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아제르바이잔과의 유전 공동개발에 참여하는 지분은 어느 정도입니까.”(기자)

“전체 지분의 10% 정도다.”(송민순 청와대 안보정책실장)

노무현 대통령의 아제르바이잔 국빈 방문 둘째 날인 11일 오전(현지시간) 프레스센터에서는 ‘지분 논란’이 일었다.

아제르바이잔과의 ‘이남(Inam) 유전광구 공동개발 협력 양해각서(MOU) 체결 의미를 설명하는 자리에서다.

그러나 배포된 산업자원부 자료에는 ‘전체 지분 중 최대 20% 매입 목표’라고 돼 있었다.

그 차이를 묻자 송 실장은 산자부 실무자에게 확인한 후 “아제르바이잔 국영석유회사(SOCAR)의 지분 50% 중 20%를 우리가 가져온다는 것인 만큼 전체로는 10%”라며 “간단한 산수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남 광구 개발에는 석유 메이저사인 영국 BP와 셸이 25%씩 지분을 갖고 있고, 한국은 SOCAR 몫인 나머지 50% 중 일부를 차지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잠시 후 산자부 실무자는 “SOCAR 지분 50% 중 40% 정도를 확보한다는 계획인 만큼 전체를 기준으로 하면 20%가 맞다”고 정정 발표를 했다. ‘대형유전 개발의 참여 길이 열렸다’는 산자부의 의미 부여도 성급한 것이다.

이번 MOU는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지 여부를 SOCAR 측과 협상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산자부 실무자 말대로 “협상하다 서로 셈이 맞지 않으면 안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서방의 석유 메이저들 안마당인 아제르바이잔 유전 개발 시장에 우리가 그 정도의 권리라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정상회담 덕분임이 분명하다.

그럴수록 작은 성과에 흥분하고 과대광고를 하기보다는 차분하고 내실있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바쿠=조남규 정치부 기자

 

 

 

 

 

 

 

 

 

 

 

 

 

 

 

 

 

 

 

 

 

 

 

 

 

 

 

 

 

 

 

 

 

 

 

 

 

 

 

 

 

 

 

 

 

 

 

 

 

바쿠에서 만난 태권 소년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다음 행선지인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까지는
비행기로 6시간 50분이 걸렸습니다.
울란바토르에서 알타이 산맥넘고
중가리아 분지를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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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 본 중가리아 분지-이전엔 몽골 땅이었으나 지금은 중국 땅이 됐습니다>

 
 천산 산맥을 넘으니
조금 뒤 카스피해가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바람의 도시'라는 의미의 바쿠는,
 카스피해에 면한 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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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9년 가을부터 시작된 칭기스칸의 이슬람권 정벌은
흥미롭게도 노대통령의 이날 동선과 거의 일치합니다.
시속 1000km에 육박하는 속도의 비행기로도 7시간 가까이 걸린 지역을
수십만 군대와 수백만 병참 가축이 함께 이동한 것입니다.
천산은 중국 파미르 고원에서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까지
2000km 정도 뻗어있는 산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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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천산 산맥>

 
 칭기스칸 군대는 천산을 왼쪽으로 바라보며
서쪽으로 내달렸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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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 눈을 이고있는 천산 아래 분지로 수 십만의 몽골군이 진군하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중가리아 분지가 끝날 즈음,
그 군대 앞에 천산이 길을 가로막고 섰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 바람 속에,
군대는 천산을 넘어야했습니다.
수많은 군대와 가축이 희생됐습니다.
 
 무모한 정벌길이었습니다.
무엇이 칭기스칸의 말머리를 서역으로 돌렸을까요.
 
