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2월,
상하이 태생인 26살의 청년 후진타오(胡錦濤)는
이역만리에 위치한 간쑤성(甘肅省) 여정길에 오릅니다.
중국 서북 변경의 오지로 향하는 그의 심정은 참담했습니다.
2년 전 베이징의 칭화대학(수리공정학부 하천발전공장학과)을 졸업하고
대학에 남아 교수를 꿈꾸고 있을 때만 해도 그의 앞 길은 밝았습니다.
문화혁명의 소용돌이는 하루 아침에 그가 쌓아놓은 모든 것을 허물어뜨립니다.
학창 시절 믿고따른 학교 당조직을 보호하다 문혁 세력으로부터
'집권파' '반혁명 지식분자'로 낙인찍힌 것이지요.
후진타오는 그 당시,
아버지가 지주로 분류되는 바람에 대학은 꿈도꾸지 못할 신분으로 전락한 육촌 누이를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재능있고 총명했으나 시대를 잘못만나 평생을 농촌에서 썩어야했던 누이말입니다.
 
 미래가 없다는 자각과 꿈의 포말이 터진 끝의 상실감.
간쑤성 댐 건설 현장으로 향하던 그의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후일 중국 국가주석이 될 명문 칭와대 졸업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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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막일꾼과 함께 벽돌을 쌓으며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생활은?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그가 '정말 말이 아니었다'고 회고했을 정도.
유일한 낙이라면,
캠퍼스 커플이었던 약혼녀로 먼저 간쑤성에 가 있던
류융칭(劉永淸.아래 사진)을 종종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 정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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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댐 건설 현장에서 벽돌쌓던 그가 36년만에 중국 국가주석의 자격으로 한국 국회의사당을 찾았습니다. 지난 17일 국회 본회의장 관람석에 앉아 그의 연설을 듣고있노라니 그의 표정과 음성 위로 굴곡많았던 그의 과거가 오버랩됐습니다. 국회 본회의장 맨 앞 줄에 앉아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남편의 연설을 경청하던 류융칭 여사의 삶과 함께 말이죠.
 
 
 막일꾼까지 추락했다가 정상에 오른 그의 삶을 복기해 보면
'지도자란 비르투(역량)와 포르투나(행운), 네체시타(시대정신과의 합치)라는 세 요소를 갖춰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에 힘이 실립니다.
 
 날개를 잃고 추락했던 문화혁명 당시의 상황만 놓고봐도
후일 문혁 4인방의 몰락 이후의 시대정신은 후진타오 편이 되었습니다.
그가 당 고위직 진출의 기로에 섰을 때,
당정과 언론은 그의 문혁 당시 행동을 근거로 그를
'매우 온당하고 착실한 성격을 지닌 인물'로 평가합니다.
젊은 시절의 그를 한없이 절망케 한 문혁의 회오리는 그를 서북 변경으로 내몰았지만, 그는 그 곳에서 평생의 정치적 후원자 쑹핑(宋平)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를 간쑤성 간부로 키운 것도, 중국 공산당 간부들에게 소개한 것도,
자신의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에 후진타오를 추천한 것도 쑹핑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쑹핑이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점이
후진타오의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후진타오-대륙을 질주하는 검은 말'(런즈추, 원쓰융 지음, 임국웅 옮김)은 '고급간부서류'라는 중국 고위층 신상정보 자료를 인용, '쑹핑의 집이 중앙 고위층 중에 청탁자들이 출입하기 가장 어려운 집이었다'고 소개했습니다.
참고로 후진타오는 말 띠입니다.
그래서 그가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에 올랐을 때,언론은 그를
'설산(雪山.그의 마지막 부임지인 티벳)에서 뛰쳐나온 검은 말'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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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3년 전 오늘(11월7일)은 '군주론'의 저자인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공화국 제2사무국 사무관직에서 파면된 날입니다.
 


