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미국 의회의 정쟁 사례(오바마 케어)

 

2016년 대선후보 선출 경선에서 표출된 공화당의 난맥상은 길을 잃은 미국 보수주의의 현 주소를 보여준다.

‘아웃 사이더’ 도널드 트럼프는 공화당의 골칫거리가 된 지 오래다. 공화당 주류가 어쩔 수 없이 트럼프 대항마로 내세운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도 공화당을 구해낼 지도자감은 아니다. 공화당 동료 의원들이 그렇게 보고 있다. 크루즈는 버락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와 싸우면서 인지도를 키운 대표적 정치인이다. 우파 대중 운동인 티 파티 세력의 도움으로 상원의원이 됐고 공화당 보다는 티 파티를 대변하는 행보를 보였다. 국외자가 보기에도 트럼프나 크루즈 중 한 사람을 대선후보로 세워야 하는 공화당의 처지가 딱하다. 

트럼프를 띄운 힘은 국민을 신물나게 한 ‘워싱턴 정쟁’이었다. <1회 ‘샌더스·트럼프가 뜬 진짜 이유’ 참고> 그 정쟁의 한 복판에 버락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의 정책에 사사건건 반대해온 강경파 크루즈가 있었다. <8회 ‘공화당 주류와 크루즈의 오월동주(吳越同舟)’ 참고>

정쟁 없는 정치도, 타협 없는 정치도 무의미하다. 정치가 ‘가능성의 예술’로 불리는 이유다. 무슨 일이든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공화당 우파의 문제는 너무 지나치다는 점이다. 좋게 표현하면 소신에 투철한 정치라고 할 수 있지만 대개는 이런 부류가 의회를 싸움판으로 만든다. 미국 대선경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만큼 당분간 미 정치권에서 벌어졌던 정쟁 사례들을 하나씩 짚어본다. 

대표적 정쟁 사례가 2013년 미국 연방정부 폐쇄 사태를 초래한 공화당의 ‘오바마 케어’(오바마 정부가 추진한 의료보험개혁법안, 정식 명칭은 ‘환자 보호 및 적정 가격의 의료서비스를 위한 법령’) 반대 투쟁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최대 치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의료보험 개혁은 민주당 정부의 오랜 숙원이었다.

미국의 의료비는 가히 살인적인 수준이다. 맹장이라도 터지면 수 천 만원의 병원비를 각오해야 한다. 그래서 밥은 굶어도 보험은 들어야 하는데 보험료가 만만치 않다. 제대로 된 의료보험에 가입하려면 4인 가족 기준으로 최소 월 100만원은 부담해야 한다. 질병 이력이 있는 사람이 보험에 들려면 더 많은 보험료를 내야 한다. 그 것도 병력이 있으면 잘 받아주지도 않는다. 보통의 미국인들은 기업이 제공하는 의료보험에 가입해 있는데 직장에서 잘리면 의료보험도 사라진다. 의료보험 혜택을 제공하지 않는 영세 기업도 많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 국민 수 천 만명이 보험 없이 하루 하루 불안한 삶을 살아가야 했다. 가족 중 누군가 큰 병에 걸리면 파산하기 일쑤다. 전체 개인 파산의 대부분이 의료비 부담에 따른 파산이다. 특파원 시절 필자도 병원가기가 무서웠다. 임산부들이 출산을 한 뒤 하루 만에 퇴원했다는 말도 들었다. 하루 수 백만원에 이르는 입원비를 감당하기 힘들어서다. 오바마 정부가 의료보험 개혁을 추진하기 이전의 미국 현실이었다. 단언컨대 전국민 의료보험 제도가 완비된 한국은 적어도 의료보험에 관한 한, 미국 보다 선진국이다.

