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 20년-한국 경제 현주소] “30년간 정치가 파괴한 경제생태계… 복원 위한 개혁 시급”

 외환위기 겪은 국민 ‘생계형 인간’ 전락 / 누구도 다음 세대 걱정하는 사람 없어 / 양극화 고착… 젊은이들도 모험 안해 / 5년 단임 정부, 큰 그림 없이 단기 처방 / 기업은 매 정권 몸사리느라 투자 꺼려 / 노동·자본 한 배 타야 경제생태계 복원

대담=조남규 경제부장
 

“다음 위기는 경제생태계의 반란에서 올 것이다.”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1987년 이후 30년 동안 정치가 경제를 크게 압도하고 5년 단임 대통령제의 병폐가 깊어지면서 한국 경제의 생태계가 파괴됐다”면서 “경제생태계의 건강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한국 사회의 병리 현상이 깊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 이사장은 20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협상 수석대표를 맡아 한국을 국가부도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는 IMF 외환위기 10년을 맞은 시점에 자신의 경험을 담은 ‘외환위기 징비록(懲毖錄)’을 출간해 IMF 위기의 부정적 유산(역동성 약화, 양극화 심화, 국가·사회의 문제 해결 능력 약화, 공동체주의 약화)으로 사회 전반의 생산성과 효율성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는 경고음을 울렸다. 환란 이후 출범한 진보정부(김대중, 노무현) 10년을 지켜본 뒤였다.


 

곧이어 보수정부(이명박, 박근혜) 10년이 이어졌지만 한국 경제의 병통은 더 심해졌다는 것이 정 이사장의 진단이다. 세계일보는 환란 20년 시리즈를 마감하면서 외환위기 수습 과정에서 ‘우리 경제의 배를 가르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는 특별한 경험을 했던’ 정 이사장을 만나 한국 경제가 처해 있는 현실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물었다. 인터뷰는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니어재단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이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니어재단 사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외환위기 20년을 맞은 한국 경제의 생태계 복원이 시급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외환위기 20년을 맞는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외환위기 20년이라고 하지만 지금 국민들의 마음에 ‘잘해봐야지’ 하는 생각은 없다. 대한민국 국민은 생계형 인간이 됐다. 국가공동체를 걱정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나라경제도 추격을 할 때가 있다. 그때는 국민들이 총력을 다해 달린다. 우리 경제는 박정희정부 때가 추격의 시기였다. 대통령 혼자 한 게 아니라 모든 국민이 같이 뛰었다. 그 시대에는 국가리더십이 강했다. 장발하면 깎이고 시위하면 감옥 가는 일도 있었지만 다음 세대에 영광된 조국을 물려주기 위해 현 세대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지금은 대통령이나 국민이나 그런 생각을 안 한다. 10년, 20년 내다보면서 다음 세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라가 정체기에 들어섰다는 얘기다.”

-어쩌다 정체에 빠진 나라가 됐나.

“1987년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면서 정치가 경제를 과도하게 압도하게 됐다. 모든 문제를 경제논리 대신 정치논리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사회 전 분야에 만연하게 됐다. 외환위기도 어느 면에서 보면 국가지배구조, 거버넌스의 문제였다. 외환위기가 터졌는데 1997년 봄부터 가을까지 엉거주춤한 상태로 흘러갔다. 마치 전쟁이 터졌는데 지휘관이 어쩔 줄 모르는 상황과 흡사했다. 기아자동차가 부도났을 때 기업의 은행 채무에 대해, 특히 외국 은행이 국내 은행에 빌려준 돈에 대해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준다는 말 한마디만 해줬으면 외환이 나가지 않았을 것이고 외환위기는 없었을 것이라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거버넌스가 없었다. 외환위기를 전후로 이런 느슨한 국가지배구조가 6번째 지속되고 있다. 5년 단임 대통령들은 위기에 대한 근본 처방을 내리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는 쪽에만 관심을 쏟는다. 불안하니까 자기 지역, 자기 파벌 중심으로 대통령을 민다. 그렇게 당선된 대통령은 자기 쪽 사람만 챙긴다. 그러다 보니 과잉 정치화, 과잉 이념화로 치닫는다. 이게 우리 경제를 망쳐왔다. 5년마다 새 정부가 들어와서 파괴를 일삼는다.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대체되듯 새것이 옛것을 밀어내는 슘페터식 ‘창조적 파괴’가 아니다. 새것은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기존 것을 없애는 소멸적 파괴다. 숲의 생태계를 복원하려면 새 나무를 심고 다 크면 잘라야 하는데 5년 단임 정부는 이미 심어진 나무부터 자른다. 이런 환경에서 관료는 굴종할 뿐 추종하지 않는다. 어차피 정권은 또 바뀌니깐. 기업인은 정치인의 눈치만 보면서 위험을 회피하려 한다. 그러니 투자가 일어나지 않는다. 강성해진 시민사회는 자기 몫을 더 크게 주장하고 나선다. 이런 정부와 관료, 기업, 시민사회가 적절히 영합하면서 만들어진 느슨한 국가지배구조는 문제해결 능력이 없다. 그래서 터진 게 외환위기다.”

