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자랑스러운 민주당원, 자랑스러운 미국인, 자랑스러운 힐러리 클린턴 지지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서게 돼 영광이다.”

2016년 7월26일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장. 민주당 대선경선에서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 맞서 끝까지 싸운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연설문의 첫 문장을 읽어내려가자 장내에서는 환호성과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당신이 힐러리에게 표를 던졌든, 아니면 나를 지지했든, 이제는 동일한 목적 아래 당 전체가 단합해야 할 때다” 더 큰 박수가 터져나왔고 대의원들은 ‘No Trump!’를 외쳤다. 샌더스 의원은 “힐러리 클린턴은 나의 후보이다. 그는 우리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전날 시작된 민주당 전당대회는 개최 직전까지만 해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 내에서는 클린턴 후보 지명에 불만을 품은 샌더스 지지자들이 전당대회 난동 사태를 촉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하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전당대회 사흘째, 샌더스는 클린턴에게 또 하나의 선물을 안겼다.

그 날 오전에 전당대회 대의원들은 클린턴과 샌더스를 대상으로 호명(roll call)투표를 실시했다. 롤 콜은 알파벳 순으로 각 주 대표가 나와, 대의원 투표 결과를 공개로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미 경선 과정에서 클린턴 후보가 과반 대의원을 확보했기 때문에 롤 콜은 클린턴을 민주당 후보로 지명하는 요식 절차에 불과했다. 샌더스는 이를 당의 단합을 위한 계기로 활용했다.

호명투표가 절반 넘게 진행됐을 때 샌더스는 자신의 지역구인 버몬트주 대의원들 앞에 섰다. “우리 당의 단합을 보여주고 대선 승리를 각오하는 다짐의 일환으로 우리가 한 목소리로 힐러리 클린턴이 우리의 후보이고 우리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자”고 말했다. 그러자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런 뒤 샌더스는 전당대회 호명투표를 중단하고 박수로 오바마를 지명하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은 통과됐고 대의원들은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대의원들은 ‘힐러리’를 연호했다. 전당대회 의장은 호명 투표 중단을 선언했다. 클린턴과 샌더스의 오랜 싸움이 비로소 종지부를 찍었다. 샌더스가 양 진영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씻김굿을 해준 셈이었다.

2008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버락 오바마(오른쪽)는 민주당 경선 맞수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새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임명하면서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상은 다음달 25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되는 민주당 전당대회 상황을 필자가 가상해서 그려본 모습이다.

소설을 쓴 것은 아니고 2008년 8월 콜로라도 덴버에서 열렸던 민주당 전당대회의 실제 상황을 토대로 등장 인물만 바꿔서 재구성한 것이다. 버락 오바마를 힐러리 클린턴으로, 힐러리 클린턴을 버니 샌더스로 바꿨다.

올해 민주당 대선경선도 치열했지만 2008년 민주당 경선에서도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과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죽기살기로 싸웠다.

클린턴은 그 해 6월7일 오바마 지지를 공식 선언했으나 클린턴 지지자들은 경선 과정에서 쌓인 앙금을 쉽게 풀지 못했다. 일부 지지자들은 ‘클린턴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하라’는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그 해 8월25일 콜로라도 덴버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하루 전날 오바마는 부통령 러닝 메이트로 조 바이든 상원의원을 선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클린턴 지지자들의 실망감은 컸다. 민주당 지도부가 전당대회 난동 사태를 걱정했을 정도다. 공연한 걱정이었다. 전당대회는 축제의 장이 됐다.

워싱턴포스트 정치전문기자인 댄 볼츠는 저서 ‘THE BATTLE FOR AMERICA 2008’에서 당시 정황을 전하면서 힐러리 클린턴과 남편인 빌 클린턴 덕분에 민주당이 내분을 종식시키고 일치단결해서 본선 경기에 임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오바마는 클린턴에게 빚을 졌다. 

클린턴과 비슷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
클린턴 유튜브 캡처

클린턴은 이제 2008년과는 정반대의 상황에 놓여있다. 그는 경선 맞수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그 지지자들을 우군화해야 한다. 8년 전의 클린턴처럼 샌더스도 할 수 있을까. 샌더스 의원은 지난 9일 오바마 대통령과의 회동 직후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다면 재앙이다. 유권자들이 여성과 소수집단을 모욕하는 사람을 지지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면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고, 조만간 클린턴 전 장관을 만나 협력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상의 클린턴 지지 선언이지만 아직은 2%가 부족하다. 샌더스의 지지자들을 클린턴 쪽으로 돌려세우기 위해서는 필자가 전개한 가상의 시나리오대로 민주당 전당대회가 흘러가야 한다. 사전 각본도 좋아야 하고 샌더스의 연기력도 좋아야 한다.