 그의 나이 만 43살이었습니다.
제2사무국 사무관이라면
요즘 직제로 보면 직업 외교관 자리입니다.
대학도 나오지 않은 그였으나
임명 당시 로마 주재 피렌체 대사가
정세 분석보고서를 부탁할 정도였으니,
이른바 발탁 인사 케이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4년 동안 피렌체 공화국에 헌신한 그였으나
피렌체의 유력 가문인 메디치 가문이 소델리니 종신 대통령을 추방한
쿠데타의 여파로 직장을 잃게됩니다.
능력이 없어서 쫓겨난 것이 아닙니다.
정권을 누가잡든 자신은 피렌체를 위해 봉사하는
직업 관료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였습니다.
피렌체 정부를 원격 조종하고 싶은 메디치가 핵심들이
정보 획득 차원에서 마키아벨리의 자리에 스파이를 앉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그의 불행이었습니다.
어쨌든 마키아벨리는 한창 일할 나이에 실직자가 됩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일년 뒤에는 난데없는 쿠데타 음모에 연루돼
고문당하고 한 달 가까이 옥살이를 하게됩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10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벌금이 부과됩니다.
임신중인 아내와 세 아들, 그리고 딸.
입에 풀칠하기도 급급한 상황에서
친구들의 보증으로 유예된 벌금 상환은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이런 현실은 오히려 견딜 수 있었을 지 모릅니다.
오히려 무능한 인사가 자신의 자리를 차고 앉아
메디치가의 주구 노릇을 하고 있는 꼴이야말로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상심과 분노로 뒤범벅된 마흔 세 살의 남자는
결국 피렌체 시내를 떠나 교외의 산장에 은둔합니다.
그리고 단숨에 '군주론'을 써내려갑니다.
추방된 단테가 '신곡'을 썼듯이-.
 
 그의 산장은 지금 마키아벨리 자료관이 되어있습니다.
주변은 포도나무 밭입니다.
군데 군데 마키아벨리 가족의 생계에 기여했을 올리브 나무가 서 있고요.
 


 이 산장을 찾은 시오노 나나미는 저서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에서
'가슴이 예리한 칼날 같은 것으로 콱 찔리는 듯한 육체적 아픔을 느꼈다'고 썼습니다.
산장 마당에 나가서 무심코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피렌체가 보였을 때,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상해봅니다.
'산장 마당에 서서, 운무가 끼거나 날이 흐리면 금방 보이지 않게 될 만큼 먼,
그러나 갠 날에는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피렌체를 그는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았을까?'
 
 자고 일어나 보니 유명해졌다는 행운아와 정반대로
하루 아침에 자신의 영혼 보다 더 사랑한 피렌체로부터 버림받은 사나이.
그럼에도 평생 동안 열강에 둘러싸인 피렌체의 운명을 괴로워한 사나이.
'다 읽고나신 지금, 여러분에게도 이 사나이는 '나의 친구'가 되었습니까'라고,
시오노 나나미는 묻습니다.
저는 주저없이 속으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뱀 다리>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지도자란 비르투(역량)와 포르투나(행운), 네체시타(시대정신과의 합치)라는 세 요소를 갖춰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차기 대통령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자문자답해 볼 만한 대목입니다. 

 

 
 
 *아래 글은 중앙일보 박보균 대기자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집필 500년을 계기로 쓴 글입니다.

중앙일보 2013년 4월28일자

[군주론 500년] 2013년 한국정치 왜 마키아벨리인가

  『군주론(Il Principe)』은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o Machiavelli·그림)의 대표작이다. 1513년 정치 유배 시절에 썼다. 그 후 500년은 애증(愛憎)의 극단적 대비다. ‘근대 정치사상의 독보적 출발’이란 격찬과 ‘권모술수의 교활한 교본’이라는 비난이 교차했다.

 『군주론』은 권력과 인간성의 불편한 진실을 해부한다. 그는 정치를 정치로 접근했다. 종교와 윤리에 묶인 정치를 분리시켰다. 그것을 바탕으로 통치 딜레마의 극복, 위기관리의 해법을 제시한다.

 『군주론』의 유산은 시대를 뛰어넘는 상상력과 시사점이다. 한국 정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 정치에 익숙하지 않다. 명분과 추상, 이념과 도덕주의가 우세하고 넘친다. 좋은 정치, 유능한 권력, 대중 역량의 토양이 취약하다. 그것이 ‘2013년 왜 『군주론』인가’ ‘한국 정치의 성숙과 마키아벨리’에 대한 해답이다. 그는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이다. 그의 삶과 흔적을 현지에서 추적했다.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군주론 500년 … 2013년 한국 정치 왜 마키아벨리인가
리더십 역량·의지가 정치 불확실성 제거한다

마키아벨리의 흉상. 죽음의 얼굴상(추정)이다. 베키오 궁전 백합홀 집무실에 초상화와 함께 전시돼 있다. 얼굴(데스 마스크)에 치장용 벽토(stucco)를 발라 본뜬 것으로 추정한다. 거기에 검정·붉은색등 여러 색칠을 했다. 외모 기록대로 ‘마르고 작은 얼굴’이다. 상반신의 옷 형태와 색깔은 초상화와 같다. 작가 미상이다. 20세 초 미국인 르네상스 미술 수집가(Charles Loeser)가 흉상을 기증했다.

마키아벨리는 파격과 도전이다. 그는 사상의 질서를 깼다. 정치를 도덕과 종교에서 분리했다. 군주론(Il Principe, 영어 The Prince)의 주제는 대담하다. 언어는 강렬하다. 그 책은 권력의 본질과 인간 본성을 추적한다. 권력과 인간관계의 유형을 제시한다.