오바마 정부 이전에도 수많은 의료개혁 시도가 있었다. 1912년 진보당 대선후보로 나섰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전국민 의료보험 공약을 내건 이래 해리 트루먼이나 지미 카터 민주당 정부는 물론 공화당 정부인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대통령도 나름의 의료개혁을 추진했다. 그 만큼 미국의 의료 시스템 개혁은 역대 정부의 난제 중의 난제였다. 의료개혁에 있어서는 린든 존슨 민주당 정부의 ‘메디케어’(노인 의료보험제도)와 ‘메디케이드’(저소득층 의료보장제도)가 가장 획기적이다. 1964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후보를 크게 누르고 승리한 바로 그 존슨이다. 존슨 정부는 1964년 대선과 의회선거에서 압승한 동력을 바탕으로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개혁을 성사시켰다. 그 이후로는 오바마 케어 외에 그 어떤 의료개혁 법안도 의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1992년 대선에서 승리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취임 100일 안에 의료개혁안을 내놓겠다고 선언하고 야심차게 의료개혁을 추진했지만 결국 의회에서 발목이 잡혔다. 이 때 대통령 직속의 의료개혁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인사가 다름아닌 퍼스트레이디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올해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실시되는 힐러리 클린턴은 당시 의료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보수 진영의 공적(公敵)이 됐다.

오바마 이전의 의료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한 둘이 아니다. 전국민 의료보험이 도입되면 수익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보험 회사나 제약업체도 반대했고 이들의 로비를 받은 의원들도 비협조적이었다. 기존에 의료보험에 가입해있는 국민들도 전국민 의료보험을 선호하지 않았다. 여유 계층에서는 왜 내가 다른 사람의 의료보험 비용까지 부담해야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민주당 의원들도 이런 여론을 쉽게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개혁이 혁명 보다 어려운 법이다.

그걸 오바마 정부가 해냈다. 2010년 3월 미국 의회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공약한 지 100년만에 의료보험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2008년 대선과 의회 선거에서 민주당이 백악관과 상·하원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엄두도 못냈을 일이었다. 역사적인 법안이었다. 100년만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수많은 난관들을 뚫고,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이뤄낸 것이라서 그런 것이다. 당리당략의 차원에서 평가한다면 오바마 대통령과 민주당의 의료보험개혁은 자해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후 오바마 정부가 겪고 있는 정치적 어려움은 상당 부분 의료보험개혁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오바마는 ‘사회주의자’로 매도됐고 민주당 의원들은 2010년 중간선거에서 대거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공화당은 지금도 반대하고 있다. 크루즈가 그 선봉에 서 있다. 크루즈는 2013년 오바마 케어의 집행예산이 새해 예산안에 포함됐다는 이유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에 나서 연방정부 폐쇄 사태를 불렀다.

자유의 여신상이 미국 연방정부의 셧다운으로 인해 일시 폐쇄 되었음을 알리는 팻말.
EPA=연합. 자료사진
오바마 케어는 공화당 측이 위헌 소송을 제기하면서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가게 됐다. 연방대법원에서는 일반의 예상을 깨고 보수파인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오바마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는 바람에 5 대 4로 합헌 판결이 나온 사실은 모두가 알고있는 그대로다. 오바마 케어의 실효성을 놓고는 아직도 미국 사회에서 논란이 분분하다. 필자처럼 필요한 개혁이었다고 생각하는 국민도 있고,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는 사회주의적 조치라고 반대하는 국민도 있다. 공화당은 집권할 경우 오바마 케어부터 폐지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오바마 케어를 폐지하는 조치도 오바마 케어를 만들어내는 조치 못지 않은 반발에 직면할 것이다. 오바마 케어 반대를 통해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것과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고 오바마 케어 폐지를 추진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크루즈가 올 대선에서 대통령이 되면 오바마 케어 폐지 여부가 최대 쟁점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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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다.

2016년 미국 공화당의 대선후보 선출 경선이 딱 그렇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공화당 주류는 올 대선에서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을 밀어줘야하는 상황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크루즈는 지난 5일(현지시간) 위스콘신주 경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꺾고 천금같은 승리를 거두면서 그런 상황을 만들어냈다.


크루즈가 트럼프의 ‘매직 넘버’(공화당 대선 후보 지명을 확정짓는 대의원 수 1237명) 달성을 효과적으로 막아낸다면 전당대회 경선이 불가피해질 전망이다. 이른바 ‘중재 전당대회’다. 중재 전당대회가 열리면 트럼프와 크루즈, 존 케이식 오하이오 주지사가 표 대결을 할 가능성이 높다. <‘조남규의 미국정치 이야기(6) ‘반란군 트럼프의 운명은’ 참고>


공화당 주류는 지금 크루즈가 좋아서 밀고 있는 게 아니다. 원래 지지했던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와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이 ‘트럼프 광풍’에 밀려 추풍낙엽의 신세가 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크루즈를 선택한 것이다. 공화당 주류로서는 트럼프가 전당대회 전에 공화당 대선후보 지명에 필요한 매직 넘버를 채우지 못하도록 하는 게 급선무다. 크루즈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크루즈가 임무를 완수한 뒤엔? 그 건 그 때가서 보자는 것이 공화당 주류의 속내일 것이다.

