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강릉 MBC 주최의 열린우리당 당의장 후보 합동토론회장. 5월 지방선거 전략과 관련, ‘범양심세력 대연합론’을 펴는 김근태 후보와 ‘중도개혁세력 통합론’의 기치를 든 임종석 후보가 상호 토론에 나섰다.

“많은 분이 (임 후보가)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에서 (외연을) 확대한 것은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한다.”(김 후보)

“처음부터 반한나라당 선거연합이었고 고건 전 총리도 그 대상에 포함된다.”(임 후보)

“저는 대연합을 통한 지방선거 승리를 주장하는데 정동영 후보는 선(先) 우리당 중심 강화론이다.”(김 후보)

“정 후보가 분명한 입장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임 후보)

반(反) 한나라당 연합전선이 지방선거 승리의 전제조건이라는 데 두 후보의 인식이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 후보는 대연합 과정에 ‘기득권’을 내놓을 수도 있다고 말할 정도로 적극적이다.

임 후보도 “허벅지를 베어내는 아픔도 감수하자”고 호소한다. 김혁규 후보도 민주당과의 통합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반발하는 인물이 김두관 후보다. 그는 “우리당이 전통민주개혁세력”이라면서 “당을 먼저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동영 후보와 같은 방향이다.

하지만 후보 간 연대흐름은 김근태-임종석, 정동영-김두관이 아니라 김근태-김두관, 정동영-김혁규다. 경선 후보들이 비전으로 선택받기보다는 맞수의 득표력을 줄이기 위해 명분 없는 짝짓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벌써부터 당의 지방선거 전략이 도대체 뭐냐는 말이 나올 만하다.

조남규 정치부 기자

 리어커에 새참을 실고

어머니와 밭일가던 시절이 가끔 생각납니다.

천태산 가는 길목에 있는 재 너머 밭과 황새 밭,

문중 선산 일부를 개간해 만든 큰 벌안과 작은 벌안.

어머니는 큰 벌안과 작은 벌안은 도지(賭地)를 놓으시고

재 너머 밭과 황새밭에는 고추나 참깨, 고구마, 콩 따위를

직접 심어 경작하셨습니다.

고등학교가 있는 대처(大處)로 유학갈 때까지 밭일을 거들었으니

저의 얼치기 농사꾼 이력도 십년은 족히 되는 셈입니다.

그 때는 왜 그리도 농사일이 싫었는지,

죽어도 농사는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보낸 시절이었습니다.

대학생이 되어 농촌봉사 활동을 하면서도

농사일은 고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예전 모습 그대로인 고향의 밭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저 밭들이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이려니...

이미 농사지으러 낙향한 이들의 체험담에 귀를 기울인 것이

그 즈음이고 미국판 귀농기(歸農記)인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Living the Good Life)을 손에 잡은 것도 그 즈음이었습니다.

                                                    ⓒ google.com 


 조화로운 삶은 쉰 살이 다 되어서야 농사일에 뛰어든 스코트 니어링이

일흔 두 살에 펴낸 영농 체험기이자 인생 독본입니다.

정치학 교수 출신인 스코트 니어링은 헬렌 니어링을 만나

물질 문명의 굴레를 벗고 자연 속에서 조화롭게 살기로 마음먹고

1932년 버몬트州 시골로 들어가 농사지으며 19년을 삽니다.

이후 버몬트 농장 일대마저 개발 바람이 불어닥치자 니어링 부부는

52년 봄 메인주로 옮겨가 새로운 농장을 일굽니다.

조화로운 삶 이어가기 (Continuing the Good Life)에는

니어링 부부의 50년 가까운 귀농 체험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이 책을 펴낼 때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의 나이 각각

아흔 다섯살, 일흔 다섯살.

그럼에도 그들은 책의 서두에

우리는 삶에서 뒤로 물러설 뜻이 없다. 아니 오히려 살고자 하는

의욕에 불타오르고 있다고 썼습니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

그들의 흔적이나마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래서 메인주에 있는

니어링 부부의 농장을 찾아 보기로 했습니다.

농장이 있는 메인주 하버사이드는 대서양 물길이
육지 쪽으로 들어온 피놉스캇 만과 면한 지역으로

니어링 부부가 책에 적었듯이 거칠고 메마른 땅입니다.

 니어링 부부는 쓸모 잃은 농장을 사들여 기름진 땅으로 되살려냈습니다.

