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분단 70년, 대한민국 다시 하나로] "통일은 새로운 기회… 다가올 70년도 희망의 시대 열 것"

문정인 연세대 교수, 윤덕민 국립외교원장 대담, 사회=조남규 외교안보부장

한반도 통일과 선진국 도약이라는 미완의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를 풀어내기 위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세계일보는 광복·분단 70년의 성취와 미완의 과제를 반추해보는 연중 시리즈를 시작한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온 각계 인사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광복·분단 70년이 남긴 질곡의 현장을 찾아 남북과 동서로 갈라진 7500만 겨레의 힘을 결집할 수 있는 교훈을 모색해 본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와 윤덕민 국립외교원장은 각각 진보와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학자다. 문 교수는 김대중·노무현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인 햇볕 정책과 동북아평화번영 정책 설계에 참여했고, 윤 원장은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의 대북 정책 수립에 깊숙이 관여했다.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대북정책과 동북아 전략, 한반도의 미래 비전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의 시각은 조금씩 엇갈렸지만 지난 70년이 성공의 역사였으며 통일이 한반도의 새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희망의 과정이라는 인식에서는 하나였다. 말미에 이르러서는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는 저출산 고령화, 청년 실업, 양극화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문 교수와 윤 원장은 통일을 ‘새로운 돌파구’와 ‘또 하나의 프런티어’(신 개척지)로 명명했다. 대담은 우리가 지난 70년을 성공했으니 다가올 70년도 성공할 것이라는 희망을 확인하면서 마무리됐다. 대담은 지난달 16일 세계일보 서울 광화문 사옥 인터뷰실에서 진행됐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윤덕민 국립외교원장, 문정인 연세대 교수, 세계일보 김민서 기자,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광복·분단 70년을 맞았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격동의 70년을 회고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하나.

문정인 교수(이하 문 교수):과거에 대한 성찰, 현재 위상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진단, 미래로 나아가야 할 방향 설정이 이뤄져야 한다. 6·25전쟁 이후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루고 민주화까지 이뤘다는 점은 분명한 성과다. 동남아와 중남미에 우리보다 훨씬 오래전에 독립을 이룬 국가도 있지만 우리만큼 출중하게 변모한 나라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분단된 한반도는 군사적 대립과 갈등관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미완의 과제를 안고 있다. 선진국 경제가 맞닥뜨린 저성장·고실업·저소비의 ‘뉴 노멀(New Normal)’은 우리도 비켜가기 어렵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부상에 따른 지정학적 역학관계 변동 등 도전이 간단치 않고 불확실성이 너무나 크다. 남북이 하나 된 한반도를 만들어 분단을 극복함으로써 미·중과 중·일 갈등 사이에서 통일 한반도가 중심축 역할을 수행하며 동북아 평화를 이끌어야 한다.

윤덕민 원장(이하 윤 원장):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누렸으나 분단이라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분단은 현재 진행형이다. 문 교수님이 지적했듯이 세계 최빈국이었던 우리가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뤄 세계 10위권의 경제국가로 부상했고 세계 7위의 무역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성과다. 보편적 가치인 민주화를 우리 스스로 힘으로 이뤄낸 점은 엄청난 성과다.

-성공의 70년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도 이승만 초대 대통령 평가 등 현대사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윤 원장: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당시의 국제정세를 보면 1948년은 이미 동서 냉전 시기였다. 당시 소련의 움직임을 보면 남북 분단은 불가피했다고 봐야 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분단시킨 장본인인 양 여기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전 대통령이 국제 환경 흐름을 제대로 읽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문 교수:이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는 있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분단을 초래한 최대 원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당시 상황에서는 최선이었다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다. 건국에 대해서는 분명한 국민적 합의를 지니고 있다. 상하이(上海) 임시정부가 있었다. 중국을 비롯해 국제사회가 당시 인정한 임시정부였다. 1948년이 대한민국이 주권국가로서 공표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상하이 임정의 전통을 부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남북관계는 정권교체에 따라 냉온탕을 오갔다. 김대중, 노무현정부의 남북정상회담 성과물인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이 계승되지 않은 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문 교수:윤 원장이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웃음)

윤 원장:승계된 점도 있다. (웃음) 10·4 선언은 합의된 내용 가운데 현실성이 없는 것도 많았다. 무조건 다 이행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대통령 선거 몇 달 앞두고 남북정상이 합의를 하면 다음 정부가 전부 다 이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정부 나름의 성격이 있고 시대의 요구가 있으므로 어느 정도의 변화나 조정은 필연적이다. 박근혜정부는 기본적으로 그간의 합의를 인정하고 있다. 박근혜정부의 대북 구상인 한반도신뢰프로세스 자체가 그렇다. 지금까지 남북한이 합의한 것을 잘 지키자는 것이고, 신뢰를 쌓아 남북관계를 풀어나가자는 정신이다.

문 교수:10·4선언만 놓고 봐도 노태우정부 때부터 각 부처가 갖고 있는 사업을 모아서 만든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10·4 정상선언 후속 조치로서 남북총리가 45개 합의사항 만들면서 구체적인 사업결정 여부는 사안별로 추후 협의해 나가자는 합의를 했다. 어려운 것은 뒤로 미루고 쉬운 것부터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정부도, 이명박정부도 지속성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남북 문제 만큼은 정치 쟁점화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인도적 지원, 인프라 개발, 그리고 민족 동질성 회복 3가지를 핵심으로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구상은 사실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다. 박 대통령이 드레스덴 구상을 밝힐 때 “6·15와 10·4선언의 연속선상에서 이런 제안을 한다”는 대목이 들어갔다면 북한이 제도통일 또는 흡수통일 운운하지 않았을 것이다.

윤 원장:진보·보수의 대북정책이 마치 크게 다른 것처럼 비치지만 사실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을 예로 들면 그 원형은 노태우정부 때 만든 포용정책이다.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북한보다 경제력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랐을 때였음에도 흡수통일 정책이 아닌 포용정책을 표방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명박·박근혜정부에 이르기까지 북한을 흡수하겠다는 정책을 쓴 적이 없다. 북한 붕괴 가능성이 거론된 김영삼정부 시절에도 북한 붕괴 시나리오를 갖고 정책을 편 게 아니었다.

문 교수:동의하지 않는다. 예를 하나 들겠다. 과거 국가정보원에 대북 막후접촉을 담당하는 대북전략국이 있었는데 이명박정부 들어 와 폐지됐다. 대북침투와해 공작과 대공수사 기능만 강화됐다. 대한민국 헌법 자체가 평화통일을 지향하므로 북한을 압살하고 흡수하는 통일을 얘기를 할 수 없는 구조다. 그런데도 북한 붕괴론에 기초한 흡수통일론이 당시에 대세를 이뤘다.

