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 망년회 자리에서
참으로 멋진 사무라이 한 명을 소개받았습니다.
요시무라 간이치로(吉村貫一郞).
'신센구미(新選組)'의 일원이었답니다.
신센구미는 일본 메이지 유신 직전 도쿠가와 바쿠후가 조직한 교토 경호대. 도쿠가와 바쿠후를 뒤엎고 천황을 받들려했던 메이지 유신 지사들이 신센구미의 주요 타깃이었답니다. 걸리기만 하면 닥치는대로 베었다나. 요시무라는 신센구미 간부도 아니고 무술의 달인도 아닙니다. 신센구미 관련 사료에 이름 정도 소개되는 인물이라는군요. 바로 이런 친구를, '철도원' '파이란'의 저자인 아사다 지로(淺田次郞.아래 사진)가 그의 장편 소설 '칼에 지다'(원제 壬生義士傳)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부활시킵니다.
그런데 도무지 사무라이답지 않은 친구입니다.
<지로의 소설을 토대로 한 영화 '바람의 검, 신선조' 속의 요시무라>
소설 속의 요시무라는 이렇습니다.
다음은 소설의 한 대목.
그날 저녁에 나와 요시무라에게 액땜이나 하라는 포상금이 나왔어.
히지카타의 방에 불려들어가 우리는 두 냥씩 돈을 받았어.
사실 나는 그런 일(가이샤쿠,介錯:할복하는 자가 배를 가르고 목을 내밀면 뒤에서 그 목을 쳐주는 일)로 돈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던 터라 그저 고맙게 넙죽 받아넣었어. 그런데, 허 참, 요시무라는 그게 아니었어. 뭐가 못마땅한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돈에는 손도 대지 않은채 이런 소리를 하더라구.
'가이샤쿠를 맡았던 것은 동기생으로서의 의무이니 새삼 금전을 받을 입장이 아닐 터입니다.'
아이쿠, 이 친구야, 내 사정도 좀 봐줘. 나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어. 그런 소리를 하면 벌써 돈을 품 속에 챙겨넣은 내 체면은 어떻게 되느냐구.
'그러하나 히지카타 선생님, 조금 전에 일의 전말을 모두 보셨을 줄 압니다만....적잖이 무리한 가이샤쿠를 했는지라 칼날에 이가 빠진 곳이 많습니다. 가능하다면 칼 값을 주실 수 는 없으신지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돈을 더 내놓으라는 얘기였어.
말을 그렇게 하는데, 윗사람으로서 설마하니 '어디 이가 얼마나 빠졌는지 한 번 보자'하고 부하의 허리춤에 꽂힌 칼을 확인할 수는 없지. '그러냐' 한 마디하고는 그 걸로 그만, 히지카타는 자기 품에서 석 냥을 꺼내 두 냥 위에 보태주더라고. 그 때 그들 사이에 오고간 흥정이 정말 재미있어. 히지카타도 원래 약 행상을 하고 다녔던 사람이라 돈 계산하는 머리는 아주 잘 돌아갔거든. 자린고비 둘이 눈으로 주고받은 줄다리기를 얘기로 꾸미면 대충 이렇게 될게야.
(알았다. 그럼 석냥 더 내지. 이걸로 대충 때워줘라.)
(싫소. 내 칼은 다섯 냥으로는 못 사지요. 거기서 다섯 냥은 더 받아야겠고만요.)
(어림없는 소리. 네 칼은 싸구려에다 다 닳아빠진 칼이잖아. 그걸 어째 열 냥이나 쳐?)
(한 말씀 드리자면 오키타 선생의 칼은 기슈 기요미쓰, 사이토 선생의 칼은 이케다 기신마루인줄 압니다. 오십냥은 너끈히 나가는 명품 검이지요. 나는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열냥 정도면 적당하지 않습니까?)
(....못 말릴 놈. 그러고도 네가 사무라이더냐?)
(사무라이인지라 더더욱 칼은 분명히 계산해야지요. 부디 열냥은 쳐주시죠.)
결국 그런 암묵의 흥정끝에 히지카타는 다시 다섯냥을 더 내줬어. 요시무라는 그것을 갈퀴로 긁듯이 챙겨넣더니 잽싸게 나가버렸어. 그 꼴이 또 어찌나 천연덕스럽던지, 나하고 히지카타가 어이가 없어 서로 마주봤다니까.
요시무라가 사라진 뒤에 히지카타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내게 묻더라고.
'저자가 난부 번사였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
'설마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대답이야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나도 의심이 가더라고. 사무라이라는 건 대개 금전에는 무심한 법이고, 더구나 난부 모리오카라고 하면 이십만 석의 큰 번이었으니까.
소설 속의 또 다른 에피소드.
신센구미 곤도 이사미 대장은 일동을 한바탕 휘이 둘러보고는 갈고 닦인 굵직한 음성으로 느닷없이 이렇게 말하더만.
'이번에 특별한 훈령에 따라 우리 신센구미 일동을 하타모토에 등용하신다는 통지가 있었다'
한 순간, 회의실이 고요하게 가라앉더니 뒤를 이어 와, 하는 탄성이 한 목소리처럼 터져나왔어. 그야 뭐, 말할 수 없이 좋았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어. 하타모토라고 하면, 보쇼, 손님, 지금으로 치자면 중앙관청의 고급 공무원 나리, 회사로 말하자면 도쿄 본사의 간부 사원이라고. 이게 꿈이냐 생시냐 싶더라니까. 말단 무사의 한 칸 짜리 길다란 집단 거주지를 집이랍시고 받아 살고, 사무라이라는 건 그저 명색 뿐 근근히 입에 풀칠이나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 할아버지의 얼굴이 말이지, 나도 모르게 가슴이 어리더라구.
