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이뤄지는 일들이 있다. 우연찮은 기회에 머릿 속에서만 맴돌던 생각이 현실이 되기도 한다. 이달 초 관훈클럽 해외문화유적 답사팀의 일원으로 다녀온 러시아 이르쿠츠크, 바이칼 호 여행이 그랬다.

연초 마포 거리에서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과 조우했다.

 

김 전 위원장과는 과거 금융감독위 출입 기자 시절에 인연을 맺은 뒤 오래 격조했다. 금융위원장 퇴임 이후 우리 민족의 상고사(上古史) 탐구에 나선 김 전 위원장과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필자는 고조선-국사책에서 배운 부족사회 고조선이 아니라 BC 2333년 건국돼 만주 일대를 호령했다는 고대국가 고조선-과 다시 만나게 됐다.

그는 ‘김석동의 대한민국 경제와 한민족 DNA'라는 제목의 저서를 통해 한국인이 과거 유라시아 대초원을 무대로 활약했던 기마유목민의 DNA를 가지고 있으며 그 DNA는 엄격한 자연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용감하고 동시에 유능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들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인간유형에서 유래한다는 것, 이 DNA가 한국을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굴지의 중견국으로 성장시켰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 기마유목민이 주축이 된 기마군단은 약 2500년간 유라시아 스텝지역에서 동서양에 걸쳐 거대국가를 건설한 주역인데 이들은 고대로부터 한민족과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민족이 세운 고조선은 이들 보다 훨씬 앞서 유라시아 스텝 동부 지역에 기념비적인 고대 국가를 건설하고 동북아를 장악하는 대역사를 시작했고 여기서부터 스키타이와 돌궐, 흉노, 위구르, 몽골 같은 유라시아 기마민족의 역사가 태동됐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의 견해는 재야 역사학계의 ‘대(大) 고조선론’과 맥을 같이하지만 고조선의 영역을 평양 대동강 주변으로 보는 강단(대학) 역사학계의 ‘소(小) 고조선론’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바이칼을 한민족이 시작된 곳으로 적고있다.

최근 재야사학 연합체가 출범하면서 상고사 논쟁이 다시 불붙기 시작, 필자는 그 논쟁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대 고조선론’이 사실로 확인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여하튼 김 전 위원장은 바로 이 기마민족이 지배한 영역을 두루 돌아보고 이들의 역사를 재조명하면서 한민족의 성장DNA를 탐구했는데 그의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필자도 후일 기회가 되면 그 지역을 한 번 돌아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관훈클럽이 올해 문화유적 답사지로 바이칼을 선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심 깜짝 놀랐던 것은 바이칼 호의 정령이 된 먼 조상이 필자의 생각에 응답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바이칼 호 주변에서 살고 있는 몽골계 브리야트인들은 한민족과 같은 알타이어계 언어를 사용한다. 브리야트족은 바이칼의 브리야트 공화국을 비롯해 러시아에 약 45만 명, 몽골 헨티주,내몽골 등에 약 5만 명이 살고 있다. 칭기즈칸의 어머니가 브리야트족이다.

서울대 의대 이홍규 교수에 따르면 추위에 적응된 북방계 몽골리안의 체질이 1만 년 전 빙하기 때 시베리아에서 형성됐다면서 한민족의 주류는 바이칼 호에서 온 북방계 아시아인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상고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은 브리야트인들도 자신들과 뿌리가 같은 코리족의 일파가 동쪽으로 가서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믿고 있다고 전했다. 그런 얘기를 듣고 봐서 그런지 바이칼 호 인근 브리야트족 거주지에서 만난 민속박물관 남녀 단원들이 한결 정겹게 느껴졌다. 



 

 

관광객에게 민속 공연을 보여주는 브리야트인들

 

단원들이 선보인 브리야트 씨름은 우리 것과 흡사했다. ‘선조의 영’이라는 제목의 브리야트 가무극은 한국의 전래 동화인 ‘나무꾼과 선녀’와 줄거리가 똑같다고 한다.