크루즈가 남은 경선에서 트럼프와의 격차를 최대한 좁히면 공화당 주류는 크루즈에게 표를 몰아줄 것으로 관측된다. 크루즈가 희망하는 시나리오다.

미국 공화당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지난 3월 워싱턴 연방의사당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겨냥해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인종주의자 또는 인종주의 조직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공화당 주류는 다른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전당대회에서 트럼프도, 크루즈도 아닌 제3의 후보를 ‘추대’하는 방안이다.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나 2012년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 등의 이름이 꾸준히 거론되고 있는 이유다. 현행 공화당 전당대회 규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규정은 성경이 아니다. 공화당 규정위원회에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트럼프 대항마가 부시나 루비오였다면 거론되지도 않았을 제3후보 추대 주장 등이 나오는 것은 공화당 내의 크루즈 비토 기류 탓이다.

크루즈는 왜 그렇게 주류의 미움을 받고 있을까.

우선 그의 ‘독불 장군’ 행태가 반감을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 크루즈는 2012년에 당선된 초선 상원의원이다. 한국 국회도 그렇지만 미국 의회에서도 선수(選數)는 중요한 기준이다. 선수를 기준으로 당내 랭킹이 매겨진다. 상원은 하원 보다 전통과 관행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그런 상원에서 1970년생인 크루즈는 1942년생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인 미치 맥코넬과 맞짱을 떴다. 2013년 맥코넬 대표를 비롯한 공화당 지도부가 백악관·민주당과의 예산안 협상 과정에서 ‘오바마케어’(버락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가 마련한 건강보험 개혁 조치)집행 예산을 포함시키는 타협안을 마련하자, 크루즈는 맥코넬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며 강하게 비판했다. 공화당 지도부는 공화당 유권자의 뜻을 저버리고 오바마 정부에 투항한 인사들로 매도했다.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인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왼쪽)이 5일 위스콘신주 경선에서 승리한 뒤 부인 하이디와 함께 경선 승리 연설을 하고 있다.
밀워키=AP연합뉴스


한국 국회의 막장 드라마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선뜻 와 닿지 않지만 미 의회에서는 동료 의원을 ‘거짓말쟁이’로 부르는 정도의 발언도 큰 논란거리가 된다. 언론도 크게 다룬다. 2009년 공화당의 조 윌슨 하원의원이 상·하원 합동연설을 하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을 향해 “당신 거짓말이야”라고 소리쳤다가 사과 성명을 냈던 일도 있었다. 당시 민주당은 윌슨 의원에 대한 규탄결의안까지 추진했다. 상원 의사규칙은 구체적으로 동료 의원들에 대한 직·간접적인 비난 발언을 하지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니 고참 의원들 눈에는 크루즈의 거침없는 언행이 시쳇말로 ‘싸가지가 없는’ 행태로 보였을 것이다. 공화당에는 지금도 크루즈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의원들이 많다. 어떤 의원들은 크루즈의 공식 사과가 있기 전에는 그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크루즈는 위스콘신주 경선 승리 이후 부쩍 자주 공화당의 통합을 외치면서 동료 의원들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들자면, 크루즈와 공화당 주류의 갈등은 공화당 노선 투쟁의 산물이다.


 


크루즈는 2012년 텍사스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우파 대중운동인 ‘티 파티’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 덕분에 공화당 예비경선 과정에서 텍사스주 현직 부지사를 꺾는 이변을 연출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크루즈는 ‘티 파티의 의회 대사’를 자처하면서 오바마 정부의 건강보험개혁이나 이민개혁, 증세 정책에 결사 반대하는 티 파티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공화당 주류도 오바마 정부의 정책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티 파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화당은 2010년 중간선거 과정에서는 티 파티 운동에 편승, 다수당 고지 탈환에 성공했다. 이 때 티 파티 계열 의원들이 공화당 하원에 대거 유입됐다.

