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 망년회 자리에서

참으로 멋진 사무라이 한 명을 소개받았습니다.

 

 요시무라 간이치로(吉村貫一郞).

 

 '신센구미(新選組)'의 일원이었답니다.

 신센구미는 일본 메이지 유신 직전 도쿠가와 바쿠후가 조직한 교토 경호대. 도쿠가와 바쿠후를 뒤엎고 천황을 받들려했던 메이지 유신 지사들이 신센구미의 주요 타깃이었답니다. 걸리기만 하면 닥치는대로 베었다나. 요시무라는 신센구미 간부도 아니고 무술의 달인도 아닙니다. 신센구미 관련 사료에 이름 정도 소개되는 인물이라는군요. 바로 이런 친구를, '철도원' '파이란'의 저자인 아사다 지로(淺田次郞.아래 사진)가 그의 장편 소설 '칼에 지다'(원제 壬生義士傳)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부활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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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도무지 사무라이답지 않은 친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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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로의 소설을 토대로 한 영화 '바람의 검, 신선조' 속의 요시무라>

 

 

 소설 속의 요시무라는 이렇습니다.

 

 다음은 소설의 한 대목.

 

 그날 저녁에 나와 요시무라에게 액땜이나 하라는 포상금이 나왔어.

히지카타의 방에 불려들어가 우리는 두 냥씩 돈을 받았어.

사실 나는 그런 일(가이샤쿠,介錯:할복하는 자가 배를 가르고 목을 내밀면 뒤에서 그 목을 쳐주는 일)로 돈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던 터라 그저 고맙게 넙죽 받아넣었어. 그런데, 허 참, 요시무라는 그게 아니었어. 뭐가 못마땅한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돈에는 손도 대지 않은채 이런 소리를 하더라구.

 

 '가이샤쿠를 맡았던 것은 동기생으로서의 의무이니 새삼 금전을 받을 입장이 아닐 터입니다.'

 아이쿠, 이 친구야, 내 사정도 좀 봐줘. 나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어. 그런 소리를 하면 벌써 돈을 품 속에 챙겨넣은 내 체면은 어떻게 되느냐구.

 '그러하나 히지카타 선생님, 조금 전에 일의 전말을 모두 보셨을 줄 압니다만....적잖이 무리한 가이샤쿠를 했는지라 칼날에 이가 빠진 곳이 많습니다. 가능하다면 칼 값을 주실 수 는 없으신지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돈을 더 내놓으라는 얘기였어.

 말을 그렇게 하는데, 윗사람으로서 설마하니 '어디 이가 얼마나 빠졌는지 한 번 보자'하고 부하의 허리춤에 꽂힌 칼을 확인할 수는 없지. '그러냐' 한 마디하고는 그 걸로 그만, 히지카타는 자기 품에서 석 냥을 꺼내 두 냥 위에 보태주더라고. 그 때 그들 사이에 오고간 흥정이 정말 재미있어. 히지카타도 원래 약 행상을 하고 다녔던 사람이라 돈 계산하는 머리는 아주 잘 돌아갔거든. 자린고비 둘이 눈으로 주고받은 줄다리기를 얘기로 꾸미면 대충 이렇게 될게야.

(알았다. 그럼 석냥 더 내지. 이걸로 대충 때워줘라.)

(싫소. 내 칼은 다섯 냥으로는 못 사지요. 거기서 다섯 냥은 더 받아야겠고만요.)

(어림없는 소리. 네 칼은 싸구려에다 다 닳아빠진 칼이잖아. 그걸 어째 열 냥이나 쳐?)

(한 말씀 드리자면 오키타 선생의 칼은 기슈 기요미쓰, 사이토 선생의 칼은 이케다 기신마루인줄 압니다. 오십냥은 너끈히 나가는 명품 검이지요. 나는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열냥 정도면 적당하지 않습니까?)

(....못 말릴 놈. 그러고도 네가 사무라이더냐?)

(사무라이인지라 더더욱 칼은 분명히 계산해야지요. 부디 열냥은 쳐주시죠.)

 결국 그런 암묵의 흥정끝에 히지카타는 다시 다섯냥을 더 내줬어. 요시무라는 그것을 갈퀴로 긁듯이 챙겨넣더니 잽싸게 나가버렸어. 그 꼴이 또 어찌나 천연덕스럽던지, 나하고 히지카타가 어이가 없어 서로 마주봤다니까.

 요시무라가 사라진 뒤에 히지카타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내게 묻더라고.

'저자가 난부 번사였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

'설마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대답이야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나도 의심이 가더라고. 사무라이라는 건 대개 금전에는 무심한 법이고, 더구나 난부 모리오카라고 하면 이십만 석의 큰 번이었으니까.

 

 소설 속의 또 다른 에피소드.

 

 신센구미 곤도 이사미 대장은 일동을 한바탕 휘이 둘러보고는 갈고 닦인 굵직한 음성으로 느닷없이 이렇게 말하더만.

'이번에 특별한 훈령에 따라 우리 신센구미 일동을 하타모토에 등용하신다는 통지가 있었다'

 한 순간, 회의실이 고요하게 가라앉더니 뒤를 이어 와, 하는 탄성이 한 목소리처럼 터져나왔어. 그야 뭐, 말할 수 없이 좋았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어. 하타모토라고 하면, 보쇼, 손님, 지금으로 치자면 중앙관청의 고급 공무원 나리, 회사로 말하자면 도쿄 본사의 간부 사원이라고. 이게 꿈이냐 생시냐 싶더라니까. 말단 무사의 한 칸 짜리 길다란 집단 거주지를 집이랍시고 받아 살고, 사무라이라는 건 그저 명색 뿐 근근히 입에 풀칠이나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 할아버지의 얼굴이 말이지, 나도 모르게 가슴이 어리더라구.

 (중략)

 그 때, 내 곁에 앉아있던 요시무라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데. 마치 전기에 닿아 소스라친 사람처럼 말이지. 넋이 나간 꼴로 그 훌쩍하니 큰 키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두 손은 허벅지를 짚고 있었어.

