초기 텍사스인들의 이런 기질이 부시의 혈관에도
흐르고 있는 느낌입니다.
 

 오스틴과 달라스 사이에 위치한

부시가의 크로포트 목장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소가 됐지요.




 오는
6월 한미 정상회담이 '서부의 백악관'으로 부르는
크로포드 목장에서 열릴 가능성이 거론되더군요
.

부시 대통령은 우선 순위가 높은 정상들만을

크로포드로 초청했습니다.
한미 크로포드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그 의미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이 목장을 가보지 못했는데
김치욱 후배가 갔다와서 전하는 말이,
경비가 삼엄해서 접근 불가라고 하는군요.
차 타고 가면서 크로포트 목장의 지붕 정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소 몰이꾼과 총잡이들의 땅이었던 텍사스가
부시 가문 덕분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역사적 현장이 됐습니다.
유일 초강대국의 최고 통치권자인 부시의 텍사스 기질 또한
세계사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벌칸(Vulcan)을 아십니까.

그리스인은 헤파이스토스로, 로마인은 벌카누스로 불렀던

대장간의 신이랍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옛 사람들은 화산에서 분출되는 연기가

 

그의 대장간 풀무에서 나오는 것으로 믿었다는군요.

철강 산업이 발달한 미국 앨라바마주 버밍햄이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17m에 이르는 거대한 벌칸상을 세울만 하지요.

벌칸 2000년 미 대선 당시 공화당 부시 후보 진영의

외교 안보팀이 스스로 붙인 별칭이기도 합니다.

그 팀의 일원이자 버밍햄이 고향인 콘돌리자 라이스 현 국무장관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농담조로 사용한 이 별칭이

 

후에는 공식 호칭으로 바뀌었다는군요.

벌칸팀이 추구하던 외교 정책의 이미지-, 강인함, 탄성, 내구성 등이

벌칸의 이미지와 맞아 떨어진다고 판단한 것이겠지요.

 

바로 이 벌칸팀이 미 본토를 강타한

2001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안보 전략을 획기적으로 개조합니다.

그 과정이 LA 타임스 특파원 출신인 제임스 만의

Rise of the Vulcans에 서술돼 있는데 흥미롭고 시사적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임스 만이 추적한 벌칸들은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 딕 체니 부통령,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표지 앞 줄 왼쪽부터), 폴 월포위츠 전 국방부 부장관,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뒷 줄 왼쪽부터) 등입니다.
집권 2기들어 부시 행정부의 벌칸팀 구성이 좀 변하긴 했지만
정책 기조는 그대로입니다
.
오히려 벌칸팀 내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취했던
파월과 아미티지가 빠지는 바람에
집권
2기 벌칸팀은 집권 1기 보다 더 강성으로 변했다는 분석입니다.


만이 취재한 秘話입니다
.

 

9.11 테러 당일.

파키스탄의 국가정보원장 마흐무드 아마드는

워싱턴에 있었습니다.

그 해 여름 조지 테닛 미 CIA 국장이

오사마 빈 라덴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파키스탄을

비밀 방문한 데 대한 답방이었습니다.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이 아마드를 사무실로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단도직입으로 말했습니다.

Are you with us or against us?(파키스탄은 미국의 친구냐, 적이냐)

파키스탄은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 세력을 비호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의 후원자였기 때문입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한 아마드가

파키스탄과 탈레반 정권과의 오랜 역사를 거론하며

이해를 구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아미티지가 한 마디로 자릅니다.

History starts today(역사는 오늘부터 시작된다)

다음 날 아미티지는 아마드에게 미국의 요구 사항을 전달합니다.

미 항공기와 군인의 파키스탄 통과, 병참 지원, 탈레반과 알 카에다

정보 제공 등.

아미티지는 아마드에게,

협상도 없고 대가도 없다고 통보했습니다.

그간의 외교 관례를 무시한 일방적 요구였습니다.

아마드는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긴급 전문을 띄웁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미국의 요구 사항을

조건 없이 수락합니다.

나아가 탈레반과의 전쟁 기간, 무샤라프 대통령은

미국을 전폭적으로 돕습니다.

친구가 된 무샤라프에게 미국 또한 화끈하게 보답합니다.

이듬 해 무샤라프가 자신의 재임 기간을 5년 더 연장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을 강행해도

미국은 눈 감아줍니다.

민주주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부시의 잣대는

아무래도 고무줄로 만들어진 듯 합니다.

 

 9.11 테러 당일 중국 기자 14명도 워싱턴을 방문중이었습니다.

국제교육재단 초청의 공식 방문이었답니다.

이들은 어느 사무실에서 TV를 통해 무역센터 테러를 알게됐는데

지켜보던 미국인이 경악할 만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일부 기자들이 웃고 환호한 것이지요.

