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심훈, ‘그날이 오면’)
광복은 부활이었다. 자주 독립의 희망이 삼천리 방방곡곡에 흘러 넘쳤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냉전의 대리 전쟁터로 변했다. 아름다운 우리 강토는 쑥대밭이 됐다.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났다. 그렇게 70년이 속절없이 흘렀다. 광복의 기쁨에 더덩실 춤을 췄던, 전쟁과 분단의 세월을 온몸으로 견뎌낸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고 있다. 광복 70년의 의미와 교훈을 얻기 위해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만났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의 손자인 이종찬(79) 전 국정원장은 “해방 정국에서 백범 김구 선생과 우남 이승만 박사가 협력했다면 지금처럼 보혁 갈등이 심화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못내 아쉬워했다.

이 전 원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이 전 원장의 작은할아버지)의 끊임없는 설득 덕에 백범은 어느 정도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할 마음을 굳혔다”는 비사를 공개했다. 그는 “이시영 선생은 ‘내가 부통령직을 맡고 있지만 나이(80)가 너무 많다. 이제 당신이 하라’는 식으로 백범을 설득했다. 그러던 와중에 백범이 암살당했다. 안타까울 따름이다”고 말했다.

이 전 원장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데다 임정 요인들이 중국에서 귀국했을 때 미국 유학파들을 중심으로 한민당이 조직돼 그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면서 “하지만 임시정부에게는 국민적 지지가 있었던 만큼 이를 바탕으로 한민당과 화합을 하는 것이 옳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데 백범은 다들 알다시피 외골수였다. 백범 입장에서는 귀국하자마자 ‘일제 때 해먹던 놈들이 또 해먹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백범과 한민당은 틀어졌다”면서 “백범은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 없이 우국충정만 있었다”고 말했다. 그 시점에 이시영의 설득으로 백범이 남한 단독정부에 참여하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암살당했다는 것이다. 김구를 임시정부 주석으로 추대한 이시영은 김구의 멘토 같은 존재다. 이 전 원장은 “김대중정부 시절 김 전 대통령과도 해방 정국에 대한 토론을 많이 했는데 김 전 대통령도 ‘당시의 정치인이었다면 백범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라고 권했을 것’이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이 전 원장과의 인터뷰는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우당기념관 접견실에서 진행됐다.

김대중정부의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79) 우당장학회 이사장은 광복을 중국 상하이에서 맞았다. 그의 조부인 이회영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직후인 1910년 12월 아들 이규학(李圭鶴·이 전 원장 부친) 등 가솔 60여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회영 일족은 만주 등을 거쳐 1919년 상하이로 거처를 옮겼고 1936년 4월29일 그곳에서 이 전 원장이 태어났다. 이 전 원장은 지금도 자신을 농담조로 ‘상하이방(上海幇)’이라고 부른다. 그는 상하이에서 광복의 소식을 들었다. 이 전 원장 가족은 46년 5월 꿈에 그리던 조국에 돌아왔다. “배가 상하이 부두를 지나 서해를 건너 제주 근방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산이란 것을 봤다. 그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 전 원장은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봤으며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정부의 주역으로 활동하며 현대사의 산 증인이 됐다.

―광복을 어떻게 맞았나.


“미국이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1945년 8월9일)한 다음 날이었다. 집에 돌아와 잠시 머물었던 아버님(이규학)을 누가 찾아왔다. 꼭 베트남의 호찌민처럼 빼빼 마른 사람이었다. 그분이 바로 정화암(鄭華岩) 선생이었다. 정 선생은 항일전선에서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많은 일본 고위간부와 친일파를 처단한 대담한 분이었다. 그러나 외모로는 가냘프기 짝이 없는 분이었다. 아버님과 정 선생은 골방에 들어앉아 무언가 숙의를 했다. 그때 이미 아버님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고문 끝에 청각을 거의 상실한 몸이었다. 그러므로 자연 필답으로 밀담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두어 시간의 대화가 끝난 후 정 선생은 바람처럼 훌쩍 떠났고, 아버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자! 이제 우리도 곧 고국에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정 선생은 이미 일본의 패망을 알고 아버님과 여러 가지 사후 문제를 논의한 것이었다. 내가 골방에 들어가 보니 재떨이에 종이를 태운 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정 선생이 아버님을 찾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후 며칠 안 되어 목 매도록 기다렸던 일본의 패망의 날이 왔다. 나의 부모님은 1910년에 중국에 망명한 이래 내내 객지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조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국이었다.”

 

1945년 11월5일 환국 길에 상하이를 찾은 임시정부 요인들. 당시 아홉살이던 이 전 원장(원 안) 뒤로 백범 김구
―광복 직후 상하이의 풍경은.


“일본군이 물러나니 제일 먼저 한인교민회가 조직됐다. 하지만 교민회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없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일단 돈이 없지 않나. 쫓겨 다니다 보니 인맥도 넓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에 붙어서 장사를 하고 심지어 아편을 팔던 사람들까지도 앞장서서 한인교민회를 만들어 돈을 내는 등 표변했다. 아버님은 ‘그 사람들끼리 노는 것’이라며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가족도 나름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만끽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집에 많이 몰려왔고 아버지의 즐거워하는 모습도 자주 보여 ‘이게 해방이구나’ 싶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광복군 선견대가 상하이에 들어왔다. 광복군 선견대는 기존 교민회를 인정하지 않았고 새로 교민회가 구성됐다. 여기에는 아버님도 참여했다.”

 

1974년 주영 대사관 참사관 시절, 부인 윤장순씨와 함께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 길에 상하이에 들렀다. 기억나는 일들을 얘기해 달라.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을 다시 찾았지만 국제 정세는 우리에게 즉각적인 귀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버님은 끊임없이 충칭의 임시정부와 통신을 하였지만 사후 정리할 것이 있으므로 귀국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뿐이었다. 1945년 10월이나 되어서 임시정부 요인 일행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배려로 그의 전용기편으로 상하이까지 왔다. 상하이에 있었던 일가들, 교포들은 밤을 새워서 태극기를 만들고 환영 준비에 바빴다. 상하이 비행장에서 우리는 임정요인 일행을 맞이했다. 나는 당시 백범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작은 할아버지인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유림 등 여러 선생들을 만났다. 임정 요인들이 상하이에 머물다가 마지막으로 작별하고 조국으로 돌아가시는 전날 저녁 가족들은 모두 모였다. 당시 김구 주석의 연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김 주석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대통령 나사복(羅斯福·루스벨트)이가 영국 수상 구길(球吉·처칠)이를 만나서 조선독립을 확약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젊은이들이 모두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김구 주석이 영어를 모르니깐 미국 대통령이나 영국의 수상 이름을 한국식으로 부른 것이 우습다는 것이었다.

 

1945년 11월5일 상하이 공항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을 마중나간 이종찬 전 국정원장(앞줄 오른쪽, 왼손에 태극기를 든 소년) 일가. 후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는 이시영 선생(앞줄, 중절모에 지팡이)이 아들과 조카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고 있다.
우당기념관 제공
김구 주석은 희망에 찬 말을 남겼다. ‘이제 여러분들이 조국에 돌아오면 옛날 조국이 아니라 민주적인 나라, 행복한 나라가 여러분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우레 같은 박수로 그분의 연설을 환영했었다. 김 주석의 주변에는 쟁쟁한 요인들이 모두 배석했었다. 30년간 임시정부를 지키신 이분들이야말로 장차 한국을 지도해 나가실 어른들이고, 모두가 하나같이 내 눈에는 바위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불과 5년 후에 대부분이 북한군에 의하여 납북되어 비명에 가실 줄이야….


 

1986년 국회 외무위원 시절 참석한 삼일절 행사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 이후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미국이 충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땐 비행기가 미군 비행기밖에 없었기 때문에 충칭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임시정부 자격으로 활동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라고 했다. 결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가 왜곡된 첫 번째 단서라고 볼 수 있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교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이 김포 비행장에서 고국 땅을 밟았을 때 환영객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1988년 이시영 부통령 동상 옆에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군은 연합군 자격으로 참전하지 않아 임시정부가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분석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광복군을 조직해서 대일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훈련하는 도중 원자폭탄으로 전쟁이 일찍 끝났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국내 진공작전을 펼칠 수 있었지만 그 전에 종전이 돼버렸다. 그래서 미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들어와서도 푸대접을 받았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우당기념관 집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중국 상하이에서 맞은 광복의 순간을 회고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해방 정국의 이승만 박사를 평가한다면.


“정치적 안목과 정보력에 있어서는 역대 대통령을 통틀어 이승만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정치고문인 미국의 로버트 올리버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국제정세를 파악했다. 올리버는 편지를 통해 소련, 북한의 동향을 상세히 알려줬다. 당시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진주하자마자 인민위원회를 조직해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정부를 세우지 않았다면서도 사실상 정부가 할 일을 한 셈이다. 이때 이승만은 ‘통일이 되기엔 이미 늦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주장한 ‘정읍 발언’도 이 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현재 이 박사가 정권 욕심 때문에 정읍 발언을 했다고 매도하는 말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시점에서 ‘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위에서 밀고 내려오겠구나’ 하는 경계심이 낳은 발언이라고 본다.”

―백범과 이승만이 화합했더라도 분단은 불가피하지 않았나.