윤 원장:이명박정부 시절 여러 번 정상회담을 시도하고 대북협상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만간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질 것 같다고 말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천안함 폭침 사건이 터졌고,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논의했는데 뒤통수를 맞았다. (북한이) 대화와 도발을 오가며 롤러코스터를 타는 상황이었다. 결국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김정은(국방위 제1위원장)으로의 후계 구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남북 관계를 북한이 정치적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윤덕민 원장(왼쪽)·문정인 교수

-박근혜정부는 원칙 자체를 중요시하는 지도력이다 보니 대북관계에서도 원칙에만 얽매여 있다는 지적도 있다.



윤 원장:여러 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국민 대다수는 남북관계가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과거처럼 우리가 불필요할 정도로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하는 것보다는 정상적 관계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적 바람이 있다고 본다.

문 교수:박근혜정부는 우리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나가지 않겠다는 것과 북한과의 협의는 공식 채널을 통해서만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런 것은 절차의 문제라고 본다. 대통령의 원칙은 국익 우선의 원칙이어야 한다. 윤 원장 같은 분이 대통령께 당국 간 공식 회담을 하되 비공식적으로 당국자 간 막후 접촉이나 물밑 접촉을 통해 사전에 조율하는 방안을 건의드렸으면 한다.

윤 원장: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을 계기로 젊은 층 가운데 북한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아진 것 같다. 이 문제를 매듭지으려면 북측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큰 틀에서 (천안함 폭침에 따른) 5·24 대북제재조치를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으나 장기적 관점에서 남북관계의 질적 발전을 생각한다면 5·24 조치는 문제의 원인이 된 점을 어느 정도 매듭을 지어야 더 탄탄한 남북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문 교수: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일단 천안함 건은 북한이 인정을 안 할 것이다. 따라서 북의 사과와 재발 방지를 전제 조건으로 한 남북관계 개선은 다분히 비현실적이다. 역지사지 입장에서 봐야 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결말이 날 것 같지 않다. 중국 얘기를 해보자. 지난 70년을 미국과 함께했다면 앞으로 70년은 중국과 같이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윤 원장: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가장 강력한 패권국가인 미국과의 동맹을 통해 운신의 공간을 만들고, 지역 내 안정과 균형을 만들어냄으로써 성공의 환경을 조성했다고 본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지역 내 균형이 깨질 때마다 대한민국은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의 부상은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으나 엄청난 도전이다. 두 개의 태양 아래 살 수 없으니 중국을 택해야 한다는 분도 있으나 과거 중화질서에 편입해 조공(朝貢)을 바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는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은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강력한 한 축이자 안전판으로 삼으면서 중국과도 전략적 협력 관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중층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면 된다. 중국이 너무 커져서 우리가 (미국과의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때가 올지, 안 올지 모르겠지만 내 생애에는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문 교수: 우리에게 가장 바람직한 관계 설정은 경제는 중국과, 안보는 미국과 손잡는 양면전략이다. 문제는 미·중 두 나라가 우리에게 자꾸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3년 12월 미국 조 바이든 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을 접견한 자리에서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하는 것은 좋은 베팅이 아니다”고 말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도 한국 방문 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을 권유했다. 윤 원장도 말했듯이 북한이라는 위협이 존재하는 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동맹이 갖는 함정이 있다. 동맹은 늘 공동의 위협과 공동의 적을 가정한다. 단기적으로는 한·미동맹에 의지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동맹처럼 편 가르기가 아닌 역내 국가가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일 관계로 넘어가 보자.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은 다 하는 것 같은데 묘수가 없다.

윤 원장: 일본의 젊은 세대가 성장하면 한·일 간에 감정으로 얽힌 역사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는데 오히려 (식민지 시절 가해와 피해의) 경험이 없는 세대들이 인구의 주류를 형성하는데도 해가 가면 갈수록 한·일관계가 악화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이 과거사 정립 문제이다. 얼마 전 폴란드를 다녀왔는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폴란드 사제단이 오히려 독일에 대해 폴란드를 용서해달라는 식으로 접근을 했다고 한다. 독일이 자각하고 손을 내미는 계기가 됐다. 독일 대통령이 무릎 꿇고 사죄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의는 과거의 불의를 기억하는 것보다 과거를 용서하는 데 있다”고 했다. 한·일 관계를 언급한 말은 아니었으나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말이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정부의 역사적 퇴행은 문제지만 우리가 일본을 용서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극우 보수와 일반인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 일본인이 일본 내 극우 정치인의 선동에 말려들지 않고 젊은 일본인들이 올바른 역사를 알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문 교수: 피해자의 용서와 가해자의 사과는 상호 작용을 해야 하는데 일본 정치를 움직이는 지도자들이 역사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문제다. 그런 상황에서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지역 내 중요한 협력 파트너다. 앞으로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시대다. 그들이 갈등을 해도, 협력을 해도, 한·일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일은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역사적 집단기억은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경험한) 세대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전수가 된다. 일본 국민 대다수는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일 양국에서 극우·민족주의적 시각을 가진 세력을 사회적으로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인식이라면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와 못 만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윤 원장: 그런 만남이 필요하지만 아베 정부의 퇴행적 역사 인식이 한·일 관계의 기초를 흔들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일본 정부가 진정성을 보여줘야 하고 그 시금석이랄 수 있는 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고 본다. 다른 문제와 달리 위안부 문제는 시간의 문제이다. 할머니들 연세가 모두 90세에 가까워 화해할 수 있는 시기가 몇 년 남지 않았다. 이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놓아야한다. 그 이후에는 아무리 화해하고 싶어도 화해할 수가 없게 된다. 위안부 문제를 잘 풀어나가는 것이 향후 새로운 한·일 관계를 형성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문 교수: 독도문제도 단순한 영토 문제가 아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한다고 독도가 일본 땅이 되는 게 아니다.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인정하고, 위안부 문제도 강제성이 없었다거나 (피해자가) 몇 명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해서 국제사회의 공분을 살게 아니라 아베 총리가 과감하게 진심으로 사과하면, 보상 문제는 기술적 문제이니 협의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정상회담 할 수 있다. 일본이 과거사 청산 문제를 정확히만 해결한다면 주변 국가가 일본의 정상 국가화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아베 총리의 대승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미래 비전을 얘기해보자. 우리 사회는 이념과 계층, 지역, 세대 갈등에 속박된 상태로 전진을 못하고 있다. 어떻게 갈등을 해소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나.

문 교수: 분단 상황이 지속하는 한 통일의 꿈을 실현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우리 정부가 합의에 의한 평화통일 원칙을 보다 분명히 해서 북한이 흡수통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통일준비위원회에서 준비 중인 통일헌장에 어떤 형태, 어떤 방식의 통일인지를 분명히 해둬야 한다. 박 대통령은 남남갈등을 극복하고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통일, 북한과 더불어 함께 준비하는 통일,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는 통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제 이를 실천해 나가면 된다.

