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실베니아 방문 길에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습니다.
펜실베니아 미디아시에 있는
서재필 박사 기념관입니다.
이 곳은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한 서 박사가
1925년부터 51년까지 조국의 독립과 근대화를 염원하면서
근거지로 삼고 살았던 집입니다.
저는 한참을 헤맨 끝에 폐관 시간인 오후 5시가 다 돼서야 도착했습니다.
기념관은 인근에 거주하는 한국 유학생이 자원 봉사 형식으로
관리하고 있더군요.
기념관 내부의 모습.
유학생은 폐관 시간이 지나고도 오랫동안 저의 가족을 안내했습니다.
감회가 새롭더군요.
국사 시간에 입시용으로 암기했던 서재필이라는 인물을
이역 만리 타국에서 가슴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유학생의 설명에 따르면,
이 저택은 서 박사가 유명을 달리한 이후 첫째 딸이 머물러 살았으나
첫째 딸이 숨진 이후 미국인에게 넘어갈 뻔 한 것을 필라델피아 교민들이
모금 운동을 벌여 인수했다고 합니다.
갑신정변 당시 서 박사의 부인과 자녀들은 모두 참살당하고
서 박사는 미국 망명 시절 미국 여성과 결혼해
딸 둘을 얻습니다.
둘째 딸은 독신으로 남고 첫째 딸은 결혼해 서 박사의 혈육을 남기나
이 혈육은 연락이 두절됐다는 군요.
지금과 같은 기념관으로 개축된 것은 1990년 11월 24일로
서재필 기념재단(1-215-224-2000)의 역할이 컸습니다.
기념관에는 주로 미국 교민들이 방문하고 있을 뿐 한국 관광객의 발길은
뜸하다고 합니다.
정치인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 시절에 한 차례,
대통령 퇴임 후 한 차례 방문했습니다. 이인제 전 민주당 고문의 이름도 보이더군요.
방명록에는 또 민족사관고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방문한 기록이 있어 반가웠습니다.
기념관에 소개된 서 박사의 행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갑신 정변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미국으로 망명,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이자 미국 의사가 됐다.
3.1 운동 직후 제1차 한인회의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
한국 독립의 열망을 전 세계에 알리고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설립해 조직적인 선전활동을 벌였다.
1895년 10년만에 한국에 돌아온 서재필은
1898년 5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등 계몽운동에 헌신했다.
독립협회, 독립문, 독립관을 설립해 자주독립 사상과
민주 민권 사상 고취에 힘썼다.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워싱턴 군축회의 등에 참가,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각국 대표들에게 인식시키는 등
외교적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7년 7월 과도정부 특별 의정관 자격으로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정치 활동 보다는 국민 계몽운동에 헌신했으며
미소 냉전으로 분단이 고착화해가는 상황에서
한민족 통일과 민주적 근대국가 건설에 매진했다.
그 와중에 서재필 초대 대통령 추대 움직임이 일자
정치적 야심이 없음을 공표하고
한국이 통일되어 잘 살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긴채
남한 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48년 9월 한국을 떠났다'
조선의 근대화에 목숨을 걸었던
청년 서재필이 꿈꾸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합하면 조선이 살테고
만일 나뉘면 조선이 없어질테니
조선이 없으면
남방사람도 없어지는 것이고
북방사람도 없어지는 것이니
근일 죽을 일을 할 묘리가 있겠습니까.
살 도리들을 하시오'
말년의 서 박사가 분열된 조국을 향해
유언처럼 남긴 말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