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사회안전망’으로 불리는 보험 산업이 안팎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각종 규제 속에서 새 먹거리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해외 시장은 낯설고 2021년부터 도입되는 새로운 국제보험회계기준(IFRS17)은 보험사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전대미문의 위기다. 4차혁명의 진전, ‘문재인케어’(문재인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 등이 몰고 올 보험 환경의 변화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는 보험사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보험산업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도 곱지 않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손해보험협회를 이끌게 된 김용덕 손보협회장은 “보험산업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전환을 위해서는 소비자 신뢰회복이 최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보험업계의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보험사들이 과거의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인 보험 소비자 중심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손해보험협회 회장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문재인케어’를 어떻게 평가하나.

“‘문재인케어’의 핵심은 3800개 비급여 항목(의료 치료비에서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치료)의 급여화다.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가중시키는 원인이 비급여 의료에 있다는 문제의식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전의 정책들처럼 ‘비급여의 점진적 축소’에 그치지 않고 ‘의학적으로 필요한 비급여의 완전한 해소’로 접근 방식을 획기적으로 전환했다. 국민의 의료비 부담 완화를 위해 차질없이 추진되어야 한다.”

-건강보험 보장 대상이 늘어나면 실손의료보험은 반사이익을 얻게 된다. 보험료를 내리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문재인케어 시행으로 얼마만한 반사이익을 얻게 되는지를 우선 평가해야 한다. 현재 중립적인 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연구하고 있다. 올 상반기에 결과가 나오면 합리적인 접점을 찾겠다. 다음달에 유병자 실손보험이 나온다. 앞으로 고령자 전용 실손보험을 확대하는 등 국민의 의료비 부담이 줄어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손보업계는 그동안 실손보험 적자를 이유로 문재인케어 시행 여부에 관계없이 보험료 인하는 어려우며 보험료 인하에 앞서 병원의 과잉진료와 보험사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실손보험료 청구 절차가 번거롭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병원에서 진료 기록을 받아서 보험사에 일일이 팩스로 넣어주고 있다.

“현재 실손보험 청구절차는 복잡해서 청구를 포기하는 사례가 발생한다. 실손보험 가입자가 의료기관에 요청하면 의료기관이 보험금 청구를 위한 진료서류를 보험사에 전송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먼저 현행법령 개선이 필요하고 의료기관과 보험사 간 전송체계가 구축돼야 한다. 지금도 일부 보험사는 개별적으로 병원과 협약을 맺고 자동으로 보험료가 청구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더 많은 의료기관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환자들이 원하는데 병원에서는 왜 안 해주나.

“의료 정보가 공개되길 꺼린다. 자기공명영상(MRI) 사진만 해도 병원끼리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졌는데도 이 사진을 다른 병원으로 가져갈 수 있게 된 것은 최근 일이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도 방향은 맞기 때문에 시간의 문제일 뿐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의료계는 비의료기관의 헬스케어 서비스가 의료법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보험업계로서는 이 서비스를 활용한 상품 개발이 필요하지 않나.

“우리는 민간회사가 개인이나 가정에서 활용되는 기기를 부착해 콜레스테롤, 혈압, 체지방을 측정하는 행위도 의료행위로 판단한다. 그렇다보니 정보통신기술(ICT), 웨어러블 기기 등을 활용한 헬스케어 서비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도 이런 서비스가 활성화하지 못하고 있다. 보험 선진국처럼 이런 서비스가 허용되면 보험사는 건강관리를 잘하는 가입자의 보험료를 내려줄 수 있다. 보험 가입자는 웨어러블 기기로 수시로 건강을 체크하게 되니 전체적으로 국민건강이 증진되고 의료비용이 줄어든다. 다행히 지난달 새로운 헬스케어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의료법상 규제를 완화하는 조치가 이뤄졌다. 보건복지부 산하에 민관 합동 법령해석팀을 신설해 그런 상품과 서비스가 의료법상 의료행위에 저촉되는지를 신속히 판단하도록 했다. 일단 한발짝 진전됐다.”