“그렇다고 본다. 이미 소련이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세우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불가피했을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보혁 갈등은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았을까. 요즘 백범 노선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그의 노선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당시 백범이 시도한 남북협상은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공산주의 노선과는 이미 타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김일성이 백범을 이용하려 했다고 보는 게 맞다.”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와 함께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바로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승만은 ‘정부 수립 대통령’이지 건국 대통령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국회의장으로 직접 대한민국 국회 개회사를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리 민국은 기미년(1919년)부터 시작됐다. 민국 연호는 기미년으로부터 기산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지만 최근 나오는 ‘건국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임시정부부터 따진 게 아니지 않나. 따라서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를 한다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어떤 뜻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는지 모르고 주장하는 것이다. 국회 개회사뿐만 아니라 관보 등에서도 이승만은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봤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초 “친일파 주도로 이뤄진 대한민국 건국으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불의(不義)가 정의(正義)를 눌러온 역사”라고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그런 평가에 100% 동의하지 않는다. 김 전 대통령과는 이 주제로 놓고 토론을 많이 했는데 김 전 대통령도 ‘당시의 정치인이었다면 백범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라고 권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중국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오쩌둥(毛澤東)을 평가한 ‘공칠과삼(功七過三)’을 말하고 싶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초기의 이승만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인의 장막에 둘러싸이고 권력에 취하면서 말로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분명 공도 무시할 수 없다.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나는 박정희를 나쁘게 보지 않는다. 유신 등의 엄혹한 시절이 있었지만 공도 따져야 한다. 이후의 권력들도 마찬가지다. 권력뿐 아니다. 모든 역사 평가를 편협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파 인명사전이 4000명 이상을 친일파로 분류한 것은 과하다는 생각이다. 참고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친일파 명단은 7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친일파 기준의 적용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당시의 계급에 따라 선을 긋는 것은 역시 잘못된 일이다. 행적을 평가해서 친일파 여부를 가려야 한다. ”

―친일파의 범위를 너무 넓게 잡았다는 의미인가.

“행동이 얼마나 악질적이었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의암 장지연 선생 같은 분까지 친일파에 포함하면 민족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무조건 친일 명단에 넣고 본다면 ‘독립운동가가 소수고 친일파가 많았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게다가 일본이 이것을 두고 ‘친일파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한국도 식민지배를 바랐다는 뜻이 아니냐’고 역논리를 펼 수도 있다.”

 

1992년 한·영의원친선협회 회장 시절 영국 찰스 왕세자로부터 훈장을 수여받는 장면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방식을 놓고 외교독립론, 무장투쟁론, 실력양성론이 충돌했다.


“세 가지 노선이 서로 이질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특히 외교독립, 무장투쟁 노선은 같이했어야 옳았다. 예를 들면 아일랜드 독립운동은 IRA(아일랜드공화국군)와 신페인당이 함께 움직였다. 신페인은 IRA의 정당조직으로 외교교섭과 무장투쟁을 병행했다. 무장 없이 외교만 하자는 것도 문제고, 외교로 무엇이 되겠나 하면서 경시하는 입장도 문제다. 그러다 보니 양쪽 노선 모두 아무 것도 안 됐다. 외교와 무장이라는 두 개의 바퀴를 만들어 같이 돌렸어야 했다. 실력 양성도 중요하다. 다만 실력 양성을 친일의 변론으로 삼는 것은 안 된다. 주체적으로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어야 한다. 실력 양성이 잘못하면 일제와 협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당시 셋 모두를 적절히 배합하는 리더십이 없었다는 점이 아쉽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소회는.

“올해는 광복회가 생긴 지 50년째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최근 광복회 50주년 행사가 열렸다. 광복 70주년인데 광복회 창설 50주년이라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그 20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나. 해방되고 3년 동안 미 군정의 통치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전쟁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광복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해야 할 인물들이 학살당하거나 끌려간 뒤 이름 없는 산하에 묻혔다. 이런 비극을 바로잡으려면 역사가 바로 서야 한다. 독립운동을 했던 위인들은 대부분 삼대가 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중에 나라가 다시 위기에 빠지면 누가 저항하려 하겠나. 광복회가 할 일은 이런 절망을 이겨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후손들에게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는 것이 먼저다. 친일파 후손들은 대한민국이 1948년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1919년 3·1 독립선언을 통해 최초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한다고 밝혔고 그 선언이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이 의지를 이어나가는 것을 광복회의 지상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6형제 가족 40여명 다함께 독립운동 위해 해외로 망명…‘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

 

“동서 역사상 국가가 망할 때 나라를 떠난 충신·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가족 40여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일제히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6형제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이관직은 ‘우당 이회영(사진) 실기(實記)’에서 우당 일가의 만주행을 극찬했다. 백사 이항복을 비롯해 영의정만 셋을 배출한 이회영 가문은 삼한갑족(三韓甲族)이었다. 나라가 멸망하고 이른바 권문세가 다수가 일제의 작위를 받고 친일파가 되었을 때 이회영 일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해외로 망명했다. 서양식으로 표현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다.

이회영 형제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사 비용을 위해 경작하던 위토까지 처분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달 초 덕수궁 중명전에서 열린 ‘우당 이회영과 6형제’ 전시회 특별강연에서 “우당 가문은 현재 명동 인근에 1만여평 토지를 보유했다. 굳이 계량해 보자면 오늘날 2조원은 넘는다”며 “그 외에도 개성, 양주 등 전국에 소유한 토지 266만여 평과 드러나지 않은 재산의 가치를 합하면 10조원에서 수백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모두 썼다. “우당 집의 밥을 얻어먹지 않은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우당의 6형제 중 다섯째 이시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복을 보지 못하고 중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대소가와 권속 6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넜지만 해방을 맞아 고국 땅을 밟은 이는 20명 남짓이었다.

 

대담=조남규 사회부장, 정리=이우중 기자

 

*아래는 조선일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가 2017년 8월31일자 조선일보에 '만주로 떠난 이회영 형제와 투사의 아내 이은숙'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글.  

[박종인의 땅의 歷史] 만주로 갔느니라… 목숨을 바쳤기에 떳떳했느니라

이은숙의 혼례

1908년 10월 20일 서울 명동 상동교회에서 열아홉 살 규수 이은숙이 마흔한 살 먹은 사내 이회영과 서양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첫 아내와 사별한 이회영은 두 번째 결혼이다. 평안도 암행어사와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넷째 아들이다. 2년 전 별세한 고관대작 가문에 출가했으니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비단옷 입고 살겠지, 라고 남들은 생각했다.

2년 뒤 이회영 집안은 물론 시아주버니 건영과 석영과 철영, 시동생 시영과 호영까지 여섯 형제 집안이 문중 땅 수백만 평을 일시에 다 팔고서 한꺼번에 만주로 떠났다. 식솔이 예순 명에 달했고 마차가 열 대가 넘었다. 1910년 경술년 12월 30일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고 넉 달이 지난 엄동설한 동지섣달이었다. 단순한 이사 혹은 이민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을 위한 집단 망명이었다.

경술국치와 집단망명

1910년 8월 29일 이름만 남아 있던 나라, 대한제국이 이름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많은 고관대작과 지식인은 일본에 빌붙어 권세를 얻었고, 또 많은 사람들은 투쟁을 택했다. 민영환처럼 1905년 을사늑약 때 자결한 사람도 있었고 매천 황현처럼 경술년 국치 때 자결한 사람도 있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한편에는 우당 이회영의 묘가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한편에는 우당 이회영의 묘가 있다. 아내 이은숙과 합장이라고 새겨져 있지만, 이회영의 유해는 없다. 허묘다. 이회영은 전재산을 털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인 여섯형제의 넷째다. /박종인 기자
'스스로 죽어서 일본을 이롭게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지식인들은 망명을 택했다. 을사늑약 때 거리에서 바위에 머리를 찧어 자살 미수에 그쳤던 이상설이 그랬고(백범일지), 경상도 안동의 지사 석주 이상룡이 그랬다. 이상룡은 궁궐 같은 99칸짜리 임청각을 버리고 온 가족이 만주로 떠났다. 이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총독부 요시찰 인물, 불령선인(不逞鮮人) 목록에 올랐다. '푸테이(不逞)'는 '고집 세고 반항하는 놈'이라는 뜻이다.

대신 '착한' 조선인에게는 상을 주었다. 합방에 공헌한 고관대작들에게는 귀족 작위와 돈을 내려주었다. 지역 양반들에게도 효자, 효부상을 듬뿍 내렸다. 온 나라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재인용). 고관대작 가문에 갑부였던 이회영 형제는, 망명을 택했다.

이회영 형제의 망명

'사람들은 우리를 공신의 후예라 한다. 괴변으로 한반도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명문 호족으로서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지 않고 구차히 생명을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왜적과 혈투하시던 조상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하니, 여러 형님과 아우님들은 따라주시기를 바라노라.' 형제들을 모아놓고 이회영이 이리 말했다.(이관직, 〈우당 이회영 실기〉) 이회영 형제는 조선 초 정승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다. 모두가 그를 따랐다.

우당 이회영(1867~1932).
우당 이회영(1867~1932).
먼 친척 백부인 이유원에게 양자로 간 둘째 이석영은 갑부였다. '양주 가오실에 별장이 있는데, 서울에서 거리가 80리였다. 80리 왕래하는 길이 모두 그의 밭두렁이라 다른 사람 땅은 단 한 평도 밟지 않고 다녔다.'(황현, 〈매천야록〉)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왕현종에 따르면 남양주 화도읍 가곡리에 있던 땅은 640정보, 192만 평에 달했다. 서울 명동에도 형제들 땅이 산재했다. 1960년대 한 조사에서 600억원에 이른다는 추정이 나온 적이 있다.

