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
 
 -김치찌개 평화론-
 
 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
 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있다.
 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 주며
 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
 아버지가 고추잎을 닮은 딸 아이에게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
 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
 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
 이 소박한 한국의 저녁 시간이 우리는 좋다
 거기에는 부패와 좌절과
 거짓 화해와 광란하는 십자가와
 덥석몰이를 당한 이웃의 신음도 없다
 38선도 DMZ도 사령관도 친일파도
 염병헐, 시래기 한 가닥만 못한
 이데올로기의 끝없는 포성도 없다
 식탁 위에 시든 김치 고추무릅 동치미 대접
하나
 식구들은 눈과 가슴으로 오래 이야기하고
 그러한 밤 십자가에 매달린
 한 유대 사내의 웃는 얼굴이 점점 커지면서
 끝내는 식구들의 웃는 얼굴과 겹쳐졌다.
 
 
*곽재구 시집 '전장포 아리랑' 중에서.
 
*20대 초반,
이념과 종교 문제로 고민하며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살며시 다가와
나를 다독거려준 시.
지금은 나도 가장이 되어
고추잎 닮은 딸을 바라보며
그 시절 미망들을 떠올리다
웃음짓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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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탱크를 탄 사람이 어떤 느낌을 줍니까?
강력한 국방정책을 펼칠 인물로 보이십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속의 주인공은
1988년 미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선 마이클 두카키스입니다.
'유약한 두카키스에게 국방을 맡길 수 없다'는 공화당측 공격에,
두카키스는 미시간주 제너럴 다이나믹스 공장에서
M1 탱크에 올라타는 이벤트를 연출합니다.
이를 통해 그의 참모들은
두카키스의 강력한 국가방위공약을 유권자에게 전달하려했으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그가 탄 탱크는 빙빙 돌았습니다.
머리와 어깨만 내놓은 두카키스는 탱크를 조종한다기 보다는
탱크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듯이 보였습니다.
탱크를 탄 두카키스가 관광객처럼 미소짓고 손을 흔들 때,
강력한 국방의 주창자라는 이미지는
포말터지듯 사라졌습니다.
'웃기고 있네. 탱크 탄 모습이 바보같아'
탱크 이벤트를 지켜본 국민 대부분이 이렇게 냉소했습니다.
이미지에 기대려다 망가진 대표적 사례입니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 후보.
두카키스를 누르고 대통령이 되지만
그가 재선에 실패한 이유도 이미지 탓입니다.
88년 대선 당시 '세금 인상없다'고 외치던 그의 이미지가
재임중 세금 인상 조치가 이뤄짐으로써
92년 대선 때는 부메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블로그 '미국 탐사기' 코너의 '내 입술을 보시오' 참조)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국 정치권에서도 이미지 정치 논란이 한창입니다.
서울시장 선거에 뛰어든
열린우리당 강금실, 한나라당 오세훈 예비후보가
기존 정치인과는 차별화된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빚어진 현상입니다.
출마 선언도 하기 전에 이들의 지지율이 상한가를 치는 것을 보면
국민들은 일견 비합리적인 듯 보이는 이미지에 의존하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지 정치를 연구한 서울대 이준웅 교수(언론정보학)는
'정책같은 이슈 정보보다 이미지 정보가
유권자 개인에게 편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유권자가 미디어 등을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를
무조건 수용하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는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나름대로 다양한 정보들을 자기 식으로 처리한 끝에
특정 후보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지 정치에 관한 논의는
이미지 정치가 좋으냐, 나쁘냐는 차원을 넘어
후보의 특정 이미지가 진정성을 지니고 있느냐,
그런 이미지가 제대로 된 검증을 거쳤느냐는 수준에서
이뤄져야한다는 생각입니다.
두카키스의 탱크쇼는 작위적 이미지로 받아들여졌고
부시의 감세 이미지는 본인에 의해 훼손됐습니다.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도 어렵지만
그 이미지를 가꿔나가는 것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나 나름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강금실, 오세훈씨가 참신한 이미지라면
이들의 경쟁자인 이계안, 맹형규씨는
안정적 이미지를 갖습니다.
홍준표씨는 강한 추진력을 연상시킵니다.
그런 만큼 그 누구든,
이번 선거의 당락을 떠나
자신들의 좋은 이미지가
국민들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허밋 레스트(Hermits Rest).
말 그대로 은둔자의 쉼터입니다.
그랜드 캐년을 찾은 관광객 대부분이 이 곳을
그랜드 캐년의 서쪽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곳에서 도로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랜드 캐년 지역에 접어든 콜로라도 강은
이 곳까지 152km를 달려왔을 뿐입니다.
허밋 레스트에서 292km를 더 흘러가야
캐년 지역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뒤 라스 베가스 근처의
미드 호수에 닿을 때까지 말이죠.
그랜드 캐년의 광대한 규모를 짐작케합니다.
 