 군주론은 권모술수, 악의 교서라고 비난받았다. 그 500년은 애증(愛憎)의 서사시다. 군주론은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1469~1527)를 상징한다.

집필 500년-. 자극의 단어다. 나는 마키아벨리의 도시로 떠났다. 이탈리아의 중북부 피렌체(Firenze, 영어 Florence)다. 그가 태어났고 활약했던 곳이다. 4월 초 로마에서 고속철에 올랐다. 피렌체까지 북쪽으로 1시간30분.

 피렌체는 르네상스 천재들의 도시다. 그 시대 그림·건축·조각·인문학으로 넘친다. 마키아벨리의 시골집이 시 외곽에 남아 있다. 피렌체에서 남쪽 11㎞. 그곳으로 향했다. 그의 시대로 그를 찾아간다.

 1512년 가을 그에게 비운이 찾아왔다. 피렌체 공화국은 무너졌다. 스페인 군대의 침공 때문이다. 행정 수반 소데리니(Pier Soderini) 정권은 몰락했다.

 그는 소데리니 정권과 운명을 같이했다. 1498년 정권 출범 때 그는 행정청의 제2서기장(Segretario della Seconda Cancelleria)을 맡았다(29세). 14년간 그는 피렌체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소데리니의 퇴장과 함께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추방됐다.

 메디치 가문(Famiglia de’ Medici)이 18년 만에 권력에 복귀했다. 그는 반(反)메디치 음모에 연루됐다. 체포됐고 고문까지 받았다. 사면으로 풀렸다. 1513년 봄 시골집으로 쫓겨났다. 나이 44세. 유배의 가택연금 신세가 됐다.


자동차는 시에나 쪽으로 20분쯤 달렸다. 산 카시아노(San Casciano) 지명 표지판에서 오른쪽 좁은 2차로 도로에 들어섰다. 완만한 포도밭 언덕, 올리브 나무들.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솟는다. 이탈리아 운전기사가 “토스카나(Toscana, 영어 Tuscany) 지방의 전형적인 전원 풍경”이라고 한다. 토스카나의 주도(州都)가 피렌체(인구 36만 명)다.

 5분쯤 뒤 산탄드레아 인 페르쿠시나(Sant’Andrea in Percussina) 마을에 도착했다. 고풍의 수채화다. 여러 채의 돌집이 나를 맞는다. 잔잔하고 한적했다. 마을은 르네상스 시대 풍경 그대로라고 한다.

 알베르가치오(Albergaccio)-. 그의 소박한 3층 벽돌집이다. 그의 삶은 가난 속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평범한 법률가였다. 돌 벽 중간에 걸린 석판이 시선을 잡는다.

 che qui medito' e propugno' la liberazione d′Italia scrivendo le sue opere immortali sull′arte di reggere e difendere con armi proprie gli stati. “국가 통치와 자기 나라 군대로 방어하는 기술에 관한 불멸의 작품을 쓰면서 이탈리아의 해방을 모색하고 주창했던 마키아벨리.” 그의 탄생 400주년(1869년) 기념 석판이다.

 그 시대 이탈리아는 외세의 각축장이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성공 신화는 퇴색했다. 두 강대국, 프랑스와 스페인은 경쟁적으로 이탈리아를 침략했다.

 ‘국가 통치술, 자주국방, 이탈리아의 통일’-. 군주론의 핵심 주제다. 마키아벨리의 고뇌와 열정을 압축한다. 나는 마지막 장을 떠올렸다. ‘야만인들의 지배에서 이탈리아 해방을 위한 호소’(26장)다. 동판은 19세기 이탈리아의 열망을 반영한다. 마치니(Mazzini) 등 통일 운동가들은 그 대목에서 영감을 받았다.

 마키아벨리는 외국 지원군과 용병을 불신했다. “자신의 무력에 근거하지 않는 나라는 위기 때 자기 방어를 할 역량이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운명에 의존한다”(13장)-. 자주국방은 국가 지도력의 핵심이다. 그 명제는 시대를 뛰어넘는 진리다. 북한 핵무기 위협의 방파제이기도 하다.

 관광객 다섯이 차에서 내린다. ‘피렌체시 군주론 500주년(V centenario)’ 홍보 로고가 차에 붙어 있다. 인솔자 조르조 키엘리니(46)는 토스카나의 르네상스 연구소 연구원이다. 그가 이 지역 신문(Il Gazzettino del Chianti)을 보여준다. ‘추방자 마키아벨리, 500주년 재현 행사’ 기사다.