 

-그래도 역대 정부는 보수든, 진보든 나름의 성장정책을 펴지 않았나.

“5년 단임 정부는 외발자전거를 타고 5년만 가려 했다. 어떤 정부는 노동, 어떤 정부는 자본에 치중했다. 노동과 자본, 둘 중 하나에 중심을 뒀을 뿐 이 둘을 연결하려고는 안 했다. 그러다 보니 경제주체 간 연결고리가 사라졌다. 정부와 기업, 가계를 잇는 피댓줄(벨트)이 끊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기를 올려도 헛바퀴가 돌게 된다. 우리나라는 제조업 구조를 오래 끌고 오면서 제조업의 생산성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정년 연장은 노동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그러면 자본의 한계효율을 높여야 하는데 기업이 신규투자를 꺼리면서 자본효율은 노동생산성보다 더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이렇게 가면 잠재성장률이 제로가 되고 그걸 메우기 위해 재정을 쏟아붓다 보면 재정파탄에 이른다. 경제생태계의 반란이다. 그때는 돈을 쏟아부어도 소용없다.”

-경제생태계를 복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한의학에서는 몸의 경혈을 따라 기가 움직인다고 한다. 그래서 머리가 아픈 환자의 손목에 침을 놓기도 한다. 순환체계를 통해 병을 고치는 것이다. 이처럼 경제생태계도 원활하게 순환해야 한다. 지금은 순환체계가 막혀 있다. 대표적으로 가계와 기업이 연결돼 있지 않다. 생태계가 자꾸만 침하하고 있다. 생태계 복원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개혁이다. 우리 경제를 압박하고 있는 과잉 정치화, 과잉 이념화의 덫을 제거해야 한다. 기득권의 거대한 담합구조를 제거해야 한다. 이 작업은 5년 단임 대통령 혼자 할 수 없다. 수십년 동안 형성된 기득권을 혁파하려면 이를 해체하는 데도 수십년이 걸린다. 정치가 길게 봐야 한다. 5년 단임 정부는 시계(視界)가 5년밖에 안 된다. 내일을 걱정하면서도 오늘이 급한 정부다. 이것이 앞서 말한 정체기의 현상이다. 신체를 보면 간과 신장이 독소를 걸러낸다. 사회에서는 언론과 지식사회가 그 역할을 한다. 언론과 지식사회가 그걸 제대로 못하고 있다.”

 

 

IMF 협상 타결되던 날 국가부도 위기에 놓인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과 구제금융 협상을 하고 있던 1997년 12월3일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싱가포르 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 강만수 재경원 차관(맨왼쪽)과 정덕구 재경원 제2차관보(맨오른쪽)의 마중을 받으며 입국하고 있다. 당시 정 2차관보는 IMF와의 실무협상을 주도했다. 협상은 캉드쉬 총재가 입국한 날 타결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어떤 정치개혁이 필요한가.

“내가 국회의원 2년만 하고 그만뒀다. 정파 이익을 위하여 이익담합 구조에 갇혀 있는 그들 앞에서 나는 항상 혼자였다. 내 외침은 크게 울렸으나 이를 귀담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의원직 사퇴 직후 니어재단을 창립했다. 정당정치에 가면 국회의원은 장기판의 졸이다. 의원은 헌법기관이 아닌 추종자일 뿐이다. 계파 이익을 우선하는 칡뿌리 민주주의를 국민 주권의 풀뿌리 민주주의로 전환해야 한다. 정당의 정책 생산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이런 정치개혁으로 체제를 잘 갖추면 4년 중임제든 의원내각제든 상관없다. 5년 단임제의 한계인 쇼터미즘(short-termism:단기적인 이익만 생각하는 주의)도 개선해야 한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국민의 생존 방정식도 달라졌다.

“정치도, 정부도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고 생각한 국민은 독자생존으로 갈 수밖에 없다. 각자도생이다. 생존 터전이 척박하기 때문이다. 국가공동체에 대한 부채의식이라든지,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 생존형 인간은 크게 변하는 것을 싫어한다. 힘 있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끼리, 힘없는 사람은 힘없는 사람끼리 모여서 담합 구조를 형성한다.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기득권 구조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구조 안에 편입되면 바보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 생존형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는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기 힘들다. 부모들의 과보호로 아이들이 나약해졌다. 내가 10년 고생해서 수백명 먹여살리는 사업가가 되겠다는 젊은이들이 없다. 부모들이 말린다. 모험심을 독려하는 사회 분위기, 가정 분위기가 사라졌다. 국민들이 물렁해졌다. 다음 세대가 우리 세대보다 못살 것이라는 일반적 견해에 동의한다. 사회생태계는 양극화, 단층화됐다. 부자끼리 모여서 같은 학교 보내고 같은 헬스클럽 다니면서 자기들끼리 소통한다.”

