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가족부(여가부)의 모태는 여성부다. 2001년 1월 여성부로 출범한 이후 이름에 가족이 추가됐다. 지금은 ‘양성평등부’로 변경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저출산 고령화라는 시대의 추이에 맞춰 여성가족부는 꾸준히 진화했다. 과거 여성인권 문제에 한정됐던 업무 영역은 인터넷 중독 청소년, 이혼 가정의 양육비, 국제결혼, 학교 밖 청소년 지원, 양성 평등 등으로 확대됐다. 다음달 취임 1년을 맞는 김희정 장관을 16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17층 장관접견실에서 만나 날로 그 중요성이 더해가는 청소년과 여성, 가족 문제를 주제로 방담했다.

 



―우리 사회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와 사실상 전쟁을 벌이고 있다. 여가부 차원에서 어떤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나.

“메르스로 고통받고 있는 가정을 도와드리기 위한 가족돌봄 긴급서비스 등을 확대하고 있다. 전국 청소년 시설에 대한 긴급 점검도 병행해 메르스 확산과 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국민을 돕기 위해 전 직원이 노력 중이다. 가족 중에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은 환자나 격리 대상자가 발생한 가정을 위한 서비스를 한 가구당 90시간까지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비상 상황에서 꼭 필요한 공적서비스다. 자녀를 돌봐야 할 부모가 메르스에 걸린 경우뿐 아니라 어린이집과 유치원, 학교의 휴원 또는 휴업으로 가정 내 양육에 어려움을 겪는 가정에 지원된다. 평소 오후 6시까지 이뤄지던 상담 및 신청 시간을 오후 10시로 확대했다. 해당 지역에 아이 돌보미가 부족하면 인근 지역과 연계하여 서비스 이용에 지장이 없도록 운영하고 있다. 메르스 확진 환자의 가정에는 무료로 제공된다. 노인 가사 등 돌봄 서비스는 한국건강가정진흥원(02-3479-7600)으로 신청할 수 있고 아이돌봄은 1577-2514 또는 홈페이지(ww.idolbom.go.kr)로 신청해주시면 된다.”

―학교 밖 청소년 지원대책은 김 장관이 국회의원 시절부터 관심을 갖던 사안으로 알고 있다. 장관으로서 직접 정책화한 사안인데 효과는 어떤가.

“국회에서 ‘학교 밖 청소년 지원법’을 대표 발의해 통과시켰다.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나 학교 밖에서 배회하는 청소년이 36만명에 달한다. 매년 8만명이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있다. 이들에 대한 지원체계를 처음으로 공식화했다는 의미가 있다. 이들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보듬느냐에 따라 장차 국가적 부담이 될 수도 있고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인재로 성장할 수도 있다. 학교밖청소년치유센터인 꿈드림센터를 전국에 200여개 만들었다. 교육부와 손잡고 이들이 학교를 그만두기 전부터 학업중단 문제를 상담하는 숙려(熟慮)제를 운영하고 있다. 그 결과 학업중단을 고민하는 학생들 중 82%가 상담 후 학교에 남기로 결정했다.”

 
―자녀들의 인터넷 중독 문제는 모든 가정의 골칫거리다. 여가부에서 운영 중인 인터넷중독치료 학교가 학부모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어떤 프로그램인가.

“전북 무주에 ‘인터넷드림학교’라는 인터넷중독치료 대안학교를 만들었다. 폐교를 매입해서 몇 주간 숙식을 하며 치료프로그램을 받는다. 중독 치료는 생활 습관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에 공부만 시켜서는 안 된다. 부모들은 아이의 치료 기록이 알려져 낙인이 찍히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하는데 학생기록부 등에 전혀 기록이 남지 않는다. 대안학교로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학기 중에 오더라도 수업단절 같은 문제도 없다. 사회적 편견이나 공연한 두려움으로 인터넷 중독 치료를 꺼릴 이유가 없다. 장기적으로는 이곳에서 치료를 받은 아이들이 인터넷에 중독된 다른 청소년의 멘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 장관부터가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워킹맘(workingmom)이다.(김 장관은 일곱 살배기 딸과 네 살배기 아들을 둔 엄마다.) 일과 가정을 어떻게 양립시키고 있나.

“‘세상에 슈퍼우먼, 알파걸(alpha girl·모든 분야에서 남성과 동등하거나 뛰어난 첫째가는 여성)은 없다. 피곤해하는 여성만 있을 뿐’이라는 어느 여성학자 분의 말에 크게 공감한다. 일과 가정을 양립시켜야 하는 고충은 개인적으로도 현재진행형이다. 아이들이 이제 ‘일하는 엄마’를 둔 환경에 제법 익숙해진 것 같고, 놀아줄 땐 확실하게 놀아주면서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최대한 집중한다. 둘째를 낳고 아이돌봄서비스를 1년간 이용했고, 지금도 두 아이 모두 직장어린이집에 보내고 있다. 워킹맘으로서 정부의 일·가정양립 지원정책을 직접 경험하다 보니 국민 입장을 더 잘 이해하고 정책개선에도 반영하게 된다.”

―최근 포털에서 가장 인기를 끈 검색어 중 하나가 여가부가 출범시킨 ‘양육비이행관리원’이다. 그만큼 갈라선 부부간에 양육비 문제를 놓고 다툼이 많다는 증거인 것 같다.

“지난 3월 양육비이행관리원 콜센터를 열자마자 문의가 폭주했다. 상담을 받기 위한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출범 이후 상담만 1만3600건이 들어왔고 3481건이 공식 접수됐다. 자녀 양육비에 인색한 우리 사회의 세태를 보여주는 풍경 같아서 씁쓸했다. 일방 배우자가 다른 배우자에게 양육비를 주지 않는 이유는 다양하다. 주다가 끊은 경우도 있고, 처음부터 안 주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연락이 끊긴 사례가 많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경우에는 정부가 먼저 긴급양육비를 지원하고 뒤에 양육비 부담의무가 있는 배우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하기도 한다. 양육비이행관리원은 또 다른 분란을 일으키는 곳이 아니라 그것을 종식하는 곳이다. 부부관계는 결별됐어도 아이를 돌봐야 할 책임은 사라져서는 안 된다. 양육비이행관리원의 존재 자체가 자녀에 대해서는 부모가 확실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킬 것이다.”

―‘양성평등법안’이 다음달 시행된다. 여가부 정책이 여성 중심에서 양성평등으로 진화하는 양상이다. 어떤 점들이 달라지나.

“성별영향평가, 성인지(性認知) 예산 등 어려운 용어가 많은데 쉽게 풀어 보면 똑같은 정부 예산을 들였을 때 한 성별에만 혜택이 되는 문제를 바로잡자는 것이다. 회사에서 휴가를 정할 때 할머니 상은 3일, 외할머니는 1일로 정하는 경우도 있다. 육아휴직도 여성은 3년이고 남자는 1년밖에 안 된다. 우리 삶 속에서 국가가 하는 정책이나 규율이 성별 차이로 있는 차별을 겪는 정책이 의외로 많다. 이와 관련해 국민 공모 제안을 했더니 녹색어머니회를 녹색학부모회로 바꾸자는 제안도 있다. 이런 부분을 형평성에 맞게 조정한다.”

―기관 기업 내 성희롱 문제가 사회 이슈가 된 지 오래다.