'곤도 선생, 그 말씀이 참말이십니까?'

(중략)

 그 무렵 그 자는 말 그대로 너덜너덜한 허수아비였어. 봉급을 땡 전 한 푼 안남기고 고향에 보내버리는 탓인지 노상 입고다니는 단벌 바지저고리가 여기저기 기운 곳 투성이여서, 그 한 참 전 입대할 적에 내가 아이즈번 감독관으로 착각할 정도로 멋지던 모습은 자취도 없었지.

 그 꼴을 보고 히지카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더만.

'왜 그러나, 요시무라. 뭔가 불만이라도 있어?'

'아뇨'

 그리고 눈을 들어 히지카타를 바라보며 이어진 요시무라의 말에 대원들은 아주 대경실색을 했지.

'변변치 않은 질문입니다만, 수당은 얼마나 받게 되겠습니까?'

 어이가 없어 입만 뻐금거리는 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자, 어이그 하고 한 숨을 내쉬는 자....어지간한 곤도 이사미도 꾸짖을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그 큰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것 같더라고.

 우리는 번듯한 막부 관료로 임명을 받은거야. 그건 하타모토 관리의 격을 하사받았다는 명예의 문제였지. 어느 누구도 금전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어.

 곤도는 돌연한 질문에 적잖이 당황하는 모습이더니 곁에 있던 히지카타에게 물었어.

'그런 쪽은 어떻게 되나?'

히지카타도, 아, 예에, 하고 얼빠진 대답을 하고는 서류를 뒤적여보더라고.

'지도감찰 요시무라 간이치로에게는 사십 석이 하사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요시무라가 자리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더만. 감개무량한 목소리가 터지데.

(중략)

'저는 고향에서 이타 이인부치(14가마 정도)의 말단 무사였고만요. 아무리 검술을 잘하고 글을 잘해도, 마음가짐을 올바르게지녀도 말단은 평생 말단이었어요. 그런 제가 도쿠가와 가의 봉록을 사십 석이나 받다니...사십 석이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대기를 다룬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의 '대망(大望)'이나 메이지 유신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주인공으로 한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료마가 간다'라는 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요시무라는 파격 무사입니다. 당시 통념에 비춰보면 동료라는 게 수치스러울 정도였겠죠.

 그런데 소설을 읽어갈수록 저는 요시무라야말로 진정한 무사였다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는 누구보다 인간의 길을 제대로 걸어간 무사였다는 생각입니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도쿠가와 바쿠후의 껍데기 무사 정신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존왕양이'(尊王攘夷,천왕의 권위를 중심으로 국가체제를 강화하여 외국세력을 물리치자는 사상. 메이지 유신파가 도쿠가와 막부를 공략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창)를 외치며 다니던 시기에 그는, 처자식을 굶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갔습니다. 그건 할복의 명령이 내려질 중죄인 탈번(자신이 속한 영지를 떠나는 일)을 결행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처자식에게 한 푼이라도 더 보내주기 위해 그는 수전노라는 조롱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사내라는 건 제가 먹여살려야 하는 자들을 위해 죽는거요. 여자에게 반했다면 그 여자를 위해, 자식이 생겼다면 그 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거요'라고 외치면서.

 '사무라이가 목숨을 바칠 상대는 번주님이 아니라 우리를 먹여살리는 백성들이 아니겠는가'라고 주장하면서.

 '전쟁이라는 것은 항상 그 나름의 대의가 있겠습니다, 그 배경에는 반드시 그 대의 따위와는 상관없는 굶주림과 가난이 있다'고 호소하면서.

 

 천황이니 바쿠후니,무사도니 하는 용어로 가득찬 근대 일본사만을 접해온 저로서는, 요시무라야말로 뜻밖의 인물이더군요. 시도 때도 없이 배를 갈라대던 사무라이 시대에도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은 살고 있었구나, 라는 신선한 자각이랄까.

 '칼에 지다'의 역자 양윤옥님은 '인(仁)이란 착하면서도 강한 인간으로서의 길, 의(義)는 겉으로 내세우는 사회적 책임일 것이다. 인은 무시되고 의만을 강요하던 시대에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이 두 길을 모두 포기하지 않고 운명에 저항하며 한 방울 눈물의 흔적만 남을 때까지 온 힘을 쥐어짜 자신의 할 일을 칼같이 해내고 스러졌다. 마지막 사내다운 사내, 누구보다 행복한 지아비이고 훌륭한 아버지의 모습이다'고 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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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요시무라 처럼 피가 따뜻한 무사들이 근대 일본을 주도했다면, 일본은 제국주의가 아닌 다른 길을 걷지 않았을까, 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정한론'(征韓論)의 주창자이자 지독한 국수주의자였던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가 환생한 것 같은 요즘의 일본을 바라보다 가져보는 공허한 생각이요, 처자식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가장의 한 사람으로서 절절히 느껴지는 요시무라와의 동류의식입니다. 2006년도엔 요시무라와 친해져 볼랍니다.

 

*후기:'너를 보니 생각나는 책'이라면서 수첩을 북 찢어 '아사다 지로, 칼에 지다'라고 써서 건넨 친구. 대학 시절엔 '자칭 시인'이었고 지금은 '자칭 영화감독'인 그가, 올 해엔 메가폰을 잡고 소리치는 모습을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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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이 또 한차례 선심을 쓸 모양이다.

이번엔 올해 대입수능시험장에서 휴대전화 등을 소지했던 학생들이 수혜자가 될 듯하다. 여론이 ‘억울한’ 수험생 편으로 쏠리자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법(고등교육법)을 개정할 태세다. 여당의 담당 정책조정위원장은 실수로 휴대전화 등을 들고 간 수험생에게 시험 자체를 무효처리하고 내년 수능 응시자격까지 박탈토록 한 법률 규정이 너무 가혹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런 그는 ‘너무 가혹한’ 법안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한 여당의 대응은 원칙도, 철학도 없었다. 수능을 불과 20일 앞두고 문제의 법을 만들었다가 수능이 끝난 후에는 ‘억울한’ 수험생을 구제한다며 법을 손질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졸속입법’ 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자, 교육부의 행정지침으로 이들을 구제할 수 있다는 ‘묘안’을 내놓았다. 법률 규정을 하위의 행정지침으로 뒤집겠다는 비 법치주의적 발상이다.