-IFRS17 시행을 앞두고 보험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지금은 보험부채를 원가기준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IFRS17 체제에서는 시가평가제도로 바뀐다. 그러면 보험사들의 부채규모가 훨씬 커진다. 그렇게 되면 보험사는 지급여력비율(RBC비율·보험계약자에게 보험금을 제때 지급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건전성 지표)을 높이기 위해 자본금을 더 쌓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보험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 그래서 국내 보험건전성 감독기준인 한국형 신지급여력제도(K-ICS)가 나온 것이다. IFRS17 시행 전에 자본금을 충분히 쌓으라는 취지다. 방향은 맞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제도이고 단기간에 자본금을 확 늘리려면 여러 무리가 따른다. 기준 바뀐다고 건전한 회사가 부실한 회사로 전락하면 문제가 있다.(국내 손해보험사 평균 RBC비율은 2017년 9월 기준 250.19%로 양호한 상태다.) 적응 기간을 둬서 새로운 제도가 소프트 랜딩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보험사의 건전성은 강화하되 부작용이 최소화되는 방향으로 감독당국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검토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협회 차원에서는 보험사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감독당국에 건의하고 IFRS17과 K-ICS가 연착륙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블록체인 등 혁신기술들이 출현하고 있다. 보험업계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

“기술이 발전하거나 사회가 발전하면 새로운 위험이 등장한다. AI나 자율주행, 드론, 헬스케어 분야에서도 과거에 없던 위험이 생겨난다. 사회 전체를 생태계로 본다면 미래의 손해보험은 흐르는 물처럼 변화의 사이사이를 메우며 흐를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위험을 보장할 수 있는 다양한 상품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보험 업무의 각 단계에서 빅데이터 등 발전된 기술을 도입해 소비자의 편의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다. 자율주행차 시대가 도래하면 사고 시 자동차 결함인지, 시스템 결함인지를 놓고 분쟁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제조업체나 시스템 개발 업체 모두 보험을 들어야 한다. 사회, 기술 변화에 따른 새로운 시장 영역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 조금 앞서가고 있는 선진국 시장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20일 미국에서 콜택시앱 우버의 시험주행 자율주행차가 보행자를 치어 숨지게 한 사고가 발생했다.(3월 20일 추가 질문)

“자율주행차 산업의 발전은 무엇보다도 피해자 보호를 최우선시하는 제도적 토대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보험상품도 보험 본연의 역할인 피해자 보호에 빈틈이 없도록 변화하여야 하며, 그러한 방향으로 관련 제도나 법규도 정비되어야 할 것이다.”

-해외 시장도 보험사의 새로운 먹거리다. 국내 보험사들이 해외에서 돈을 벌어올 수 있는 실력이 되나.

“실력을 다 갖추고 나가면 언제 나가겠나. 가능한 범위 내에서 나가서 진출하고 실패하면 성공의 밑거름으로 삼고 가야 한다. 우리 금융권은 국제화 수준이 낮다는 것이 큰 제약 요인이다. TNI(Transnationality Index·초국적 지수)라는 게 있다. 금융회사들의 해외영업 이익, 해외 직원 수 등을 지수화한 것인데 우리나라는 4∼5%에 머문다. 금융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스위스, 영국, 미국은 우리보다 10배에서 20배 정도다. 국내에서 벌어들이는 돈보다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더 많다는 의미다. 우리 금융도 세계화 전략을 세워서 나가야 한다. 우리 금융은 국내 비즈니스만 하고 있다. 은행, 카드, 보험, 증권 다 똑같다. 근래 들어 조금씩 해외로 나가고 있는데 장기적으로는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

-반려동물 인구가 늘고 있는데 관련 보험상품이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려동물 인구가 2015년 기준으로 약 457만명에 이른다. 지금은 반려동물에 대한 동물병원 수가 같은 것들이 제대로 표준화되어 있지 않고 공개가 안 되고 있어 반려동물 보험 발달이 더딘 상태다. 반려동물 등록이 제대로 안 돼 있는 탓도 있다. 반려동물 산업도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분야다. 그런 차원에서 정부도 관심을 갖고 있다. 협회 차원에서는 동물병원의 진료비를 공시하는 등 새로운 보험상품이 개발될 수 있도록 법령 개정과 제도 개선을 건의할 예정이다.”