그 땅을 팔고, 못 판 땅은 버리고서 이 갑부 집안 6형제가 만주벌 북풍 속으로 떠난 것이다. 월남 이상재가 이렇게 말했다. "6형제 전 가족이 한마음으로 결의했으니, 동포의 모범이 되리라."(우당 이회영 실기)

처분하지 못한 명동 땅은 총독부 토지조사를 거쳐 남의 땅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주소로 경기도 경성부 황금정 2목 164번지 591평도 이 형제들 땅이었다. 현재 을지로 2가 164번지 부근이다. 서울 YWCA회관 북쪽이다. 회관 소공원에는 이회영의 흉상이 서 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독립운동에 조직과 자금은 필수다. 이회영 형제가 바로 그 일을 했다. 형제는 이듬해 4월 안동 선비 석주 이상룡과 함께 유하현 삼원보에 경학사를 설립했다. 밭을 갈아 생산을 하고(耕) 교육을 하며(學) 군사력을 키우는(武) 결사체였다. 사장은 이상룡, 내무부장은 이회영, 재무부장은 오랜 동지인 이동녕이 맡았다. 이상룡이 쓴 취지문은 이렇다. '한 삼태기 흙이 쌓여 태산을 이룬다. 힘을 축적해서 끝장에 대비할 것이다.'(우당 이회영 실기)

그리고 이듬해 여름, 이석영의 자금을 털어 구입한 인근 합니하 산속에 본격적인 독립운동 교육기관이 설립되니, 8년에 걸쳐 3500명에 이르는 항일투쟁 지도자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같은 만주 항일투쟁의 불꽃을 지핀 운동 기지였다. 교장은 셋째형 이철영이 맡았다. 3·1 운동 이후에는 해마다 입교를 원하는 조선 청년이 600명에 이르렀다. 3년 만에 자금이 바닥났다.

독립투쟁의 중심에서

신흥학교 설립 후 자금난에 빠진 이회영은 1913년 서울에서 돈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다 1918년 이회영은 왕실 시종 이교영을 통해 고종 망명을 기도한다. 일본의 귀족 작위를 거부했던 전 내부대신 민영달이 5만원을 댔다. 동생 이시영이 이 돈으로 북경에 고종 거처를 마련했다. 그런데 이듬해 1월 20일 고종이 급서했다. 식혜를 들이켜고 죽었다고 했다. 독살당했다는 말이 돌았다. 그날 왕실 당직자는 이완용이었다. 훗날 사학자 이증복은 조선 남작 작위를 받은 한창수와 시종관 한상학을 독살범으로 지목했다. 또 다른 친일파 윤덕영이라는 설도 있다.

3·1운동 직전 이회영은 중국으로 돌아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회영은 "자리다툼에 분규가 끝이 없을 것이니" 행정조직이 아닌 투쟁본부를 만들자고 했다. 동생 이시영은 재무총장으로 임정에 참여했고 이회영은 무장투쟁노선을 걸었다.

이후 북경 자금성 북쪽 이회영의 집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로 북적거리는 사랑방이 됐다. '그 당시 국내에서 마음을 품은 인물 즉 청년들은 북경에 오면 반드시 나의 부친을 뵙게 되고 대개 우리 집에 거주하게 됐다.'(이회영의 아들, 독립지사 이규창, 〈운명의 여신(餘燼, '남은 재'〉) 이규창이 기억하는 사람들을 적으면 그대로 한국 독립운동 인물사가 된다.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 노선사가 된다. 민족주의,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모든 노선이 이회영의 북경 거처를 거쳐 나뉘었다.(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간난과 고초, 죽음

이회영이 최후에 입고 있던 옷.
이회영이 최후에 입고 있던 옷.
백여 명의 대가족을 이끄는 모습은 만주 원주민들에게는 장관이었다. 중국 육필 마차가 거의 백 차가 되니 대부호의 이동이다. 부호의 호화로운 행렬쯤으로 짐작했으리라.(이규창, 〈운명의 여신〉)

대의를 좇는 남정네를 따라가니, 여자들 간난과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회영이 서울로 간 사이 이은숙은 마적 떼에게 총을 맞고 6개월 된 아들 규창은 얼굴을 화롯불에 크게 데였다. 그 몸으로 이은숙은 큰딸 규숙과 젖먹이를 안고 업고서 신흥학교 학생들 밥을 지었다. '죽을 쑤는 때면 상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이은숙, 〈서간도시종기〉)

가난을 피해, 대의를 좇아 대륙 곳곳으로 흩어진 형제들은 고단하게 살고 고단하게 죽었다. 자금을 책임졌던 이석영은 굶어 죽었다. 맏형 건영도 병사했다. 신흥학교장 셋째 철영도 병사했다. 여섯째 호영은 아들과 함께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 아들 대도 대부분 해방 전 중국에서 죽었다.

이회영의 두 딸 규숙과 현숙은 고아원에서 산 적도 있었다. 아들 규창은 함께 살던 단재 신채호가 준 옷을 뜯어 만든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1925년 아내 이은숙이 돈을 벌기 위해 혼자 조선으로 돌아갔다. 고무신 공장 급료와 옷 수선으로 번 돈을 보내면, 그 돈으로 가족들이 연명했다. 삶은 매우, 아주 매우 신산하였다. '귀한 집 부인들이 이 같은 고생은 듣지도 못했을 것이어늘, 그러나 여필종부의 본의를 지키는 것이다.'(서간도시종기) 그러나 그해 작별한 남편을 이은숙은 영영 보지 못한다.

이회영의 죽음

이회영은 백정기, 정화암 등과 의기투합해 남화연맹을 창설했다. 요인 암살이 주된 임무였다. 1932년 11월, 윤봉길 의사 의거 후 투쟁의 중심지로 다시 만주를 택한 이회영은 상해에서 대련 행 여객선에 올랐다. 그런데 대련 항구에서 이회영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11월 17일 일본 경찰은 심문 도중 이회영이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시신 인수를 위해 찾아간 딸 규숙은 혈흔이 낭자한 얼굴과 역시 혈흔이 묻은 옷을 보았다. 동지들은 이회영이 고문사했다고 확신했고, 이회영을 밀고한 사람이 있다고 확신했고, 찾아냈고, 처단했다.

이회영의 손자인 우당장학회 회장 이종찬(전 국정원장)이 말했다. "밀고자는, 우리 할아버지의 조카 이규서다." 이회영의 아들 규창은 이석영의 둘째 아들인 사촌형 규서를 동지들에게 고발했고, 동지들은 이규서와 공범 연충렬로부터 자백을 받고 처단했다. 이종찬이 말했다. "집안 어른들은 창피하니 함구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역사는 떳떳해야 한다. 그때 우리 우국지사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 속에 투쟁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증거니까."
형제 가운데 다섯째인 이시영만 살아남아 해방을 맞았다. 이시영은 1945년 11월 9일 다른 임정 요원들과 상해 비행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눈물을 닦았다. 노혁명가, 노투쟁가가 울었다. 1948년 이시영은 대한 민국 초대 부통령이 됐다가 6·25전쟁 와중인 1951년 사퇴했다. 이시영은 서울 수유동 애국순국선열묘역에 묻혀 있다. 서울 신교동에 우당기념관이 있다.1946년 귀국한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1966년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를 탈고했다. 첫 문장은 이러했다. '이영구의 과거나 현재는 모두가 몽환(夢幻)이라.' 이영구는 남편 이회영이 지어준 이름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31/2017083100013.html

[광복·분단 70년, 대한민국 다시 하나로] "통일은 새로운 기회… 다가올 70년도 희망의 시대 열 것"

문정인 연세대 교수, 윤덕민 국립외교원장 대담, 사회=조남규 외교안보부장

한반도 통일과 선진국 도약이라는 미완의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를 풀어내기 위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세계일보는 광복·분단 70년의 성취와 미완의 과제를 반추해보는 연중 시리즈를 시작한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온 각계 인사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광복·분단 70년이 남긴 질곡의 현장을 찾아 남북과 동서로 갈라진 7500만 겨레의 힘을 결집할 수 있는 교훈을 모색해 본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와 윤덕민 국립외교원장은 각각 진보와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학자다. 문 교수는 김대중·노무현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인 햇볕 정책과 동북아평화번영 정책 설계에 참여했고, 윤 원장은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의 대북 정책 수립에 깊숙이 관여했다.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대북정책과 동북아 전략, 한반도의 미래 비전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의 시각은 조금씩 엇갈렸지만 지난 70년이 성공의 역사였으며 통일이 한반도의 새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희망의 과정이라는 인식에서는 하나였다. 말미에 이르러서는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는 저출산 고령화, 청년 실업, 양극화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문 교수와 윤 원장은 통일을 ‘새로운 돌파구’와 ‘또 하나의 프런티어’(신 개척지)로 명명했다. 대담은 우리가 지난 70년을 성공했으니 다가올 70년도 성공할 것이라는 희망을 확인하면서 마무리됐다. 대담은 지난달 16일 세계일보 서울 광화문 사옥 인터뷰실에서 진행됐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윤덕민 국립외교원장, 문정인 연세대 교수, 세계일보 김민서 기자,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광복·분단 70년을 맞았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격동의 70년을 회고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하나.