브리야트인들의 샤먼(shaman)신앙은 한민족 고유의 무속 신앙과 통한다. 구 소련 시절 샤먼이 공산주의 사상에 배치된다는 이유로 샤먼 수만 명을 처형하는 바람에 살아있는 샤먼은 더 이상 만나보기 힘들다고 안내인은 설명했다. 샤먼은 사라졌지만 바이칼 호 주변 곳곳에서 자작나무에 흰색 광목이 매여있는 ‘신목’(神木)을 볼 수 있다고 안내인은 전했다. 나무에 천을 매단 뒤 소원을 비는 행태는 우리네 풍습과 다르지 않다. 이러니 바이칼이 한민족의 시원(始原)이라는 얘기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브라야트족 민속박물관에 전시된 샤먼 모형

 

지도를 펼쳐보면 바이칼 호는 동시베리아 지역에 초승달 모양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바이칼이 '푸른 눈'(blue eye) 모양으로 보인다고 한다. 


 

필자가 여장을 푼 바이칼호가 바라보이는 호텔

 

바이칼호 위로 빼꼼이 고개를 내민 바위

바이칼 호를 배경을 선 필자



저지대 분지 지역이어서 주변의 물들이 흘러 들어와 호수를 이룬다. 바이칼 호로 유입되는 하천은 모두 336개에 달하지만 바이칼 호에서 빠져나가는 하천은 앙가라 강이 유일하다. 앙가라 강은 예니세이 강과 합쳐져서 북극해로 흘러 들어간다. 앙가라강 상류에는 ‘샤먼 바위’가 있다. 예전에는 강 위로 우뚝 솟아있었으나 앙가라 강에 댐이 생기면서 수위가 높아져서 지금은 윗부분만 물 위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바이칼 호에는 22개의 섬이 있다. 그 중 가장 큰 섬이 알혼섬이다. 알혼섬의 상징인 '부르한 바위'는 최초의 샤먼 의식이 이뤄진 곳으로 유명하다. 북방 기마민족 고유의 전통인 샤머니즘의 시원이다. 브리야트족이 신성시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공주’(公主)라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의 여행사 현지 지사장은 바이칼 호와 샤먼 바위, 앙가라 강, 예니세이 강에 얽힌 무시무시한 전설을 들려줬다. 아버지 바이칼에게는 336명의 아들과 외동딸 앙가라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외동딸을 이르쿠트(이르쿠츠크를 흐르는 강)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예니세이를 사랑한 앙가라가 집에서 나와 도망치려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앙가라를 향해 바위를 던졌는데 그 바위에 맞은 앙가라가 죽어가면서 예니세이를 생각하며 흘린 눈물이 앙가라 강을 이뤄 예니세이 강을 향해 흐른다는 것이다.  


바이칼은 타타르어로 ‘풍요로운 호수’라는 뜻이다. 남한 면적의 3분의 1인 3만1500제곱킬로미터 크기인 바이칼 호에는 2500여종의 동식물이 서식한다. 절반 이상이 바이칼 호의 고유종이라고 한다. 전 세계 담수의 20%를 담고있는 바이칼호의 최대 수심은 1742m에 달한다. 

바이칼 호 생태학 박물관에는 진기한 어족-그 중 민물에 사는 유일한 물개인 ‘네르파’는 복어처럼 생긴 물개인데 머리털 나고 처음보는 동물이었다-들이 전시돼 있는데, 이는 원래 바다였던 바이칼이 심연에서 융기하면서 바다에서 서식하던 동·식물들이 통째로 호수로 변한 바이칼에 맞게 진화한 때문이라고 한다. 네르파가 어떻게 바이칼호에 유입됐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바이칼 호 생태학 박물관 수족관 속의 네르파

 

바이칼호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들


바이칼 호를 배로 달리다 보니 춘원 이광수가 소설 ‘유정’에서 그려낸 최석과 남정임의 순결하고도 애잔한 순애보가 떠오른다.

 춘원은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바이칼 호수까지 갔다고 한다. 유정에는 당시 여행 경험에 바탕한 바이칼 호수의 풍광이 그려진다. 

