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1910년 일제의 조선 병탄과 1945년 일제로부터의 광복,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은 나라의 명운을 가른 분기점이었다. 올해는 광복 70돌이다. 사람의 일생으로 보면 고희(古稀)다. 지난 70년은 식민의 족쇄를 끊어내고 부강한 나라를 이루기 위해 질주해온 분투(奮鬪)의 역사였다. 온 국민의 피와 땀으로 대한민국은 세계 굴지의 중견국 반열에 올랐다. 올해는 분단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내부의 힘을 결집해 통일국가를 이루고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할 사명이 7000만 한민족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광복·분단 70년을 맞이해야 하는가. 하영선(68)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은 본지와의 신년 대담에서 “부강국가 건설이라는 지난 70년의 목표를 대체할 새로운 표준을 세워야 한다”면서 “새로운 표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도 그룹, 새로운 리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통일과 선진국 도약을 이뤄야 할 우리에게 광복·분단 70년의 의미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1870년대 중반 이전까지 우리는 중국 중심의 질서 속에서 동방예의지국을 꿈꾸며 살아왔다. 그러다 1870년대 들어 소위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지만 일본에 강점당해 독자적인 근대화 과정이 중단됐다. 지난 70년은 광복 이후 근대국가 건설, 부강국가 건설을 위해 숨가쁘게 달려온 기간이었다. 이제 부강국가 건설이라는 19세기 중반의 표준이 바뀌고 있다. 정치권을 비롯해 우리 모두가 지난 70년을 성찰하고 새로운 70년의 비전을 세우는 2015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광복 70돌의 시점에서 새롭게 설정해야 할 표준은 무엇인가.



“21세기 환경에서 부국강병은 통일과 선진국 도약을 위한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부강국가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나는 ‘복합(複合) 국가’를 제창하고 싶다. 경제, 군사 중심으로 뛰어온 지난 세월은 한계에 이르렀다. 경제, 군사만이 아니라 문화, 생태환경을 횡적으로 엮는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문화국가, 환경국가가 되지 않고는 더 이상 21세기의 선도국가가 될 수 없다. 지식력(力)의 기반 위에 문화·환경력이 더해지고 그 위에 경제·군사력, 통치력이 차곡차곡 쌓인 다보탑을 상상해보라. 이런 새로운 표준을 누가 먼저 세우느냐에 따라 향후 70년, 140년 이후의 고지에서 동아시아의 지형도가 새롭게 그려질 것이다. 새로운 표준을 세울 수 있는 새로운 지도 그룹이 필요하고 이를 선도할 수 있는 리더가 절실하다.”



―세계일보가 신년을 맞아 각계 전문가 100명을 상대로 광복 이후 70년간 한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국내외 인물 세 사람을 주관식으로 물었다.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이 박정희, 김대중, 이승만 전 대통령 순이었다.



“해방이라는 공간이 주어졌을 때 우리에게는 부강국가 건설이란 절체절명의 과제가 주어졌다. 그때 우리가 사회주의 계획경제 모델을 선택했다면 70년 후 어디에 서 있었을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선택은 옳았던 것이다. 박정희라는 지도자는 일정한 부작용이 있더라도 일단은 산업화로 가야겠다는 확고한 목표를 갖고 나라를 이끌었다. 두 사람은 모두 독재와 권위주의라는 결함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으로 남북 교류협력은 확대됐지만 남북관계의 본질적 변화라는 측면에서는 낙관한 측면이 있다. 우리가 되돌아본 70년은 서구의 400∼500년을 압축적으로 살아온 기간이다. 비교사적으로 보면 이 정도 희생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했다는 점을 과소평가할 이유가 없다.”



―압축 성장의 부작용이 곳곳에서 분출되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보수와 진보, 좌우라는 표현은 더 이상 21세기 상황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한 세대 이전의 잣대들이다. 1980년대 진보의 가치로는 2010년대의 진보를 이야기할 수 없다. 보수나 진보 모두 국제관계나 남북관계가 변화하고 있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소위 지도자라는 인사들이 국민을 리드하기보다는 국민 뒤에서 발목을 잡고 있다. 시대의 조류를 따라잡는 새로운 안목의 지도자가 없는 탓에 정치가 3류로 전락했다. 새로운 안목을 갖춘 주도 세력이 한 번은 등장해야 대한민국의 국운이 융성할 수 있다.”


―새해에는 민족 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을 만나서라도 남북관계의 물꼬를 터야 하지 않나.



“역대 정부의 대북정책이 냉온탕을 반복하면서 지금은 남북정상회담으로도 해법을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활로는 공진(共進·co-evolution)의 길이다. 남북이 함께 진화하는 것이다. 소위 진보라는 입장에서는 북이 어떻든 그냥 한 번 해보자는 주장을 편다. 그렇지만 남북 공진의 원칙으로 변환하지 않으면 남북정상회담도 돌파구가 될 수 없다. 변환의 톱니바퀴는 북한이 먼저 돌려야 한다. ‘핵·경제 병진(竝進)’으로는 안 된다. 북한이 핵·경제 병진론을 고수하면 21세기 중반의 무대에서 북한이 설 수 있는 공간은 없다. 북한은 1970년 전후로 남한에 추월당한 뒤 사실상 한 세대를 허송세월한 것이나 다름없다. 두 세대 정도 그러면 대개 망한다. 북한은 중국이 78년부터 한 세대 동안 두자릿수의 성장을 기록했던 길로 나서야 한다. 북한이 ‘비핵(非核)·경제 병진’으로 움직일 조짐이 보이면 우리도 톱니바퀴를 빨리 돌려야 한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한반도는 통일된 민족국가 완성이란 무거운 숙제도 안고 있습니다.