 재현 행사는 피렌체 중심,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에서 있었다. 관광객이 몰렸다. 16세기 옷차림의 관원이 말을 탄 채 마키아벨리 체포령을 발표한다. 그의 시골집 추방은 1513년 2월 19일 그렇게 시작됐다.


마키아벨리의 대표적인 초상화, 궁정복 차림이다. 1575년(사후 48년) 산티 디 티토의 작품. 다문 얇은 입술에서 야릇한 미소가 풍긴다.
나는 집안에 들어갔다. 2층에 그의 책상이 남아 있다. 장식도 크기도 조촐하다. 거기서 군주론을 썼다. 등불과 깃촉 펜이 보인다. 벽에 그의 작은 초상화가 걸려 있다. 군주론의 목차를 넣은 액자도 있다. 1532년 첫 인쇄본이다. 그의 죽음 5년 뒤다. 책상 뒤 창문 틈으로 꽃 향기가 스며든다. 그때도 피렌체는 꽃의 도시였다.

 그 방에 추방자의 삶이 배어 있다. 베토리(Francesco Vettori, 로마 주재 피렌체 대사)에게 보낸 그의 편지(1513년 12월 10일)를 읽어야 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 편지를 “이탈리아 문학 사상 가장 아름다운 문체”(저서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라고 감탄했다.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서재에 들어간다. 문턱에서 나는 진흙과 먼지 묻은 평상복을 벗고 품위 있는 궁정복으로 갈아입는다. 이런 옷차림으로 나는 고대인들의 궁전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나를 반긴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궁금한 행적이 있으면 그 이유를 캐묻는다. 그들은 정중하게 답변한다. ··· 단테(Dante)는 읽은 것을 기록하지 않으면 지식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얻는 성과를 기록해서 ‘군주에 관한 작은 책자(opuscolo De Principatibus)’를 썼다.”

 역사와의 대화다. 궁정복은 타임머신이다. 그는 고대 로마의 영웅, 철학자들과 토론한다. 1513년 여름부터 정력적으로 썼다. 편지를 보낼 무렵 군주론(헌정사+26장) 초고가 완성됐다. 그 표현대로 ‘국가통치술(arte dello stato)에 대한 연구’다. 그는 권력 복귀의 열정을 글에 쏟았다. 유배지에서 불후의 명작이 탄생한다.

 나는 동네를 살폈다. 집 건너편 작은 레스토랑의 외관은 500년 전 그대로다. 마키아벨리는 거기서 돈을 걸고 카드 게임(tric-trac)을 했다. 그의 사후, 집주인은 세리스토리(Serristori) 가문이었다. 최근 와인 회사(Gruppo Italiano Vini) 소유로 바뀌었다. 이곳은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 와인 생산지다. 마키아벨리 상표 와인도 있다. 라벨에 옆 얼굴 초상화가 붙어 있다.

 집 지하에 와인 저장고가 있다.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의 초상화가 눈에 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의 냉혹한 권력의지에 심취했다. 체사레는 이탈리아 반도의 신예 강자였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타인의 무력이나 호의에 의존해선 안 된다.” 체사레의 권력 평판은 잔인함의 외경(畏敬)이다.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 곽준혁 소장은 “평판(reputazione)은 정치적 권위의 핵심 요소이며 영향력의 실질적 근거다. 그것은 마키아벨리의 고유 해석”이라고 설명한다.

 체사레의 아버지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다. 일찍 죽는다. 후임 교황은 율리우스 2세다. 체사레는 그의 선출을 막지 않았다. 그것은 ‘체사레의 유일한 실수지만 파멸의 원인’이었다. “지난날 원한이 새로운 은혜를 베풂으로써 씻어진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7장)이기 때문이다. 체사레 집안은 과거에 율리우스 2세와 섭섭한 관계였다. 은혜와 원한-. 인간성 양면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통찰은 전율과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 연구원에게 물었다. “군주론의 어느 대목이 와닿느냐.” 그는 주저 없이 말한다. “군주는 경멸받는 것을 피해야 한다. 경멸받는 것은 변덕이 심하고, 소심, 우유부단한 인물로 생각되는 경우다”(19장). 그는 “유럽 위기는 경제적 측면보다 결단과 용기의 정치 리더십 문제”라고 했다.

 이명박(MB) 정권의 2008년 봄이 생각난다. 광우병 촛불시위 때다. 그는 청와대 뒷산에서 시위대의 ‘아침이슬’ 합창을 들었다. 민심을 향한 간절함의 표출이었다. 그 방식의 효험도 있었다. 부작용은 치명적이었다. 반(反)MB의 좌파 세력에 얕잡아 보였다. 지지층도 나약함에 실망했다. MB 정권은 권위와 존경을 잃었다.