"가도가도 벌판, 서리 맞은 풀바다. 실개천 하나 없는 메마른 사막. 어디를 보아도 산 하나 없으니 하늘과 땅이 착 달라붙은 듯한 천지. 구름 한 점 없건만도 그 큰 태양 가지고도 미쳐 다 비추지 못하여 지평선호를 그린 지평선 위에는 항상 황혼이 떠도는 듯한 세계"

 소설 속의 최석은 딸 같은 정임과의 연애 사건에 휘말려 바이칼 호반에 은둔했고 정임은 최석을 만나기 위해 병든 몸을 이끌고 바이칼 삼림 지대 사이로 눈썰매를 달린다. 하지만 그녀의 눈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최석의 싸늘한 시신이었다. 최석의 장례가 끝나고 정임은 바이칼 촌에 남았다. 지금도 정임은 바이칼 호반 어디선가, 죽은 최석을 그리워하며 늙어가고 있을 것이다. 

바이칼호 여행의 또 다른 묘미는 사우나.

뜨겁게 달궈진 돌 위로 물을 부어 수증기를 만들어내면 사우나 안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후끈 달아오른다. 러시아식 사우나 '반야'다. 

 

 

바이칼호 인근에 위치한 기념품 가게.

 

 

뭐니뭐니해도 바이칼 관광의 참맛은 유람선 위에서 바이칼에서만 산다는 '오물'이라는 생선을 안주삼아 '바이칼' 보드카에 취해보는 것이리라.

 

 별 맛이 없어서 씹는 맛으로 먹어야 하는 오물



 

2016년 9월 1일, 밤 늦게 도착한 러시아 이르쿠츠크 공항엔 추적 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1652년 코사크 기병대가 점령한 이후로 이르쿠츠크는 러시아의 동방 거점 도시로 발전했다. 러시아 제국은 19세기 초 이 도시에 시베리아 총독부를 두고 극동과 알래스카까지 관할했다.  


 이르쿠츠크 레닌 거리



유럽 어느 지역이든 주요 볼거리는 성당이다. 러시아 정교회 본산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견줄 수 없지만 이르쿠츠크의 성당들도 나름의 사연을 지닌 채 답사객의 눈길을 끌었다. 이르쿠츠크 시내에 위치한 즈나멘스키 수도원을 먼저 찾았다.

 

즈나멘스키 수도원

즈나멘스키 수도원에는 1825년 12월14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뒤를 이은 니콜라이 1세 대관식 당일 새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시베리아로 유배됐던 데카브리스트-‘데카브리(러시아어로 12월) 당원’-들이 묻혀있다. 데카브리스트 묘비들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들의 불꽃같은 삶과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다 속절없이 스러져간 비운의 왕조를 상기시켰다. 



귀족 신분의 청년 장교들이 주축이 된 데카브리스트들은 나폴레옹 황제 치하의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러시아 병사들을 통해 러시아 민중의 애국심과 잠재력을 깨닫게 됐다. 왕정을 타도한 혁명의 나라 프랑스에서 이들은 인민주권을 토대로 한 서구 계몽사조의 세례를 받았고 급기야 국민 주권의 공화정을 꿈꾸기 시작했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든 혁명가들은 있다. 데카브리스트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혁명가였다. 

대문호인 레오 톨스토이의 역작 '전쟁과 평화‘에서 우리는 주인공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을 통해 데카브리스트의 맹아(萌芽)를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와 맞서 싸우면서 황제에 대한 충성심과 민중을 향한 애정 사이에서 번뇌했던 러시아 청년 귀족들의 분투는 백척간두에 서 있는 조선을 구하기 위해 무능한 왕조를 변혁시키려했던 구한말 양반 자제들을 연상시킨다. 만약 니콜라이 1세가 데카브리스트의 충정을 받아들여 농노를 해방하고 입헌군주국으로 러시아를 변모시켰다면, 로마노프 왕조는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시베리아의 황량한 폐광 속에서 볼세비키에 의해 총살당하는 비극적 결말을 피했을지도 모른다. 고종이 김옥균을 필두로 한 개혁파와 손잡고 근대적 개혁에 나섰다면, 독립협회의 공화(共和)적 제도 도입 요구를 수용했다면 조선왕조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부질없다지만 ‘역사의 신’이 있다면 그는 분명 냉혹한 성격일 것이다. 로마노프 왕조도, 제정 러시아의 숨통을 끊은 볼세비키도, 소비에트 공산정권도 수천만 러시아인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데카브리스트들의 숭고한 희생과 고결한 이상만이 살아남아서 후세인들의 가슴에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즈나멘스키 수도원으로 들어서면 철창으로 둘러싸인 석관묘가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트푸베츠코이 공작 부인 묘