“남북이 해방 국면에서 통일됐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사용하는 ‘재통일(reunification)’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21세기 통일은 ‘신통일(new unification)’이 되어야 한다. 근대 부강국가 시대에는 이탈리아나 독일의 경우처럼 내부 결합을 통한 독립으로서의 통일이 중요했다. 21세기엔 그런 차원의 통일만으로는 안 된다. 한반도를 넘어서 동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적 차원까지 아우르는 통일이 아니면 통일 한반도가 21세기의 주역이 되기 어렵다. 남북이 합쳐봐야 우리가 가진 힘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동아시아판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우리가 설 자리가 달라진다. 간신히 통일을 이뤘는데 동아시아, 세계 차원에서 접목되지 않은 통일이라면 통일의 시너지를 폭발시킬 수 없다.”



―중국의 부상으로 동북아에서는 미·중의 패권 경쟁이 가열되고 있다. 이런 국제 질서 속에서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통일 역량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외교 전략을 구사해야 하나.



“경제 부문에서 일본이 2010년 중국에 추월당했다. 2020년 상반기에는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다들 예상한다. 그런데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최근 “미국이 21세기에도 세계를 리드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 질문은 잘못됐다. 미국이 어떻게 리드할 것이냐고 물어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21세기의 힘은 ‘복합력’이다. 중국이 국내총생산(GDP)에서 미국을 따라잡았다고 해서 중국이 판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한국과 같은 미들파워 입장에서는 70년, 140년 앞을 내다보고 형세를 읽어야 한다. 섣부르게 ‘연미연중(聯美聯中)한다’는 식의 표현을 하면 안된다. ‘안보는 미국이고, 경제는 중국’이란 말도 10년 전에나 통했던 문법이다. 미·중이 갈등,협력,공생하는 영역을 예리하게 관찰해서 그에 적합한 대응 전략을 짜야 한다. 한·미·일의 전통적 연대는 중요하지만 냉전 시대처럼 중국을 배제하기보다는 중국을 끌고 갈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정리=김민서 기자, 사진=남정탁 기자

2006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의 아제르바이잔 방문에 동행했을 당시 수도인 바쿠에서 한국어가 유창한 현지 대학생들과 조우한 적이 있다. 바쿠 국립대 학생들이라고 소개한 이들은 대화 도중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배우면서 한국을 동경하게됐다”고 말해 기자를 감동시켰다. 문화교류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한 경험이었다. 바쿠 국립대에 개설된 한국어와 한국학 과목은 KF(Korea Foundation·한국국제교류재단)가 파견한 한국 객원교수가 담당한다. KF는 한국어·한국학 진흥, 문화예술교류, 인적교류 및 지한파 육성 활동 등을 통해 정부의 외교활동을 지원하는 외교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한국의 친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유현석 KF 이사장을 지난 19일 서울시 중구 KF문화센터 집무실에서 만났다.


 

 


―국제교류재단 대신 ‘KF’로 부르는 게 더 기억하기 쉬운 것 같다. KFC(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에서 C만 빼면 되니….

“다른 데서도 그런 말을 들었다. 두 번 들었으니 바꿔야겠다. 국제교류재단은 지자체마다 다 있다. 비슷한 게 너무 많아 국민들이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잘 모른다. 외교부는 할 수 없는, 해외 싱크탱크 지원이랄지,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이런 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예산 배정에서 밀리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의 대외원조 활동도 한국의 국격(國格) 향상에 도움이 되지만 한국어를 포함해 문화적으로 한국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는 일도 중요하다. ”

―KF와 코이카 예산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

“우리가 500억원 정도이고 코이카가 6600억원 정도다. 코이카는 올해 600억원 늘었다.”

―코이카의 10분의 1 수준인데 국회나 정부가 KF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 같다.

“솔직히 국제사회에서 정치적으로는 KF가 중요하다. 원조는 수혜국 입장에서 별 느낌이 없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중남미 어느 나라는 중국이 쏟아붓는 원조에 비해 소액에 불과한 우리의 원조를 그다지 감사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KF의 초청 대상 인사들은 1주일만 한국에 머물다가면 모두 한국의 팬이 된다. 아프리카 초청 인사는 대부분 대통령급 인사다. 그러면 그 나라 주재 한국대사는 일하기가 아주 편해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코이카의 원조 활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국제사회 지도층, 오피니언 리더를 움직이는 KF의 활동도 중요하니깐 어느 정도는 (예산 배정 등에서)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올 예산안 편성 때 좀 더 배정해달라고 요청하지 그랬나.