 참고로, 그랜드 캐년은
웨스트 림과 이스트 림, 노스 림으로 구분되는데,
웨스트 림과 이스트 림을 합쳐 사우스 림으로 통칭하기도 합니다.
사우스 림에서 바라다 보이는 협곡 건너 편이 노스 림입니다.
웨스트 림은 차량 통행이 금지돼 있습니다.
셔틀 버스가 유일한 교통 수단입니다.
바로 이 버스의 종점이 허밋 레스트입니다.
 
 한 때는 이 곳에 정말 은둔자가 살았답니다.
루이스 부처라는 사람인데,
구리 광맥을 찾아서 캐년 속을 헤집고 다녔다나.
그는 구리 광산으로 별 재미를 못보고 떠났지만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에는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허밋 레스트는 명소가 됐습니다.
지금의 허밋 레스트 건축물은
이스트 림의 데져트 뷰 워치타워('이스트 림'편 참고)를 설계한
제인 콜터의 작품입니다.
 


 
 
 허밋 트레일은 이 건축물 뒷 편에서 시작됩니다.
이스트 림이나 노스 림과는 다소 색다른 풍광이 펼쳐집니다.
 

               <허밋 트레일 코스에서 바라본 캐년>

 웨스트 림의 호피 포인트와 모하브 포인트에선
매일 석양과 캐년이 어우러진,
장엄한 광경이 연출됩니다.
낙조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하면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그 자체로 장관을 이룹니다.
 

         
 


   
 운이 좋다면,
비구름 사이로 터져나오는 번개가
캐년 위로 내리꽂히는 영화같은 장면을
목격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호피와 모하브는
콜로라도 강 근처에 살던 인디언 부족의 이름.
시시각각 변해가는 캐년의 석양 빛이
신산을 겪은 호피족과 모하브족의 삶을
차근차근 반추하는 듯 합니다.
여름철엔 오후 8시30분이나 돼야
석양이 무르익습니다.
 
 웨스트 림 셔틀버스가 출발하는 그랜드 캐년 빌리지.
3일 이상 캐년에 머물 여행객에겐 안성맞춤의 숙소입니다.
윌리엄스에서 출발하는 그랜드캐년 열차의 종착역이기도 하고
인기있는 '브라이트 앤젤 트레일'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그랜드 캐년 빌리지 안의 셔틀버스 타는 곳, 마침 캐년 열차가 지나갑니다>
 
 브라이트 앤젤 트레일의 입구입니다.
완주하기까지는 대단한 각오가 필요합니다.
 


             
 

                                                     <트레일 초입새의 바위 문>

 

                                                                         <바위 문 위에 우뚝 서있는 이 나무, 정말 고개가 숙여집니다>
        
 

                                                                                <'갈짓 자'를 그리며 내려갑니다>

 



 10km 정도 내려가면
정상에서 실개천처럼 보이던 콜로라도 강이

 


그 자태를 드러냅니다.
 


 고도가 1300m 정도 낮아진 때문입니다.
여름 시즌엔 섭씨 35도 안팎까지 기온이 상승,
오전 9시 이전이나 오후 4시 이후에나
트레일에 가능합니다.
다시 올라오는 길은 죽을 맛이니
무리하게 계획을 세우면 위험합니다.
아예 노새타고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google.com 

 숙소를 캐년 국립공원 바깥에 잡으면
공원에 진입하기 위해 남문이나 동문을 통해야 합니다.
저는 캐년 남동쪽의 플래그스태프에 숙소를 잡아두고 왔다갔다했는데
남문과 동문 모두 이용하기 편했습니다.
남문으로 가는 길은 울창한 숲길이고
동문으로 가는 길은 벌건 황무지 길입니다.
그 묘한 대조가 캐년 가는 재미를
한층 높여줍니다.
 
 
 
 
 
 
   
 
 
 
 
 
 
 


 피에로 소데리니(1450~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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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의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동생 프란체스코는 추기경이 됐습니다.
성실하고 청렴한 관료로 칭송받았습니다.
그는 법의 사람이었습니다.
적군이 코 앞에 이른 상황에서도
결정을 국회의 토의에 맡길 정도로 말이죠.
특정 분파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소란스런 피렌체 정계에서
항상 중립적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어느 한 쪽을 편들어
다른 쪽과 싸우려들지 않았습니다.
피렌체가 공화국 정체였을 당시인 1502년 9월,
그는 공화국의 종신 대통령으로 선출됐습니다.
 
 소데리니의 삶은
고건 전 총리의 역정과 닮은 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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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전 총리,
훌륭한 가풍(家風) 속에서 성장,
관료로 입신했습니다.
평생 '선(禪) 철학'을 궁구한 선친은
관료가 된 아들에게 '공직 3계'를 내렸다고 합니다.
첫째,파벌 만들지 말고 줄 서지 마라,
둘째,돈 받지 말라,
셋째,술 잘 먹는다고 소문내지 마라.
그는 언젠가 '첫 번째와 두 번째 계율은 잘 지켰지만,
세 번째 계율만은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관료로서 올곧게 살아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박정희 정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무려 6대 정권에 걸쳐 요직에 중용됐습니다.
참여정부 초대 총리에 오른 그는,
국회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로
대통령권한대행이 됐습니다.