 배석규는 그의 저서 '칭기스칸, 천년의 제국'에서
칭기스칸의 서역 정벌이 '선택당한 전쟁'이었다고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칭기스칸은 상인들이 가져온 서쪽 나라 '호레즘' 소식과
그 나라 물품에 관심을 가져
처음엔 교역을 원했다고 합니다.
바쿠 시내 곳곳에 카페트 가게가 많았는데
당시에도 옛 페르시아 지역의 카페트는
주요 교역 물품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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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쿠 시내에는 이런 카페트 상점이 즐비...>
 
  그래서 평화조약을 맺고 교역을 하자는 서신을 보냈는데
여기서 문제가 터졌습니다.
칭기스칸이 서신 말미에 친근감을 표시하는 의미로
'그대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덧붙인 내용이
호레즘 군주인 무함마드의 심기를 건들였답니다.
무함마드는 제2의 알렉산더를 꿈꾸는
돈키호테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상인들을 통해 호레즘 왕국의 정보를 취합해온 칭기스칸과 달리
무함마드는 자신의 역량만 믿고 국제 정세에는 귀를 닫은
어리석은 군주였습니다.
결국 그는 몽골 사절단을 첩자로 몰아붙여
한 명만 남기고 모두 살해했습니다.
칭기스칸은 교류 대신 전쟁을 선택합니다.
 
 후대 이슬람 역사가들은 이 대목을 두고,
땅을 치며 안타까워했다고, 배석규씨는 강조했습니다.
'무함마드의 무모한 행위로
얼마나 많은 이슬람인들이 피를 흘리게 되었느냐'면서.
 
 실제 이슬람 민중들은 지도자를 잘못 만난 죄로
무수한 피를 뿌려야했습니다.
호레즘 왕국은 몽골군에 의해 철저히 유린됩니다.
몽골군은 자신들에 저항하거나
몽골군을 한 사람이라도 희생시킨 도시의 경우,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생긴 것은
고양이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도륙했습니다.
'몽골군에 맞서면 몰살 당한다'는 공포감은
전쟁 대신 투항을 유도하기도 했으니
칭기스칸은 효과적인 심리전을 병행한 셈입니다.
화를 자초한 무함마드는
몽골군의 끈질긴 추격을 피해다니다
결국 병을 얻어 죽습니다.
무함마드의 마지막 은신처는
카스피해의 섬이었습니다.
지금의 아제르바이잔 영토였을지도 모릅니다.
 
 아제르바이잔 역시 호레즘 정벌의 여파로
100여년간 몽골군의 지배를 받게됩니다.
바쿠 시내의 유적지인 '처녀의 망루'에는
몽골 지배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몽골의 '칸'(왕)에게 몸을 바쳐야하는 운명에 놓인
성주의 딸이 바로 이 망루 위에서 카스피해로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전해져내려옵니다.
딸을 요구한 게 몽골 왕이 아니라
귀족이라는 다른 버전도 있습니다만...
어떻든 지금은 카스피해가 망루 아랫쪽으로
수 백미터나 물러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 탑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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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은 11일
아제르바이잔 경제인 오찬 연설 도중
'한국과 아제르바이잔 양국은 외세의 침략을 꿋꿋이 이겨낸
자랑스런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외세에는 몽골만 포함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지역은 후일 제정 러시아의 패권 하에 들어갔고
20세기초 독립을 선언했으나
러시아 볼세비치 혁명군에 접수돼
또 다시 소 연방에 편입됐습니다.
한국을 침략한 외세로는
몽골도 포함돼 있습니다.
몽골과 아제르바이잔, 한국의 얽히고설킨 인연이
새삼스러워지는 순방길입니다.
 
*이번 노대통령 순방은 정상회담 내용 보다
순방과는 그다지 연관성이 없는
대통령의 대북 관련 언급이 더 크게 취급되는 분위기네요.
순방의 주제인 미래의 자원과 에너지 확보 문제도
중요할 것 같은데 말이죠.
 
 
   
 
 
 
 
 우리가 몽골과 의미있는 첫 만남을 가진 시점을
역사가들은 1218년으로 봅니다.
몽골군에 쫓겨온 거란인들이 고려 땅에서 난동을 부리자
몽골 장수 카치운이 고려 서북면원수부에 거란인 소탕을 위한
합동작전을 요구했다는군요.
당시 칭기스칸은 고려와 '형제의 의'를 맺자고 했는데,
당연히 몽골이 형님이었겠지요.
 