문정인 교수(이하 문 교수):과거에 대한 성찰, 현재 위상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진단, 미래로 나아가야 할 방향 설정이 이뤄져야 한다. 6·25전쟁 이후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루고 민주화까지 이뤘다는 점은 분명한 성과다. 동남아와 중남미에 우리보다 훨씬 오래전에 독립을 이룬 국가도 있지만 우리만큼 출중하게 변모한 나라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분단된 한반도는 군사적 대립과 갈등관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미완의 과제를 안고 있다. 선진국 경제가 맞닥뜨린 저성장·고실업·저소비의 ‘뉴 노멀(New Normal)’은 우리도 비켜가기 어렵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부상에 따른 지정학적 역학관계 변동 등 도전이 간단치 않고 불확실성이 너무나 크다. 남북이 하나 된 한반도를 만들어 분단을 극복함으로써 미·중과 중·일 갈등 사이에서 통일 한반도가 중심축 역할을 수행하며 동북아 평화를 이끌어야 한다.

윤덕민 원장(이하 윤 원장):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누렸으나 분단이라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분단은 현재 진행형이다. 문 교수님이 지적했듯이 세계 최빈국이었던 우리가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뤄 세계 10위권의 경제국가로 부상했고 세계 7위의 무역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성과다. 보편적 가치인 민주화를 우리 스스로 힘으로 이뤄낸 점은 엄청난 성과다.

-성공의 70년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도 이승만 초대 대통령 평가 등 현대사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윤 원장: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당시의 국제정세를 보면 1948년은 이미 동서 냉전 시기였다. 당시 소련의 움직임을 보면 남북 분단은 불가피했다고 봐야 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분단시킨 장본인인 양 여기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전 대통령이 국제 환경 흐름을 제대로 읽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문 교수:이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는 있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분단을 초래한 최대 원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당시 상황에서는 최선이었다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다. 건국에 대해서는 분명한 국민적 합의를 지니고 있다. 상하이(上海) 임시정부가 있었다. 중국을 비롯해 국제사회가 당시 인정한 임시정부였다. 1948년이 대한민국이 주권국가로서 공표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상하이 임정의 전통을 부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남북관계는 정권교체에 따라 냉온탕을 오갔다. 김대중, 노무현정부의 남북정상회담 성과물인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이 계승되지 않은 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문 교수:윤 원장이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웃음)

윤 원장:승계된 점도 있다. (웃음) 10·4 선언은 합의된 내용 가운데 현실성이 없는 것도 많았다. 무조건 다 이행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대통령 선거 몇 달 앞두고 남북정상이 합의를 하면 다음 정부가 전부 다 이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정부 나름의 성격이 있고 시대의 요구가 있으므로 어느 정도의 변화나 조정은 필연적이다. 박근혜정부는 기본적으로 그간의 합의를 인정하고 있다. 박근혜정부의 대북 구상인 한반도신뢰프로세스 자체가 그렇다. 지금까지 남북한이 합의한 것을 잘 지키자는 것이고, 신뢰를 쌓아 남북관계를 풀어나가자는 정신이다.

문 교수:10·4선언만 놓고 봐도 노태우정부 때부터 각 부처가 갖고 있는 사업을 모아서 만든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10·4 정상선언 후속 조치로서 남북총리가 45개 합의사항 만들면서 구체적인 사업결정 여부는 사안별로 추후 협의해 나가자는 합의를 했다. 어려운 것은 뒤로 미루고 쉬운 것부터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정부도, 이명박정부도 지속성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남북 문제 만큼은 정치 쟁점화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인도적 지원, 인프라 개발, 그리고 민족 동질성 회복 3가지를 핵심으로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구상은 사실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다. 박 대통령이 드레스덴 구상을 밝힐 때 “6·15와 10·4선언의 연속선상에서 이런 제안을 한다”는 대목이 들어갔다면 북한이 제도통일 또는 흡수통일 운운하지 않았을 것이다.

윤 원장:진보·보수의 대북정책이 마치 크게 다른 것처럼 비치지만 사실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을 예로 들면 그 원형은 노태우정부 때 만든 포용정책이다.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북한보다 경제력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랐을 때였음에도 흡수통일 정책이 아닌 포용정책을 표방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명박·박근혜정부에 이르기까지 북한을 흡수하겠다는 정책을 쓴 적이 없다. 북한 붕괴 가능성이 거론된 김영삼정부 시절에도 북한 붕괴 시나리오를 갖고 정책을 편 게 아니었다.

문 교수:동의하지 않는다. 예를 하나 들겠다. 과거 국가정보원에 대북 막후접촉을 담당하는 대북전략국이 있었는데 이명박정부 들어 와 폐지됐다. 대북침투와해 공작과 대공수사 기능만 강화됐다. 대한민국 헌법 자체가 평화통일을 지향하므로 북한을 압살하고 흡수하는 통일을 얘기를 할 수 없는 구조다. 그런데도 북한 붕괴론에 기초한 흡수통일론이 당시에 대세를 이뤘다.

윤 원장:이명박정부 시절 여러 번 정상회담을 시도하고 대북협상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만간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질 것 같다고 말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천안함 폭침 사건이 터졌고,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논의했는데 뒤통수를 맞았다. (북한이) 대화와 도발을 오가며 롤러코스터를 타는 상황이었다. 결국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김정은(국방위 제1위원장)으로의 후계 구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남북 관계를 북한이 정치적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윤덕민 원장(왼쪽)·문정인 교수

-박근혜정부는 원칙 자체를 중요시하는 지도력이다 보니 대북관계에서도 원칙에만 얽매여 있다는 지적도 있다.



윤 원장:여러 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국민 대다수는 남북관계가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과거처럼 우리가 불필요할 정도로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하는 것보다는 정상적 관계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적 바람이 있다고 본다.

문 교수:박근혜정부는 우리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나가지 않겠다는 것과 북한과의 협의는 공식 채널을 통해서만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런 것은 절차의 문제라고 본다. 대통령의 원칙은 국익 우선의 원칙이어야 한다. 윤 원장 같은 분이 대통령께 당국 간 공식 회담을 하되 비공식적으로 당국자 간 막후 접촉이나 물밑 접촉을 통해 사전에 조율하는 방안을 건의드렸으면 한다.

윤 원장: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을 계기로 젊은 층 가운데 북한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아진 것 같다. 이 문제를 매듭지으려면 북측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큰 틀에서 (천안함 폭침에 따른) 5·24 대북제재조치를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으나 장기적 관점에서 남북관계의 질적 발전을 생각한다면 5·24 조치는 문제의 원인이 된 점을 어느 정도 매듭을 지어야 더 탄탄한 남북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문 교수: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일단 천안함 건은 북한이 인정을 안 할 것이다. 따라서 북의 사과와 재발 방지를 전제 조건으로 한 남북관계 개선은 다분히 비현실적이다. 역지사지 입장에서 봐야 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결말이 날 것 같지 않다. 중국 얘기를 해보자. 지난 70년을 미국과 함께했다면 앞으로 70년은 중국과 같이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윤 원장: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가장 강력한 패권국가인 미국과의 동맹을 통해 운신의 공간을 만들고, 지역 내 안정과 균형을 만들어냄으로써 성공의 환경을 조성했다고 본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지역 내 균형이 깨질 때마다 대한민국은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의 부상은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으나 엄청난 도전이다. 두 개의 태양 아래 살 수 없으니 중국을 택해야 한다는 분도 있으나 과거 중화질서에 편입해 조공(朝貢)을 바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는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은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강력한 한 축이자 안전판으로 삼으면서 중국과도 전략적 협력 관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중층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면 된다. 중국이 너무 커져서 우리가 (미국과의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때가 올지, 안 올지 모르겠지만 내 생애에는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문 교수: 우리에게 가장 바람직한 관계 설정은 경제는 중국과, 안보는 미국과 손잡는 양면전략이다. 문제는 미·중 두 나라가 우리에게 자꾸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3년 12월 미국 조 바이든 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을 접견한 자리에서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하는 것은 좋은 베팅이 아니다”고 말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도 한국 방문 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을 권유했다. 윤 원장도 말했듯이 북한이라는 위협이 존재하는 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동맹이 갖는 함정이 있다. 동맹은 늘 공동의 위협과 공동의 적을 가정한다. 단기적으로는 한·미동맹에 의지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동맹처럼 편 가르기가 아닌 역내 국가가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일 관계로 넘어가 보자.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은 다 하는 것 같은데 묘수가 없다.