여당 스스로 보기에도 민망했던지 4일에는 법개정 쪽으로 돌아섰다. 고등교육법에 휴대전화와 MP3 플레이어를 실수로 소지하고 있다가 적발된 수험생에 대해서는 법 시행 첫해인 올해에 한해 내년 수능 응시를 허용한다는 내용의 부칙을 신설하겠다는 것이다.

문제의 고등교육법 입안 당시도 부정행위 유형에 따라 처벌 수위를 차별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별 생각없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응시 제한 연도에 대해 1년이냐, 2년이냐를 놓고 입씨름을 하다 거수 표결에 부쳐 2년으로 굳어진 겁니다”(국회 교육위 관계자). 결국 입법 효과나 부작용 등에 대한 고민없이 법을 만들어 놓고 뒷북 수습에 허둥대는 꼴이다.

조남규 정치부 기자

“사실이 기사를 만드는 힘”
[미디어오늘 2005-09-15 00:00]

[미디어오늘] “저는 이번 기획취재 과정에서 경찰이든 검찰이든 수사권 조정과 관련된 그 어느 쪽 인사에게서 밥 한끼 얻어먹은 사실이 없고 그 누구와도 개인적 친분이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대학시절 시위에 참가했다 경찰서에 끌려가서 구타당한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갖고 있지만 지금의 경찰은 달라졌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12년 기자 생활을 구차하게 해오지도 않았습니다.

타고나기가 낯부끄러운 짓 못하는 성질머리입니다.

하물며 유착이라니요?”

세계일보 조남규 기자가 지난 6일 자신의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 <검찰 사주 받고 기사 썼다고?>의 한 대목이다.

조 기자는 지난 5일 1면 머리기사 <경찰에 독자 수사권 부여, 당정 잠정 합의>에서 “여권이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 문제와 관련, 경찰의 수사권을 독립시켜 주기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이에 따라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으로 확립된 검찰과 경찰의 상명하복 관계가 51년만에 제한적 상호협력 관계로 바뀌게 됐으며 경찰이 검찰과 함께 양대 수사기관으로 자리잡을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조 기자는 같은 날 3면에 <경, 51년만에 검 지휘 벗어나나> <“경찰파쇼가 검찰보다 세다” 54년 ‘검찰수사권’ 명문화> <‘수사권 싸움’ 국민은 안 보이나> 등에서 ‘사정체계 지각변동’ 첫 기획을 올렸다.

단독보도로 순항하던 이 기획의 문제는 이튿날 발생했다.

조 기자가 6일자 5면 기사 <‘수사권 독립’ 인권침해 폐해 우려/통제장칟감시체제 제도화 필요>에서 ‘경찰 수사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인권침해 가능성에 대한 학계·시민단체 주장’을 전한 게 문제가 된 것이다.

경찰 관계자들이 기사를 작성한 조 기자에게 항의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대한 조 기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5일 처음으로 보도한) 이 기사가 나가자 검찰은 우리당 내에 설치된 수사권 조정 정책기획단이 결론을 내리지 않은 상황에서 이 같은 기사가 보도된 점과 관련, 경찰에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의혹은 근거 없는 것입니다.

팩트가 기사를 만드는 힘입니다.

그런데 6일자 본지에 시리즈 2회분이 나가자 좀체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경찰이라고 신분을 밝힌 이들이 제 기사를 비난하는 댓글을 띄우고 저에게 전화를 걸어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점을 지적한 박스(기사)가 검찰 논리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검찰에 코가 꿰였다느니, 검찰의 사주를 받은 기사라느니 하는 등의 댓글을 남겼습니다.

첫날은 검찰 측에서 경찰 편향성 기사라고 문제를 삼더니 그 다음날은 경찰 측이 검찰의 사주를 받은 기사라고 매도하는 황당한 상황이 연출된 것입니다.

”조 기자는 ‘유착의혹’ 등 쏟아지는 비난에도 아랑곳 않고 7일자 5면에 <“밀리면 끝장”…검·경 막판 로비 치열> 등의 기사를 보도했다.

그리고 이튿날 3면에 <현장메모-경찰 ‘수사주체’ 되려면…>을 올려 “귀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다 해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인신공격을 해대는 이들이, 수사권의 주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경찰의 일원은 아니라고 믿고 싶을 뿐”이라고 썼다.

조 기자는 개인블로그 뿐만 아니라 본지 지면에서도 ‘출입처와 유착된 기사를 쓴 적이 단 한번도 없다’며 이번 취재과정에서 느낀 소회를 당당히 밝혔다.

자신의 기사를 읽는 독자들에 대한 애프터서비스, 그리고 기사에 대한 자신감이 단독보도의 설득력을 뒷받침한 것이다.

조 기자는 기사 한 줄 쓰기가 더욱 어려워져만 가는 지금, 기자의 소임과 기사 작성 전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밝혔다.

“검찰 출입하면서 심하다 싶을 정도로 검찰을 비판했을 망정 단 한번도 유착된 기사를 쓴 적이 없습니다.