버지니아에서 700 마일을 달려 메인주 항구 도시인 벨파스트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한 때는 조선소로 번성했던 항구였다는데

지금은 바닷 가재를 잡는 한산한 어촌이었습니다.

 




 피놉스캇 만은 눈이 시린 쪽빛입니다.

 


 3월 말인데도 겨울은 좀체 떠날 마음이 없는 듯 합니다.

얼마 전에 내린 눈으로 풍경은 완연한 겨울입니다.

그래도 얼음과 눈이 녹기 시작합니다.

머지않아 메인주 농사꾼들이 바빠지는

봄이 올 것이 분명합니다.

메인주 농부들에게 장작은 긴 겨울을 나기위한 필수품 중 하나입니다.

 


 벨파스트에서 농장까지는 차로 2시간 거리입니다.

시골 길을 물어 물어 농장을 3마일 정도 남겨둔 지점까지

어렵사리 찾아갔는데 그 곳부터 농장에 이르는 길은

며칠 전에 내린 눈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굿 라이프 센터(니어링 부부 기념관)에 확인, 또 확인하고

출발했건만 메인주의 3월 날씨는 역시 종잡을 수 없더군요.

결국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니어링 부부가 직접 지은 돌집과 손수 가꾼 농장을 보고싶었는데...
너무 억울해서 여행을 마치고 굿 라이프 센터에 사정을 설명했더니
날이 풀리면 꼭 한 번 찾아오라면서 농장 사진을 보내줬습니다.

                                                                                  <니어링 부부가 손 수 지은 돌 집>

        


                                                                       <거름더미>

                                                                <니어링 부부가 고안한 태양열 온실. 겨울철에도 신선한 채소를...>

*이 글은 미국 연수중이던 2005년 상반기에 블로그에 올린 글로 블로그 개편 도중 사진 배열이 뒤섞여 다시 올리게됐습니다. 미국에 계신 독자들이라면 올 봄에 날 풀리면 한 번 방문하셔서 저의 못다이룬 꿈을 이뤄주시길...방문하신 분들은 저에게도 니어링 부부의 농장을 간접경험할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이클 새틀러가 선고받은 형벌은 가혹했습니다.

 “일단 혀를 자르고

인두로 온 몸을 두 번 지진다.

그래도 정신을 잃지 않고 있으면 다섯 번 더 지진다”

16세기의 가톨릭이 종교 개혁 운동에 가담한

‘스위스 형제단’ 멤버들에게 내린 형벌입니다.

먼저 혀를 자르는 이유는,

순교자가 남길 믿음의 증언을 원천 봉쇄하려는 의도겠지요.

이를 알고 있는 새틀러는 붙잡히기 전에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손을 하늘로 들어 올리겠다”고 형제단원들에게 약속합니다.

이제 혀를 잃은 새틀러는 인두 고문 끝에 죽음의 문 턱에 섰습니다.

바로 그 순간,

포승줄이 불에 타 끊어지자

새틀러가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고 전해집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주인공 멜 깁슨이

죽기 직전 ‘Freedom’이라고 외치듯이-.

 

  풍경이 아름다운

 펜실베니아주 랭카스터 카운티는 아미쉬의 마을입니다.

 

 



 순교자 새틀러 이야기는 아미쉬 마을의 종교 집회에서

단골로 거론되는 소재라는군요.

형제단을 설립한 펠릭스 만츠는

세계사 시간에 배운 종교 개혁가 쯔빙글리의 동지입니다.

그는 쯔빙글리의 온건 개혁 노선에 실망,

좀 더 급진적인 형제단을 설립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스위스 형제단 중에서도 성서를 보다 엄격히 해석하는 부류가

분파해 아미쉬를 이뤘다고 하니,

아미쉬는 흑이면 흑, 백이면 백일 뿐

회색은 존재하지 않는 성향의 사람들 같습니다.

그러니 박해가 오죽했겠습니까.

이들은 18세기 초반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옵니다.

 

 아미쉬가 바깥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Witness’라는 영화일 것입니다.

 



 2005년이  ‘위트니스’ 상영 20주년이었습니다.

랭카스터 카운티는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아미쉬 관광붐을 조성하더군요.

그러나 정작 아미쉬들은 관광객의 잦은 발길이 마땅치 않습니다.

영화 속의 존 북(해리슨 포드)이 목격한 脫俗의 아미쉬들이

20년이 흐른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살고있기 때문입니다.

 

 전기도 없고 전화도 없는 마을,

말과 쟁기로 밭을 갈고 마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정부의 교육을 거부하고 아이들을 스스로 교육하는 사람들,

옷 색깔과 마차의 형태까지 규제하며 사는 사람들.