윤 원장: 일본의 젊은 세대가 성장하면 한·일 간에 감정으로 얽힌 역사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는데 오히려 (식민지 시절 가해와 피해의) 경험이 없는 세대들이 인구의 주류를 형성하는데도 해가 가면 갈수록 한·일관계가 악화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이 과거사 정립 문제이다. 얼마 전 폴란드를 다녀왔는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폴란드 사제단이 오히려 독일에 대해 폴란드를 용서해달라는 식으로 접근을 했다고 한다. 독일이 자각하고 손을 내미는 계기가 됐다. 독일 대통령이 무릎 꿇고 사죄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의는 과거의 불의를 기억하는 것보다 과거를 용서하는 데 있다”고 했다. 한·일 관계를 언급한 말은 아니었으나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말이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정부의 역사적 퇴행은 문제지만 우리가 일본을 용서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극우 보수와 일반인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 일본인이 일본 내 극우 정치인의 선동에 말려들지 않고 젊은 일본인들이 올바른 역사를 알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문 교수: 피해자의 용서와 가해자의 사과는 상호 작용을 해야 하는데 일본 정치를 움직이는 지도자들이 역사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문제다. 그런 상황에서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지역 내 중요한 협력 파트너다. 앞으로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시대다. 그들이 갈등을 해도, 협력을 해도, 한·일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일은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역사적 집단기억은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경험한) 세대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전수가 된다. 일본 국민 대다수는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일 양국에서 극우·민족주의적 시각을 가진 세력을 사회적으로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인식이라면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와 못 만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윤 원장: 그런 만남이 필요하지만 아베 정부의 퇴행적 역사 인식이 한·일 관계의 기초를 흔들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일본 정부가 진정성을 보여줘야 하고 그 시금석이랄 수 있는 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고 본다. 다른 문제와 달리 위안부 문제는 시간의 문제이다. 할머니들 연세가 모두 90세에 가까워 화해할 수 있는 시기가 몇 년 남지 않았다. 이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놓아야한다. 그 이후에는 아무리 화해하고 싶어도 화해할 수가 없게 된다. 위안부 문제를 잘 풀어나가는 것이 향후 새로운 한·일 관계를 형성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문 교수: 독도문제도 단순한 영토 문제가 아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한다고 독도가 일본 땅이 되는 게 아니다.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인정하고, 위안부 문제도 강제성이 없었다거나 (피해자가) 몇 명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해서 국제사회의 공분을 살게 아니라 아베 총리가 과감하게 진심으로 사과하면, 보상 문제는 기술적 문제이니 협의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정상회담 할 수 있다. 일본이 과거사 청산 문제를 정확히만 해결한다면 주변 국가가 일본의 정상 국가화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아베 총리의 대승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미래 비전을 얘기해보자. 우리 사회는 이념과 계층, 지역, 세대 갈등에 속박된 상태로 전진을 못하고 있다. 어떻게 갈등을 해소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나.

문 교수: 분단 상황이 지속하는 한 통일의 꿈을 실현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우리 정부가 합의에 의한 평화통일 원칙을 보다 분명히 해서 북한이 흡수통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통일준비위원회에서 준비 중인 통일헌장에 어떤 형태, 어떤 방식의 통일인지를 분명히 해둬야 한다. 박 대통령은 남남갈등을 극복하고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통일, 북한과 더불어 함께 준비하는 통일,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는 통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제 이를 실천해 나가면 된다.

윤 원장: 영화 ‘국제시장’을 보니 우리가 참 어려운 시기를 잘 견디고 열심히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 시절에는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있었다. ‘88만원 세대’로 일컬어지는 요즘 젊은 세대는 스타벅스에서 비싼 커피를 사 마시고 비싼 스마트폰을 쓰고 통신요금을 내면서도 저축은 못한다. 젊은 맞벌이 부부도 저축하는 대신 그 돈으로 비싼 취미 활동을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삶을 즐기며 사는 쪽을 선호하는 것 같다. 과거에는 금리가 괜찮아서 저축하면 집도 사고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보니 희망이 없다고 보는 것 같다.

한국만 보면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눈을 세계로 돌리면 중국과 인도 등에서 구매력을 갖춘 중산층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은퇴를 앞둔 베이비붐 세대가 퇴장하면 대한민국은 심각한 노동인력 부족 상태가 될 것이다. 하루빨리 정년을 연장하고 경험 있는 인력의 재활용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통일이 또 하나의 새로운 기회일 수 있다는 점도 적극 알려야 한다. 우리 인구의 90% 이상은 분단 이후 태어났다. 앞으로 20∼30년만 지나면 분단을 기억하는 사람도 더는 없다는 얘기다. 앞으로의 70년은 통일을 새로운 기회로 여는 희망의 시대로 만들어야 한다.

문 교수: 세계화 시대에 맞물려서 저출산 고령화니 양극화니 여러 문제점이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 담론이 부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중국과 인도도 얼마든지 진출이 가능하다. 통일이 되면 남북한 통합 인구가 약 1억명 수준으로 커지고 출산율도 증가할 수 있다.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야 한다. 지도자의 비전 제시와 사회적 담론 형성이 그래서 중요하다.

윤 원장: 전쟁까지 겪은 최빈국이 지금 이렇게까지 성장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기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모욕적인 말도 들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민주화를 이뤄내는 저력을 보였다. 자부심을 갖고 젊은 세대가 새로운 희망을 가져야 한다.

문 교수: 중동·아프리카·남미 지역의 경우 독립을 이루고 성장하면서 종파·인종 간 갈등을 겪었지만 우리는 종교갈등과 인종갈등이 없는 유일한 나라다. 상당히 동질성이 강한 사회이므로 좋은 지도자가 나와 희망의 메시지를 준다면 얼마든지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다. 지난 70년이 성공의 역사였듯이 앞으로의 70년도 성공할 수 있다. 

정리=김민서 기자, 사진=허정호 기자

■ 문정인 교수는…

●1951년 제주도 제주 출생 ●미국 메릴랜드대 정치학 박사 ●1차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대통령 자문 동북아시대위원장(장관급)·제2차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장(현)·대통령직속 통일준비위원(현)

■ 윤덕민 원장은…


●1959년 서울 출생 ●일본 게이오대 법학박사 ●남북 고위급 회담 특별 자문위원·외교안보연구원 교수·대통령 외교안보자문위원·국립외교원(옛 외교안보연구원) 안보통일연구부장 ●국립외교원장(현)


 

 



 

엘 캐피턴(El Capitan).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며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거대한 바위산입니다.

 미국 조지타운대 방문 연구원 시절인 2005년 여름, 요세미티를 찾았을 때 정말 큰 바위산이라는 느낌을 받았을 뿐인데, 세계 최대의 화강암 바위라고 합니다. 전 세계 암벽등반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란 사실도 뒤늦게 알게됐습니다. 2015년 1월14일(현지시간) 미국의 암벽 등반가 토미 콜드웰과 케빈 조거슨이 세계 최초로 엘 캐피턴의 '새벽 直壁(Dawn Wall)'을 맨손으로 오르는데 성공했다는 기사를 접하면서,제가 요세미티를 찾은 날에도 저 암벽에 사람들이 매달려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벽 직벽을 맨손으로 올라가고 있는 토미 콜드웰과 케빈 조거슨.     AP=연합뉴스

 

세계일보 유태영 기자가 외신을 참고해서 쓴 기사에 따르면 해발 2300m인 엘 캐피턴은 독특한 모양의 직벽으로 전 세계 등반가들의 도전 대상이었고 그 중에서도 '새벽 직벽'은 그동안 아무도 맨손 등반에 성공하지 못해 엘 캐피턴의 난공불락 루트로 불렸다는군요. 사고로 왼손 검지를 잃은 콜드웰이 이 루트를 맨손으로 정복했다고 해서 지구촌은 감탄의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조거슨은 무려 18일이 소요된 등반 도중 손가락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상처가 아물 때까지 이틀 간 쉬었다가 다시 기어올라 끝내 정상을 밟고야 말았답니다.

 조거슨은 "우리가 느리지만 확신을 갖고 이 일을 해낸 것 처럼 모두가 언젠가는 각자의 '새벽 직벽'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미국 사람들은 참 똑같은 말도 멋있게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정치인도 그렇고, 일반인도 그렇고. 어려서부터 말하기 훈련을 해와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우리 보다 인생을 대하는 자세가 좀 더 진지해서 그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좀 더 주체적이고, 좀 더 사려깊고, 좀 더 희생적이고...솔직히 우리 사회에는 대통령부터 '부자되시라'고 외치고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무슨 신주단지처럼 여기고,다른 삶의 조건들은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는데(그렇다고 제가 경제적 조건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무슨 문제든 '정도의 문제'입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는 품격있는 삶은 고사하고 격조있는 말도 여간해선 듣기힘들지 않을까, 뭐 그런 객소리를 해봅니다.  

 여튼 을미년 새해를 맞은 세계인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겨주는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잠시 나의 '새벽 직벽'은 뭘까, 라는 상념에 젖어들기도 했습니다.

요세미티 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걸어서 들어서면 엘 캐피턴을 지나자마자 멀리서 폭포가 보입니다. 걸어가면 갈수록 그 폭포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와서 끝내는 폭포 물방울이 내 몸에 튀길 정도가 됩니다. 바로 요세미티 폭포입니다. 이 폭포는 북한의 대포동미사일처럼 3단인데 위부터 아래로 Upper Fall, Lower Fall, Cascade Fall로 부릅니다. 총 길이가 739m로 미국에서는 가장 높고, 세계적으로도 다섯번째로 높은 폭포라는군요. 

 

 

 

 

 

 

 

 

 

 

 

 

 

 

아래는 요세미티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Glacier point'에 서서 오른 쪽으로 Nevada Fall과 Vernal Fall을 바라본 정경입니다. 예전에는 이 곳까지 말을 타고 다녔지만 지금은 자동차로 글레이셔 포이트 턱밑까지 편하게 올라올 수 있습니다.

 

 

 

셔틀버스는 다니지 않고 겨울철엔 도로가 폐쇄되기 때문에 시점과 이동 수단을 면밀히 고려해서 오셔야 합니다. Nevada, Vernal Fall은 빙하가 녹으면서 생긴 것이라는군요. 안내판을 보면 빙하가 아래 쪽으로 흘러내리면서 그 때 무른 지반은 빙하에 패여서 쓸려내려가고 단단한 부분만 남았는데 그 강도의 차이로 협곡도 생기고 폭포도 생겼다는 설명이 죽 적혀있습니다. 그런 거 몰라도 확 트인 전망을 즐기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Glacier point에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요세미티 달력 사진에 나오는 바위가 우뚝 서 있습니다. 'Half Dome'이라는 명칭 그대로 돔을 절반으로 잘라놓은 모습입니다. 이 곳 역시 암벽 등반자들의 성지 같은 곳입니다. 