“성희롱뿐 아니라 성폭력·성매매·가정폭력 등 폭력근절을 위해서는 ‘인식개선’과 ‘가해자 엄벌’ 두 가지가 핵심이다. 인식개선을 위해 국가·지자체·공공단체의 폭력예방 교육을 의무화하고, 양성평등 관점에서 가정폭력·성희롱·성폭력에 대한 통합교육을 실시할 수 있도록 지난해 법과 제도를 정비했다. 이제 모든 정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공직유관단체는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그 결과를 여가부에 제출해야 한다. 가해자에 대해서는 지난 3월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표된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성폭력근절대책’에서 밝혔듯이 지위고하, 업무성과 등에 상관없이 무관용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다른 부처와 업무가 중복된다는 지적이 많다. 여가부만의 정체성은 뭐라고 생각하나.

“여가부는 기능이 아니라 여성·청소년·가족 등 대상 중심의 정책을 추진하는 부다. 다른 부처와 상호보완적으로 해나가야 더 큰 성과를 거두는 일들이 많다. 일례로 청소년 중에서 학교를 다니는 청소년은 교육부가 담당하지만, 학업중단·가출 등 ‘학교 밖 청소년’은 여성가족부가 보호를 해주고 있고, 학교 단위가 아닌 방과 후 청소년활동도 담당하고 있다. 복지부가 보편적 저소득층 지원을 한다면, 여가부는 한부모가족·다문화가족 등 취약계층 가족의 역량강화와 자립을 지원한다.”


대담=조남규 사회부장, 정리=조병욱 기자, 사진=이재문 기자 brightw@segye.com

◆ 김희정 장관은… ▲1971년 부산 출생 ▲1994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2002년 연세대 정치학 석·박사 수료 ▲2004년 17대 국회의원(부산 연제구) ▲2009년 한국인터넷진흥원장 ▲2010년 대통령실 대변인 ▲2012년 19대 국회의원 ▲2012년 새누리당 정책위원회 정책위부의장 ▲2012년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간사 ▲2014∼여성가족부 장관


노무현정부가 임기 초반 ‘더 내고 덜 받는’ 국민연금 개혁을 추진했을 때 반대 여론이 70%를 넘었다. 당시는 평균 소득의 9%를 보험료로 내고 평균 소득의 60%(소득대체율)를 연금으로 받았을 때다. 30년 정도 보험료를 낸 직장 가입자는 보험료(절반은 회사 부담)의 2배 정도를 연금으로 돌려받았다. 이런 짭짤한 연금 체계를 ‘보험료율은 점진적으로 15.9%까지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즉시 50%로 낮추자’고 했으니 국민은 선뜻 동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좌파 정당인 열린우리당(새정치민주연합)이 연금 축소에 반대한 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명색이 우파 정당이라는 한나라당(새누리당)까지 반대하고 나선 것은 기이한 모습이었다. 대체로 우파 정당들은 복지 같은 군살을 뺀 ‘작은 정부’를 추구한다. 국민연금은 가입자의 보험료로 운영되지만, 장기적으로 연금기금이 고갈되면 우파가 싫어하는 ‘증세’로 가야 한다. 4년여의 국민연금 개혁 논란 끝에 한나라당은 2007년 2월 노무현정부의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부결했다. 그것도 열린우리당보다 더 좌파적인 민주노동당(정의당)과 손잡고 그랬다. 이런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
당시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의 기이한 정책연합은 ① 65세 이상의 모든 노인에게 매달 국민연금 가입자 평균의 20%에 해당하는 연금(2007년 기준 34만원)을 지급하고 ② 국민연금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각각 7%, 20%로 낮추는 국민연금 개혁안을 만들어냈다.

①은 2012년 대선 과정에서 박근혜 후보가 약속했던 ‘기초연금(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씩 지급)’ 공약보다 급진적이다. 노인 기초연금은 매년 세금을 거둬서 지급하는 것이라 고령화 속도가 빠른 우리에게는 재정 부담이 만만치 않다. 오죽했으면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박근혜 대통령조차 65세 이상 노인 중 소득 하위 70%를 대상으로, 그것도 국민연금과 연계해서 차등 지급하는 식으로 공약을 후퇴시켰겠는가. ②는 소득대체율 40%인 지금도 ‘용돈 연금’으로 불리는 연금을 ‘껌값 연금’으로 전락시켰을 것이다. 다행히 좌·우파 정책연합의 이율배반적인 개혁안도 정부안과 함께 부결됐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친 뒤에야 여야는 2007년 7월 보험료율은 9%로 유지하고 60%인 소득대체율만 2028년까지 점진적으로 40%까지 인하하는, ‘그대로 내고 덜 받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합의 처리했다. 현행 국민연금 제도가 만들어진 ‘흑역사(黑歷史)’다.
당시 한나라당은 70%가 넘는 반대여론이 두려워서 국민연금 개혁에 반대했을 것이다. 재원 조달 계획도 없이 불쑥 꺼내든 노인 기초연금 제도는 해마다 늘어나는 노인 표를 노린 선심 정책이었다. 대중에게 영합한 것이다.

여야가 바뀌자 이제는 새정치민주연합이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 박근혜정부의 공무원연금 개혁에 딴지를 걸고 과거 자신들이 인하했던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다시 올리자는 자가당착에 빠져있다. 공무원 표밭을 다지고 노후가 불안한 국민의 마음을 사서 정권을 되찾아오겠다는 속내가 빤히 보인다.

개혁은 누군가의 손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 심리가 그렇다. 뭔가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욕망이 자신에게 없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보다 더 크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래도 개혁을 이뤄내는 지혜로운 국민과 정당은 있다. 연금 개혁만 놓고 봐도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국민의 노후 보장과 재정 안정성을 동시에 이룬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상충하는 이해를 절충할 수 있는 최적(最適)의 지점을 찾아냈다.

우리 정치권이 만들어낸 공무원연금 개혁안은 최선의 선택이었나. “그렇다”고 대답할 국민은 공무원 가족을 제외하면 많지 않을 것이다. 이해 당사자의 과도한 욕망과 정치권의 대중영합주의가 손잡으면 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 로마 시대의 철학자인 세네카는 “국민의 뜻을 따르기만 하면 국민과 함께 망하고 국민의 뜻을 거스르기만 하면 국민에 의해 망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이 저출산·고령화의 덫에서 빠져나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국민과 지도자 모두 세네카의 충고를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조남규 사회부장


                                                'The dying Seneca' by Peter Paul Rubens

 

 

대법관 출신 인사의 변호사 개업 문제가 법조계의 고질적 병폐로 지목돼온 ‘전관예우’ 관행과 맞물리면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총리 후보자인 안대희 전 대법관이 대형 로펌에서 거액의 수임료를 받았다는 이유로 낙마한 사실은 우리 사회가 전직 대법관의 돈벌이에 부정적이라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대법관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변호사 개업조차 막는 것은 헌법상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적 발상이란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한 하창우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만나 그의 반대 논리를 들어봤다. 변협이 최근 차한성 전 대법관의 변호사 개업신고서를 반려한 조치와 관련해법조계 안팎에서는 ‘지나치다’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그는 오히려 “대법관뿐만 아니라 헌법재판관, 검찰총장, 법무장관 등도 전관예우 적폐가 심하다고 판단되면 변호사 개업을 만류하겠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31일 서울 강남구 대한변협 회장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차한성 전 대법관은 ‘공익 활동을 하기 위해 변호사 개업 신고를 했는데 이를 철회하라는 변협의 취지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항변했다.