윤 원장: 영화 ‘국제시장’을 보니 우리가 참 어려운 시기를 잘 견디고 열심히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 시절에는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있었다. ‘88만원 세대’로 일컬어지는 요즘 젊은 세대는 스타벅스에서 비싼 커피를 사 마시고 비싼 스마트폰을 쓰고 통신요금을 내면서도 저축은 못한다. 젊은 맞벌이 부부도 저축하는 대신 그 돈으로 비싼 취미 활동을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삶을 즐기며 사는 쪽을 선호하는 것 같다. 과거에는 금리가 괜찮아서 저축하면 집도 사고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보니 희망이 없다고 보는 것 같다.

한국만 보면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눈을 세계로 돌리면 중국과 인도 등에서 구매력을 갖춘 중산층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은퇴를 앞둔 베이비붐 세대가 퇴장하면 대한민국은 심각한 노동인력 부족 상태가 될 것이다. 하루빨리 정년을 연장하고 경험 있는 인력의 재활용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통일이 또 하나의 새로운 기회일 수 있다는 점도 적극 알려야 한다. 우리 인구의 90% 이상은 분단 이후 태어났다. 앞으로 20∼30년만 지나면 분단을 기억하는 사람도 더는 없다는 얘기다. 앞으로의 70년은 통일을 새로운 기회로 여는 희망의 시대로 만들어야 한다.

문 교수: 세계화 시대에 맞물려서 저출산 고령화니 양극화니 여러 문제점이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 담론이 부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중국과 인도도 얼마든지 진출이 가능하다. 통일이 되면 남북한 통합 인구가 약 1억명 수준으로 커지고 출산율도 증가할 수 있다.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야 한다. 지도자의 비전 제시와 사회적 담론 형성이 그래서 중요하다.

윤 원장: 전쟁까지 겪은 최빈국이 지금 이렇게까지 성장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기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모욕적인 말도 들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민주화를 이뤄내는 저력을 보였다. 자부심을 갖고 젊은 세대가 새로운 희망을 가져야 한다.

문 교수: 중동·아프리카·남미 지역의 경우 독립을 이루고 성장하면서 종파·인종 간 갈등을 겪었지만 우리는 종교갈등과 인종갈등이 없는 유일한 나라다. 상당히 동질성이 강한 사회이므로 좋은 지도자가 나와 희망의 메시지를 준다면 얼마든지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다. 지난 70년이 성공의 역사였듯이 앞으로의 70년도 성공할 수 있다. 

정리=김민서 기자, 사진=허정호 기자

■ 문정인 교수는…

●1951년 제주도 제주 출생 ●미국 메릴랜드대 정치학 박사 ●1차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대통령 자문 동북아시대위원장(장관급)·제2차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장(현)·대통령직속 통일준비위원(현)

■ 윤덕민 원장은…


●1959년 서울 출생 ●일본 게이오대 법학박사 ●남북 고위급 회담 특별 자문위원·외교안보연구원 교수·대통령 외교안보자문위원·국립외교원(옛 외교안보연구원) 안보통일연구부장 ●국립외교원장(현)


 

 



 

엘 캐피턴(El Capitan).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며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거대한 바위산입니다.

 미국 조지타운대 방문 연구원 시절인 2005년 여름, 요세미티를 찾았을 때 정말 큰 바위산이라는 느낌을 받았을 뿐인데, 세계 최대의 화강암 바위라고 합니다. 전 세계 암벽등반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란 사실도 뒤늦게 알게됐습니다. 2015년 1월14일(현지시간) 미국의 암벽 등반가 토미 콜드웰과 케빈 조거슨이 세계 최초로 엘 캐피턴의 '새벽 直壁(Dawn Wall)'을 맨손으로 오르는데 성공했다는 기사를 접하면서,제가 요세미티를 찾은 날에도 저 암벽에 사람들이 매달려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벽 직벽을 맨손으로 올라가고 있는 토미 콜드웰과 케빈 조거슨.     AP=연합뉴스

 

세계일보 유태영 기자가 외신을 참고해서 쓴 기사에 따르면 해발 2300m인 엘 캐피턴은 독특한 모양의 직벽으로 전 세계 등반가들의 도전 대상이었고 그 중에서도 '새벽 직벽'은 그동안 아무도 맨손 등반에 성공하지 못해 엘 캐피턴의 난공불락 루트로 불렸다는군요. 사고로 왼손 검지를 잃은 콜드웰이 이 루트를 맨손으로 정복했다고 해서 지구촌은 감탄의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조거슨은 무려 18일이 소요된 등반 도중 손가락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상처가 아물 때까지 이틀 간 쉬었다가 다시 기어올라 끝내 정상을 밟고야 말았답니다.

 조거슨은 "우리가 느리지만 확신을 갖고 이 일을 해낸 것 처럼 모두가 언젠가는 각자의 '새벽 직벽'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미국 사람들은 참 똑같은 말도 멋있게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정치인도 그렇고, 일반인도 그렇고. 어려서부터 말하기 훈련을 해와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우리 보다 인생을 대하는 자세가 좀 더 진지해서 그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좀 더 주체적이고, 좀 더 사려깊고, 좀 더 희생적이고...솔직히 우리 사회에는 대통령부터 '부자되시라'고 외치고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무슨 신주단지처럼 여기고,다른 삶의 조건들은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는데(그렇다고 제가 경제적 조건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무슨 문제든 '정도의 문제'입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는 품격있는 삶은 고사하고 격조있는 말도 여간해선 듣기힘들지 않을까, 뭐 그런 객소리를 해봅니다.  

 여튼 을미년 새해를 맞은 세계인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겨주는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잠시 나의 '새벽 직벽'은 뭘까, 라는 상념에 젖어들기도 했습니다.

요세미티 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걸어서 들어서면 엘 캐피턴을 지나자마자 멀리서 폭포가 보입니다. 걸어가면 갈수록 그 폭포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와서 끝내는 폭포 물방울이 내 몸에 튀길 정도가 됩니다. 바로 요세미티 폭포입니다. 이 폭포는 북한의 대포동미사일처럼 3단인데 위부터 아래로 Upper Fall, Lower Fall, Cascade Fall로 부릅니다. 총 길이가 739m로 미국에서는 가장 높고, 세계적으로도 다섯번째로 높은 폭포라는군요. 

 

 

 

 

 

 

 

 

 

 

 

 

 

 

아래는 요세미티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Glacier point'에 서서 오른 쪽으로 Nevada Fall과 Vernal Fall을 바라본 정경입니다. 예전에는 이 곳까지 말을 타고 다녔지만 지금은 자동차로 글레이셔 포이트 턱밑까지 편하게 올라올 수 있습니다.

