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새틀러가 선고받은 형벌은 가혹했습니다.

 “일단 혀를 자르고

인두로 온 몸을 두 번 지진다.

그래도 정신을 잃지 않고 있으면 다섯 번 더 지진다”

16세기의 가톨릭이 종교 개혁 운동에 가담한

‘스위스 형제단’ 멤버들에게 내린 형벌입니다.

먼저 혀를 자르는 이유는,

순교자가 남길 믿음의 증언을 원천 봉쇄하려는 의도겠지요.

이를 알고 있는 새틀러는 붙잡히기 전에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손을 하늘로 들어 올리겠다”고 형제단원들에게 약속합니다.

이제 혀를 잃은 새틀러는 인두 고문 끝에 죽음의 문 턱에 섰습니다.

바로 그 순간,

포승줄이 불에 타 끊어지자

새틀러가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고 전해집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주인공 멜 깁슨이

죽기 직전 ‘Freedom’이라고 외치듯이-.

 

  풍경이 아름다운

 펜실베니아주 랭카스터 카운티는 아미쉬의 마을입니다.

 

 



 순교자 새틀러 이야기는 아미쉬 마을의 종교 집회에서

단골로 거론되는 소재라는군요.

형제단을 설립한 펠릭스 만츠는

세계사 시간에 배운 종교 개혁가 쯔빙글리의 동지입니다.

그는 쯔빙글리의 온건 개혁 노선에 실망,

좀 더 급진적인 형제단을 설립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스위스 형제단 중에서도 성서를 보다 엄격히 해석하는 부류가

분파해 아미쉬를 이뤘다고 하니,

아미쉬는 흑이면 흑, 백이면 백일 뿐

회색은 존재하지 않는 성향의 사람들 같습니다.

그러니 박해가 오죽했겠습니까.

이들은 18세기 초반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옵니다.

 

 아미쉬가 바깥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Witness’라는 영화일 것입니다.

 



 2005년이  ‘위트니스’ 상영 20주년이었습니다.

랭카스터 카운티는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아미쉬 관광붐을 조성하더군요.

그러나 정작 아미쉬들은 관광객의 잦은 발길이 마땅치 않습니다.

영화 속의 존 북(해리슨 포드)이 목격한 脫俗의 아미쉬들이

20년이 흐른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살고있기 때문입니다.

 

 전기도 없고 전화도 없는 마을,

말과 쟁기로 밭을 갈고 마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정부의 교육을 거부하고 아이들을 스스로 교육하는 사람들,

옷 색깔과 마차의 형태까지 규제하며 사는 사람들.

저녁엔 램프를 켜고 텔레비전을 보는 대신 책을 읽는 사람들.

음식도 불을 때서 해 먹고(연전에 프로판 가스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수도 대신 수동식 펌프을 사용하는 사람들.

 

 한 켠에 빨래판이 놓여진 부엌이며

수동식 펌프 등등이

어쩌면 그렇게도 어린 시절 저의 시골 집과 닮았는지.

 

 선거도 하지 않고

정부 일에도 관여치 않고

정부가 제공하는 사회 보장이나 의료 보장 혜택도 거부하는 사람들.

새 신랑 신부가 살 집을

공동체가 합심해서 지어주고

경조사는 온 마을이 함께 치러내는 사람들.

 




 

산아 제한 없이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3대가 한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공식 교육은 8학년까지만 마치곤

 

남자는 농사일과 목수일에

여자는 가사일과 퀼트 만들기에 종사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람들.

결혼은 일찍.

대신 Non-Amish와의 결혼은 결사 반대인 사람들.

그들은 미국으로 이주해 온 18세기 당시의 생활 양식을

우주 왕복선이 발사되는 21세기에도 고수하고 있습니다.

 



 

 아미쉬들은 성인이 되면

이런 엄격한 규율에 복종할 것인지 여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그 전에 1년 정도 속세 생활을 하는 기간이 있는데

요즘엔 공동체로 복귀하지 않는 젊은이들도 나오고 있답니다.

 

 아미쉬들은 세속의 사람들을 ‘Non-Amish’라고 부릅니다.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이 엄격하더군요.