클린턴과 샌더스 지지자들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과정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오바마야말로 샌더스 지지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다. 진보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오바마는 여전히 80%가 넘는 지지를 받고 있다. 오바마는 8년전 클린턴에게 진 빚을 갚으려 한다. 그런 오바마가 임기말 재선 대통령치고는 괜찮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클린턴에게 행운이다. 

오바마의 클린턴 지원 유세(미국은 한국과 달리 대통령의 선거 지원 운동이 가능하다)는 특히 위스콘신과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같은 경합주 싸움에서 도움이 될 것으로 미 언론은 분석한다. 오바마는 두 번의 대선에서 이들 주를 석권했다. 오바마라면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인 백인 노동자층을 분열시키고, 중도·무당파층을 끌어올 수 있다.

클린턴은 조만간 샌더스와 만날 것이다. 그 자리에서는 민주당 강령을 보다 진보화하는 문제가 최우선 의제가 될 것이다. 이미 샌더스는 경선 과정에서 클린턴을 통상과 월가 개혁 문제에서 좀 더 진보적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샌더스는 이제 시간당 최저임금 인상 등과 같은 경제 이슈와 정당 민주화 부문에서 클린턴의 양보를 요구하고 있다. 클린턴과 샌더스를 중재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도 오바마다. 미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는 ‘첫 여성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킹 메이커’를 자처하고 나섰다. 역사와 대화하길 좋아하는 오바마다운 빅 프로젝트다.

조남규 국제부장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 미국 하원의장이 끝내 무릎을 꿇었다.

2일(현지시간) 공화당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하겠다’고 밝혔다. 라이언 의장은 트럼프가 후보 지명을 확정지은 이후에도 트럼프의 주요 공약들이 공화당 강령과 배치된다면서 지지 입장을 유보해왔다. 그 사이 트럼프의 생각이 바뀐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라이언도 “여전히 그와 나 사이에는 이견이 존재하지만 이견 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왜 라이언은 트럼프를 지지했을까? 그는 “트럼프가 보수주의 아젠다를 입법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밝혔지만, 그 말을 누가 믿을까. 라이언의 희망 사항일 것이다. 

<<폴 라이언 하원의장>>
공화당 전당대회 의장이기도 한 라이언이 달리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우선 당을 살려야 하는 처지에서 불가피한 선택을 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어쨌든 공화당 옥새를 쥐고 있는 라이언이 사실상 투항하면서 공화당은 이제 ‘트럼프의 정당’이 됐다. ‘아웃 사이더’ 트럼프가 공화당을 접수한 것이다. 적어도 대선이 치러지는 오는 11월8일까지는 그렇다.

이제 라이언과 트럼프는 한 배를 타게됐다. 그런데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미워한다는 점을 제외하곤 공통점이 많지 않다. 어떤 지점에선 정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이민개혁이다.

이민개혁은 민주당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전유물로 인식되고 있지만 이를 맨먼저 추진했던 대통령은 공화당 조지 W 부시 행정부였다. ‘돌아온 탕자’ 부시 대통령은 거듭난 기독교인이 된 이후 ‘다문화주의’를 신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앵글로 색슨 백인만의 세상을 만들려했던 공화당 우파와는 달랐다. 부시의 이런 관용 정책은 증가세인 히스패닉 표를 따진 정치적 선택이기도 했다. 제수씨(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부인)가 히스패닉이라는 가정사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2007년 부시는 민주당과 손잡고 초당적 이민개혁 법안을 마련했으나 공화당 내부 반발에 밀려 실패하고 말았다.(흥미롭게도 민주당 대선주자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이 법안에는 반대했다. 클린턴 후보가 올해 민주당 경선 TV토론에서 이를 공격 소재로 삼았다.)