 피렌체 시내로 돌아갔다. 떠나는 순간, 두오모(Duomo, Santa Maria del Fiore) 성당의 주황색 쿠폴라(cupola·둥근 지붕, 높이 106m)가 아련히 보인다. 피렌체 두오모는 건축 사상 가장 화려하다. 나는 아르노 강변 베키오 다리 부근에서 내렸다. 다리 옆 거리에도 마키아벨리의 집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대형 지뢰 폭발로 파괴됐다. 집터는 도자기 가게로 바뀌었다.

 나는 시뇨리아 광장으로 10분쯤 걸어갔다. 그곳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은 지금도 시청 청사다. 광장 바닥에 동판이 있다.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의 비극을 기억하게 한다. 프랑스 샤를 8세의 침공으로 메디치 권력은 무너진다(1494년). 수도사(修道士) 사보나롤라가 권좌에 올랐다. 그의 4년 통치는 급진개혁의 신정정치였다. 포퓰리즘적 광기로 대중 지지가 추락한다. 그는 화형을 당한다.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의 극적 몰락을 분석했다. “신질서(nuovi ordini)를 만드는 것은 어렵고 성공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구질서의 이득을 본 사람들은 개혁자에게 적대적이다. 반면에 신질서로부터 이익을 누릴 사람들의 지지는 미온적이다. 인간 속성은 확고한 결과를 직접 보기 전에는 개혁을 신뢰하지 않는다.”(6장)

 대통령 퇴임 후 김영삼은 “개혁은 혁명보다 힘들다”고 실토했다. 500년 전 책은 개혁과 대중심리의 관계를 꿰뚫었다.

 사보나롤라는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의 비극이다. “무장한 예언자는 획득했고, 말뿐인 예언자는 실패한다. 대중은 변덕스럽다. 대중은 설득하기 쉬우나 설득한 상태를 유지하기는 어렵다.”(6장) 노무현의 옛 386정권은 독특한 바람으로 집권했다. 집권 후 포퓰리즘 행태는 대중 다수의 반발을 샀다. 지지세력은 이탈했다. 나는 베키오 궁전에 들어갔다. 2층 백합홀(sala dei Gigli)로 갔다. 현란한 벽화에다 사자 조각상, 붉은색 백합이 그려져 있다. 피렌체의 상징물이다. 500년 전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함이 보존돼 있다.

 백합홀 왼쪽에 마키아벨리 집무실이 그대로 있다. 10평 정도다. 입구와 끝 양쪽에 그의 초상화와 흉상(胸像)이 있다.

 얼굴상( 작가 미상)은 초췌하다. 그의 죽은 얼굴을 흙으로 본떠 색칠한 것으로 추정한다. 흉상은 피곤한 말년의 삶을 드러내는 듯하다.

 초상화는 산티 디 티토(Santi di Tito)의 작품(1575년)이다. 화가는 ‘편지 속 궁정복’의 마키아벨리를 상상했다. 얼굴상과 그림은 그의 외모를 기록한 것과 비슷하다. “마르고 보통 키, 작은 얼굴, 매부리코, 검은 머리, 빛나는 검은 눈. 다물어진 얇은 입술, 냉소하는 듯하다.”

 그의 제2서기국은 외교와 대외 전략을 담당했다. 그는 외교사절(mandatario)로 여러 곳에 파견되었다. 그는 귀족 출신이 아니다. 대사(oratore)직은 맡지 못했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이웃 통치자들을 만났다. 관찰하고 협상도 했다. 프랑스 루이 12세, 체사레 보르자, 막시밀리안 황제(신성로마제국), 교황 율리시스 2세-. 관찰의 초점은 통치자의 성향과 자질, 군사력, 권력 운용, 대중의 지지 여부였다. 그는 수많은 보고서를 보낸다. 직관과 통찰, 상상력과 분석력은 탁월했다.


안내문에 ‘비르투(virtu')와 포르투나(fortuna)’가 적혀 있다. 군주론의 핵심 용어다(25장). 마키아벨리는 중세시대의 소극적 운명론을 거부했다. 정치의 속성은 불확실과 변동이다. 하지만 정치의 안정은 포르투나의 운명적 소산이 아니다. 그것은 지도자의 역량과 창조적 의지력, 결단과 용기로 바뀐다. 그것이 비르투다.

 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링컨 ’을 기억했다. 영화는 수정헌법(노예해방)의 하원 통과 과정을 다룬다. 19세기 미국은 내전(남북전쟁)과 노예제의 어두운 운명 속에 있었다. 링컨은 비르투의 정치력으로 운명을 역전시킨다. 비르투는 리더십의 매력을 발산한다. 정치는 가능성의 미학이다. 링컨은 버락 오마바 미국 대통령의 롤 모델이다. 그것은 오늘의 한국 정치 리더십의 해법이다.