바로 새틀러 같은 순교자들의 후예냐, 아니냐는 판단이지요.

문명의 결과물인 편리함이나 쾌락, 사치 등과 같은

세속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순교자의 삶을 따르지 않는 만큼 그 후예가 아니라는 식입니다.

이러다 보니,

아미쉬들은 물질 문명의 수용 정도에 따라

보수와 진보(New Order Amish)로 나뉘어 있습니다.

보수파는 특히 ‘Old Order Amish’라고 부르는데

흔히 아미쉬라고 하면 이들을 지칭합니다.

마차만 보면 타고 있는 아미쉬가 보수인지 진보인지 알 수 있다는데,

보수 아미쉬는 쇠 바퀴에 천으로 된 문을 선호하는 반면

진보 아미쉬는 고무 바퀴에 여닫는 문을 선호한다는군요.

최근엔 마차 뒤에 불빛에 반사되는 삼각 표지를 설치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양측이 설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자동차와 마차 간 추돌사고가 빈발한데 따른 대책으로

펜실베니아주가 마차의 삼각 표지 부착을 의무화한데 따른 것이지요.

이제 진보 아미쉬는 마차에 삼각 표지 뿐 아니라

헤드라이트와 백 미러, 좌우 깜빡이까지 달고 다니지만(젊은

아미쉬 중엔 차를 몰고 다니는 이들도 다수 눈에 띄었습니다)

 

                         <우리 차 앞서 달리는 이 마차는 진보 성향인 듯 합니다>

 

보수적인 아미쉬들은 아직도

밤 운전할 때 랜턴을 매다는 것이 고작입니다.

  

 보수든 진보든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고

세계화와 기술 우선주의에 반대하고

환경론자들인 점에서는 같습니다.

랭카스터 아미쉬 마을의 가이드는

“아미쉬는 기술 문명이 싫어서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좋아서 피한다. 기술 문명이 가족 구성원들의 사이를

멀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더군요.

 

 아미쉬들의 상부상조 정신이나

가정 중심주의(이혼은 못한다는군요),

 


자작농 중심의

자급자족 체제 등은

 

 물질 문명의 화신이랄만한 미국의 주류 문화와는

정 반대의 끝에 위치한 문화입니다.

요즘은 주류 문화에 지친

미국인들이 아미쉬의 삶을 기웃거립니다.

그렇다 해도 대다수에게

아미쉬는 별난 족속입니다.

아미쉬는 외양부터가 별나긴 합니다.

남자들은 결혼하면 콧수염은 깎고 턱수염만 기르니…

 

그러나 내게는

한 아미쉬 농부의 다음과 같은 말이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별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러 가고, 배고플 때 먹고

그리고 저녁에 잠자리에 듭니다”

 

 어쩌면 주류 문화 속에서 갈증을 느끼며 사는 우리들이야말로

별난 족속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후기:아미쉬들은 사진 찍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따라서 일부 사진은 빌 콜먼의 작품을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메사추세츠주의 월든 호수는

헨리 데이빗 서로우(1817~1862)의 고향입니다.

 


 2005년 3월 아이들의 봄 방학 기간 찾았습니다.

그의 고향인 콩코드시 인근에 위치한 이 호수는

데이빗 서로우 덕분에 전 세계 자연주의자(Naturalist)들의 성지가 됐습니다.
완연한 봄이 되면 그림같은
 풍광이라는데

 


 

3월의 풍광은 삭막했습니다.

 

                                                                  <뭐 이런 델 데려왔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황당해하는 가족들...^^>
            

 

 데이빗 서로우가 월든 호수 근처에 오두막을 짓고

자연과 교감하는 생활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28살 때였습니다.

1845 7 4일의 일입니다.

편한 마음으로 월든 호수 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형과 함께 설립한

대안 학교가 형의 건강 악화로 문을 닫고

형마저 결핵으로 숨진 직후이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는 초절론(超絶論)의 선구자로 알려진

랄프 왈도 애머슨이 그에게 자신의 땅인 월든 호수

근처에서 생활해 보도록 권유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 곳에서 2 2개월 2일 동안 나날의 일상과

월든 호수 주변의 생태를 관찰하고 기록합니다.