2008년 대선에서 히스패닉 표심이 압도적으로 오바마 후보와 민주당 쪽으로 쏠리는 것을 목격한 공화당은 서서히 이민개혁을 수용하는 쪽으로 이동해갔다. 그런데 2010년 중간선거에서 반(反) 이민개혁 성향의 ‘티 파티(보수적 우파 대중운동)’ 계열 의원들이 공화당 예비경선에서 후보가 되고 대거 당선되면서 당내 기류가 확 변했다. 급기야는 오바마 대통령의 불체자 사면 등 이민개혁에 동조하는 공화당 의원들은 배신자로 몰리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그 대표적 희생양이 공화당 넘버 투였던 에릭 캔터 하원 원내대표다. 캔터는 존 베이너 하원의장 다음 서열의 거물이었으나 이민 개혁파로 찍혀서 2014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당내 예비경선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티 파티 세력이 경선 과정에서 캔터를 낙마시키기 위해 정치 신인인 경제학 교수 출신 후보를 밀었기 때문이다. 라이언은 이민개혁의 경우 캔터의 계보를 잇는 정치인이다. 대통령이 되면 1000만명이 넘는 불법 체류자를 몽땅 추방하겠다는 트럼프와 무슨 대화가 잘 됐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미국 노인이나 저소득층은 연방정부와 주 정부 차원에서 의료 혜택이 주어진다. 노인 의료보험은 메디케어, 저소득층 의료보험은 메디케어로 부른다. 고령화 사회, 소득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이 분야에 들어가는 예산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이 돈은 의무지출 예산이어서 매년 연례행사처럼 이뤄지는 백악관과 의회의 연방정부 예산 공방의 단골 소재가 된다. 공화당은 메디케어 수령 나이나 수령자의 부담을 더 높이는 쪽으로 메디케어 시스템을 개혁하자고 주장한다. 각 주의 메디케이드 예산도 대상자와 보장 대상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줄여나가자는 게 공화당의 입장이다. 이런 주장의 논리적 근거를 마련한 사람이 다름아닌 라이언이다. 예산 전문가인 그는 하원 예산위원장 시절 ‘미국의 미래를 위한 로드맵’(A Roadmap for America’ Future)을 통해 연방예산을 21세기 중반까지 균형예산으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그 핵심 방안 중 하나가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개혁이었다. 그는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변화 없이는 미국 예산 문제 통제 불가능하다”면서 “의료보험은 사회적 이슈라기 보다는 경제적 이슈”라고 주장했다. 반면 트럼프는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면서 메디케어는 손도 대지 말자고 한다. 메이케이드나 사회보장연금도 마찬가지다.

대외정책을 놓고도 공화당의 전통적인 ‘국제주의(개입주의)’를 지지하는 라이언과 ‘America First’를 외치며 미국 국익을 우선시하는 트럼프와는 서로 헌혈을 해줄 수 없는 혈액형이다. 자유무역을 놓고도 두 사람은 이견을 보이고 있다. <13회, ‘자유무역에 관한 트럼프의 거짓말’ 참고> 오바마 행정부 시절 공화당이 오바마표 법안을 거의 모두 비토하면서도 흔쾌히 찬성표를 던진 것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롯한 각종 FTA 비준안이었다. 그런 정당의 사실상의 대선후보가 FTA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 작금의 공화당의 어이없는 현실이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웃픈 표정의 라이언이 떠오른다.

조남규 국제부장

2016년 6월8일

 

7일(현지시간) 막을 내린 미국 대선후보 경선전의 최대 이변은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이다.

부동산 재벌인 그는 정치 경력이 전무한 상태에서 혈혈단신으로 공화당 경선전에 뛰어들어 당의 간판 스타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렸다.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의 후보 지명을 막기 위해 별의별 궁리를 다했으나 트럼프의 파죽지세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당 1인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한동안 트럼프 지지 선언을 거부한 것을 보면 공화당 지도부의 낭패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공화당 지도부의 눈에는 ‘트럼프의 반란(叛亂)’이었다. 반란은 성공했고 트럼프는 공화당을 접수했다.

미국 보수를 대표하는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유권자들이 공화당 주자 가운데 가장 진보적 공약을 내세운 트럼프를 선택한 것은 아이로니컬하다. 

