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남북정상회담 방북단은 수행원 150명, 기자단 50명, 지원인원 100여명으로 구성됐다. 대표단은 2007년 10월2일 아침 서울을 출발, 경의선 CIQ(남북출입사무소)를 경유,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평양에 도착했다. 2박3일의 일정이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1차 남북정상회담 때 우리 대표단은 서해 직항로를 통해 항공편으로 방북했다. 이번에는 육로 방북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2일 오전 9시쯤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남북분단의 상징인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통과했다. 노 대통령은 군사분계선 앞에서 "이 자리에 선 심경이 착잡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이 선이 우리 민족을 갈라 놓은 장벽이다. 이 장벽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아왔고 또 발전이 정지되어 왔다"는 심경을 피력했다. 그런 뒤 "다행히 그동안 여러 사람들이 수고를 많이 해서 이 선을 넘어가고 넘어왔다.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간다.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은 지워지고 장벽은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도라산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개성, 평양으로 이어진 길

분단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군사분계선 앞에 표지석이 설치됐다. '평화를 다지는 길, 번영으로 가는 길. 2007년 10월 2일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의 문구는 노 대통령이 직접 친필로 작성한 것이다.

정부 공식 행사에서 우리 측 인사들이 육로로 평양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 한국 기자들에게 육로를 개방한 것은 북측의 폐쇄성을 고려할 때 주목할만한 일이었다. 북한의 실상을 그대로 공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개성에서 평양까지 가는 고속도로는 노면 상태가 고르지 못했다. 오가는 차량도 거의 없었다. 고속도로 옆의 일반 도로는 비포장 흙길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도 보였고 소달구지를 끌고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북측의 가파른 산세는 남한과는 다른 나라같았다. 

 

 

 

 

 

2007년 10월2일 남북정상회담 취재단 일원으로 버스를 타고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이용해 평양으로 가던 도중, 임시로 설치된 휴게소에서 북측이 제공하는 음료수를 마시고 있다.

 

 

개성에서 한 시간쯤 달리자 대동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충성의 다리'를 건너자 길가 인도에 평양 시민들이 분홍색 조화를 들고 앉아 있었다. 스피커를 단 차량에서 구령을 외치자 평양 시민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만세"를 반복하며 함성을 질렀다. 환영 행렬은 노무현 대통령의 환영 식장인 4.25문화회관 앞 광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2007년 10월2일 평양 시내 모란봉 구역에 위치한 4.25문화회관 앞 광장. 왼쪽이 필자이고 오른쪽은 대학 동기인 CBS 김재덕 기자.

 

2007 남북정상회담을 하기위해 평양에 도착한 노무현 대통령을 맞이하는 북측의 공식 환영식이 열리고 있다. 당초 공식 환영식은 평양 입구인 승리동의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한 시간 전쯤 장소가 갑자기 이곳으로 바뀌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전 9시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은 뒤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2시간30분 정도 달려 평양에 도착한 뒤 인민문화궁전에서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영접을 받았다. 그리고 무개차를 타고 4.25문화회관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필자는 미리 이 곳으로 와서 노 대통령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기 직전 현장에서 대기하는 남북측 인사들. 김종민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오른쪽 두번째)과 유민명 대변인실 행정관(왼쪽 네번째) 모습이 보인다.

 

 

 

2007년 10월2일 낮 12시쯤 갑자기 문화회관 광장 환영 인파에서 함성이 터졌다. 일부 시민들은 울기도 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어 5분 뒤 노 대통령과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함께 탄 무개차가 광장으로 들어서고 의장대의 군악 연주가 울려퍼졌다. 김 위원장은 노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악수를 교환하고 북한 인민군 의장대 사열을 받았다. 노 대통령은 영접 나온 북한 당,정,군의 고위층 인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이어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4.25문화회관 앞 중앙단상에 나란히 올라 북한 인민군의 분열을 받았다. 환영식이 끝난 뒤 노 대통령은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로 갔고 김 위원장은 잠시 더 광장에 머물며 환영 인파에게 손을 흔들었다. 김 위원장이 떠날 때 박수와 환호성은 더 커졌다. 2007 남북정상회담은 다음날인 3일 백화원 초대소 영빈관에서 이뤄졌다.

노 대통령은 평양 도착 직후 서면을 통해 북한 동포와 평양 시민에게 전하는 도착 성명을 발표했다. 노 대통령은 성명에서 "여러분의 따뜻한 환영에 마음 속 깊이 뜨거운 감동을 느낀다. 남북은 지금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보면서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이 간절할수록, 우리의 의지가 확고할수록 그 길은 더욱 넓고 탄탄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10월 2일 노 대통령과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면담이 있었다. 노 대통령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본회의장을 참관한 후 방명록에 '인민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이라고 서명했다. 면담 이후 평양 시내 목란관에서 김 상임위원장 주최 만찬이 열렸다. 필자는 이 만찬의 풀기자였다. 목란관은 평양 중구역에 자리 잡은 연회장으로 북한의 국화인 '목란'에서 이름을 땄다. 만찬장에 들어서자 헤드 테이블 맞은 편 벽에 걸린 대형 '해 그림'과 반대편 벽에 걸린 '파도 그림'이 눈길을 사로 잡았다.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해 사진'을 가리키며 김대중 대통령 일행에게 "저게 해 뜨는 장면 같소, 아니면 지는 장면 같소?"라고 물은 뒤 "아침에 들어와서 보면 해 뜰 때, 술 마시다 저녁에 해 질 때 보면 또 저 장면"이라고 자문자답했다는 일화가 생각났다. 그래서 '해 사진'을 유심히 관찰했으나 어느 시점의 해인지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그 사진이 냉온탕을 반복했던 남북관계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 입맛이 썼다.

 

목란관에 걸린 해 그림

 

기자의 옆에 앉은 북측 인사는 조선중앙통신사 간부였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뒤 중앙통신사에 입사한 20년차 기자로, ㅈ로 정치 보도 부문을 담당해왔다고 했다. 신변잡기식 대화를 이어 가던 와중에 우리는 생각하지도 못한 지점에서 분단의 벽을 실감하게 됐다. 대화 도중 '게사니 구이' 요리가 나왔을 때였다.