“예산은 예산당국의 논리가 있다. 중요하다고 설명하면 지금 중요하지 않은 예산이 어디 있느냐고 한다. 대통령 관심 사업이라고 해도 똑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다행히 지금 국회 상임위에 한국학 지원(15억원), 지자체 국제교류 역량강화 사업 예산(7억원)이 올라가 있다. 그런데 살아돌아올 확률이 높지 않아 걱정이다. 그동안 한국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지역에서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신청이 쇄도하고 있다. 한국학 지원 예산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예산이다.”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인가.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 지역이다. 이들 지역에서 한국 드라마, 한국 가수가 인기를 끌고 ‘한류(韓流)’ 열풍이 불면서 한국어과, 한국어 강좌를 개설해달라는 신청이 들어오고 있는데 예산 문제로 10개가 들어오면 1개도 해주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그런 나라들의 대학에 한국어 강좌 하나 개설하는 데 비용은 얼마나 소요되나.

“강좌를 열려면 일단 교수가 있어야 하는데 가장 싸게 보내는 게 객원교수를 보내는 방식이다. 그러면 1년에 6만달러 정도 필요하다. 우리가 5, 6년 계약해서 그 교수의 인건비를 지원하면 해당 학교에서 종신직으로 고용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최근 우리와 관계가 악화된 일본에도 공을 들이고 있나.



“일본은 주로 민간 차원에서 고위 인사, 학생 초청해서 하는 문화교류다. 정무적인 부분은 조금 어렵다.”

―내년은 한·일 국교 수립 50주년이다. 경색 국면을 풀어내기 위한 민간 차원의 노력이 요구된다.

“양국 국민으로 한·일합창단을 만들어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제3국에서 공연하기로 일본국제교류기금과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한·일합창단 프로그램 관련해서 우리는 외교부 승인을 받았는데 일본국제교류기금은 아직 일본 외무성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다.”

―양국 국민이 화합의 노래를 부르겠다는데 일본 정부가 안 해줄 이유가 있나.

“그렇죠. 그런데 아직까지 오케이 안해서 (일본국제교류기금 측에) 승인 못 받으면 다른 일본 파트너를 찾겠다고 얘기했다. 실제 한·중·일 3국이 함께하는 민간교류 프로그램이 여러 개 있는데 일본이 소극적이다. 한·중·일 예술인 공연도 지난해 일본이 참가하지 않아서 한·중 두 나라만 했다. 3국 미술전에도 일본은 잘 안 온다.”

―중국 쪽 민간교류는 어떤가.

“중국과는 활발하다. 고위급 포럼도 있고 초청사업도 많다. 중국은 매우 적극적이다. 교류 프로그램을 만들기만 하면 참여하겠다고 한다. 돈 걱정도 하지 말라고 한다. 이 기회(한·일관계가 소원한 계기)에 우리를 끌어안으려는 중국의 외교 공세가 느껴진다.”

―KF 입장에서 좀 조심스럽겠다. 외교부에서 말리는 일은 없나.

“그렇지는 않다. 교류는 좋은 것이다. 외교부도 정치색 들어가는 교류는 경계하지만 중국에서 요구하는 것은 대부분 인적교류다. 중국 내 혐한(嫌韓)감정 등 양국 간에는 오해가 많다. 중국은 인적교류를 많이 하려고 한다. 중국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일본은 굉장히 조심한다.”

―이러다가 한·중관계가 한·일관계보다 더 좋아지는 상황이 올 수 있겠다.

“민간 차원의 인적교류가 늘어난다고 해서 정무적으로 바로 연결될 것 같지는 않다. 외교부도 그렇고 저희 사업 방향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한·일관계는 굉장히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움직인다. 우리도 일본과의 사업을 강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번에 한·중·일 차세대 포럼이 중단된 지 6년 만에 살아났다. 3국의 45세 이하 국회의원, 언론인, 기업인, 문화계 인사, 시민사회 인사 등이 참석 대상이다. 이들이 3박4일씩 세 나라에 머물면서 교류하는데 12일 정도 하루종일 붙어다니면서 찜질방에도 가고 술도 먹고 하면서 어울리다 보면 정말 친구가 된다.”

―KF가 차세대 리더들에게 공을 들이고 있는 것 같다.

“차세대들은 사고가 열려 있고 한국에 대한 인상이 기본적으로 좋다. 올드 제네레이션은 한국 하면 가난, 전쟁, 독재를 떠올린다. 차세대들에겐 이런 게 없다.각국 의회 보좌관, 국무성 초급 관리 등을 초청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최근 KF가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 이어 브루킹스연구소에도 ‘코리아 체어(한국석좌연구직)’를 개설했다.

“미국은 한국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나라다. 앞으로 우드로윌슨센터와 미국외교협회(CFR) 등에도 한국센터를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이런 걸 만들려면 처음에 기금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300만달러 정도가 필요하다. 한국 기업들의 적극적 참여가 필요하다. 미국 싱크탱크 지원 관련 예산은 연간 7억원으로 일본의 10분 1 수준이다. 차세대 전문가 그룹은 중장기적으로 미국의 대(對)한반도 정책 및 미국 내 한국 관련 여론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므로 미국 내 지한 네트워크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차세대 한국정책전문가를 육성하는 싱크탱크 사업 강화가 시급하다.”