“공익 목적의 활동은 변호사 등록만으로 가능하다. 굳이 변호사 개업을 하겠다는 것은 사익을 취하기 위해 사건을 수임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전관예우’ 폐습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면 개업을 제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지난 30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의 전관예우 모습은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은 대법원 상고사건(2심 판결에 대한 불복신청으로 대법원에 제기)을 거의 독점한다. 일반 변호사에게서 상고사건을 의뢰받고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도장값’으로 수천만원을 받는다. 재작년까지 3000만원이었는데 작년에 5000만원까지 올랐다는 소리도 들린다.”

―아무리 대법관 출신 변호사라고 해도 도장값으로 3000만원이면 너무 많지 않나.

“지금은 대법관 출신들이 변호사 개업을 자제하다보니 그러지 않는 몇 사람이 상고사건을 독점한다. 그래서 도장값이 올라가는 것이다. 도장값 수천만원은 최종판결을 앞둔 소송 당사자인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다. 대부분은 주위에서 빌리거나 대출을 받아서 어렵게 마련한다. 최고 법관으로 재직하다 이런 식으로 돈을 버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다. 200만∼300만원의 월급을 받는 젊은 변호사들은 이런 사실 앞에서 절망하고 있다. 후배 법관들은 전직 대법관 도장이 찍힌 사건 앞에서 심리적 부담을 느낀다.”


 

 

―변호사 숫자가 늘면서 전관예우 논란이 더 증폭되고 있는 것 같다.



“로스쿨이생기고 변호사가 양산되면서 등록변호사가 2만명을 훌쩍 넘었다. 광복 이후 변호사가 1만명이 되는 데 100년이 걸렸는데, 2만명 되는 데 8년밖에 안 걸렸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5∼6년이면 3만명 된다. 공급과잉 문제가 심각하다. 지난해 변호사 배출 숫자에서 우리보다 인구가 많은 일본은 1810명인데 우리는 근 2500명이다.”

―변호사 수가 늘면 국민에게 더 많은 법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지 않나.

“그건 이상적인 말이다. 현실적으로는 재작년 로스쿨 출신 변호사시험 합격자 중에 아직 취업 못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수습 때 100만원 받고 일했던 변호사가 정식 채용이 안 돼서 계속 100만원을 받고 있는 경우도 있다.”

―고급 인력인데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제대로 활용할 방안은 없나.”

“지금은 국가소송을 변호사 자격 없는 공무원이 수행하고 있는데 이래서는 국가가 패소할 확률이 높다. 미국에서는 행정부 안에 변호사 일자리가 많다. 국가가 당사자인 소송은 변호사 자격 있는 사람이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행정부 공무원들이 반대한다. 자기네 밥그릇이니까. 노무현정부에서 가동됐던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행정부 내 법무담당관을 변호사 자격이 있는 자로 임명해야 한다는 법안을 발의한 적이 있다. 이 법안은 행정부 법무담당 공무원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해서 무산됐다.”

―변호사들이 너무 좋은 일자리만 찾아다니는 것 아닌가. 공익적 일자리도 있는데.

“실상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월 200만원 준다고 해도 달려올 변호사들이 많다. 실제 변협 관련 재단에는 월 200만원 받고 일하는 변호사가 있다. 지금은 그런 자리도 없다는 게 문제다. 얼마 전에 부산시에서 7급 계약직 변호사를 공채했다. 초창기엔 격이 떨어진다고 해서 7급엔 지원하지 말자는 움직임도 일부 있었지만 지금은 간다. 일자리가 없으니까.”


―행정부에서 변호사 직역을 확대하면 사법시험은 폐지해도 되나.



“사시와 로스쿨은 다른 문제다. 서민의 아들딸이 판검사도 되고 변호사도 될 수 있는 ‘희망의 사다리’를 남겨놔야 한다. 사시 존치는 서민 정책이다. (책상 서랍에서 편지 한묶음을 꺼내보이며) 고등학생들이 내게 보낸 편지들인데, 집안이 가난해서 로스쿨엔 갈 수 없지만 꼭 법조인이 되고 싶다는 내용이 담겨있다.(하 회장은 농부의 아들이다)”

―실력 없는 로스쿨 졸업생이 판사나 검사로 임용됐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인가.

“판검사 임용뿐만 아니라 일류 로펌에 들어간다든가, 사시 1차도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 로스쿨을 거쳐 판사가 된 케이스가 있다. 자격 미달자가 유명 로펌 ×××에 들어가 있고,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로스쿨 출신이 치르는 변호사 시험 합격자는 성적을 공개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로스쿨 출신을 법관으로 채용하고도 누굴 판사로 임용했는지 공개를 안 한다. 이러니 로스쿨 제도 자체의 공정성이 의심받는 것이다. 임용 즉시 공개해야 한다.”

―로스쿨 출신과 사시 출신 사이에 갈등이 심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서로가 상대 탓에 피해를 봤다고 생각한다. 사시 출신은 로스쿨 출신 때문에 자기 일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로스쿨 출신은 반대로 연수원 출신 때문에 제대로 대접을 못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변협이 ‘김영란법’(공직자의 금품수수 및 부정청탁 방지 등에 관한 법률)에 대해 헌법소원을 냈다.



“김영란법 자체는 환영한다. 검사가 벤츠를 받아도 처벌받지 않는 현실은 바꿔야 한다. 그런데 위헌적 요소가 있다. 왜 법 적용 대상에 언론인을 포함하나. 내가 대한변협 신문 발행인이고 변협 공보이사가 편집인이다. 우리처럼 정부 예산 한 푼도 받지 않는 민간 언론이 왜 김영란법의 적용 대상이 되어야 하나. 본래 김영란법은 공직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언론은 공공성이 강한 곳이어서 들어간 것 아닌가.

“그런 논리라면 언론 외에도 들어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시민단체도 들어가야 하고, 의료·법률·공기업도 다 포함해야 한다. 국회의원은 공무원인데 왜 빠졌나. 한마디로 과잉입법이다.”

―‘법관평가제’가 호평을 받고 있다. 어떤 식으로 운용하고 있나.

“사건 담당 변호사가 항목별로 재판장을 평가한다. 판사가 “늙으면 죽어야지”, 이런 발언을 하면 밑에다가 적게 돼 있다. 평가표를 모아서 점수를 매긴다. 지금은 인터넷, 모바일로도 평가한다. 베스트(best) 법관 10명씩 뽑아서 발표한다.”


―워스트(worst) 법관을 공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난해 그러려고 했는데 난리가 났다. 대신 법원이 자체적으로 법관 평가를 인사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3년 전 워스트 법관 한 명은 승진에서 탈락했고 사법연수원 성적이 좋아서 승진 대상이었는데 전보 조치된 사례도 있다. 법관 평가 이후 법정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검사도 사실상 견제받지 않는 권력인데 평가해야 하지 않나.

“사실은 검사 평가가 더 중요하다. 예전에는 검사가 피의자를 조사할 때 구타도 했다. 지금도 헌법에 보장된 피의자 변론권이 침해되고 있다. 인권 침해 요소가 있었는지, 회유·압박이 있었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올해가 영국 귀족들이 왕을 굴복시켜 승인 받은 ‘마그나카르타(대헌장)’ 제정 8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정확히 800년 되던 지난 2월23일 변협 회장에 취임했다. 소명으로 알고 검사 평가도 정착시키겠다.”