"게사니가 뭡니까?" 필자가 물었다.

 "게사니가 게사니지 뭐겠습니까?"

"남측('남한'이라고 하면 항의를 받는다. 여러 차례 지적을 받은 끝에 필자도 '남측'이라는 표현에 익숙해졌다)에서는 게사니라는 말이 없습니다."

"오리 비슷한 조류인데 몸집이 좀 더 큽니다. 꽥꽥하는 소리를 냅니다."

"그럼 거위군요."

"거위가 뭡네까?"

음식을 내오는 안내원을 불러 물어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거위려니 짐작하고 대화를 끝내야 했다. 서울로 돌아온 후 북한어 사전을 찾아보니 짐작대로 '게사니'는 거위의 북한어였다.

 

평양 방문 당시 취재단을 안내했던 북측 인사. 

 

 

 


2007년 10월3일 낮 12시에 평양 시내 대동강변에 자리 잡은 옥류관 식당에서 노무현 대통령 초청 형식으로 공식 수행원, 특별 수행원, 공동취재단이 참여하는 오찬 행사가 열렸다. 필자도 냉면을 먹은 뒤 대동강변으로 나와 망중한을 즐겼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백화원 초대소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옥류관에서 점심을 먹은 뒤 오후에 백화원 초대소 영빈관에서 다시 김 위원장과 회담을 했다. 2007 남북정상회담의 전환점이 된 노 대통령의 오찬 발언이 이 곳에서 나왔다.

 노 대통령은 오전에 진행된 첫 정상회담과 관련,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숨김없이 진솔하게 얘기를 나눴습니다. 한 가지 쉽지 않은 벽을 느끼기도 했다. 남측이 신뢰를 가지고 있더라도 북측은 아직도 남측에 여러 가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 불신의 벽을 허물기 위해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예를 들면 개혁과 개방이라는 용어에 대한 불신감과 거부감을 어제 김영남 상임위원과의 면담에서도, 또 오늘 김 위원장과의 회담에서 느꼈다. 우리는 개성공단을 아주 만족스러운 성공적인 사업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북측이 속도의 문제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개성공단을 개혁과 개방의 표본이라고 많이 얘기했는데, 우리의 관점에서 편한 대로 얘기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북측이 보기에는 역지사지하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개성공단의 성과를 얘기할 때 북측의 체제를 존중하는 용의주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북측의 입장과 북측이 생각하는 방향도 존중해서 불신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함께해 나가면 좋겠다고 제안 드린다"

사실상 노 대통령의 오찬 발언은 김 위원장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이 발언은 즉각 김 위원장에게 보고됐을 것이다.

평양 주민들에 대한 덕담도 이어졌다.

"어제도 평양 주민이, 연도에 많은 사람이 나와 따뜻하고 열렬히 환영해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와 같이 배려해 주신 북측 당국에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연도에 계신 분들을 가까이에서 보니 표정이 그렇게 간절할 수 없었다. 남북의 국민이 나뉘어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이를 해소해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을 그분들의 표정에서 생생하게 보았다. 그동안 수십개 나라를 다녔지만 북측 땅만큼 먼 나라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까 음식도 똑같고 잠자리도 똑같고 통역도 필요없고 정말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훨신 더 좋은 체험이 될 것 같다. 여러분이 역사적 현장에 함께하고 계시다. 양국 간의 평화 정착, 공동의 번영, 마침내 화해와 통일로 가는 과제가 순탄하게 이뤄지길 바란다. 모든 부분에 인식을 같이하진 못했지만, 김 위원장이 평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갖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에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화해와 통일에 대해서는 논쟁이 따로 없었다. 김 위원장과 북측 인민들의 건강과 행운을 함께 기원한다."

노 대통령의 오찬 발언은 경색됐던 이날 오전 남북 정상회담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오후 회담에서는 김 위원장의 태도가 한결 누그러져 2박3일의 공식 일정을 연기해서 하룻밤 더 묵고 가라는 김 위원장의 권유까지 나올 정도로 회담 분위기가 좋아졌다고 청와대 관계자가 전했다.

 

 

평양시 중구역 창전동 대동강 변에 자리잡은 옥류관은 1960년 8월 문을 열었다. 대동강 옥류교 옆에 위치해 있어 옥류관이란 이름이 붙었다.  순메밀 국수로 만든 평양냉면과 고기쟁반 국수, 평양온면, 대동강 숭어국, 송어회 등이 옥류관의 대표 메뉴다. 물냉면은 100% 메밀로 면을 만들고 쟁반냉면은 메밀과 전분을 섞어 만든다고 한다.

 북한의 당.정 간부 연회 및 외국인 접대 장소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북한 주민들도 즐겨 찾는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 곳에서 오찬을 했고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 곳에서 오찬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8년 9월19일 옥류관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 부부와 오찬을 했고 특별 수행원으로 평양에 온 여야 3당 대표와 재계 총수들도 옥류관에서 식사를 했다. 그 때 리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재계 총수들에게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고 말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18년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은 "옥류관 행사에서 대기업 총수들이 냉면을 먹는 자리에 리선권이 불쑥 나타나 정색하고 '아니,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라고 했다, 보고 받았느냐"고 하자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고 답변했다. 정 의원이 "왜 그런 핀잔을 준 것이냐"고 묻자 조 장관은 "북측에서는 남북 관계 속도를 냈으면 하는 게 있다"고 했다. 그 자리에는 김능오 평양시 노동당 위원장을 비롯해 손경식 경총 회장,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최태원 SK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광모 LG회장이 동석했다. 옥류관은 2020년 6월에도 다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북한이 6.12 미북 정상회담 2주년을 맞아 대미, 대남 비방전을 시작했을 때 북한의 대외선전매체인 '조선의 오늘'에 오수봉 옥류관 주방장의 발언이 소개됐다. '조선의 오늘'은 2020년 6월13일 오수봉 주방장이 “평양에 와서 우리의 이름난 옥류관국수를 처먹을 때는 그 무슨 큰일이나 칠 것처럼 요사를 떨고 돌아가서는 지금까지 전혀 한 일도 없는 주제에 오늘은 또 우리의 심장에 대못을 박았다”며 “몽땅 잡아다가 우리 주방의 구이로에 처넣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필자는 2007년 남북 정상회담 취재단의 일원으로 노 전 대통령이 수행원과 오찬을 할 때 다른 테이블에서 냉면 맛을 봤다.