경찰서를 출입했다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감시와 비판이 기자의 소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김종화 기자 sdpress@mediatoday.co.kr

미디어오늘 기사목록 | 기사제공 :
 1968년 12월,
상하이 태생인 26살의 청년 후진타오(胡錦濤)는
이역만리에 위치한 간쑤성(甘肅省) 여정길에 오릅니다.
중국 서북 변경의 오지로 향하는 그의 심정은 참담했습니다.
2년 전 베이징의 칭화대학(수리공정학부 하천발전공장학과)을 졸업하고
대학에 남아 교수를 꿈꾸고 있을 때만 해도 그의 앞 길은 밝았습니다.
문화혁명의 소용돌이는 하루 아침에 그가 쌓아놓은 모든 것을 허물어뜨립니다.
학창 시절 믿고따른 학교 당조직을 보호하다 문혁 세력으로부터
'집권파' '반혁명 지식분자'로 낙인찍힌 것이지요.
후진타오는 그 당시,
아버지가 지주로 분류되는 바람에 대학은 꿈도꾸지 못할 신분으로 전락한 육촌 누이를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재능있고 총명했으나 시대를 잘못만나 평생을 농촌에서 썩어야했던 누이말입니다.
 
 미래가 없다는 자각과 꿈의 포말이 터진 끝의 상실감.
간쑤성 댐 건설 현장으로 향하던 그의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후일 중국 국가주석이 될 명문 칭와대 졸업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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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막일꾼과 함께 벽돌을 쌓으며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생활은?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그가 '정말 말이 아니었다'고 회고했을 정도.
유일한 낙이라면,
캠퍼스 커플이었던 약혼녀로 먼저 간쑤성에 가 있던
류융칭(劉永淸.아래 사진)을 종종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 정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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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댐 건설 현장에서 벽돌쌓던 그가 36년만에 중국 국가주석의 자격으로 한국 국회의사당을 찾았습니다. 지난 17일 국회 본회의장 관람석에 앉아 그의 연설을 듣고있노라니 그의 표정과 음성 위로 굴곡많았던 그의 과거가 오버랩됐습니다. 국회 본회의장 맨 앞 줄에 앉아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남편의 연설을 경청하던 류융칭 여사의 삶과 함께 말이죠.
 
 
 막일꾼까지 추락했다가 정상에 오른 그의 삶을 복기해 보면
'지도자란 비르투(역량)와 포르투나(행운), 네체시타(시대정신과의 합치)라는 세 요소를 갖춰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에 힘이 실립니다.
 
 날개를 잃고 추락했던 문화혁명 당시의 상황만 놓고봐도
후일 문혁 4인방의 몰락 이후의 시대정신은 후진타오 편이 되었습니다.
그가 당 고위직 진출의 기로에 섰을 때,
당정과 언론은 그의 문혁 당시 행동을 근거로 그를
'매우 온당하고 착실한 성격을 지닌 인물'로 평가합니다.
젊은 시절의 그를 한없이 절망케 한 문혁의 회오리는 그를 서북 변경으로 내몰았지만, 그는 그 곳에서 평생의 정치적 후원자 쑹핑(宋平)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를 간쑤성 간부로 키운 것도, 중국 공산당 간부들에게 소개한 것도,
자신의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에 후진타오를 추천한 것도 쑹핑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쑹핑이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점이
후진타오의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후진타오-대륙을 질주하는 검은 말'(런즈추, 원쓰융 지음, 임국웅 옮김)은 '고급간부서류'라는 중국 고위층 신상정보 자료를 인용, '쑹핑의 집이 중앙 고위층 중에 청탁자들이 출입하기 가장 어려운 집이었다'고 소개했습니다.
참고로 후진타오는 말 띠입니다.
그래서 그가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에 올랐을 때,언론은 그를
'설산(雪山.그의 마지막 부임지인 티벳)에서 뛰쳐나온 검은 말'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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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3년 전 오늘(11월7일)은 '군주론'의 저자인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공화국 제2사무국 사무관직에서 파면된 날입니다.
 


 그의 나이 만 43살이었습니다.
제2사무국 사무관이라면
요즘 직제로 보면 직업 외교관 자리입니다.
대학도 나오지 않은 그였으나
임명 당시 로마 주재 피렌체 대사가
정세 분석보고서를 부탁할 정도였으니,
이른바 발탁 인사 케이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4년 동안 피렌체 공화국에 헌신한 그였으나
피렌체의 유력 가문인 메디치 가문이 소델리니 종신 대통령을 추방한
쿠데타의 여파로 직장을 잃게됩니다.
능력이 없어서 쫓겨난 것이 아닙니다.
정권을 누가잡든 자신은 피렌체를 위해 봉사하는
직업 관료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였습니다.
피렌체 정부를 원격 조종하고 싶은 메디치가 핵심들이
정보 획득 차원에서 마키아벨리의 자리에 스파이를 앉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그의 불행이었습니다.
어쨌든 마키아벨리는 한창 일할 나이에 실직자가 됩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일년 뒤에는 난데없는 쿠데타 음모에 연루돼
고문당하고 한 달 가까이 옥살이를 하게됩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10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벌금이 부과됩니다.
임신중인 아내와 세 아들, 그리고 딸.
입에 풀칠하기도 급급한 상황에서
친구들의 보증으로 유예된 벌금 상환은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이런 현실은 오히려 견딜 수 있었을 지 모릅니다.
오히려 무능한 인사가 자신의 자리를 차고 앉아
메디치가의 주구 노릇을 하고 있는 꼴이야말로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상심과 분노로 뒤범벅된 마흔 세 살의 남자는
결국 피렌체 시내를 떠나 교외의 산장에 은둔합니다.
그리고 단숨에 '군주론'을 써내려갑니다.
추방된 단테가 '신곡'을 썼듯이-.
 
 그의 산장은 지금 마키아벨리 자료관이 되어있습니다.
주변은 포도나무 밭입니다.
군데 군데 마키아벨리 가족의 생계에 기여했을 올리브 나무가 서 있고요.
 


 이 산장을 찾은 시오노 나나미는 저서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에서
'가슴이 예리한 칼날 같은 것으로 콱 찔리는 듯한 육체적 아픔을 느꼈다'고 썼습니다.
산장 마당에 나가서 무심코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피렌체가 보였을 때,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상해봅니다.
'산장 마당에 서서, 운무가 끼거나 날이 흐리면 금방 보이지 않게 될 만큼 먼,
그러나 갠 날에는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피렌체를 그는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았을까?'
 