 그림 속 마키아벨리 미소는 야릇하다. 쾌감과 의연, 냉소와 반감이 교차한다. 군주론을 둘러싼 찬사와 적대의 반응인 듯하다.

 군주론 500년은 다양한 해석, 끊임없는 논란의 세월이다. 오해와 비판은 두텁다. 속임수와 기만의 정치 참고서라는 부정적 언어들이 넘친다. 1559년 로마 교황청은 마키아벨리의 책들을 금서(禁書)로 판정한다.

 군주론에 대한 옹호와 감탄은 더욱 두텁다. 18세기 장 자크 루소의 반격은 자주 인용된다. 루소는 “(마키아벨리는) 피상적인 독서에 희생되었다”고 했다.

 군주론은 권력의 야만성을 조명했다. 인간성의 어두운 본성을 파헤쳤다. 그 진실은 불편하고 역겹다. 그것은 윤리와 종교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의 천재적 작업은 생각의 세상을 바꾸었다. 피렌체시 ‘군주론 500주년 기념 조직위원회’의 발도 스피니(Valdo Spini) 위원장은 진전된 관점을 내놓는다.

이탈리아 피렌체=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군주론 500년은 애증의 서사시
'살아 숨쉬는' 위기 극복 통치술


그는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권력을 방어하는 인식의 도구를 시민들에게 제공했다”고 말한다. 피렌체시는 12월까지 군주론의 학술회의, 재현 행사, 기념 사업을 한다.

 그 책의 언어는 직설과 대비다. “군주는 대중에게 사랑(amore)보다 두려움(timore)을 느끼게 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17장) 하지만 미움(odio)은 피해야 한다. 두려움은 적절한 통치 수단이다. 미움은 군주에게 치명적이다. 그런 대비법은 강렬하게 꽂힌다.

 군주론은 ‘현실주의 정치(realpolitik)’ 교본이다. 초점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통치의 딜레마를 푸는 데 있다. 군주론은 ‘살아 숨 쉬는’ 지도력 연구서다. ‘권력의 경제학’이다. 권력은 낭비되지 말아야 한다. 군주론은 기만과 비열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정치행위의 판단 기준은 좋은 결과와 효용, 공익이다. 고려대 최장집 명예교수는 그것을 “좋은 가치보다 좋은 결과의 기능주의”로 해석한다.

 프린스턴대 비롤리(Maurizio Viroli) 교수는 “마키아벨리의 삶은 역설과 불확실성, 비극적 드라마로 차 있다(저서 『Niccolo’s Smile』)”고 했다.

 비롤리의 포착은 실감 난다. 마키아벨리는 역설이다. 군주론의 부정적 이미지는 능숙한 처세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그렇지 못했다. 1515년 가을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i Piero de’ Medici)에게 군주론을 바쳤다. 책은 ‘헌정사(獻呈辭·Dedica)’로 시작한다. "전하께 드리는 선물은 장신구가 아닌 지식입니다.” 그것을 통해 책사(策士)의 역량과 충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그만의 권력 복귀 방식이었다. 그러나 젊은 메디치 군주는 그 책을 외면했다. 그의 정치 재기 꿈도 사라졌다.

불우함은 반전(反轉)을 낳는다. 그는 저술로 삶을 집중했다. 리비우스의 로마사 강론(Discorsi), 전술론(Dell’Arte della Guerra), 피렌체사도 썼다. 희곡 만드라골라(Mandragola)는 문학적 재능을 보여준다.

 반전은 그를 근대 정치사상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스피니 조직위원장은 그 반전과 역설을 ‘역사의 복수(la vendetta della storia)’라고 했다. 시인 단테의 신곡 은 망명의 산물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다산 정약용의 저서도 비슷하다. 군주론의 영향력은 독보적이다. 정치와 리더십 담론은 군주론을 통과해야 한다. 정치인, 학자는 군주론을 우회할 수 없다. 격찬과 비판과는 상관없다.

 베키오 궁전에서 나왔다. 그 옆은 우피치(Uffizi) 미술관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受胎告知)’,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등 거장의 걸작들이 쏟아지는 곳이다. 미술관 밖 회랑에서 마키아벨리를 조각상으로 만났다. 과장된 근엄함은 로마공화정의 원로원 귀족 같다.

 그는 좌절과 낭패 속에서 병으로 숨졌다. 1527년 6월, 58세. 묘소는 산타 크로체(Santa Croce) 성당에 있다. 시신이 없는 묘비(cenotafio)다. 베키오 궁전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다. 성당 안에는 단테와 갈릴레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묘비도 있다. 피렌체 출신 위대한 고유명사들이다.