아래는 그 때 필자가 먹은 냉면 사진.

 

 

냉면을 먹은 뒤에는 '에스키모'가 나온다. 디저트 아이스크림을 북측에선 이렇게 불렀다. '얼음 보숭이'를 현대적으로 고친 이름이었다.

 

 

2007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평양에 온 도올 김용옥(위), 소설가 조정래씨.

 

 

 옥류관에서 바라본 대동강 풍경

 

 

'아리랑' 공연이 열리고 있는 대동강 능라도 경기장(일명 5.1경기장)


노 대통령의 아리랑 공연 관람은 남북정상회담 준비 단계부터 '뜨거운 감자'였다. "대통령이 김일성의 혁명 생애와 선군정치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집단체조를 보는 것은 말이 안되다"는 반대 여론이 일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아리랑 관람은 북측에서 하자는 대로 맡기라"고 지침을 내렸다. 상호 체제를 존중하는 대승적 차원에서 정상회담을 풀어가고 손님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남측 협상단은 노 대통령의 아리랑 공연 관람이 친북 논란 등 불필요한 이념 논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공연 내용 일부를 수정하기로 하고 북측과 사전 교섭을 벌였다. 북측은 남측의 이같은 우려를 받아들여 공연 내용을 수정하겠다는 태도를 보여 사전 교섭은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이에따라 청와대는 노 대통령의 아리랑 공연 관람 계획을 확정 발표했고 남측 선발대는 북측이 수정한 아리랑 공연을 사전 관람한 뒤 문제될만한 부분은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 공연 관람 시간은 2007년 10월3일 오후 7시30분. 하지만 오전부터 비가 내린탓에 공연은 예정보다 늦은 오후 8시에 시작됐다. 필자를 비롯한 공동 취재단은 능라도경기장의 주석단 인근에 마련된 특별 좌석에 배치됐다. 북측의 10만여 관객이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오후 8시쯤 김영남 위원장과 경기장에 들어섰다. 아리랑 공연은 공연자만 10만명이 등장하는 세계 최대의 공연이다. 북측은 약속대로 공연에서 이념성 짙은 내용을 삭제, 수정했다. 원래 아리랑 공연은 서장과 본장 1,2,3,4장, 종장으로 구성됐는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칭송하는 내용의 서장을 없애고 대신 출연진들이 노 대통령을 향해 모란과 진달래 등을 형상화한 종이꽃을 흔들며 환호하는 대목을 넣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수난사로 시작하는 1장 공연으로 들어갔다. 아리랑 공연은 종장에서도 '영광스런 조선로동당', '영원히 번영하라 조선로동당', '위대한 우리 당에 영광을' 같은 카드섹션은 제외했고 2장에서도 북한 인민군의 위력을 과시하는 총검술 장면을 삭제하고 태권도 시범을 보이는 장면으로 대체했다. 김정일 위원장을 형상화한 카드 섹션도 없앴다. 그럼에도 '한 세대 두 제국주의 타승하신 강철의 명장, 어버이 사랑으로 강군을 키우신 대원수', '무궁 번영하라 김일성 조선이여'라는 카드섹션은 바꾸지 않았다. 

아리랑 공연은 별 문제없이 끝났는데 논란은 의전 과정에서 불거졌다. 노 대통령과 함께 공연을 관람한 인사가 김정일 위원장이 아닌 김영남 최고인민회의위원장이라는 격식 논란이었다. 또 다른 논란은 노 대통령이 관람 도중 두 차례 기립박수를 친 것이었다. 공연 말미에 관중들이 함성을 지르며 노 대통령을 향해 환호하자 노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출연자들과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 대목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에 앞서 이뤄진 첫번째 기립박수는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 이 때 공연 중인 어린 아동들이 "아버지 장군님 고맙습니다"라고 소리치며 달려나오면서 노 대통령이 앉아있는 무대 뒤편으로 '아버지 장군님 고맙습니다'라는 카드섹션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김영남 위원장이 일어서자 노 대통령도 따라서 일어선 것이다. 

기립 박수를 할 것인지 여부는 방북 전에 청와대 내에서 논의됐던 사안이었다. 공연을 관람하면서 일어서서 박수를 쳐야할 상황이 생겼을 때 손님으로서 그냥 앉아있기도 그렇고 기립박수를 치자니 남측 국민의 정서에 배치될 수도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청와대 참모들은 '일어서기는 하되, 박수는 치지 않는다'는 절충안으로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무슨 소리요. 가서 전부 박수 치는 걸로 해!"라면서 참모들의 결정을 질책했다. 그러나 수행했던 각료들이 우려를 표명해서 원래대로 '일어서되 박수는 치지 않는다'로 최종 확정됐다. 노 대통령은 "그럼 나 혼자만 치지"라고 말하고 공연장으로 떠났다고 한다. 노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 사이에서도 이 문제는 고심거리였다. 권 여사가 "나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노 대통령은 "나와 우리는 다르니 당신은 치지 마시오"라고 정리했다. 관람을 마친 뒤 권 여사는 노 대통령에게 불평을 토로했다고 한다. "나는 이제 이 사람들한테 인심 다 잃었다. 나는 북쪽에 오면 매 맞게 생겼고, 당신은 남쪽에 내려가면 매 맞게 생겼으니까. 이제 우리는 북에 가도 욕먹고 남에 가도 욕먹게됐다"

노 대통령은 나중에 기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나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 북쪽의 인심을 얻어야 되는가, 남쪽의 인심을 얻어야 되는가. 우리 여론의 인심을 얻어야 하나 북쪽의 호감을 사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내가 여기 온 걸음이 얼마나 어려운 걸음인데, 그래도 와서 마지막까지 하나라도 더 본전 찾고 가자면 북쪽의 호감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 싶었다. 그래서 제가 박수를 쳤습니다."  

 

북한 최고의 명문대인 김책공대 컴퓨터실에서 학생들이 컴퓨터를 다루고 있다.