―현재 준비 중인 사업은.

“국내에는 150만에 이르는 국내거주 외국인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의 노력 여부에 따라 한국에 우호적 또는 적대적이 될 수 있다. 이들 국내거주 외국인에 대한 체계적, 통합적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정리=김청중 기자, 사진=남정탁 기자

◆ 유현석 이사장은… ▲1963년생 ▲서울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미 노스웨스턴대 정치학 박사 ▲중앙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국무조정실 정책평가위원, 외교통상부 자체평가위원,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올해 노벨평화상을 받은 파키스탄 소녀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2012년 10월9일 통학 버스 안에서 총에 맞았다. 이슬람의 악성 변종인 탈레반은 여자가 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말랄라의 얼굴에 총을 쐈다. 한때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장악했던 탈레반은 이슬람 근본주의로 포장된 야만의 세력이다. 화석화된 이슬람 율법을 강요한 탈레반은 주민에게서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자유, 공부할 수 있는 자유, 토론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았다. 말랄라는 저서에서 기회만 있었다면 자신에게 총을 쏜 두 남자에게 “왜 우리 여자들을, 당신의 누이와 딸을 학교에 보내야만 하는지 설명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반은 열다섯 살 소녀의 자유를 향한 열망을 향해 총을 쏜 것이다.

 



자유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말랄라 뒤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말랄라는 “아들이 태어나면 축포를 쏘고 딸이 태어나면 커튼 뒤에 숨기는 나라, 그저 요리를 하고 아이를 낳는 일이 여자의 평생 역할인 나라”에서 태어났다.(‘나는 말랄라’·문학동네) 여성 천시는 그가 속한 파슈툰족의 문화였다. 하지만 말랄라의 아버지는 달랐다. 말랄라가 태어나자 남자들의 이름만 적힌 족보에 말랄라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남 보란 듯이 딸의 이름은 아프가니스탄의 위대한 여걸 이름인 말랄라이를 따서 지었다. 주변의 손가락질과 탈레반의 위협을 무릅쓰고 딸을 학교에 보냈다. 아버지는 항상 “말랄라는 새처럼 자유롭게 살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여행을 좋아했던 동독의 물리학자 앙겔라 메르켈은 60세가 되면 미국에 가겠다는 소망을 품고 살았다. 구동독 정권 시절엔 연금 수령 개시 연령인 60세가 돼야 서방국으로 여행을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어린 시절 영화와 책을 통해 미국을 접하며 미국에 대한 그리움을 키웠다고 한다. 메르켈이 꿈꾼 것은 자유의 정신이었을 것이다.

마치 ‘신의 한 수’가 작용한 듯이, 냉전의 얼음이 녹기 시작하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메르켈의 미국행 꿈은 24년이나 앞당겨 실현됐다. 독일이 통일을 이룬 뒤 메르켈은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최초의 동독 출신 총리가 됐다. 35년 동안 억압된 체제에서 살아온 메르켈에게 자유는 어떤 의미였을까. “자유는 내 평생 가장 행복한 경험이다. 자유만큼 나를 감탄시키고 격려하는 것은 아직 없다. 자유보다 더 강하게 나를 만족시키는 좋은 감정은 없다.” (‘위기의 시대 메르켈의 시대’·책담)
메르켈의 뒤에도 아버지가 있었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메르켈이 태어나자마자 동독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딸이 동독의 억압 체제 하에서 자유를 꿈꿀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는 언젠가 언론 인터뷰에서 “동독만으로도 이미 압박은 충분했다. 집에서만큼은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시대착오적인 3대 세습독재 체제와 이웃해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말랄라와 메르켈이 꿈꾼 자유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북한 내에도 수많은 메르켈과 말랄라가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며 살고 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수많은 탈북민들이 그 증인이다.

인간이 평생을 바쳐 완성해야 할 여러 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그 자신이라고 ‘자유론’의 저자인 존 스튜어드 밀은 역설했다. 자유가 없이는 개성의 완성이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지난 시절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했던 이유 중 하나도 그들이 우리의 자유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국회가 ‘북한 인권법’을 제정해 북한 내 인권 침해범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일본군 성노예(위안부) 강제동원 사실(史實)을 인정하고 피해 할머니들에게 사과해야 하는 이유도 매한가지다. ‘자유’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문명사회에 부여된 제1의 도덕적 책무이기 때문이다. 과거 군사독재정권까지도 ‘자유’의 기치를 내건 탓에 우리 사회에서 ‘자유’에 담긴 본래의 의미는 심하게 왜곡됐다. ‘자유’를 전면에 내세운 단체가 스스럼없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태를 보이는 곳이 자유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말랄라의 노벨상 수상이 자유의 가치와 한계를 성찰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영화 ‘명량’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불현듯 김종대(66·사진)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떠올랐다. 그는 1975년 봄 책방에서 노산 이은상 선생이 쓴 ‘충무공의 생애와 사상’을 접한 뒤 39년 동안 이순신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저서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를 쓰고 이순신 강연을 다니고 ‘이순신 스쿨’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사람들은 그를 ‘이순신 전도사’로 불렀다. 영화 ‘명량’의 흥행 돌풍에 그의 입은 귀밑까지 찢어졌으리라. 7일 부산에 살고 있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배우 최민식이 열연한 ‘명량’의 이순신이 그가 그린 이순신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자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명량’을 보면서 영화 속 이순신과 저서 속 이순신이 동일 인물처럼 느껴졌다.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원인이 역사적으로 규명이 안 됐다. 일본은 패배한 이유를 모른다. 이순신은 명량해전 전날 저녁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가르쳐 줬다고 썼다. 명량해전 승리 후에는 ‘이는 실로 천행이었다(此實天幸)’고만 했다. 나는 그 신인이 무슨 얘기를 했을까, 오래 고민했다. 이순신의 내면 세계를 추측해봤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다.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하려는 이순신의 정성이 지극해서, 하늘을 움직인 것 아닌가. 이순신은 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명량’을 만든 김한민 감독의 생각이 나와 같았다.”