불후의 명작 Walden은 그 기록의 산물입니다.

생활을 단순화하고, 자연과 교감하며

물질적 잡념을 멀리하면 보다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그의 깨달음은 수많은 후세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제 블로그 문패인 'Simplify, simplify'(단순하게 살자)도 그의 구호입니다.

그의 오두막은 후에 다른 사람이 철거해서

자기 집 지붕을 수리하는데 써버렸다고 합니다.
원래 오두막이 있던 자리에는
표지판만 서 있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오두막은 후에 복원한 것입니다.

위치도 이전 자리가 아니라 호수 입구 쪽으로 옮겼습니다.

원래 있던 자리는 호수를 끼고 한 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성미급한 관광객용으로 만들어 놓은 듯 합니다.


 



 어떻든 원래 것을 그대로 본떠 놓은 오두막 안은

 '단순한 삶'의 본보기였습니다.


                    

 월든 호수 생활 중이던 1846 7,

세계사에 두고 두고 영향을 미친 의미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가 세금 납부를 거부한 죄목으로 콩코드 감옥에 하룻 동안 수감됩니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비도덕적이라는 신념 하에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한 세금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는 수감 경험을 토대로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라는 글을 쓰게 되는데

인도의 간디나 미국 인권운동가인 마르틴 루터 킹이

그의 영향을 받아 소극적 저항 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1·2 개각으로 산업자원부 장관에 내정된 열린우리당 정세균 당의장이 6일 물러났다.

취임 두 달여 만이다. 정 전 의장은 10·26 재선거 참패로 붕괴한 문희상 체제를 승계한 과도 지도부였으나 재임 기간 당이 활력을 되찾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폭이나마 당 지지율도 올랐다. 박수 받으며 입각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 정 전 의장은 후임 의장을 추대하기 위해 이날 소집된 비상집행위·시도당위원장 연석회의에서 “정말 뜻하지 않게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 데 대해 참으로 안타깝다”면서 “이유야 어떻든 당원과 국민에게 송구스럽다”고 고개를 숙였다. 1·2 개각을 둘러싼 당·청 갈등의 와중에 그는 동료 의원에게서 “당·청 간 소통을 막은 장본인”으로 몰렸고, “자신의 입각에만 매달려 당·청 조율 역할을 사실상 포기했다”는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정 전 의장은 사석에서 “1월 2일부터 5일까지는 없던 일로 하고 싶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 이 시점에, 산자부 장관 입각은 ‘뜻하지 않은 상황’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개각 하루 전 ‘귀띔’을 받았던 그다. 집권당 원내대표 겸 당의장을 맡고 있는 만큼 ‘장관행’을 통해 경력 관리의 기회를 얻었다는 자족감보다는 자신의 ‘징발’로 야기될 당 지도체제의 공백을 먼저 걱정하는 게 마땅했다.

지난해 11월13일 창당 2주년을 기념한 북한산 산행에서 “제2창당을 성공시키기 위해 희생물이 필요하고, 제물이 필요하다면 제가 기꺼이 그 제물이 되겠다”던 정 전 의장의 ‘결연한 의지’가 무색하기만한 퇴장이다.

조남규 정치부 기자

 지난해 연말 망년회 자리에서

참으로 멋진 사무라이 한 명을 소개받았습니다.

 

 요시무라 간이치로(吉村貫一郞).

 

 '신센구미(新選組)'의 일원이었답니다.

 신센구미는 일본 메이지 유신 직전 도쿠가와 바쿠후가 조직한 교토 경호대. 도쿠가와 바쿠후를 뒤엎고 천황을 받들려했던 메이지 유신 지사들이 신센구미의 주요 타깃이었답니다. 걸리기만 하면 닥치는대로 베었다나. 요시무라는 신센구미 간부도 아니고 무술의 달인도 아닙니다. 신센구미 관련 사료에 이름 정도 소개되는 인물이라는군요. 바로 이런 친구를, '철도원' '파이란'의 저자인 아사다 지로(淺田次郞.아래 사진)가 그의 장편 소설 '칼에 지다'(원제 壬生義士傳)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부활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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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도무지 사무라이답지 않은 친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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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로의 소설을 토대로 한 영화 '바람의 검, 신선조' 속의 요시무라>

 

 

 소설 속의 요시무라는 이렇습니다.