 

 

 

아까 봤던 폭포들과 Half Dome이 보이게 카메라 앵글을 잡으면 아래와 같은 예술 작품이 찍혀나옵니다. 저는 사진 문외한이지만 대충 눌러도 이런 멋진 장면이 포착됩니다.

 

 

 

 



 

내려오는 길에 '이제 언제 이 곳에 다시 오랴'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뒤돌아서 눈에 넣은 Half Dome. 

 

 

 

 

 

 

 

 

物我一體

 


저를 넣어서 찍어봤는데 아무래도 저 같은 인간 따위는 없애버리고 자연의 모습만 담은 사진이 훨씬 자연()스럽군요.;; 

 

 

 

 

아래는 미 요세미티 엘캐피탄 자유등반 성공 소식을 다룬 조선일보 2015년 1월24일자 기사입니다.

오직 손과 발, 육체의 힘으로 '불가능의 벽'을 타고 오르다

지난 1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거벽(big wall) '엘캐피탄(El Capitan)'에 전 세계 시선이 쏠렸다. 꼭대기에 오른 두 산사나이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서로 부둥켜안았다. 등반가 토미 콜드웰(37)과 케빈 조르게슨(31)이 19일간의 사투(死鬪) 끝에 지구 상에서 가장 어려운 루트로 꼽히는 높이 914m의 '여명의 벽(돈월·Dawn Wall)'을 거쳐 앨캐피탄 정상에 오른 순간이었다.

외신들은 찬사를 쏟아냈다. 뉴욕타임스는 "불가능을 좇다, 그리고 정상에 서다"라고 했고, 내셔널지오그래픽은 "(그들이) 역사를 만들었다"고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두 사람을 향해 "당신들은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줬다"고 했다.

엘캐피탄은 요세미티 계곡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다. 최고 높이는 1000여m로 단일 암벽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북한산 인수봉 암벽이 150m라는 걸 생각하면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엘캐피탄은 꼭대기 높이가 해발 2307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에베레스트(8848m)의 4분의 1을 간신히 넘는 정도다. 두 등반가가 땅에 내려오는 데도 2~3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AP통신은 "두 사람은 많은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돈월 루트를 자유등반으로 오른 첫 번째 사람이 됐다"고 평가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른 것도 아니고, 그것도 19일에 걸쳐 정상을 밟은 것인데 세계는 왜 이들의 등반에 열광하는 것일까.

절벽이 하늘에 매달렸다. 이 절벽을 오르던 사람도 덩달아 그 아래 매달렸다. 암벽이 그곳에 있는 한 인간의 도전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진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그야말로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타고 오르는 한 등반가의 모습이다.
절벽이 하늘에 매달렸다. 이 절벽을 오르던 사람도 덩달아 그 아래 매달렸다. 암벽이 그곳에 있는 한 인간의 도전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진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그야말로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타고 오르는 한 등반가의 모습이다. / 코르비스 토픽 이미지
자유등반… 오직 손과 발로 등정

자유등반은 장비를 이용하지 않고 자신의 신체 능력으로 등반하는 것이다. 손끝 힘만으로 몸을 끌어올릴 정도의 탁월한 신체적 능력과 수백m 공중에 매달려서도 추락에 대한 공포를 이기고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정도로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정신적·육체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행위인 것이다. 콜드웰은 한 인터뷰에서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손끝이 상하고 피가 난 상황에 대해 "손끝에 피부가 얼마나 남았는지가 이번 등반의 성패를 좌우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엘캐피탄은 1958년 미국의 저명한 암벽등반가 워렌 하딩이 처음 올랐다. 하딩은 사람의 코처럼 생겼다고 해서 '노즈(The Nose)'라고 불리는 루트를 개척해 47일 만에 엘캐피탄 꼭대기에 섰다. 이후 많은 사람이 다양한 루트를 개발하면서 이 거벽에 올랐다. 뉴욕타임스는 "현재 엘캐피탄 정상에 오르는 루트는 100여 개에 달한다"고 했다. 1970년 돈월 루트를 개척한 것도 하딩이다. 하지만 그의 등반 방식은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알피니스트닷컴에 따르면 하딩은 당시 27일에 걸쳐 등정하면서 암벽에 328개의 구멍을 냈다. 그 구멍에 볼트 등을 박아넣은 뒤 로프를 연결해 등반에 이용했다. 자연을 훼손하는 '인공등반' 방식이었다.

이번에 콜드웰과 조르게슨이 격찬을 받은 것은 하딩이 인공등반으로 올랐던 그 루트를 45년 만에 오로지 손과 발만 사용하는 '자유등반'으로 등정했기 때문이다. 자유등반도 암벽에 오를 때는 바위틈 등에 안전장비를 설치하고 몸에 로프를 연결한다. 하지만 이는 추락을 대비하는 것으로, 등반할 때는 장비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는다.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은 "암벽등반은 장비의 도움을 받느냐 안 받느냐에 따라 인공등반과 자유등반으로 나뉜다"면서 "장비 도움을 받아야 오를 수 있었던 곳을 순전히 인간 육체의 힘으로만 등정한다는 것은 가장 극적이고 위대한 휴먼 드라마"라고 했다.

암벽 자유등반 바람은 1970년대 말부터 불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오영훈 월간산 편집위원은 "가볍고 친환경적인 등산 장비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자연을 훼손하지 말고 등반하자는 '깨끗한 등반(클린 클라이밍)'이 붐을 일으켰고, 이어 인간 힘만으로 오르자는 자유등반이 큰 흐름을 형성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인공 장비를 이용해서라도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중요했지만 점점 '자연 보존과 인간의 힘만으로'라는 가치가 부각된 것이다.

엘캐피탄의 경우 1979년 첫 자유등반이 이뤄졌고, 주요 루트 중에서는 '살라테월'이 1988년, 가장 유명한 '노즈' 루트는 1993년 자유등반에 길을 터줬다. 알피니스트닷컴은 "앨캐피탄 주요 루트 중 자유등반이 이뤄진 곳은 이번 돈월을 포함해 모두 14개가 됐다"고 밝혔다.

지난 14일 토미 콜드웰(오른쪽)과 동료 케빈 조르게슨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거벽 ‘엘캐피탄’에서 지구 상에서 가장 어려운 자유등반 루트로 알려진 ‘여명의 벽’을 통해 정상에 오르고 있다. 두 사람은 인공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손과 발로만 등정을 하는 ‘자유등반’으로 이 암벽의 꼭대기에 섰다.
지난 14일 토미 콜드웰(오른쪽)과 동료 케빈 조르게슨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거벽 ‘엘캐피탄’에서 지구 상에서 가장 어려운 자유등반 루트로 알려진 ‘여명의 벽’을 통해 정상에 오르고 있다. 두 사람은 인공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손과 발로만 등정을 하는 ‘자유등반’으로 이 암벽의 꼭대기에 섰다. / AP 뉴시스
손가락 한 마디로 턱걸이… "그들은 거미다"

'난도(難度) 등급 5.14d.'

콜드웰 등의 등반이 전 세계 등반가들을 감탄하게 한 건 무엇보다 이 등반의 '난도'였다. 이용대 교장은 "그 사람들이 오른 암벽의 난도가 5.14d라는 걸 알고 정말 깜짝 놀랐다. 그들은 거의 거미 수준"이라고 했다. 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 소속 최석문씨는 "지금까지 엘캐피탄 등정 주요 루트 중에서 가장 높았던 난도는 5.14a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5.14d라는 난도는 이번에 처음 들었다"고 했다.

도대체 난도가 5.14d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 등반 난이도를 매기는 체계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영국과 독일에서 만들어졌다. 이후 전 세계에 10여개 이상의 난이도 등급 체계가 등장했다. 미국에선 자유등반 난이도 등급을 매길 때 '요세미티 소수점 체계'라는 걸 사용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 체계는 1~5급까지 난이도 등급을 매기는데, 1~4급까지는 일반인도 무리 없이 오를 수 있는 수준이고 5급은 본격적인 암벽등반이 시작되는 영역이다.

전문가들은 "5.14 난도를 이겨내려면 손가락 끝으로 절벽을 오를 정도가 돼야 한다"고 했다. 손정준 '손정준스포츠클라이밍연구소' 소장은 "난도 5.12는 열 손가락의 두 마디를 이용해 턱걸이 10개를 하는 수준이고, 5.13는 열 손가락의 한 마디로 턱걸이를 하는 수준이며, 5.14는 한 손가락으로 그것도 딱 한 마디만 걸어서 턱걸이를 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이런 능력이 필요한 것은 실제 등반 도중 손톱 정도의 작은 돌기를 한 손으로 잡고 올라야 하는 때가 반드시 생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각 난이도 등급은 다시 a·b·c·d 4등급으로 세분화되는데 d로 갈수록 난도가 더 높다.

현재 지구 상에 존재하는 가장 어려운 난도는 5.15b이다. 한 전문가는 "이 난도는 땅에서 20~30m 정도의 낮은 암벽에 매겨졌을 뿐 높은 산에서 진행되는 자유등반 영역에선 존재하지 않는다"며 "자유등반 세계에선 5.14d가 최고의 난도인 셈"이라고 했다.