조남규 국제부장
미국 노인들이 자식보다 낫다고 말하는 복지 제도가 있다. 노인 의료보험(메디케어)과 사회보장연금 제도다. 두 제도는 민주당 정부의 유산이다. 공화당은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부와의 예산 협상 과정에서 이런 사회복지 예산을 삭감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작은 정부’는 공화당의 핵심 강령이지만 트럼프는 복지는 줄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자유무역주의는 공화당이 100년 넘게 지지해온 정책이다. 오바마 정부의 국정과제들을 사사건건 걸고넘어진 공화당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롯한 각종 FTA 비준안 만큼은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당시 오바마 정부는 민주당 좌파의 FTA 반대 주장을 무마하느라 진땀을 뺐다. 자유무역 쟁점에서 트럼프는 민주당 좌파나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트럼프가 외교·안보 공약의 기치로 내건 ‘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도 세부 내용을 들여다보면 “세계를 경영하기에 앞서 미국인의 삶을 먼저 챙기라”는 진보 진영의 주장과 맥이 닿아 있다.

트럼프의 세금 공약도 공화당의 ‘감세’ 기조와는 사뭇 다르다. 그는 소득 2만5000달러(부부 합산 소득 5만달러) 이하인 저소득층에겐 소득세를 전액 면제해주겠다고 발표했다.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보다 급진적이다. 클린턴의 세금 공약은 소득이 1만달러 이하인 개인의 경우 10%의 소득세율을 현행대로 유지하고 있다. 최근엔 클린턴이 내세운 ‘부자 증세’ 공약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감세를 신줏단지 모시듯 해온 공화당 우파는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민주당과 공화당, 무소속을 넘나든 트럼프의 인생 역정이 보여주듯 그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다. 굳이 규정하자면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에 가깝다.

트럼프는 선거전략 차원에서 ‘좌파 코스프레’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가 조지 H W 부시 공화당 정부가 체결한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을 비판하면서 “(힐러리의 남편인) 빌 클린턴이 사인했다”고 억지 주장을 펴는 걸 보면 그런 심증이 굳어진다. ‘아메리카 퍼스트’는 클린턴 후보가 국무장관 시절 동맹 외교에 치우쳤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보인다. 트럼프의 실체가 무엇이든 지금까지는 트럼프의 전략이 먹혀들었다. 당내 경선 과정에서 ‘샌더스 역풍’에 시달렸던 클린턴은 본선에서도 샌더스 같은 트럼프를 상대해야 한다.

조남규 국제부장

 

“내가 2008년 오바마를 지원했듯이 샌더스도 그래야 한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을 굳힌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최근 경선 완주를 고집하고 있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에게 한 마디 던졌다. 클린턴 전 장관은 다음달 7일 캘리포니아 등 6개주 경선이 끝나면 후보 지명에 필요한 대의원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면 샌더스 의원은 결과에 승복하고 전당대회 전에 자신을 지지해달라는 메시지다.

2008년 민주당 경선 당시 클린턴은 그렇게 했다.

버락 오바마 후보는 그 해 6월 3일 승부를 결정지었다. 초선 상원의원에 불과했던 오바마의 승리는 놀라운 것이었다. 오바마는 ‘변화’와 ‘희망’을 외치며 민주당 대주주인 정치 거물 클린턴을 쓰러 뜨렸다. 4일 뒤 클린턴은 승복 연설을 했다. 클린턴 캠프 내에서는 “전당대회 경선까지 가자”, “지지 선언하기 전에 오바마 측과 대선 공약 등을 놓고 협상을 하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클린턴은 승복 결단을 내렸다. 워싱턴포스트 정치전문기자인 댄 볼츠의 저서 ‘THE BATTLE FOR AMERICA 2008’에 당시 정황이 실려있다.

결단을 내리기 전에 클린턴은 선거 참모들을 돌아보며 “오바마가 (존 매케인 공화당 대선후보에 맞서)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보느냐”고 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때 한 참모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돕는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참모는 반대 의견을 폈다. “본선에선 더 혹독한 검증에 시달릴 것이고, 오바마는 배겨내지 못할 것입니다.” 클린턴은 오바마를 돕기로 결정했다.

