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울란바토르 시내를 달리고 있는 상왕십리행 버스

 

 

 

 

 

 

 

 

 

 

 

 

 

 

 

 

 

 

 

 

 

 

 

 

 

 

 

 

 

 

 

 

 

 

 

 

 

 

 

 

 

 

 

 

 

 

 

 

 

 

 

 

 

 

 

 

 

 

 

 

 

  

 

 

 

 

 

 

1206년 봄,
몽골의 오논강 하류에 몽골족의 족장들이 모였습니다.
골육상쟁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마침내 몽골 고원이
한 영웅에 의해 통합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날 테무진은 '칭기스칸'의 칭호를 부여받았습니다.
워싱턴포스트가 1999년,
지난 1000년의 역사 속에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선정한
바로 그 칭기스칸입니다.
 

 
 
 
 그로부터 800년이 지난 5월 8일,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함박 눈이 내렸습니다.
 

                                                                                                 <눈 내린 울란바토르 시내>

 몽골에서 봄 철에 내리는 눈은 행운의 상징이랍니다.
전날 노무현 대통령이 몽골을 찾았습니다.
남바린 엥흐바야르 몽골 대통령은
 “노 대통령이 우리에게 눈을 가지고 와 주셨다”고 환대했습니다.
가는 곳곳 마다 노 대통령은
눈 덕분에 더 큰 환대를 받았지요.
몽골 신문들도,
'몰골 건국 800주년 해에 첫 방문한 외국 대통령'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며 반겼습니다.
노 대통령의 몽골 방문은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뤄졌습니다.
 
 몽골을 생각하면 가슴이 훈훈합니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낯설지 않습니다.
한.몽골 정상회담과 이후 이뤄진 이런저런 모임에서
가장 많이 나온 얘기는
'너무 닮았다'는 말입니다.
노 대통령도 엥흐바야르 대통령도,
'누가 한국 사람인지, 몽골사람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고려 시대 42년간의 대 몽골 항쟁이 있었지만,
양국 관계의 시작은 여늬 민족과는 달랐습니다.
굴종만을 요구하던 칭기스칸이 고려에게는
'형제의 의(義)'를 요구했습니다.
애초부터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몽골 사람들은 지금도 한국을
'송롱고'(무지개)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친밀감의 표현입니다.
몽골에는 '알란 고아' 설화가 있는데요
칭기스칸의 선조인 도분 메르겐이
'코리 토마드'라는 곳에서 알라 고아를 아내로 맞아
유복자로 세 아들을 출산했는데
'빛'을 받아 잉태했다는 내용입니다.
바로 이 코리 토마드 지역을 놓고
몽골과 우리나라 일부 학자들은
고구려 시조 주몽의 출신지인 '고리국'(槁離國)에
비견하고 있습니다.
주몽은 '명궁'이라는 의미의 몽골어인
'제바이 메르겐'과 음가가 유사하다는
주장도 있구요.
몽골 초원에서 발견되는 돌 무더기들도
우리네 당산 나무 밑 돌무너기들을
연상시킵니다.
그 곳에 돌 얹으며
소원비는 것도 비슷하고.
 


 
하여간 양국은 몽골 반점 말고도
닮은 점이 많습니다.
 
 각설하고,
노 대통령의 이번 순방여정(몽골-아제르바이잔-아랍에미리트)은
징기스칸의 서역 정벌 경로와 닮았습니다.
그 경로는 그대로 중세 시대 동서 문화권의 교통로였던
초원길과 비단길의 루트입니다.
그 경로를 따라,
독자들과 시간 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몽골 고원을 평정한 칭기스칸이
서역 정벌에 나선 13세기로 거슬러 가봅시다.
 