북한도 취업난이 심각했다. 엘리트들이 갈 곳이 없어 국정원 직원 격인 안내원들도 김일성종합대학 출신들이 많았다. 기업체가 활발히 생겨나지 않으니 공무원으로 몰리는 셈이다. 그렇다보니 북한 주민들도 자녀 교육이 큰 관심사였다. 신분 변화가 활발하지 않다보니 자녀 교육에 더 매달리는 것이다.

 

 

 

 

 

 2007 남북정상회담 취재진 숙소인 평양 고려호텔 내부. 숙소는 1인1실로 주어졌고 방은 트윈룸이었다. 세탁 서비스, 미니바 서비스는 모두 무료였다. 호텔 서비스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호텔 방의 라디오 스위치는 떨어져 나간 채였고 시계는 고장 나 있었다. 방문은 아귀가 맞지 않아 여닫을 때마다 힘을 줘야 했다. 금방 고칠 수 있는 사안인데도 그대로 둔채 운영되고 있었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는 2층 식당에서 코스 요리 형태로 제공됐다.

 

 

 

 

 

 

고려호텔 44층 스카이라운지에서 바라본 평양 전경.  

고려호텔 스카이라운지는 회전 장치로 되어 있어 시내 전경을 사방에서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대동강맥주, 사이다, 들쭉 단물, 커피 등이 제공됐다. 남성 직원 한 명에 여성 카운터 한 명, 여성 봉사원 두 명이 근무했다. 호텔 지하의 '화면노래반주실'은 홀의 형태로 되어 있었다. 호텔에서는 이 곳에서만 양담배(던힐)를 팔았다. 노래는 북측 혁명가요, 일제강점기 때의 대중가요(북에서는 '계몽기 가요'라고 함), 서양 팝송 등이 있었다.  1층 로비에 마련된 매점에서는 농산품, 보약류, 주류, 버섯류 등이 구비돼 있었다. 카운터에 가서 전표를 구입한 뒤 매장에서 물품으로 교환하는 형식이었다. 카운터 옆에는 환율표가 붙어 있었다.

 

 

 

 

 

 

평양 건물 외벽이나 옥상에는 붉은 글씨로 쓴 선전 구호가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선군정치의 위대한 승리 만세', '혁명의 수뇌부 결사옹위', '자주 자립 자위', '미제는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하자', '영광스러운 조선노동당 만세', '수령님은 만인의 태양', '김정일 원수님 고맙습니다' 같은 글귀였다.

 

 

 

 

 

 

평양의 거리는 도시계획이 제법 잘돼 있었다. 왕복 6차로가 대부분이었고 고층 건물 외벽도 회색 일변도가 아닌 다채로운 색깔로 단장돼있었다. 인도와 차도는 깨끗했다. 젊은 여성들은 대부분 양장 차림이었고 미니에 가까운 치마에 부츠를 신은 멋쟁이들도 보였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눈에 띄었다. 취재진은 외국인 관광객처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기념 촬영도 제지당하기 일쑤였다. 몰래 촬영하다 적발되면 곧바로 디지털 카메라를 빼앗아 해당 사진을 지웠다. 거리에는 곳곳에 공중전화 박스가 비치돼 있었다.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교차로에는 수신호를 하는 여성 교통보안원이 신호등을 대신했다. 출퇴근 시간대에 근무를 섰는데 통행 차량이 많지 않아 교통은 원활하게 이뤄졌다. 건널목에는 대부분 지하도가 연결돼 있어 보행자들은 지하도로 다녔다. 차량들은 오래된 일본 자동차들이 대부분이었다. 도요타, 닛산 등이었고 일본에서 바로 건너온 것이라서 오른쪽에 핸들이 달린 승용차도 많았다. 벤츠, 폭스바겐, BMW 같은 유럽 자동차도 많았다. 한국차와 미국차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연식이 오래된 탓인지 매연을 내뿜는 차량들이 많았다. 택시 캡을 단 흰색 택시도 드물게 보였다. 택시는 주로 외국인들이 이용했고 평양 시민들은 대부분 전기로 움직이는 전차식 버스를 이용했다.

북한의 밤은 칠흙이었다. 밤 10시 이후 평양은 상점과 음식점에서 전등을 한두개 켜놓고 손님을 기다릴뿐 다른 곳은 불이 꺼져 있었다. 밤 11시가 넘으면 거리의 차량은 통행조차 끊겼다. 가로수는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불을 밝힌 전구들로 장식돼있었지만 정상회담을 의식해 켜놓은 것으로 추정됐다. 그도 그럴 것이 고층 아파트에서도 불 꺼진 집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2007 남북정상회담 프레스센터는 평양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고려호텔 2층에 마련됐다. 고려호텔의 프레스센터는 통신, 통화, 통행의 '3통'이 단절된 장소였다. 남북측의 사전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인터넷도 되지 않아 취재진이 들고간 노트북은 워드프로세서 기능으로만 사용됐다. 기자들의 호텔 밖 출입도 엄격히 통제됐다. 기사 송고는 서울 프레스센터와 연결된 '인포넷' 라인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 때와 달리 적어도 호텔 안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했다. 2000년 정상회담 때는 북측 안내원들이 취재 기자들을 철저히 통제했다. 2007년에는 호텔 지하 사우나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했고 헬스클럽과 탁구장도 개방했다. 원래는 유료 시설이지만 정상회담 취재진에게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했다. 하지만 호텔 밖 이동은 통제됐다. 김정일 위원장 관련 행사에서는 기자들의 접근 취재가 원천 봉쇄됐다.  

 

 

 

2007 남북정상회담 취재단 구성은 시작부터 경합이 치열했다. 청와대 출입 언론사 수와 기자들은 늘어났으나 취재단은 여전히 50명으로 한정됐기 때문이다. 남과 북의 협의와 청와대 기자실 내부의 협의 절차를 통해 최종적으로 정상회담 취재단 구성이 확정됐다. 중앙기자실에서 통신사 기자 1명(연합뉴스), TV방송사 기자 6명(KBS 1명, MBC 1명, SBS 2명, MBN 1명, YTN 1명), 종합지 기자 10명(경향, 국민, 내일, 동아, 서울, 세계, 조선, 중앙, 한겨레, 한국), 경제지 기자 5명(매일경제, 머니투데이, 서울경제, 이데일리, 한국경제), 라디오방송 기자 1명(CBS), 영문지 1명(코리아타임스), 인터넷 신문 1명(프레시안) 등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 계기에 “북한의 4차 핵실험은 동북아의 안보지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국면이라서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사실 이 언급은 매우 엄중한 상황 인식에 바탕한 것이다. 4차 핵실험을 통해 북한이 ‘핵무기 소형화’(미사일에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기술)에 성공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은 100도에 이르면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4차 핵실험이 물을 끓게 하는 마지막 불꽃이 될 수 있다.