대담=조남규 사회부장, 정리=김민순 기자, 사진=이제원 기자

◆ 하창우 회장은

▲1954년 경남 남해 출생 ▲경남고, 서울대 법대 졸업 ▲사시 25회, 변호사 개업(1986) ▲서울지방변호사회 총무이사(1997), 대한변호사협회 공보이사(2001), 대검찰청 검찰개혁자문위원(2003), 법무부 법무행정혁신자문위원(2005), 방송위원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방송심의위원(2006), 서울지방변호사회장(2007),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저서 ‘하창우 변호사의 변호사 길라잡이’


검찰이 모처럼 제대로 된 칼을 빼들었다.

 세계일보가 지난달 26일 포스코건설 비자금 조성 의혹을 단독 보도한 이후, 정부는 전광석화처럼 대응했다. 포스코 수사에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가 실렸다는 얘기도 들린다. 선친의 혼(魂)이 깃든 포항제철(포스코)이 역대 정권마다 복마전을 이뤄왔으니 뜬소문은 아닐 것이다. 언론은 집권 3년차에 접어든 정부가 다목적 포석으로 사정(司正) 정국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해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모두 이번 수사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김진태 검찰총장


 본질은 검찰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대기업 비리, 자원비리, 방산비리 수사가 대한민국 공동체를 좀먹는 ‘거악(巨惡)’과의 싸움이라는 점이다.
 포스코가 조성했다는 그 비자금이라는 것이 어떤 돈인지, 어떻게 쓰였는지, 국민은 이제 검찰 이상으로 잘 알고 있다. 전직 대통령부터 대기업 총수까지 연루됐던 그 숱한 비리 사건들을 지켜봤던 국민은 이제 비자금이라면 물릴 만큼 물렸다. 성실히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에게 수백억, 수천억에 달하는 비자금 보도는 애써 다잡아 놓은 마음 한 귀퉁이를 무너뜨린다. 이럴 때마다 왜 싱가포르가 부정부패 사범을 극형에 처하고 있는지 십분 공감하게 된다. 싱가포르 성공의 열쇠는 사회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예외없는 법치다. 바로 이 지점에 검찰의 존재 의의가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한민국 검찰은 그동안 국민의 편에 서서 정의를 구현해온 조직이란 믿음을 주지 못했다. 기자로서 오랫동안 검찰을 지켜본 경험에 비춰보면 대한민국 검사는 사명감이나 능력에서 다른 어떤 나라의 검사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왜 국민은 검찰을 경원시할까. 이웃 일본 검찰의 역사가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정치 권력과의 관계라면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의 검찰은 정치권력에 예속돼 있어야 정상이다. 그 나라에선 1954년 이른바 ‘조선(造船)의혹 사건’ 당시 정치인 법무상이 검찰총장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발동, 훗날 총리(한국의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실세 정치인에 대한 수사를 무력화시킨 일도 있었다. 그렇지만 일본 검찰은 1976년 정치권력의 압박을 이겨낸 끝에 현직 총리(다나카 가쿠에이)를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시키며 조선의혹 사건의 패배를 설욕했다. 일본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받기까지는 각고의 노력과 분투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 검사 중에도 권력을 좇는 해바라기형 인사들이 없지 않았지만 대다수 검사는 국민의 검찰로 남았다.
 일본 검찰이 사표(師表)로 삼고 있는 이토 시게키 전 검찰총장은 “검사는 소박한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서민이 무엇으로 고통받고, 무엇을 갈구하고 있는지 그것을 피부로 느낄 수 없으면 우수한 검사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쁜 놈, 그중에서도 숨겨진 거악은 절대로 발 뻗고 자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어록도 남겼다. 그는 ‘미스터 검찰’이란 명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여기까지 쓰다 보니 좀 지나쳤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 검찰이라고 왜 이토 같은 검사가 없었을까. 우리가 그런 인재를 끝까지 키워내지 못하고, 검찰 조직 스스로 그들을 지켜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김진태 검찰총장은 행운아다. 법조 출입 기자 시절인 1990년대 중반, 대검 중앙수사부 검사이던 김 총장이 수월 스님의 행적을 담아 펴낸 수필집 ‘달을 듣는 강물’을 읽었다. 그 책은 흔들리며 30대를 살아가던 기자에게 큰 울림을 줬다.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검사로 성장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최근 사회부로 복귀한 뒤에야 김 총장이 ‘고독한 칼잡이’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왠지 그와 어울리는 별칭 같다. 요즘 유행어를 빌리면, 나름 ‘에지(edge)’도 있다. 달을 듣는 강물처럼 살아간다면 좀 고독해져도 견딜 만하지 않을까. 김진태 검찰의 건투를 빈다.

조남규 사회부장

 

*사실 이 칼럼을 쓸 때만 해도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정치권 금품 로비 의혹을 폭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줄은 예상도 못했습니다. 세계일보 특종으로 시작된 검찰의 부패 수사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입니다. 특별수사는 시작은 알 수 있어도 끝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한국일보 정병진 논설고문이 '성완종 리스트' 수사와 관련해서 게재한 칼럼이 저의 칼럼과 일맥 상통하는 것 같아서 소개합니다.

 

한국일보 2015년 4월18일자

[정병진 칼럼] 아이 엠 쏘리, 나는 총리다

‘아이 엠 쏘리(I’m Sorry)’라는 컴퓨터게임을 새삼 기억한다. 1970년대 후반이었으니 당시 유행했던 ‘벽돌 깨기’나 ‘갤러그’ 수준이었다. 주인공이 미로와 같은 길을 돌아다니며 금괴를 훔쳐서 집에 쌓는 게임이다. 통나무 같은 장애물이 나타나면 피하거나 뛰어넘어야 하고, 철문이 가로막으면 주먹으로 쳐부수고 나가야 한다. 훔치는 금괴의 양에 따라 점수가 높아지고, 주인공의 집은 점점 더 화려해 진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 게임은 일제(日製)였는데,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까지 유행이 번졌다. 게임의 원래 제목은 ‘나는 총리다(私は總理)’였으나 국제적으로 유행하는 과정에서 총리의 일본 발음이 ‘쏘리(そうリ)’인 까닭에 ‘아이 엠 쏘리’로 바뀌었다고 했다. 당시 일본을 뒤집어 놓았던 ‘록히드 뇌물수수 사건’을 패러디 한 것이었다니, 일본 국민의 자괴와 분노를 짐작할 만하다. 일본 국민 전체가 국제사회를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했던 셈이다.

1976년 미국에서 록히드 항공사가 많은 국가의 유력한 권력자들에게 뇌물을 뿌렸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독일과 네덜란드 등 유럽국가 인사들도 포함돼 있었으나 일본에서 유난히 큰 사건으로 비화한 것은 뇌물을 받은 사람이 당대 최고의 권력자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英)였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사건이 폭로되었을 때 일본 총리는 미키 다케오(三木武夫)였지만, 일본정치의 특성 때문에 당시 국민들이 느끼는 실질적 최고 권력자는 다나카 전 총리였다. 다나카 전 총리는 구속됐다.