국무부 내에서 이들 기자들의 처리 문제를 놓고 격론이 벌어집니다.

국무부 동아시아국에서 중국 기자들을 즉각 추방할 것을 건의했으나

교육 문화국에서는 반대합니다.

향후 對 중국 관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이들을

추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

베이징 주재 미 대사관도 추방 반대 의견을 피력합니다.

매파와 비둘기파가 갑론 을박,

이 문제가 아미티지에게까지 올라갑니다.

아미티지의 결론은,

Send them home"(집으로 돌려보내)

Those people ought to be on the next plane out of here

(그런 인간들은 당장 추방시켜야 마땅하다)

중국 기자들은 즉각 추방됐고

대외적으로는 중국 기자들의 안전 문제를 우려해

일정이 단축된 것으로 발표됐습니다.

 

 확실히 미국은 9.11 이후 변했습니다.

더 이상 회색 지대는 없습니다.

친구가 아니면 적입니다.

구구한 설명도 듣지 않으려 합니다.

2002 1 29,

부시 대통령이 의회 연설을 통해 미국의 변화된 안보 전략의 일단을

피력합니다.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명명해서

유명해진 연설이지요.

물론 벌칸팀이 작성한 원고입니다.

그 때는 벌칸들이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키기로

결정하고 분위기를 몰아가던 상황이었습니다.

동맹국들의 의견은?

기자 회견에서 나온 폴 월포위츠 당시 국방부 부장관의
답변이 미국의 마이 웨이 방침을 대변합니다
.

그들도 부시 대통령의 연설문을 읽을 수 있지 않느냐"

더 이상 동맹국의 견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동맹국은 미국의 인공위성이 아니다"는 독일 피셔 외상의 불만을,
2차 대전과 냉전 시대를 미국과 손잡고 헤쳐나온 유럽 동맹들은
공유하고 있습니다
.

 

 의회 연설이 있은지 5개월 후에

부시 대통령은 미 육군사관학교 연설에서

선제 공격(Preemptive action)을 골자로 한 새 전략을 공식화합니다.

냉전 시대의 유물인 억지와 봉쇄(Deterrence & containment) 전략을

폐기 처분한 것이지요.

연설에서 부시는

불량 정권들이 미국을 파괴적인 무기로 위협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선포합니다.

이라크가 그 첫번째 제물이 됐지요.

그런데 이라크 공격의 명분이었던 대량 살상 무기가 발견되지 않아

벌칸들이 잠시 궁지에 몰렸으나

그렇다고 다른 명분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집권 2기를 맞은 부시 행정부는 이제

중동 지역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산하겠다고 합니다.

 

 문제는 북한입니다.

2005 4 24일자 워싱턴타임스 보도입니다.

북한이 핵 실험을 준비하고 있는 징후를

미국 정보 기관이 포착했다는군요.

핵 실험은, 핵 보유국이라는 사실을
지금까지의 공갈 수준을 넘어

공식적으로 전 세계에 천명하는 행위입니다.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미국을 협박하고

6자 회담도 보이콧하고 있는 북한입니다.

미국은 이런 북한을 애써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특사에게 핵 보유국이라고
깜짝 선언을 했을 때도
,

북한이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했을 때도,

북한이 국제 원자력 기구의 핵 사찰단을 추방했을 때도,

북한이 핵 무기 원료인 플루토늄 추출을 재개했을 때도,

미국의 반응은 It is not a crisis(아직 위기가 아니다)였습니다.

존재하지도 않은 대량 살상무기를 근거로

이라크를 박살내 버린 미국입니다.

이라크 보다 북한 핵이 더 시급한 문제 아니냐는 주장이

터져 나올 만 하지요.

2004년 대선 당시 존 케리 민주당 후보도 TV 토론에서

이런 논리로 이라크 공격을 비판했습니다.

벌칸은 이런 저런 이유로

북한 만큼은 군사적 해법이 적당치 않다고 말합니다.

중국과 러시아가 인접해 있고

전쟁이 나면 서울이 초토화될 수 있으며

북한 경제난이 북한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고

내부 쿠데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등등..

어떻든 "북한이 위협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라크와는 다른 위협이고 적어도 아직은 외교로 다룰 수 있는 위협"(럼스펠드 국방장관. 아래 사진)이라는 입장이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한편으론 벌칸이

그동안 이라크 전쟁 명분이 퇴색되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북한 위기를 일부러 축소시킨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북한 핵 실험은

미국의 북한 문제 주무 부서를 국무부에서 펜타곤으로
이동시킬 정도의
폭발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벌칸들에게는

그럴 만한 의지와 힘이 차고 넘칩니다.
벌칸이 구상중인 북한 해법이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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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싱턴 D.C.에 새클러 미술관이 있습니다.