 마키아벨리의 라틴어 묘비명(1787년 작품)은 이렇게 적혀 있다. “어떤 찬사도 이처럼 위대한 이름에 적합하지 않는다.” 탄토 노미니 눌룸 파르 엘로지움(Tanto nomini nvllvm par elogium)-.


최장집 교수가 본 마키아벨리즘
“좋은 정치를 이끌 실력 중요 … 마키아벨리에 익숙해져야”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요즘도 ‘왜 마키아벨리를 공부하나’라는 제목으로 강의한다. 최 교수는 3년 전 “우리 정치에서 카를 마르크스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그 주장은 유효한가.

 “그렇다. 한국정치는 도덕적·이상주의적이다. 한국 현실에서 요구되는 ‘정치적 현실주의’에 대한 전통이 약하다. 마르크스 이론에는 정치의 역할이 없다. 규범과 이상만 강요한다. 그것이 이 시점에서 ‘왜 마키아벨리인가’다.”

 - 민주주의와 마키아벨리의 관계는.

 
 “민주주의도 통치체제의 하나다. 통치행위는 권력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우리 민주주의는 추상화, 물신(物神)화, 도덕적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현실에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제약으로 작용한다. 이런 문제의 해독(解毒)제로서 마키아벨리의 유용성이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저항의 민주주의가 아닌 통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다.”

 - 마키아벨리는 누구인가.

 “솔직하고 대담무쌍한 정치철학자다. 도덕·종교적 담론은 인간의 권력의지를 베일에 덮어씌운다. 마키아벨리는 그 위선적 가면을 벗겨 보인 위에서 정치현상을 설명했다. ”

 - 우리 사회에 반(反)정치의 분위기가 퍼져 있다.

 “ 정치 배제의 반정치는 무책임의 정치를 낳는다.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을 찾는 게 정치다. 좋은 정치를 이끌 실력이 필요하다. 마키아벨리의 정치와 통치술에 익숙해야 한다.”

 - ‘좋은 정치’란.
 
 “우리 사회에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가 놓여 있다. 좋은 정당으로 뒷받침받는 좋은 리더십이 해결 과제를 사려 깊게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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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찬 총리가 얼마 전 국순당 배중호 사장과 골프 라운딩을 가졌다고 합니다.
용산고 동기 동창 모임이었다는군요.
추석 연휴에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라운딩이었으니
지난 식목일 날의 '산불 골프' 때와는 달리 편안한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임이 市場에 알려지자
'삐딱한' 촌평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저런 말들이 있었지만 요지는,
이 총리와 배 사장, 이 두 사람의 만남이 부적절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반응이 선뜻 와 닿지않아
알아봤더니 이랬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골프를 친 날은
소주세 인상을 골자로 한 주세법 개정안이
논란끝에 국무회의에서 통과되기 전날이었더군요.
그런데 국순당은 올초 '삼겹살에 메밀 한 잔'이라는 술을 내놓고
소주 시장 공략에 나섰습니다.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이 보편적인 서민들의 술 자리에
명함을 내민 셈이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도전장을 받은 소주업계는
소주세 인상이 소주 값 인상과 소주 판매량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소주세 인상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우리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주세법 개정안을 밀어붙인 이 총리가,
소주 시장 공략에 나선 주류업체 사장과 골프를 쳤다고 하는데,
아무리 친구 사이라지만
하필이면 주세법 개정안 의결을 코 앞에 둔 시점에 쳐야했느냐는
뒷 말이었던 것이더군요.
 
 이 총리로서는,
호사가들의 입방아로 일축할 수 있겠지만
총리라는 자리가 그 만큼 엄중하다는 반증이라는 생각입니다.
최근 논란거리가 된 총리의  '대부도 땅'도
총리가 부동산 대책을 책임지는 자리에 없었다면
그처럼 증폭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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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자 본지 1면에 “열린우리당이 경찰에 독립적인 수사권을 부여하기로 방침을 정했다”는 기사를 단독 보도하고 관련 시리즈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기자는 ‘친(親) 경찰 기자’라는 오해를 받았다. 검찰 관계자는 전화를 걸어와 “아직 안이 확정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런 기사가 나간 배경이 뭐냐. 경찰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의도 아니냐”고 물었다. 물론 당치 않은 추정이다. 우리당이 하루 뒤인 6일 사실상 보도 내용을 확인한 그대로, 취재된 ‘사실’을 토대로 기사가 작성됐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경찰 수사권 독립에 따른 문제점을 짚어보는 기사가 나가자 현직 경찰이라고 신분을 밝힌 이들이 전화를 걸거나 문자 메시지를 통해 기사 내용을 문제삼았다. 인터넷판 기사 밑에는 인신공격성 댓글이 붙었다. 검찰에 코가 꿰인 것 아니냐느니, 검찰에 아부하려는 기사라느니, 검찰의 사주를 받은 기사라느니 하는 등의 댓글이었다.