우리 표현으로 ‘현직 왕(王)총리’를 구속한 일본 검찰은 이후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강직하게 본분을 다하는 검찰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당시 검찰총장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한 마디의 말로써 검찰조직의 방패막이가 돼 주었고, 수사팀장 검사장은 “수사가 난관에 부딪힌다는 이유로 망설인다면 앞으로 20년 동안 우리 검찰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사건이 검찰의 손을 떠난 뒤 정치적 마무리가 흐지부지 됐던 것은 일본의 정치구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구속된 지 한달 만에 보석금을 내고 출소했으며 이후에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재판은 지지부진했고 판결은 미뤄졌다. 1993년 12월 그가 사망한 이후 상고심이 재개됐고, 14개월 뒤인 95년 2월에야 사망한 사람에게 수뢰혐의를 최종 인정했다. 하지만 ‘다나카-록히드 사건’은 법과 원칙을 지킨 일본 검찰의 위상과 ‘아이 엠 쏘리’라는 일본 국민의 각성과 사과를 전 세계에 남겼다.

당시 일본 검찰이 ‘왕총리’를 잡아들일 수 있었던 배경은 두 가지 정도로 알려져 있다. 우선 들끓었던 민심이었다. 국민 모두가 ‘국제적으로 창피하여 고개를 들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나는 총리다’ 패러디가 일본 열도를 휘저었던 이유다. 다른 하나는 당시 같은 당 소속의 미키 총리가 수뢰사건 수사를 완전히 방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건의 모든 증거와 증언들이 미국에 있었고, 길거리에서 승용차끼리 접촉해 돈을 주고받았다는 정황 정도가 애초 드러난 단서였다. 검찰로서는 ‘수사가 난관에 부딪혀 망설여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분명했다. 하지만 검찰은 ‘앞으로 20년 동안 잃게 될 국민의 신뢰’를 염려했기에 최고 권력에 대한 수사의 끈을 다잡아 갔다.

30여년 전 ‘다나카-록히드 사건’을 다시 들춰본 것은 지금의 상황에서 너무나 뚜렷한 데자뷰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국민들의 마음은 ‘창피해 죽겠다’는 자괴감을 넘어 ‘미워 죽겠다’는 증오감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같은 당에서도 수사 방치(?) 수준을 넘어 적극적인 협력도 아끼지 않을 태세다. 수사 대상도 일본 ‘왕총리’에 비하면 덜 껄끄럽고, 증거나 증언, 정황도 훨씬 풍부해 보인다. 현재 우리 검찰의 입장이 1970년대 일본 검찰의 입장보다 여러 면에서 여건이 좋다는 얘기다. 우리 검찰의 분발을 기대한다.

정병진 상임고문 bjjung@hk.co.kr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심훈, ‘그날이 오면’)
광복은 부활이었다. 자주 독립의 희망이 삼천리 방방곡곡에 흘러 넘쳤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냉전의 대리 전쟁터로 변했다. 아름다운 우리 강토는 쑥대밭이 됐다.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났다. 그렇게 70년이 속절없이 흘렀다. 광복의 기쁨에 더덩실 춤을 췄던, 전쟁과 분단의 세월을 온몸으로 견뎌낸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고 있다. 광복 70년의 의미와 교훈을 얻기 위해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만났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의 손자인 이종찬(79) 전 국정원장은 “해방 정국에서 백범 김구 선생과 우남 이승만 박사가 협력했다면 지금처럼 보혁 갈등이 심화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못내 아쉬워했다.

이 전 원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이 전 원장의 작은할아버지)의 끊임없는 설득 덕에 백범은 어느 정도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할 마음을 굳혔다”는 비사를 공개했다. 그는 “이시영 선생은 ‘내가 부통령직을 맡고 있지만 나이(80)가 너무 많다. 이제 당신이 하라’는 식으로 백범을 설득했다. 그러던 와중에 백범이 암살당했다. 안타까울 따름이다”고 말했다.

이 전 원장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데다 임정 요인들이 중국에서 귀국했을 때 미국 유학파들을 중심으로 한민당이 조직돼 그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면서 “하지만 임시정부에게는 국민적 지지가 있었던 만큼 이를 바탕으로 한민당과 화합을 하는 것이 옳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데 백범은 다들 알다시피 외골수였다. 백범 입장에서는 귀국하자마자 ‘일제 때 해먹던 놈들이 또 해먹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백범과 한민당은 틀어졌다”면서 “백범은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 없이 우국충정만 있었다”고 말했다. 그 시점에 이시영의 설득으로 백범이 남한 단독정부에 참여하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암살당했다는 것이다. 김구를 임시정부 주석으로 추대한 이시영은 김구의 멘토 같은 존재다. 이 전 원장은 “김대중정부 시절 김 전 대통령과도 해방 정국에 대한 토론을 많이 했는데 김 전 대통령도 ‘당시의 정치인이었다면 백범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라고 권했을 것’이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이 전 원장과의 인터뷰는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우당기념관 접견실에서 진행됐다.

김대중정부의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79) 우당장학회 이사장은 광복을 중국 상하이에서 맞았다. 그의 조부인 이회영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직후인 1910년 12월 아들 이규학(李圭鶴·이 전 원장 부친) 등 가솔 60여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회영 일족은 만주 등을 거쳐 1919년 상하이로 거처를 옮겼고 1936년 4월29일 그곳에서 이 전 원장이 태어났다. 이 전 원장은 지금도 자신을 농담조로 ‘상하이방(上海幇)’이라고 부른다. 그는 상하이에서 광복의 소식을 들었다. 이 전 원장 가족은 46년 5월 꿈에 그리던 조국에 돌아왔다. “배가 상하이 부두를 지나 서해를 건너 제주 근방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산이란 것을 봤다. 그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 전 원장은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봤으며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정부의 주역으로 활동하며 현대사의 산 증인이 됐다.

―광복을 어떻게 맞았나.


“미국이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1945년 8월9일)한 다음 날이었다. 집에 돌아와 잠시 머물었던 아버님(이규학)을 누가 찾아왔다. 꼭 베트남의 호찌민처럼 빼빼 마른 사람이었다. 그분이 바로 정화암(鄭華岩) 선생이었다. 정 선생은 항일전선에서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많은 일본 고위간부와 친일파를 처단한 대담한 분이었다. 그러나 외모로는 가냘프기 짝이 없는 분이었다. 아버님과 정 선생은 골방에 들어앉아 무언가 숙의를 했다. 그때 이미 아버님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고문 끝에 청각을 거의 상실한 몸이었다. 그러므로 자연 필답으로 밀담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두어 시간의 대화가 끝난 후 정 선생은 바람처럼 훌쩍 떠났고, 아버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자! 이제 우리도 곧 고국에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정 선생은 이미 일본의 패망을 알고 아버님과 여러 가지 사후 문제를 논의한 것이었다. 내가 골방에 들어가 보니 재떨이에 종이를 태운 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정 선생이 아버님을 찾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후 며칠 안 되어 목 매도록 기다렸던 일본의 패망의 날이 왔다. 나의 부모님은 1910년에 중국에 망명한 이래 내내 객지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조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국이었다.”

 

1945년 11월5일 환국 길에 상하이를 찾은 임시정부 요인들. 당시 아홉살이던 이 전 원장(원 안) 뒤로 백범 김구
―광복 직후 상하이의 풍경은.