 
 
 
 
 
 
 


곽재구
 
 -김치찌개 평화론-
 
 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
 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있다.
 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 주며
 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
 아버지가 고추잎을 닮은 딸 아이에게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
 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
 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
 이 소박한 한국의 저녁 시간이 우리는 좋다
 거기에는 부패와 좌절과
 거짓 화해와 광란하는 십자가와
 덥석몰이를 당한 이웃의 신음도 없다
 38선도 DMZ도 사령관도 친일파도
 염병헐, 시래기 한 가닥만 못한
 이데올로기의 끝없는 포성도 없다
 식탁 위에 시든 김치 고추무릅 동치미 대접
하나
 식구들은 눈과 가슴으로 오래 이야기하고
 그러한 밤 십자가에 매달린
 한 유대 사내의 웃는 얼굴이 점점 커지면서
 끝내는 식구들의 웃는 얼굴과 겹쳐졌다.
 
 
*곽재구 시집 '전장포 아리랑' 중에서.
 
*20대 초반,
이념과 종교 문제로 고민하며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살며시 다가와
나를 다독거려준 시.
지금은 나도 가장이 되어
고추잎 닮은 딸을 바라보며
그 시절 미망들을 떠올리다
웃음짓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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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탱크를 탄 사람이 어떤 느낌을 줍니까?
강력한 국방정책을 펼칠 인물로 보이십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속의 주인공은
1988년 미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선 마이클 두카키스입니다.
'유약한 두카키스에게 국방을 맡길 수 없다'는 공화당측 공격에,
두카키스는 미시간주 제너럴 다이나믹스 공장에서
M1 탱크에 올라타는 이벤트를 연출합니다.
이를 통해 그의 참모들은
두카키스의 강력한 국가방위공약을 유권자에게 전달하려했으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그가 탄 탱크는 빙빙 돌았습니다.
머리와 어깨만 내놓은 두카키스는 탱크를 조종한다기 보다는
탱크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듯이 보였습니다.
탱크를 탄 두카키스가 관광객처럼 미소짓고 손을 흔들 때,
강력한 국방의 주창자라는 이미지는
포말터지듯 사라졌습니다.
'웃기고 있네. 탱크 탄 모습이 바보같아'
탱크 이벤트를 지켜본 국민 대부분이 이렇게 냉소했습니다.
이미지에 기대려다 망가진 대표적 사례입니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 후보.
두카키스를 누르고 대통령이 되지만
그가 재선에 실패한 이유도 이미지 탓입니다.
88년 대선 당시 '세금 인상없다'고 외치던 그의 이미지가
재임중 세금 인상 조치가 이뤄짐으로써
92년 대선 때는 부메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블로그 '미국 탐사기' 코너의 '내 입술을 보시오' 참조)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국 정치권에서도 이미지 정치 논란이 한창입니다.
서울시장 선거에 뛰어든
열린우리당 강금실, 한나라당 오세훈 예비후보가
기존 정치인과는 차별화된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빚어진 현상입니다.
출마 선언도 하기 전에 이들의 지지율이 상한가를 치는 것을 보면
국민들은 일견 비합리적인 듯 보이는 이미지에 의존하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지 정치를 연구한 서울대 이준웅 교수(언론정보학)는
'정책같은 이슈 정보보다 이미지 정보가
유권자 개인에게 편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유권자가 미디어 등을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를
무조건 수용하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는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나름대로 다양한 정보들을 자기 식으로 처리한 끝에
특정 후보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지 정치에 관한 논의는
이미지 정치가 좋으냐, 나쁘냐는 차원을 넘어
후보의 특정 이미지가 진정성을 지니고 있느냐,
그런 이미지가 제대로 된 검증을 거쳤느냐는 수준에서
이뤄져야한다는 생각입니다.
두카키스의 탱크쇼는 작위적 이미지로 받아들여졌고
부시의 감세 이미지는 본인에 의해 훼손됐습니다.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도 어렵지만
그 이미지를 가꿔나가는 것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나 나름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강금실, 오세훈씨가 참신한 이미지라면
이들의 경쟁자인 이계안, 맹형규씨는
안정적 이미지를 갖습니다.
홍준표씨는 강한 추진력을 연상시킵니다.
그런 만큼 그 누구든,
이번 선거의 당락을 떠나
자신들의 좋은 이미지가
국민들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허밋 레스트(Hermits Rest).
말 그대로 은둔자의 쉼터입니다.
그랜드 캐년을 찾은 관광객 대부분이 이 곳을
그랜드 캐년의 서쪽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곳에서 도로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랜드 캐년 지역에 접어든 콜로라도 강은
이 곳까지 152km를 달려왔을 뿐입니다.
허밋 레스트에서 292km를 더 흘러가야
캐년 지역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뒤 라스 베가스 근처의
미드 호수에 닿을 때까지 말이죠.
그랜드 캐년의 광대한 규모를 짐작케합니다.
 