 

-문재인정부는 임기 동안 어떻게 해야 하나.

“문재인 대통령이 두발자전거를 타고 경제생태계의 숲을 쭉 돌아본 뒤 멀리 보고 페달을 밟았으면 좋겠다. 자본과 노동을 한 배에 태워야 한다. 외발자전거로는 멀리 갈 수 없다. 두발자전거를 타고 긴 호흡과 담대한 인내를 갖고 다음 정부에 무엇을 넘겨줄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잘못된 길을 너무 오래 걸어왔다. 그동안 정치가 해도 너무 했다.”

정리=이진경 기자

●정덕구 이사장은
고려대 상대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 매디슨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제10회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 재정경제원 대외경제국장, 기획관리실장, 제2차관보, IMF 협상 수석대표 등을 거쳐 재정경제부 차관, 산업자원부 장관을 역임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중국 베이징대와 런민대 초빙교수, 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저서로는 ‘거대 중국과의 대화’, ‘키움과 나눔을 넘어서’, ‘외환위기 징비록’, ‘한국을 보는 중국의 본심’, ‘기로에 선 북중관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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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2017년 사회조사’ 결과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한국인 3명 중 2명은 일생 동안 노력해도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낮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 우려스러운 대목은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자식 세대의 계층 상승 가능성에 대해서도 ‘낮다’고 한 점이다. 그렇게 답한 비율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본인과 자식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상류층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군에서는 본인 세대와 자식 세대의 계층이동 가능성을 모두 높게 봤다. 소득과 부의 양극화가 희망의 양극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사회는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2010년 6·25전쟁 발발 60년을 맞아 존 놀런 ‘스텝토 & 존슨’ 로펌 회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6·25전쟁 참전용사인 놀런 변호사는 6·25전쟁을 미국의 독립전쟁에 비유하면서 “미국이 독립전쟁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웠듯이, 한국전쟁도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이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는 발판이 됐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쟁이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전쟁 자체는 비극이었지만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충격이 신분과 계급의 장벽을 부숴버렸다.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출세할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 이런 신분 상승 욕구가 우리나라를 6·25전쟁이 남긴 폐허 위에서 중견 경제국으로 도약시킨 동력으로 작용했다.

경제학 교수 출신인 조윤제 주미 대사도 놀런 변호사와 유사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는 최근 내놓은 저서 ‘생존의 경제학’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정부 수립 이후, 특히 한국전쟁 이후 똑같은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면서 이는 한반도 수천년 역사상 초유의 경험이었다고 썼다. 과거 역사에서 소수 지배집단에만 열려있던 출세와 축재, 입신의 기회가 모든 국민에게 허용되면서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역동성을 갖게 됐고, 이는 기적 같은 경제성장 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는 개천에서 용이 나기 힘든 ‘닫힌 사회’로 변해갔다. 모두가 선망하는 양질의 일자리는 소수의 카르텔 속에서 유전되고 있다. 요즘 세간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채용비리 사건이 비단 금감원, 우리은행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발전 동력으로 작용했던 신분 상승 욕구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 곳곳에 기득권을 만들어냈다. 이제는 그 기득권이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기득권 수호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기득권자들의 유착 속에서 공정경쟁은 질식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좌절감과 열패감이 확산된다. 통계청의 2017년 사회조사 결과 그대로다.

문재인정부의 첫 번째 과제는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되살리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다시 6·25전쟁 직후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쟁에 버금가는 충격으로 우리 사회를 혁신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공정경쟁을 가로막는 온갖 종류의 반칙을 걷어내야 한다. 정부든, 기업이든, 노조든, 아니 그 무엇이든 이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기득권을 손봐야 한다. 불필요한 규제는 기득권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기업과 개인의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규제는 하루빨리 없애야 한다. 이미 경쟁력을 잃은 부문, 사라질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혈세를 퍼붓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그럴 돈이 있으면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데 한푼이라도 더 투입해야 한다.