한반도와 일본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북한의 노동·스커드 미사일에 핵탄두가 탑재되면 북한은 절대무기인 핵을 흔들며 우리를 겁박하려 들 것이다. 북한의 도발에 맞선 우리의 칼날은 무뎌질 수밖에 없다. 북한의 도발 즉시 도발 원점은 물론 북한군 지휘부까지 타격한다는 계획이 북한 핵무기 앞에서도 주춤거림 없이 실행될지는 의문이다.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는 일본은 이제 북한의 핵보유를 빌미로 군사대국화의 길로 폭주할 것이다. 국내에서도 핵보유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안보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경제적·심리적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북한 핵문제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선 안 되지만 상황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부침을 거듭한 북핵 협상은 북한이 더 이상 핵을 협상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북한은 언제부터인가 핵을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정권의 유지를 위한 생존 수단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북한 지도부가 이런 생각이라면 협상을 통해 자발적으로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한·미 행정부는 북한의 그런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북핵 협상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최근 만난 외교 당국자는 6자회담 전망을 묻는 질문에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경구로 답변을 대신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북한이 ‘북·미 2·29 합의’ 문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2012년 4월 장거리 로켓 ‘은하 3호’를 쏘아올린 이후 북한을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런 판국에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네 번째 폭발음이 들려온다면 그것은 6자회담의 종언을 알리는 조종(弔鐘) 소리가 될 것이다.

 



지금은 북핵 당사자들 사이의 불신감이 너무 커서 어느 쪽도 위기관리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정부의 ‘창조적’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조만간 이뤄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한국 방문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중국은 이제 북한이 문제가 될 뿐 아니라 자국의 안보에도 큰 문제라는 것을 지금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은 출발점에 불과하다. 북한 비핵화의 짐을 중국에 떠넘기는 식의 접근법으로는 중국을 움직일 수 없다. 세계 전략 속에서 북핵을 바라보는 미국은 그럴 수 있어도 남북한 7500만의 생존 차원에서 북핵을 바라봐야 하는 우리는 그럴 수 없다.

동북아 패권을 다투는 미·중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해법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 이해가 엇갈리는 미·중을 설득해서 우리 국익을 극대화할 해법을 찾아내야 한다. 북한의 핵보유를 막는 일이야말로 박근혜정부 외교안보팀에 부여된 최우선 과제다. 그 어떤 과제가 남북한 주민의 생존 문제보다 중요할 수 있겠는가. 윤병세 외교장관은 최근 유엔에서 “북한이 핵실험으로 국제사회에 도전할 경우 가장 심각한 결과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경고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북한을 향해 으름장을 놓는 일이라면 군인 출신이 수장을 맡고 있는 청와대 국가안보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미국과 중국을 움직여야 하는 보다 정교한 작업은 윤병세 외교부의 몫이다. 더 이상 감나무 밑에 누워서 홍시가 떨어지기만 기다려서는 안 된다. 북한을 향해 호통치고 중국이 나서야 한다고 떠들어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또한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2011년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공동번영 실현을 목적으로 출범한 한·중·일 3국 협력사무국(Trilateral Cooperation Secreteriat·TCS)이 최대 난관에 봉착했다. 3국간 역사인식의 차이라는 암초를 만나 3국 정상회의는 2012년 5월, 3국 외교장관 회의는 2012년 4월 이래 2년째 표류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신봉길 초대 사무총장에 이어 3국협력사무국의 지휘봉을 잡은 이와타니 시게오(岩谷滋雄) 사무총장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다. 이와타니 사무총장은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3국이 역사인식의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한·중·일 3국이 서로 ‘톨레랑스’(자신과 다른 생각·신념을 가진 것을 용인하는 관용)를 갖고 서로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25일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3국 협력사무국에서 이뤄졌다.


 

―2년째 한·중·일 정상회의는 고사하고 외교장관 회담도 열리지 않고 있다.

“한·중·일 정상회의가 2년간 열리지 않는 상황은 3국 협력에서도 손실이다. 다만 협력이 연기되는 분야가 있으나 이전과 같은 페이스로 협력이 진행되고 있는 분야도 있다. 정치 부문에서는 업·다운(부침)이 있기 마련이다. 현재는 약간 다운되는 시기이나 장기적으로 볼 때 개선되는 시점이 올 것이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

“두 개의 어프로치(접근법)가 있다. 하나는 이런 상황에 관계없이 계속 발전할 수 있는 3국 협력관계를 더욱 촉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전체적인 관계가 개선되는 방향으로 노력한다. 2010년 5월 3국 관계가 조금 더 좋았던 시기에 ‘비전 2020’이라는 3국 정상이 합의해 작성한 문서가 있다. 그 시점부터 향후 10년간 3국 협력을 해나가자는 꽤 긴 문서였는데 아직 실행되지 않고 있는 분야가 엄청 많다. 이것을 착실하게 하나하나 실현시키는 것을 통해 3국 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양자 문제의 경우 3국협력사무국이 다룰 수는 없지만 3국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테마를 정해서 작으나마 공통인식을 만들도록 할 수 있다면 지금의 양자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도 연관될 수 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3국 정부 간에 이런 일을 진행하기는 몹시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학자 등 민간대화를 촉진해 (3국간의) 핵심적인 문제에 관해서도 상황을 개선할 돌파구를 찾도록 하는 것도 사무국의 역할이 아닌가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3국 공통의 문제라고 한다면 한·일, 중·일 양자 관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역사문제가 있다. 다만 역사문제도 양자 간에는 공동연구가 이뤄졌으나 그 결과가 양국 관계를 촉진하는 것으로 그리 연결되지는 못했다. 만약 한·중·일 학자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전전(戰前)부터 전후에 걸쳐 이 지역에 크게 관여한 미국의 역사, 정치학자들이 모여 논의한다면 무엇인가 역사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는 지혜라든지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일 일본군위안부 관련 국장급 협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 부분에 성과가 있으면 한·일 정상회담으로 이어질 분위기다. 사무국 차원에서 절충안이나 제안을 내놓을 계획은 없는가.