(중략)
그 때, 내 곁에 앉아있던 요시무라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데. 마치 전기에 닿아 소스라친 사람처럼 말이지. 넋이 나간 꼴로 그 훌쩍하니 큰 키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두 손은 허벅지를 짚고 있었어.
'곤도 선생, 그 말씀이 참말이십니까?'
(중략)
그 무렵 그 자는 말 그대로 너덜너덜한 허수아비였어. 봉급을 땡 전 한 푼 안남기고 고향에 보내버리는 탓인지 노상 입고다니는 단벌 바지저고리가 여기저기 기운 곳 투성이여서, 그 한 참 전 입대할 적에 내가 아이즈번 감독관으로 착각할 정도로 멋지던 모습은 자취도 없었지.
그 꼴을 보고 히지카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더만.
'왜 그러나, 요시무라. 뭔가 불만이라도 있어?'
'아뇨'
그리고 눈을 들어 히지카타를 바라보며 이어진 요시무라의 말에 대원들은 아주 대경실색을 했지.
'변변치 않은 질문입니다만, 수당은 얼마나 받게 되겠습니까?'
어이가 없어 입만 뻐금거리는 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자, 어이그 하고 한 숨을 내쉬는 자....어지간한 곤도 이사미도 꾸짖을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그 큰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것 같더라고.
우리는 번듯한 막부 관료로 임명을 받은거야. 그건 하타모토 관리의 격을 하사받았다는 명예의 문제였지. 어느 누구도 금전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어.
곤도는 돌연한 질문에 적잖이 당황하는 모습이더니 곁에 있던 히지카타에게 물었어.
'그런 쪽은 어떻게 되나?'
히지카타도, 아, 예에, 하고 얼빠진 대답을 하고는 서류를 뒤적여보더라고.
'지도감찰 요시무라 간이치로에게는 사십 석이 하사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요시무라가 자리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더만. 감개무량한 목소리가 터지데.
(중략)
'저는 고향에서 이타 이인부치(14가마 정도)의 말단 무사였고만요. 아무리 검술을 잘하고 글을 잘해도, 마음가짐을 올바르게지녀도 말단은 평생 말단이었어요. 그런 제가 도쿠가와 가의 봉록을 사십 석이나 받다니...사십 석이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대기를 다룬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의 '대망(大望)'이나 메이지 유신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주인공으로 한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료마가 간다'라는 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요시무라는 파격 무사입니다. 당시 통념에 비춰보면 동료라는 게 수치스러울 정도였겠죠.
그런데 소설을 읽어갈수록 저는 요시무라야말로 진정한 무사였다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는 누구보다 인간의 길을 제대로 걸어간 무사였다는 생각입니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도쿠가와 바쿠후의 껍데기 무사 정신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존왕양이'(尊王攘夷,천왕의 권위를 중심으로 국가체제를 강화하여 외국세력을 물리치자는 사상. 메이지 유신파가 도쿠가와 막부를 공략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창)를 외치며 다니던 시기에 그는, 처자식을 굶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갔습니다. 그건 할복의 명령이 내려질 중죄인 탈번(자신이 속한 영지를 떠나는 일)을 결행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처자식에게 한 푼이라도 더 보내주기 위해 그는 수전노라는 조롱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사내라는 건 제가 먹여살려야 하는 자들을 위해 죽는거요. 여자에게 반했다면 그 여자를 위해, 자식이 생겼다면 그 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거요'라고 외치면서.
'사무라이가 목숨을 바칠 상대는 번주님이 아니라 우리를 먹여살리는 백성들이 아니겠는가'라고 주장하면서.
'전쟁이라는 것은 항상 그 나름의 대의가 있겠습니다, 그 배경에는 반드시 그 대의 따위와는 상관없는 굶주림과 가난이 있다'고 호소하면서.
천황이니 바쿠후니,무사도니 하는 용어로 가득찬 근대 일본사만을 접해온 저로서는, 요시무라야말로 뜻밖의 인물이더군요. 시도 때도 없이 배를 갈라대던 사무라이 시대에도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은 살고 있었구나, 라는 신선한 자각이랄까.
'칼에 지다'의 역자 양윤옥님은 '인(仁)이란 착하면서도 강한 인간으로서의 길, 의(義)는 겉으로 내세우는 사회적 책임일 것이다. 인은 무시되고 의만을 강요하던 시대에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이 두 길을 모두 포기하지 않고 운명에 저항하며 한 방울 눈물의 흔적만 남을 때까지 온 힘을 쥐어짜 자신의 할 일을 칼같이 해내고 스러졌다. 마지막 사내다운 사내, 누구보다 행복한 지아비이고 훌륭한 아버지의 모습이다'고 평했습니다.
저는, 요시무라 처럼 피가 따뜻한 무사들이 근대 일본을 주도했다면, 일본은 제국주의가 아닌 다른 길을 걷지 않았을까, 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정한론'(征韓論)의 주창자이자 지독한 국수주의자였던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가 환생한 것 같은 요즘의 일본을 바라보다 가져보는 공허한 생각이요, 처자식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가장의 한 사람으로서 절절히 느껴지는 요시무라와의 동류의식입니다. 2006년도엔 요시무라와 친해져 볼랍니다.
*후기:'너를 보니 생각나는 책'이라면서 수첩을 북 찢어 '아사다 지로, 칼에 지다'라고 써서 건넨 친구. 대학 시절엔 '자칭 시인'이었고 지금은 '자칭 영화감독'인 그가, 올 해엔 메가폰을 잡고 소리치는 모습을 보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