 

 

 

셔틀버스는 다니지 않고 겨울철엔 도로가 폐쇄되기 때문에 시점과 이동 수단을 면밀히 고려해서 오셔야 합니다. Nevada, Vernal Fall은 빙하가 녹으면서 생긴 것이라는군요. 안내판을 보면 빙하가 아래 쪽으로 흘러내리면서 그 때 무른 지반은 빙하에 패여서 쓸려내려가고 단단한 부분만 남았는데 그 강도의 차이로 협곡도 생기고 폭포도 생겼다는 설명이 죽 적혀있습니다. 그런 거 몰라도 확 트인 전망을 즐기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Glacier point에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요세미티 달력 사진에 나오는 바위가 우뚝 서 있습니다. 'Half Dome'이라는 명칭 그대로 돔을 절반으로 잘라놓은 모습입니다. 이 곳 역시 암벽 등반자들의 성지 같은 곳입니다. 

 

 

 

아까 봤던 폭포들과 Half Dome이 보이게 카메라 앵글을 잡으면 아래와 같은 예술 작품이 찍혀나옵니다. 저는 사진 문외한이지만 대충 눌러도 이런 멋진 장면이 포착됩니다.

 

 

 

 



 

내려오는 길에 '이제 언제 이 곳에 다시 오랴'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뒤돌아서 눈에 넣은 Half Dome. 

 

 

 

 

 

 

 

 

物我一體

 


저를 넣어서 찍어봤는데 아무래도 저 같은 인간 따위는 없애버리고 자연의 모습만 담은 사진이 훨씬 자연()스럽군요.;; 

 

 

 

 

아래는 미 요세미티 엘캐피탄 자유등반 성공 소식을 다룬 조선일보 2015년 1월24일자 기사입니다.

오직 손과 발, 육체의 힘으로 '불가능의 벽'을 타고 오르다

지난 1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거벽(big wall) '엘캐피탄(El Capitan)'에 전 세계 시선이 쏠렸다. 꼭대기에 오른 두 산사나이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서로 부둥켜안았다. 등반가 토미 콜드웰(37)과 케빈 조르게슨(31)이 19일간의 사투(死鬪) 끝에 지구 상에서 가장 어려운 루트로 꼽히는 높이 914m의 '여명의 벽(돈월·Dawn Wall)'을 거쳐 앨캐피탄 정상에 오른 순간이었다.

외신들은 찬사를 쏟아냈다. 뉴욕타임스는 "불가능을 좇다, 그리고 정상에 서다"라고 했고, 내셔널지오그래픽은 "(그들이) 역사를 만들었다"고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두 사람을 향해 "당신들은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줬다"고 했다.

엘캐피탄은 요세미티 계곡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다. 최고 높이는 1000여m로 단일 암벽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북한산 인수봉 암벽이 150m라는 걸 생각하면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엘캐피탄은 꼭대기 높이가 해발 2307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에베레스트(8848m)의 4분의 1을 간신히 넘는 정도다. 두 등반가가 땅에 내려오는 데도 2~3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AP통신은 "두 사람은 많은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돈월 루트를 자유등반으로 오른 첫 번째 사람이 됐다"고 평가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른 것도 아니고, 그것도 19일에 걸쳐 정상을 밟은 것인데 세계는 왜 이들의 등반에 열광하는 것일까.

절벽이 하늘에 매달렸다. 이 절벽을 오르던 사람도 덩달아 그 아래 매달렸다. 암벽이 그곳에 있는 한 인간의 도전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진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그야말로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타고 오르는 한 등반가의 모습이다.
절벽이 하늘에 매달렸다. 이 절벽을 오르던 사람도 덩달아 그 아래 매달렸다. 암벽이 그곳에 있는 한 인간의 도전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진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그야말로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타고 오르는 한 등반가의 모습이다. / 코르비스 토픽 이미지
자유등반… 오직 손과 발로 등정

자유등반은 장비를 이용하지 않고 자신의 신체 능력으로 등반하는 것이다. 손끝 힘만으로 몸을 끌어올릴 정도의 탁월한 신체적 능력과 수백m 공중에 매달려서도 추락에 대한 공포를 이기고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정도로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정신적·육체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행위인 것이다. 콜드웰은 한 인터뷰에서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손끝이 상하고 피가 난 상황에 대해 "손끝에 피부가 얼마나 남았는지가 이번 등반의 성패를 좌우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엘캐피탄은 1958년 미국의 저명한 암벽등반가 워렌 하딩이 처음 올랐다. 하딩은 사람의 코처럼 생겼다고 해서 '노즈(The Nose)'라고 불리는 루트를 개척해 47일 만에 엘캐피탄 꼭대기에 섰다. 이후 많은 사람이 다양한 루트를 개발하면서 이 거벽에 올랐다. 뉴욕타임스는 "현재 엘캐피탄 정상에 오르는 루트는 100여 개에 달한다"고 했다. 1970년 돈월 루트를 개척한 것도 하딩이다. 하지만 그의 등반 방식은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알피니스트닷컴에 따르면 하딩은 당시 27일에 걸쳐 등정하면서 암벽에 328개의 구멍을 냈다. 그 구멍에 볼트 등을 박아넣은 뒤 로프를 연결해 등반에 이용했다. 자연을 훼손하는 '인공등반' 방식이었다.

이번에 콜드웰과 조르게슨이 격찬을 받은 것은 하딩이 인공등반으로 올랐던 그 루트를 45년 만에 오로지 손과 발만 사용하는 '자유등반'으로 등정했기 때문이다. 자유등반도 암벽에 오를 때는 바위틈 등에 안전장비를 설치하고 몸에 로프를 연결한다. 하지만 이는 추락을 대비하는 것으로, 등반할 때는 장비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는다.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은 "암벽등반은 장비의 도움을 받느냐 안 받느냐에 따라 인공등반과 자유등반으로 나뉜다"면서 "장비 도움을 받아야 오를 수 있었던 곳을 순전히 인간 육체의 힘으로만 등정한다는 것은 가장 극적이고 위대한 휴먼 드라마"라고 했다.

암벽 자유등반 바람은 1970년대 말부터 불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오영훈 월간산 편집위원은 "가볍고 친환경적인 등산 장비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자연을 훼손하지 말고 등반하자는 '깨끗한 등반(클린 클라이밍)'이 붐을 일으켰고, 이어 인간 힘만으로 오르자는 자유등반이 큰 흐름을 형성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인공 장비를 이용해서라도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중요했지만 점점 '자연 보존과 인간의 힘만으로'라는 가치가 부각된 것이다.