정리=백소용 기자, 사진=남정탁 기자

대담=조남규 경제부장

 
김용덕 손해보험협회 회장은


●1950년 전북 정읍 출생 ●용산고 ●고려대 경영학과 ●행시 15회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 ●재정경제부 국제담당 차관보 ●관세청장 ●건설교통부 차관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 ●법무법인 광장 고문 ●고려대 경영대 초빙교수


 

●IFRS17
2021년 1월 1일 시행되는 새로운 국제보험회계기준으로, 보험부채의 평가 기준을 원가에서 시가로 변경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동안 보험사는 최초 보험 계약 시 계산에 따라 미래에 고객에게 지급할 보험금을 준비하면 됐지만, IFRS17이 시행되면 현재 시장금리를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고금리 확정형 상품을 대량 판매한 보험사들은 지금과 같은 저금리 기조에서는 훨씬 많은 적립금을 쌓아야 한다.

●K-ICS
IFRS17 도입에 따라 현행 지급여력비율(RBC비율) 기준을 대체하는 새로운 지급여력제도이다. 보험사가 계약자에게 보험금을 제때 지급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건전성 지표로, 가용자본을 요구자본으로 나눠서 계산한다. 보험업법에서 100% 이상을 유지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당국은 150% 이상을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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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복인 KT&G 사장의 연임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주 정부 당국자와의 식사자리에서 ‘민영화된 공기업’의 지배구조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KT&G나 포스코, KT처럼 민영화된 공기업에는 창업자가 있는 회사와 달리 실질적인 지배주주가 없다. 소유가 분산된 과점 주주 체제이다 보니 지배구조의 문제가 각별히 중요해진다. 대부분의 과점 주주들은 단순 투자자들이고 경영진을 감시·견제해야 하는 이사회는 경영진에 포획된 거수기 노릇에 그칠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이 당국자는 민영화된 공기업이 이런 ‘내부자 통제기업’(Insider-controlled firm)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 냉전 이후 동구권의 국영기업이 국민주나 종업원지주 방식으로 민영화되면서 내부자 통제기업의 폐해가 현실화했다. 경영진과 종업원의 담합 구조가 형성됐고 이들의 지대 추구 행위가 판을 쳤다. 설상가상으로 사회주의 경제의 고질적 병폐였던 ‘관치’(官治)까지 되살아났다. 기업이 정상적으로 굴러갈 턱이 없다. 결국 ‘마피아 경제’로 추락했다. 외환 위기 이후 꾸준히 지배구조를 개선해온 한국 기업에 동구권의 사례는 반면교사 정도면 족할 것이다.

현 경영진과 2대 주주인 기업은행이 한판 승부를 벌였던 KT&G 주주총회는 우리 사회에 과제를 남겼다.
민영화된 공기업의 지배구조를 어떻게 발전시켜나갈 것이냐는 문제다. 우선 ‘관치’ 논란이다. 2대 주주인 기업은행이 주주 견제와 감시기능 강화를 이유로 사외이사 2명을 추천하자 KT&G 경영진과 노조는 경영 개입이라고 반발했다. 기업은행이 주주 제안이라는 형식을 취했을 뿐 그 배경에는 기업은행 지분을 절반 이상 보유한 정부가 KT&G 이사회를 장악하려는 의중이 깔려 있다는 논리였다. 2015년 사장 선출 과정의 트라우마가 이런 의구심을 낳았을 수 있다. 백 사장은 그해 검찰에 구속된 민영진 사장의 후임으로 선출됐지만 얼마 안 가 민 사장과 같은 처지가 됐다. 후일 두 사람은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올해 백 사장의 연임을 전후해서는 금융감독원이 분식회계 혐의로 KT&G에 대한 감리를 진행하고 있고 이 회사 출신의 임직원들은 백 사장을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기업은행이 백 사장 연임 반대의 논거로 내세운 이유들이다. 키를 쥐고 있던 1대 주주 국민연금은 주주총회 직전에 ‘중립’으로 돌아섰다. 관치 논란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국민연금까지 반대했다면 백 사장 연임은 장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관치 프레임’이 통한 셈이다. 기업은행은 졸지에 정부 하청을 받아서 백 사장을 흔들려다 실패한 ‘관치 청부업자’로 몰렸다. 하지만 이런 관치 프레임은 백 사장 연임 논란의 일면일 뿐이다.