 자고 일어나 보니 유명해졌다는 행운아와 정반대로
하루 아침에 자신의 영혼 보다 더 사랑한 피렌체로부터 버림받은 사나이.
그럼에도 평생 동안 열강에 둘러싸인 피렌체의 운명을 괴로워한 사나이.
'다 읽고나신 지금, 여러분에게도 이 사나이는 '나의 친구'가 되었습니까'라고,
시오노 나나미는 묻습니다.
저는 주저없이 속으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뱀 다리>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지도자란 비르투(역량)와 포르투나(행운), 네체시타(시대정신과의 합치)라는 세 요소를 갖춰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차기 대통령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자문자답해 볼 만한 대목입니다. 

 

 
 
 *아래 글은 중앙일보 박보균 대기자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집필 500년을 계기로 쓴 글입니다.

중앙일보 2013년 4월28일자

[군주론 500년] 2013년 한국정치 왜 마키아벨리인가

  『군주론(Il Principe)』은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o Machiavelli·그림)의 대표작이다. 1513년 정치 유배 시절에 썼다. 그 후 500년은 애증(愛憎)의 극단적 대비다. ‘근대 정치사상의 독보적 출발’이란 격찬과 ‘권모술수의 교활한 교본’이라는 비난이 교차했다.

 『군주론』은 권력과 인간성의 불편한 진실을 해부한다. 그는 정치를 정치로 접근했다. 종교와 윤리에 묶인 정치를 분리시켰다. 그것을 바탕으로 통치 딜레마의 극복, 위기관리의 해법을 제시한다.

 『군주론』의 유산은 시대를 뛰어넘는 상상력과 시사점이다. 한국 정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 정치에 익숙하지 않다. 명분과 추상, 이념과 도덕주의가 우세하고 넘친다. 좋은 정치, 유능한 권력, 대중 역량의 토양이 취약하다. 그것이 ‘2013년 왜 『군주론』인가’ ‘한국 정치의 성숙과 마키아벨리’에 대한 해답이다. 그는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이다. 그의 삶과 흔적을 현지에서 추적했다.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군주론 500년 … 2013년 한국 정치 왜 마키아벨리인가
리더십 역량·의지가 정치 불확실성 제거한다

마키아벨리의 흉상. 죽음의 얼굴상(추정)이다. 베키오 궁전 백합홀 집무실에 초상화와 함께 전시돼 있다. 얼굴(데스 마스크)에 치장용 벽토(stucco)를 발라 본뜬 것으로 추정한다. 거기에 검정·붉은색등 여러 색칠을 했다. 외모 기록대로 ‘마르고 작은 얼굴’이다. 상반신의 옷 형태와 색깔은 초상화와 같다. 작가 미상이다. 20세 초 미국인 르네상스 미술 수집가(Charles Loeser)가 흉상을 기증했다.

마키아벨리는 파격과 도전이다. 그는 사상의 질서를 깼다. 정치를 도덕과 종교에서 분리했다. 군주론(Il Principe, 영어 The Prince)의 주제는 대담하다. 언어는 강렬하다. 그 책은 권력의 본질과 인간 본성을 추적한다. 권력과 인간관계의 유형을 제시한다.

 군주론은 권모술수, 악의 교서라고 비난받았다. 그 500년은 애증(愛憎)의 서사시다. 군주론은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1469~1527)를 상징한다.

집필 500년-. 자극의 단어다. 나는 마키아벨리의 도시로 떠났다. 이탈리아의 중북부 피렌체(Firenze, 영어 Florence)다. 그가 태어났고 활약했던 곳이다. 4월 초 로마에서 고속철에 올랐다. 피렌체까지 북쪽으로 1시간30분.

 피렌체는 르네상스 천재들의 도시다. 그 시대 그림·건축·조각·인문학으로 넘친다. 마키아벨리의 시골집이 시 외곽에 남아 있다. 피렌체에서 남쪽 11㎞. 그곳으로 향했다. 그의 시대로 그를 찾아간다.

 1512년 가을 그에게 비운이 찾아왔다. 피렌체 공화국은 무너졌다. 스페인 군대의 침공 때문이다. 행정 수반 소데리니(Pier Soderini) 정권은 몰락했다.

 그는 소데리니 정권과 운명을 같이했다. 1498년 정권 출범 때 그는 행정청의 제2서기장(Segretario della Seconda Cancelleria)을 맡았다(29세). 14년간 그는 피렌체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소데리니의 퇴장과 함께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추방됐다.

 메디치 가문(Famiglia de’ Medici)이 18년 만에 권력에 복귀했다. 그는 반(反)메디치 음모에 연루됐다. 체포됐고 고문까지 받았다. 사면으로 풀렸다. 1513년 봄 시골집으로 쫓겨났다. 나이 44세. 유배의 가택연금 신세가 됐다.


자동차는 시에나 쪽으로 20분쯤 달렸다. 산 카시아노(San Casciano) 지명 표지판에서 오른쪽 좁은 2차로 도로에 들어섰다. 완만한 포도밭 언덕, 올리브 나무들.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솟는다. 이탈리아 운전기사가 “토스카나(Toscana, 영어 Tuscany) 지방의 전형적인 전원 풍경”이라고 한다. 토스카나의 주도(州都)가 피렌체(인구 36만 명)다.

 5분쯤 뒤 산탄드레아 인 페르쿠시나(Sant’Andrea in Percussina) 마을에 도착했다. 고풍의 수채화다. 여러 채의 돌집이 나를 맞는다. 잔잔하고 한적했다. 마을은 르네상스 시대 풍경 그대로라고 한다.

 알베르가치오(Albergaccio)-. 그의 소박한 3층 벽돌집이다. 그의 삶은 가난 속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평범한 법률가였다. 돌 벽 중간에 걸린 석판이 시선을 잡는다.

 che qui medito' e propugno' la liberazione d′Italia scrivendo le sue opere immortali sull′arte di reggere e difendere con armi proprie gli stati. “국가 통치와 자기 나라 군대로 방어하는 기술에 관한 불멸의 작품을 쓰면서 이탈리아의 해방을 모색하고 주창했던 마키아벨리.” 그의 탄생 400주년(1869년) 기념 석판이다.

