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4일 수교 21주년을 맞는 한·중관계가 도약기를 맞고 있다. 중국의 5세대 지도부인 시진핑(習近平) 체제가 들어선 이후 한·미와 북·중이 맞서는 기존의 대결 구도는 완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중국은 ‘새로운 대국 관계(新型大國關系)’를 외치며 미국과 함께 국제질서를 재편해 가고 있다. 그 저변에선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과 미국의 ‘아시아 중시’ 전략이 공조와 갈등의 변주곡을 울리고 있다. 중국의 부상은 한국의 응전 여하에 따라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절체절명의 위기가 될 수도 있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원하는 한국의 꿈은 중국몽과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양국의 동상이몽 끝에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이 ‘영원한 중국대사’로 불렀던 황병태(78) 전 중국주재 대사를 지난달 30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무실에서 만나 한·중이 만들어가야 할 미래를 물었다. 황 전 대사는 최근에도 중국식 국가자본주의에 주목한 저서 ‘침몰하는 자본주의’를 펴내며 중국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중국의 국력이 커지면서 미·중 사이에 놓인 한국의 전략적 대응이 그 어느 때보다 긴요해졌다. 전통의 한·미동맹 기반 위에서 한·중우호를 증진시켜야 한다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박근혜정부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나.

“이명박정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사건이 터졌을 때 이명박정부는 미국에만 연락하고 중국엔 얘기를 안 했다. 미국 핵항모인 조지워싱턴호가 중국의 안마당인 서해로 들어왔다. 중국은 한·미가 한묶음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명박정부는 미국의 앞잡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중국 내에서 북한을 객관화하려는 흐름이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북한은 중국의 전략적 완충지역이라는 종전의 인식이 되살아났다. 남한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견해가 퍼져갔다. 미국과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이해가 충돌하고 있지만 그런 문제로 전쟁까지 가진 않는다. 하지만 북한이 잘못되면 미·중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다. 천안함 사건 때처럼 북한이 미·중 간에 불화를 조장할 수 있다. 북한이야말로 미·중 갈등의 화약고다. 한국은 미·중과 함께 북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중국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북·중 관계가 순망치한의 혈맹 관계에서 정상국가 관계로 변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올 6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랜초미라지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은 우리 외교사의 대사건이다. 6·25전쟁 정전 60년 만에 미·중이 처음으로 북한문제(북핵 불용)에 공동 합의한 것은 중국이 이념국가, 진영국가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세계국가를 지향하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이제 중국은 세계적 견지의 바둑판을 보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북한의 김정은 3대세습체제는 시대착오적이다. 북·중 혈맹관계는 다 끝난 얘기다. 중국은 북한을 향해 보통국가로 변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북한의 선택지는 제한적이다. 스스로 개혁해서 살아남는 길, 고립 속에 망하는 길, 전쟁으로 자폭하는 길밖에 없다. 가장 바람직한 길은 미얀마가 택한 개혁·개방의 생존법이다.”

―북한이 체제를 위협한다고 믿고 있는 개혁·개방의 길을 선택하겠는가.

“시진핑이란 인물이 있어서 가능하다. 중국이 기름(원유)과 식량을 대주지 않으면 북한은 며칠 못 버틴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김정은(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불러서 ‘다 해보지 않았느냐. 사는 길은 개혁·개방밖에 없다. 내가 도와주겠다. 박근혜 대통령도 돕도록 하고 미국도 돕도록 하겠다’고 설득해야 한다. 북한이 걱정하는 체제 보장은 시 주석과 박 대통령,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해줄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미 미얀마 방식의 대북 해법을 얘기했고 중국도 그런 방향으로 나오고 있다. 북한은 그냥 두면 망한다.”

―북한이 망하면 한국 주도로 통일할 수 있는 기회가 오는 것 아닌가.

“보수 진영 일각에선 북한 (김정은 정권)을 망하게 하자는 것인데 그러면 부담이 너무 크다. 하루아침에 북한이 무너져도 보통 일이 아니다.”

―미얀마와 달리 북한은 핵 문제가 걸려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미얀마식 대북 해법도 북한의 선제적인 핵 폐기 조치를 전제로 하고 있다.

“북핵은 중국이 반대하면 무용지물이다. 지금은 (한·미가) 너무 북한의 비핵화에 매몰돼 있다. 북한은 중국이 반대하는 핵을 사용할 수가 없다. 북한이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핵을 사용하는 순간, 북한은 망한다. 개혁·개방이 되면 사람도 달라지고 나라도 달라진다. 중국과 미국, 우리가 같이하면 북한도 지금처럼 (핵개발) 할 수 없게 된다.”

―박근혜정부의 대북 구상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는 좀 다른 구상인 것 같다.

“박 대통령이 시 주석을 움직여 김정은을 개혁·개방의 길로 이끌도록 설득해야 한다. 비핵화를 넘어 그다음 단계로 가야 한다.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북한이 개혁·개방하지 않으면 한반도 통일은 어렵다. 지난 6월 한·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박 대통령 측에도 이런 구상을 전달했다.”

―이번 한·중 정상회담은 어떻게 평가하나.

“현재 상황을 관리하는 차원에 그친 회담이었다. 북한을 어떻게 관리해나갈 것인지, 통일 문제는 어떻게 다뤄나갈 것인지에 대한 미래 비전까지는 다루지 못한 것 같다. 중국이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 통일을 지지한다’고 했는데 우리 정부는 할 말을 못했다. 준비가 부족했다.”

―중국은 한국 주도의 통일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인가.

“중국은 한반도 통일에 반대 안 한다. 한국과 같은 정상국가로 한반도가 통일되길 원한다. 지금 세계가 가는 길은 먹고사는 길이다. 북한도 그렇게 되라는 것이 중국의 요구다. 중국이 처음 세상에 나올 때는 냉전 시절이었다. 미국과 대치하는 세상을 살았다. 지금의 중국은 이념·진영 논리에 갇힌 과거의 중국이 아니다.”

―시 주석이 김정은 제1위원장을 초청하지 않고 있다. 북·중 우호조약 폐기까지도 고려하고 있는 건가.

“시 주석이 언젠가 김정은을 불러서 북한이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할 것이다. 북한이 중국에 귀찮은 존재가 되긴 했어도 북·중 우호조약을 폐기하는 단계까지는 안 간다.”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유례없는 경제 모델을 실험 중이다. 지속가능한 모델이라고 보나.

“중국의 국가주도 자본주의를 모든 학자들이 변종이라고 본다. 종국엔 시장경제로 넘어오든가 다시 공산경제로 회귀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중국식 자본주의는 생명력이 있을 뿐 아니라 서구 자본주의의 대안체제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경제발전의 결과로 중산층이 두터워지면 공산당 영도를 근간으로 한 중국의 정치체제가 도전받을 수 있다. 우리도 산업화의 성공이 민주화 시대를 낳았다.

“일반적으로 그리 본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시절만 해도 원 총리가 직접 민주화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런데 시진핑 체제 들어선 뒤엔 민주화 얘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시진핑 지도부는 일당 지배의 정치와 자유주의 경제를 혼합한 리콴유(李光耀)의 싱가포르 체제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은 일당독재라고는 하지만 10년마다 물갈이되는 집단지도체제다. 일인 독재를 막기 위해 덩샤오핑이 만든 제도다. 지도부는 8000만 공산당원 중에서 엄선된다. 이른바 엘리트 민주주의다. 이 또한 서구식 민주주의와 다른 새로운 정치 모델이다. 동양적이다. 경제발전과 충돌없이 성공할 것으로 본다.”

―주중 대사 시절 ‘미·중 등거리 외교’를 주창,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발언 배경이 궁금하다.

“(93년 4월) 주중 대사로 부임해보니 베이징 대사관은 무역대표부 수준이었다. 중국 입장에선 한국은 무역 상대일 뿐 정치 문제를 논의하는 상대는 아니었다. 당시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북핵이 한·중의 핵심 현안으로 부상한 시점이었다. 그런데 중국은 정치 문제에선 북한만 상대하니 이래 가지고 무슨 외교가 되겠나. 94년 3월 김영삼 대통령 방중 기간에 기자들 앞에서 “북한 문제에 관해서 한국은 중국·미국과 등거리 외교하겠다”고 선언했다. 소환당할 각오로 했다. 국내에선 난리가 났지만 중국은 나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중국의 대접이 어떻게 달라졌나.

“내가 그 발언으로 고초를 겪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중국 정부가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덩샤오핑(鄧小平) 장남인 덩푸팡(鄧樸方)과는 막역한 사이가 됐다. 장쩌민 주석과도 자주 만났다. 95년 장 주석이 직접 송별연을 베풀어주면서 ‘황 대사는 중국 사람 마음속에 있는 영원한 중국 대사’라고 했다.”