“일본군이 물러나니 제일 먼저 한인교민회가 조직됐다. 하지만 교민회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없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일단 돈이 없지 않나. 쫓겨 다니다 보니 인맥도 넓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에 붙어서 장사를 하고 심지어 아편을 팔던 사람들까지도 앞장서서 한인교민회를 만들어 돈을 내는 등 표변했다. 아버님은 ‘그 사람들끼리 노는 것’이라며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가족도 나름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만끽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집에 많이 몰려왔고 아버지의 즐거워하는 모습도 자주 보여 ‘이게 해방이구나’ 싶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광복군 선견대가 상하이에 들어왔다. 광복군 선견대는 기존 교민회를 인정하지 않았고 새로 교민회가 구성됐다. 여기에는 아버님도 참여했다.”

 

1974년 주영 대사관 참사관 시절, 부인 윤장순씨와 함께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 길에 상하이에 들렀다. 기억나는 일들을 얘기해 달라.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을 다시 찾았지만 국제 정세는 우리에게 즉각적인 귀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버님은 끊임없이 충칭의 임시정부와 통신을 하였지만 사후 정리할 것이 있으므로 귀국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뿐이었다. 1945년 10월이나 되어서 임시정부 요인 일행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배려로 그의 전용기편으로 상하이까지 왔다. 상하이에 있었던 일가들, 교포들은 밤을 새워서 태극기를 만들고 환영 준비에 바빴다. 상하이 비행장에서 우리는 임정요인 일행을 맞이했다. 나는 당시 백범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작은 할아버지인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유림 등 여러 선생들을 만났다. 임정 요인들이 상하이에 머물다가 마지막으로 작별하고 조국으로 돌아가시는 전날 저녁 가족들은 모두 모였다. 당시 김구 주석의 연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김 주석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대통령 나사복(羅斯福·루스벨트)이가 영국 수상 구길(球吉·처칠)이를 만나서 조선독립을 확약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젊은이들이 모두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김구 주석이 영어를 모르니깐 미국 대통령이나 영국의 수상 이름을 한국식으로 부른 것이 우습다는 것이었다.

 

1945년 11월5일 상하이 공항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을 마중나간 이종찬 전 국정원장(앞줄 오른쪽, 왼손에 태극기를 든 소년) 일가. 후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는 이시영 선생(앞줄, 중절모에 지팡이)이 아들과 조카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고 있다.
우당기념관 제공
김구 주석은 희망에 찬 말을 남겼다. ‘이제 여러분들이 조국에 돌아오면 옛날 조국이 아니라 민주적인 나라, 행복한 나라가 여러분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우레 같은 박수로 그분의 연설을 환영했었다. 김 주석의 주변에는 쟁쟁한 요인들이 모두 배석했었다. 30년간 임시정부를 지키신 이분들이야말로 장차 한국을 지도해 나가실 어른들이고, 모두가 하나같이 내 눈에는 바위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불과 5년 후에 대부분이 북한군에 의하여 납북되어 비명에 가실 줄이야….


 

1986년 국회 외무위원 시절 참석한 삼일절 행사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 이후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미국이 충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땐 비행기가 미군 비행기밖에 없었기 때문에 충칭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임시정부 자격으로 활동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라고 했다. 결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가 왜곡된 첫 번째 단서라고 볼 수 있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교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이 김포 비행장에서 고국 땅을 밟았을 때 환영객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1988년 이시영 부통령 동상 옆에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군은 연합군 자격으로 참전하지 않아 임시정부가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분석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광복군을 조직해서 대일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훈련하는 도중 원자폭탄으로 전쟁이 일찍 끝났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국내 진공작전을 펼칠 수 있었지만 그 전에 종전이 돼버렸다. 그래서 미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들어와서도 푸대접을 받았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우당기념관 집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중국 상하이에서 맞은 광복의 순간을 회고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해방 정국의 이승만 박사를 평가한다면.


“정치적 안목과 정보력에 있어서는 역대 대통령을 통틀어 이승만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정치고문인 미국의 로버트 올리버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국제정세를 파악했다. 올리버는 편지를 통해 소련, 북한의 동향을 상세히 알려줬다. 당시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진주하자마자 인민위원회를 조직해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정부를 세우지 않았다면서도 사실상 정부가 할 일을 한 셈이다. 이때 이승만은 ‘통일이 되기엔 이미 늦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주장한 ‘정읍 발언’도 이 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현재 이 박사가 정권 욕심 때문에 정읍 발언을 했다고 매도하는 말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시점에서 ‘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위에서 밀고 내려오겠구나’ 하는 경계심이 낳은 발언이라고 본다.”

―백범과 이승만이 화합했더라도 분단은 불가피하지 않았나.

“그렇다고 본다. 이미 소련이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세우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불가피했을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보혁 갈등은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았을까. 요즘 백범 노선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그의 노선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당시 백범이 시도한 남북협상은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공산주의 노선과는 이미 타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김일성이 백범을 이용하려 했다고 보는 게 맞다.”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와 함께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바로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승만은 ‘정부 수립 대통령’이지 건국 대통령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국회의장으로 직접 대한민국 국회 개회사를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리 민국은 기미년(1919년)부터 시작됐다. 민국 연호는 기미년으로부터 기산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지만 최근 나오는 ‘건국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임시정부부터 따진 게 아니지 않나. 따라서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를 한다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어떤 뜻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는지 모르고 주장하는 것이다. 국회 개회사뿐만 아니라 관보 등에서도 이승만은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봤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초 “친일파 주도로 이뤄진 대한민국 건국으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불의(不義)가 정의(正義)를 눌러온 역사”라고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그런 평가에 100% 동의하지 않는다. 김 전 대통령과는 이 주제로 놓고 토론을 많이 했는데 김 전 대통령도 ‘당시의 정치인이었다면 백범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라고 권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중국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오쩌둥(毛澤東)을 평가한 ‘공칠과삼(功七過三)’을 말하고 싶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초기의 이승만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인의 장막에 둘러싸이고 권력에 취하면서 말로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분명 공도 무시할 수 없다.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나는 박정희를 나쁘게 보지 않는다. 유신 등의 엄혹한 시절이 있었지만 공도 따져야 한다. 이후의 권력들도 마찬가지다. 권력뿐 아니다. 모든 역사 평가를 편협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파 인명사전이 4000명 이상을 친일파로 분류한 것은 과하다는 생각이다. 참고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친일파 명단은 7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친일파 기준의 적용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당시의 계급에 따라 선을 긋는 것은 역시 잘못된 일이다. 행적을 평가해서 친일파 여부를 가려야 한다. ”

―친일파의 범위를 너무 넓게 잡았다는 의미인가.

“행동이 얼마나 악질적이었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의암 장지연 선생 같은 분까지 친일파에 포함하면 민족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무조건 친일 명단에 넣고 본다면 ‘독립운동가가 소수고 친일파가 많았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게다가 일본이 이것을 두고 ‘친일파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한국도 식민지배를 바랐다는 뜻이 아니냐’고 역논리를 펼 수도 있다.”

 

1992년 한·영의원친선협회 회장 시절 영국 찰스 왕세자로부터 훈장을 수여받는 장면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방식을 놓고 외교독립론, 무장투쟁론, 실력양성론이 충돌했다.