 소데리니는,
'평시라면 이상적인 지도자였을 것'(작가 시오노 나나미)입니다.
'시대와 그의 행동하는 방식이 부합하는 동안에
그와 그의 도시는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후일 그가
자신의 인내와 겸손을 중단할 필요가 있는 시기에 직면했을 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 자신의 도시와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마키아벨리의 평가입니다.
인간 소데리니는 훌륭했지만
지도자 소데리니는 시대상황에 부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 전 총리가 5월 지방선거 불개입을 천명했습니다.
열린우리당과도 민주당과도,
손 잡을 생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반(反) 한나라당 연대를 제안해도,
그는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정동영-고건 회동에 앞서 양측은,
'참여정부의 성공을 기원한다'는 사전 합의문을 준비했으나
고 전 총리측이 꺼려 채택되지 않았다는 후문입니다.
대신 그는 '창조적 실용주의'를 외치고 있습니다.
부패한 보수세력,
무능한 개혁세력에 등을 돌린 이들이
그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 대목이 범 여권의 대선 주자들 중,
그의 지지율이 최고인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정황 속에서 그는,
우리당이 지방선거에서 깨질 때까지,
그 여파로 정치판 재편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리려 한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다른 경쟁 후보가 스스로 무너질 때를 기다리면서.
이런 태도는 마치 소데리니가,
피렌체 공화국을 무너뜨리려는 세력의 성장 속에서
우호 세력인 프랑스의 힘에만 기대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던 행태를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그런 소데리니의 피렌체 공화국은 결국,
스페인과 손을 잡은 메디치가의 쿠데타로 붕괴합니다.
유리한 여건과 충분한 시간을 갖고도
힘을 키우지 않은 소데리니는,
조국 피렌체에서 추방되고
평생 피렌체 땅을 밟지못하는
운명이 됩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창출한
민주개혁세력은 지금,
분열해있습니다.
우리당의 지방선거 참패는,
이들의 분열을 가속화시킬 것입니다.
민주개혁세력은 큰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이때 쯤 고 전 총리는 '창조적 실용주의'의 기치를 들고
소집나팔을 불 것입니다.
그러나 의문입니다.
피와 땀을 공유하지 않은 장수의 부름에
응답할 병사가 얼마나 될 것인지.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역사학자인 게리 윌스가 말했습니다.
고상한 부름이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응답할 만한 부름이 응답받는 법이라고.
 
 
 미 프로풋볼 선수인 팻 틸먼(애리조나 카디널스)이 자원입대할 당시,
그는 잘 나가는 선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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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시즌엔 224회 태클로 팀 신기록을 달성,
팀의 간판 수비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2000년 시즌이 끝나자 세인트 루이스 램스는
5년에 900만 달러의 연봉을 제시하며 이적을 권했습니다.
카디널스는 2001년 말, 3년에 360만 달러의 연봉을 제의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제안들을 모두 물리치고
2002년 여름, 육군특수부대 레인저스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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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한가하게 운동만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마이너리그 프로야구 선수인 동생도 형과 뜻을 함께 했습니다.
그 뒤로, 신혼의 틸먼 부인이 홀로 남았습니다.
9.11 테러의 연기 속에 풋볼장을 떠난 그는,    
2004년 4월 22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전사했습니다.
 
 며칠 전엔 틸먼의 애리조나 주립대 친구인 제레미 스타트가
해병대 신병 훈련을 마친 뒤
이라크 파병을 앞두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그 역시 2006년 미 프로풋볼리그(NFL) 우승팀인 피츠버그 스틸러스에서
수비수로 활약한 풋볼 선수 출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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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 테러 직후 틸먼과 함께 입대하려 했으나
틸먼의 만류로 입대를 늦췄다고 합니다.
입대하기 위해 수십만 달러의 연봉을 포기하고
체중을 23kg 가량이나 감량했습니다.
돈도 포기하고, 체중까지 줄여가면서
자원입대의 길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프로 선수로 돈 버는 일에 자긍심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프로 선수들이나 연예인들에게는 수백만 달러를 쓰면서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사는 군인들에게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미국은 모병제 국가라서
틸먼과 스타트의 행동이 더욱 영웅적으로 부각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반면 신체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나 군에 가는 것이 상식이고 원칙인 나라에선,
병역 기피나 면제 따위의 일들이 부각됩니다.
한국 정부가 월드베이스볼 클래식(WBC)  국가 대표팀 11명에게
병역 혜택를 부여하기로 했다는 결정이 뉴스가 되듯이.
샌디에이고 해병대 신병 훈련장에서 나온 스타트가
마침 그 도시에서 열린 WBC 경기를 보러왔다가
그 뉴스를 접했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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