“양국 간 문제, 개별적 문제는 사무국의 업무 범위 안에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런(위안부) 문제에 대해 제안을 하면 3국 정부 모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주제를 보다 넓게 설정해 역사문제에 대해 서로 공통이익을 갖도록 인식을 좁혀간다는 목적 하에 사무국이 무엇인가 기여할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3국간 어떤 차이가 관계 개선의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보나.

“불충분한 지식으로 그런 큰 문제에 대해 일반적으로 짧게 말하면 오해를 일으킬 것으로 우려된다. 그래서 먼저 각론으로 들어가면 한·중·일 3국의 의식주(衣食住)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그 차이의 배경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예의와 습관, 교제 방식에서 서로 간의 차이를 3국이 서로 이해하고, 그래서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구미(歐美)에는 톨레랑스라는 말이 있다. 톨레랑스가 없으면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나가는 게 꽤 어렵다. 상대방의 차이를 인식하고, 상대방을 자신의 방식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고, 상대방의 방식도 존중하고 자신의 방식도 존중받는 인간관계가 가능하다면 나라와 나라 사이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3국협력사무국은 2011년 이후 어떤 역할을 했나.

“협정에 규정된 역할은 크게 다섯 가지다. 3국 정상회의 등 각종 회담 준비, 아세안 등 다른 국제기구와 연계, 기존에 협력 분야가 없거나 촉진시켜야 할 분야에 대한 아이디어 제안, 3국협력진척보고서 작성, 3국협력 분야에 대한 연구다. 특히 다른 국제기구와의 연계와 관련해 3국 협력이 발전하면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과도 일체화(통합)하는 방향도 생각하고 있어 아세안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또 러시아, 몽골, 유럽연합(EU)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한·중·일 3국이 유럽처럼 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한 관건은.

“물론 유럽에는 유럽의 문화가 있고, 여기(동아시아)에는 여기의 문화가 있다. 그래서 완전히 유럽처럼 이쪽도 나아가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역시 유럽에서 배울 부분이 많다. 동아시아는 여러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으나 확실한 법적인 의무, 문서에 근거한 의무가 아닌 수준의 협력에 머물러 있다. 반면 유럽은 좀 더 확실한 법적 틀 안에 있다. 이것이 큰 차이다. 3국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끝나고 실제 발효되면 조약의 형식으로 (3국이)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부분이 있게 된다. 법적인 틀을 만들어 협력의 수준을 높이는 방법은 경제뿐 아니라 문화, 환경 등 다른 많은 분야에서도 필요하다.”

―3국 협력을 새롭게 촉진시켜야 할 분야는 어떤 것이 있나.

“스포츠가 뜻밖에 아직 충분한 교류가 이뤄지지 않는 분야다. 그런 의미에서 스포츠담당 장관급 회의라든지 고위급 레벨에서의 3국 회의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서 제안한 바 있다.”

―그동안 부임 후 3국간 편견의 극복을 강조한 것으로 안다.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구상하거나 실행 중인 프로그램은.

“3국에서 모두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해 있다. 그래서 3국의 문화, 사고방식이 비슷하다고 생각(오해)하기 때문에 그게 오히려 부작용이 되고 있어 서로 차이에 대해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런 부분을 극복하기 위해 3국 문화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주제로 전문가의 강연을 듣는 월간 강좌(Monthly Lecture) 행사를 열고 있다. 어떤 특정한 면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서로 파악하면 편견을 극복하는 데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일례로 3국이 모두 젓가락을 쓰지만 형태나 사용법은 다 다르다. 그래서 하나하나의 사례를 통해 3국의 문화, 사고방식의 차이를 일반 시민에게 설명하고 책자로 배포한다면 서로 올바로 이해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국제기구에 속해 있어 주한 일본대사관 소속 일본 외교관보다는 자유로운 입장이라고 생각된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서 한·일 간 현안이 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계획은 혹시 없나.

“사무총장의 입장을 떠나 한 명의 일본인, 외교 분야에서 일한 일본인으로서 이 문제가 한·일 관계 개선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주 안타깝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제가 가능한 것이 있다면 하고 싶은 생각도 있으나, 무엇이 가능할까 생각해 보면 몹시 어려운 일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저는 사무총장직에 전념하면서 하나하나의 문제에 몰두하는 것보다 보다 큰 틀에서 불행한 역사문제가 양국 관계 개선에 걸림돌이 되는 상황을 넘어설 길이 없을까 좀 더 크게 생각해 보고, 3국 정부 간에는 힘들지만 민간 레벨이 무언가 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있으면 하고 싶은 마음이다.”

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정리=김청중, 사진=김범준 기자

■이와타니  3국협력사무국 사무총장 약력…

▲1950년 일본 고치(高知)현 출생 ▲일본 히토쓰바시(一橋)대 법학부 ▲1973년 외무성 입성 ▲주중국공사 ▲주독일공사 ▲주하와이호놀룰루총영사 ▲주케냐대사 ▲주오스트리아대


 

박근혜정부 2년차로 접어든 새해 들어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성사되는 등 남북관계가 해빙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이명박정부의 외교·안보 유산 조정 여부가 정부 내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명박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을 총괄했던 천영우(62·사진) 전 대통령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북한이 저렇게 유화공세로 나오는 건 이명박정부의 원칙 있는 대북정책으로 북한이 버틸 수 있는 체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면서 “한반도 평화·안보를 약화시키더라도 남북관계를 좋아 보이게 하는 정책만큼 쉬운 게 없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26일 서울 광화문 세계일보 사옥에서 이뤄졌다.



―박근혜정부 1년을 맞아 실시된 각종 조사에서 현 정부가 외교·안보 분야는 잘한다는 평가가 나왔다. 동의하나.