사회의 역동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경제 생태계의 역동성도 커져야 한다. 그러려면 수출 기업의 국제경쟁력과 서비스 산업의 질을 높여야 한다. 과거엔 가계소득을 높여주면 소비가 늘고 국내 기업이 투자에 나서는 선순환이 이뤄졌으나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그 고리가 느슨해졌다. 국내외 소비자들은 더 싸고 더 질 좋은 제품을 손쉽게 찾아다닌다.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지 않으면 국내에서 풀린 돈이 투자로 이어지기는커녕 자산 거품을 만들어내기 십상이다. 경쟁력을 키우려면 기득권의 양보를 이끌어내야 한다. 독일을 회생시킨 슈뢰더 총리가 지지층의 반발을 무릅쓰면서 걸어간 길이다.

조남규 경제부장

“금융투자업이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 성공을 도울 수 있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25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 집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가진 자리에서 “이번 정부가 표방한 창업부터 혁신성장, 일자리 창출, 소득주도 성장, 이런 맥락의 핵심에 모험자본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모험자본 활성화의 주체는 은행이나 보험회사가 아닌 벤처, 증권회사가 할 일”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아시아 자산운용허브’의 기치를 내걸었다. 노무현정부가 주창했던 ‘동북아 금융허브’를 발전적으로 계승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면밀한 투자 전략과 신뢰 구축을 통해 한국에서도 금융의 삼성전자가 출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이 25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 집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금융투자업이 문재인정부의 혁신성장을 추동하는 전진기지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금융투자업계는 뭘 원하는가. 

“정부와 국회가 과감히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 그 하나가 기업금융 한도를 늘려주는 것이다. 현재 국회 정무위 전체회의에는 증권사의 기업금융 한도를 확대(증권사 자기자본 100%→200%)하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박근혜정부에서 발의돼 정무위 법안심사소위까지 통과했다. 그런데 문재인정부로 바뀌면서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 이 법안은 사실 문재인정부가 주창한 ‘생산적 금융’ 기조에 부합하는 것이다. 최종구 신임 금융위원장의 취임사 화두가 그것이다. 이제 금융이 가계대출 같은 비생산적 분야 대신 벤처, 중소기업처럼 새로운 성장동력,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곳에 돈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자본시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금융투자업계는 모험자본 활성화, 증권화를 통한 유동자금 흡수방안 등 다른 금융업권이 할 수 없는 생산적 금융분야를 고민하고 있다. 증권사의 기업금융 한도 확대도 그 일환이다. 그렇다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앞장서 도와줘야 하는 게 맞는데 오히려 여당의 동력을 못 받고 있는 현실이다.”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법안을 여당이 왜 반대하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현 정부 기조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빨리 하자고 해야 할 판인데 집권 여당에서 반대하니 황당하다. 증권사 기업금융 가운데 90%가 신용이 낮은 A등급 이하 기업용 대출이나 채권 인수다. 중견 기업 이하 기업에 대출이 나갔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정부가 원하는 것 아닌가. 증권회사는 대기업과 거래하는 은행과 경쟁할 수 없다. 은행과 우리는 노는 물이 다르다. 은행처럼 부동산 대출하기 위해 신용공여 한도를 늘려 달라는 것도 아니다. 기업 대출도 중소기업으로 제한하라고 하면 제한하겠다는 입장이다. 우리에게 새 정부를 도울 수 있는 ‘총알’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은행이나 보험업에 비해 금융투자업이 불합리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얘기해 왔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추석 연휴 이후에 그런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한 ‘증권사 균형발전 100대 과제’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제 증권사도 법인 지급결제, 외환거래 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보험은 10년 이상 보유하고 있으면 비과세인데 펀드와 주식은 안 된다. 이런 게 국내의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해외 금융투자업과의 관계에서 기울어진 운동장도 존재한다. 홍콩, 싱가포르, 런던에서는 증권사들이 다 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예 못하는 것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회사 간 합병 가격을 법에 명시하고 있는 규제다. 문제가 됐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건만 해도 기업은 법을 준수했지만 당시 합병비율이 사회적 통념에 맞지 않았다.” 

-올가을엔 초대형 투자은행(IB)이 탄생한다.  

“10월이면 초대형 IB 지정, 단기금융업 인가가 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증권회사 다 합쳐도 자기자본금이 48조원 정도에 불과하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110조원, 중국의 중신증권도 50조원에 달한다. 증권회사가 큰 프로젝트, 국제적인 인수금융 업무를 하려면 어느 정도 덩치가 있어야 한다. 자본금이 크고 덩치가 크면 위상도 신뢰수준도 올라가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KB금융이 전 계열사에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행사 지침)를 도입하기로 했다. 국민연금도 적극적이다.  

“스튜어드십 코드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핵심은 국민연금이다. 일본 정부연금투자펀드(GPIF)는 우리의 국민연금 같은 조직이다. 운용액이 1500조원 규모다. GPIF가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면 정부 의도대로 연금을 사용한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이른바 ‘연금 사회주의’ 논란이다. 그래서 GPIF는 국내 주식투자를 전부 펀드 방식으로 아웃소싱한다. 현명한 방법이다.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다. 펀드 내 주식 의결권은 자산운용사가 행사한다. 일본처럼 하면 국민연금 이사장이나 기금운용본부장이 감옥 갈 일이 없다. 우리 국민연금도 의결권행사를 과감히 100% 아웃소싱할 필요가 있다.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의 행사자 대신 감독자가 되는 게 바람직하다.” 