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사진=이재문 기자

■ 황병태 前 주중대사 약력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하버드대 행정학 석사, 버클리대 정치학 박사 ▲외무고시 ▲경제기획원 운영차관보 ▲13·15대 의원 ▲2대 주중 대사(1993년 4월∼95년 12월) ▲경산대·대구한의대 총장 ▲저서 '경제주의의 종언','자본주의와 민주정치','유학과 현대화','박정희 패러다임','침몰하는 자본주의'

 

+아래는 중국의 경제 발전 전망과 관련, 황병태 전 대사와는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 인터뷰 기사  

<중앙일보 2013년 8월29일자>

중 사회과학원 연구 고문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

 

정덕구 이사장은 “중국은 그동안 절대 권력을 통해 관리를 잘 한 덕에 경제가 고성장할 수 있었지만 1인당 소득 1만 달러에 가까워지면 관리가 어려울 것”이라 말했다.

“중국 지식인들은 지금 반성 중이다. ‘베이징 컨센서스’라고 찬양하던 중국식 발전 모델이 한계에 부딪치면서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새로운 성장 모델을 찾기 위해 한국을 주시하고 있다.”

 정덕구 니어재단이사장(전 산업부 장관)은 “그동안 중국 경제를 이끌어 오던 투입에 의존한 성장 방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중국 학계·정계 고위 인사와의 교류를 통해 대륙의 속살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인물로 꼽히는 그는 중국 최대 싱크탱크인 중국사회과학원 연구 고문으로 위촉돼 활동하게 된다. 중국인민은행(중앙은행), 외교부, 재무부 등의 고위 관리를 대상으로 강연에 나설 계획이다. 다음 달 2일 취임을 앞둔 그를 만났다.

 - 중국 경제, 도대체 무엇이 문제라고 보는가.

 “핵심은 ‘모순적 결합’에 있다. 사회주의와 시장경제가 만나고, 농민공(농촌 출신 노동자)의 도시 진입을 장려하면서도 후커우(戶口·주거지 등록)제도가 그들의 발목을 잡는다. 정책 배합이 틀렸다는 자성론이 내부에서 일고 있다.”

 - 중국의 하드랜딩(경착륙)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문제는 경제가 아닌 체제에 있다. 체제 불안은 곧 경제의 하드랜딩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동안 고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절대 권력을 통해 관리를 잘 했을 뿐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현재 약 6000달러)에 가까워지면 국민은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게 돼있다. 당의 주민 관리는 점점 더 어려울 것이다. 정치가 불안하면 경제가 일시에 꺼질 수 있다.”

 - 시진핑(習近平)시대 중국의 과제는.

 “3개를 극복해야 한다. 첫째는 미국이다. 미국은 중국의 주요 자원 수송로를 장악하고 있다. 중국의 목을 쥐고 있는 형국이다. 중국이 얘기하는 신형대국관계는 곧 ‘미국에 도전하지 않을 테니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해 달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둘째는 국민을 극복해야 한다. 국민의 마음을 어떻게 잡느냐가 관건이다. 시진핑의 과제는 부패로 얼룩진 공산당을 깨끗이 만들어 국민들에게 내놓을 수 있느냐에 있다. 셋째는 중국적 가치를 극복해야 한다. 중국이 ‘G2’에 걸맞는 문명 국가가 되려면 보편적인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주변국을 포용해야 한다.”

 - 중국 지식인은 한국을 어떻게 보나.

 “한국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글로벌 위기를 잘 극복하고 있는, 주변에서 유일한 시장경제의 나라라는 점에서 그렇다. 금융 선진화 개혁을 이뤄내고, 글로벌 플레이어(기업)를 갖고 있는다는 점에서 참고할 모델로 생각한다. 다양한 교류를 통해 우리와의 경제적 동질감을 넓혀야 한다.”

글·사진=한우덕 중국연구소 소장

 
<조선일보 2013년 8월28일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의 속살을 만져 보게 된 기분입니다. 중국인들에게 한국의 경제적 성공만 얘기하지 않고, 금융에서 실패해 위기를 맞게 된 이유를 가감 없이 전달할 생각입니다."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26일 여의도 니어재단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나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사회과학원 연구고문에 위촉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중국사회과학원은 중국 최고 싱크탱크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가 선정한 아시아 최고의 싱크탱크이기도 하다.

정 이사장은 다음 달 2일 중국 베이징에서 연구고문 위촉식을 갖고, 향후 1년간 중국사회과학원 연구고문으로 활동하게 된다. 특히 9월 한 달은 집중적으로 중국 정부의 핵심 부처인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재무부, 외무부, 인민은행 등을 대상으로 공개 강연 4차례, 라운드테이블 방식 토론회 5차례를 갖는다. 정 이사장은 "이번 기회는 국가 발전 모델을 전환하고 있는 중국 정부를 대상으로 간접 컨설팅을 제공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위촉식에서 첫 번째 강연을 하게 되는데, 이 자리에서 중국이 앞으로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하려면 다리(bridge)를 4개 건너야 한다고 조언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건너야 할 첫째 다리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다리이다. 정 이사장은 "중국은 사회의 투명성과 법치를 강화하고 부정부패를 없애는 데 성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둘째는 시장 지배 구조의 다리다. 그는 "이제까지 중국의 성공 모델은 정부 주도로 경제를 직접 관리하는 것이었는데, 앞으로는 시장과 민간과 함께 가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셋째는 국제사회 리더십의 다리이다. 그는 "일본은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 때 자기만 살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아시아의 리더가 될 수 없었는데, 여기서 중국이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는 금융 개혁의 다리이다. 정 이사장은 특히 한국과 일본의 실패 지점이 금융이라고 강조하면서 "금융이 낙후되면 서방 세력의 도움 없이 성장이 불가능한데, 외국 자본 유출입을 잘못 관리하면 금융의 변동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며 "중국이 서방에 기대지 않는 독자 성장을 하려면 금융 개혁과 개방으로 금융 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중국사회과학원이 연구고문으로 영입한 이유에 대해 "중국 정부 내 개혁파와 보수파가 향후 중국 발전 모형에 대해 합의하지 못하자, 중국의 문제와 해법에 대한 외국인의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1997년 IMF 외환 위기 때 재정경제원 2차관보를 지낸 정 이사장은 "외환 위기의 경험을 보면 문제 해결을 위해서 정부는 단순한 메시지를 줘야 하고, 정부가 나서면 반드시 해결된다는 '신뢰'를 보여줘야 한다"며 "경제정책은 테스트를 하거나 실험해서는 안 되고 국민의 '신뢰'를 얻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중국에 얘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방현철 기자

 


北 핵무장은 美·中 공존 위협
동북아 갈등 막기 위한 고육책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2년 10월 중국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을 미 텍사스 크로퍼드에 있는 자신의 목장으로 초청했다.

북한이 미국에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추진 사실을 공개한 직후였다. 이로써 북핵 1차 위기를 봉합했던 제네바 합의 체제는 붕괴되고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 부시 대통령은 장 주석에게 “북핵은 미국뿐 아니라 중국에도 위협이 된다”면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압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장 주석은 “북한은 내 문제라기보다는 당신의 문제”,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일”이라면서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몇 달 뒤 부시 대통령은 장 주석에게 다른 방식으로 말했다. “만약 북한이 핵 개발을 지속하면 미국은 일본의 핵 개발을 막을 수 없다.” 그래도 중국이 움직이지 않자 부시 대통령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없으면 북한에 대한 군사조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다음에야 중국이 움직였고, 북핵 6자회담이 시작됐다고 부시 전 대통령은 회고록 ‘결정의 순간들’(Decision Points)에서 밝혔다.

6자회담 과정에서도 중국은 고비마다 북한 편을 들었다. 유엔 안보리가 대북제재 결의안을 준비할 때마다 한·미·일 3국은 북한을 싸고도는 중국을 설득하느라 바빴다. 그런 중국이 최근 들어 북한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지난 주말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만나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용인하지 않겠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워싱턴을 방문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오바마 대통령의 북핵 저지 노력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뜻이 없었다. 그 때문에 미·중 정상회담 실무팀은 정상회담 당일 새벽까지 공동성명 문구를 놓고 절충을 벌여야 했다. 미국은 “양국은 북한의 우라늄농축프로그램을 우려한다”는 표현에 만족해야 했다.

 

                                      <2013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 휴양지 서니랜즈에서 만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오른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중국의 북핵 기조 변경은 국익을 지키기 위한 고육책이다. 변화의 계기는 올 초 북한이 강행한 3차 핵실험이었다. 중국이 우려하는 것은 북한의 핵무기 자체보다 그것이 초래할 동북아의 갈등 상황이다. 핵무장에 성공한 북한은 동북아 핵 도미노 현상을 촉발시킬 것이다. 군국주의 역사를 지닌 일본의 핵 무장은 중국에게 재앙이다. 갈등의 대상이 미국이라면 중국에겐 악몽이다. 북한은 이미 63년 전에 6·25전쟁을 도발, 신생 중국을 강대국 미국과의 전쟁으로 끌어들인 전례가 있다.

