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현지시간) 흑인 저격범에 의해 피살된 백인 경찰관들의 추모식이 열린 미국 댈러스주의 모튼 H 메이어슨 심포니 센터에서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부부가 손을 잡고 미국의 통합을 촉구하고 있다. 왼쪽부터 로라 부시, 부시 전 대통령, 미셸 오바마, 오바마 대통령.
댈러스=AP연합뉴스
백인 경찰과 흑인 저격범의 총격 사건이 미국의 해묵은 인종 갈등을 촉발시키면서 미국 대선판이 출렁거리고 있다. 

미국 대선에서 인종 변수가 유난히 강하게 작동되는 때가 있다. 2008년 대선이 그랬다. 민주당이 흑인 후보(버락 오바마)를 내세우자 소수인종 유권자의 투표율이 높아졌다. 히스패닉·흑인 인구가 많은 플로리다주는 2000년, 2004년 대선에서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를 선택하며 부시를 재선 대통령으로 만들어줬지만 2008년엔 오바마 쪽으로 기울었다. 오바마는 플로리다를 비롯한 경합주를 거의 휩쓸며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소수인종의 힘이다.  

최근 들어 히스패닉 유권자 수가 늘어나면서 소수 인종의 대선 영향력은 더 커졌다. 히스패닉 유권자는 2008년 2000만명 정도였으나 올해는 273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특히 박빙 경합주인 플로리다와 네바다, 콜로라도주는 히스패닉 유권자의 비중이 커졌다.

 

 

노스캐롤라이나와 펜실베이니아, 버지니아주의 히스패닉 유권자도 5% 정도 된다. 5%는 미미한 것 같지만 박빙 승부에선 결정적이다. 노스캐롤라이나의 경우 5%면 20만표가 넘지만 2008년, 2012년 대선은 몇 만표 차이로 승부가 갈렸다. 

올해 대선은 ‘백인 우월주의’를 부추기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사실상 지명되면서 인종 변수가 도드라지고 있다. 트럼프는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 백인과 소수인종을 갈라치는 전략을 구사하며 백인표 결집에 나섰다. 히스패닉 불법체류자들을 모두 추방하고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은 백인 유권자들 사이에서 트럼프 팬덤 현상을 만들어냈다. ‘미국의 주인은 백인’이라고 생각하는 유권자들이 대거 쏟아져 나와 트럼프를 대선후보로 밀어올린 것이 ‘트럼프 현상’의 일면이다. 

트럼프는 동시에 히스패닉 벌집을 건드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히스패닉의 유권자 등록이 2012년 대선 때보다 대폭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올해 대선에서 히스패닉의 투표율이 높아질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히스패닉 유권자는 직전 대선 때 보다 민주당 성향이 더 강해졌다. 

 어쩌면 트럼프는 이번 대선을 ‘백인 대(對) 소수인종’의 대결구도로 몰아가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만 되면 트럼프의 승리는 확정적이기 때문이다. 

백인 유권자 비율은 2000년 78%에서 2012년 71%, 올해 69%(추산)로 감소 추세지만 아직은 백인이 절대 다수다. 

 

 

소수인종이 그동안 플로리다주 같은 경합주 선거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백인표가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갈렸기 때문이다. 소수인종 영향력은 사실상 백인표 분할에 따른 반사효과에 불과한 것이다. 최근 퓨리서치센터 조사에 따르면, 백인 유권자의 51%가 트럼프를, 42%가 민주당 대선후보 지위를 굳힌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다. 전체적으로는 2012년 대선(민주당 오바마, 공화당 밋 롬니) 당시 지지율과 비슷하다. 

하지만 저학력(고졸 이하·대체로 저소득 백인층과 겹친다) 백인층에서는 트럼프 지지세가 2012년 롬니 지지세보다 다소 강해졌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소수인종 유권자들의 클린턴 지지세도 2012년 오바마 지지세보다 조금 더 굳어졌다. 통계상으로는 최소한 ‘저학력 백인 대 소수인종’ 구도가 확인된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올해는 클린턴이 고학력 백인 여성층에서 트럼프를 압도하고 있다는 점이다.(클린턴 62%, 트럼프 31%) 2012년 대선에서 롬니는 고학력 백인 여성층 지지를 오바마와 절반씩 나눠가졌다. 하지만 흑백 갈등이 고조되면 고학력 백인 여성층의 클린턴 지지세가 흔들릴 수 있다. 인종별 투표율도 관건이다. 