엘캐피탄의 경우 1979년 첫 자유등반이 이뤄졌고, 주요 루트 중에서는 '살라테월'이 1988년, 가장 유명한 '노즈' 루트는 1993년 자유등반에 길을 터줬다. 알피니스트닷컴은 "앨캐피탄 주요 루트 중 자유등반이 이뤄진 곳은 이번 돈월을 포함해 모두 14개가 됐다"고 밝혔다.

지난 14일 토미 콜드웰(오른쪽)과 동료 케빈 조르게슨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거벽 ‘엘캐피탄’에서 지구 상에서 가장 어려운 자유등반 루트로 알려진 ‘여명의 벽’을 통해 정상에 오르고 있다. 두 사람은 인공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손과 발로만 등정을 하는 ‘자유등반’으로 이 암벽의 꼭대기에 섰다.
지난 14일 토미 콜드웰(오른쪽)과 동료 케빈 조르게슨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거벽 ‘엘캐피탄’에서 지구 상에서 가장 어려운 자유등반 루트로 알려진 ‘여명의 벽’을 통해 정상에 오르고 있다. 두 사람은 인공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손과 발로만 등정을 하는 ‘자유등반’으로 이 암벽의 꼭대기에 섰다. / AP 뉴시스
손가락 한 마디로 턱걸이… "그들은 거미다"

'난도(難度) 등급 5.14d.'

콜드웰 등의 등반이 전 세계 등반가들을 감탄하게 한 건 무엇보다 이 등반의 '난도'였다. 이용대 교장은 "그 사람들이 오른 암벽의 난도가 5.14d라는 걸 알고 정말 깜짝 놀랐다. 그들은 거의 거미 수준"이라고 했다. 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 소속 최석문씨는 "지금까지 엘캐피탄 등정 주요 루트 중에서 가장 높았던 난도는 5.14a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5.14d라는 난도는 이번에 처음 들었다"고 했다.

도대체 난도가 5.14d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 등반 난이도를 매기는 체계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영국과 독일에서 만들어졌다. 이후 전 세계에 10여개 이상의 난이도 등급 체계가 등장했다. 미국에선 자유등반 난이도 등급을 매길 때 '요세미티 소수점 체계'라는 걸 사용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 체계는 1~5급까지 난이도 등급을 매기는데, 1~4급까지는 일반인도 무리 없이 오를 수 있는 수준이고 5급은 본격적인 암벽등반이 시작되는 영역이다.

전문가들은 "5.14 난도를 이겨내려면 손가락 끝으로 절벽을 오를 정도가 돼야 한다"고 했다. 손정준 '손정준스포츠클라이밍연구소' 소장은 "난도 5.12는 열 손가락의 두 마디를 이용해 턱걸이 10개를 하는 수준이고, 5.13는 열 손가락의 한 마디로 턱걸이를 하는 수준이며, 5.14는 한 손가락으로 그것도 딱 한 마디만 걸어서 턱걸이를 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이런 능력이 필요한 것은 실제 등반 도중 손톱 정도의 작은 돌기를 한 손으로 잡고 올라야 하는 때가 반드시 생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각 난이도 등급은 다시 a·b·c·d 4등급으로 세분화되는데 d로 갈수록 난도가 더 높다.

현재 지구 상에 존재하는 가장 어려운 난도는 5.15b이다. 한 전문가는 "이 난도는 땅에서 20~30m 정도의 낮은 암벽에 매겨졌을 뿐 높은 산에서 진행되는 자유등반 영역에선 존재하지 않는다"며 "자유등반 세계에선 5.14d가 최고의 난도인 셈"이라고 했다.

국내 암벽 중에선 난도가 5.14 이상은 없다. 전북 고창에 있는 선운산 투구바위가 난도 5.14a 정도지만 이 바위는 15m에 불과해 자유등반에 포함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대표적인 암벽 중 설악산 적벽은 정상으로 가는 3개 루트 중 가장 난도가 높은 것이 5.13c 정도이고, 높이가 200m인 울산바위도 난도는 5.12c 정도이다. 손 소장은 "이렇게 난도가 낮은데도 울산바위와 적벽을 오른 사람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그는 2000년 태국에서 국내 등반가로서는 처음으로 5.14b의 암벽 등반을 경험했다. 그는 "그 등반을 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아직 다음 난도인 5.14c 등반엔 성공한 적이 없다. 그만큼 난도를 높이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보통 난이도 등급은 그 암벽 등반을 끝난 사람이 매긴다. 직접 암벽에 오르지 않고는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여명의 벽 등반의 경우도 콜드웰이 "전체 30구간 중에서 난도가 5.13 구간이 12개, 5.14 구간이 6개였다. 특히 난도 5.14d 구간도 두 곳이나 있었다"고 밝히면서 난도가 밝혀진 것이다. 한 등반 전문가는 "어려운 루트라고 해도 5.14 난도를 가진 구간은 한 개 정도가 대부분인데 여명의 벽은 그 어렵다는 구간이 여러 개나 된다는 게 정말 대단한 것"이라며 "앞으로 이곳을 다시 오르는 사람이 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토미 콜드웰이 몇 년 전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엘캐피탄’ 암벽에서 등반을 하는 모습.
토미 콜드웰이 몇 년 전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엘캐피탄’ 암벽에서 등반을 하는 모습. / 레베카 콜드웰 블로그
불가능이라던 영역을 향한 도전

히말라야 산맥같이 만년설이 덮인 고산을 오르는 것과 달리 암벽등반은 단순히 높이를 추구하지 않는다. 인간의 육체적 능력을 시험하는 다양한 한계에 도전한다. 스포츠클라이밍처럼 지상에서 수십m 정도 이내에서 이뤄지기도 하지만 자유등반이라고 할 땐 보통 높이 수백m 암벽에서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등정이 여러 날 걸릴 땐 도중에 식사도 하고 공중 텐트 같은 걸 걸어놓고 잠도 잔다. 커피나 가볍게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럴 땐 단단한 고정물에 공중 텐트 등을 걸어놓아야 한다. 대소변도 공중에서 해결해야 한다.

전문 등반가들은 "자유등반이 어려운 것은 허공에 매달린 것 같은 원초적 두려움과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손정준 소장은 "땅 부근에서 5.14급의 고난도 등반을 탁월하게 했던 사람도 막상 100~200m 이상 높은 곳에 가서는 난도가 5.12 정도인데도 발을 내딛지 못한다"며 "추락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고 추락 방지 장비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져야만 자유등반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자유등반이 진보할 수 있었던 데는 과학기술의 발전도 큰 역할을 했다. 가볍고 바위틈에 쉽게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장비들이 개발되면서 등반가들이 갖고 올라가야 할 장비 무게가 크게 줄었고, 신체의 특정 부위를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장비도 등장했다.