신흥 강대국(독일)과 기존 패권국가(영국)의 갈등은 1차 대전을 불렀다. 아시아의 패권국으로 재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아시아로 중심축을 이동(pivot to Asia)시키고 있는 미국은 태평양을 무대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미·중은 경쟁하면서 협력해야 하는 모순의 관계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중국은 미국이 자신을 포위하는 억지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미국은 힘이 커진 중국이 자신을 아시아에서 몰아낼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그러면서도 미·중은 과거 독일과 영국이 실패했던 공존의 길을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다.

북한의 핵무장은 미·중의 공존을 위협한다. 미 국방부는 1994년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폭격 시나리오를 검토했다. 영변 폭격은 미국과 중국을 갈등 상황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저서 ‘중국에 대하여’(On China)를 마무리하면서 “미국과 중국이 전략적 갈등 상황에 빠지게 되면,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유럽과 비교할 만한 상황이 아시아에서 틀림없이 생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핵 무기에 집착하는 북한 김정은 체제는 중·미의 협력을 가로막는 최대 장애물이다. 북한과 ‘항미(抗美) 원조 전쟁’(6·25)을 함께 치른 중국이 북·중 관계를 재조정하고 있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다. 이달 말 이뤄지는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순망치한(脣亡齒寒)에 비유되던 전통적인 북·중 관계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미·중이 진지하게 공존을 모색하는 시점에 이뤄지는 것이다. 미·중 모두의 핵심 이해관계국인 한국에겐 외교의 공간이 확장됐다. 이 공간 속에서 어떤 성과를 만들어낼 것인지는 박 대통령의 몫이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올해는 6·25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6·25전쟁은 신생 대한민국에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 아래 한반도 공산화 계획을 진행시켰고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대책 없이 전쟁을 맞았다. 바람 앞의 촛불 같았던 대한민국은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했지만 국민은 참담한 고통을 당했다. 전쟁을 이끌었던 건국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극명히 엇갈린다. 한편에선 ‘분단의 원흉’이자 ‘무능력한 전시 지도자’로 매도하고 다른 한편에선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에서 자유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으로 칭송한다. 최근 ‘이승만의 삶과 국가’를 저술한 오인환(74) 전 장관을 3일 서울 서초동 자택에서 만나 이승만의 공과(功過)를 따져봤다. 언론인 출신으로 김영삼정부에서 공보처 장관을 지낸 그는 “공과 과에 대한 평가에서 사실을 가감하거나 평가를 왜곡 또는 미화함이 없이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균형시각을 유지하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진보·좌파 진영은 1946년 6월3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시사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근거로 그를 ‘분단의 원흉’으로 몰아세운다.

“소련 스탈린은 이승만의 정읍 발언보다 9개월 전에 북한에 단독 인민정부를 수립하라고 지령을 내렸다. 그에 따라 소련 군정은 김일성을 임시정부 격인 인민위원회 의장으로 앉히고 사실상 단독정부를 수립해갔다.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은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접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판단 하에, 일단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세우고 다음 단계로 통일정부를 추구해야 한다는 구상 속에서 나온 것이다. 우파의 관점에서는 냉전체제가 형성되는 당시로서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주장이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가장 큰 분단 책임은 소련 스탈린에게 있다.”

―전쟁 직전 한반도 주둔 미군은 대책 없이 철수했고 미국은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을 배제, 김일성과 소련의 오판을 불렀다. 미국의 잘못된 판단이 전쟁을 초래한 것 아닌가.

“2차대전 이후 미국의 대소련 전략에서 주(主)전장은 서유럽이고 태평양 지역에선 일본이 방어의 축이 됐다. 미국의 한반도 경시론의 속내가 드러난 것이 50년 1월12일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연설이었다. 그는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을 거쳐 필리핀으로 이어진다’면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해 소련과 중국, 북한이 남침을 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미국이 충분한 시간차를 두고 점진적으로 미군을 철수하고 한국군의 전투력을 증강시켰다면 전쟁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 통일론’을 주창한 1949년, 한국의 전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왜 그런 무모한 주장이 나왔나. 이승만의 실속 없는 ‘북진 통일론’이 북한의 도발을 자극한 측면은 없었는가. 맥아더 미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 이후엔 이승만의 무모한 북진론이 중공군의 개입을 불러 보다 유리한 환경에서 전쟁을 끝낼 기회를 놓쳐버린 것은 아닌가.

“그런 비판이 있다. 하지만 이승만의 북진론은 국익에 도움이 되는 다목적 카드였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북진론은 남한을 적화통일하겠다는 김일성의 ‘국토완정론’에 맞서기 위한 대응 논리였다. 반공노선을 함께 내걸면서 국론을 결집시키고 권력을 강화하려는 국내정치적 요인이 있었고 미국의 군사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외교적 목적도 있었다. 중공군이 개입하는 빌미를 제공한 제1원인자는 의도적으로 중공군의 참전을 부정적으로 본 맥아더 사령관이었다. 그는 미 합참이 준 ‘39도 가이드라인’(미군의 북진에 대한 중공의 경고가 격렬해지자 미 합참이 정한 북진 상한선)을 어기고 계속 쾌속으로 북진했다. 이승만은 맥아더를 맹목적으로 신뢰했다. 그것은 한 광주리에 모든 투자액을 쏟아부었다가 파산하는 경우처럼 위험률이 높은 도박이기도 했다. 중공은 한국군의 단독 북진에 대해서는 내전으로 간주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미군은 39도선에서 멈추고 한국군만 북진했다면 전쟁의 판도는 크게 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엔 안보리의 6·25참전 결의가 이뤄질 때 상임이사국인 소련이 불참한 것은 한국으로선 행운이었다. ‘역사의 신’이 있다면 그 시점에 한국 편에 서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미국의 조기참전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련측 대표가 유엔 안보리 이사회에 불참함으로써 거부권 행사 기회를 놓쳤다. 미국이나 한국에는 역사적인 행운이었다.”

―이승만은 전쟁 발발 이틀째인 1950년 6월27일 새벽, 서울을 몰래 탈출하고 그릇된 전황 방송을 내보내 서울시민의 피란 기회를 박탈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승만은 서울 탈출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비겁자의 오명을 벗기 위해 필사적으로 전쟁지휘에 나섰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대통령의 탈출이 서울시민을 포함한 전국민의 항전 의지를 꺾게 한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회고하고 후회와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군은 1950년 6월28일 새벽 2시30분 예고 없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 수백명의 피란민이 희생됐다. 수많은 서울 시민이 피란을 가지 못해 인민군 치하에서 고통을 겪었다.

“인도교 폭파는 이승만의 심야탈출과 맞물려 잘못된 전쟁 지휘의 대표적 사례가 됐다. 하지만 군 전략의 관점에서 보면 인도교가 폭파되지 않았다면 서울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이 다음날로 한강 방어선을 뚫고 남진했을 것이다. 패주하던 한국군은 재편성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재기불능의 붕괴 사태를 맞을 수도 있었다.”

―이승만은 전시 대통령에 걸맞은 리더십을 발휘했나. 거창 양민학살 사건이나 국민방위군 부정사건 등의 책임 논란에서 그는 자유로운가.

“전쟁 초기 군 수뇌들이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이승만은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하고 장면 주미대사를 호출해 미국의 무기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남침 문제를 워싱턴과 유엔의 대응 현안으로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대통령 개인의 위기 관리는 합격점이었으나 정부를 통솔해 전시 체제를 운영하는 관리능력에서는 허점을 보였다. 심복이던 신성모 국방장관의 잘못으로 국민방위군 부정사건이 일어나고 양민을 대량학살한 거창 양민학살 사건이 실패 사례에 속한다.”

 

 

―전쟁 지도자로서 이승만의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인가.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이다. 한국전 참전국 모두가 휴전을 원하고 있을 때 이승만은 홀로 휴전에 반대하며 상대국이 침략을 당하면 미국이 즉각 참전하는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에 요구했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뜻하지 않은 전쟁에 끌려들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휴전협정 회담이 한창이던 1953년 6월18일 새벽 미국과 중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전격적으로 반공포로 석방 명령을 내렸다. 칼을 물고 널뛰는 식의 ‘벼랑 끝 전술’로 미국을 압박한 것이다. 결국 이승만은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2억달러의 원조공여, 한국군 증강 요구를 관철시켰다. 이후 한반도에는 60년 동안 평화시대가 열렸다. 미국의 안보 보장 속에서 한국은 2차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 중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조약이 가조인되던 53년 8월8일,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그 조약 때문에) 번영을 누릴 것이며…우리의 안보를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중견국가로 성장한 지금의 대한민국을 예언했다.”

―북한은 휴전 이후 60년 동안 고슴도치처럼 핵무기라는 가시를 기르며 호전성을 키워가고 있다. 한반도 분단의 원인 제공자인 일본은 지도자들의 과거사 역주행이 도를 넘고 있다. 이승만이 살아 있다면 한국의 대북, 대일 정책과 관련해 무슨 조언을 할 것 같은가.