“외교안보정책이란 건 인기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국익이 얼마나 더 향상됐는가, 안보가 얼마나 더 강화됐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앞으로 무슨 결실을 맺을지 두고봐야 한다. 남북 긴장이 완화되는 게 우리 외교안보정책의 목표가 아니다. 긴장완화가 목표라면 우리 쌀 달라면 쌀 주고, 비료 달라면 비료 주고, 돈 달라면 돈 주면 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체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된다면 그 정책은 실패다. 이명박정부는 이전 10년간 북한이 키운 체력을 소진시키는 데 집중했다. 당시 국민 눈엔 남북관계가 나쁘게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체력을 누가 빼앗았나.”

―남북 고위급 접촉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됐다. 이제 북한이 우리에게 명세서를 내밀 차례가 된 것 같다.

“북한은 이미 기대하는 것 이상을 얻어 갔다고 본다. 북한이 가장 바라는 것은 비방 중단이다.(남북은 지난달 14일 고위급 접촉에서 이산 상봉과 비방 중단에 합의) 쌀이나 비료, 현금보다 비방 중단이 북한엔 더 소중한 것이다. 북한은 우리 정부의 5·24조치(이명박정부 당시 천안한 폭침 사건에 대응한 북한 제재조치) 이후 우리에게 줄곧 요구해오던 것을 얻어냈다. 그런 만큼 이산 상봉 대가로 쌀 달라, 비료 달라, 금강산 관광 재개해 달라, 이런 말 못한다.”

―북한에 비방 중단이 그렇게 중요한가.

“북한은 북한 체제와 외부세계에 대한 진실이 유입돼서 북한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을 비방·중상으로 간주한다. 진실이 곧 비방·중상이다. 북한은 배가 고프거나 현금이 없어서 체제가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한다. ‘김일성 왕조’에 대한 신앙심과 충성심이 무너질 때 체제가 무너진다고 본다. 장성택(국방위 부위원장)을 비롯해서 북한 체제 내부의 적은 이미 다 소탕했다. 남은 적은 남한으로부터 오는 진실과 정보다. 진실과 정보를 차단하지 못하면 아무리 쌀이 넘쳐나고 돈이 넘쳐나도 북한 체제는 무너진다. 우리는 5·24조치로 북한산 농수산물과 모래, 자갈 수입이 금지돼 북한이 연 5억달러 정도 손해 보는 게 아플 거라고 생각하지만, 북한으로선 (2004년 군사분계선에서의 선전활동 중단 등을 골자로 한) ‘6·4합의’가 파기되고 비방·중상 중단 합의가 파기된 게 가장 아픈 대목이었다. 이명박정부 당시에도 북한은 비방 중단 합의를 살리려고 별 이야기를 다 했다. 우리는 천안함 폭침 책임을 인정하면 6·4 합의가 복원된다고 했으나 북한은 수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정부에서 6·4 합의 복원 조건을 대폭 완화하니까 그 기회를 빨리 잡아야겠다고 북한은 판단한 것이다.”

 

 

―박 대통령이 새해 들어 ‘통일 대박’을 외치며 통일 붐을 조성하고 있다. 하지만 통일 과정은 생략한 채 통일 이후의 장밋빛 미래만 부각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통일대박론’ 이후로 나오는 여러 통일담론은 일단 좋은 현상으로 본다. 그동안 통일에 대한 무관심, 통일 회의론, 통일 재앙론 등이 통일담론 시장에서 더 우세한 형국이었는데, 통일에 대한 부정적 생각들을 일거에 바로잡아 놓았다. 다만 통일정책은 북한 김정은 체제의 미래를 현실적으로 진단하면서 구체적으로 세워나가야 한다. 김정은(국방위 제1위원장)이 공포정치를 하고 큰 사고를 치다가 하루아침에 운명이 끝날 수 있겠다는 가능성에만 기대하면서 통일정책을 세워선 안 된다. 김정은이 하기에 따라서는 북한 체제가 더 오래 갈 수 있다는, 10년 이상도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대북 정책을 세워야 한다.”

―북한 김정은 체제가 단기간에 무너질 가능성은 없다는 의미인가.

“장성택 처형 이후 김정은 체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졌다고들 하는데, 단기적으론 그렇지 않다고 본다. 장성택 처형으로 높아진 불확실성보다 처형이 감소시킨 불확실성이 더 크다고 본다.”

―무엇보다 북핵 문제가 걱정이다. 어떤 식으로 풀어가야 하나.

“북한이 하고 있는 전략적 계산의 공식을 바꾸면 북한은 핵을 포기할 수 있다. 중국과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지금까지 북한의 전략적 계산을 바꿀 만큼 대북 제재를 가한 적이 없다. 이란 제재의 5분의 1도 안 된다. 북한으로선 지금 수준의 제재 같으면 핵을 포기 안 하고 버티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제재 대상이 북한 대외무역의 10분의 1도 안 된다. 국제사회가 이란에 가한 수준의 대북 제재를 결심하면 북한은 버틸 수가 없다. 중국이 외상으로 북한에 석유 수출하는 것만 막아도 북한의 전략적 계산을 바꿀 수 있다.”

―중국은 북한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걱정을 하는 것 같다.

“북한은 정권이 무너지기 전에 핵을 포기할 것이다.”

―박근혜정부 들어 한·중 관계가 좋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중 관계의 미래는 서로 좋은 말만 하는 것으로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북한 비핵화에 중국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힘을 쓰느냐에 좌우된다는 메시지를 중국에 던져야 한다. 북한이 비핵화를 안하면 우리는 북한 핵과 미사일을 막아내기 위해 자구 차원에서 미국 미사일방어(MD) 시스템에 참여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전달해야 한다.”

―지금 한·일 관계가 잘 풀리지 않는 게 이명박 대통령 책임이란 말도 나온다. 독도 방문 사례처럼 너무 강경한 대일 정책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동의하지 않는다. 이 대통령이 독도에 간 건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걸 보여주려는 게 아니었다. 영토 문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영토 문제와 상관없이 천연기념물 보호 문제 등을 목적으로 간다면 대한민국 영토에 대통령이 못 갈 곳은 없다. 대한민국 섬 3000개 어디든 갈 이유가 있으면 가는 거다.”