 그 시대 이탈리아는 외세의 각축장이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성공 신화는 퇴색했다. 두 강대국, 프랑스와 스페인은 경쟁적으로 이탈리아를 침략했다.

 ‘국가 통치술, 자주국방, 이탈리아의 통일’-. 군주론의 핵심 주제다. 마키아벨리의 고뇌와 열정을 압축한다. 나는 마지막 장을 떠올렸다. ‘야만인들의 지배에서 이탈리아 해방을 위한 호소’(26장)다. 동판은 19세기 이탈리아의 열망을 반영한다. 마치니(Mazzini) 등 통일 운동가들은 그 대목에서 영감을 받았다.

 마키아벨리는 외국 지원군과 용병을 불신했다. “자신의 무력에 근거하지 않는 나라는 위기 때 자기 방어를 할 역량이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운명에 의존한다”(13장)-. 자주국방은 국가 지도력의 핵심이다. 그 명제는 시대를 뛰어넘는 진리다. 북한 핵무기 위협의 방파제이기도 하다.

 관광객 다섯이 차에서 내린다. ‘피렌체시 군주론 500주년(V centenario)’ 홍보 로고가 차에 붙어 있다. 인솔자 조르조 키엘리니(46)는 토스카나의 르네상스 연구소 연구원이다. 그가 이 지역 신문(Il Gazzettino del Chianti)을 보여준다. ‘추방자 마키아벨리, 500주년 재현 행사’ 기사다.

 재현 행사는 피렌체 중심,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에서 있었다. 관광객이 몰렸다. 16세기 옷차림의 관원이 말을 탄 채 마키아벨리 체포령을 발표한다. 그의 시골집 추방은 1513년 2월 19일 그렇게 시작됐다.


마키아벨리의 대표적인 초상화, 궁정복 차림이다. 1575년(사후 48년) 산티 디 티토의 작품. 다문 얇은 입술에서 야릇한 미소가 풍긴다.
나는 집안에 들어갔다. 2층에 그의 책상이 남아 있다. 장식도 크기도 조촐하다. 거기서 군주론을 썼다. 등불과 깃촉 펜이 보인다. 벽에 그의 작은 초상화가 걸려 있다. 군주론의 목차를 넣은 액자도 있다. 1532년 첫 인쇄본이다. 그의 죽음 5년 뒤다. 책상 뒤 창문 틈으로 꽃 향기가 스며든다. 그때도 피렌체는 꽃의 도시였다.

 그 방에 추방자의 삶이 배어 있다. 베토리(Francesco Vettori, 로마 주재 피렌체 대사)에게 보낸 그의 편지(1513년 12월 10일)를 읽어야 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 편지를 “이탈리아 문학 사상 가장 아름다운 문체”(저서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라고 감탄했다.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서재에 들어간다. 문턱에서 나는 진흙과 먼지 묻은 평상복을 벗고 품위 있는 궁정복으로 갈아입는다. 이런 옷차림으로 나는 고대인들의 궁전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나를 반긴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궁금한 행적이 있으면 그 이유를 캐묻는다. 그들은 정중하게 답변한다. ··· 단테(Dante)는 읽은 것을 기록하지 않으면 지식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얻는 성과를 기록해서 ‘군주에 관한 작은 책자(opuscolo De Principatibus)’를 썼다.”

 역사와의 대화다. 궁정복은 타임머신이다. 그는 고대 로마의 영웅, 철학자들과 토론한다. 1513년 여름부터 정력적으로 썼다. 편지를 보낼 무렵 군주론(헌정사+26장) 초고가 완성됐다. 그 표현대로 ‘국가통치술(arte dello stato)에 대한 연구’다. 그는 권력 복귀의 열정을 글에 쏟았다. 유배지에서 불후의 명작이 탄생한다.

 나는 동네를 살폈다. 집 건너편 작은 레스토랑의 외관은 500년 전 그대로다. 마키아벨리는 거기서 돈을 걸고 카드 게임(tric-trac)을 했다. 그의 사후, 집주인은 세리스토리(Serristori) 가문이었다. 최근 와인 회사(Gruppo Italiano Vini) 소유로 바뀌었다. 이곳은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 와인 생산지다. 마키아벨리 상표 와인도 있다. 라벨에 옆 얼굴 초상화가 붙어 있다.

 집 지하에 와인 저장고가 있다.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의 초상화가 눈에 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의 냉혹한 권력의지에 심취했다. 체사레는 이탈리아 반도의 신예 강자였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타인의 무력이나 호의에 의존해선 안 된다.” 체사레의 권력 평판은 잔인함의 외경(畏敬)이다.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 곽준혁 소장은 “평판(reputazione)은 정치적 권위의 핵심 요소이며 영향력의 실질적 근거다. 그것은 마키아벨리의 고유 해석”이라고 설명한다.

 체사레의 아버지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다. 일찍 죽는다. 후임 교황은 율리우스 2세다. 체사레는 그의 선출을 막지 않았다. 그것은 ‘체사레의 유일한 실수지만 파멸의 원인’이었다. “지난날 원한이 새로운 은혜를 베풂으로써 씻어진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7장)이기 때문이다. 체사레 집안은 과거에 율리우스 2세와 섭섭한 관계였다. 은혜와 원한-. 인간성 양면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통찰은 전율과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 연구원에게 물었다. “군주론의 어느 대목이 와닿느냐.” 그는 주저 없이 말한다. “군주는 경멸받는 것을 피해야 한다. 경멸받는 것은 변덕이 심하고, 소심, 우유부단한 인물로 생각되는 경우다”(19장). 그는 “유럽 위기는 경제적 측면보다 결단과 용기의 정치 리더십 문제”라고 했다.