“아마도 ‘퍼주기’ 같은 대북지원은 어림도 없고 외교적으로 강하게 북한을 조이려 했을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믿을 수 없는 상대로 봤으며 협상하면 속임수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된다는 깊은 불신감을 갖고 있었다. 일본에 대해서도 팽팽한 외교전을 펴려 했을 것이다. 그는 ‘일본은 주위의 나무들을 고사시키는 아카시아 같다’고 평가하며 믿을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미국의 건국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국민의 존경을 받는 워싱턴의 얼굴 위로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망명지에서 숨을 거둔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이 오버랩됐다.

“언젠가는 이승만도 건국대통령으로 평가받고 대우받는 시대가 올 것이다. 종신 대통령을 꿈꾼 권력욕이 워싱턴과 이승만을 갈랐다. 그렇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있게 된 근본이 모두 이승만과 관계 있는데 어찌 부정할 수 있나. 김구를 정통으로 보는 좌파식 현대사 인식은 황당한 것이다.” 

사진=김범준 기자

 

+아래 글은 6.25전쟁에 대해 오인환 전 장관과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의 인터뷰.

<중앙일보 2013년 8월31일자>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은 2013년 현재 6·25전쟁은 형식을 달리하며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이념분쟁은 대개 ‘역사 전쟁’의 모습으로 전개된다. 한국사 교과서의 현대사 서술을 둘러싼 좌·우파 분쟁이 몇 해째 벌어지고 있다. 6·25전쟁의 원인 규명은 6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갈등의 핵이다. 그런 분쟁의 한가운데 있는 인물이 브루스 커밍스(70)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다. 1943년생인 그가 30대 후반이던 81년 펴낸 『한국전쟁의 기원』이 진원지다. 최근엔 진보 성향 매체에 주로 소개되고 있지만 80년대 그의 영향력은 광범위했다. 6·25전쟁 관련 토론회에서 그는 30년 넘게 주요 연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정전60주년 한반도평화대회 국제포럼’ 참석차 28일 방한한 그를 아산정책연구원(원장 함재봉) 비공개 라운드테이블에서 만나 전격 인터뷰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한국학의 연구 수준을 높였다는 소리를 듣는다. 다른 한편으론 고질적 이념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국 지식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1950년 6월 25일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는 신화는 그로부터 출발한다. 남한에서만 2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제3차 세계대전’이라고까지 불리는 전쟁의 발발 원인을 모호하게 만들어 놓았다. 80년대 반미 구호를 내건 급진 이념운동에 학술적 근거를 제공한 이도 그였다.

 냉전이 끝나고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며 6·25전쟁 연구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면서 ‘커밍스 신화’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소련의 스탈린과 북한 김일성의 긴밀한 협의 아래 전쟁이 일어났음이 확인된 것이다. 하지만 냉전시대에 형성된 그의 신화의 힘은 탈냉전 시대에도 깨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이날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은 소련 비밀문서가 나오기 이전의 저술임을 인정하면서 북한의 남침 사실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남한에선 한국전쟁에 대해 ‘진짜 역사’를 연구할 수 있지만 북한에선 그게 불가능하다”며 “북한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억압적인 국가”라는 말도 했다. “누군가 내 책이 친북한 성향이라고 주장한다면 내 유일한 대답은 나는 친북한적으로 쓰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고 나는 단지 참혹한 전쟁에 대한 진실을 전달하려 했을 뿐”이란 말도 주목할 만하다.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이다. 하지만 ‘6월 25일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본래 입장까지 바꾸지는 않았다.

  - 2000년대 이후 커밍스 교수는 주로 진보 성향 매체에 소개되고 있는데, 그 배경이 뭘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예컨대 경향신문이 나보고 기고문을 써달라고 하고 도쿄의 아사히신문도 써달라고 한다. 이런 신문에 글을 쓰는 이유는 기고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할 이유가 없다. 다만 요청을 받아서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한다. 미국은 8년간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경험했다. 나는 때로 워싱턴의 브루킹스연구소나 카네기연구소 등에 가서 특강을 하는데 부시 정부 시절에는 아무도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 부시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단순화하자면 누군가 기고를 요청하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젊을 때는 요청을 받기 전에도 신문에 기고문을 보냈다가 거절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 중앙일보에서 요청을 한다면.

 “기꺼이 하겠다(I will be happy to).”

 - 한국사회에서 6·25전쟁을 둘러싼 이념 갈등이 있고 그것은 ‘역사 전쟁’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의 6·25 서술을 놓고 좌·우파 갈등이 벌어진다.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인데 오히려 북한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한국에 대해선 차가운 시선으로 서술하는 경향이 문제가 되고 있다. 역사 전쟁에 커밍스 교수도 책임이 있다고 보는데, 이런 글쓰기의 출발이 커밍스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아닌가.

 “내가 『한국전쟁의 기원』을 쓸 때 북한 사람들은 물론 자유롭게 역사의 진실에 대해 쓸 수 없었고 북한은 지금도 그렇다. 당시엔 남한에서도 마찬가지로 내가 쓴 것처럼 인민위원회나 노동당 등에 대한 내용을 전혀 쓸 수 없었다. 만일 쓴다면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역사연구와 한국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여는, 가능한 한 많은 역사적 진실을 밝혀내서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진실이 어떤 경우에는 북한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남한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다. 그런 점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이 일본에서 지난해 번역 출간됐는데 조총련에선 자기네 매체에 그 책의 사진을 실었다. 나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한국은 분단 국가고 만일 한쪽에서 내 책이 도움이 되고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온정적이라고 한다면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 책이 친북한 성향이라고 주장한다면 내 유일한 대답은 나는 친북한적으로 쓰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고 나는 단지 참혹한 전쟁에 대한 진실을 전달하려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남한은 이제 북한에 비해 훨씬 강력한(much stronger) 나라가 됐다. 그렇다면 북한에 대해 온정적 시선도 감당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북한은 고립됐고 두려워하고 생존에 급급한 실정이다. 분명한 사실은 남한에선 한국전쟁에 대해 ‘진짜 역사’를 연구할 수 있지만 북한에선 그게 불가능하다.”

 - 81년 나온 『한국전쟁의 기원』은 충격적이었다. 50년 6월 25일에 ‘누가 먼저 사격했는가’를 찾지 말라고 썼다. 6·25 당일 북한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전면전을 일으켰는데 마치 단순한 사격전인 것처럼 묘사한 것은 대규모 전쟁 발발의 의미를 지나치게 작게 표현한 것 아닌가.

 “분명한 사실은 남한에선 한국전쟁에 대해 ‘진짜 역사’를 연구할 수 있지만 북한에선 그게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

 “당시 북한은 소련에서 구입한 탱크가 있었다. 소련은 북한에 탱크 구입을 승인했다. 미국은 남한에 탱크 판매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유는 미 국무부가 이승만 정부와 국군 장성들에게 탱크가 있다면 북한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탱크와 비행기를 팔지 않는다는 방침에 대해선 비밀문서에서 확인이 됐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이슈다. 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탱크 공격에 남한은 방어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남한의 방어력 상실에 대해 책임이 있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의 생각은 남한의 국군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격용 무기로 무장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한이 도발하지 않았는데도 북한이 공격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는 논리적인 함축이 담겨 있다. 그런 경우 미국이 남한을 방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탱크에 대해 얘기했지만 나는 지뢰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미국은 남한이 북한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공격용 탱크를 주지 않고 방어용 지뢰를 제공했다. 그러나 국군은 지뢰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뭘까. 공격용 진출로 확보를 위해서다. 이 모든 것들은 매우 복잡한 문제다. 나는 이런 사실들을 밝혀냈다. 그것은 소련 측 문서가 나오기 전까지 상황이다. 연구를 마치고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을 출간한 것은 90년이다. 그때는 소련이 붕괴하기 전이었고 소련 측 문서를 이용할 수 없었다. 이것이 당신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당신이 말한 부분에 대해 나는 내 생각을 전혀 바꾼 적이 없다(I haven’t changed my mind at all). 전쟁의 시작은 전쟁의 기원에 비해 여전히 덜 중요하다(The start of the war is still less important than the origins of the war). 48년 5월부터 50년 6월까지 옹진반도나 개성의 상황을 살펴본다면 거기에 6·25 전쟁의 기원이 있었다.”

 - 소련 비밀문서를 통해 6·25전쟁의 원인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소련 측 문서는 전쟁이 어떻게 발발했는지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물론 내 책에는 소련 측 문서가 포함되지 않았다. 내 책과 소련 측 문서는 약간 차이는 있지만 서로 상충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전쟁이 6월 25일 시작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6월 25일 시작됐다고 하면 모든 다른 이슈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단지 ‘악(evil)의 북한’이 침공했고 우리는 이런 비극을 당할 이유가 없으며 미국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정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전쟁의 시작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역사학적 질문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질문이다.”