첫날은 검찰측에서 ‘경찰 편향성 기사’라고 문제 삼더니 그 다음날은 경찰측이 ‘검찰의 주구’로 매도하는 황당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기사는 경찰 수사권 독립에 따른 인권침해 우려가 나오니 사전에 제도적 안전장치를 강구해야 한다는 방향이었다. 도대체 경찰은 독립 수사권에 걸맞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문 정도도 듣기 싫다는 것인가. 귀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다 해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인신공격을 해대는 이들이, ‘수사권의 주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경찰의 일원은 아니라고 믿고 싶을 뿐이다.  조남규 정치부 기자

 지난 9월5일자 세계일보에 저는 열린우리당이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 문제와 관련, 경찰에 독립적인 수사권을 부여하기로 방침을 정했다는 기사를 1면에 단독 보도했습니다. 경찰의 수사권 독립은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으로 형성된 검찰 중심의 사정 시스템이 51년만에 혁명적으로 변화하는 계기입니다. 이에따라 세계일보는 경찰 수사권 독립과 관련한 시리즈물을 3회에 걸쳐 연재하기로 결정하고 5일자 3면에 그 1회분을 내보냈습니다. 내용은 경찰 수사권 독립의 의미를 개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기사가 나가자 검찰은 우리당 내에 설치된 수사권 조정 정책기획단이 결론을 내리지 않은 상황에서 이같은 기사가 보도된 점과 관련, 경찰에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의혹은 근거없는 것입니다. 팩트가 기사를 만드는 힘입니다.
 그런데 6일자 본지에 시리즈 2회분이 나가자 좀체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경찰이라고 신분을 밝힌 이들이 제 기사를 비난하는 댓글을 띄우고 저에게 전화를 걸어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2회분 시리즈의 의도는 이제 경찰에 수사권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으니, 경찰을 포함해 최근 떠오르는 사정기관을 개괄하고 경찰 수사권 독립에 따른 문제점과 대책을 짚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중 문제점을 지적한 소박스에 비난이 집중됐습니다.
 경찰청이 만든 '수사권조정 설명자료' 68쪽에도 수사권 독립 이후의 문제점 중 하나로 부당한 지휘 명령 감독이 통용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수사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들이 나열돼있습니다.
 그런데도 문제점을 지적한 박스가 검찰 논리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검찰에 코가 꿰였다는니, 검찰의 사주를 받은 기사라느니 하는 등의 댓글을 남겼습니다.
 첫날은 검찰측에서 경찰 편향성 기사라고 문제를 삼더니 그 다음날은 경찰측이 검찰의 사주를 받은 기사라고 매도하는 황당한 상황이 연출된 것입니다.
 경찰측에서 가장 예민하게 반응했던 대목은 수사권이 독립되면 인권침해가 우려된다는 부분이었습니다. 검찰 논리를 그대로 되풀이했다는 항변이었습니다. 검찰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나 검찰은 그렇기 때문에 경찰에 수사권을 줘서는 안된다는 논리이고 저는 수사권 독립 이후에도 인권 침해 우려가 있으니 사전에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강구해야한다는 방향이었습니다. 설사 검찰이 주장하지 않았어도 저는 그 부분을 짚었을 것입니다.
 수사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억울한 피해자가 수십만건 중 한 건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 사람 본인에게는 100%의 피해입니다. 이제 경찰도 수사권의 주체로 당당히 설 수 있는 상황이 됐으니 그 권한에 걸맞는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는 점에서 제기한 제반 문제점이 그렇게 귀에 거슬렸습니까?
 
 분명히 밝히지만 저는 이번 기획취재 과정에서 경찰이든 검찰이든 수사권 조정과 관련된 그 어느 쪽 인사에게서 밥 한끼 얻어먹은 사실이 없고 그 누구와도 개인적 친분이 없습니다. 댓글의 내용대로 검찰에 코를 꿰일 정도로 인생을 허술하게 살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대학 시절 시위에 참가했다 경찰서에 끌려가서 구타당한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갖고 있지만 지금의 경찰은 달라졌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12년 기자 생활을 구차하게 해오지도 않았습니다. 타고나기가 낯부끄러운 짓 못하는 성질머리입니다. 하물며 유착이라니요? 검찰 출입하면서 심하다 싶을 정도로 검찰을 비판했을 망정 단 한번도 유착된 기사를 쓴 적이 없습니다. 경찰서를 출입했다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감시와 비판이 기자의 소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제 인생을 모독하는 댓글을 올린 분들이 그토록 '수사권의 주체'가 되고 싶어하는 경찰의 일원은 아니라고 믿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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