조남규 국제부장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o Machiavelli)는 저서 '군주론'에서 지도자의 조건으로 ‘비르투’(virtu·역량)를 들었다. 

비르투를 갖춘 인물에게 포르투나(fortuna·행운)까지 따르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역량이 없는 인물은 설사 행운이 따라줘도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역량을 갖추고 행운까지 따른 인물이 시대정신과도 맞아떨어진다면? 그런 인물이 대선에서 승리할 것이다. 500년 전 마카이벨리의 통찰은 지금도 유효하다.

미국 대선에서도 각각 민주, 공화당 후보로 사실상 선정된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의 역량이 미국민의 시험대에 올라있다. 

CNN 주최 토론에 나선 힐러리
결과론적인 얘기이지만 주요 정당의 대선후보가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클린턴과 트럼프는 행운의 정치인이다. 한 사례만 들자면 민주당 경선 방식이 공정했다면 클린턴은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에게 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좋게도 경선 결과에 구속되지 않는 수백명의 특별한 대의원들(슈퍼 대의원, 대부분이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기성 정치인들이다)은 클린턴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이들은 2008년 민주당 대선경선 때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클린턴을 버리고 버락 오바마 후보를 지지했다. 경선 초반부터 슈퍼 대의원들이 클린턴에 쏠리면서 샌더스가 불러일으킨 변화의 바람은 고비마다 벽에 부닥쳤다. AP통신이 민주당 최대 지분을 가진 캘리포니아주 경선을 앞두고 클린턴의 대선 후보 지명 사실을 보도한 것은 샌더스에 치명타가 됐다. 그 때까지 입장을 유보했던 슈퍼 대의원들이 클린턴 지지를 선언하면서 샌더스의 숨통을 끊었다. 캘리포니아가 샌더스에게 넘어갔다면 클린턴의 본선 경쟁력이 크게 훼손됐을 것이다. 행운이다.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된 것도 운이 좋아서다. 샌더스 바람과 트럼프 돌풍의 진원지는 똑같지만 공화당의 대선경선주자들 중에는 민주당의 클린턴만한 중량급이 없었다. 경륜과 관록의 클린턴은 가까스로 버텨냈지만 공화당의 다른주자들은 트럼프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버렸다. 트럼프에게는 행운이다. 

정치인 역량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게 권력 의지다. 다른 자질은 대체 가능하지만 이건 누가 대신해줄수 없다. 수많은 명망가들이이 정작 선거전에서는 힘을 못쓰는 이유가 바로 권력 의지가 약해서다. 정치인이 비전을 실행하려면 권력을 잡아야 한다. 정당의 존재 목적이 정권 창출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국 대선 후보를 권력 의지라는 잣대로 평가할 때 힐러리 클린턴(이하 힐러리)은 A플러스급 정치인이다.

2000년 뉴욕주 상원의원 선거에 나서면서 자기 정치를 본격화했다. 힐러리는 선출직에 나서 당선된 첫번째 퍼스트 레이디다. 당시는 힐러리가 남편이자 미국 대통령인 빌 클린턴이 모니카 르윈스키라는 백악관 인턴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일이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빌과의 결혼생활을 지속할 지 여부를 놓고 고민하던 시점이었다.

그는 2003년 쓴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Living History)에서 이렇게 썼다.

“내 의사 결정(상원 선거 출마) 과정이 가져온 한 가지 소득은 빌과 내가 또 다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는 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둘 다 느긋해지기 시작했다. 빌은 나를 돕고 싶어했고, 나는 그의 전문 지식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 빌은 나의 수많은 걱정을 일일이 검토했고, 나의 승산을 신중하게 평가했다. 이제는 형세가 역전되어, 내가 언제나 빌을 위해 맡았던 역할을 빌이 맡고 있었다. 빌은 조언하고, 결정은 내가 내렸다. 내가 출마하면 처음으로 빌에게서 독립하여 내 책임 아래 선거를 치르게 될 것이다.” (웅진닷컴의 ‘살아있는 역사’, 김석희 옮김 인용)

힐러리는 빌과 이혼하는 대신 ‘정치적 동거’를 선택한 셈이다.