―노무현정부 당시만 해도 ‘동북아 금융허브’ 구상이 펼쳐지면서 자본시장이 들썩들썩했다. 지금은 흐지부지된 느낌이다.  

“노무현정부가 추진했던 동북아 금융허브는 미국이나 영국, 홍콩처럼 외환, 파생, 상품시장 등 모든 금융업권을 아우르는 금융중심지가 되겠다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하지만 그 구상은 성과 없이 좌초됐고 오히려 주요 외국계 증권사가 철수하면서 금융허브로서 위상이 더 떨어졌다. 과거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보다 섬세하고 과감한 금융 허브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우리 펀드 시장이 1000조원을 넘어서는 시대가 됐다. 1500조원 국내총생산(GDP)에 육박하는 수치다. 전문사모운용사 100개가 새로 생겼다. 재야의 고수들이 운용사로 들어오면서 시장도 커지고 상품도 다양해졌다. 자산운용업은 상전벽해에 가까운 변화다. 펀드 백가쟁명의 시대에 진입했다. 이렇게 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시아권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자산운용업 시장이 될 것이다. 은행은 세계적으로 속지성이 강하지만 자산운용업은 속지성이 별로 없다. 누가 돈을 잘 운용하다고 하면 세계 어디에서도 찾게 된다. 일본도 저금리가 지속되니까 기관, 개인이 못 견디고 해외로 눈을 돌렸다. 우리도 그럴 것이다. 홍콩이 갈수록 중국화하고 있다. 중국이 패권국가화하면서 홍콩이 불안해한다. 홍콩에 들어가 있던 돈을 유치할 수 있다. 외국돈 1000조원 정도 들어와 있으면 외교안보 차원에서도 도움이 된다. 싱가포르 같은 작은 나라에도 수천조원 규모의 돈이 들어가 있다. 세계 최고의 IT 인프라, 홍콩이나 싱가포르보다 온화한 기후, 우수한 치안 등 우리 입지가 더 좋다.”  

 


-감나무에서 저절로 감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글로벌 투자회사를 유치하려면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법인세율이나 개인소득세율을 경쟁국 수준으로 인하해야 한다. 투자자들의 근무여건도 중요하다. 자녀를 위한 국제학교, 배우자 취업기회 보장 같은 지원책이 필요하다.”  

―취임 직후 ‘황영기가 전사하든 자본시장이 바뀌든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증권사에 대한 규제혁파는 처음 생각했던 것의 반도 다 못했다. 이유가 있다. 증권회사는 은행이 견제한다. 증권사 쪽에서 법인지급 결제, 외환업무 취급, 융자한도 증가 등도 현재 진행형이다. 취임 3년이 다 돼 가는데 아직도 그대로다.” 

 


-코스피가 2007년 7월 2000선에 도달한 뒤 10년째 제자리 걸음이다. 코스피 3000, 5000선 시대는 꿈에 불과한가. 

“북한 핵 문제와 정부의 경제정책 불확실성을 제외한다면 지금 증시 여건은 굉장히 좋다. 북핵 문제는 우리가 어쩔 수 없다. 경제정책의 불확실성은 정부가 인내심을 갖고 기업 경영 간섭에 신중해야 한다. 정부가 급하다 보니 기업들이 불안감을 토로한다. 경제정책에 불확실성이 있다 보니 기업은 투자와 고용에서 몸을 사린다. 삼성전자 착시효과를 없애고 나면 과연 기업들이 활발하게 재투자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기업인들을 만나 보면 걱정부터 한다. 주가도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기업실적과 지배구조개선을 통해서 코스피 3000선으로 갈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런데 4000, 5000선으로 가려면 신종 사업, 알리바바와 같은 기업이 우리나라에서도 나와야 할 것이다.” 

대담=조남규 경제부장 
정리=신동주 기자 ranger@segye.com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 약력 
 
●서울대 무역학과, 런던 경제학스쿨(LSE) 석사●미국 뱅커스 트러스트 아시아담당 부사장●삼성투자신탁운용 대표●삼성증권 대표●우리금융회장 겸 우리은행장●KB금융지주 초대회장●차병원그룹 총괄부회장●법무법인 세종 고문●금융투자협회 공익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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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선의로 시작된 정책이 부메랑으로 돌아올 때가 있다.  