하지만 선명성은 투쟁의 시기에 필요한 덕목이다. 2010년 중간선거 이후 공화당은 비타협 노선으로 일관하는 티 파티 계열 의원들에게 발목이 잡혀서 오바마 정부와는 그 어떤 타협도 불가능한 정당으로 변해갔다. 공화당은 더 우경화됐다. 탈레반같은 티 파티 계열 의원들은 공화당의 골칫거리가 됐다. 원래 티 파티 운동은 과도한 정부 지출에 반대하면서 시작된 시민 운동이었는데 보수 우파가 개입하면서 사실상 오바마 정부에 반대하는 정치 운동으로 변질됐다. 나중에는 종교 우파인 기독교 복음주의와 인종주의 세력까지 티 파티로 흘러들어갔다. 2013년 미국 연방정부 폐쇄 사태를 야기한 주범이 바로 크루즈를 필두로 한 티 파티 계열 의원들이다. 이 때 크루즈는 오바마케어 집행예산을 막기위해 21시간19분 동안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를 했다. 크루즈는 떴지만 공화당은 연방정부 폐쇄 책임론에 휩싸였다.

티 파티의 이런 원리주의적 보수 노선은 공화당 주류가 바라는 진로가 아니다. 공화당 주류는 날로 인구가 늘어나는 히스패닉 등 소수인종이나 중도층을 끌어안지 않고서는 공화당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티 파티 세력은 자신들의 노선대로 당을 운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2014년 6월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를 지역구 당내 예비선거에서 낙선시키는 정치 반란까지 일으켰다. 그 희생자가 2010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을 승리로 이끈 뒤 원내대표 자리에 올랐던 에릭 캔터다. 하원 다수당 원내대표가 예비선거에서 낙선한 것은 미 의회 역사상 초유의 참사였다. 그 것도 정치 신인인 대학 교수에게 졌다. 캔터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공화당 주류와 티 파티 세력의 사이는 더 악화했다. 2008년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그 점잖은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크루즈를 향해 ‘미친 자식(wacko bird)’이라고 욕을 해댔을 정도였다.

두 세력의 불화는 크루즈가 대선후보로 지명되는 과정에서, 크루즈가 공화당 대선후보가 된 이후 본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줄곧 걸림돌로 작용할 전망이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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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최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일단을 내보인 외교안보 구상은 파격(破格)이었다.

한국 부분만 살펴봐도, 우리가 방위비 분담금을 올리지 않으면 주한 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고 협박했고, 북한의 위협 때문에 한국은 핵무장을 시도할 것이라면서 사실상 한국의 핵무장을 용인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대로 된 참모를 둔 정상적인 후보라면 ‘주한미군 철수’나 ‘한국 핵무장’ 같은 민감한 이슈를 그런 식으로 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는 자신의 발언이 도마 위에 오르자 슬그머니 핵무장 허용 발언은 거둬들이고 있다. 더욱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대외정책을 구상하고 있다는 트럼프이고 보면, 그의 발언을 진지하게 다룰 가치가 있을까, 회의도 든다.

하지만 문제는 트럼프가 대다수 미국인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미국의 한 유력 싱크탱크가 공개적으로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펴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자유의지주의(libertarian)’를 표방한다는 케이토 연구소였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자유의지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이념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자유시장 경제를 신봉한다. 미국 보수를 대표하는 공화당과 유사하지만 대외정책은 공화당과 크게 차별된다. 예컨대 이들은 미국의 대외 개입정책을 긍정하는 공화당과 달리 미국은 국제분쟁에 발을 담그지 말라고 주장한다.

론 폴 전 하원의원. 사진 = Getty Images

 

2008년 미 공화당 대선주자로 나섰던 론 폴 전 하원의원이 대표적 자유의지주의자다. 당시만 해도 론 폴의 목소리가 미약했지만 지금은 론 폴처럼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다.

공화당 유력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이런 기류에 올라탔다. 트럼프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쉽게 풀어보면 이런 식이다.