―‘명량’ 제작 과정에 참여했나.

“헌법재판관 시절인 2년 전쯤 우연찮게 김 감독과 국밥집에서 만났다. 나의 이순신 강연을 들었던 김 감독의 형이 다리를 놨다. 명량해전을 소재로 한 영화 ‘명량, 회오리 바다’를 기획 중이라고 했다. 김 감독은 내 책을 읽고 확신을 가졌다고 했다. 김 감독과 나는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원인에 공감했다. 김 감독은 내가 지은 시(詩)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명량’을 찍었다고 한다.”

김 전 재판관의 저서 ‘이순신’은 이 시로 끝난다. ‘한산 바다 거북전선/적의 탐욕 응징했고/명량 바다 열두 전선/배달 불꽃 되살렸네/…/영웅으로 태어나서/성웅으로 돌아가니/거룩하다 님의 생애/죽었어도 살았도다!’ 김 감독은 최근 김 전 재판관의 저서를 소개하는 글에서 “12척 대 133척, 이 불가사의한 승리를 영화로 만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왔다. 이 책은 막연했던 영화 ‘명량’에 강한 확신을 주었다”고 썼다.

―‘명량’이 연일 관람객 동원 기록을 경신해가고 있다. 흐믓하겠다.

“김 감독을 도와서 ‘명량’을 명품으로 만들어서 10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다면 내가 백번, 이백번 강연해서 몇 만 명에게 이순신을 알리는 것보다 더 이순신을 국민에게 가깝게 맺어주는 것 아니겠나. 김 감독이 소중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명량’ 촬영 전에 지내는 고사(告祀)에도 참석했고 촬영 현장도 찾았다. 김 감독을 만난 뒤로는 이순신 강연에서 주로 명량해전을 주제로 삼았다. 강연 말미엔 김 감독 자랑과 영화 ‘명량’ 선전을 잊지 않았다.”

―‘명량’의 흥행 성공 저변엔 영화 외적인 뭔가 깔려 있는 것 같다.

“우리 국민이 이순신 같은 인물을 갈망하기 때문에 더 열광하는 것 같다. 자기의 명예, 심지어는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백성을 살리고 나라를 지켜내려는 지극한 나라 사랑과 위험하고 어려운 일일수록 솔선수범해 정성을 다하는 지도자 이순신의 무한책임의식이 국민의 마음에 울림을 만들어냈다고 본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 도망친 선장이나 GOP(일반전초) 총기난사 사건 당시 도망친 군 간부도 앞에 놓을 가치와 뒤에 놓아야 할 가치를 전도시켜 자기만 살고 보자 해서 도망간 게 아닐까. 전도된 가치를 바로잡을 약재로는 이순신 정신이 가장 큰 보약이라 생각된다.”

―영화 ‘명량’이 떴으니 책도 많이 팔릴 것 같다.

“출판사에서 신문에 광고를 내기 시작했다.(웃음) 지금까지 3만5000부 정도 팔렸는데 인세는 1원도 받지 않았다. 인세로는 ‘이순신 아카데미’도 운영하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이순신 독서감상문 행사도 개최한다.”

그 말을 듣고 책을 확인해보니 ‘수익금 전액은 충무공사상 선양기금으로 사용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부박한 질문을 던진 기자는 민망해졌다.

―‘이순신 아카데미’는 뭔가.

“누구나 이순신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만든 이순신 강좌다. 원래는 남녀노소 누구나 이순신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이순신 학교’를 만들 계획이었다. 세월호 참사나 군 총기·폭행 사건도 인성이 바로서야 해결되는 문제다. 교육부가 추진하면 힘을 받을 것 같아서 6년 전쯤 교육부에 문의했다. 서너 달 뒤에 ‘참 훌륭한 생각이다. 그 문제는 두고두고 연구하겠다’는 답신이 왔다. 지금도 연구 중인지 답신은 없다. 그러던 차에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순신은 자조정신을 강조했는데 내가 너무 정부에 의존하려 하지 않았나. 이순신이 저를 나무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선 손쉬운 일부터 해보자고 시작한 게 이순신 아카데미다.”