 -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이른바 ‘남침유도설’이 한국의 지식사회에 끼친 영향이 큰데, 남침유도설의 진원지가 커밍스 교수 아닌가.

 “나로선 솔직히 웃기는 얘기다. 『한국전쟁의 기원』 1권은 81년에 출간됐는데 47년까지의 역사만 다루고 있다. 그 책에선 6·25전쟁의 시작에 대해선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커밍스가 남한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전두환 정권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이 중상모략을 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다. 그리고 2권이 90년에 출간될 때는 타이밍이 별로 좋지 않았다. 1년 뒤에 소련 측 문서가 나왔다. 거기엔 스탈린과 김일성이 남침을 공모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시 나는 다른 책을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비난받는다는 것에 대해선 우습다고 생각한다. 1권과 2권은 모두 33장으로 돼 있는데 그중 하나가 전쟁의 시작에 대한 것이다. 거기에는 불충분한 정보(imperfect information)를 토대로 모자이크한 3가지 전쟁 발발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그 장의 전체적인 요점은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는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신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규명하려고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누가 전쟁을 시작했느냐’는 질문 자체를 해체하려고 했다. 그것은 좀 전에 언급한 대로 이데올로기적 질문이기 때문이다.”

 - 소련과 북한의 긴밀한 협의 아래 전쟁이 발발했다고 정리해도 되겠나.

 “50년 1~2월이 되자 스탈린이 마음을 바꿨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공격 계획에 동의했다. 그러면 전쟁이 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소련 측 문서에서 이런 얘기들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그래. 커밍스가 틀렸다. 트루먼과 애치슨이 맞았다. 스탈린이 시작 버튼을 눌러서 전쟁이 시작됐다’고 했다. 그 후 시간이 흘렀다. 소련 측 문서가 추가로 나왔다. 이제 더욱 전체적인 그림을 얻을 수 있게 됐다. 많지는 않지만 중국 측 문서도 일부 나왔다. 시간이 갈수록 전쟁에 대해 더욱더 전체적인 그림을 얻을 수 있게 됐다.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역사는 변한다(History changes). 역사는 결코 같은 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It never stays as same). 새로운 문서가 추가로 공개되면 역사적 관점이 달라진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해선 전쟁 전에 미국 정보기관이 수집한 북한 측 첩보 관련 문서가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미국은 6·25 전쟁 전에 남한에서 최소한 14곳의 감청 기지(listening station)를 운영했다. 미국은 해안선을 따라 정찰기를 띄워 북한을 정찰하면서 정보를 수집했다. 이런 항공정찰이나 첩보 관련 문서들이 아직까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전쟁 직전 수만 명의 북한 군대가 38선을 향해 이동 중이었다면 미국이 그것을 보지 못했을까?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기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까. 북한과 관련한 대형 문서저장고 한 곳이 여전히 완전히 차단돼 있다. 언젠가 북한이 민주화되거나 붕괴되거나 한다면 이곳의 문서도 공개될 것이다. 이런 모든 관점이 종합되면 한국전쟁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더욱 전체적인 역사적 그림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 『한국전쟁의 기원』 1권에서 당신은 “정치적 위기에는 아무도 중립을 지킬 수 없으며 순수한 객관은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남한과 북한에서 각기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지던 시기의 혼란과 6·25전쟁보다 더 격렬한 정치적 위기는 없을 것이다. 그 시기에 대해 쓰는 역사가의 자세, 서술의 방식에서 중립이나 객관이 가능한가.

 “대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책에서 말한 것은 위기 상황에선 이쪽도 보고 저쪽도 보는 객관적인 입장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술의 데칼코마니처럼 남한과 북한을 정확히 절반씩 나눠서 남한은 어떻고 북한은 어떻고라고 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냉전으로 인한 왜곡이 심했다. 미국에서도 50년대 초반에 매카시즘이 유행했고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한국에서도 70년대, 80년대는 비슷한 상황이었다. 더 어려운 문제가 있다. 북한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북한은 강제수용소에 수많은 사람들을 가둬놓고 있는가. 그렇다. 김정은을 앞에 나오도록 해서 인민들이 찬성과 반대를 놓고 투표를 하는가. 아니다. 북한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억압적인 국가다. 하지만 북한에 대해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북한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 북한이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지만 미국도 마틴 루서 킹이 활동하던 60년대까지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다. 당시엔 심각한 폭력을 써서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종을 탄압했다. 60년대 미국 앨라배마였다면 (지금 인터뷰를 하는) 이 방에 있는 사람들 중 나를 제외하고 유색인종용 음수대에서 물을 마셔야 했을 것이다. 피터 노빅(Peter Novick)은 『That Noble Dream: The ‘Objectivity Question’ and the American Historical Profession』이란 책을 썼다. 객관성에 대해 지금까지 내가 읽어본 최고의 저술이다. 인간은 객관적이고 싶어 하는 ‘고상한 꿈(noble dream)’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것이 내 대답이다.”

 - 북한의 친일파 청산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최근 연구를 보면 북한 김일성 정권의 초대 내각에 친일파가 많이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나도 그 부분에 대해 글을 썼다. 당시에도 알려져 있었다. 북한은 40년대 후반에 일제에 협력한 기술자(technician)들을 활용했다. 그들을 기술자라고 봐야지 친일파라고 할 순 없다. 북한은 특히 경찰 출신 친일파들을 청산했다. 일제 지배 기간에 가장 미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북한은 그 가족들에 대해서도 친일 경찰 가족이란 낙인을 찍었다. 따라서 친일 경찰의 자손들도 차별을 받았다. 김정일이 90년대 후반에 결국 폐지하기 전까지 차별이 지속됐다. 나는 그것(친일 경찰 가족에 대한 차별)에 동의할 순 없지만 이해할 순 있다. 어쨌든 북한은 방법론에서 잘못되기는 했지만 그것을 실행했다. 북한 정권을 친일 정권이라고 표현할 순 없다. 북한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스탈린이 반일 정권을 원하고 친일파 청산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 남한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 미 군정 통치에는 실책과 어리석음이 대단히 많았다. 군대와 경찰을 보면 전부는 아니라 해도 일제의 군대·경찰 출신이 대부분 등용됐다. 예전에 레너드 버치(Leonard Bertsch, 미 군정청 정치고문)에게 친일파를 어떻게 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우리는 원래 자리로 복귀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단히 미국적인 사고방식이다. 크림은 맨 위로 올라오게 마련이란 식이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제 치하에서나 미군정에서나 위로 올라온다는 얘기다. 남한은 반일적인 수사(rhetoric)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문제를 미해결인 채로 끌고 가게 됐다. 그리고 사실 친일파라는 낙인은 지나치게 광범위하다. 만일 일제 시대 법원에서 판사로 일했지만 한국인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친일 부역자라고 말할 수 없다. 남한에선 누구를 친일파로 볼 것이냐에 대한 논의가 지나치게 광범위하다.”

 - 90년대 이후엔 토지개혁에 대한 연구도 새롭게 나와서 남한의 토지개혁이 굉장히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 당시 밑으로부터의 민중 봉기를 억제하는 힘이었고 박정희 대통령 이후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다는 얘기다.

 “토지개혁이 전쟁 후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 것은 확실하다. 일본, 남한, 대만에서 토지개혁은 50~60년대 농업 생산성 향상에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질문의 앞부분에 대해선 반대 입장이다. 전쟁 이전에 토지개혁이 이뤄져서 남한 농부들이 북한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전쟁 이전 남한에선 진정한 의미의 토지개혁이 없었다. 하지만 전쟁 후에는 남한과 월남을 비교한다면 남한에선 토지개혁이 이뤄져서 농민들이 더 이상 좌익에 동조하지 않고 수확에만 관심을 가졌다. 월남에선 토지개혁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이것이 75년 월남 패망의 원인이 됐다.”

 - 『한국전쟁의 기원』이 출간되던 81년 북한을 방문했다. 당시 북한과 오늘의 북한을 어떻게 보나.

 “81년 8월에 북한에 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보니 내가 쓴 책이 집 앞에 놓여 있었다. 우편으로 도착한 것이었다. 나는 북한에 가기 전에는 책의 완성본을 보지 못했다. 내가 북한에 있는 동안 출판사에서 일을 진행했다. 당시 북한의 경제는 상대적으로 좋았다. 북한을 2주간 방문하기 전에 중국을 1주간 방문했었다. 당시 중국은 북한에 비해 훨씬 가난한 나라였다. CIA 보고서에 따르면 70년대 후반까지 남한과 북한의 국민소득은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 내가 보기에 적어도 농촌 지역에선 그것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80년대 중반 이후 남한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후엔 남한과 북한은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북한 경제는 80년대 후반부터 정체된 상태였고 90년대 들어 위기를 맞았다. 90년대엔 소련이 무너졌고 중국의 도움도 줄었고 대홍수가 발생했고 김일성이 죽었다. 이 모든 것이 북한 경제위기의 원인이 됐다. 하지만 80년대 후반에 북한 경제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했던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나는 한국 전문가를 자처하지만 어떻게 남한이 그렇게 잘했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삼성이 소니를 추월해서 애플의 강력한 경쟁자가 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놀랍다.”