‘부자였던 미국이 다른 나라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미국 연방정부 부채가 19조 달러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한국과 일본, 독일, 중국은 부자가 됐다. 기존의 동맹 조약은 일방적이고 낡은 조약이다. 미국에 유리하게 고쳐야 한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이 아니다. 우리가 왜 우리 돈 써가면서 다른 나라를 지켜줘야 하나. 중국은 미국에서 번 돈으로 군사력 키워서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대통령이 되면 이런 상황을 바로잡아서 미국과 미국인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

위스콘신 유세 나선 도널드 트럼프 AP=연합

 

트럼프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해외주둔 미군은 미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한 세계전략 차원에서 배치된 것이지 주둔국에서 자원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가난한 나라’라는 말도 궤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먹고살기 힘들어진 대다수 미국인은 트럼프에 환호하고 있다. 트럼프가 그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포퓰리스트다.

트럼프가 미처 못한 말은 케이토 연구소의 더그 밴도 선임연구원이 대신해주고 있다.

“지금 펜타곤(미 국방부)은 세계적으로 부유한 나라들의 국방비를 떠안고 있다. 해마다 미국인들은 수천억 달러의 비용을 부담하고 있지만, 정작 미국은 덜 안전해지고 있다. 이들 부유한 나라는 국내총생산(GDP)의 1%를 비용으로 내야 한다. 군사적 대치상태에 있고 미국으로부터 핵우산을 제공받는 한국은 더 부담해야 한다. 1950년 6·25전쟁 때 만들어진 한·미동맹은 시대착오적이며 전적으로 일방적인 동맹이다. 한국은 수퍼파워인 미국에 의존하며 돈을 아끼고 있다”

외교라는 것이 본래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영국의 누군가 외교관을 ‘국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도록 외국에 파견되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정의했듯이,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가 국익에 부합한다면 언제든 철수할 것이다. 민주당 지미 카터 대통령이 1976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주한미군 철수 공약을 실행하려했다. 미국 의회와 미군 사령부가 카터를 설득하지 않았다면 사태는 주한미군을 일부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지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의 말을 듣다보면 얼핏 ‘고립주의’ 성향이 엿보인다.

원래 미국 대외정책에서 고립주의는 다른 나라와 동맹도 맺지않고 다른 나라들의 분쟁에도 개입하지 않는 정책이다. 미국은 건국 이후 한동안 고립주의로 일관했다. 1,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마지못해 참전한 것도 그런 전통 때문이었다. 그런 미국의 대외정책은 2차 대전을 거치면서 ‘국제주의(개입주의)’로 전환된다. 만약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2차대전 종전 이후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에 고립주의 정책으로 대응했다면 세계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트루먼은 터키와 그리스가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갈 위기에 처하자 미국이 공격받지 않는 한 중립을 지킨다는 전통적인 고립주의를 버리고 적극적인 개입주의를 채택했다. 트루먼은 미 의회에 터키와 그리스에 대한 원조 승인 법안을 요청하면서 “나는 자유민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역설했다. ‘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린 이 국제주의 원칙은 미국 대외정책 기조가 되었으며 향후 북대서양조약으로 구체화했다.

트럼프의 외교안보 기조는 이런 전통적인 고립주의와는 다르다. 동맹을 유지하거나 국제 분쟁에 개입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에 따른 금전적 부담을 최소화하겠다는 차원의 고립주의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는 데이비드 생거 뉴욕타임스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나는 ‘고립주의자’가 아니라 ‘미국 우선주의자’”라고 밝혔지만, 필자는 트럼프의 외교안보 구상이 정치학자 이삼성이 이름붙인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에 가깝다고 본다.