기업은행은 KT&G 사장추천위가 사장 공모 자격을 전·현직 임원으로 제한하는 등 사장후보 선임 절차를 폐쇄적이고 비합리적으로 진행했다면서 단독 후보로 추천된 백 사장 연임에 반대했다. 현 사장에게 매우 유리한 구조로 진행돼 공모절차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는 지적이다. KT&G의 사장후보는 사외이사들만으로 구성된 추천위에서 이뤄진다. 사외이사를 추천하는 과정에도 사장은 개입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사외이사들의 경영진 감시·견제 기능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업은행이 사외이사 2명을 추천한 이유도 주주의 견제와 감시기능 강화였다. 이를 관치라고 일축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사외이사를 추천한 기업은행의 주주제안을 전향적으로 수용해서 경영 투명성을 높이는 계기로 활용하는 편이 낫지 않았나.

국회라는 대의기관이 국민의 대리인인 정부를 감시 견제하듯 기업에선 이사회가 경영진을 감시·견제한다. 어떤 지배구조가 최선이냐는 정답은 없다. 나라마다 기업을 발전시킨 경로가 다르기 때문이다. 국가권력구조에 정답이 없는 것과 같다. 국가 내에서도 기업마다 최적의 지배구조는 다를 수밖에 없다. 창업자가 있는 회사와 공기업으로 출발한 회사의 지배구조를 같은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권력구조, 지배구조든 정부와 경영진은 국민과 주주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 이 원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국민의 권리와 주주의 이익이 침해된다. 기업의 경우엔 장기적으로 기업 가치가 하락한다.

조남규 경제부장

2018-01-16

“오늘의 코인(가상화폐), 최초의 그린 에너지 코인. 비트코인보다 400배 적은 에너지 소모…가장 저평가된 코인.”

지난해 말 사이버 보안업계의 거물인 존 맥아피 MGT캐피털 최고경영자가 이런 내용의 트윗을 날렸다. 그러자 몇 년째 바닥을 기던 해당 코인 가격이 급등했다. 이 코인을 오랫동안 채굴해온 지인은 뜻밖의 성탄절 선물을 받았다. 거액의 평가금액을 맛본 지인은 코인 불리기에 여념이 없다. 요즘엔 하락세여서 차익을 실현하는 게 어떠냐고 권해 봤지만 그는 더 큰 차익을 기대하면서 필자의 조언을 귓등으로 흘리고 있다.

가상화폐 열기가 뜨겁다. 가상화폐를 한몫 잡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해 나갈 미래 혁신기술로 보는 사람도 있다. 전자는 투기를 하고 후자는 투자를 한다. 어느 쪽이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버블이 생겨난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이나 18세기 미시시피사, 남해회사 버블이 그랬다. 당시 금융 중심지였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장에 신종 튤립이 나타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구근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 튤립은 번식시키기 힘들었다. 품귀현상이 가격을 천정부지로 끌어올렸다. 때마침 도입된 옵션 거래로 튤립 구근을 사고파는 권리가 매매되면서 거품이 더 커졌다. 미시시피사는 프랑스 식민 시절 북미대륙 미시시피 지역의 개발·교역권이 수익의 원천이었다. 주식으로 떼돈을 번 사람들이 속출하자 너도나도 주식거래소로 몰려갔다. 영국 남해회사는 스페인 식민지였던 남미의 무역독점권을 보유한 회사였지만 속은 껍데기였다. 스페인이 해상봉쇄에 나서면서 무역업 자체가 이뤄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남해회사는 새로운 투자자 자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배당하는 전형적인 폰지 사기로 한동안 주가를 끌어올렸다. 어느 시점에 사람들이 튤립 구근을 팔기 시작하자 시세는 폭락했다. 미시시피와 남미 지역 사업이 신통치 않다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은 미시시피사와 남해회사 주식을 투매했다. 거품이 터졌다.

가상화폐 버블은 이전 버블들과는 다를까. 넷스케이프 공동설립자인 마크 앤드리슨은 다르다고 단언한다. 그는 2014년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1975년이 PC의 해, 1993년 인터넷의 해였다면 2014년은 비트코인의 해”라면서 PC나 인터넷도 세상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대다수가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비트코인이 PC와 인터넷처럼 상용화된다면 비트코인은 살아남을 것이다. 이런 추정은 희귀한 튤립 구근이 관상용을 넘어서 수출 상품이 됐다면, 남해회사의 식민지 무역이 번성했다면, 미시시피 개발에 나섰던 사람들이 금광이라도 발견했다면 버블은 투자자나 투기꾼에게 이익이 됐을 것이라고 가정해 보는 이치와 같다.