저녁엔 램프를 켜고 텔레비전을 보는 대신 책을 읽는 사람들.

음식도 불을 때서 해 먹고(연전에 프로판 가스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수도 대신 수동식 펌프을 사용하는 사람들.

 

 한 켠에 빨래판이 놓여진 부엌이며

수동식 펌프 등등이

어쩌면 그렇게도 어린 시절 저의 시골 집과 닮았는지.

 

 선거도 하지 않고

정부 일에도 관여치 않고

정부가 제공하는 사회 보장이나 의료 보장 혜택도 거부하는 사람들.

새 신랑 신부가 살 집을

공동체가 합심해서 지어주고

경조사는 온 마을이 함께 치러내는 사람들.

 




 

산아 제한 없이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3대가 한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공식 교육은 8학년까지만 마치곤

 

남자는 농사일과 목수일에

여자는 가사일과 퀼트 만들기에 종사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람들.

결혼은 일찍.

대신 Non-Amish와의 결혼은 결사 반대인 사람들.

그들은 미국으로 이주해 온 18세기 당시의 생활 양식을

우주 왕복선이 발사되는 21세기에도 고수하고 있습니다.

 



 

 아미쉬들은 성인이 되면

이런 엄격한 규율에 복종할 것인지 여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그 전에 1년 정도 속세 생활을 하는 기간이 있는데

요즘엔 공동체로 복귀하지 않는 젊은이들도 나오고 있답니다.

 

 아미쉬들은 세속의 사람들을 ‘Non-Amish’라고 부릅니다.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이 엄격하더군요.

바로 새틀러 같은 순교자들의 후예냐, 아니냐는 판단이지요.

문명의 결과물인 편리함이나 쾌락, 사치 등과 같은

세속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순교자의 삶을 따르지 않는 만큼 그 후예가 아니라는 식입니다.

이러다 보니,

아미쉬들은 물질 문명의 수용 정도에 따라

보수와 진보(New Order Amish)로 나뉘어 있습니다.

보수파는 특히 ‘Old Order Amish’라고 부르는데

흔히 아미쉬라고 하면 이들을 지칭합니다.

마차만 보면 타고 있는 아미쉬가 보수인지 진보인지 알 수 있다는데,

보수 아미쉬는 쇠 바퀴에 천으로 된 문을 선호하는 반면

진보 아미쉬는 고무 바퀴에 여닫는 문을 선호한다는군요.

최근엔 마차 뒤에 불빛에 반사되는 삼각 표지를 설치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양측이 설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자동차와 마차 간 추돌사고가 빈발한데 따른 대책으로

펜실베니아주가 마차의 삼각 표지 부착을 의무화한데 따른 것이지요.

이제 진보 아미쉬는 마차에 삼각 표지 뿐 아니라

헤드라이트와 백 미러, 좌우 깜빡이까지 달고 다니지만(젊은

아미쉬 중엔 차를 몰고 다니는 이들도 다수 눈에 띄었습니다)

 

                         <우리 차 앞서 달리는 이 마차는 진보 성향인 듯 합니다>

 

보수적인 아미쉬들은 아직도

밤 운전할 때 랜턴을 매다는 것이 고작입니다.

  

 보수든 진보든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고

세계화와 기술 우선주의에 반대하고

환경론자들인 점에서는 같습니다.

랭카스터 아미쉬 마을의 가이드는

“아미쉬는 기술 문명이 싫어서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좋아서 피한다. 기술 문명이 가족 구성원들의 사이를

멀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더군요.

 

 아미쉬들의 상부상조 정신이나

가정 중심주의(이혼은 못한다는군요),

 


자작농 중심의

자급자족 체제 등은

 

 물질 문명의 화신이랄만한 미국의 주류 문화와는

정 반대의 끝에 위치한 문화입니다.

요즘은 주류 문화에 지친

미국인들이 아미쉬의 삶을 기웃거립니다.

그렇다 해도 대다수에게

아미쉬는 별난 족속입니다.

아미쉬는 외양부터가 별나긴 합니다.

남자들은 결혼하면 콧수염은 깎고 턱수염만 기르니…

 

그러나 내게는

한 아미쉬 농부의 다음과 같은 말이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별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러 가고, 배고플 때 먹고

그리고 저녁에 잠자리에 듭니다”

 

 어쩌면 주류 문화 속에서 갈증을 느끼며 사는 우리들이야말로

별난 족속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후기:아미쉬들은 사진 찍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따라서 일부 사진은 빌 콜먼의 작품을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메사추세츠주의 월든 호수는

헨리 데이빗 서로우(1817~1862)의 고향입니다.