자유등반을 100m 달리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달리기 선수가 0.01초를 단축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하듯 자유등반가는 인간의 한계라고 여겨졌던 영역에 끊임없이 도전장을 내밀기 때문이다. 이용대 교장은 "산이 있고, 암벽이 있는 한 그곳을 자신의 힘만으로 오르겠다는 인간의 도전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1910년 일제의 조선 병탄과 1945년 일제로부터의 광복,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은 나라의 명운을 가른 분기점이었다. 올해는 광복 70돌이다. 사람의 일생으로 보면 고희(古稀)다. 지난 70년은 식민의 족쇄를 끊어내고 부강한 나라를 이루기 위해 질주해온 분투(奮鬪)의 역사였다. 온 국민의 피와 땀으로 대한민국은 세계 굴지의 중견국 반열에 올랐다. 올해는 분단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내부의 힘을 결집해 통일국가를 이루고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할 사명이 7000만 한민족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광복·분단 70년을 맞이해야 하는가. 하영선(68)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은 본지와의 신년 대담에서 “부강국가 건설이라는 지난 70년의 목표를 대체할 새로운 표준을 세워야 한다”면서 “새로운 표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도 그룹, 새로운 리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통일과 선진국 도약을 이뤄야 할 우리에게 광복·분단 70년의 의미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1870년대 중반 이전까지 우리는 중국 중심의 질서 속에서 동방예의지국을 꿈꾸며 살아왔다. 그러다 1870년대 들어 소위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지만 일본에 강점당해 독자적인 근대화 과정이 중단됐다. 지난 70년은 광복 이후 근대국가 건설, 부강국가 건설을 위해 숨가쁘게 달려온 기간이었다. 이제 부강국가 건설이라는 19세기 중반의 표준이 바뀌고 있다. 정치권을 비롯해 우리 모두가 지난 70년을 성찰하고 새로운 70년의 비전을 세우는 2015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광복 70돌의 시점에서 새롭게 설정해야 할 표준은 무엇인가.



“21세기 환경에서 부국강병은 통일과 선진국 도약을 위한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부강국가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나는 ‘복합(複合) 국가’를 제창하고 싶다. 경제, 군사 중심으로 뛰어온 지난 세월은 한계에 이르렀다. 경제, 군사만이 아니라 문화, 생태환경을 횡적으로 엮는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문화국가, 환경국가가 되지 않고는 더 이상 21세기의 선도국가가 될 수 없다. 지식력(力)의 기반 위에 문화·환경력이 더해지고 그 위에 경제·군사력, 통치력이 차곡차곡 쌓인 다보탑을 상상해보라. 이런 새로운 표준을 누가 먼저 세우느냐에 따라 향후 70년, 140년 이후의 고지에서 동아시아의 지형도가 새롭게 그려질 것이다. 새로운 표준을 세울 수 있는 새로운 지도 그룹이 필요하고 이를 선도할 수 있는 리더가 절실하다.”



―세계일보가 신년을 맞아 각계 전문가 100명을 상대로 광복 이후 70년간 한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국내외 인물 세 사람을 주관식으로 물었다.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이 박정희, 김대중, 이승만 전 대통령 순이었다.



“해방이라는 공간이 주어졌을 때 우리에게는 부강국가 건설이란 절체절명의 과제가 주어졌다. 그때 우리가 사회주의 계획경제 모델을 선택했다면 70년 후 어디에 서 있었을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선택은 옳았던 것이다. 박정희라는 지도자는 일정한 부작용이 있더라도 일단은 산업화로 가야겠다는 확고한 목표를 갖고 나라를 이끌었다. 두 사람은 모두 독재와 권위주의라는 결함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으로 남북 교류협력은 확대됐지만 남북관계의 본질적 변화라는 측면에서는 낙관한 측면이 있다. 우리가 되돌아본 70년은 서구의 400∼500년을 압축적으로 살아온 기간이다. 비교사적으로 보면 이 정도 희생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했다는 점을 과소평가할 이유가 없다.”



―압축 성장의 부작용이 곳곳에서 분출되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보수와 진보, 좌우라는 표현은 더 이상 21세기 상황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한 세대 이전의 잣대들이다. 1980년대 진보의 가치로는 2010년대의 진보를 이야기할 수 없다. 보수나 진보 모두 국제관계나 남북관계가 변화하고 있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소위 지도자라는 인사들이 국민을 리드하기보다는 국민 뒤에서 발목을 잡고 있다. 시대의 조류를 따라잡는 새로운 안목의 지도자가 없는 탓에 정치가 3류로 전락했다. 새로운 안목을 갖춘 주도 세력이 한 번은 등장해야 대한민국의 국운이 융성할 수 있다.”


―새해에는 민족 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을 만나서라도 남북관계의 물꼬를 터야 하지 않나.



“역대 정부의 대북정책이 냉온탕을 반복하면서 지금은 남북정상회담으로도 해법을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활로는 공진(共進·co-evolution)의 길이다. 남북이 함께 진화하는 것이다. 소위 진보라는 입장에서는 북이 어떻든 그냥 한 번 해보자는 주장을 편다. 그렇지만 남북 공진의 원칙으로 변환하지 않으면 남북정상회담도 돌파구가 될 수 없다. 변환의 톱니바퀴는 북한이 먼저 돌려야 한다. ‘핵·경제 병진(竝進)’으로는 안 된다. 북한이 핵·경제 병진론을 고수하면 21세기 중반의 무대에서 북한이 설 수 있는 공간은 없다. 북한은 1970년 전후로 남한에 추월당한 뒤 사실상 한 세대를 허송세월한 것이나 다름없다. 두 세대 정도 그러면 대개 망한다. 북한은 중국이 78년부터 한 세대 동안 두자릿수의 성장을 기록했던 길로 나서야 한다. 북한이 ‘비핵(非核)·경제 병진’으로 움직일 조짐이 보이면 우리도 톱니바퀴를 빨리 돌려야 한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한반도는 통일된 민족국가 완성이란 무거운 숙제도 안고 있습니다.



“남북이 해방 국면에서 통일됐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사용하는 ‘재통일(reunification)’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21세기 통일은 ‘신통일(new unification)’이 되어야 한다. 근대 부강국가 시대에는 이탈리아나 독일의 경우처럼 내부 결합을 통한 독립으로서의 통일이 중요했다. 21세기엔 그런 차원의 통일만으로는 안 된다. 한반도를 넘어서 동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적 차원까지 아우르는 통일이 아니면 통일 한반도가 21세기의 주역이 되기 어렵다. 남북이 합쳐봐야 우리가 가진 힘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동아시아판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우리가 설 자리가 달라진다. 간신히 통일을 이뤘는데 동아시아, 세계 차원에서 접목되지 않은 통일이라면 통일의 시너지를 폭발시킬 수 없다.”



―중국의 부상으로 동북아에서는 미·중의 패권 경쟁이 가열되고 있다. 이런 국제 질서 속에서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통일 역량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외교 전략을 구사해야 하나.