새로운 기술은 버블을 만들어낸다. 버블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버블이 신기술 발전과정에서 동력을 제공하는 경우도 많다. 세계 기축통화라는 달러화에도 거품이 끼어 있다. 그 거품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불러오기도 했지만 달러화는 건재하다. 미국의 막강한 경제력, 국방력 등이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가상화폐 신봉자들은 가상화폐가 블록체인이라는 혁신기술을 동력으로 삼아서 더욱 번성해 나갈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달러 패권에 맞설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믿음이 가상화폐 버블을 지속시키고 있다. 다른 한편에선 “비트코인은 내재적 가치가 전혀 없는 자산이라는 점에서 신뢰가 사라지면 가치가 0으로 폭락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장 티롤 교수)고 경고한다. 미국이 달러화 패권을 지키기 위해 비트코인을 무력화시킬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우리 정부는 후자의 입장에서 가상화폐를 옥죄고 있지만 가상화폐 신봉자들은 물러설 기색이 전혀 없다. 디지털로 호흡하는 이들에게는 국경도 큰 의미가 없다. 이들은 정부가 뭐라 하든 가상화폐 리듬에 맞춰 춤을 출 것이다. 음악은 지속될 수도, 어느 순간 느닷없이 멈출 수도 있다. 그건 시장에서 결정된다. 결정권은 정부가 갖고 있지 않다. 정부가 좌지우지해서도 안 된다. 다만 가상화폐 시장에 참여한 사람들은 버블의 역사가 꾸준히 입증해온 한 가지 사실만은 명심해야 한다. 음악이 멈추면 잔치도 끝난다.

조남규 경제부장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기성세대와 기득권층이 먼저 희생하고 양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우리 청년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11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소년 가장이 돼야 했던 김동연의 아픔이었다. 김 부총리는 청년을 살리고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높이려면 ‘사회보상체계’와 이를 결정하는 방식인 ‘거버넌스’(governance)를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세계일보 창간 29주년을 맞아 이뤄진 김 부총리와의 특별인터뷰는 지난 2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김 부총리는 규제개혁과 관련, “대부분의 규제는 그 규제로 인해서 형성된 기득권 세력이 있고, 그 규제를 풀려면 그들의 기득권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면서 “사회적 대타협은 아니더라도 ‘스몰딜’ 정도의 타협이 이뤄져야 가능한 일인데 이해당사자들만 모여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도 참여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 부총리가 거론한 국민 참여 공론화 방식으로는 신고리 5·6호기 원자력발전소 건설 때 쓰인 ‘공론조사’ 등이 거론된다. 그는 “올해는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과제를 몇 개라도 뽑아 공론화하고 싶다”면서 “작은 과제부터 하나씩 해결해 초기 추동력을 확보하고 더 큰 규제를 개혁하겠다”고 덧붙였다. 청년 일자리 문제와 관련, 김 부총리는 “기존 방식과 틀을 넘어 획기적인 발상으로 실효성 있는 특단의 대책을 만들겠다”면서 “정부가 할 수 있는 것과 민간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같이 하려고 생각 중이고, 올해는 민간에서 일자리가 더 많이 나오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3%로 잡았다.

“대내외 여건이 녹록지 않고 여러 위험 요인이 있지만 3% 성장을 달성하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 성장률보다 중요한 것은 질 높은 성장이다. 수출만 잘 되고 소비와 투자 등 내수가 빈약한 성장은 바람직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성장의 과실이 골고루 퍼져 양극화 문제 등을 극복해 우리 경제의 체질을 강화하는 것이다.”

 

 

― 올해는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를 달성하는 원년이 된다.

“구조개혁이 되지 않고 사회적 자본이 축적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갈 수 있는 국민소득 최대치가 3만달러대일 수도 있다. 4만달러 수준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제도와 시스템, 관행과 의식 등의 근본적인 혁신을 지속해야 한다. 올해 세계경제 전망이 낙관적인데 우리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이번 기회가 구조개혁의 적기’라는 인식하에 개혁에 나서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경제가 좋아지니 우리는 괜찮다’면서 편안한 길을 걷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미국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교수의 저서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는 우리에게 통찰력 있는 시사점을 던진다. 그는 경제위기의 원인을 양극화에 따른 중산층의 구매력 부족 등에서 찾으면서 고통스러운 구조개혁을 감내하지 않는다면 위기가 반복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리도 갈림길에 서 있다.”