 그로부터 788년이 흐른 뒤,
이런 형님 동생 관계가 역전(?)됐습니다.
몽골을 국빈방문중인 노무현 대통령이 동포간담회에서
'우리가 형님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거든요.
노 대통령이 든 이유인즉슨, 이렇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인류가 발상해서 서아시아, 터키 쪽으로 와서
남으로, 북으로 시베리와로 왔을 것이다. 한국 사람 저 북쪽으로
둘러서 온 것 같다. 몽골와서 다리가 아파
'더 못가겠다. 너나 가봐라'해서 아들에 아들,
아들에 아들 대를 이으면서
조금씩 동진해 한국까지 도착했죠.
형님이 여기 남고 동생이 왔는지,
동생이 남고 형님이 왔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동생은 아버님 모시고 살고
형님이 온 것 아닌가 싶다.
그래서 우리가 형님이라고 생각한다'
 
 농담조의 가벼운 얘기였고 결론은
'길게보면 같이 살아갈 사람들'이라는 것이지만
저는 노 대통령의 추측이 그럴 듯 하다고 생각합니다.
몽골에서는 우리와 반대로
가업을 막내 아들에게 맡기는 전통이 있으니깐요.
 
 형님 동생하는 얘기는 우스갯 소리라 하더라도
세계 제국을 건설한 경험이 있는 저력의 몽골에
지금은 우리가 '한 수' 전수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노대통령 방문 기간 몽골은
'황무지에서 경제를 일군'(노대통령) 전략을
전수받기 원했습니다.
이에 노 대통령은
'부자된 지 오래 안돼 많은 돈은 없으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경험과 그 것을 함께하려는 의지를 갖고있다'고
화답했습니다.  
 
 과거 몽골 제국의 경쟁력 중 하나는
탁월한 통신망이었습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넓은 초원 지대에서
정보는 생사를 가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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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 초원 지대의 게르(천막집). 좀 지나면 황무지같은 이 곳이 파랗게 변한답니다>

 
 말을 탄 전령이 릴레이식으로 정보를 나르던 역참제나
매를 이용한 정보 전달 시스템은
요즘의 인터넷과 DHL에 비견될 만 합니다.
칭기스칸을 지난 1000년간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한 워싱턴포스트가
이런 몽골인을 '그들은 인터넷이 발명되기 700여년 전에
 전 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개척해 놓았다'고 평가한 바 있듯이.
 

 

이제는 이 부분에서도 우리가 앞서갑니다.
노 대통령이 몽골 경제인과의 만남에서
'몽골은 국토가 넓은 만큼 정보 통신 인프라가 더 중요하다'고
조언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우리의 자부심 만큼이나
몽골인의 자부심도 대단합니다.
한국을 보면서도
'너희들이 지금은 경제적으로 앞서있지만
한 때는 우리의 지배아래 있었던 나라이고
우리가 언젠가는 과거의 영광을 재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슴 속에 담고 살아간다고, 현지 교민들은 말합니다.
몽골은 1921년 소비에트 적군과 연합해 중국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선포했으나 사회주의 체제에 묶여
88년 개혁 개방정책으로 선회하기 전까지
독자적 성장의 계기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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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 공산혁명의 영웅'인 수흐바타르 장군 동상. 신혼부부들이 결혼식 후 이 동상에 헌화
        하는 관습이 있답니다.>
 
 최근 한국인의 몽골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일부 '어글리 코리안'의 추태도 한국의 이미지를 갉아먹고 있습니다.
노대통령 방문행사에 지원나온 울란바토르 대학의 학생은
한국 사람에 대한 평가를 묻자,
'나쁜 짓을 하고다녀 그다지 좋게 안보인다'고 답변했습니다.
 
 좀 있다고 거들먹거리지 않았는지,
우리를 되돌아봐야 할 때이고
현재의 겉모습보다는
내면을 들여다봐야 할 몽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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