“경제 부문에서 일본이 2010년 중국에 추월당했다. 2020년 상반기에는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다들 예상한다. 그런데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최근 “미국이 21세기에도 세계를 리드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 질문은 잘못됐다. 미국이 어떻게 리드할 것이냐고 물어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21세기의 힘은 ‘복합력’이다. 중국이 국내총생산(GDP)에서 미국을 따라잡았다고 해서 중국이 판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한국과 같은 미들파워 입장에서는 70년, 140년 앞을 내다보고 형세를 읽어야 한다. 섣부르게 ‘연미연중(聯美聯中)한다’는 식의 표현을 하면 안된다. ‘안보는 미국이고, 경제는 중국’이란 말도 10년 전에나 통했던 문법이다. 미·중이 갈등,협력,공생하는 영역을 예리하게 관찰해서 그에 적합한 대응 전략을 짜야 한다. 한·미·일의 전통적 연대는 중요하지만 냉전 시대처럼 중국을 배제하기보다는 중국을 끌고 갈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정리=김민서 기자, 사진=남정탁 기자

2006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의 아제르바이잔 방문에 동행했을 당시 수도인 바쿠에서 한국어가 유창한 현지 대학생들과 조우한 적이 있다. 바쿠 국립대 학생들이라고 소개한 이들은 대화 도중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배우면서 한국을 동경하게됐다”고 말해 기자를 감동시켰다. 문화교류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한 경험이었다. 바쿠 국립대에 개설된 한국어와 한국학 과목은 KF(Korea Foundation·한국국제교류재단)가 파견한 한국 객원교수가 담당한다. KF는 한국어·한국학 진흥, 문화예술교류, 인적교류 및 지한파 육성 활동 등을 통해 정부의 외교활동을 지원하는 외교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한국의 친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유현석 KF 이사장을 지난 19일 서울시 중구 KF문화센터 집무실에서 만났다.


 

 


―국제교류재단 대신 ‘KF’로 부르는 게 더 기억하기 쉬운 것 같다. KFC(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에서 C만 빼면 되니….

“다른 데서도 그런 말을 들었다. 두 번 들었으니 바꿔야겠다. 국제교류재단은 지자체마다 다 있다. 비슷한 게 너무 많아 국민들이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잘 모른다. 외교부는 할 수 없는, 해외 싱크탱크 지원이랄지,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이런 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예산 배정에서 밀리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의 대외원조 활동도 한국의 국격(國格) 향상에 도움이 되지만 한국어를 포함해 문화적으로 한국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는 일도 중요하다. ”

―KF와 코이카 예산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

“우리가 500억원 정도이고 코이카가 6600억원 정도다. 코이카는 올해 600억원 늘었다.”

―코이카의 10분의 1 수준인데 국회나 정부가 KF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 같다.

“솔직히 국제사회에서 정치적으로는 KF가 중요하다. 원조는 수혜국 입장에서 별 느낌이 없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중남미 어느 나라는 중국이 쏟아붓는 원조에 비해 소액에 불과한 우리의 원조를 그다지 감사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KF의 초청 대상 인사들은 1주일만 한국에 머물다가면 모두 한국의 팬이 된다. 아프리카 초청 인사는 대부분 대통령급 인사다. 그러면 그 나라 주재 한국대사는 일하기가 아주 편해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코이카의 원조 활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국제사회 지도층, 오피니언 리더를 움직이는 KF의 활동도 중요하니깐 어느 정도는 (예산 배정 등에서)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올 예산안 편성 때 좀 더 배정해달라고 요청하지 그랬나.

“예산은 예산당국의 논리가 있다. 중요하다고 설명하면 지금 중요하지 않은 예산이 어디 있느냐고 한다. 대통령 관심 사업이라고 해도 똑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다행히 지금 국회 상임위에 한국학 지원(15억원), 지자체 국제교류 역량강화 사업 예산(7억원)이 올라가 있다. 그런데 살아돌아올 확률이 높지 않아 걱정이다. 그동안 한국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지역에서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신청이 쇄도하고 있다. 한국학 지원 예산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예산이다.”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인가.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 지역이다. 이들 지역에서 한국 드라마, 한국 가수가 인기를 끌고 ‘한류(韓流)’ 열풍이 불면서 한국어과, 한국어 강좌를 개설해달라는 신청이 들어오고 있는데 예산 문제로 10개가 들어오면 1개도 해주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그런 나라들의 대학에 한국어 강좌 하나 개설하는 데 비용은 얼마나 소요되나.

“강좌를 열려면 일단 교수가 있어야 하는데 가장 싸게 보내는 게 객원교수를 보내는 방식이다. 그러면 1년에 6만달러 정도 필요하다. 우리가 5, 6년 계약해서 그 교수의 인건비를 지원하면 해당 학교에서 종신직으로 고용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최근 우리와 관계가 악화된 일본에도 공을 들이고 있나.



“일본은 주로 민간 차원에서 고위 인사, 학생 초청해서 하는 문화교류다. 정무적인 부분은 조금 어렵다.”

―내년은 한·일 국교 수립 50주년이다. 경색 국면을 풀어내기 위한 민간 차원의 노력이 요구된다.

“양국 국민으로 한·일합창단을 만들어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제3국에서 공연하기로 일본국제교류기금과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한·일합창단 프로그램 관련해서 우리는 외교부 승인을 받았는데 일본국제교류기금은 아직 일본 외무성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다.”

―양국 국민이 화합의 노래를 부르겠다는데 일본 정부가 안 해줄 이유가 있나.

“그렇죠. 그런데 아직까지 오케이 안해서 (일본국제교류기금 측에) 승인 못 받으면 다른 일본 파트너를 찾겠다고 얘기했다. 실제 한·중·일 3국이 함께하는 민간교류 프로그램이 여러 개 있는데 일본이 소극적이다. 한·중·일 예술인 공연도 지난해 일본이 참가하지 않아서 한·중 두 나라만 했다. 3국 미술전에도 일본은 잘 안 온다.”

―중국 쪽 민간교류는 어떤가.

“중국과는 활발하다. 고위급 포럼도 있고 초청사업도 많다. 중국은 매우 적극적이다. 교류 프로그램을 만들기만 하면 참여하겠다고 한다. 돈 걱정도 하지 말라고 한다. 이 기회(한·일관계가 소원한 계기)에 우리를 끌어안으려는 중국의 외교 공세가 느껴진다.”

―KF 입장에서 좀 조심스럽겠다. 외교부에서 말리는 일은 없나.

“그렇지는 않다. 교류는 좋은 것이다. 외교부도 정치색 들어가는 교류는 경계하지만 중국에서 요구하는 것은 대부분 인적교류다. 중국 내 혐한(嫌韓)감정 등 양국 간에는 오해가 많다. 중국은 인적교류를 많이 하려고 한다. 중국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일본은 굉장히 조심한다.”