 - 박근혜정부 들어 북한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 개성공단 재가동,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대화에서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 박근혜 대통령은 전임 이명박 대통령에 비해 상당히 잘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은 박근혜 대통령이 전임 이명박 대통령보다는 나을 것이란 기대가 있는 것 같다. 물론 김대중이나 노무현 대통령 시절과는 다르겠지만. 올봄 북한의 도발적인 언사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테스트였다고 본다. 최근 남북대화는 좋은 신호다.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오바마 정부가 북한에 대해 전혀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전략적 인내인데 좋은 전략이 아니다. 북한이 핵 보유국이 되고 미사일을 발사한다고 해도 행동을 취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한다. 남북관계에 따뜻한 분위기가 생기면 오바마 정부도 북한에 대해 뭔가 행동을 취할 것으로 기대한다.”

글=배영대·주정완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아래 글은 오인환 전 장관과 유사한 입장을 갖고 있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중앙일보 인터뷰. 

진보-보수 진영 사이에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역사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1970~80년대 진보 이론가였던 안병직(77 ·국민통합시민운동 공동대표) 서울대 명예교수는 온통 음해 수준의 ‘밥그릇 싸움’이라고 비판했다. 서로 물고뜯으니 언뜻 크게 다른 것 같지만 8종의 교과서 모두 민주화운동사 체계로 쓰였다는 점에선 동일하다고 분석했다. 교과서에서 사상의 자유는 종북주의만 아니면 모두 보장돼야 한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현재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은 온통 음해 수준입니다. 정상적인 학술토론이 아니에요.”

 10일 오전 10시 서울 청진동 국민통합시민운동 사무실. 1960년대부터 진보 진영의 주요 이론가로 활약하다 만 50세가 되던 86년 이후 시각을 180도 바꾼 그의 목소리는 두 시간 내내 열정적으로 이어졌다. 국민통합시민운동 공동대표 안병직(77·한국경제사) 서울대 명예교수의 이야기다.

 대학가 운동권이 극성했던 80년대의 대표적 좌파 이론인 ‘식민지 반(半)봉건론(식반론)’을 남한에 확산시킨 출발점이 그였다. 엄밀히 말해 창작이라기보다는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의 농민혁명 이론을 모방한 것이었다. 식반론은 한국이 여전히 식민지 상태며 아직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은 봉건적 상태로 파악했다. 안 교수가 전향했던 86년은 대학가 운동권의 헤게모니가 ‘NL(민족해방) 주체사상파(주사파)’로 넘어가는 시점과 겹친다. 안 교수에 따르면 마오쩌둥의 농민혁명론, 식반론, 남미의 종속이론, 주사파 등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 모두 ‘내재적 발전론’이란 분모를 공유한다.

 안 교수 자신은 식반론에 대한 생각을 바꿨지만 그가 뿌린 씨앗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최근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 진영 사이 ‘역사 전쟁’도 그런 연장선에 놓여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보수적 관점에서 진보를 향한 ‘사상 운동’을 전개하는 이유다.

 - 내재적 발전론이란.

 “한국 현대사를 보는 두 개의 관점 가운데 하나다. 내재적 발전론은 한국의 발전동력이 안으로부터 나온다고 본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은 전부 침략적이다. 대외 침략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가 기조를 이룬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한국 근현대사는 저항운동사가 된다. 일제시대는 독립운동, 해방 이후는 민주화운동이다. 북한에서 자력경제하는 것도 다 그거다. 조선 후기의 자본주의 맹아론과 관련된다.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 맹아가 있어서 만약 제국주의 침략이 없었다면 저절로 근대화가 됐을 거라고 보는 시각이다.”

 - 내재적 발전론이 왜 문제인가.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 맹아가 사실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른다. 일종의 이념이다. 또 일제시대 민족자본을 내재적 발전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일제시대 조선인 자본 중 가장 유명한 게 고무와 메리야스 공업이다. 고무와 메리야스가 조선 후기부터 발전할 수 있겠는가, 밖으로부터 온 거다. 조선 후기부터 발전해 일제시대까지 연결되는 것은 동(구리)광산업의 덕대 제도다. 덕대는 광산에서 하는 하청업이다. 광산업자가 모든 굴을 자기가 다 개발하지 못하니까 일부는 덕대에게 줘서 개발토록 했다. 그리고 도기 산업, 옹기 만드는 정도였다. 내재적 발전론은 마오쩌둥의 ‘중국 혁명과 중국 공산당’(37년)에서부터 나온 가설이다. 이에 기반해 남쪽이든, 북쪽이든 지배적인 사상은 저항적 민족주의다. 한국이 미국 식민지라고 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하는 게 전부 그렇다. 내재적 발전론이 주류 이념이다. 올해 검정 통과된 8종의 한국사 교과서가 전부 다 운동사 체계로 쓴 배경이다.”

 - 한국 현대사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관점은 무엇인가.

 “캐치업(catch- up) 이론이다. 한국 근대를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민족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 국가를 만드는 과정이었다는 얘기다. 그런 가설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성공했기 때문이다. 한국만 그런 게 아니다. 제3세계 신흥공업국에 나타나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중국도 개혁, 개방을 해 저만큼 발전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먼저 이승만 시대에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했다. 이승만이 독재도 하고 권위주의도 했지만 제도를 그때 만들었고, 반공주의와 53년 한·미 방위조약으로 지켜냈다. 그 다음에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 지향 공업화 정책으로 경제발전에 성공했다. 내재적 발전이 아니고 외국에서 새로운 자본, 기술, 산업을 도입해 한국 산업을 발전시켰다.”

 - 87년의 민주화는 어떻게 설명하나.

 “민주화 역량에서 중요한 게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지식인운동이다. 민주화운동의 주체도 서양과 교류하는 캐치업 과정에서 자라났다. 이승만은 재정이 그렇게 어려운데 엄청난 교육 투자를 했다. 고교생, 대학생을 양산해 그들이 4·19혁명의 주체가 됐다. 이승만은 자기가 민주주의한다고 가르쳐놓고, 자기가 민주주의를 하지 않으니까 자기가 육성한 세력에 의해 쫓겨난 거다. 왜 북쪽에는 4·19가 없나. 그런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87년 이후 민주화도 사실상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민주주의가 본래 우리나라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 8종 교과서가 모두 운동사 체계로 씌어 있다고 했는데, 유독 교학사 교과서를 놓고 말이 많은 이유는.

 “그것은 밥그릇 싸움이다. 내 눈으로 보면 교학사 교과서를 포함해 8종이 모두 다 같은 운동사 체계다. 다만 교학사는 대한민국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점이 다르긴 하다. 그러나 서술 체계는 운동사 체계다. 그럼에도 교학사 한 종에 대해 데모까지 해가면서 눈을 부릅뜨고 하는 것은 국사학을 하는 사람들이 교과서를 자신들 영역이라고 보는 것이다. 국사학계는 전부 좌파가 잡고 있고, 그 좌파의 이념이 저항적 민족주의다. 그런 상황에서 왜 너희들 자유주의자들이 들어오느냐 하면서 들어오지 말라는 밥그릇 싸움이다. 교학사 교과서를 놓고 이론 싸움을 하는 것을 봤는가? 전부 음해고 그렇다. 숫자가 틀렸다거나 맞춤법 오류 같은 것은 다른 교과서에도 많다. 그렇게 틀린 것들은 고치면 되는 것이다.”

 - 8종 교과서가 모두 운동사로 되어 있는 이유는.

 “검정에 통과하려면 집필기준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집필기준의 민주주의 발전 항목을 보면 한국 민주주의가 민주화운동에 의해 발전한 것으로 돼 있다. 집필기준에 이승만 시대의 권위주의, 박정희 시대의 유신, 전두환 시대의 군부독재를 부정적 요인으로 넣어놨다.”

 - 독재가 있었고 그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이 있었지 않나.

 “일례로 이승만 시대의 권위주의가 과연 자유민주주의 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었나? 공산주의가 워낙 득세하니까 어떻게 하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느냐, 그 목적으로 만든 것 아닌가? 60여 년 전의 권위주의를 오늘날 입장에선 비판할 측면도 있지만 평가할 측면도 있는 것이다. 또 박정희 시대의 유신체제도 민주주의를 두드려 잡기 위해서만 한 것인가? 그것도 하나의 사실이지만 중화학 공업화를 성공시키기 위해 한 것도 사실이다. 전두환 정권 때 3저 호황으로 한국 경제가 크게 발전하며 무역흑자로 바뀌었다. 물가를 한 자릿수로 잡았다. 한국 경제사에서 아주 중요한 거다. 그런 기술은 교과서의 어느 곳에도 없고 전두환이 5·18 민주화운동 두드려 잡기 위해서만 독재했다고 하는 식이다. 교과서의 종합적 평가가 안 되는 이유는 집필기준이 운동사 체계라서다.”