-영화 ‘명량’의 감상평을 말씀해주신다면.

“우선 재미있고 현실감있게 전투를 재현해 낸 작품으로 작품 자체로서 완성도가 높아 보인다. 제가 그 영화를 보며 주목한 것은 김한민감독이 명량해전의 조선 수군의 승리원인을 어떻게 그려내는가 였는데, 조선수군이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 장수 이순신은 어떻게 했는가 하는 것을 찾아가는 진지한 노력이 있었다고 보인다. 사실 명량승첩의 사실을 밝힐 객관적 사료가 없기 때문에 상당부분 상상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김감독의 추리는 전체적으로 훌륭했다고 본다. 나는 쓰러져가는 대장선을 백성들이 힘을 합쳐 바로 세우는 장면이 멋졌다.”

-어떤 계기로 이순신에게 매료가 됐나.

“특별한 이유는 없다. 군법무관시절 이순신을 주제로 강연준비를 하면서 운명적으로 빨려 들어갔다고나 할까요. 지금 와서보니 사회적 병리현상에 관심을 가져오던 중 그 병을 낫게 할 치료제를 이순신에게서 찾을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서 이순신 공부가 지속되었다고 생각된다.” 

-정치권을 비롯, 국가적 리더십이 국민의 불신을 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순신의 진면목이 더욱 빛나는 것 같다. 이순신의 삶이 이 시대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모든 지도자는 자신들의 사사로운 가치나 욕심앞에 항상 우리 모두에 대한 공공의 가치와 이익을 놓는, 즉 목숨바쳐 나라사랑하는 지도자, 맡은 바 정성을 다해 공적책임을 완수하는 지도자들이 많아져야 오늘날 이 국가사회가 아픔에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서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허점 찾기에 온갖 노력을 보았지만 단 한 군데 흠잡을 곳을 찾을 수 없었다”고 썼다. 세상에 흠이 없는 인간이 있을 수 있을까요. 문외한의 입장에서는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읽혔다.

“흠을 찾아내어 제가 과장된 표현을 한 점을 나무라 주시면 저도 영광이겠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이달 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을 계기로 조선의 17세기가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그 바탕엔 조선이 사대(事大)했던 명나라의 국력이 쇠하고 여진족의 후금(청나라)이 동북아 패권국으로 부상한 당시 정세가 중국의 굴기(堀起)로 미국의 동북아 패권이 도전받고 있는 작금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동북아 패권 지형도가 새로 그려질 때마다 우리가 생존의 기로에 서는 것은 대륙·해양 세력 사이에 낀 한반도의 지정학적 숙명이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의 저자인 명지대 한명기 교수가 서문에서 “병자호란은 ‘과거’가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일 수 있으며, 결코 오래된 미래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반추해야 할 ‘G2(미·중) 시대의 비망록’이다”라고 쓴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역사가 기록하고 있듯이, 17세기 조선의 국왕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후금은 '떠오르는 태양', 명나라는 '지는 해'로 봤기 때문이다. 반면 사대사상에 매몰된 조선 신료들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며 광해군에 맞섰다.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인조반정·1623년)한 조선은 친명 노선을 고수하다 끝내 대청(大淸)제국으로 강성해진 여진의 침략(병자호란·1636년)을 자초했다. 인조는 송파의 삼전도에서 오랑캐 수장이라고 멸시했던 청 태종 홍타이지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이다. 조선 백성은 인조나 조정 신료보다 더 참혹한 수난을 당했다. 청군은 철수할 때 조선 백성 수십만명을 끌고갔다.

                                                                                                     <삼배구고두례>


병자호란으로 능욕당한 조선의 원혼들은 21세기 한반도에 “자강(自强)만이 살길”이라고 통곡한다. 광해군은 말했다.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급하다. 이런 때에는 안으로 자강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가 했던 것처럼 한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았다. 광해군은 성곽을 쌓고 장병을 기르는 데 써야 할 소중한 재원을 궁궐을 짓는 데 탕진했다. 신료들은 틈만 나면 광해군을 흔들었고 광해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정적(政敵)을 내치는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후금군에게 격파된 이후에도 조선은 단결하지 않았다. 쿠데타로 광해군을 내쫓은 서인(西人) 정권도 입으로만 전쟁을 외쳤다. 전쟁은 준비하지 않고 화친(和親)만을 반대했다. 후금이 쳐들어오자 임금(인조)은 수도를 버렸고 장졸은 창을 버렸다. 군 최고통수권자와 지도층이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자 조선은 유린됐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6·25전쟁 때도 그랬다. 17세기 조선의 집권 세력은 임진왜란의 교훈을 잊었고 6·25전쟁 당시 이승만정부는 병자호란의 교훈을 잊었다.