 

이 곳에 세르게이 페트로비치 트루베츠코이 공작(1790~1860)의 부인이 세 딸과 함께 묻혀있다. 트루베츠코이는 데카브리스트 쿠데타 당시 황실 근위대 장교였다. 쿠데타가 실패한 뒤 주동자 5명은 처형되고 나머지 106명은 시베리아로 유배됐다. 유배된 이들 중 기혼자는 18명이었다. 부인들은 기로에 섰다. 남편과 이혼한 뒤 재혼해서 귀족의 삶을 이어가느냐, 아니면 귀족 신분과 특권, 재산을 모두 박탈당한 채 시베리아로 가서 유배된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느냐. 11명의 부인들은 고난의 시베리아를 선택했다. 트루베츠코이의 부인 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 트루베츠카야가 가장 먼저 시베리아로 떠났다. 당시 26살이었다. 트루베츠카야는 시베리아에서 28년을 보낸 뒤 남편이 사면받기 두해 전 숨졌다. 지금도 그녀의 묘비에는 변치 않는 사랑을 다짐하는 신혼부부나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르쿠츠크에는 곳곳에 데카브리스트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은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이 된 ‘발콘스키의 집’을 찾고서야 왜 이르쿠츠크가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게 됐는지를 알게됐다. 

이 곳은 마리아 발콘스카야가 시베리아로 유배된 남편 세르게이 발콘스키 공작(1786~1856)을 돌보면서 살아간 집이다. 

세르게이 발콘스키 공작과 부인 마리아 발콘스카야


세르게이 발콘스키 공작의 집

 

 

 

 

 

 

마리아가 쓰던 피라미드형의 포르테피아노


마리아는 어린 아이를 친정에 맡겨놓고 유배된 남편 곁으로 갔다. 광산 갱도에서 노역중인 남편과 상봉한 마리아는 무릎을 꿇고 남편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에 입을 맞췄다고 한다.  

처녀 시절 마리아 발콘스카야의 연인이었던 시인 푸시킨은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에게 ‘젊은 데카브리스의 사랑’이라는 시를 헌사했다.

‘시베리아 깊은 광맥 속에/그대들의 드높은/자존심의 인내를 보존하소서/그대들의 비통한 노력과/높은 정신의 지향은 사라지지 않으리니./불행의 신실한 누이/희망은 암흑의 지하 속에서/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리니/그날은 오리니/중략/무거운 사슬이 풀어지고/암흑의 방은 허물어지고-자유는/기쁨으로 그대들을 마중 나오리니/그리고 형제들은 그대들에게 검을 건네리니.’ 

세르게이 발콘스키는 톨스토이의 외가쪽으로 6촌 아저씨뻘된다.

톨스토이의 어머니 마리아는 발콘스키 가문 출신이다. 트루베츠코이도 톨스토이의 외가쪽 친척이다. 어려서부터 발콘스키 가문 출신의 장군들에 대한 무용담이나 데카브리스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톨스토이는 세르게이 발콘스키를 모델로 장장 6년에 걸쳐 ‘전쟁과 평화’를 집필했다. 

세르게이 발콘스키의 분신인 소설 속의 안드레이 볼콘스키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과 조국 러시아에 대한 애국심으로 불타는 열혈 청년 귀족 장교다. 1805년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에 맞서 러시아 황제가 전쟁을 선포하자 안드레이는 부인과 여동생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마병으로 자원 입대했고 러시아 군대가 모스크바를 불태우고 퇴각한 1812년 전쟁의 와중에 장렬히 전사한다.

그는 죽기 직전 ‘인간에 대한 감격에 찬 연민과 사랑’을 깨닫게 된다. “형제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 적에 대한 사랑, 그렇다, 이것은 신이 이 땅 위에서 가르친 사랑이다. 누이인 마리야에게 가르침을 받고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 사랑이다.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나는 삶에 미련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살아 남을 수만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나에게 남겨진 유일한 것인데. 아아! 그러나 나는 이미 늦었다. 나는 그 것을 잘 알고 있다.”(‘전쟁과 평화’, 박형규 역, 삼중당문고)

톨스토이가 안드레이의 입을 통해 밝힌 이 각성이 현실의 수많은 발콘스키들을 러시아 전제정 타도를 위한 혁명의 길로 내몰게 된다.  