2008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버락 오바마(오른쪽)는 민주당 경선 맞수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새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2008년 6월7일. 클린턴은 지지자들에게 오바마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달라는 지지 연설을 했다. 그 자신도 오바마가 다음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헌신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꿈꿨던 클린턴이 다음 문장을 읽어내려갔을 때, 수많은 지지자들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우리는 비록 이번에 가장 높고 가장 단단하 유리 천장을 깨뜨리지 못했지만, 여러분들 덕분에 그 천장에 1800만개의 금(민주당 경선 참여 유권자 가운데 약 1772만명이 클린턴에게 표를 던졌다)을 낼 수 있었다. 그렇게 갈라진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이전 같지 않을 것이다. 그 빛은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번에는 이 길을 더 쉽게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오바마를 도운 클린턴은 오바마 정부의 국무장관에 임명됐다. 세계를 경영하는 제국인 미국에서 국무장관은 부통령 못지않은 자리다. 클린턴급의 인사에게는 대권을 준비하기에 안성맞춤의 자리다. 경선 승복에 대한 보답 차원의 인사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클린턴은 8년을 참고 기다렸다. 그리고 2008년 승복 연설 그대로, 이번에는 더 쉽게 민주당 대선 후보 지위를 사실상 확정지었다. ‘샌더스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지만 적어도 민주당 내부에서는 “이번에는 클린턴 차례”라는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2008년 경선 당시 ‘오바마 바람’에 휩쓸려 오랜 친구 클린턴을 배신했던 흑인들이 이번에는 빚을 갚는 심정으로 클린턴을 전폭적으로 밀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지지 의사를 숨기지 않고 있다 .

경선 패배가 굳어진 샌더스도 클린턴의 길을 따를 것인가.

샌더스는 2008년 당시 조건없이 오바마를 지지했던 클린턴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만 75세인 샌더스가 또 대선에 출마할 일은 없을 것이다. 클린턴 정부가 출범한다해도 샌더스와는 무관하다. ‘민주적 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를 자처하는 그가 추구하는 유일한 가치는 미국 사회의 진보화다. 그는 민주당 좌파 보다 급진적이다.(샌더스는 물론 대다수 샌더스 지지자들도 자신들을 민주당원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샌더스는 클린턴에 버금가는 경선 성적표(샌더스는 민주당 경선 규정이 공정했다면 자신이 이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를 내밀며 노선 투쟁에 돌입했다. 오는 7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공표될 민주당 대선 공약에 자신의 공약을 최대한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사실상 경선 패배가 확실시된 이후에도 샌더스가 경선 완주를 고집하고 있는 이유다. 그는 클린턴과 민주당을 향해 “본선에서 샌더스 지지자들의 표를 얻으려면 그들의 요구에 응답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아래는 뉴욕타임스(NYT)가 집계한 28일 현재 클린턴과 샌더스가 확보한 대의원 숫자다.
 

 

 



민주당 유력 인사들인 '슈퍼 대의원(Superdelegates)'들이 대부분 클린턴 지지를 선언한 점을 고려하면, 민주당 경선룰이 클린턴에게 유리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샌더스의 밑바닥 지지세는 클린턴 보다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2008년 오바마를 지지했던 젊은층은 이번 대선에서 클린턴 대신 샌더스를 밀고 있다. 젊은층이 공화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에게 표를 주진 않겠지만, 클린턴과 샌더스의 갈등이 원만히 조율되지 않으면 대거 투표에 불참할 수 있다. 아래 그래픽은 하버드대 정치연구소(IOP)가 지난 4월 18~29세 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다. 민주,공화당 대선후보에 대한 호감도를 묻는 조사에서 샌더스는 압도적인 1위에 올랐다. 호감 응답률에서 비호감 응답률을 뺀 순호감도 수치는 +23을 기록, 유일하게 +값을 얻었다.

 

 

샌더스는 비록 민주당 후보지명이 어렵게됐지만 미국의 젊은층을 대거 민주당으로 견인, 향후 미국 정치의 지형도가 민주당에 유리하게 그려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29세 젊은층을 상대로 한 IOP 조사에서는 최근 5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당원이라는 응답자가 무당파라고 답한 응답자 보다 많았다.

 젊은층의 민주당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 샌더스다. 샌더스 지지자들을 끌어 안지않고서는 클린턴의 대선 승리가 힘들어 진다.

 아래는 민주당 경선에 참여한 샌더스 지지자들의 정치 성향을 보여주는 출구조사 결과다.