정치적 운명공동체인 빌과 힐러리

힐러리가 최근 대선 과정에서 보여준 각별한 부부애를 고려하면, 정치적 동거라는 표현이 좀 심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치 칼럼리스트인 크리스토퍼 앤더슨의 저서 ‘아메리칸 에비타’(American Evita)에는 이 보다 더 심한 표현이 등장한다. 앤더슨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인 클린턴 부부는 8년 간의 백악관 생활을 정리할 즈음에 이미 백악관 재입성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고 있다고 썼다. 클린턴 부부의 백악관 참모들은 그 계획을 ‘The Plan’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힐러리가 재선 대통령이 돼서 클린턴 부부가 8년 더 백악관의 주인이 된다는 구상이다. 힐러리는 미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 빌은 미 역사상 최초의 ‘퍼스트 젠틀맨’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클린턴 부부는 미 역사상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세운 재임 기간(4선에 성공했지만 4선 대통령 취임 직후 숨지는 바람에 12년 밖에 재임하지 못했다)을 넘어 16년을 부부가 번갈아가며 집권하게되면 역사적 기록을 세우게 된다. 앤더슨이 전하는 에피소드 하나. 2000년 대선에서 승리한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에게 백악관을 비워주기 전날 밤, 이삿짐을 꾸리던 빌은 참모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는 다시 돌아온다(We’ll be back)”고 말했다는 것이다.

‘The Plan’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앤더슨이 2004년에 힐러리의 대선 출마를 확신하면서 쓴 책에 나오는 얘기이니 전혀 낭설은 아닐 것이다. 힐러리의 2008년 대선 출마 과정을 짚어보면 앤더슨의 전망은 대부분 그대로 실현된다.

조남규 국제부장

 

미국 민주당원들의 기억 속에 2000년 대선은 쓰라린 패배로 남아있다.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는 일반투표에서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를 54만여표 앞섰으나 정작 대선 승부를 좌우하는 선거인단 집계에서는 부시 후보가 5명 앞섰다.(부시 271명, 고어 266명) 연방대법원까지 개입하는 우여곡절 끝에 부시는 불과 537표 차로 고어를 누르고 플로리다 선거인단 25명을 차지하며 대선에서 승리했다. 플로리다가 고어에게 갔으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당시 진보 진영에서는 녹색당 후보로 출마한 랠프 네이더 책임론이 흘러나왔다. 진보 성향의 네이더가 고어 표를 잠식한 탓에 플로리다를 빼앗겼다는 비판이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 격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고어와 네이더의 지지층이 일부 겹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2000년 대선 승부는 네이더가 플로리다에서 얻은 9만7488표가 갈랐다고 볼 수 있다. 



 

올해 대선에서도 진보 진영에선 녹색당의 질 스타인 후보가, 보수 진영에선 자유당의 게리 존슨 후보가 각각 출마했다. 

민주, 공화 양당제가 정착된 미국 대선에서는 제3후보가 여간해선 판세를 좌우하기 힘들다. 역대 대선에서 제3후보들은 항상 있었지만 존재감이 미미했다.

 

 스타인과 존슨은 2012년 대선에서도 각각 녹색당, 자유당 후보로 나섰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올해 대선에서는 제3후보 변수가 중요해졌다.

미국 자유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 게리 존슨 전 뉴멕시코 주지사가 지난 5월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올랜도=AP연합뉴스

무엇보다 스타인이나 존슨 같은 제3후보의 득표 공간이 대폭 확장됐다. 역대 어느 대선보다 민주, 공화 후보를 싫어하는 유권자층이 두꺼워졌기 때문이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발표된 월스트리트저널(WSJ)·NBC의 조사에 따르면,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비호감도가 각각 55%, 60%에 달했다. 클린턴과 트럼프를 지지한 응답자 대부분이 두 후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상대 후보가 더 싫어서 어쩔 수 없이 클린턴이나 트럼프를 선택했다는 얘기다.