 - 교과서 집필기준에 보완할 점은.

 “집필기준에 ‘권위주의 정치체제론’이 하나 들어가야 한다. 저개발국이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일 때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실행할 객관적 조건 없이 제도만 받아들였다. 농민, 빈민이 대부분인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어떻게 하겠나. 자유민주주의는 두꺼운 중산층이 성립돼야 한다. 예전엔 단순히 독재라고 했다. 그런데 저개발국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보니까 선진적인 정치, 경제체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독재를 했다. 단순히 권력욕, 장기 집권만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개발독재란 말이 그것이다. 그게 이론적으로 발전해 권위주의 정치체제론이 된 거다. 권위주의 정치체제론은 캐치업 이론의 일부다. 민주화운동만 갖고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다 설명하지 못한다.”

 - 안 교수는 진보 진영의 주요 이론가였으니까 진보적 역사인식을 이해해줄 법도 한데….

 “나도 한때는 좌익이었다. 한국 사회에 맞는 이론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르크스와 레닌과 마오쩌둥 이론을 공부했다. 마오쩌둥 이론이 한국 사회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 같더라. 식반론은 그렇게 나왔다.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이론이다. 내가 접한 것은 북쪽에서 수용한 마오쩌둥 이론이었다. 당시 북쪽의 사회과학이란 잡지를 다 복사해 볼 수 있었다. 나는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한용운과 신채호를 연구해 30대 초반에 이미 학계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얻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식반론을 이야기하니까 선배들도 내가 독자적인 이론을 개발했다며 감히 못 달려들었다. 그러다 보니 피가 나도록 박정희 정권과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왜 생각을 바꿨나.

 “내가 주장한 식반론에 의하면 70년대 말 한국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해야 한다. 그런데 80년대 초 전두환 정권 등장 후 한국 자본주의가 계속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을 전부 노동운동에 밀어넣었는데 내 이론이 틀렸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85년 도쿄대에 1년간 전임교수로 갔다. 도쿄에서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스트레스로 윗니 2개가 빠졌다. 그때 북쪽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다.”

 - 북한 사람을 만나면 감옥에 갈 때가 아닌가.

 "내가 감옥에 가는 게 문제가 아니고, 민족 운명이 문제니까. 조총련이니 뭐니 다 다가왔다. 칙사 대접이었다. 만나 보니까 완전히 저승사자를 대하는 것 같았다. 인간의 유형이 너무나 음험했다. 독재국가에서 자란 내가 제일 후진 인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나보다 훨씬 후졌다. 소련, 중국, 동독 등 공산권에서 온 유학생들이 당시 도쿄에 바글바글했다. 그들이 나보다 훨씬 선진적인 사회에서 사는 줄 알았는데 만나 보니 완전 후진국이었다. 마침 85년에 이미 사회주의 세기가 끝나고 지금부터 자본주의 세기가 전개된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연구자들이 있었다. 교토(京都)대 경제학과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 교수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 세계사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이 엄청나게 동태적인 사회이며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후 내 제자들부터 사상 전향을 시켰다. 노동운동을 했던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대표적이다. 처음엔 말로 하다 잘 안 돼서 사상투쟁을 전개했다. 80년대 후반을 그렇게 보냈다. 내가 죄를 많이 지었다. 제자들을 사지에 몰아넣었는데 나 몰라라 하고 팽개칠 수 없었다.”

 - 식반론은 이제 다 폐기됐나.

 “세계적으로 폐기됐다. 중국도 폐기해서 개혁·개방에 나선 것이다. 개혁·개방은 캐치업의 전형이다. 국내 시장경제 체제를 만들고 대외 자유무역을 하고 그래서 선진국에서 수백 년간 축적한 제도와 기술을 계속 받아들인다. 그것을 안 받아들인 게 쿠바와 북한, 일부 아랍 국가다. 북한은 아직도 남한을 미국의 신식민지라고 한다.”

 - 식민지 근대화론을 교학사 교과서가 수용한다는 비판이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진보 진영이 보수 진영에 뒤집어씌운 거다. 식민지 시대에도 근대적 변화가 있었다. 1905년 재정, 화폐개혁, 1910년대 토지조사 사업을 통해 근대적 화폐, 은행, 소유 제도를 도입한 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유효하게 식민지를 착취할 수 없다. 조선 후기의 재정은 마이너스, 저축률도 마이너스였다. 착취할 것도 없다. 착취하려면 개발을 해야 한다. 철도, 항만, 도시도 건설하고, 자금 투자도 하고. 안 그러면 일본에서 보충금이라고 해서 재정보조를 해야 한다. 예컨대 아프리카에 가서 뭐를 착취할 거냐. 땅을 차지한다든지 그 정도지, 아무 생산도 없는데 뭐를 착취할 거냐. 착취하려면 개혁도 하고 투자도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식민지민의 자기계발도 있다. 식민지민도 근대적으로 살아남으려면 근대적 교육도 받고 근대적 경영도 해야 한다.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근대적 학교도 만들고 산업도 일으키고 한 것을 무엇으로 설명하나. 식민지 시대라도 식민지적 개발과 식민지민의 자기계발이 다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설명한다고 해서 공격해 오는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 교과서에서 사상의 자유는 어느 정도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

 “종북주의만 아니면 모두 보장돼야 한다. 그것은 자유주의의 본질이다. 자유가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되 내 자유가 지고의 가치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자유주의다. 다만 종북은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하니까. 인류사 차원이 아니고 국민사회 차원에서 그렇다.”

글=배영대·주정완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북한은 자신들을 고슴도치에 비유하곤 한다.

북한의 ‘고슴도치 동화’에서 미국은 호랑이로 그려진다. 호랑이가 제아무리 최상위 포식자라 해도 가시털을 곧추세운 고슴도치는 어쩔 도리가 없다. ‘핵과 미사일’(가시털)로 시도 때도 없이 한국과 미국을 협박하는 북한이고 보면 제법 그럴싸한 비유다.

기원전 8∼7세기에 활동했던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는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안다”고 읊었다. 이 시구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후대의 우화들은 꾀 많은 여우가 번번이 고슴도치와 싸워 낭패를 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화에서 여우는 갖은 꾀로 고슴도치를 처치하려 하지만 고슴도치가 가시털을 세운 채 몸을 웅숭그리면 여우는 번번이 제풀에 나가떨어진다.

국제사회의 설득과 압박에도, 주민들의 굶주림에도 아랑곳없이 핵과 미사일을 신주단지 모시듯 해온 북한은 영락없이 고슴도치를 닮았다. 북한이 최근 3차 핵실험에 대응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에 맞서 하루가 멀다하고 한반도 위기를 고조시키는 행태도 온몸의 가시를 세워올린 고슴도치를 연상시킨다. 북한이 고슴도치라면 북한과 씨름해온 한·미는 여우의 처지다. 여우는 이 고슴도치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대북 강경론자들은 고슴도치를 제거해버리자고 한다. 수단을 놓고는 군사적 조치에서 대북 심리전에 이르기까지 편차가 다양하지만 3대 세습의 김정은 정권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지점에선 일치한다.