“세 가지 노선이 서로 이질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특히 외교독립, 무장투쟁 노선은 같이했어야 옳았다. 예를 들면 아일랜드 독립운동은 IRA(아일랜드공화국군)와 신페인당이 함께 움직였다. 신페인은 IRA의 정당조직으로 외교교섭과 무장투쟁을 병행했다. 무장 없이 외교만 하자는 것도 문제고, 외교로 무엇이 되겠나 하면서 경시하는 입장도 문제다. 그러다 보니 양쪽 노선 모두 아무 것도 안 됐다. 외교와 무장이라는 두 개의 바퀴를 만들어 같이 돌렸어야 했다. 실력 양성도 중요하다. 다만 실력 양성을 친일의 변론으로 삼는 것은 안 된다. 주체적으로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어야 한다. 실력 양성이 잘못하면 일제와 협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당시 셋 모두를 적절히 배합하는 리더십이 없었다는 점이 아쉽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소회는.

“올해는 광복회가 생긴 지 50년째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최근 광복회 50주년 행사가 열렸다. 광복 70주년인데 광복회 창설 50주년이라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그 20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나. 해방되고 3년 동안 미 군정의 통치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전쟁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광복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해야 할 인물들이 학살당하거나 끌려간 뒤 이름 없는 산하에 묻혔다. 이런 비극을 바로잡으려면 역사가 바로 서야 한다. 독립운동을 했던 위인들은 대부분 삼대가 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중에 나라가 다시 위기에 빠지면 누가 저항하려 하겠나. 광복회가 할 일은 이런 절망을 이겨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후손들에게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는 것이 먼저다. 친일파 후손들은 대한민국이 1948년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1919년 3·1 독립선언을 통해 최초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한다고 밝혔고 그 선언이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이 의지를 이어나가는 것을 광복회의 지상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6형제 가족 40여명 다함께 독립운동 위해 해외로 망명…‘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

 

“동서 역사상 국가가 망할 때 나라를 떠난 충신·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가족 40여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일제히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6형제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이관직은 ‘우당 이회영(사진) 실기(實記)’에서 우당 일가의 만주행을 극찬했다. 백사 이항복을 비롯해 영의정만 셋을 배출한 이회영 가문은 삼한갑족(三韓甲族)이었다. 나라가 멸망하고 이른바 권문세가 다수가 일제의 작위를 받고 친일파가 되었을 때 이회영 일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해외로 망명했다. 서양식으로 표현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다.

이회영 형제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사 비용을 위해 경작하던 위토까지 처분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달 초 덕수궁 중명전에서 열린 ‘우당 이회영과 6형제’ 전시회 특별강연에서 “우당 가문은 현재 명동 인근에 1만여평 토지를 보유했다. 굳이 계량해 보자면 오늘날 2조원은 넘는다”며 “그 외에도 개성, 양주 등 전국에 소유한 토지 266만여 평과 드러나지 않은 재산의 가치를 합하면 10조원에서 수백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모두 썼다. “우당 집의 밥을 얻어먹지 않은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우당의 6형제 중 다섯째 이시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복을 보지 못하고 중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대소가와 권속 6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넜지만 해방을 맞아 고국 땅을 밟은 이는 20명 남짓이었다.

 

대담=조남규 사회부장, 정리=이우중 기자

 

*아래는 조선일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가 2017년 8월31일자 조선일보에 '만주로 떠난 이회영 형제와 투사의 아내 이은숙'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글.  

[박종인의 땅의 歷史] 만주로 갔느니라… 목숨을 바쳤기에 떳떳했느니라

이은숙의 혼례

1908년 10월 20일 서울 명동 상동교회에서 열아홉 살 규수 이은숙이 마흔한 살 먹은 사내 이회영과 서양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첫 아내와 사별한 이회영은 두 번째 결혼이다. 평안도 암행어사와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넷째 아들이다. 2년 전 별세한 고관대작 가문에 출가했으니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비단옷 입고 살겠지, 라고 남들은 생각했다.

2년 뒤 이회영 집안은 물론 시아주버니 건영과 석영과 철영, 시동생 시영과 호영까지 여섯 형제 집안이 문중 땅 수백만 평을 일시에 다 팔고서 한꺼번에 만주로 떠났다. 식솔이 예순 명에 달했고 마차가 열 대가 넘었다. 1910년 경술년 12월 30일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고 넉 달이 지난 엄동설한 동지섣달이었다. 단순한 이사 혹은 이민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을 위한 집단 망명이었다.

경술국치와 집단망명

1910년 8월 29일 이름만 남아 있던 나라, 대한제국이 이름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많은 고관대작과 지식인은 일본에 빌붙어 권세를 얻었고, 또 많은 사람들은 투쟁을 택했다. 민영환처럼 1905년 을사늑약 때 자결한 사람도 있었고 매천 황현처럼 경술년 국치 때 자결한 사람도 있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한편에는 우당 이회영의 묘가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한편에는 우당 이회영의 묘가 있다. 아내 이은숙과 합장이라고 새겨져 있지만, 이회영의 유해는 없다. 허묘다. 이회영은 전재산을 털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인 여섯형제의 넷째다. /박종인 기자
'스스로 죽어서 일본을 이롭게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지식인들은 망명을 택했다. 을사늑약 때 거리에서 바위에 머리를 찧어 자살 미수에 그쳤던 이상설이 그랬고(백범일지), 경상도 안동의 지사 석주 이상룡이 그랬다. 이상룡은 궁궐 같은 99칸짜리 임청각을 버리고 온 가족이 만주로 떠났다. 이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총독부 요시찰 인물, 불령선인(不逞鮮人) 목록에 올랐다. '푸테이(不逞)'는 '고집 세고 반항하는 놈'이라는 뜻이다.

대신 '착한' 조선인에게는 상을 주었다. 합방에 공헌한 고관대작들에게는 귀족 작위와 돈을 내려주었다. 지역 양반들에게도 효자, 효부상을 듬뿍 내렸다. 온 나라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재인용). 고관대작 가문에 갑부였던 이회영 형제는, 망명을 택했다.

이회영 형제의 망명

'사람들은 우리를 공신의 후예라 한다. 괴변으로 한반도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명문 호족으로서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지 않고 구차히 생명을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왜적과 혈투하시던 조상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하니, 여러 형님과 아우님들은 따라주시기를 바라노라.' 형제들을 모아놓고 이회영이 이리 말했다.(이관직, 〈우당 이회영 실기〉) 이회영 형제는 조선 초 정승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다. 모두가 그를 따랐다.

우당 이회영(1867~1932).
우당 이회영(1867~1932).
먼 친척 백부인 이유원에게 양자로 간 둘째 이석영은 갑부였다. '양주 가오실에 별장이 있는데, 서울에서 거리가 80리였다. 80리 왕래하는 길이 모두 그의 밭두렁이라 다른 사람 땅은 단 한 평도 밟지 않고 다녔다.'(황현, 〈매천야록〉)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왕현종에 따르면 남양주 화도읍 가곡리에 있던 땅은 640정보, 192만 평에 달했다. 서울 명동에도 형제들 땅이 산재했다. 1960년대 한 조사에서 600억원에 이른다는 추정이 나온 적이 있다.