이삼성에 따르면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자는 미국의 대외개입 정책이 미국의 국익에는 별로 기여하지 않으면서 미국의 자원을 낭비하는 경향이 있다고 인식한다. 트럼프가 공화당 주류와 달리 조지 W 부시 공화당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자는 미국이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이 ‘세계 경찰’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반대한다. 트럼프도 “우리는 더 이상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이라크는 물론이고 우크라이나와 시리아 사태 등에 미국이 왜 개입해야하느냐고 반문한다. 미국의 개입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 만큼 그런 돈이 있으면 미국인들을 위해 쓰자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대외 개입에 소극적인 버락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의 입장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2008년 3월 미국 워싱턴D.C.의 백악관 앞에서 이라크전에 반대하는 시위집회가 열리고있다. EPA=연합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자는 국제 기구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트럼프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미·일동맹 등은 미국에 불리하게 체결된 조약이므로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미국은 NATO 회원국이나 일본이 공격받으면 자동적으로 미군을 보내 도와줘야하느냐고 트럼프는 반문한다. 유엔 등 국제기구를 우습게 보고 미국 마음대로 하겠다는 일방주의적 행태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비슷하다. 하지만 미군의 해외 파병은 극히 예외적이고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트럼프는 부시의 ‘근육 외교’와 대조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트럼프는 군사력 행사를 기피하는 비둘기로 보인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는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미군을 파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의 국익이 침해받으면 군사력 행사도 불사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적대감을 드러냈다. 트럼프는 1999년 북한의 핵 의혹이 불거지자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를 통해 북한이 계속 핵무기 개발에 나서면 선제 공격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미 북한은 트럼프가 공언했던 선제 타격의 조건을 충족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핵 위협을 고조시키고 있다. 북한 김정은에 대해서도 “중국이 그 인간(김정은)을 어떤 식으로든 사라지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암살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그 것(암살) 보다 더 나쁜 짓에 대해서도 들어봤다”고 답변할 정도로 충동적인 성향을 내보였다.

공화당 경선 후보들의 6차 TV토론 중의 트럼프(사진 가운데). AP=연합

 

우리에게 가장 큰 ‘트럼프 리스크’는 그가 예측 불가능한 인사라는 점이다. 그는 주요 외교안보 현안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동안 미국은 너무 속내를 보여왔다”면서 “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대방(상대국)이 알지 못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곤 한다. 좋게 말하면 전략적 모호성이다. 이런 태도가 때론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특정 국가와의 긴장 상황에서 이해 당사국들이 상대국의 의도를 오해하게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예측 불가능한 김정은이 핵을 흔들며 미국에 맞서고 있는 지금, 미국에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다면 한반도와 동북아의 긴장 수위는 급격히 상승할 것으로 관측된다. 설사 한반도에서 무슨 일이 터져도 한 푼을 아까워하는 트럼프 정부가 흔쾌히 지원할 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조남규 국제부장

워싱턴 특파원 시절 미국의 한 유력 싱크탱크가 공개적으로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펴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자유의지주의(libertarian)’를 표방한다는 케이토 연구소였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자유의지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이념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자유시장을 신봉한다. 미국 보수를 대표하는 공화당과 유사하지만 대외정책이나 사회정책은 차별된다. 이들은 미국의 대외 개입정책을 긍정하는 공화당과 달리 해외주둔 미군을 철수하라고 외치고 다닌다. 2008년 미 공화당 대선주자로 나섰던 론 폴 전 하원의원이 대표적 자유의지주의자다. 당시만 해도 론 폴의 목소리가 미약했지만 지금은 론 폴처럼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다.

공화당 유력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이런 기류에 올라탔다. 트럼프는 이렇게 말하면서 미국인을 홀리고 있다. ‘부자였던 미국이 다른 나라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그 사이에 한국과 일본, 독일, 중국은 부자가 됐다. 대통령이 되면 이런 상황을 바로잡아서 미국과 미국인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

트럼프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해외주둔 미군은 미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한 세계전략 차원에서 배치된 것이지 주둔국에서 자원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가난한 나라’라는 말도 궤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먹고살기 힘들어진 대다수 미국인은 트럼프에 환호하고 있다. 트럼프가 그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포퓰리스트다. 이런 트럼프에 공화당 유력 대선주자들이 주류든 비주류든 가릴 것 없이 하나 둘 나가떨어지고 있다. 공화당 지도부는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다. 트럼프를 대선후보로 내세우자니 당이 분열할 것 같고, 내치자니 공화당 유권자를 잃을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화당이 이런 군색한 처지에 몰린 것은 자업자득이다.

대공황 이후 최대 경제위기를 맞아 공화당은 국민에게 대안은 내놓지 못하고 반대만 일삼는 정치세력으로 비쳤다. 공화당은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부의 첫 번째 법안인 경기부양법안이 상정되자 소속 의원 전원이 반대표를 던졌다. 건강보험개혁이든, 이민개혁이든 오바마 정책이라면 덮어놓고 거부했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이 된 뒤 의회의 교착 상태는 더 심화했다.