국내 암벽 중에선 난도가 5.14 이상은 없다. 전북 고창에 있는 선운산 투구바위가 난도 5.14a 정도지만 이 바위는 15m에 불과해 자유등반에 포함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대표적인 암벽 중 설악산 적벽은 정상으로 가는 3개 루트 중 가장 난도가 높은 것이 5.13c 정도이고, 높이가 200m인 울산바위도 난도는 5.12c 정도이다. 손 소장은 "이렇게 난도가 낮은데도 울산바위와 적벽을 오른 사람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그는 2000년 태국에서 국내 등반가로서는 처음으로 5.14b의 암벽 등반을 경험했다. 그는 "그 등반을 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아직 다음 난도인 5.14c 등반엔 성공한 적이 없다. 그만큼 난도를 높이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보통 난이도 등급은 그 암벽 등반을 끝난 사람이 매긴다. 직접 암벽에 오르지 않고는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여명의 벽 등반의 경우도 콜드웰이 "전체 30구간 중에서 난도가 5.13 구간이 12개, 5.14 구간이 6개였다. 특히 난도 5.14d 구간도 두 곳이나 있었다"고 밝히면서 난도가 밝혀진 것이다. 한 등반 전문가는 "어려운 루트라고 해도 5.14 난도를 가진 구간은 한 개 정도가 대부분인데 여명의 벽은 그 어렵다는 구간이 여러 개나 된다는 게 정말 대단한 것"이라며 "앞으로 이곳을 다시 오르는 사람이 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토미 콜드웰이 몇 년 전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엘캐피탄’ 암벽에서 등반을 하는 모습.
토미 콜드웰이 몇 년 전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엘캐피탄’ 암벽에서 등반을 하는 모습. / 레베카 콜드웰 블로그
불가능이라던 영역을 향한 도전

히말라야 산맥같이 만년설이 덮인 고산을 오르는 것과 달리 암벽등반은 단순히 높이를 추구하지 않는다. 인간의 육체적 능력을 시험하는 다양한 한계에 도전한다. 스포츠클라이밍처럼 지상에서 수십m 정도 이내에서 이뤄지기도 하지만 자유등반이라고 할 땐 보통 높이 수백m 암벽에서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등정이 여러 날 걸릴 땐 도중에 식사도 하고 공중 텐트 같은 걸 걸어놓고 잠도 잔다. 커피나 가볍게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럴 땐 단단한 고정물에 공중 텐트 등을 걸어놓아야 한다. 대소변도 공중에서 해결해야 한다.

전문 등반가들은 "자유등반이 어려운 것은 허공에 매달린 것 같은 원초적 두려움과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손정준 소장은 "땅 부근에서 5.14급의 고난도 등반을 탁월하게 했던 사람도 막상 100~200m 이상 높은 곳에 가서는 난도가 5.12 정도인데도 발을 내딛지 못한다"며 "추락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고 추락 방지 장비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져야만 자유등반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자유등반이 진보할 수 있었던 데는 과학기술의 발전도 큰 역할을 했다. 가볍고 바위틈에 쉽게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장비들이 개발되면서 등반가들이 갖고 올라가야 할 장비 무게가 크게 줄었고, 신체의 특정 부위를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장비도 등장했다.

자유등반을 100m 달리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달리기 선수가 0.01초를 단축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하듯 자유등반가는 인간의 한계라고 여겨졌던 영역에 끊임없이 도전장을 내밀기 때문이다. 이용대 교장은 "산이 있고, 암벽이 있는 한 그곳을 자신의 힘만으로 오르겠다는 인간의 도전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1910년 일제의 조선 병탄과 1945년 일제로부터의 광복,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은 나라의 명운을 가른 분기점이었다. 올해는 광복 70돌이다. 사람의 일생으로 보면 고희(古稀)다. 지난 70년은 식민의 족쇄를 끊어내고 부강한 나라를 이루기 위해 질주해온 분투(奮鬪)의 역사였다. 온 국민의 피와 땀으로 대한민국은 세계 굴지의 중견국 반열에 올랐다. 올해는 분단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내부의 힘을 결집해 통일국가를 이루고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할 사명이 7000만 한민족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광복·분단 70년을 맞이해야 하는가. 하영선(68)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은 본지와의 신년 대담에서 “부강국가 건설이라는 지난 70년의 목표를 대체할 새로운 표준을 세워야 한다”면서 “새로운 표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도 그룹, 새로운 리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통일과 선진국 도약을 이뤄야 할 우리에게 광복·분단 70년의 의미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1870년대 중반 이전까지 우리는 중국 중심의 질서 속에서 동방예의지국을 꿈꾸며 살아왔다. 그러다 1870년대 들어 소위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지만 일본에 강점당해 독자적인 근대화 과정이 중단됐다. 지난 70년은 광복 이후 근대국가 건설, 부강국가 건설을 위해 숨가쁘게 달려온 기간이었다. 이제 부강국가 건설이라는 19세기 중반의 표준이 바뀌고 있다. 정치권을 비롯해 우리 모두가 지난 70년을 성찰하고 새로운 70년의 비전을 세우는 2015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광복 70돌의 시점에서 새롭게 설정해야 할 표준은 무엇인가.



“21세기 환경에서 부국강병은 통일과 선진국 도약을 위한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부강국가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나는 ‘복합(複合) 국가’를 제창하고 싶다. 경제, 군사 중심으로 뛰어온 지난 세월은 한계에 이르렀다. 경제, 군사만이 아니라 문화, 생태환경을 횡적으로 엮는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문화국가, 환경국가가 되지 않고는 더 이상 21세기의 선도국가가 될 수 없다. 지식력(力)의 기반 위에 문화·환경력이 더해지고 그 위에 경제·군사력, 통치력이 차곡차곡 쌓인 다보탑을 상상해보라. 이런 새로운 표준을 누가 먼저 세우느냐에 따라 향후 70년, 140년 이후의 고지에서 동아시아의 지형도가 새롭게 그려질 것이다. 새로운 표준을 세울 수 있는 새로운 지도 그룹이 필요하고 이를 선도할 수 있는 리더가 절실하다.”



―세계일보가 신년을 맞아 각계 전문가 100명을 상대로 광복 이후 70년간 한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국내외 인물 세 사람을 주관식으로 물었다.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이 박정희, 김대중, 이승만 전 대통령 순이었다.



“해방이라는 공간이 주어졌을 때 우리에게는 부강국가 건설이란 절체절명의 과제가 주어졌다. 그때 우리가 사회주의 계획경제 모델을 선택했다면 70년 후 어디에 서 있었을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선택은 옳았던 것이다. 박정희라는 지도자는 일정한 부작용이 있더라도 일단은 산업화로 가야겠다는 확고한 목표를 갖고 나라를 이끌었다. 두 사람은 모두 독재와 권위주의라는 결함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으로 남북 교류협력은 확대됐지만 남북관계의 본질적 변화라는 측면에서는 낙관한 측면이 있다. 우리가 되돌아본 70년은 서구의 400∼500년을 압축적으로 살아온 기간이다. 비교사적으로 보면 이 정도 희생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했다는 점을 과소평가할 이유가 없다.”



―압축 성장의 부작용이 곳곳에서 분출되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보수와 진보, 좌우라는 표현은 더 이상 21세기 상황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한 세대 이전의 잣대들이다. 1980년대 진보의 가치로는 2010년대의 진보를 이야기할 수 없다. 보수나 진보 모두 국제관계나 남북관계가 변화하고 있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소위 지도자라는 인사들이 국민을 리드하기보다는 국민 뒤에서 발목을 잡고 있다. 시대의 조류를 따라잡는 새로운 안목의 지도자가 없는 탓에 정치가 3류로 전락했다. 새로운 안목을 갖춘 주도 세력이 한 번은 등장해야 대한민국의 국운이 융성할 수 있다.”


―새해에는 민족 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을 만나서라도 남북관계의 물꼬를 터야 하지 않나.



“역대 정부의 대북정책이 냉온탕을 반복하면서 지금은 남북정상회담으로도 해법을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활로는 공진(共進·co-evolution)의 길이다. 남북이 함께 진화하는 것이다. 소위 진보라는 입장에서는 북이 어떻든 그냥 한 번 해보자는 주장을 편다. 그렇지만 남북 공진의 원칙으로 변환하지 않으면 남북정상회담도 돌파구가 될 수 없다. 변환의 톱니바퀴는 북한이 먼저 돌려야 한다. ‘핵·경제 병진(竝進)’으로는 안 된다. 북한이 핵·경제 병진론을 고수하면 21세기 중반의 무대에서 북한이 설 수 있는 공간은 없다. 북한은 1970년 전후로 남한에 추월당한 뒤 사실상 한 세대를 허송세월한 것이나 다름없다. 두 세대 정도 그러면 대개 망한다. 북한은 중국이 78년부터 한 세대 동안 두자릿수의 성장을 기록했던 길로 나서야 한다. 북한이 ‘비핵(非核)·경제 병진’으로 움직일 조짐이 보이면 우리도 톱니바퀴를 빨리 돌려야 한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한반도는 통일된 민족국가 완성이란 무거운 숙제도 안고 있습니다.



“남북이 해방 국면에서 통일됐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사용하는 ‘재통일(reunification)’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21세기 통일은 ‘신통일(new unification)’이 되어야 한다. 근대 부강국가 시대에는 이탈리아나 독일의 경우처럼 내부 결합을 통한 독립으로서의 통일이 중요했다. 21세기엔 그런 차원의 통일만으로는 안 된다. 한반도를 넘어서 동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적 차원까지 아우르는 통일이 아니면 통일 한반도가 21세기의 주역이 되기 어렵다. 남북이 합쳐봐야 우리가 가진 힘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동아시아판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우리가 설 자리가 달라진다. 간신히 통일을 이뤘는데 동아시아, 세계 차원에서 접목되지 않은 통일이라면 통일의 시너지를 폭발시킬 수 없다.”