 이명박(MB) 정권의 2008년 봄이 생각난다. 광우병 촛불시위 때다. 그는 청와대 뒷산에서 시위대의 ‘아침이슬’ 합창을 들었다. 민심을 향한 간절함의 표출이었다. 그 방식의 효험도 있었다. 부작용은 치명적이었다. 반(反)MB의 좌파 세력에 얕잡아 보였다. 지지층도 나약함에 실망했다. MB 정권은 권위와 존경을 잃었다.

 피렌체 시내로 돌아갔다. 떠나는 순간, 두오모(Duomo, Santa Maria del Fiore) 성당의 주황색 쿠폴라(cupola·둥근 지붕, 높이 106m)가 아련히 보인다. 피렌체 두오모는 건축 사상 가장 화려하다. 나는 아르노 강변 베키오 다리 부근에서 내렸다. 다리 옆 거리에도 마키아벨리의 집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대형 지뢰 폭발로 파괴됐다. 집터는 도자기 가게로 바뀌었다.

 나는 시뇨리아 광장으로 10분쯤 걸어갔다. 그곳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은 지금도 시청 청사다. 광장 바닥에 동판이 있다.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의 비극을 기억하게 한다. 프랑스 샤를 8세의 침공으로 메디치 권력은 무너진다(1494년). 수도사(修道士) 사보나롤라가 권좌에 올랐다. 그의 4년 통치는 급진개혁의 신정정치였다. 포퓰리즘적 광기로 대중 지지가 추락한다. 그는 화형을 당한다.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의 극적 몰락을 분석했다. “신질서(nuovi ordini)를 만드는 것은 어렵고 성공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구질서의 이득을 본 사람들은 개혁자에게 적대적이다. 반면에 신질서로부터 이익을 누릴 사람들의 지지는 미온적이다. 인간 속성은 확고한 결과를 직접 보기 전에는 개혁을 신뢰하지 않는다.”(6장)

 대통령 퇴임 후 김영삼은 “개혁은 혁명보다 힘들다”고 실토했다. 500년 전 책은 개혁과 대중심리의 관계를 꿰뚫었다.

 사보나롤라는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의 비극이다. “무장한 예언자는 획득했고, 말뿐인 예언자는 실패한다. 대중은 변덕스럽다. 대중은 설득하기 쉬우나 설득한 상태를 유지하기는 어렵다.”(6장) 노무현의 옛 386정권은 독특한 바람으로 집권했다. 집권 후 포퓰리즘 행태는 대중 다수의 반발을 샀다. 지지세력은 이탈했다. 나는 베키오 궁전에 들어갔다. 2층 백합홀(sala dei Gigli)로 갔다. 현란한 벽화에다 사자 조각상, 붉은색 백합이 그려져 있다. 피렌체의 상징물이다. 500년 전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함이 보존돼 있다.

 백합홀 왼쪽에 마키아벨리 집무실이 그대로 있다. 10평 정도다. 입구와 끝 양쪽에 그의 초상화와 흉상(胸像)이 있다.

 얼굴상( 작가 미상)은 초췌하다. 그의 죽은 얼굴을 흙으로 본떠 색칠한 것으로 추정한다. 흉상은 피곤한 말년의 삶을 드러내는 듯하다.

 초상화는 산티 디 티토(Santi di Tito)의 작품(1575년)이다. 화가는 ‘편지 속 궁정복’의 마키아벨리를 상상했다. 얼굴상과 그림은 그의 외모를 기록한 것과 비슷하다. “마르고 보통 키, 작은 얼굴, 매부리코, 검은 머리, 빛나는 검은 눈. 다물어진 얇은 입술, 냉소하는 듯하다.”

 그의 제2서기국은 외교와 대외 전략을 담당했다. 그는 외교사절(mandatario)로 여러 곳에 파견되었다. 그는 귀족 출신이 아니다. 대사(oratore)직은 맡지 못했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이웃 통치자들을 만났다. 관찰하고 협상도 했다. 프랑스 루이 12세, 체사레 보르자, 막시밀리안 황제(신성로마제국), 교황 율리시스 2세-. 관찰의 초점은 통치자의 성향과 자질, 군사력, 권력 운용, 대중의 지지 여부였다. 그는 수많은 보고서를 보낸다. 직관과 통찰, 상상력과 분석력은 탁월했다.


안내문에 ‘비르투(virtu')와 포르투나(fortuna)’가 적혀 있다. 군주론의 핵심 용어다(25장). 마키아벨리는 중세시대의 소극적 운명론을 거부했다. 정치의 속성은 불확실과 변동이다. 하지만 정치의 안정은 포르투나의 운명적 소산이 아니다. 그것은 지도자의 역량과 창조적 의지력, 결단과 용기로 바뀐다. 그것이 비르투다.

 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링컨 ’을 기억했다. 영화는 수정헌법(노예해방)의 하원 통과 과정을 다룬다. 19세기 미국은 내전(남북전쟁)과 노예제의 어두운 운명 속에 있었다. 링컨은 비르투의 정치력으로 운명을 역전시킨다. 비르투는 리더십의 매력을 발산한다. 정치는 가능성의 미학이다. 링컨은 버락 오마바 미국 대통령의 롤 모델이다. 그것은 오늘의 한국 정치 리더십의 해법이다.

 그림 속 마키아벨리 미소는 야릇하다. 쾌감과 의연, 냉소와 반감이 교차한다. 군주론을 둘러싼 찬사와 적대의 반응인 듯하다.

 군주론 500년은 다양한 해석, 끊임없는 논란의 세월이다. 오해와 비판은 두텁다. 속임수와 기만의 정치 참고서라는 부정적 언어들이 넘친다. 1559년 로마 교황청은 마키아벨리의 책들을 금서(禁書)로 판정한다.

 군주론에 대한 옹호와 감탄은 더욱 두텁다. 18세기 장 자크 루소의 반격은 자주 인용된다. 루소는 “(마키아벨리는) 피상적인 독서에 희생되었다”고 했다.