4자 구도의 지지율은 클린턴(39%), 트럼프(38%), 존슨(10%), 스타인(6%) 순으로 나타났다.

 

 

지지후보가 없다는 응답자(7%)에게 한번 더 물었더니 이들 중 존슨과 스타인을 택하겠다는 응답이 각각 31%, 17%에 달했다. 트럼프와 클린턴에게 표를 던지겠다는 응답은 12%, 8%에 불과했다. 본선전이 본격화하면 민주, 공화당 후보에게로 표가 결집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현재까지는 제3후보의 득표력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하나, 2012년 대선 당시 4% 포인트 미만 격차로 승부가 갈린 곳이 4개주 나왔는데 올해 대선에선 2000년 대선의 플로리다처럼 제3후보가 승부를 가르는 주들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커졌다. 


1992년부터 2012년까지 역대 6차례 대선을 돌아보면 민주당 후보는 펜실베이니아 등 18개 주와 워싱턴DC에서 연전연승했다. 그래서 이들 18개 주는 ‘민주당 장벽(Blue Wall)’으로 불렸다. 그런데 올해 대선에서는 트럼프 후보가 민주당 성향의 백인 노동자층을 흔들면서 민주당 장벽의 일각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민주당 아성이 경합주(Swing State)로 바뀐 것이다.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주가 특히 그렇다. 최근 6차례 대선 중 민주당이 5번 승리한 아이오와와 뉴햄프셔주, 4번 승리한 오하이오주 같은 민주당 우세주도 이번엔 경합주로 변했다. 의회 전문매체인 ‘더 힐’은 28일 이들 경합주에서 클린턴과 트럼프가 오차 범위 내 접전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재로선 제3후보가 클린턴과 트럼프 중 누구에게 치명타를 가할지 예단하기는 쉽지 않다. 진보 성향의 스타인 후보는 클린턴 후보와, 보수 성향의 존슨 후보는 트럼프 후보와 지지층이 일부 겹친다. 박빙 경합주에서 존슨이 선전하면 클린턴이, 반대로 스타인의 득표력이 커지면 트럼프가 웃을 것이다.



 

미국 녹색당 대통령 후보 질 스타인

참고로 존슨의 자유당은 50개주 모두에서, 스타인의 녹색당은 50개주의 4분의3 정도에서만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릴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클린턴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충성도에 있어서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클린턴 지지자들보다 단단한 것으로 집계됐다. WSJ·NBC조사의 클린턴·트럼프 양자대결 상황에서 클린턴을 택한 응답자는 4자 구도에서 13%가 제3후보로 이동한 반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같은 상황에서 9%만 떨어져 나갔다. 

조남규 국제부장

 

필자는 이 글에 붙는 댓글을 꼼꼼이 읽는 편이다. 네티즌들이 궁금해하는 대목은 다음 글의 소재로 삼기도 한다. 다만, 이 글의 관점을 문제삼는 댓글은 대개는 무시한다. 필자는 미 공화당 대선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의 인종편향·여성 경시 행태나 ‘미국 우선주의’ 대외 정책을 비판하는 쪽에 서 있다. 트럼프는 그런 국수주의, 편가르기 전략으로 공화당 경선에서 재미를 봤다. 하지만 그런 자세로는 더 다양한 미국인의 지지가 필요한 본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본다. 설사 트럼프가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를 현실화시킨 반(反) 세계화 흐름 속에서 미국 대통령이 되는 행운을 잡는다해도 트럼프의 공약으로는 그가 약속한 ‘위대한 미국’은 절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이런 필자의 견해에 반대하는 네티즌들의 견해도 십분 존중한다. 더욱이 필자의 졸고에 댓글을 다는 성의를 보인 만큼 필자도 나름의 성의를 보이고 싶다. 그래서 이번 회에는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트럼프가 지금 클린턴 보다 지지율이 낮은 것은 100% 그의 책임이다.