미국 정치는 허구한 날 정쟁으로 일관했다. 그 여파로 미 연방정부가 폐쇄되는 사태가 빚어졌고 급기야 2011년에는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가 미 연방 정부의 신용등급을 강등시키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정치가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표류하는 동안 중산층, 서민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정치에 실망하고 삶에 지친 이들이 올 대선에서 공화당에서는 트럼프를, 민주당에서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띄우고 있다. 정쟁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국 정치인들에게 미국 주류 정치인들의 몰락은 훌륭한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조남규 국제부장 

‘트럼프만 아니면 누구나 괜찮다’(Anyone But Trump)… 공화당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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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공화당의 대선 후보선출 경선에서는 전당대회가 개최되기 수개월 전에 승자가 결정됐다. 그런데 올해 공화당 대선 경선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남아 있는 3명의 주자(도널드 트럼프 후보와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존 케이식 오하이오 주지사) 중 어느 누구도 대선 후보 지명에 필요한 대의원 과반 확보에 실패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선두를 달리는 트럼프 후보가 지금까지 확보한 대의원 수는 738명. 최소 과반인 ‘매직 넘버’(1237명)에 499명이 부족하다. 남은 대의원(848명)의 58.8% 가량을 확보해야 자력으로 대선 후보가 될 수 있다.

트럼프는 그럴 수 있을까. 트럼프가 현재의 지지율을 유지하면 가능하다. 뉴욕타임스의 예측 프로그램에서 트럼프의 향후 지지율을 42%로 설정하면, 아래와 같은 그래픽을 얻을 수 있다. 

트럼프가 남은 경선주 가운데 대의원 수가 많은 뉴욕(95명), 캘리포니아(172명)에서 이기면 매직 넘버 달성은 무난한 것으로 예측됐다. 

그런데 트럼프가 캘리포니아에서 지면 아래와 같은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전당대회는 대선 후보 지명을 축하하는 무대가 아니라 피튀기는 경선장으로 변하게된다. 이른바 ‘경선 전당대회(contested convention)’다.

현행 공화당 룰에 따르면, 전당대회 대의원들은 1차 투표에서 원칙적으로 각 주의 경선 결과대로 표를 던져야 한다. 예컨대 지난 22일(현지시간) 트럼프 후보가 승리한 애리조나주의 대의원 58명은 무조건 트럼프 후보를 찍어야 한다.(일부 예외도 있다) 1차 투표에서 과반 후보가 안나오면 2차 투표부터는 아무 후보에게나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는 대의원들이 늘어난다.(주마다 규정이 다르지만 대체로 3차 투표부터는 거의 모든 대의원이 자유롭게 후보를 선택할 수 있게된다) 이 때부터는 공화당 지도부나 주지사 등 유력 정치인들이 개입, 막후에서 중재에 나선다. 그래서 ‘중재 전당대회(brokered convention)’라고도 부른다.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지난 21일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트럼프와 크루즈의 격차가 크지 않으면 트럼프는 1위를 하고도 후보 자리를 크루즈에게 내줘야 하는 사태를 맞을 수 있다. 트럼프 본인도 언젠가 “협상이라면 나도 자신이 있지만 중재 전당대회는 전적으로 내가 불리하다. 나를 제외한 다른 주자들이 서로 친밀하기 때문이다”라면서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래선지 트럼프는 과거 자신이 1위를 하고도 공화당 후보가 되지 못하면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과연 트럼프다운 협박이다.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인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이 22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브뤼셀 테러와 관련,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로부터 미국을 방어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하지만 공화당 주류는 폭동이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얼마나 트럼프가 싫었으면 밋 롬니(2012년 공화당 대선후보)나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같은 공화당 주류 인사들이 그동안 상극(相剋)이었던 크루즈를 지지하고 나섰을까. 공화당 내부에서는 트럼프에게 당을 넘겨주느니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백악관 입성을 지켜보는 쪽을 택하겠다는 말도 나온다고 미 언론은 전하고 있다. 공화당 상·하원 의원 대다수는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가 되면 대선과 동시에 치러지는 상·하원 선거도 힘들어진다고 푸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공화당 대선 후보는 ‘트럼프만 아니면 누구나 괜찮다’(Anyone But Trump)는 기류다. 공화당 지도부는 전당대회 직전 열리는 전당대회 규정위원회에서 트럼프에게 불리하도록 전당대회 룰 자체를 바꿔버릴 수도 있다.