―누구 책임이든 결과적으로 한·일 관계가 파탄 직전이다.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역대 어느 정부보다 과거 회귀적인, 퇴행적인 행태를 보이는 건 틀림없다. 우리가 보기에 가슴 아프고 한심하다. 하지만 국민감정만 갖고 국가 간 관계를 할 순 없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국익이다.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범세계적 가치관 등에서 일본처럼 가까운 나라가 없다. 아베 총리의 시대착오적 행동에 과잉대응할 필요는 없다.”

―양국 정상이 일단 만나야 하지 않겠나.

“정상 간 회담이 어렵다면 장관급이라도 수시로 만나서 서로 협의할 일이 있으면 해야 한다. 대통령이 일본 총리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장관들도 눈치 보면서 일본의 카운터파트들과 만나서 협의하기를 꺼려하는 건 좋지 않다.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은 우리가 다른 나라와 손잡고 일본을 망신시키는 데 앞장서는 건 옳지 않다. ”

―미국이 한·일 과거사 갈등을 중재하는 방식은 어떤가.

“미국 입장에서도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과 같은 행태가 한심하니 한마디씩 거들지만, 그렇다고 미국 사람들이 우리 편을 든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미국이 일본에 갖고 있는 가장 큰 이해관계가 안보다. 역대 일본 정부 중에서 아베 총리만큼 미국의 전략을 잘 이해하고 협조해주는 총리가 없었다. 미·일 관계의 근간이 아베 총리의 과거사 인식 문제로 흔들리지 않는다.”

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정리=김예진, 사진=허정호 기자

◆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은…?

▲1952년 경남 밀양 출생 ▲ 동아고, 부산대, 미국 컬럼비아대 국제관계학 석사 ▲외무고시 11회 ▲북핵6자회담 수석대표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주영국 대사 ▲대통령실 외교안보수석 ▲현 아산정책연구원 고문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존경하는 역사 인물은 다카스기 신사쿠(高衫晋作)다.

아베 총리의 이름 중 ‘신(晋)’자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카스기는 아베의 고향인 조슈 출신으로 민병대를 조직해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숨통을 끊어놓은 인물이다. 아베 총리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전 외상의 이름에도 ‘晋’자가 들어있다. 그에 대한 아베 부자의 존경의 깊이를 짐작케 한다. 다카스기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일본을 제국주의로 몰아간 ‘정한론(征韓論)’ 주창자다. 아베 총리가 정한론자를 존경하는 것과 그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이었다는 점은 동전의 양면이다.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 인물은 일본 근대화의 영웅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다.

 

                                                                                                    <사카모토 료마>

하급무사 출신인 그는 견원지간인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과 조슈번(현 야마구치현)이 오랜 반목과 불화를 넘어 동맹(삿초동맹)을 맺도록 하고, 메이지유신의 토대를 닦은 인물이다. 그가 성사시킨 삿초동맹은 백제와 신라를 손잡게 하는 일에 비견할 만한 기적 같은 일이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사는 가슴을 뛰게 한다. ‘서양 오랑캐를 내쫓고 국왕을 받들어 모시자’(尊王攘夷·존왕양이)는 대의명분 아래 수많은 지사들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다. 그들의 헌신에 천운이 더해진 덕분에 일본은 주변국보다 먼저 근대화에 성공했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중심의 봉건체제에서 일왕을 정점으로 한 근대국가로 탈바꿈했다. 중국의 국부(國父) 쑨원(孫文)이 한때 “우리는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이다”고 말한 데서 당시 메이지유신을 바라보는 조선과 중국 개혁가들의 선망 어린 눈길을 느낄 수 있다.

사카모토 료마 등 개명한 지사들은 일본의 근대화가 주변국과의 연대속에 진행되길 바랐다. 여론의 인정을 받는 좋은 정치를 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료마와 같은 개명파 지사들이 암살당하거나 메이지유신 이후 노선 투쟁에서 극우파들이 승리하면서 일본은 아류 제국주의의 길로 폭주했다. 이는 일제의 침략으로 자주적 근대화가 좌절된 조선과 중국뿐 아니라 일본에게도 불행이었다. 청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 일제의 침략전쟁으로 수백만의 ‘황군(皇軍)’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마리우스 잰슨의 분석은 명료하다. 그는 저서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유신’(푸른길)에서 “진정한 진보로 이어질 이성적인 계획에 눈을 뜨면서 폭력적인 수단을 버렸던 메이지유신의 선각자들과, 입으로는 그들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이성에 등을 돌리고 근거 없고 시대착오적인 미신의 불합리로 조국을 내모는 허망한 시도를 하면서 폭력에 호소한 후세의 아류들의 차이점을 보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평가했다. 잰슨이 살아있다면 아베 총리에게 이런 충고를 할 것이다. 메이지유신 선각자들의 이상을 곡해한 채 ‘폭력에 호소한 후세 아류들’의 전철을 밟지 말고 주변국과의 협력을 통해 일본을 존경받는 나라로 만들라고.

개인적으로 필자는 아베 총리가 요시무라 간이치로(吉村貫一郞)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를 펼쳐 보이길 기대한다.

그는 영화 ‘철도원’의 원저자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아사다 지로(淺田次郞)가 그의 장편소설 ‘임생의사전(壬生義士傳)’에서 주인공으로 삼은 인물이다. 아사다는 사료에 이름 정도 기록돼 있던 평범한 무사를 주인공으로 삼아 대의 명분의 기치 아래서 스러져간 민초들의 삶을 그려 보인다. 메이지유신 시대의 영웅전에 익숙한 독자라면 요시무라는 파격 무사다. 주군(또는 일왕)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앞세우며 시도 때도 없이 배를 그어대던 다른 사무라이들과 달리 그는 처자식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는 형식만 남은 껍데기 무사정신에 얽매이지 않았다. 사무라이가 목숨을 바칠 상대는 주군이 아니라 우리를 먹여 살리는 백성이라고 외치면서. 사카모토나 요시무라 같은 무사들이 근대 일본을 주도했다면, 일본은 주변국의 존경을 받는 동북아 강국이 돼 있을 것이다. 아베 총리가 그런 나라를 만드는 데 힘쓰길 바란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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