트럼프가 지난 5월3일 사실상 공화당 대선후보 지위를 굳힌 뒤 그의 지지율은 껑충 뛰었다. 주요 정치이벤트 직후에 지지율이 오르는 이른바 ‘컨벤션 효과’ 덕분이다. 클린턴을 추월하는 조사도 나왔다. 이 때 민주당 대선경선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경선 맞수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에 의해 발목이 잡혀서 경선을 종결짓지 못하고 있었다.
 당내 도전자들을 모두 정리한 트럼프로서는 후방을 걱정하지 않고 진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통상적인 후보라면 경선 과정에서 제시했던 과격한 공약들-예컨대 무슬림 입국 금지나 불법 체류자 전원 추방,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 쌓기 등-을 순화시키거나, 최소한 그런 공약을 부각시키는 일은 삼갔을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달랐다. 멕시코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공화당 소속인 수사나 마르티네즈 멕시코주 주지사를 공격하고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과 각을 세웠다. 인디언 혈통설이 나도는 민주당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을 향해 ‘포카 혼타스’라는 인종차별 표현을 사용하며 비아냥댔다. 트럼프 관련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곤잘로 쿠리엘 연방판사를 겨냥해선 그가 히스패닉 혈통이라서 편파적일 것이라고 예단했다. 쿠리엘 판사는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로 멕시코 마약조직 소탕 과정에서 살해 위협까지 받은 인물이었는데도 트럼프의 인종 공격은 피해가지 못했다.
 

 트럼프는 또 올랜도 총격 테러가 발생하자 무슬림 입국 금지 공약을 다시 꺼내들었다. 트럼프의 쿠리엘 판사 비판이나 무슬림 입국 금지 주장과 관련해선 대다수 보수 유권자들도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트럼프가 자충수를 두고 있는 사이에 클린턴은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에 필요한 선거인단을 확보하면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트럼프가 후보 확정 이후 천금같은 50일을 쓸데없는 논란이나 불러일으키며 낭비하고 있는 사이에 클린턴은 트럼프를 가볍게 추월했다. 트럼프의 하락세는 기존 공화당 대선 후보들 보다 가파른 것이다. 아래는 대선을 200일∼100일 앞둔 시점의 공화당 대선 후보 지지율 추이다.

 

 

이제 트럼프에게는 반전의 기회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무엇보다 여성 후보인 클린턴이 여성 유권자의 호감을 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공략할 필요가 있다. 최근 실시된 월스트리트저널(WSJ)·NBC방송 조사에 따르면, 트럼프는 전문대졸 이하 학력의 백인 여성층에서 클린턴을 앞서고 있다. 대다수 백인 남성은 학력에 관계없이 클린턴을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가 백인 유권자층에서 클린턴에게 밀리는 곳은 전문대졸 이상의 고학력층이다. 트럼프는 이들을 우군으로 만들어야 한다.
 

 

 


2012년 대선 당시 밋 롬니 공화당 대선후보는 고학력 백인 여성표에서 재선에 도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앞섰다. WSJ은 “펜실베이니아나 콜로라도 같은 경합주의 교외 지역에서 트럼프가 표를 얻으려면 고학력 백인 여성표를 가져와야 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건 트럼프가 고민해야 할 문제다. 다만, 폭스뉴스 앵커 메긴 켈리에 대해 “그의 눈에서 피가 나왔다. 다른 데서도 피가 나왔을 것”이라고 말한 것 같은 여성 비하 발언은 절대 금물이다. 

트럼프가 고학력 여성의 지지를 높일수 있다면 그건 그가 보다 정상적인 후보가 됐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최소한 2012년 대선 당시 롬니가 이긴 주들은 트럼프도 가져올 수 있다.  

 
 

 

롬니는 2012년 대선에서 206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다.

트럼프는 이제 206명에 +알파를 해야 한다.

WSJ은 트럼프가 롬니 승리주를 모두 차지한다는 전제 위에서 트럼프가 승리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을 제시했다.

그 하나가 플로리다 루트다.  플로리다 승리를 전제로 한 전략이다.
트럼프가 2012년 대선에서 오바마가 가져간 플로리다(선거인단 29명)를 빼앗아오면 대선 승리 전략을 활용하기가 한결 쉬워진다.