톨스토이가 원래 3부로 기획했던 ‘전쟁과 평화’는 1805년~1812년의 이야기만을 다룬 채 미완으로 끝나 제2부에서 다룰 예정이었던 ‘데카브리스트 쿠데타’와 제3부 ‘데카브리스트들의 귀환’은 감상할 도리가 없게 됐다. 2,3부가 집필됐다면 이르쿠츠크 여행이 톨스토이 문학기행을 겸할 수 있었을텐데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유형 생활이 10년을 넘어서자 유배된 데카브리스트들의 처우가 개선됐다. 이제 이들은 이르쿠츠크에서 가족(처음엔 부인 혼자 왔지만 시베리아에서도 자녀들은 계속 태어났다. 위대한 사랑의 힘이여, 트루베츠카야는 시베리아에서 무려 7명의 자녀를 뒀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됐다. 당대의 일급 교양인이었던 데카브리스트들은 집에서 토론회나 시낭송회, 음악회, 연극공연을 열었다. 발콘스키의 집은 데카브리스트들의 유배형을 감독하는 시베리아 총독도 즐겨 찾는 명사들의 사교장이 됐다. 변방 도시였던 이르쿠츠크에서 르네상스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이후 힐러리)이 2008년 미국 민주당 대선경선에서 버락 오바마에게 패배한 뒤 '살생부'를 만든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끝까지 힐러리에게 충성한 사람은 1등급,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배신자는 7등급. 이렇게 7단계로 분류했는데 이 살생부는 후일 은혜를 갚고 복수를 하는데 활용된다.

대선에서 승리한 후보나 패배했더라도 후일을 기약하는 후보는 반드시 승인과 패인을 검토하고 선거 공신과 배신자를 정리한다. 2002년 한국 대선이 노무현 당선이라는 의외의 결과를 내놨을 때도 노무현 진영에서 만들었다는 '살생부'가 나돌았다. 신상필벌은 제대로 된 선거캠프의 작동원리다. 일찍이 권력의 본질을 통찰해본 니콜로 마키아벨리도 저서 '군주론'에서 "군주는 신민의 결속과 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랑도 느끼게 하고 동시에 두려움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굳이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고 권고했다. 오늘날에는 군주를 정치 지도자로 바꿔도 무방할 것 같다. 마키아벨리의 충고를 가장 충실히 따르고 있는 정치인 중 한 명이 힐러리다.

힐러리는 '의리의 정치인'이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측근들은 끝까지 챙긴다. 배신자는 반드시 응징한다. 

"정치에서 의리를 빼면 뭐가 남나?" 

2012년 빌 클린턴(이후 빌)이 제이슨 올트마이어 하원의원의 배신 사례를 거론하면서 했다는 이 말에 클린턴 부부의 권력운동 방식이 함축돼 있다.

과거 힐러리의 신세를 졌던 올트마이어는 2008년 민주당 대선경선에서 중립을 선언, 힐러리에게 배신을 때렸다. 힐러리 살생부에 오른 올트마이어는 4년 뒤 응징당했다. 2012년 민주당 하원의원 예비경선에서 올트마이어는 압도적 우세 속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2008년 힐러리편에 섰던 마크 크리츠에게 졌다. 국무장관인 힐러리를 대신해서 빌이 크리츠를 적극적으로 밀었기 때문이다.

올트마이어는 클린턴 부부의 신상필벌이 작동된 수 많은 사례들의 하나일 뿐이다. 클린턴 부부는 왜 배신자를 응징했을까. 2016년 대선을 내다보고 민주당 대선경선을 좌지우지하는 '슈퍼대의원'들에게 '배신은 죽음'이라는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하려했을 것이다. 그 전략은 성공했다. 힐러리는 올해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도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일으킨 '샌더스 바람'에 위기를 맞았지만 슈퍼대의원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가까스로 민주당 후보가 됐다. 