― 우리는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하나.

“당연히 구조개혁을 하는 동시에 우리 경제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길로 가야 한다. 국제경제나 우리 경제 여건으로 봐서 올해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구조개혁하기 좋은 시기다. 지금까지 구조개혁이 어려웠던 것은 공고하게 짜여진 기득권 내지는 기득권 카르텔을 변화시키지 못해서다.”

 

 

―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킹핀’(king pin·볼링에서 스트라이크를 치기 위해 공략해야 하는 5번 핀)을 넘어뜨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 사회 문제를 볼링의 핀에 비유하면 이렇다. 맨 앞의 1번 핀을 ‘저성장’, 그 뒤의 2번 핀을 ‘청년 실업’, 그 옆의 3번 핀을 ‘저출산’이라고 가정해보자. 1번 핀을 넘어뜨려도 2번, 3번 핀이 쓰러지지 않는다. 고용 없는 성장시대에 성장률이 올라간다고 청년실업이 해결되거나 출산율이 올라가지 않는다. 우선 사회보상체계를 바꿔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사람과 투자를 혁신시키기 위해서는 사람과 돈의 흐름을 바꿔야 한다. 지금은 사람들이 명문대에 입학해서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 취직하려 한다. 보상이 크기 때문이다. 동시에 승자 독식구조, 가진자들만의 리그, 기득권 카르텔, 부와 사회적 지위의 대물림, 양극화 같은 기울어진 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 사회보상체계가 킹핀이고 보상체계를 결정하는 방식인 거버넌스가 또 다른 킹핀이다.”

― 노동시장 개혁은 역대 정부마다 실패로 끝났다. 어떤 복안을 갖고 있나.

“궁극적으로 고용 유연성을 포함하는 노동시장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 시점에서 바로 유연성 얘기를 하면 못 갈 것이다. 고용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아서다. 유연성을 확보하려면 안정성이 전제돼야 한다. 그래서 고용 안정·유연(Securexibility:Security+Flexibility) 모델이다. 누군가 일시 실업상태가 됐다 하더라도 안정적인 일거리를 찾을 가능성과 기회가 제공돼야 한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너무 안정성이 떨어진다. 그러니 노동자가 그런 문제에 부딪히면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실업급여 지급수준을 높이고 지급 기간도 늘릴 필요가 있다. 그렇게 안정성을 일정 수준으로 높인 뒤 유연성도 같이 얘기해서 사회적 타협을 이뤄야 한다. 최근 사회적 대화를 위한 긍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사회적 합의 과정에서는 기득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먼저 손을 내밀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사회적 신뢰가 생긴다.”

 

― 규제 개혁도 해묵은 과제다.

“우버 같은 카풀앱을 하려면 택시기사가 반대한다. 편의점에서 비상약품 파는 것은 약사들이 반대한다. 의·약대 정원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례가 있다. 타협과정에서 가장 큰 이해당사자인 국민도 참여해야 하고 손해보는 당사자에 대해서는 합리적 보상책을 성의 있게 만들어야 한다. 호주에서는 우버 수익 일부로 택시업자에게 보상한다. 자유무역협정(FTA)할 때는 찬성하는 산업에서 생기는 이익이 반대하는 측에 어떤 형태로든 돌아갔다. 노동개혁이나 규제개혁도 그런 길로 갔으면 좋겠다.”

― 노동개혁, 규제개혁에 성공한 나라들은 사회적 타협을 정부가 주도했다. 독일 사민당 정부가 성공시킨 하르츠 개혁이 대표적이다.

“하르츠 개혁도 정부가 프로펠러 역할을 했지만 밀어붙이기보다는 수많은 대화와 타협을 했다. 독일은 대화와 타협이 일상화된 나라다. 우리도 정부가 중심 역할을 맡아서 끌고 나가야 하지만 노조와 사용자, 시민단체, 정치인 등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대화하고 타협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 최저임금 인상의 취지에 동감하지만 속도가 빠르다. 2020년 1만원까지 올리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은 조정돼야 하지 않나.