17세기 조선이 취한 대외 전략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광해군 집권(1608년) 당시 조선과 명나라는 동맹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함께 치른 혈맹 관계였다.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침략에 맞서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再造之恩·재조지은)를 저버려선 안 된다는 여론도 팽배했다. 아직 후금은 요동 지역도 평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금나라가 강성해질 때까지 화친조약을 거부하며 항전했던 고려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 더 실리적이지 않았을까. 물론 이런 가정은 부질없다. 인조반정을 전후한 시점에 여진은 더 이상 명나라와 조선이 맞설 수 없을 만큼 강한 제국이 돼 있었다. 그렇다면 인조와 서인 정권은 현실을 직시하고 광해군의 실용주의 노선을 계승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이 또한 부질없는 가정이다.

조선은 시대착오의 대명사인 돈키호테처럼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모험주의로 치달았다. 정작 싸워야 할 때는 싸우지 않고, 더 이상 싸움이 무의미할 정도로 대세가 기울었을 때는 허상의 명분에 사로잡혀 치욕의 역사, 수난의 역사를 기록해 간 17세기 조선은 격동의 동북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선명한 반면교사로 다가온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아래 글은 삼전도비 현장을 찾은 중앙일보 장세정 논설위원의 글. 중앙일보 2020년 6월8일자.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555m 롯데월드타워 옆 3.95m 삼전도비 '패권 싸움 흑역사'

 

지정학이 초래하는 구조적 비극은 언제든 되풀이될 위험이 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은 예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미·중 패권 경쟁이 과열되는 지금, 대륙 패권을 놓고 명·청이 다투던 400년 전 17세기 조선에 눈길이 쏠리는 이유다.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에서 교훈을 얻자는 '다크 히스토리(흑역사) 투어' 차원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관련된 두 유적지를 답사했다. 하나는 임진왜란(1592~1598) 당시 군대를 보내준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보답하겠다며 친명 사대주의 의리를 다짐한 만동묘(萬東廟)다. 다른 하나는 병자호란(1636~1637) 때 남한산성의 굴욕을 생생하게 기록한 삼전도비(三田渡碑)다.   

양난(兩亂)으로 불리는 두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 왕조는 건국 200년 만에 뿌리부터 크게 흔들려 당장 망해도 이상할 게 없는 지경이었다. 왜군과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힌 백성은 어육(魚肉)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명·청 교체기에 대외 전략 오판이 자초한 삼전도비와 만동묘는 동전의 양면이다.
  
 ①만동묘, 조선시대 친명 사대주의 상징
 지난 3일 충북 괴산의 만동묘를 찾아 나섰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로 2시간, 다시 차로 30분을 달렸더니 조선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은거하던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당도했다. 

사실 송시열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이 발탁한 인재였다. 하지만 최명길의 대척점에 있던 척화파 김상헌처럼 숭명배청(崇明排清) 노선을 걸었다.  
 병자호란 이후 1644년 명나라가 멸망했는데도 송시열은 화양구곡( 華陽九曲)의 명당자리에 만동묘를 짓도록 했다. 선조 때 터진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 만력제와 마지막 황제인 의종 숭정제의 위패를 송시열 사후인 1704년 만동묘에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경기도 가평 조종암(朝宗巖)에 선조가 남긴 만절필동(萬折必東) 네 글자를 송시열이 화양구곡의 첨성대 바위 절벽에 새겼고,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따서 만동묘라고 이름 붙였다. 만절필동은 황하 흐름이 수없이 꺾여도 결국 동쪽으로 간다는 뜻뿐 아니라 충신의 절개로 의미가 확장됐다.  
 만동묘로 올라가는 계단은 균형을 잡고 걷기 힘들 정도로 위태로웠다. 아래로부터 위를 향해 계단을 3칸, 5칸, 3칸, 5칸을 오른 뒤 맨 위에 황제를 상징하는 9칸 계단을 오르도록 배치했다. 임진왜란으로 망할 위기에 처했던 조선을 살려줬으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명나라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라는 의도가 숨어 있다. 
만동묘 유적을 몇 년 전에 답사한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전 한국정치사학회장)는 "계단 경사가 70도를 넘을 정도로 가파르고 계단 폭도 매우 좁다"며 "황제를 모신 사당이니 개처럼 기어서 올라가서 개처럼 기어서 내려오라는 무언의 압력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허영란 괴산군 문화해설사는 "계단이 하도 가팔라서 흥선대원군이 하인의 부축을 받고 올라가자 옆에 있던 문지기가 밀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고 전했다. 봉변당한 분풀이 차원인지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리면서 1865년 만동묘를 가장 먼저 철거했는데 이에 반발한 유림이 1875년 다시 세웠다.  
 명나라의 임진왜란 개입에 반감을 가졌던 일제는 1942년 만동묘를 불태우고 비석 건립 유래를 새긴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 글자를 정으로 모두 훼손하고 땅에 묻었다. 하지만 1983년 대홍수 때 비석이 다시 드러났고, 2004년 괴산 지역 유지에 의해 만동묘와 만동묘정비가 복원됐다.
 공교롭게도 만동묘의 존재를 널리 알린 것은 '친중 정권'이란 지적을 받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다. 2017년 12월 5일 당시 노영민 주중대사(현 대통령 비서실장)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인민대회당 방명록에 '만절필동(萬折必東) 공창미래(共創未來)'라는 글을 남겼다. 그의 본뜻은 우호 강조였겠지만 사대주의를 상징하는 용어 사용은 부적절했다. 더군다나 대사 부임 불과 8개월 전인 2017년 4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시진핑은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망언하지 않았던가.  
  