여기에 경합주인 오하이오(18), 아이오와(6), 뉴 햄프셔(4), 메인(4)을 보태면 트럼프가 확보한 선거인단은 267명이 된다. 이제 펜실베이니아(20), 미네소타(100, 위스콘신(10), 콜로라도(9), 미시간주(16) 가운데 하나만 가져오면 당선 조건인 선거인단 270명을 가볍게 넘길 수 있다.

그런데 플로리다의 인종별 구성은 트럼프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트럼프 반감이 강한 히스패닉이 30% 가깝게 되고, 흑인 비율도 15%를 넘는다. 10명 중 4명꼴로 트럼프를 싫어하는 히스패닉과 흑인이다.

또 다른 루트가 플로리다를 우회해서 가는 길이다. 플로리다 루트 보다는 좀 험한 코스가 되겠다.

트럼프는 플로리다 대신 아이오와, 메인, 뉴햄프셔에서 승리해야 한다. 트럼프 지지세가 강한 백인 노동자층이 다수 거주하는 오하이오와 펜실베이니아까지 가져오면 선거인단 258명을 확보할 수 있다. 트럼프는 이제 12명을 더 얻어와야 한다. 전통적으로 공화당 지지세가 강했던 버지니아(13)를 공략할만하다. 버지니아는 오바마가 등장하기 전만해도 공화당의 아성이었다. 트럼프가 공화당 단합만 이뤄낸다면 버지니아 승리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할 것이라고 누가 예상했나. 그 만큼 트럼프는 있을 법 하지않는 일을 성사시킨 비전통적 후보다. 본선에서도 그런 기적을 만들지 말란 법은 없다. 대신 트럼프가 좀 변해야 가능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조남규 국제부장

 

 

 

2001년 미국을 강타한 9·11 테러 이후 ‘테러’는 미국 대선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가 됐다.

9·11테러 이후 치러진 첫 선거인 2004년 대선이 특히 그랬다. 그해 재선에 도전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박빙 승부를 펼친 끝에 민주당 존 케리 후보를 꺾었다.

부시 대통령은 민주당 앨 고어 후보와 맞붙었던 2000년 대선에서는 과반 선거인단(271명)을 확보하며 승리했지만 일반 유권자 득표에서는 54만여표를 졌다.(연방제 국가인 미국의 대통령은 50개주와 워싱턴DC에서 선출하는 선거인단이 뽑는다. 각 주에 배정된 선거인단은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 1표라도 더 많이 얻은 후보가 독식한다. 전체 선거인단 538명의 과반인 270명 이상을 확보한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

첫 번째 재임 기간 내내 ‘반쪽 대통령’이란 조롱을 받아야 했던 부시는 4년 뒤 치러진 대선에서 선거인단은 물론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도 케리 후보를 301만여표 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 체면을 회복했다. 공화당 후보가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 민주당 후보를 누른 것은 1992년 대선 이후 처음이었다. 9·11 이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인 ‘테러와의 전쟁’은 부시 승리의 일등공신이었다.

지난 12일(현지시간) 발생한 올랜도 총격사건으로 올해 대선에서도 테러 변수가 돌출됐다.

테러 변수는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과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 중 누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까.