문재인정부가 추진 중인 ‘세일즈 앤드 리스백’(sales and lease back) 정책이 그럴 것 같다. 이 제도는 대출로 집을 샀다가 생계가 곤란해진 ‘하우스푸어’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정부가 이들의 주택을 매입한 뒤 월세나 전세로 재임대해서 하우스푸어의 주거비 부담을 덜어주자는 취지다. 새해 예산안에 1000억원을 잡아놨다. 국민의 세금이 민간주택 소유주에게 투입되는 것이다. 이는 공공재인 임대주택 건설이나 무주택자 지원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누구나 부동산에 투자(투기)할 때는 부지불식간에 ‘더 큰 바보 이론’(Greater Fool theory)에 따른다. 설사 자신이 바보처럼 실제 가치보다 비싼 값을 주고 집을 샀더라도 나중에 누군가 더 비싼 값에 사주길 바란다. 집값이 상승하는 국면에선 이 이론이 잘 적용된다. 금리 인상이나 실직 등으로 빚 부담이 커져도 ‘더 큰 바보’가 나타나서 곤란한 상황을 해소시켜 준다. 하지만 집값이 하락하는 시점에선 상투를 잡은 ‘마지막 바보’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투자에는 리스크가 따른다. 리스크가 없다면 누구나 빚을 내서라도 투자에 나설 것이다. 시장이 돌아가는 단순하지만 엄중한 원칙이다.  

문재인정부의 세일즈 앤드 리스백 정책은 이 원칙에 배치된다. 정부가 투자 실패를 보상해 주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왜 정부가 ‘마지막 바보’ 역할을 맡느냐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더욱이 문재인정부가 이 정책에 투입하겠다는 주택도시기금은 무주택자의 주거복지에 써야 할 공적자금이다. 이 돈으로 주택 소유주를 지원하는 정책은 공정한가. 향후 금리 인상기에 하우스푸어가 더 늘어나면 한정된 예산을 누구에게 먼저 투입할 것인가. 매입가 책정도 쉽지 않은 일이다. 형평성 시비도 피할 수 없다. 정부도 이런 부담감 때문인지 하우스푸어 주택을 채권자인 시중은행이 직접 매입하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택 소유주의 책임을 정부가 떠맡겠다고 약속해 놓고 이제 그 책임을 애꿎은 시중은행에 떠넘기겠다는 발상이다. 원래대로 정부가 책임지든지 정책 자체를 폐기하는 게 옳다.  

우리보다 앞서 하우스푸어 지원 논란을 겪은 미국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부는 집권 초인 2009년 2월 ‘주택소유안정화계획’(Homeowners Affordability and Stable Plan)을 발표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집값이 대출금 아래로 내려간 ‘깡통주택’ 소유주를 구제하는 조치였다. 집을 압류당할 처지에 놓인 수백만명이 구제 대상에 올랐다. 오바마 정부는 수백억 달러의 회생자금을 투입해 가계부채 일부를 조정해 줬다. ‘깡통주택’ 소유주 가운데는 투기꾼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대출의 덫에 걸린 실소유주였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불거지기 전만 해도 부동산 투자로 한몫 챙겼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너도나도 대출을 받아 집을 사던 시절이었다. 금융기관은 소득이 없거나 신용이 낮은 사람들에게까지 대출 상품을 팔았다. 이런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가 금융위기를 불렀다. 뱅크런이 일어나자 곳곳에서 은행들이 무너졌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자 깡통주택 소유주들은 길거리에 나앉게 됐다. 미 정부는 은행을 살리기 위해 천문학적 규모의 혈세를 투입했다.  

그러자 한쪽에선 “국민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금융기관을 내가 낸 세금으로 구제하지 말라”는 항의가 빗발쳤다. 당시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였던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금융기관만 살리려는 재무부 관료들에 맞서 집을 차압당할 위기에 놓인 주택 소유주들도 구제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 반대쪽에선 “무책임하고 게으른 사람들을 세금으로 지원하지 말라”는 여론이 비등했다. 

오바마 정부의 주택소유안정화계획은 선의에 바탕을 둔 것이었지만 누군가는 이 조치에 분개했다. CNBC의 편집장인 릭 샌텔리가 “정부가 무책임한 사람들의 빚을 대신 갚아주려 한다”면서 세금 낭비를 막기 위한 시민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안했다. 이로써 오바마 대통령을 임기 내내 괴롭힌 ‘티 파티’(Tea Party) 운동의 서막이 올랐다. 야당인 공화당은 티 파티 세력의 지원으로 이듬해 중간선거에서 압승했다. 명분도 실효성도 약한 정책 하나가 정권의 토대를 흔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조남규 경제부장