 

 다음은 소설의 한 대목.

 

 그날 저녁에 나와 요시무라에게 액땜이나 하라는 포상금이 나왔어.

히지카타의 방에 불려들어가 우리는 두 냥씩 돈을 받았어.

사실 나는 그런 일(가이샤쿠,介錯:할복하는 자가 배를 가르고 목을 내밀면 뒤에서 그 목을 쳐주는 일)로 돈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던 터라 그저 고맙게 넙죽 받아넣었어. 그런데, 허 참, 요시무라는 그게 아니었어. 뭐가 못마땅한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돈에는 손도 대지 않은채 이런 소리를 하더라구.

 

 '가이샤쿠를 맡았던 것은 동기생으로서의 의무이니 새삼 금전을 받을 입장이 아닐 터입니다.'

 아이쿠, 이 친구야, 내 사정도 좀 봐줘. 나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어. 그런 소리를 하면 벌써 돈을 품 속에 챙겨넣은 내 체면은 어떻게 되느냐구.

 '그러하나 히지카타 선생님, 조금 전에 일의 전말을 모두 보셨을 줄 압니다만....적잖이 무리한 가이샤쿠를 했는지라 칼날에 이가 빠진 곳이 많습니다. 가능하다면 칼 값을 주실 수 는 없으신지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돈을 더 내놓으라는 얘기였어.

 말을 그렇게 하는데, 윗사람으로서 설마하니 '어디 이가 얼마나 빠졌는지 한 번 보자'하고 부하의 허리춤에 꽂힌 칼을 확인할 수는 없지. '그러냐' 한 마디하고는 그 걸로 그만, 히지카타는 자기 품에서 석 냥을 꺼내 두 냥 위에 보태주더라고. 그 때 그들 사이에 오고간 흥정이 정말 재미있어. 히지카타도 원래 약 행상을 하고 다녔던 사람이라 돈 계산하는 머리는 아주 잘 돌아갔거든. 자린고비 둘이 눈으로 주고받은 줄다리기를 얘기로 꾸미면 대충 이렇게 될게야.

(알았다. 그럼 석냥 더 내지. 이걸로 대충 때워줘라.)

(싫소. 내 칼은 다섯 냥으로는 못 사지요. 거기서 다섯 냥은 더 받아야겠고만요.)

(어림없는 소리. 네 칼은 싸구려에다 다 닳아빠진 칼이잖아. 그걸 어째 열 냥이나 쳐?)

(한 말씀 드리자면 오키타 선생의 칼은 기슈 기요미쓰, 사이토 선생의 칼은 이케다 기신마루인줄 압니다. 오십냥은 너끈히 나가는 명품 검이지요. 나는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열냥 정도면 적당하지 않습니까?)

(....못 말릴 놈. 그러고도 네가 사무라이더냐?)

(사무라이인지라 더더욱 칼은 분명히 계산해야지요. 부디 열냥은 쳐주시죠.)

 결국 그런 암묵의 흥정끝에 히지카타는 다시 다섯냥을 더 내줬어. 요시무라는 그것을 갈퀴로 긁듯이 챙겨넣더니 잽싸게 나가버렸어. 그 꼴이 또 어찌나 천연덕스럽던지, 나하고 히지카타가 어이가 없어 서로 마주봤다니까.

 요시무라가 사라진 뒤에 히지카타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내게 묻더라고.

'저자가 난부 번사였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

'설마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대답이야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나도 의심이 가더라고. 사무라이라는 건 대개 금전에는 무심한 법이고, 더구나 난부 모리오카라고 하면 이십만 석의 큰 번이었으니까.

 

 소설 속의 또 다른 에피소드.

 

 신센구미 곤도 이사미 대장은 일동을 한바탕 휘이 둘러보고는 갈고 닦인 굵직한 음성으로 느닷없이 이렇게 말하더만.