 참고로, 그랜드 캐년은
웨스트 림과 이스트 림, 노스 림으로 구분되는데,
웨스트 림과 이스트 림을 합쳐 사우스 림으로 통칭하기도 합니다.
사우스 림에서 바라다 보이는 협곡 건너 편이 노스 림입니다.
웨스트 림은 차량 통행이 금지돼 있습니다.
셔틀 버스가 유일한 교통 수단입니다.
바로 이 버스의 종점이 허밋 레스트입니다.
 
 한 때는 이 곳에 정말 은둔자가 살았답니다.
루이스 부처라는 사람인데,
구리 광맥을 찾아서 캐년 속을 헤집고 다녔다나.
그는 구리 광산으로 별 재미를 못보고 떠났지만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에는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허밋 레스트는 명소가 됐습니다.
지금의 허밋 레스트 건축물은
이스트 림의 데져트 뷰 워치타워('이스트 림'편 참고)를 설계한
제인 콜터의 작품입니다.
 


 
 
 허밋 트레일은 이 건축물 뒷 편에서 시작됩니다.
이스트 림이나 노스 림과는 다소 색다른 풍광이 펼쳐집니다.
 

               <허밋 트레일 코스에서 바라본 캐년>

 웨스트 림의 호피 포인트와 모하브 포인트에선
매일 석양과 캐년이 어우러진,
장엄한 광경이 연출됩니다.
낙조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하면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그 자체로 장관을 이룹니다.
 

         
 


   
 운이 좋다면,
비구름 사이로 터져나오는 번개가
캐년 위로 내리꽂히는 영화같은 장면을
목격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호피와 모하브는
콜로라도 강 근처에 살던 인디언 부족의 이름.
시시각각 변해가는 캐년의 석양 빛이
신산을 겪은 호피족과 모하브족의 삶을
차근차근 반추하는 듯 합니다.
여름철엔 오후 8시30분이나 돼야
석양이 무르익습니다.
 
 웨스트 림 셔틀버스가 출발하는 그랜드 캐년 빌리지.
3일 이상 캐년에 머물 여행객에겐 안성맞춤의 숙소입니다.
윌리엄스에서 출발하는 그랜드캐년 열차의 종착역이기도 하고
인기있는 '브라이트 앤젤 트레일'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그랜드 캐년 빌리지 안의 셔틀버스 타는 곳, 마침 캐년 열차가 지나갑니다>
 
 브라이트 앤젤 트레일의 입구입니다.
완주하기까지는 대단한 각오가 필요합니다.
 


             
 

                                                     <트레일 초입새의 바위 문>

 

                                                                         <바위 문 위에 우뚝 서있는 이 나무, 정말 고개가 숙여집니다>
        
 

                                                                                <'갈짓 자'를 그리며 내려갑니다>

 



 10km 정도 내려가면
정상에서 실개천처럼 보이던 콜로라도 강이

 


그 자태를 드러냅니다.
 


 고도가 1300m 정도 낮아진 때문입니다.
여름 시즌엔 섭씨 35도 안팎까지 기온이 상승,
오전 9시 이전이나 오후 4시 이후에나
트레일에 가능합니다.
다시 올라오는 길은 죽을 맛이니
무리하게 계획을 세우면 위험합니다.
아예 노새타고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google.com 

 숙소를 캐년 국립공원 바깥에 잡으면
공원에 진입하기 위해 남문이나 동문을 통해야 합니다.
저는 캐년 남동쪽의 플래그스태프에 숙소를 잡아두고 왔다갔다했는데
남문과 동문 모두 이용하기 편했습니다.
남문으로 가는 길은 울창한 숲길이고
동문으로 가는 길은 벌건 황무지 길입니다.
그 묘한 대조가 캐년 가는 재미를
한층 높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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