“미국 경쟁법의 원리를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다 보면 을의 눈물을 덜어주기 힘들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취임 이후 ‘경쟁법의 목적은 경쟁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을 보호하는 것’(The antitrust laws were enacted for the protection of competition, not competitor)이라는 미국 경쟁법의 판례를 종종 인용하고 있다. 본래 취지는 소비자 후생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경쟁 당국은 가급적 시장의 거래 행위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지만 김 위원장은 그 반대의 주장을 펴기 위해 그 판례를 활용하고 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 25일 서울 중구 한국공정거래조정원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가맹, 유통, 하도급, 대리점 분야 등의 불공정 관행 개선책과 재벌개혁 방향을 밝히고 있다.
이재문 기자


김 위원장은 지난 25일 서울 중구 한국공정거래조정원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미국 경쟁법의 원리를 받아들인 공정거래법을 집행해야 하는 현실과 을의 눈물을 닦아달라는 여론의 사이에서 고민이 크다”고 말했다.

―취임 한 달이 지났다. ‘김상조 효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기대를 받고 있다.

“저와 공정위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크다는 점을 잘 알고 있고, 그만큼 부담감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공정위가 할 수 있었는데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과 함께 국민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한편으로는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과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지만, 매일 소임을 되새기고 있다.” 

―최근 가맹 분야 불공정관행 개선조치를 내놨다. 가맹본부와 가맹점주의 갑을 관계를 상생 관계로 바꾼다는 취지에 동감한다. 그런데 필수품목 마진 공개 등은 지나친 시장 개입이라는 지적도 있다.

“정보공개의 폭과 수준에 관해서는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필수품목이고, 어떤 가격으로 공급하느냐는 핵심적 영업비밀이다. 이 때문에 공개 방법에 대해 개별 공개가 어려운 부분은 업종별 공개, 일정한 범위 내 공개 등 다양한 형태로 조율할 계획이다. 프랜차이즈 사업이라는 게 기업 대 기업의 거래인데 공정위가 개입할 수 있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가맹점 종업원 임금이 변동되면 납품단가를 조정할 수 있도록 한 대목은 최저임금 인상을 염두에 둔 것인가.

“프랜차이즈는 관련자들이 공통의 이익을 나누는 상생의 모델이다. 가맹본부와 가맹점주가 갑을 관계인데 점주 측에는 고용의 문제가 있다. 공정위 차원에서는 갑의 을에 대한 횡포가 불공정 거래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을인 점주들도 고용하고 있는 종업원들과 이익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최저임금은 영세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에게 적용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최저임금 인상 부분을 가맹본부가 공유하는 방식으로 상생협력 모델을 유도하자는 취지다.”  

―가맹본부와 점주의 상생을 위해서는 본부가 일정 기간 직영점을 운영한 뒤 가맹점을 모집하는 등 규제를 둬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고민한 부분이다. 사실 가맹본부가 시장에서 성공 가능성이 확인됐을 때 가맹점주를 모으는 방식이 맞다. 하지만 이미 4200개가 넘는 가맹본부가 만들어진 현실에서 그것을 법률적으로 정해놓는 것이 맞는 방식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문제다. 일단 계약서에 정보공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하고, 해결이 안 되면 구조적으로 제약을 가하는 식이 될 것이다. 가맹본부 4200개가 모두 똑같은 ‘갑’은 아니다. 가맹본부나 가맹점주가 (매출액 등에서) 별 차이 없는 곳도 많다. 그래서 50개 주요 가맹본부 먼저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이들 중에는 삼성전자보다 영업이익률이 높은 곳도 있다. 영업이익을 공유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곳들이다.”


―갑을 문제가 심각한 또 다른 분야는 하도급이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태반이 하도급 거래로 먹고산다.

“그렇다. 갑을 문제 4대 영역이 가맹·유통·하도급·대리점이다. 얘기한 순서대로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나라 하도급 분야는 원사업자가 1차 하도급 업체뿐 아니라 2, 3차 하도급업체까지 관여하는 사실상 ‘전속거래’ 형태를 보인다. 재벌계열 대기업과 1차 하도급 거래의 불공정 문제는 많이 개선됐다. 2, 3차 하도급으로 가면 갈수록 상황이 나빠진다. 임금은 대기업의 절반, 더욱이 비정규직은 3분의 1까지 떨어진다. 최근 공정위가 중견, 중소기업의 갑질에 과징금을 때리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을의 갑질’이다. 공정위가 고민하는 핵심이 2, 3차 하도급 거래 구조를 어떻게 공정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법적으로는 원사업자가 2, 3차 하도급업체에 개입할 수 없다. 특히 임금문제에 개입하면 노동관계법 위반이 된다. 그래서 법 제도 개선이 어디까지 가능한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대통령께서 이번에 14개 대기업을 만나 당부하고 싶은 게 이런 점이라고 본다. 상생 노력이 1차 하도급업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2, 3차 협력업체까지 내려갈 방안을 고민해달라는 것이다.”