'이번에 특별한 훈령에 따라 우리 신센구미 일동을 하타모토에 등용하신다는 통지가 있었다'

 한 순간, 회의실이 고요하게 가라앉더니 뒤를 이어 와, 하는 탄성이 한 목소리처럼 터져나왔어. 그야 뭐, 말할 수 없이 좋았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어. 하타모토라고 하면, 보쇼, 손님, 지금으로 치자면 중앙관청의 고급 공무원 나리, 회사로 말하자면 도쿄 본사의 간부 사원이라고. 이게 꿈이냐 생시냐 싶더라니까. 말단 무사의 한 칸 짜리 길다란 집단 거주지를 집이랍시고 받아 살고, 사무라이라는 건 그저 명색 뿐 근근히 입에 풀칠이나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 할아버지의 얼굴이 말이지, 나도 모르게 가슴이 어리더라구.

 (중략)

 그 때, 내 곁에 앉아있던 요시무라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데. 마치 전기에 닿아 소스라친 사람처럼 말이지. 넋이 나간 꼴로 그 훌쩍하니 큰 키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두 손은 허벅지를 짚고 있었어.

'곤도 선생, 그 말씀이 참말이십니까?'

(중략)

 그 무렵 그 자는 말 그대로 너덜너덜한 허수아비였어. 봉급을 땡 전 한 푼 안남기고 고향에 보내버리는 탓인지 노상 입고다니는 단벌 바지저고리가 여기저기 기운 곳 투성이여서, 그 한 참 전 입대할 적에 내가 아이즈번 감독관으로 착각할 정도로 멋지던 모습은 자취도 없었지.

 그 꼴을 보고 히지카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더만.

'왜 그러나, 요시무라. 뭔가 불만이라도 있어?'

'아뇨'

 그리고 눈을 들어 히지카타를 바라보며 이어진 요시무라의 말에 대원들은 아주 대경실색을 했지.

'변변치 않은 질문입니다만, 수당은 얼마나 받게 되겠습니까?'

 어이가 없어 입만 뻐금거리는 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자, 어이그 하고 한 숨을 내쉬는 자....어지간한 곤도 이사미도 꾸짖을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그 큰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것 같더라고.

 우리는 번듯한 막부 관료로 임명을 받은거야. 그건 하타모토 관리의 격을 하사받았다는 명예의 문제였지. 어느 누구도 금전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어.

 곤도는 돌연한 질문에 적잖이 당황하는 모습이더니 곁에 있던 히지카타에게 물었어.

'그런 쪽은 어떻게 되나?'

히지카타도, 아, 예에, 하고 얼빠진 대답을 하고는 서류를 뒤적여보더라고.

'지도감찰 요시무라 간이치로에게는 사십 석이 하사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요시무라가 자리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더만. 감개무량한 목소리가 터지데.

(중략)

'저는 고향에서 이타 이인부치(14가마 정도)의 말단 무사였고만요. 아무리 검술을 잘하고 글을 잘해도, 마음가짐을 올바르게지녀도 말단은 평생 말단이었어요. 그런 제가 도쿠가와 가의 봉록을 사십 석이나 받다니...사십 석이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대기를 다룬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의 '대망(大望)'이나 메이지 유신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주인공으로 한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료마가 간다'라는 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요시무라는 파격 무사입니다. 당시 통념에 비춰보면 동료라는 게 수치스러울 정도였겠죠.

 그런데 소설을 읽어갈수록 저는 요시무라야말로 진정한 무사였다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는 누구보다 인간의 길을 제대로 걸어간 무사였다는 생각입니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도쿠가와 바쿠후의 껍데기 무사 정신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존왕양이'(尊王攘夷,천왕의 권위를 중심으로 국가체제를 강화하여 외국세력을 물리치자는 사상. 메이지 유신파가 도쿠가와 막부를 공략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창)를 외치며 다니던 시기에 그는, 처자식을 굶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갔습니다. 그건 할복의 명령이 내려질 중죄인 탈번(자신이 속한 영지를 떠나는 일)을 결행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처자식에게 한 푼이라도 더 보내주기 위해 그는 수전노라는 조롱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사내라는 건 제가 먹여살려야 하는 자들을 위해 죽는거요. 여자에게 반했다면 그 여자를 위해, 자식이 생겼다면 그 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거요'라고 외치면서.