며칠 전 공개된 미국 폭스뉴스의 미 대선 가상 양자대결 여론조사 결과는 이런 반(反) 트럼프 정서에 기름을 부었다.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의 양자 대결에서 크루즈와 케이식은 각각 47% 대 44%, 51% 대 40%로 클린턴을 앞섰지만 트럼프는 49% 대 38%로 클린턴에게 밀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텃밭인 오하이오 1승으로 143명의 대의원을 확보한 게 전부인 케이식 주지사가 당 내의 경선 포기 종용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버티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겉으로는 “내가 빠지면 트럼프가 대선 후보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진짜 이유는 ‘중재 전당대회’로 가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온다고 굳건히 믿고 있기 때문이다. 공화당 전당대회 규정에 ‘최소 8개 주(미국령 포함)에서 1위를 하지 못한 주자는 대선후보로 지명될 수 없다’는 규정이 있긴하다. 이 규정을 그대로 적용하면 케이식은 컷오프 대상이다. 하지만 공화당은 전당대회에 앞서 이런 제한도 없앨 수 있다. 당이 하려고만 한다면 트럼프를 떨어뜨리기 위해 1차 투표부터 자유 투표 경선을 실시하도록 룰을 바꿀 수도 있다.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 존 케이식 오하이오 주지사가 지난 15일 오하이오 주 베레아에서 열린 경선승리 집회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자축하고 있다.
AP=연합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이 외쳤듯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의 시대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느냐고 묻는 독자가 있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게 정당의 운영 논리다. 공직선거 후보자를 어떻게 선출하느냐는 오롯이 정당의 권한이다. 국민참여 경선이든, 여론조사 경선이든 당이 그렇게 하자고 룰을 정하면 그렇게 가는 것이다. 컬리 호그랜드 공화당 전당대회 운영위원이 얼마 전에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일반인들은 국민이 대선후보를 선택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오해다. 대선후보는 당이 지명한다”

경선 1위 주자라고 해도 당의 정체성과 맞지 않으면 당이 그 주자를 버리고 다른 후보를 세울 수도 있다는 얘기다. 크루즈나 케이식처럼 후발 주자로 달리다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된 대표적 인물이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1860년 5월 공화당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시카고 전당대회가 열렸을 때 링컨은 최약체 후보로 평가됐다. 링컨의 경쟁자였던 윌리엄 헨리 슈어드와 새먼 P. 체이스는 주지사와 상원의원을 역임한 관록의 정치인이었고 에드워드 베이츠도 미주리의 원로 정치인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인물이었다. 도리스 컨스 굿윈은 저서 ‘Team Of Rivals’(권력의 조건,21세기북스)에서 “슈어드가 처음부터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며 선두를 달렸고 체이스와 베이츠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면서 “이를 잘 알고 있던 링컨은 그 누구도 공격하지 않는다는 전략을 세웠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1차 투표에서 슈어드에 이어 깜짝 2위에 오른 링컨은 2차 투표에서 슈어드를 간발의 차로 따라 붙었다. 결국 3차 투표까지 거친 끝에 링컨은 공화당 대선후보로 지명됐다. 어렵게 공화당 후보가 된 링컨은 그 해 대선에서 승리, 위대한 대통령의 반열에 올랐다.

 

1976년 공화당 전당대회도 유력 대선주자였던 제럴드 포드와 로널드 레이건이 모두 과반 대의원 확보에 실패, ‘경선 전당대회’로 치러졌다. 포드는 현직 대통령이었고 레이건 보다 더 많은 대의원을 확보했는데도 포드를 추대하지 않았다. 포드는 가까스로 레이건을 꺾고 후보가 됐지만 본선에서는 민주당 지미 카터 후보에게 패배했다.

포드의 사례를 보면 경선 1위 주자를 대선 후보로 내세운다고 해서 본선 승리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공화당 주류가 트럼프를 흔들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경선 1위가 트럼프의 대선 후보 지위를 보장하는 충분 조건은 아닌 셈이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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