그들에게 북핵 1차 위기는 절호의 기회였다. 미국이 1994년 초여름에 계획한 영변 핵시설 ‘족집게 폭격(surgical strike)’이 이뤄졌다면 북핵의 싹을 잘라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북한 정권이 무너지는 급변사태가 현실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의 영변 폭격에 제동을 건 것은 김영삼정부였다. 빌 클린턴 미 행정부가 영변 폭격을 검토하면서 주한미군과 미 대사관 가족 등을 서울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은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 대사를 불러 “미국이 우리 땅을 빌려서 전쟁을 할 수 없다”면서 결사 반대했다. 보수정권의 대통령이 반대했을 정도로 고슴도치 제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명쾌한 해법처럼 보이지만 여우도 치명상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슴도치를 살살 달래서 가시를 세우지 않도록 진화시켜야 한다는 대북 유화론자들은 한·미의 보수정권인 이명박정부와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의 대북 정책 전환을 못내 아쉬워한다. 김대중·노무현 진보정권의 대북 유화책과 클린턴 정부가 북·미 제네바 합의 이후 취한 대북 개입(engagement) 정책을 이명박, 부시 정부가 계승했더라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의 길로 나섰을 것이란 전망에서다. 이런 주장의 치명적 약점은 칼자루를 북측에 넘겨준 채 핵 포기든 미사일 발사 유예든 북한의 선의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북핵 6자회담은 미국의 대표적 대북 강경파인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마저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6자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앉은 ‘혁명적인 대화틀’”이라고 극찬해 마지않은 협상이었다. 6자는 진통 끝에 북한이 원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포함한 포괄적 합의(2005년 9·19공동성명)를 도출해냈지만 북측의 선의가 작동되지 않는 순간 합의문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한때 한·미 정부가 활용했던 ‘선의의 무시(benign neglect) 전략’에 따라 제멋대로 날뛰는 고슴도치를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박근혜정부는 고슴도치를 우리 안에 가두고(제재) 먹이를 조절하면서(단계적 지원) 길들이는 능동적 압박정책을 채택한 듯하다. 김영삼, 이명박 정부는 ‘북한 붕괴론’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에 빠져 고슴도치를 고사시키려 했으나 고슴도치의 화를 돋웠을 뿐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북한의 진정성’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에 빠져 고슴도치를 진화시키려 했으나 고슴도치는 받아먹은 먹이로 가시만 키웠을 뿐이다. 박근혜정부의 고슴도치 길들이기는 북한 붕괴론이나 북한의 진정성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천안함 폭침 3주기를 맞는 노병의 심경은 참담했다. 이상의 전 합참의장은 2010년 3월26일 북한의 어뢰 공격을 받은 천안함이 서해 바다에서 수장되던 당시를 회고하면서 “유족에게 죄인의 심정”이라고 말했다. 해마다 천안함 순직 용사들의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는 그는 “유족에게 아무리 사과한들 생때같은 아들들이 살아 돌아오겠느냐”면서 “당시 군의 수장으로서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북한의 3차 핵실험 강행으로 한반도 안보위기가 고조되는 지금, 천안함 폭침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도원빌딩 강한대한민국범국민운동본부 사무실에서 이 전 의장을 만나 천안함 사건이 남긴 교훈을 되새겨봤다. 그는 “북한의 도발 위기에 맞서 군과 정치권, 국민 모두가 천안함 폭침 사건의 교훈을 뼈에 새겨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천안함 폭침 당시 합참의장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천안함은 많은 교훈을 남겼다. 군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악랄한 도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회한을 남겼다. 북한이 간첩 침투나 비무장지대 도발 등 간접 도발을 자행한 적은 있으나 우리 영해에 있는 초계함을 직접 타격해 피해를 준 사례는 처음이었다. 이런 도발을 군이 간과한 것은 반성해야 할 점이다. 국가적으로는 천안함 폭침 사건을 계기로 남남갈등이 조장되고 아직도 국제사회 전문가들이 모여 작성한 내용(미국·영국·호주·스웨덴 4개국 전문가들이 참여한 국제 합동조사단은 2010년 5월 “천안함이 북한 어뢰에 피격돼 침몰했다”고 공식 발표했다)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고 한편으론 황당한 일이기도 하다. 자기 입장만 주장하고 다른 사람을 믿지 않으려는 현 세태는 국가적으로 엄청난 에너지 낭비다.”

―한반도의 군사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천안함 사건과 같은 북한의 도발 위기에 충실히 대비하고 있는가.

“완전하지는 않다. 천안함 사건 직후 함정의 초계 속도를 높이고 대잠 헬리콥터를 수시로 출격시키는 등 추가 비용이 소요되지 않는 임시조치는 모두 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전력증강을 하려면 예산이 필요하다. 그런데 올 1월 국회는 국방예산을 4000억원 삭감했다. 그러고선 북한 핵실험(2월12일)이 터지자 국방비를 증액하겠다고 나서는데 국가가 이렇게 일관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 최근 군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고, 경계 실패는 1차적으로 군의 책임이다. 그러나 군의 무수한 전력증강 요구에도 우선순위로 제일 먼저 깎이는 게 국방예산이다. 눈에 띄는 것은 복지예산하고 국회의원 본인들의 지역구 예산이다. 국회가 국방예산을 처삼촌 묘 벌초하듯 잘라낼 때 어떤 정치인이 그래선 안 된다는 목소리를 냈나.”

―북한의 핵실험을 계기로 우리 국민의 안보불감증도 도마 위에 올랐다.

“공감한다. 우리 국민들은 북한이 설마 우리에게 핵 미사일을 쏘겠느냐고 생각하는데 안일하고 위험한 사고 방식이다. 미국을 향해서는 못 쏘지만 우리에게는 쏠 수 있는 게 북한이다. 우리는 북핵의 인질이다. 북한은 무력 시위용으로 핵을 사용할 수 있는 집단이다.”

―천안함 도발은 그야말로 허를 찌른 것이었다. 당시 우리 군은 무방비 상태로 당한 건가.

“천안함 사건 4개월 전에 ‘대청해전’이 있었다. 기동력이 약한 북한은 수상전에서 대패했다. 북한은 반드시 보복할 것이라고 봤다. 그 방법은 질 게 뻔한 해상도발이 아니라 수중도발일 것으로 예상했다. 이 문제로 2009년 말에 전술토의를 벌였다. 이때 참모들은 서해는 조류가 빠르고 혼탁한 데다 수심이 낮기 때문에 잠수함 도발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적이 서해 수중도발을 꾀할 수 있다고 봤다. 6·25전쟁 당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도 인천은 유속이 빠르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상륙작전이 어렵다는 참모의 조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인천으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전술토의에서 ‘키 리졸브’(한·미 연합훈련)가 끝난 직후 서해 수중 도발과 관련한 대비태세 검열을 벌이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천안함 피격 사건이 발생한 3월26일이 대비태세 검열을 위한 예비 회의를 가진 날이었다. 그 회의를 조금만 앞당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미리 대비했다면 피격 직후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도 포착할 수 있었나.

“그것은 어렵다. 적에 대한 정보 판단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100% 북한 잠수함이 공격할 수 있다고 확신해도 몇 월 며칠에 온다고는 절대 예측하지 못한다. 그런 딜레마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쨌든 예측을 하고 조금만 일찍 서둘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폭침 사건 초기 군은 우왕좌왕했고 대통령도 허둥댔다.

“초기에 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기습당하는 사람은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위기 시에 군사작전 지휘관은 절대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다음에 일어날 상황을 예측하고 그걸 대비하고 전투력을 할당하고 현재 상황에 대해 조치하는 게 지휘관의 역할이다. 소방관의 임무는 불 끄고 인명 구조하는 것이다.”

―결국 미리 예상은 했지만 준비가 제대로 안 돼서 당했다는 것인가.

“예상을 정확하게 했다기보다는 그런 식의 도발에 대비한 준비는 해야 된다는 판단을 했는데, 보다 적극적인 대비를 못했다는 게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천안함 폭침 이후 이명박정부가 안일한 대북 대응으로 일관하다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을 불렀다는 지적이 있다.

“천안함 사태 이후에 ‘5·24 (대북 제재) 조치’를 취할 때 확성기 등을 이용한 대북 심리전이 포함돼 있었다. 북한은 대북 심리전 방송을 핵무기보다 더 무서워한다. (합참의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이건 진짜 기가 막힌 카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군은 대북심리전 준비를 다 끝냈다. 북한은 겁이 나니까 계속 협박을 했다. 나는 ‘잘 됐다. 너희들이 타격을 하면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각오 아래 만반의 준비를 다 갖췄다. 부하들도 일전불사의 각오였다. 그런데 정부는 심리전 방송을 미뤘다. 결국 승인이 안 됐다. 그때 국민의 자존심이 상했다. ‘북한이 협박하니까 심리전도 못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국민이 자존심을 상했을 때 군인들은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나. 그러면 군인들이 무엇을 학습했겠나. ‘이 정부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구나. 일전 불사의 결연한 의지가 없다’는 것을 학습하는 거 아니냐.”

―박근혜정부가 반드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반드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군 통수권이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는 꼬리표가 붙고, 주가 떨어지는 문제부터 생각하는 정권이라는 인식이 퍼지면 그 다음부터 군 수뇌부는 가능하면 시끄러운 일을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군 통수권자의 결연한 의지가 없으면 절대 북한의 버릇은 못 고친다. 각오를 해야 한다. 국민들도 주권국가로서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대가를 치러야 하고,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용기와 성숙한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 통수권자의 결연한 의지와 국민의 용기, 애국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어떤 능동적 선제공격도 할 수 없다. 계속 북한에 끌려가게 된다. 북한의 지도자보다 더 결연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북한은 실질적 핵보유국이 되어가는데 우리는 대응 수단이 마땅치 않다. 핵을 가진 북한과 어떻게 맞서야 하나.

“자존심은 상하지만 북한은 핵실험을 통해 핵의 경량화·소형화에 성공하고 운반수단도 갖춘 군사강국이 됐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북한은 이미 핵 강국이 돼버렸는데 우리만 비핵화하자는 얘기는 현실성이 없다. 이런 차원에서 미국의 전술핵을 남한에 재배치하는 방안은 고려해볼 만하다. 우리 땅에 핵이 있는 것과 하와이나 미국 본토에 있는 것은 북한이 받아들이는 위협강도에서 천지차이다.”

<약력>
1951년 경남 사천 진주고 육군사관학교(30기) 39사단장 1군 사령부 참모장 8군단장 건군60주년 기념사업단장 3군 사령관 35대 합참의장 국제대 석좌교수 강한대한민국 추진운동본부 고문

대담 =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정리=안두원 기자, 사진=이재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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