―이러다가 한·중관계가 한·일관계보다 더 좋아지는 상황이 올 수 있겠다.

“민간 차원의 인적교류가 늘어난다고 해서 정무적으로 바로 연결될 것 같지는 않다. 외교부도 그렇고 저희 사업 방향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한·일관계는 굉장히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움직인다. 우리도 일본과의 사업을 강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번에 한·중·일 차세대 포럼이 중단된 지 6년 만에 살아났다. 3국의 45세 이하 국회의원, 언론인, 기업인, 문화계 인사, 시민사회 인사 등이 참석 대상이다. 이들이 3박4일씩 세 나라에 머물면서 교류하는데 12일 정도 하루종일 붙어다니면서 찜질방에도 가고 술도 먹고 하면서 어울리다 보면 정말 친구가 된다.”

―KF가 차세대 리더들에게 공을 들이고 있는 것 같다.

“차세대들은 사고가 열려 있고 한국에 대한 인상이 기본적으로 좋다. 올드 제네레이션은 한국 하면 가난, 전쟁, 독재를 떠올린다. 차세대들에겐 이런 게 없다.각국 의회 보좌관, 국무성 초급 관리 등을 초청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최근 KF가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 이어 브루킹스연구소에도 ‘코리아 체어(한국석좌연구직)’를 개설했다.

“미국은 한국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나라다. 앞으로 우드로윌슨센터와 미국외교협회(CFR) 등에도 한국센터를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이런 걸 만들려면 처음에 기금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300만달러 정도가 필요하다. 한국 기업들의 적극적 참여가 필요하다. 미국 싱크탱크 지원 관련 예산은 연간 7억원으로 일본의 10분 1 수준이다. 차세대 전문가 그룹은 중장기적으로 미국의 대(對)한반도 정책 및 미국 내 한국 관련 여론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므로 미국 내 지한 네트워크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차세대 한국정책전문가를 육성하는 싱크탱크 사업 강화가 시급하다.”

―현재 준비 중인 사업은.

“국내에는 150만에 이르는 국내거주 외국인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의 노력 여부에 따라 한국에 우호적 또는 적대적이 될 수 있다. 이들 국내거주 외국인에 대한 체계적, 통합적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정리=김청중 기자, 사진=남정탁 기자

◆ 유현석 이사장은… ▲1963년생 ▲서울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미 노스웨스턴대 정치학 박사 ▲중앙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국무조정실 정책평가위원, 외교통상부 자체평가위원,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올해 노벨평화상을 받은 파키스탄 소녀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2012년 10월9일 통학 버스 안에서 총에 맞았다. 이슬람의 악성 변종인 탈레반은 여자가 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말랄라의 얼굴에 총을 쐈다. 한때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장악했던 탈레반은 이슬람 근본주의로 포장된 야만의 세력이다. 화석화된 이슬람 율법을 강요한 탈레반은 주민에게서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자유, 공부할 수 있는 자유, 토론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았다. 말랄라는 저서에서 기회만 있었다면 자신에게 총을 쏜 두 남자에게 “왜 우리 여자들을, 당신의 누이와 딸을 학교에 보내야만 하는지 설명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반은 열다섯 살 소녀의 자유를 향한 열망을 향해 총을 쏜 것이다.

 



자유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말랄라 뒤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말랄라는 “아들이 태어나면 축포를 쏘고 딸이 태어나면 커튼 뒤에 숨기는 나라, 그저 요리를 하고 아이를 낳는 일이 여자의 평생 역할인 나라”에서 태어났다.(‘나는 말랄라’·문학동네) 여성 천시는 그가 속한 파슈툰족의 문화였다. 하지만 말랄라의 아버지는 달랐다. 말랄라가 태어나자 남자들의 이름만 적힌 족보에 말랄라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남 보란 듯이 딸의 이름은 아프가니스탄의 위대한 여걸 이름인 말랄라이를 따서 지었다. 주변의 손가락질과 탈레반의 위협을 무릅쓰고 딸을 학교에 보냈다. 아버지는 항상 “말랄라는 새처럼 자유롭게 살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여행을 좋아했던 동독의 물리학자 앙겔라 메르켈은 60세가 되면 미국에 가겠다는 소망을 품고 살았다. 구동독 정권 시절엔 연금 수령 개시 연령인 60세가 돼야 서방국으로 여행을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어린 시절 영화와 책을 통해 미국을 접하며 미국에 대한 그리움을 키웠다고 한다. 메르켈이 꿈꾼 것은 자유의 정신이었을 것이다.

마치 ‘신의 한 수’가 작용한 듯이, 냉전의 얼음이 녹기 시작하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메르켈의 미국행 꿈은 24년이나 앞당겨 실현됐다. 독일이 통일을 이룬 뒤 메르켈은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최초의 동독 출신 총리가 됐다. 35년 동안 억압된 체제에서 살아온 메르켈에게 자유는 어떤 의미였을까. “자유는 내 평생 가장 행복한 경험이다. 자유만큼 나를 감탄시키고 격려하는 것은 아직 없다. 자유보다 더 강하게 나를 만족시키는 좋은 감정은 없다.” (‘위기의 시대 메르켈의 시대’·책담)
메르켈의 뒤에도 아버지가 있었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메르켈이 태어나자마자 동독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딸이 동독의 억압 체제 하에서 자유를 꿈꿀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는 언젠가 언론 인터뷰에서 “동독만으로도 이미 압박은 충분했다. 집에서만큼은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시대착오적인 3대 세습독재 체제와 이웃해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말랄라와 메르켈이 꿈꾼 자유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북한 내에도 수많은 메르켈과 말랄라가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며 살고 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수많은 탈북민들이 그 증인이다.

인간이 평생을 바쳐 완성해야 할 여러 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그 자신이라고 ‘자유론’의 저자인 존 스튜어드 밀은 역설했다. 자유가 없이는 개성의 완성이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지난 시절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했던 이유 중 하나도 그들이 우리의 자유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국회가 ‘북한 인권법’을 제정해 북한 내 인권 침해범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일본군 성노예(위안부) 강제동원 사실(史實)을 인정하고 피해 할머니들에게 사과해야 하는 이유도 매한가지다. ‘자유’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문명사회에 부여된 제1의 도덕적 책무이기 때문이다. 과거 군사독재정권까지도 ‘자유’의 기치를 내건 탓에 우리 사회에서 ‘자유’에 담긴 본래의 의미는 심하게 왜곡됐다. ‘자유’를 전면에 내세운 단체가 스스럼없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태를 보이는 곳이 자유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말랄라의 노벨상 수상이 자유의 가치와 한계를 성찰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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