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5일자 세계일보에 저는 열린우리당이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 문제와 관련, 경찰에 독립적인 수사권을 부여하기로 방침을 정했다는 기사를 1면에 단독 보도했습니다. 경찰의 수사권 독립은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으로 형성된 검찰 중심의 사정 시스템이 51년만에 혁명적으로 변화하는 계기입니다. 이에따라 세계일보는 경찰 수사권 독립과 관련한 시리즈물을 3회에 걸쳐 연재하기로 결정하고 5일자 3면에 그 1회분을 내보냈습니다. 내용은 경찰 수사권 독립의 의미를 개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기사가 나가자 검찰은 우리당 내에 설치된 수사권 조정 정책기획단이 결론을 내리지 않은 상황에서 이같은 기사가 보도된 점과 관련, 경찰에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의혹은 근거없는 것입니다. 팩트가 기사를 만드는 힘입니다.
 그런데 6일자 본지에 시리즈 2회분이 나가자 좀체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경찰이라고 신분을 밝힌 이들이 제 기사를 비난하는 댓글을 띄우고 저에게 전화를 걸어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2회분 시리즈의 의도는 이제 경찰에 수사권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으니, 경찰을 포함해 최근 떠오르는 사정기관을 개괄하고 경찰 수사권 독립에 따른 문제점과 대책을 짚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중 문제점을 지적한 소박스에 비난이 집중됐습니다.
 경찰청이 만든 '수사권조정 설명자료' 68쪽에도 수사권 독립 이후의 문제점 중 하나로 부당한 지휘 명령 감독이 통용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수사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들이 나열돼있습니다.
 그런데도 문제점을 지적한 박스가 검찰 논리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검찰에 코가 꿰였다는니, 검찰의 사주를 받은 기사라느니 하는 등의 댓글을 남겼습니다.
 첫날은 검찰측에서 경찰 편향성 기사라고 문제를 삼더니 그 다음날은 경찰측이 검찰의 사주를 받은 기사라고 매도하는 황당한 상황이 연출된 것입니다.
 경찰측에서 가장 예민하게 반응했던 대목은 수사권이 독립되면 인권침해가 우려된다는 부분이었습니다. 검찰 논리를 그대로 되풀이했다는 항변이었습니다. 검찰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나 검찰은 그렇기 때문에 경찰에 수사권을 줘서는 안된다는 논리이고 저는 수사권 독립 이후에도 인권 침해 우려가 있으니 사전에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강구해야한다는 방향이었습니다. 설사 검찰이 주장하지 않았어도 저는 그 부분을 짚었을 것입니다.
 수사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억울한 피해자가 수십만건 중 한 건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 사람 본인에게는 100%의 피해입니다. 이제 경찰도 수사권의 주체로 당당히 설 수 있는 상황이 됐으니 그 권한에 걸맞는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는 점에서 제기한 제반 문제점이 그렇게 귀에 거슬렸습니까?
 
 분명히 밝히지만 저는 이번 기획취재 과정에서 경찰이든 검찰이든 수사권 조정과 관련된 그 어느 쪽 인사에게서 밥 한끼 얻어먹은 사실이 없고 그 누구와도 개인적 친분이 없습니다. 댓글의 내용대로 검찰에 코를 꿰일 정도로 인생을 허술하게 살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대학 시절 시위에 참가했다 경찰서에 끌려가서 구타당한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갖고 있지만 지금의 경찰은 달라졌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12년 기자 생활을 구차하게 해오지도 않았습니다. 타고나기가 낯부끄러운 짓 못하는 성질머리입니다. 하물며 유착이라니요? 검찰 출입하면서 심하다 싶을 정도로 검찰을 비판했을 망정 단 한번도 유착된 기사를 쓴 적이 없습니다. 경찰서를 출입했다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감시와 비판이 기자의 소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제 인생을 모독하는 댓글을 올린 분들이 그토록 '수사권의 주체'가 되고 싶어하는 경찰의 일원은 아니라고 믿고싶습니다.
 
             
     
 
 
 
  
 
 

얼마전 대검찰청이 발행하는 ‘검찰 가족지’에 ‘나의 수사 경험담’이란 제목의 글이 실렸다. 글을 기고한 대검 중수부 수사관은 1998년 북부지청 형사부 근무 시절 경찰서에서 송치한 폭력조직 사건을 예로 들면서 “외상값을 독촉하는 슈퍼 주인에게 홧김에 시비를 건 사건이 두목과 행동대장, 행동대원의 계보도까지 갖춘 조직 폭력사건으로 둔갑한 사례”라고 소개했다. 알고 보니 경찰청이 ‘조폭 일제소탕 기간’을 정하자 일선 경찰서에서 실적을 올리려다 빚은 해프닝이었다는 것이다. 이 수사관은 “경찰의 수사를 감독 지휘하는 검찰이 있었기에 무고한 시민이 조폭의 혐의를 벗었다”며 “국민이 이런 사실을 알고도 경찰에 수사권을 주려할지 의문스럽다”고 글을 맺었다.

경찰이 이달 만든 ‘검찰 수사권 문제점 사례 검토’라는 자료가 있다. 50쪽 분량의 이 자료 안에는 검사 지휘의 오·남용과 부작용, 검찰수사 중 사망·자살 사례, 검찰의 직무관련 불법·부당 사례 등이 빼곡히 들어 있다. 대전 법조비리 사건부터 검사아들 답안대리작성 사건에 이르기까지 검찰에 악재인 사건들이 총망라됐다. 요약하면 “경찰 수준 우습게 보는 데 검찰 수준도 형편없다”는 논리다.