국립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아시아관이랄 수 있지요.
1987년 아시아 예풀품들을 기증한
아서 M. 새클러를 기념해 설립한 박물관이랍니다.
이 박물관에는 한국이나 중국, 일본같은 동아시아 뿐 아니라
인도나 아랍 국가들의 예술품이 가득합니다
.
문화재는 공유해야 한다는 새클러의 정신은 존경할만 하지만
석조 불상이 통째로 전시된 모습에선
문화재 약탈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각설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새클러 미술관을 찾았습니다
.

그 분야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수 백년에서 수 천년의 세월을 견뎌온
예술품들을 실물로 확인한다는 데 의미를 둔 견학이었지요
.
그런 정도의 가벼운 마음으로 미술관을 둘러보다
입구에 전시된 대형 설치 미술 작품과 맞닥뜨렸습니다
.


 
 실물 크기의 고깃배가 난파된 형태 그대로 복원된 모습입니다.
고깃배 주위로는
자기 그릇 조각이 수북이 깔려 있고요
.
건성으로 따라 다니던 애들 눈에는
이 작품이 박물관 소품 정도로 보였던지
,
 '아빠는 휴지통도 찍을 것'이라면서 놀리더군요.


 첫 느낌은 뭐랄까,
객지를 떠돌다
생각지도 못한 고향 사람을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고향 인근의 어촌인 줄포나 곰소에서 흔히 봤던,
더 이상 고기 잡이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어
갯벌에 내버려져 있던 폐선의 이미지
.
고향집 장독대 옆에 촘촘히 박혀 있었던 깨진 사기 조각들.
가끔 좋은 음악이나 영화 속의 명 장면 등이 찡하게
와 닿을 때가 있는데 그 작품을 보면서 그런 느낌이었지요
.

설치 미술은 아내의 사촌 오빠인
전수천씨의 부상을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됐는데
팸플릿을 보니,이 작품을 만든 중국 출신 채국강
(蔡國强. 아래 사진)씨도
전씨와 마찬가지로 베니스 비엔날레를 통해
설치 미술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더군요.



 
폐선은 일본 어느 해변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해서 미국으로 옮겨왔고
 자기 조각은 중국에서 실어왔다고 합니다
.
채씨는 이 작품을 통해
'아시아 문화의 연대감'을 표현하려 했다고
팸플릿에 적혀 있었습니다
.
중국의 자기와 일본의 배,
이 두가지 소재는
두 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유대를 상징한다는군요.
배 안에 있어야 할 자기를 배 밖에 흩뿌려 놓은,
일종의 전도(顚倒)는
과거를 재구성해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려는
작가의 욕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
저는 그런 심오한 예술적 함의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작품의 주제-동아시아 문화의 상호 교류를 표현하려 했다는
대목은 난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허전하죠?
그 작품에는 중
-일 문화 교류의 핵심적 가교 역할을 한
한국이 빠져 있었습니다
.
물론 채씨는 일본에서 오래 활동한 분입니다.
작품에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동아시아 문화의 연대감이 작품의 주제라면,
최소한 한--일이 함께 어우러져야
채씨가 재창조하려 했다는  '역사'에
보다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떻든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 작품을 관람한 수 많은 미국인들은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중심 축이
중국과 일본이라는 인식을 굳힐 것입니다
.

요즘 한국에선 독도 문제로 일본 성토 여론이 들끓고 있지만
워싱턴에서는 벚꽃 축제가 한창입니다.
포토맥 강변의 벚나무들은
1912년 당시 유키오 오자키 도쿄 시장이
워싱턴 D.C.에 3000 그루를 선물로 보낸
아라가와 강변의 벚나무라고 미 언론들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 학계 일각에서는 아라가와 벚나무가 병충해로 죽자
일본이 후에 미국 풍토에 맞는 제주도산 벚나무를 다시 보냈다는
이른바 '한국 원산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어느 주장이 맞든,
올해로 93주년인 워싱턴 벚꽃 축제는 미국과 일본의
우호 관계를 상징하는 행사입니다.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미국 여인들의 화사한 얼굴이
미국과 일본의 밀월 관계를 반영하는 듯 합니다.
진주만 사건 당시 도끼를 들고나와 포토맥 강변의
벚나무 밑둥을 찍어내던 그 미국인들은
이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미국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은
일본 만화 영화를 보며 말을 배웁니다
.
유치한 지적같지만
채씨의 설치 미술전은
일본 화장품 회사인 시세이도가 후원을 했더군요
.
정말 미워만 할 수 없는 일본의 저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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