샌더스 지지표의 상당수가 무당파 표임을 보여준다. 샌더스가 흔쾌히 클린턴 지지를 선언하지 않으면 무당파가 트럼프로 기울거나 아예 투표장을 찾지 않을 수 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샌더스가 내세운 공약 중에는 진보 성향의 민주당원들조차 부담을 느끼는 것들이 많다는 점이다. 국공립 대학 학비는 전액 국가가 지원하고 국민의 의료비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치적으로 내세우는 의료보험개혁(오바마 케어)도 반쪽 짜리 개혁으로 치부한다. 최저임금은 연방정부 차원에서 시간당 15달러로 인상하고 실업 급여지급 기간도 지금 보다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큰 방향에서 북유럽형 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이런 공약들을 이행하기 위한 자금은? 증세다. 특히 샌더스는 고소득자의 소득세율을 대폭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널드 레이건, 조지 W. 부시 등 공화당 행정부가 단행한 감세 조치도 즉각 중단하고 상속세율과 이자·배당 소득에 대한 세금도 인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클린턴은 이번 경선 과정에서 2008년 경선 때 보다는 진보적인 공약을 선보였다. 고소득자 세율 인상을 포함한 세제개혁 추진과 노조 교섭력 강화 입장을 밝혔다. 국무장관 시절에는 오바마 대통령을 도와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FTA 체결에 힘썼으나 경선 과정에서는 FTA 입장이 바뀌었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은 찬성에서 반대로 선회했다. 자유무역으로 미국인들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샌더스의 주장에 수많은 유권자들이 호응하고 있기 때문이다.(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도 자유무역과 관련해선 샌더스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거센 ‘샌더스 바람’이 클린턴을 좌측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하지만 클린턴은 시간당 최저임금을 15달러로 인상하거나 국공립대 학비를 국비로 지원하는 공약은 시기상조라고 본다. 오바마케어도 폐지하기 보다는 현 수준에서 개선해나가는 게 합리적이라는 입장이다. 한 마디로 클린턴은 점진적이고 샌더스는 급진적이다. 
  두 후보 사이의 차이는 공약의 문제만은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신뢰의 부족이다. 샌더스는 클린턴을 믿지 못한다. 클린턴이 대기업과 월가 등의 정치자금에 포획돼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린턴은 미국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근본적 개혁을 해낼 수 없다고 샌더스는 비판한다. 아래는 지난 23일 현재까지 정치 자금 추적 단체인 '오픈시크릿'이 집계한 선거자금 모금 실적이다. 

 

 


 

그래픽의 윗쪽 막대선은 선거캠프 밖에서 모금한 자금이고 아랫쪽 막대선은 선거 캠프에서 자체적으로 모금한 자금이다. 클린턴은 샌더스에 비해 외부 자금이 훨씬 많다. 외부의 누군가 돈을 모은 뒤 클린턴을 위해 사용했다는 의미다. 샌더스는 월가의 대형 금융회사나 대기업의 돈이 클린턴 캠페인에 흘러들었다고 주장한다. 사실이 그렇다. <2회, ‘선거자금으로 풀어본 미국 대선’ 참고>

클린턴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샌더스는 문서로 보장받길 원한다. 민주당이 전당대회에서 발표하는 대선 공약이 그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민주당 전국위원회(DNC)는 샌더스 지지자들의 전당대회 난동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샌더스 측에 대폭 양보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대선 공약을 마련하는 위원회에 샌더스 측 인사를 대거 참여시키기로 했다는 것이다.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전은 클린턴의 승리로 굳어졌지만 공약 투쟁은 지금부터다. 두 후보가 갈등을 여하히 봉합하느냐에 클린턴 대선 승패가 달렸다.

조남규 국제부장

 

미국 대선의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 가운데 하나가 대선 후보(소속 정당)와 언론의 관계다.

언론은 속성상 비판적이나 대선 후보가 누구냐에 따라 그 강도는 다르다. 미국 신문은 지지 후보를 공개적으로 밝히기 때문에 이런 입장이 지면에도 일정 부분 반영되고 있다. (한국 언론은 지지 후보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정치와 언론은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사이로 표현되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특정 매체는 특정 정당과 좀 더 가깝거나 좀 더 먼 경우가 많다.

올해 대선에서도 뉴욕타임스(NYT)를 비롯한 다수 매체는 민주당 대선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뉴욕포스트 등 일부 매체는 공화당 후보 자리를 예약한 도널드 트럼프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렇다 보니 기사의 중립성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기사의 소재를 선택하고 뉴스 밸류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매체의 판단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미 대선 기사를 훑어보다 보면 NYT나 워싱턴포스트(WP) 같은 신문에선 트럼프 비판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다. 트럼프의 여성 편력을 다룬 NYT의 최근 기사는 압권이다. 발끈한 트럼프가 NYT를 향해 “망해가는 신문”이라고 독설을 퍼부은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공화당에 우호적이다. 방송도 매체별로 정치 성향이 갈린다. 대체로 ABC,CBS 방송은 민주당, FOX는 공화당 편을 드는 경우가 많다. 보수같지 않은 보수 후보인 트럼프는 비위가 뒤틀리면 FOX와도 일전 불사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양측의 관계도 개선될 것이다.