배신자를 응징하는 일과 충성파를 챙기는 일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힐러리와는 친해지기가 쉽지 않지만 한번 인연이 맺어지면 배신하지 않는 한 끝까지 간다. 측근도 마찬가지다. 핵심은 대개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1993~2000)부터 손발을 맞춘 인사들이다. 2008년 민주당 경선 때 힐러리 측근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힐러리랜드'(Hillaryland)라는 조어는 지금도 힐러리 최측근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거의 여성들이고 힐러리와는 20년 정도 고락을 함께한 이들이다. 며칠 전 '섹스팅'(음란메시지 주고받기)에 중독된 남편과 이혼하겠다고 발표한 후마 애버딘이 힐러리랜드의 일원이다. 애버딘은 과거 남편의 섹스팅이 공개됐을 때마다 그를 용서했으나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힐러리의 두번째 대선 도전에 자신의 개인사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힐러리랜드의 전사(戰士)다운 결정이다.

조남규 국제부장 

 

‘잘 쓰면 약, 잘못 쓰면 독’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이하 힐러리) 대선후보가 올해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남편인 빌 클린턴(이하 빌)의 역할이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오른쪽)와 남편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8일(현지시간)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서로 마주 보며 웃고 있다. 필라델피아=AFP연합뉴스
힐러리가 당선되면 미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되고 빌도 첫 ‘퍼스트 젠틀맨’(여성 대통령의 남편)이 된다. 더욱이 빌은 전직 대통령을 지낸 특별한 신분이다. 호사가들은 벌써부터 힐러리 시대에 빌이 맡을 역할을 놓고 설왕설래하고 있다.

클린턴 부부의 관계는 ‘정치적 동지’로 표현된다. 빌이 1992년 대선 캠페인을 벌이면서 자신을 뽑으면 유능한 힐러리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유명하다. 빌은 참모보다 힐러리의 조언을 우선시했다. 뉴스위크는 “빌은 힐러리와 상의하지 않고는 그 어떤 일도 결정하지 않았다”면서 “백악관 참모들은 농담으로 힐러리를 ‘연방대법원’으로 불렀다”고 보도했다. 당시 백악관 대변인을 지낸 디디 마이어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빌이 위층으로 올라가면 참모들은 힐러리와 의논하기 위해 가는 걸로 알았고 내려올 때는 빌의 견해가 달라져 있곤 했다”고 전했다.

퍼스트레이디 시절에도 힐러리는 달랐다. 대통령이 근무하는 웨스트 윙에 퍼스트레이디로는 처음으로 사무실을 뒀다. 빌 클린턴 정부 시절 힐러리의 참모진은 앨 고어 부통령의 참모진보다 숫자가 많았다. 빌은 핵심 국정과제인 건강보험개혁 작업을 힐러리에게 맡겼다. 둘 사이의 이 같은 관계를 고려하면 퍼스트 젠틀맨이 된 빌이 전통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인 백악관 안살림 챙기기로 시간을 보낼 것 같지는 않다.

힐러리 캠프는 조용히 대선 승리 이후 빌의 위상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힐러리는 지난 5월 심중의 일단을 내보인 적이 있다. 그는 유세 도중 “내가 대통령이 되면 빌은 경제를 살리는 임무를 맡을 수 있다”면서 “빌의 집권 시절 모든 이들의 소득이 증가하고 저소득층 비율이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역설했다. 다른 곳에서는 빌을 특사로 파견할 수 있다고도 했다. 미 언론은 힐러리의 이 발언이 나오자 “교착 상태에 놓인 중동 문제를 해결하는 데 빌만한 적임자는 없다”고 해설했다. 빌은 대통령 시절인 1993년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을 중재해 팔레스타인 임시 자치정부 출범의 계기가 된 오슬로협정을 성공시켰다. 막후 정치 참모로서 힐러리를 도울 수도 있다. 빌은 재선 대통령을 지내면서 구축한 정치적 인맥과 풍부한 외교 경험을 지니고 있다. 미국 정치판도 손바닥 보듯 알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12년 재선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수시로 빌에게 조언을 구했다. 2008년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맞붙었던 오바마팀과 힐러리팀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배경에 빌의 역할이 숨어있었다. 