 군주론은 권력의 야만성을 조명했다. 인간성의 어두운 본성을 파헤쳤다. 그 진실은 불편하고 역겹다. 그것은 윤리와 종교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의 천재적 작업은 생각의 세상을 바꾸었다. 피렌체시 ‘군주론 500주년 기념 조직위원회’의 발도 스피니(Valdo Spini) 위원장은 진전된 관점을 내놓는다.

이탈리아 피렌체=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군주론 500년은 애증의 서사시
'살아 숨쉬는' 위기 극복 통치술


그는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권력을 방어하는 인식의 도구를 시민들에게 제공했다”고 말한다. 피렌체시는 12월까지 군주론의 학술회의, 재현 행사, 기념 사업을 한다.

 그 책의 언어는 직설과 대비다. “군주는 대중에게 사랑(amore)보다 두려움(timore)을 느끼게 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17장) 하지만 미움(odio)은 피해야 한다. 두려움은 적절한 통치 수단이다. 미움은 군주에게 치명적이다. 그런 대비법은 강렬하게 꽂힌다.

 군주론은 ‘현실주의 정치(realpolitik)’ 교본이다. 초점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통치의 딜레마를 푸는 데 있다. 군주론은 ‘살아 숨 쉬는’ 지도력 연구서다. ‘권력의 경제학’이다. 권력은 낭비되지 말아야 한다. 군주론은 기만과 비열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정치행위의 판단 기준은 좋은 결과와 효용, 공익이다. 고려대 최장집 명예교수는 그것을 “좋은 가치보다 좋은 결과의 기능주의”로 해석한다.

 프린스턴대 비롤리(Maurizio Viroli) 교수는 “마키아벨리의 삶은 역설과 불확실성, 비극적 드라마로 차 있다(저서 『Niccolo’s Smile』)”고 했다.

 비롤리의 포착은 실감 난다. 마키아벨리는 역설이다. 군주론의 부정적 이미지는 능숙한 처세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그렇지 못했다. 1515년 가을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i Piero de’ Medici)에게 군주론을 바쳤다. 책은 ‘헌정사(獻呈辭·Dedica)’로 시작한다. "전하께 드리는 선물은 장신구가 아닌 지식입니다.” 그것을 통해 책사(策士)의 역량과 충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그만의 권력 복귀 방식이었다. 그러나 젊은 메디치 군주는 그 책을 외면했다. 그의 정치 재기 꿈도 사라졌다.

불우함은 반전(反轉)을 낳는다. 그는 저술로 삶을 집중했다. 리비우스의 로마사 강론(Discorsi), 전술론(Dell’Arte della Guerra), 피렌체사도 썼다. 희곡 만드라골라(Mandragola)는 문학적 재능을 보여준다.

 반전은 그를 근대 정치사상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스피니 조직위원장은 그 반전과 역설을 ‘역사의 복수(la vendetta della storia)’라고 했다. 시인 단테의 신곡 은 망명의 산물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다산 정약용의 저서도 비슷하다. 군주론의 영향력은 독보적이다. 정치와 리더십 담론은 군주론을 통과해야 한다. 정치인, 학자는 군주론을 우회할 수 없다. 격찬과 비판과는 상관없다.

 베키오 궁전에서 나왔다. 그 옆은 우피치(Uffizi) 미술관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受胎告知)’,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등 거장의 걸작들이 쏟아지는 곳이다. 미술관 밖 회랑에서 마키아벨리를 조각상으로 만났다. 과장된 근엄함은 로마공화정의 원로원 귀족 같다.

 그는 좌절과 낭패 속에서 병으로 숨졌다. 1527년 6월, 58세. 묘소는 산타 크로체(Santa Croce) 성당에 있다. 시신이 없는 묘비(cenotafio)다. 베키오 궁전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다. 성당 안에는 단테와 갈릴레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묘비도 있다. 피렌체 출신 위대한 고유명사들이다.

 마키아벨리의 라틴어 묘비명(1787년 작품)은 이렇게 적혀 있다. “어떤 찬사도 이처럼 위대한 이름에 적합하지 않는다.” 탄토 노미니 눌룸 파르 엘로지움(Tanto nomini nvllvm par elogium)-.


최장집 교수가 본 마키아벨리즘
“좋은 정치를 이끌 실력 중요 … 마키아벨리에 익숙해져야”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요즘도 ‘왜 마키아벨리를 공부하나’라는 제목으로 강의한다. 최 교수는 3년 전 “우리 정치에서 카를 마르크스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그 주장은 유효한가.

 “그렇다. 한국정치는 도덕적·이상주의적이다. 한국 현실에서 요구되는 ‘정치적 현실주의’에 대한 전통이 약하다. 마르크스 이론에는 정치의 역할이 없다. 규범과 이상만 강요한다. 그것이 이 시점에서 ‘왜 마키아벨리인가’다.”

 - 민주주의와 마키아벨리의 관계는.

 
 “민주주의도 통치체제의 하나다. 통치행위는 권력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우리 민주주의는 추상화, 물신(物神)화, 도덕적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현실에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제약으로 작용한다. 이런 문제의 해독(解毒)제로서 마키아벨리의 유용성이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저항의 민주주의가 아닌 통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다.”

 - 마키아벨리는 누구인가.

 “솔직하고 대담무쌍한 정치철학자다. 도덕·종교적 담론은 인간의 권력의지를 베일에 덮어씌운다. 마키아벨리는 그 위선적 가면을 벗겨 보인 위에서 정치현상을 설명했다. ”

 - 우리 사회에 반(反)정치의 분위기가 퍼져 있다.

 “ 정치 배제의 반정치는 무책임의 정치를 낳는다.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을 찾는 게 정치다. 좋은 정치를 이끌 실력이 필요하다. 마키아벨리의 정치와 통치술에 익숙해야 한다.”

 - ‘좋은 정치’란.
 
 “우리 사회에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가 놓여 있다. 좋은 정당으로 뒷받침받는 좋은 리더십이 해결 과제를 사려 깊게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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