주류 매체의 공격이 해당 후보에게 항상 손해인 것은 아니다. 요즘처럼 대안 매체들이 즐비한 상황에서는 주류 매체의 공격이 해당 후보의 상승 동력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 트럼프는 자신을 주류 매체의 부당한 공격을 받는 ‘희생자’로 묘사하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펼치기도 했다. 미당 서정주의 시구를 패러디하자면, 트럼프를 키운 건 팔할이 언론이다. 그는 기존 관행에서 벗어난 행태로 미디어의 관심을 폭발시키고, 필요하면 특정 매체와 맞짱을 뜨는 공격적 행보로 대중적 인지도와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당파적이고 편향적인 언론이 트럼프에게 빌미를 제공한 측면도 없지 않다. 미국 언론의 당파성은 미 정치권의 양극화를 초래한 원인의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미 정치권의 양극화는 정쟁을 부르고, 정쟁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 ‘아웃 사이더’인 트럼프를 공화당 대선후보로 밀어올렸다. <1회, ‘샌더스·트럼프가 뜬 진짜 이유’ 참고> 그러고 보면 미 언론은 트럼프를 띄운 공신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공화당 조지 W. 부시(아들 부시) 집권 시절 백악관 대변인을 역임했던 애리 프라이셔는 언론에 불만이 많았다. 대변인을 마치고 펴낸 저서(‘Taking Heat’)에서 언론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공화당원이었던 인사의 불만인 만큼 그 대상은 주로 진보 매체였다. 아직도 “논평과 보도가 구분돼 있는 미국 언론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프라이셔의 체험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프라이셔와는 반대로 FOX 등 보수 매체의 편향적 보도 행태가 미 정치를 망가뜨린 주범 중 하나라는 견해도 많다. 어느 쪽이든 미 언론이 공정하지 않다는 점에선 의견이 같다. 다음은 프라이셔의 증언이다.

<2000년 12월 12일 미 연방대법원이 공화당 조지 W.부시(아들 부시) 후보의 손을 들어줬을 때다.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 앨 고어 후보와 맞붙었던 부시 후보는 플로리다주 재검표가 끝까지 진행됐다면 대선에서 패배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법원이 재검표 중단 판결을 내린 덕분에 간발의 차이로(선거인단 271 대 266) 승리할 수 있었다.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는 고어 후보에게 밀렸다. 한국처럼 국민 직선제였다면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언론은 일제히 대법원 판결이 단 1표 차이인 5 대 4로 아슬아슬하게 결정됐다고 강조했다.

방송들은, “분열된 대법원이 앨 고어 후보의 백악관 행을 좌절시켰다”(NBC), “분열된 대법원, 억울한 소수”(ABC)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 4일 전, 플로리다주 대법원이 역시 1표 차이인 4 대 3으로 고어 후보의 손을 들어줬을 때는 보도의 뉘앙스가 달랐다. 플로리다 대법원이 분열됐다는 표현도 없었고 소수의 억울함도 거론되지 않았다. 당시 워싱턴포스트는 “축하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플로리다 대법원 판결로 고어 진영은 대선 이후 투쟁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고어 후보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똑같이 박빙인 두 판결이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미디어들은 독자와 시청자들에게 연방대법원 판결의 문제점을 반복해서 알렸다. 만약 고어 후보가 승리했다면 1표 차 승리라는 사실 정도만 의무적으로 보도했을 뿐 전체적 주안점은 ‘대법원의 분열’이 아닌 ‘고어 후보의 최종 승리’가 됐을 것이다.

또 하나의 예가 있다.

아들 부시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1년 1월 전임 빌 클린턴 대통령이나 아버지 부시(조지 H.W. 부시) 대통령의 전례를 따라 행정 명령을 발동했다. 낙태를 포함한 가족계획 운동을 펼치는 해외 단체들에게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한 명령이다. 아버지 부시는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기조대로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민주당 클린턴 대통령은 취임 직후 아버지 부시의 결정을 뒤집었다. 이번엔 아들 부시가 클린턴의 결정을 뒤집은 것이다. 낙태를 둘러싼 공화당과 민주당의 입장 차가 반영된 결정이었다.

부시 대통령의 결정을 대부분의 백악관 출입기자들은 반기지 않은 듯 했다.