―중국의 부상으로 동북아에서는 미·중의 패권 경쟁이 가열되고 있다. 이런 국제 질서 속에서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통일 역량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외교 전략을 구사해야 하나.



“경제 부문에서 일본이 2010년 중국에 추월당했다. 2020년 상반기에는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다들 예상한다. 그런데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최근 “미국이 21세기에도 세계를 리드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 질문은 잘못됐다. 미국이 어떻게 리드할 것이냐고 물어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21세기의 힘은 ‘복합력’이다. 중국이 국내총생산(GDP)에서 미국을 따라잡았다고 해서 중국이 판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한국과 같은 미들파워 입장에서는 70년, 140년 앞을 내다보고 형세를 읽어야 한다. 섣부르게 ‘연미연중(聯美聯中)한다’는 식의 표현을 하면 안된다. ‘안보는 미국이고, 경제는 중국’이란 말도 10년 전에나 통했던 문법이다. 미·중이 갈등,협력,공생하는 영역을 예리하게 관찰해서 그에 적합한 대응 전략을 짜야 한다. 한·미·일의 전통적 연대는 중요하지만 냉전 시대처럼 중국을 배제하기보다는 중국을 끌고 갈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정리=김민서 기자, 사진=남정탁 기자

2006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의 아제르바이잔 방문에 동행했을 당시 수도인 바쿠에서 한국어가 유창한 현지 대학생들과 조우한 적이 있다. 바쿠 국립대 학생들이라고 소개한 이들은 대화 도중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배우면서 한국을 동경하게됐다”고 말해 기자를 감동시켰다. 문화교류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한 경험이었다. 바쿠 국립대에 개설된 한국어와 한국학 과목은 KF(Korea Foundation·한국국제교류재단)가 파견한 한국 객원교수가 담당한다. KF는 한국어·한국학 진흥, 문화예술교류, 인적교류 및 지한파 육성 활동 등을 통해 정부의 외교활동을 지원하는 외교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한국의 친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유현석 KF 이사장을 지난 19일 서울시 중구 KF문화센터 집무실에서 만났다.


 

 


―국제교류재단 대신 ‘KF’로 부르는 게 더 기억하기 쉬운 것 같다. KFC(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에서 C만 빼면 되니….

“다른 데서도 그런 말을 들었다. 두 번 들었으니 바꿔야겠다. 국제교류재단은 지자체마다 다 있다. 비슷한 게 너무 많아 국민들이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잘 모른다. 외교부는 할 수 없는, 해외 싱크탱크 지원이랄지,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이런 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예산 배정에서 밀리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의 대외원조 활동도 한국의 국격(國格) 향상에 도움이 되지만 한국어를 포함해 문화적으로 한국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는 일도 중요하다. ”

―KF와 코이카 예산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

“우리가 500억원 정도이고 코이카가 6600억원 정도다. 코이카는 올해 600억원 늘었다.”

―코이카의 10분의 1 수준인데 국회나 정부가 KF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 같다.

“솔직히 국제사회에서 정치적으로는 KF가 중요하다. 원조는 수혜국 입장에서 별 느낌이 없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중남미 어느 나라는 중국이 쏟아붓는 원조에 비해 소액에 불과한 우리의 원조를 그다지 감사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KF의 초청 대상 인사들은 1주일만 한국에 머물다가면 모두 한국의 팬이 된다. 아프리카 초청 인사는 대부분 대통령급 인사다. 그러면 그 나라 주재 한국대사는 일하기가 아주 편해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코이카의 원조 활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국제사회 지도층, 오피니언 리더를 움직이는 KF의 활동도 중요하니깐 어느 정도는 (예산 배정 등에서)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올 예산안 편성 때 좀 더 배정해달라고 요청하지 그랬나.

“예산은 예산당국의 논리가 있다. 중요하다고 설명하면 지금 중요하지 않은 예산이 어디 있느냐고 한다. 대통령 관심 사업이라고 해도 똑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다행히 지금 국회 상임위에 한국학 지원(15억원), 지자체 국제교류 역량강화 사업 예산(7억원)이 올라가 있다. 그런데 살아돌아올 확률이 높지 않아 걱정이다. 그동안 한국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지역에서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신청이 쇄도하고 있다. 한국학 지원 예산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예산이다.”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인가.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 지역이다. 이들 지역에서 한국 드라마, 한국 가수가 인기를 끌고 ‘한류(韓流)’ 열풍이 불면서 한국어과, 한국어 강좌를 개설해달라는 신청이 들어오고 있는데 예산 문제로 10개가 들어오면 1개도 해주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그런 나라들의 대학에 한국어 강좌 하나 개설하는 데 비용은 얼마나 소요되나.

“강좌를 열려면 일단 교수가 있어야 하는데 가장 싸게 보내는 게 객원교수를 보내는 방식이다. 그러면 1년에 6만달러 정도 필요하다. 우리가 5, 6년 계약해서 그 교수의 인건비를 지원하면 해당 학교에서 종신직으로 고용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최근 우리와 관계가 악화된 일본에도 공을 들이고 있나.



“일본은 주로 민간 차원에서 고위 인사, 학생 초청해서 하는 문화교류다. 정무적인 부분은 조금 어렵다.”

―내년은 한·일 국교 수립 50주년이다. 경색 국면을 풀어내기 위한 민간 차원의 노력이 요구된다.

“양국 국민으로 한·일합창단을 만들어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제3국에서 공연하기로 일본국제교류기금과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한·일합창단 프로그램 관련해서 우리는 외교부 승인을 받았는데 일본국제교류기금은 아직 일본 외무성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다.”

―양국 국민이 화합의 노래를 부르겠다는데 일본 정부가 안 해줄 이유가 있나.

“그렇죠. 그런데 아직까지 오케이 안해서 (일본국제교류기금 측에) 승인 못 받으면 다른 일본 파트너를 찾겠다고 얘기했다. 실제 한·중·일 3국이 함께하는 민간교류 프로그램이 여러 개 있는데 일본이 소극적이다. 한·중·일 예술인 공연도 지난해 일본이 참가하지 않아서 한·중 두 나라만 했다. 3국 미술전에도 일본은 잘 안 온다.”

―중국 쪽 민간교류는 어떤가.

“중국과는 활발하다. 고위급 포럼도 있고 초청사업도 많다. 중국은 매우 적극적이다. 교류 프로그램을 만들기만 하면 참여하겠다고 한다. 돈 걱정도 하지 말라고 한다. 이 기회(한·일관계가 소원한 계기)에 우리를 끌어안으려는 중국의 외교 공세가 느껴진다.”

―KF 입장에서 좀 조심스럽겠다. 외교부에서 말리는 일은 없나.

“그렇지는 않다. 교류는 좋은 것이다. 외교부도 정치색 들어가는 교류는 경계하지만 중국에서 요구하는 것은 대부분 인적교류다. 중국 내 혐한(嫌韓)감정 등 양국 간에는 오해가 많다. 중국은 인적교류를 많이 하려고 한다. 중국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일본은 굉장히 조심한다.”

―이러다가 한·중관계가 한·일관계보다 더 좋아지는 상황이 올 수 있겠다.

“민간 차원의 인적교류가 늘어난다고 해서 정무적으로 바로 연결될 것 같지는 않다. 외교부도 그렇고 저희 사업 방향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한·일관계는 굉장히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움직인다. 우리도 일본과의 사업을 강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번에 한·중·일 차세대 포럼이 중단된 지 6년 만에 살아났다. 3국의 45세 이하 국회의원, 언론인, 기업인, 문화계 인사, 시민사회 인사 등이 참석 대상이다. 이들이 3박4일씩 세 나라에 머물면서 교류하는데 12일 정도 하루종일 붙어다니면서 찜질방에도 가고 술도 먹고 하면서 어울리다 보면 정말 친구가 된다.”

―KF가 차세대 리더들에게 공을 들이고 있는 것 같다.

“차세대들은 사고가 열려 있고 한국에 대한 인상이 기본적으로 좋다. 올드 제네레이션은 한국 하면 가난, 전쟁, 독재를 떠올린다. 차세대들에겐 이런 게 없다.각국 의회 보좌관, 국무성 초급 관리 등을 초청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최근 KF가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 이어 브루킹스연구소에도 ‘코리아 체어(한국석좌연구직)’를 개설했다.

“미국은 한국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나라다. 앞으로 우드로윌슨센터와 미국외교협회(CFR) 등에도 한국센터를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이런 걸 만들려면 처음에 기금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300만달러 정도가 필요하다. 한국 기업들의 적극적 참여가 필요하다. 미국 싱크탱크 지원 관련 예산은 연간 7억원으로 일본의 10분 1 수준이다. 차세대 전문가 그룹은 중장기적으로 미국의 대(對)한반도 정책 및 미국 내 한국 관련 여론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므로 미국 내 지한 네트워크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차세대 한국정책전문가를 육성하는 싱크탱크 사업 강화가 시급하다.”

―현재 준비 중인 사업은.

“국내에는 150만에 이르는 국내거주 외국인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의 노력 여부에 따라 한국에 우호적 또는 적대적이 될 수 있다. 이들 국내거주 외국인에 대한 체계적, 통합적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정리=김청중 기자, 사진=남정탁 기자

◆ 유현석 이사장은… ▲1963년생 ▲서울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미 노스웨스턴대 정치학 박사 ▲중앙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국무조정실 정책평가위원, 외교통상부 자체평가위원,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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