 '사무라이가 목숨을 바칠 상대는 번주님이 아니라 우리를 먹여살리는 백성들이 아니겠는가'라고 주장하면서.

 '전쟁이라는 것은 항상 그 나름의 대의가 있겠습니다, 그 배경에는 반드시 그 대의 따위와는 상관없는 굶주림과 가난이 있다'고 호소하면서.

 

 천황이니 바쿠후니,무사도니 하는 용어로 가득찬 근대 일본사만을 접해온 저로서는, 요시무라야말로 뜻밖의 인물이더군요. 시도 때도 없이 배를 갈라대던 사무라이 시대에도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은 살고 있었구나, 라는 신선한 자각이랄까.

 '칼에 지다'의 역자 양윤옥님은 '인(仁)이란 착하면서도 강한 인간으로서의 길, 의(義)는 겉으로 내세우는 사회적 책임일 것이다. 인은 무시되고 의만을 강요하던 시대에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이 두 길을 모두 포기하지 않고 운명에 저항하며 한 방울 눈물의 흔적만 남을 때까지 온 힘을 쥐어짜 자신의 할 일을 칼같이 해내고 스러졌다. 마지막 사내다운 사내, 누구보다 행복한 지아비이고 훌륭한 아버지의 모습이다'고 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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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요시무라 처럼 피가 따뜻한 무사들이 근대 일본을 주도했다면, 일본은 제국주의가 아닌 다른 길을 걷지 않았을까, 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정한론'(征韓論)의 주창자이자 지독한 국수주의자였던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가 환생한 것 같은 요즘의 일본을 바라보다 가져보는 공허한 생각이요, 처자식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가장의 한 사람으로서 절절히 느껴지는 요시무라와의 동류의식입니다. 2006년도엔 요시무라와 친해져 볼랍니다.

 

*후기:'너를 보니 생각나는 책'이라면서 수첩을 북 찢어 '아사다 지로, 칼에 지다'라고 써서 건넨 친구. 대학 시절엔 '자칭 시인'이었고 지금은 '자칭 영화감독'인 그가, 올 해엔 메가폰을 잡고 소리치는 모습을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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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이 또 한차례 선심을 쓸 모양이다.

이번엔 올해 대입수능시험장에서 휴대전화 등을 소지했던 학생들이 수혜자가 될 듯하다. 여론이 ‘억울한’ 수험생 편으로 쏠리자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법(고등교육법)을 개정할 태세다. 여당의 담당 정책조정위원장은 실수로 휴대전화 등을 들고 간 수험생에게 시험 자체를 무효처리하고 내년 수능 응시자격까지 박탈토록 한 법률 규정이 너무 가혹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런 그는 ‘너무 가혹한’ 법안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한 여당의 대응은 원칙도, 철학도 없었다. 수능을 불과 20일 앞두고 문제의 법을 만들었다가 수능이 끝난 후에는 ‘억울한’ 수험생을 구제한다며 법을 손질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졸속입법’ 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자, 교육부의 행정지침으로 이들을 구제할 수 있다는 ‘묘안’을 내놓았다. 법률 규정을 하위의 행정지침으로 뒤집겠다는 비 법치주의적 발상이다.

여당 스스로 보기에도 민망했던지 4일에는 법개정 쪽으로 돌아섰다. 고등교육법에 휴대전화와 MP3 플레이어를 실수로 소지하고 있다가 적발된 수험생에 대해서는 법 시행 첫해인 올해에 한해 내년 수능 응시를 허용한다는 내용의 부칙을 신설하겠다는 것이다.

문제의 고등교육법 입안 당시도 부정행위 유형에 따라 처벌 수위를 차별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별 생각없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응시 제한 연도에 대해 1년이냐, 2년이냐를 놓고 입씨름을 하다 거수 표결에 부쳐 2년으로 굳어진 겁니다”(국회 교육위 관계자). 결국 입법 효과나 부작용 등에 대한 고민없이 법을 만들어 놓고 뒷북 수습에 허둥대는 꼴이다.

조남규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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