“왜 하필 취임 첫 날에 그런 명령을 발동하느냐”

“낙태 금지가 부시 행정부의 최우선 순위 문제냐”는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래서 클린턴이 행정 명령을 발동할 당시의 브리핑 기록을 찾아봤다.

기자들의 질문 내용부터가 달랐다.

당시 기자들은 “이번 조치를 여군들의 낙태 등 다른 분야로까지 확대할 계획은 없느냐”는 지지성 질문 2개를 포함해 6개의 질문을 던졌다. 반면 나는 그 보다 7 배는 많은 질문에 시달렸고 대부분 적대적이었다.

방송 보도도 마찬가지였다.

ABC 앵커 피터 제닝스가 동일한 사안에 대해 보도한 내용을 비교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오늘 대법원의 낙태 합법화 판결 20 주년을 맞아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1993년 1월 22일)

“부시 대통령은 오늘 레이건의 정책을 되살리는 결정을 통해 낙태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들을 기쁘게 했습니다”(2001년 1월 22일)

다음은 CBS 앵커인 댄 래더의 보도 내용.

“오늘 클린턴 대통령은 해외 가족계획 운동 단체를 지원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 레이건·부시 정부 시절의 규제를 해제하겠다는 공약을 이행했습니다”(1993년 1월 22일)

“오늘은 부시 대통령의 공식 임기 첫 날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오늘 공화당 내의 우익 인사들을 기쁘게 하는 조치를 신속히 취했습니다”(2001년 1월 22일)

이른바 중립성을 사명으로 한다는 방송사들이 클린턴 대통령의 낙태권 옹호 결정은 객관적으로 보도한 반면 부시 대통령의 반대 입장은 당파적으로 보도한 것이다.

만약 미디어들이 좀 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면 기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도 사뭇 달라질 것이다.

보도와 논평의 경계선이 모호해져 가는 현상도 미디어의 당파성을 부채질하는 요인 중 하나다.

뉴욕 타임스의 빌 켈러 전 편집국장은 “뉴욕 타임스의 1면을 장식하는 기사 중 상당 부분이, 만약 20년 전이라면 ‘견해가 너무 개입된’(opinionated) 기사라는 판정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켈러 국장은 이런 풍토를 고치겠다는 취지로 말하지 않았다. 단지 뉴욕 타임스가 뉴스를 다루는 방법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점을 강조했을 뿐이다.

이런 점들을 모두 고려한다면 지금의 미디어 환경은 대다수 저널리즘 교수와 언론인들이 민주당에 치우쳐 있고 언론의 보도 행태마저 논평 지향적인 현실이다. 미디어 내부에 이념적 편향성이 없다고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인 것이다. 더욱이 이제는 신문 기자들이 수시로 TV에 출연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시대가 됐다. 10년 전 만해도 기자가 기자를 인터뷰하고 기자가 자신의 관점을 밝히는 장면은 보기 힘든 현상이었다. 기자들의 관점이 날로 여론에 전파되고 자신들이 쓰는 기사에 반영되고 있는 셈이다. 언론들은 1993년 클린턴 행정부의 예산 증액안을 ‘적자 감축안’이라고 부른다. 정확한 표현은 ‘세금 증액’(tax hike)이다. 하원 원내총무를 지낸 딕 게파트가 2003년 부시 대통령이 성사시킨 세금 감축안을 폐지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세금 감축안을 폐지하면 결과적으로 ‘세금 증액안’(tax hike)이 된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는 게파트 구상에 ‘세금 감축 폐지안’(repeal of tax cuts)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통상 헤드 라인은 글자 수를 줄이는 것이 원칙이다. 이 경우 편집자는 ‘repeal of tax cuts’ 보다는 ‘tax hike’를 제목으로 뽑았어야 편집 기술상으로도 옳다. 공화당은 예산 적자를 정부가 지출을 늘린 결과로 이해한다. 민주당은 세금을 감축한 탓에 적자가 늘었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별개의 문제다. 다만 언론이 사용하는 용어를 보면, 언론은 공화당 편에 서 있지 않다.>

여러분은 프라이셔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장인 필 버넷이 2004년 말 취임 직후 인터넷 독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워싱턴 포스트는 진보적 편향성을 띤다는 비판을 줄곧 받아왔다. 그런 비판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버넷 국장은 “그런 편향성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감시와 자기 비판이 필요하다. 이 주제는 앞으로도 계속 논의돼야 할 사안으로 우리는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고 답변했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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