―중소기업들이 공동사업을 할 때 공정거래법의 담합금지 규정에 대한 예외를 인정하고 하도급 불공정 거래 개선을 위해서는 하도급 정보 공개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알고 있다. 

“중소기업들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강화해서 협상력과 경쟁력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스위스에서는 중소기업들이 회사를 만들어서 공동으로 구매, 판매를 한다. 우리도 중소기업이 협력사업을 할 때 담합 예외를 인정해주고 협력 네트워크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개별 기업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것은 공정위를 넘어서 범정부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공정위가 그런 노력을 주도하려고 한다. 하도급 기업 명단 등 관련 정보를 공개하는 문제는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다. 원사업자는 하도급 정보가 영업기밀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벽을 넘어야 한다.” 

 

―하도급 정보 공개는 공정위 과제에서 빠져 있나. 

“취임 이후 해야 할 일을 단기, 중기, 장기 과제로 나눴다. 하도급 거래 정보 공개는 중기 내지는 장기 분야가 될 것이다.” 

―재벌개혁 관련해서 “시간이 얼마 없다”, “지배구조 개선은 사후적이고 시장접근적 방법이 좋겠다”고 말했다.

“소수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과 대·중소기업 간 힘의 불균형 문제 등을 해소해 한국 경제가 재도약하는 데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재벌개혁을 몰아치듯이 하지 않고 기업의 자발적 변화를 유도하겠다고 밝혔지만,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정부는 재벌개혁의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판단되면, 법령 개정을 통한 제도적 해결을 추진하는 등 민주주의 틀 내에서 가능한 모든 정책적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시장접근적 방법은 소액주주나 기관투자가 등 시장의 플레이어들이 기업 지배구조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취지다. 상법 개정(문재인 정부는 총수 일가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해 2018년까지 다중대표소송, 전자투표제,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과 스튜어드십 코드(주주권 행사 모범기준) 활성화를 추진하고 효과를 보면서 공정거래법 규제를 얼마나 강화해야 할지를 판단하겠다. 순환출자 해소나 금산분리 등은 법률 개정 사항이다.”

―4대 그룹이 바람직한 기업 지배구조 모델을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일감몰아주기 규제 대상과 관련해서 상장사의 경우 30%로 해놨더니 29.9%로 만든 회사가 있다.(현행법상 오너 일가가 대기업 상장 계열사 지분을 30% 이상 갖고 있으면 일감몰아주기 규제 대상에 포함된다)” 

―법 규정이 그렇다면 법을 지킨 것 아닌가. 

“법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비난 가능성은 있다. 이제 대기업은 법을 지켰다는 것만으로 안 된다. 대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와 사회적 기대에 대해 돌아보고 스스로 고칠 수 있는 부분은 개선해달라는 뜻이다. 적어도 올해 말까지는 국민이 납득할 수준의 자발적 변화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자발적 선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법률 개정 압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고,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어느 정도 합의됐나.

"다중대표소송, 전자투표 거의 다 됐는데 집중투표제, 감사위원분리선출제는 아직 논의 중이다. 개인적으로는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분리선출제 가운데 하나만 하고,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감사위원분리선출제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책은 곧 정치다. 정책만 하는 입장에서는 당위와 효율을 따지지만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정치다. 여의도 정치 뿐 아니라 국민의 여론을 만들어가는 것도 정치다. 공감대를 모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최근에 신장섭 싱가포르대 교수같은 인사들은 기업의 가업 승계를 인정해주고 그 대신 해당 기업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이른바 정부와 기업의 대타협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대타협론자다. 그런 타협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타협은 주고 받는게 확인돼야 한다. 약속을 깼을 때 거기에 대한 엄정한 처벌이 보장됐을 때 대타협이 가능하다. 하지만 타협 주체 중에 일방이 약속을 깼을 때 어떤 패널티를 줄 것인지에 대한 담보가 안되면 타협이 이뤄질 수 없다. 대타협 주장의 선의를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런 주장을 펴는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나 신장섭 교수는 좀 더 자신의 말에 책임감을 가졌으면 한다. 좋은 말만 하면 안된다. 구체적 방법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노조를 사회적 대타협 안에 어떻게 가져올 수 있고, 재벌의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장하성 실장이 선의를 가졌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지만 실현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제가 고민하는 것은 사회적 대타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부분이다." 

 



정리=안용성 기자 ysahn@segye.com 

대담=조남규 경제부장

 
김상조 위원장은 
●1962년 경북 구미 ●서울 대일고 ●서울대 경제학과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 석·박사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부위원장 ●참여연대 재벌개혁감시단 단장, 경제개혁센터 소장 ●경제개혁연대 소장 ●한국금융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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