 


 2005년 3월 아이들의 봄 방학 기간 찾았습니다.

그의 고향인 콩코드시 인근에 위치한 이 호수는

데이빗 서로우 덕분에 전 세계 자연주의자(Naturalist)들의 성지가 됐습니다.
완연한 봄이 되면 그림같은
 풍광이라는데

 


 

3월의 풍광은 삭막했습니다.

 

                                                                  <뭐 이런 델 데려왔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황당해하는 가족들...^^>
            

 

 데이빗 서로우가 월든 호수 근처에 오두막을 짓고

자연과 교감하는 생활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28살 때였습니다.

1845 7 4일의 일입니다.

편한 마음으로 월든 호수 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형과 함께 설립한

대안 학교가 형의 건강 악화로 문을 닫고

형마저 결핵으로 숨진 직후이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는 초절론(超絶論)의 선구자로 알려진

랄프 왈도 애머슨이 그에게 자신의 땅인 월든 호수

근처에서 생활해 보도록 권유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 곳에서 2 2개월 2일 동안 나날의 일상과

월든 호수 주변의 생태를 관찰하고 기록합니다.

불후의 명작 Walden은 그 기록의 산물입니다.

생활을 단순화하고, 자연과 교감하며

물질적 잡념을 멀리하면 보다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그의 깨달음은 수많은 후세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제 블로그 문패인 'Simplify, simplify'(단순하게 살자)도 그의 구호입니다.

그의 오두막은 후에 다른 사람이 철거해서

자기 집 지붕을 수리하는데 써버렸다고 합니다.
원래 오두막이 있던 자리에는
표지판만 서 있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오두막은 후에 복원한 것입니다.

위치도 이전 자리가 아니라 호수 입구 쪽으로 옮겼습니다.

원래 있던 자리는 호수를 끼고 한 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성미급한 관광객용으로 만들어 놓은 듯 합니다.


 



 어떻든 원래 것을 그대로 본떠 놓은 오두막 안은

 '단순한 삶'의 본보기였습니다.


                    

 월든 호수 생활 중이던 1846 7,

세계사에 두고 두고 영향을 미친 의미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가 세금 납부를 거부한 죄목으로 콩코드 감옥에 하룻 동안 수감됩니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비도덕적이라는 신념 하에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한 세금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는 수감 경험을 토대로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라는 글을 쓰게 되는데

인도의 간디나 미국 인권운동가인 마르틴 루터 킹이

그의 영향을 받아 소극적 저항 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1·2 개각으로 산업자원부 장관에 내정된 열린우리당 정세균 당의장이 6일 물러났다.

취임 두 달여 만이다. 정 전 의장은 10·26 재선거 참패로 붕괴한 문희상 체제를 승계한 과도 지도부였으나 재임 기간 당이 활력을 되찾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폭이나마 당 지지율도 올랐다. 박수 받으며 입각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 정 전 의장은 후임 의장을 추대하기 위해 이날 소집된 비상집행위·시도당위원장 연석회의에서 “정말 뜻하지 않게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 데 대해 참으로 안타깝다”면서 “이유야 어떻든 당원과 국민에게 송구스럽다”고 고개를 숙였다. 1·2 개각을 둘러싼 당·청 갈등의 와중에 그는 동료 의원에게서 “당·청 간 소통을 막은 장본인”으로 몰렸고, “자신의 입각에만 매달려 당·청 조율 역할을 사실상 포기했다”는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정 전 의장은 사석에서 “1월 2일부터 5일까지는 없던 일로 하고 싶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 이 시점에, 산자부 장관 입각은 ‘뜻하지 않은 상황’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개각 하루 전 ‘귀띔’을 받았던 그다. 집권당 원내대표 겸 당의장을 맡고 있는 만큼 ‘장관행’을 통해 경력 관리의 기회를 얻었다는 자족감보다는 자신의 ‘징발’로 야기될 당 지도체제의 공백을 먼저 걱정하는 게 마땅했다.

지난해 11월13일 창당 2주년을 기념한 북한산 산행에서 “제2창당을 성공시키기 위해 희생물이 필요하고, 제물이 필요하다면 제가 기꺼이 그 제물이 되겠다”던 정 전 의장의 ‘결연한 의지’가 무색하기만한 퇴장이다.

조남규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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