그 땅을 팔고, 못 판 땅은 버리고서 이 갑부 집안 6형제가 만주벌 북풍 속으로 떠난 것이다. 월남 이상재가 이렇게 말했다. "6형제 전 가족이 한마음으로 결의했으니, 동포의 모범이 되리라."(우당 이회영 실기)

처분하지 못한 명동 땅은 총독부 토지조사를 거쳐 남의 땅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주소로 경기도 경성부 황금정 2목 164번지 591평도 이 형제들 땅이었다. 현재 을지로 2가 164번지 부근이다. 서울 YWCA회관 북쪽이다. 회관 소공원에는 이회영의 흉상이 서 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독립운동에 조직과 자금은 필수다. 이회영 형제가 바로 그 일을 했다. 형제는 이듬해 4월 안동 선비 석주 이상룡과 함께 유하현 삼원보에 경학사를 설립했다. 밭을 갈아 생산을 하고(耕) 교육을 하며(學) 군사력을 키우는(武) 결사체였다. 사장은 이상룡, 내무부장은 이회영, 재무부장은 오랜 동지인 이동녕이 맡았다. 이상룡이 쓴 취지문은 이렇다. '한 삼태기 흙이 쌓여 태산을 이룬다. 힘을 축적해서 끝장에 대비할 것이다.'(우당 이회영 실기)

그리고 이듬해 여름, 이석영의 자금을 털어 구입한 인근 합니하 산속에 본격적인 독립운동 교육기관이 설립되니, 8년에 걸쳐 3500명에 이르는 항일투쟁 지도자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같은 만주 항일투쟁의 불꽃을 지핀 운동 기지였다. 교장은 셋째형 이철영이 맡았다. 3·1 운동 이후에는 해마다 입교를 원하는 조선 청년이 600명에 이르렀다. 3년 만에 자금이 바닥났다.

독립투쟁의 중심에서

신흥학교 설립 후 자금난에 빠진 이회영은 1913년 서울에서 돈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다 1918년 이회영은 왕실 시종 이교영을 통해 고종 망명을 기도한다. 일본의 귀족 작위를 거부했던 전 내부대신 민영달이 5만원을 댔다. 동생 이시영이 이 돈으로 북경에 고종 거처를 마련했다. 그런데 이듬해 1월 20일 고종이 급서했다. 식혜를 들이켜고 죽었다고 했다. 독살당했다는 말이 돌았다. 그날 왕실 당직자는 이완용이었다. 훗날 사학자 이증복은 조선 남작 작위를 받은 한창수와 시종관 한상학을 독살범으로 지목했다. 또 다른 친일파 윤덕영이라는 설도 있다.

3·1운동 직전 이회영은 중국으로 돌아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회영은 "자리다툼에 분규가 끝이 없을 것이니" 행정조직이 아닌 투쟁본부를 만들자고 했다. 동생 이시영은 재무총장으로 임정에 참여했고 이회영은 무장투쟁노선을 걸었다.

이후 북경 자금성 북쪽 이회영의 집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로 북적거리는 사랑방이 됐다. '그 당시 국내에서 마음을 품은 인물 즉 청년들은 북경에 오면 반드시 나의 부친을 뵙게 되고 대개 우리 집에 거주하게 됐다.'(이회영의 아들, 독립지사 이규창, 〈운명의 여신(餘燼, '남은 재'〉) 이규창이 기억하는 사람들을 적으면 그대로 한국 독립운동 인물사가 된다.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 노선사가 된다. 민족주의,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모든 노선이 이회영의 북경 거처를 거쳐 나뉘었다.(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간난과 고초, 죽음

이회영이 최후에 입고 있던 옷.
이회영이 최후에 입고 있던 옷.
백여 명의 대가족을 이끄는 모습은 만주 원주민들에게는 장관이었다. 중국 육필 마차가 거의 백 차가 되니 대부호의 이동이다. 부호의 호화로운 행렬쯤으로 짐작했으리라.(이규창, 〈운명의 여신〉)

대의를 좇는 남정네를 따라가니, 여자들 간난과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회영이 서울로 간 사이 이은숙은 마적 떼에게 총을 맞고 6개월 된 아들 규창은 얼굴을 화롯불에 크게 데였다. 그 몸으로 이은숙은 큰딸 규숙과 젖먹이를 안고 업고서 신흥학교 학생들 밥을 지었다. '죽을 쑤는 때면 상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이은숙, 〈서간도시종기〉)

가난을 피해, 대의를 좇아 대륙 곳곳으로 흩어진 형제들은 고단하게 살고 고단하게 죽었다. 자금을 책임졌던 이석영은 굶어 죽었다. 맏형 건영도 병사했다. 신흥학교장 셋째 철영도 병사했다. 여섯째 호영은 아들과 함께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 아들 대도 대부분 해방 전 중국에서 죽었다.

이회영의 두 딸 규숙과 현숙은 고아원에서 산 적도 있었다. 아들 규창은 함께 살던 단재 신채호가 준 옷을 뜯어 만든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1925년 아내 이은숙이 돈을 벌기 위해 혼자 조선으로 돌아갔다. 고무신 공장 급료와 옷 수선으로 번 돈을 보내면, 그 돈으로 가족들이 연명했다. 삶은 매우, 아주 매우 신산하였다. '귀한 집 부인들이 이 같은 고생은 듣지도 못했을 것이어늘, 그러나 여필종부의 본의를 지키는 것이다.'(서간도시종기) 그러나 그해 작별한 남편을 이은숙은 영영 보지 못한다.

이회영의 죽음

이회영은 백정기, 정화암 등과 의기투합해 남화연맹을 창설했다. 요인 암살이 주된 임무였다. 1932년 11월, 윤봉길 의사 의거 후 투쟁의 중심지로 다시 만주를 택한 이회영은 상해에서 대련 행 여객선에 올랐다. 그런데 대련 항구에서 이회영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11월 17일 일본 경찰은 심문 도중 이회영이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시신 인수를 위해 찾아간 딸 규숙은 혈흔이 낭자한 얼굴과 역시 혈흔이 묻은 옷을 보았다. 동지들은 이회영이 고문사했다고 확신했고, 이회영을 밀고한 사람이 있다고 확신했고, 찾아냈고, 처단했다.

이회영의 손자인 우당장학회 회장 이종찬(전 국정원장)이 말했다. "밀고자는, 우리 할아버지의 조카 이규서다." 이회영의 아들 규창은 이석영의 둘째 아들인 사촌형 규서를 동지들에게 고발했고, 동지들은 이규서와 공범 연충렬로부터 자백을 받고 처단했다. 이종찬이 말했다. "집안 어른들은 창피하니 함구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역사는 떳떳해야 한다. 그때 우리 우국지사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 속에 투쟁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증거니까."
형제 가운데 다섯째인 이시영만 살아남아 해방을 맞았다. 이시영은 1945년 11월 9일 다른 임정 요원들과 상해 비행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눈물을 닦았다. 노혁명가, 노투쟁가가 울었다. 1948년 이시영은 대한 민국 초대 부통령이 됐다가 6·25전쟁 와중인 1951년 사퇴했다. 이시영은 서울 수유동 애국순국선열묘역에 묻혀 있다. 서울 신교동에 우당기념관이 있다.1946년 귀국한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1966년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를 탈고했다. 첫 문장은 이러했다. '이영구의 과거나 현재는 모두가 몽환(夢幻)이라.' 이영구는 남편 이회영이 지어준 이름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31/20170831000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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