이런 빌이 너무 나서면 힐러리의 존재감이 약해질 수 있다. ‘힐러리 정부’가 아니라 ‘빌 클린턴 정부 3기’로 비칠 수 있다. 빌의 참모였던 딕 모리스는 과거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아버지(조지 H W 부시 대통령)와 거리를 뒀듯이 힐러리도 대통령은 자신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려할 것”이라면서 “힐러리는 빌에게 권한을 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힐러리 지지자들 중에는 “빌을 버리고 백악관에 혼자 들어가라”고 요구하는 이들도 많다. 그래서 힐러리가 기후변화나 지구촌 기아 대책, 에이즈 퇴치 방안처럼 미국의 주도적 역할이 필요한 글로벌 현안을 빌에게 맡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데이비드 거겐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빌이 힐러리의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대통령 재임 시절의 역사를 다시 써보려는 욕구가 발동할 수 있다”면서 “빌과 힐러리가 동시에 백악관으로 들어가는 상황은 매우 민감한 주제이고 두 사람 모두 조심해야 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조남규 국제부장

 

 

2001년 미국 연방 상원의원으로 자기 정치를 시작한 힐러리 클린턴(이하 힐러리)은 2003년 상원 군사위 위원이 됐다. 전통과 관행을 중시하는 미 상원에서 초선 의원이 군사위에 배정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기적은 우연이 아니다. 힐러리의 군사위 배정도 그렇다. 힐러리는 상원에 들어간 직후부터 군사위를 주목했고, 오랫동안 기회를 노린 끝에 군사위의 자리가 나자 그 기회를 붙잡았다. 정치 전문가들은 힐러리가 상원 군사위에 집착한 행태를 그의 대통령 꿈과 연결시키곤 했다. 군 최고통수권자(대통령)가 되려한 힐러리가 군 경험을 하기 힘든 여성의 한계를 그런 식으로 극복하려했다는 것이다. 대권 재수 끝에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 힐러리이고 보면 정치 전문가들의 평가가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힐러리는 군사위 활동을 계기로 군심(軍心)을 얻게된다. 힐러리에 관한 군의 인식은 좋지 않았다. 힐러리는 대학 시절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사회에 나와서도 미국의 친 이스라엘 정책을 비판하면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관련 인사들과 친하게 지냈다. 남편인 빌 클린턴도 대학 시절 베트남전에 반대하면서 베트남전 징병을 회피했다. 클린턴 부부는 보수 성향이 강한 군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정치인이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힐러리는 군사위 위원으로 활동하는 기간 이런 인식을 돌려놓기 위해 애썼다. 군 장성들은 힐러리 의원에게서 과거 자신들이 생각해온 힐러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힐러리는 미국 패권을 유지할 수 있는 강한 군대를 지지했다. 

힐러리는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이라크전쟁 권한을 부여하는 상원 결의안에 찬성했다. 결의안 찬성 기록은 2008년 민주당 대선경선 과정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의 결의안 반대 투표와 대비되면서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민주당 좌파가 오바마에게 쏠리는 요인이 됐지만 군의 힐러리에 대한 평판은 좋아졌다. 오바마 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재임하는 기간에도 힐러리는 공화당원인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과 호흡을 맞추며 오바마 정부 내에서 대외 강경파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민주당 내에서 힐러리는 대외정책에 관한 한, ‘매파’(hawks)로 분류된다.

매파 힐러리는 올해 민주당 대선경선에서도 미국의 대외개입 정책에 반대하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거센 도전을 받아야 했다. 샌더스 지지자들은 힐러리를 군수업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후보로 몰아붙였다. 본선에서는 공화당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로부터 유사한 공격을 받고 있다.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우스꽝스러운 희극으로 반복된다더니,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시작한 공화당이 트럼프를 대표 주자로 내세웠다는 것은 한 편의 코미디다.

공화당 행정부에 참여했던 외교 국방 인사들이 지난 주 트럼프 대신 클린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다수 포함됐다. 미국에선 정치적 소신에 따라 상대당 대선후보를 지지하곤한다. 2008년 공화당원인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이 같은 흑인인 오바마 후보 지지를 선언했듯이 말이다. 그런데 외교안보 인사들이 집단으로 자신들이 소속된 정당의 대선후보를 비토한 사례는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처음 본다. 이들 중 일부가 트럼프 비토를 넘어서 힐러리 지지까지 한 발 더 나아간 것은 힐러리가 외교 안보 인사들로부터 군 통수권자 인증서를 받아든 것이나 다름없다. 힐러리라면 치를 떠는 미국 보수가 ‘매파’ 힐러리는 인정한 셈이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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