수사권 취재 과정에서 만난 검찰 관계자들의 의식 한 쪽에는 “경찰 수준은 아직 멀었다”는 비하감이, 경찰 관계자들의 의식 한 켠에는 “검찰의 수하”라는 자괴감이 깔려 있었다. ‘수사권’은 국민 인권은 말할 것도 없고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그러나 두 조직간 자존심과 사활을 건 한판 싸움에 국민은 실종된 느낌이다.  조남규 정치부 기자

1999년 겨울에 찾은 샌프란시스코

 

 

 

 

 

2005년 여름에 찾은 샌프란시스코

 

 

 

 

 

 

 

 

 

 

 

 

 

 

 

 

 

 

 

 

 

 

 

 

 

                                            안개가 삼켜버린 금문교.

 

 

샌프란시스코만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은 1775년 지금의 금문교 자리인 해협을 지나가는 유럽인들의 배를 처음으로 봤다. 이듬해 스페인은 이 곳에 군사 초소와 포교소, 정착지를 만들었다. 이후 발견된 금광이 당시 발견됐다면 이 곳도 남미의 스페인 식민 도시처럼 번성했을 것이다. 북미 서쪽 지역은 스페인 식민지로 굳어져서 지금의 미국 지도는 크게 달라졌을 수 있다. 이후 영국인 등이 북미 동쪽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영국의 식민정책에 항거, 독립전쟁을 통해 미국을 건국했다. 건국 당시만 해도 원주민들의 땅이었던 미 서부는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지금의 루이지애나주보다 훨씬 방대한 지역)를 매입한 이후 점차 미국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1849년 골드 러시 전까지 스페인 정착촌은 벽촌으로 남아있었다. 골드 러시는 벽촌 샌프란시스코를 일약 국제적인 도시로 변모시켰다. 광산업자와 노동자, 기업가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의 출신도 아시아와 남미, 유럽, 북미 동부 지역으로 다양했다.

 

 

금문교는 4년의 공사 끝에 1937년 완공됐다. 최고 수준의 건축 공학이 낳은 걸작이다. 샌프란시스코만의 사회, 경제적 지형도를 급변시킨 촉매가 됐다. 매년 4000만대의 차량의 오간다고 한다.

 

 

  

                                                   금문교에 내걸린 쇠줄 모형.

 

 

  

 

 

 

 

 

 

 

 

 

2006년 가을에 찾은 샌프란시스코  

 

 

 

 

 

 

 

 

 

 

 

 

 

 

 

 

 

 

 

 

 

 

2020년 9월 산불이 덮친 샌프란시스코

 

9일 금문교 주변이 자줏빛이다. 미국 서부 해안의 3개주에서 40여건의 산불이 연쇄적으로 발생, 인근 지역 하늘로 날아오른 산불 미세 입자가 만들어낸 현상이다. 이 모습을 직접 본 미국인들은 "화성에 온 것 같다"고 말했다. AP연합뉴스

 

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로빌의 비드웰바교가 산불 연기에 휩싸여 있다. AP연합뉴스

 더우시죠?

시원한 여행 스케치 한 점 올립니다.

 

 1차 대전의 와중인 1915년 10월 12일.

나치 처형대가 한 여인을 총살했습니다.

영국 출신 간호사 에디스 루이자 까벨입니다.

브뤼셀이 독일에 함락됐을 당시 그녀는

연합군이든 독일군이든 가리지 않고 부상병을 간호했습니다.

브뤼셀이 독일에 점령된 후에는

연합군 병사 200여명의 탈출을 도왔습니다.

생명을 구하는 것이 소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치가 그녀에게 적용한 죄목은 간첩죄였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던 여인의 죽음.

이듬해  3월 캐나다 정부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캐나다 아싸바스카 계곡에 자리잡은

웅장한 산에 그녀의 이름을 헌사했습니다.

식민 이전의 원주민들은 ‘흰색 유령’이라고 부른 산.

캐나다 로키 산맥의 자랑인 그 산은

이후 에디스 까벨산이 됐습니다.

 


 

 캐나다 재스퍼 국립공원 남쪽 입구에 위치한 까벨산은

단체 관광으론 접근할 수 없는 곳입니다.

까벨산 빙하를 직접 만져보기 위해서는

13km의 좁은 길을 타고가야 하는데

승합차 이상은 통제되기 때문입니다.






 가는 길의 생김새는 사막에서 이동하는 뱀의 모습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내리 13km를 올라가다 보면

해발 3363m의 까벨산 정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길이 끝나면 주차하고

그 곳부터는 만년설이 뒤덮인 정상 부근까지 걸어야 합니다.

가는 길 옆으론

먼 옛날 빙하가 이동하면서 만들어 놓은

험준한 절벽이 인상적입니다.








가는 길에

숨도 고르고 빙하도 감상할 수 있도록

의자가 마련돼 있습니다.

 


빙하 밑까지 걸어가면

빙하 녹은 물이 웅덩이를 이루고 있습니다.

 


가까이 가면

웅덩이에 빙하가 둥둥 떠있고요.

 

 


고생 끝에 다다랐으니

빙하 들고 기념 사진 한 장.



 정상 부근의 요 빙하는

 천사처럼 생겼다고 해서

 천사 빙하입니다.

 


 돌아 나오는 길은

 언제나

 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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