 ②삼전도비, 청나라에 항복한 굴욕 상징
지난 2일에는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와 함께 삼전도비를 찾아 나섰다. 김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남한산성'의 여운이 강렬했던 이유도 있지만, 굴욕의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석촌호수가 넓어 비석을 찾으려면 애를 좀 먹겠거니 생각했는데 뜻밖에 너무 쉽게 찾아냈다. 잠실 광역환승센터 2번 출구에서 석촌호수 공원 안으로 불과 20여m 걸어 들어가니 대한민국 사적 101호 '서울 삼전도비'가 눈앞에 들어왔다.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 새겨진 이 거대한 비석은 귀부(龜趺, 거북 모양의 받침)를 뺀 몸체 높이만 3.95m다. 32t 화강석을 충북 충주에서 캐낸 뒤 한강을 통해 배로 실어 날랐고 인부 400여명이 육지로 끌어서 옮겼다고 한다.
 명·청 교체기에 실리외교를 폈던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 세력들은 아무런 대비 없이 기울어가던 명나라를 섬기다 신흥 세력 후금(청)의 눈 밖에 난다. 김상헌의 척화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치열하게 대립했지만, 묘수를 찾지 못했고 끝내 굴욕적 군신 관계를 받아들여야 했다.  
 삼전도비 주변을 둘러보는 심정은 여러모로 불편했다. 병자호란이 터진 1636년 겨울 남한산성에서 약 50일간 농성하던 인조가 오랑캐로 여겼던 청 태종 앞에서 항복했다. 세 번 무릎 꿇고 아홉번 이마를 땅에 조아린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한 굴욕의 역사가 지금도 생생해 속이 불편했다.   

사실 삼전도비는 건립 과정과 건립 이후에도 수차례 수난을 겪었다. 청 태종은 비문을 조선이 직접 작성하도록 강요했고, 비석 크기를 문제 삼아 중간에 다시 제작하도록 했다.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의 관리들은 청나라에 머리 숙인 굴욕적 비문을 쓰지 않으려고 서로 떠넘겼다. 결국 문신 이경석이 쓴 비문에서 인조는 "내가 어리석고 미혹되어 하늘의 벌하심을 자초해 만백성이 어육이 됐으니 죄가 내 한 몸에 있다"고 했다.  
 청·일 전쟁에서 판세가 일본으로 기울자 고종은 사대주의를 상징해온 삼전도비를 아예 뽑아버리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1917년 일제가 다시 세웠고 해방 10주년이던 1955년 이승만 정부가 땅에 묻기도 했다. 
 이런 절절한 역사를 있는 그대로 설명해주는 유적 안내가 너무 부실했다. 부끄러운 역사라 감추고 싶었다면 근시안적 '역사맹(盲)'이다. 석촌호수에 놀러 나온 20대 젊은이들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배웠는데 유적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 어두운 역사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삼전도비 현장을 촬영하다 카메라 앵글에 삼전도비(3.95m)와 롯데월드타워(123층, 555m)가 동시에 들어와 깜짝 놀랐다. 무력으로 조선을 짓밟은 청나라의 강압으로 세운 삼전도비, 신중화주의로 무장한 중국에 의해 사드 보복을 당한 롯데가 세운 대한민국 최고층 빌딩. 인연인지 악연인지 그 둘이 지금 불과 100여m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서 있으니 이런 역사적 아이러니가 있을까.  
 삼전도비는 고증을 거쳐 2010년 4월 현재의 위치에 옮겨졌다. 2016년 7월 주한 미군의 사드 배치 방침이 발표되면서 중국의 사드 보복이 시작됐다. 롯데월드타워는 그해 12월 완공됐지만, 중국은 사드 기지 부지를 제공한 롯데를 부당하게 괴롭혔다. 군사 주권과 기업의 자율을 무시한 중국의 폭거였지만 한국 정부는 저자세다. 이 판국에 대통령은 "중국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 "한·중은 운명공동체"를 역설했으니 갸우뚱해진다.

신복룡 전 석좌교수는 "대한민국 최고층 빌딩을 배경으로 삼전도비를 바라보니 정보기술(IT) 최강의 나라가 아직도 소(小) 중화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갈라파고스 (거북) 증후군'에 빠져 있는 듯해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장은 "미·중 패권 경쟁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외교·안보가 까막눈이면 자칫 인조의 길로 갈 수도 있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해양세력과 연대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만동묘와 삼전도비가 우여곡절을 겪은 것처럼 한반도는 국제 질서 재편 때마다 시련과 능욕을 경험했다.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능력을 갖춘 나라가 됐다"(이수혁 주미대사)는 발언은 성급한 자만이다. 주요 11개국(G11) 가입을 거론하며 김칫국부터 마시지만, 망국의 그림자는 자만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태종과 세종 치세를 논하기에 앞서 선조·인조·고종의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역사의 거울에 지금의 우리를 차분하게 비춰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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