정치학자들의 유권자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체로 테러 위협이 고조된 시기에는 ‘공화당 후보, 남성 후보, 국가안보 분야 경력이 있는 후보’가, 그리고 강경책을 제시하는 후보가 더 능력 있는 후보로 비쳐진다. 국내 선거에서 ‘북풍(北風)’ 변수가 불거지면 보수 정당이 유리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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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남성 후보’가 유리하다는 가설은 올랜도 테러 직후 실시된 로이터-입소스의 여론조사 결과와 일맥 상통한다.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후보를 묻는 질문에서 트럼프(45%)는 클린턴(41%)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국가안보 분야 경력에서는 클린턴이 트럼프를 압도한다. 클린턴은 200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국방위를 노렸다. 그리고 국방위에 공석이 생기자마자 그 자리를 꿰찼다. 그는 워낙 성실하기도 하지만 군사위 청문회는 반드시 챙기며 펜타곤(미 국방성)과 미군의 신뢰를 얻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클린턴은 민주당 내에서 매파로 통한다.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 개전 결의안에 주저없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 일로 2008년 민주당 대선경선에서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2005년 실시된 리더십 평가 조사에서 클린턴은 부시 대통령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케리 상원의원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지만 국무장관을 거친 이후엔 상황이 달라졌다. 상원 군사위와 국무장관 경력으로 ‘민주당 여성 후보’라는 취약점을 보강한 것이다. 클린턴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국무장관 제의를 수용한 것은 2016년 대선까지 내다본 절묘한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트럼프는 딱히 공화당 후보로 규정짓기도 힘든 ‘아웃 사이더’다. 대외정책과 관련해선 공화당의 ‘국제주의(개입주의)’ 기조를 반대하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대외정책을 담당했던 인사들은 공식적으로 트럼프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은 정치전문매체인 폴리티코에 “트럼프는 공화당원으로 보이지 않는다. 공화당 이슈들을 배우려 하지도 않는다”면서 “클린턴 전 장관이 후보가 되면 그에게 투표하겠다”고 말했다. 아미티지를 비롯한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 담당자들은 대다수가 트럼프 반대파가 됐다. 트럼프가 ‘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면서 부시 정부가 시작한 이라크 전쟁을 ‘외교 정책의 재앙’으로 매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시 집권기를 ‘실패’로 규정짓기도 했다. 참다못한 부시 전 대통령은 얼마 전 대변인을 통해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테러 변수는 전통적으로 공화당 후보에게 유리했지만 올해는 트럼프와 클린턴의 우열을 가리기 쉽지 않게 됐다.

트럼프는 올랜도 총격 범인이 아프가니스탄계 이민자 아들로 판명되자 ‘무슬림 입국 금지’ 공약을 다시 꺼내들었다. 트럼프의 반응은 9·11 테러 직후 무슬림 센터를 찾아가 “테러는 무슬림의 참 모습이 아니다”면서 단합과 연대의 메시지를 던진 당시 부시 대통령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는 무슬림이나 히스패닉을 희생양으로 삼는 트럼프의 편가르기 전략이 백인 노동자층을 결집시키는 효과를 냈다. 무려 1330만여명이 트럼프를 찍기 위해 투표장에 나왔다. 편가르기 전략이 먹힌 것이다. 사실상 본선이 시작된 이후에도 트럼프는 이런 경선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이 전략은 본선에서도 통할까.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은 45세 이상의 백인 노동자층으로 조사됐다. 본선에서는 이들의 비율이 낮아진다. 본선 승리를 위해서는 공화당 온건파는 물론이고 중도층과 무당파의 표도 필요하다. 특히 경합주(스윙 스테이트)에서는 중도층과 무당파의 향배가 중요하다.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한 오바마 대통령이 얻은 일반 유권자 표는 6600만 표(선거인단 332명)에 육박했다. 공화당 밋 롬니 후보는 약 6000만 표(선거인단 206명)를 얻고도 졌다. 산술적으로 트럼프가 본선에서 이기려면 경선에서 얻은 표에 5000만 표 이상을 보태야 한다. 트럼프 마니아만으론 이 숫자를 채울 수 없다. 히스패닉과 흑인의 트럼프 지지율은 역대 공화당 후보 중에서 최저치다. 트럼프는 전문대졸 이상의 백인 고학력층에서도 클린턴에게 밀리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무슬림 입국 금지 같은 트럼프의 과격한 공약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 공화당 지도부도 마찬가지다.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무슬림 입국 금지 공약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것은 여론에 따른 반응이다. CBS와 블룸버그뉴스이 조사 결과, 유권자의 5분의3 이상이 무슬림 입국 금지 공약에 반대했다.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가 공약을 순화해야 공화당 텐트가 넓어진다고 본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 과정에서 자신을 띄운 지지층이 돌아설 것을 염려할지도 모른다. 트럼프는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섰다. 하나는 기존 공약을 수정해서 외연을 넓혀나가는 전략이다. 다른 하나는 공약을 유지한 채 핵심 지지층의 투표율을 높이는 전략이다. 그는 어느 길로 걸어갈 것인가. 미국 대선의 주요 관전 포인트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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