“최저임금 인상은 저임금 근로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양극화를 완화하는 조치다. 내수 활성화를 통해 지속적 성장을 이뤄낼 출발점이기도 하다. 물론 인상 속도는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서 신축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올해 최저임금 인상 효과와 일자리안정자금의 집행 등을 감안해서 신축적으로 하겠다.”

― 일자리안정자금 지원이 시장 원리에 배치되는 정책이라는 비판이 나온다.(일자리안정자금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경영 어려움을 지원하기 위해 30인 미만 고용사업주에게 월급 190만원 미만 근로자 1인당 월 13만원을 지원하는 제도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다. 그런데 소득분배 왜곡이 낳은 양극화 때문에 시장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보완이 필요하다. 그런 보완 조치는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이해해주면 좋겠다. 일자리안정자금 지원은 한시적으로 하려고 생각한다. 다만 올 한 해로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원 기간은 상황을 보아가며 판단할 것이다.”

 

― 강남 집값 상승, 과도한 수준인가.

“최근 서울 일부 지역 재건축, 고가아파트의 가격상승세는 정상적인 수준이라고 보기 어렵다. 고가주택, 재건축 아파트 중심의 상승, 전세 안고 집을 사는 ‘갭투자’ 증가, 전세가격 안정 등을 감안하면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수요가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보유세 인상 주장이 타당하다는 취지로 언급했다.

“보유세 인상은 조세형평성 측면이나 거래세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다는 조세정책적 차원에서 언급한 것이다. 앞으로 재정개혁특위를 통해 폭넓은 의견을 수렴해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겠다. 보유세 인상 과정에서 다주택자 등의 부동산 보유에 대한 조세부담의 형평성, 거래세와 보유세 비중, 부동산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겠다.”

대담=조남규 경제부장, 정리=이천종 기자, 사진=남제현 기자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충북 음성(1957년생) ●덕수상고 ●국제대 법학과, 서울대 행정학 석사, 미국 미시간대 정책학 박사 ●행정고시 26회 ●경제기획원 예산실, 경제기획국, 대외경제조정실 사무관 ●기획예산처 재정전략실 전략기획관, 산업재정기획단장, 재정전략실 재정정책기획관 ●대통령실 경제금융비서관, 국정과제비서관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기획재정부 2차관 ●국무조정실장 ●아주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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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 20년-한국 경제 현주소] “30년간 정치가 파괴한 경제생태계… 복원 위한 개혁 시급”

 외환위기 겪은 국민 ‘생계형 인간’ 전락 / 누구도 다음 세대 걱정하는 사람 없어 / 양극화 고착… 젊은이들도 모험 안해 / 5년 단임 정부, 큰 그림 없이 단기 처방 / 기업은 매 정권 몸사리느라 투자 꺼려 / 노동·자본 한 배 타야 경제생태계 복원

대담=조남규 경제부장
 

“다음 위기는 경제생태계의 반란에서 올 것이다.”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1987년 이후 30년 동안 정치가 경제를 크게 압도하고 5년 단임 대통령제의 병폐가 깊어지면서 한국 경제의 생태계가 파괴됐다”면서 “경제생태계의 건강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한국 사회의 병리 현상이 깊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 이사장은 20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협상 수석대표를 맡아 한국을 국가부도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는 IMF 외환위기 10년을 맞은 시점에 자신의 경험을 담은 ‘외환위기 징비록(懲毖錄)’을 출간해 IMF 위기의 부정적 유산(역동성 약화, 양극화 심화, 국가·사회의 문제 해결 능력 약화, 공동체주의 약화)으로 사회 전반의 생산성과 효율성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는 경고음을 울렸다. 환란 이후 출범한 진보정부(김대중, 노무현) 10년을 지켜본 뒤였다.


 

곧이어 보수정부(이명박, 박근혜) 10년이 이어졌지만 한국 경제의 병통은 더 심해졌다는 것이 정 이사장의 진단이다. 세계일보는 환란 20년 시리즈를 마감하면서 외환위기 수습 과정에서 ‘우리 경제의 배를 가르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는 특별한 경험을 했던’ 정 이사장을 만나 한국 경제가 처해 있는 현실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물었다. 인터뷰는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니어재단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이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니어재단 사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외환위기 20년을 맞은 한국 경제의 생태계 복원이 시급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외환위기 20년을 맞는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외환위기 20년이라고 하지만 지금 국민들의 마음에 ‘잘해봐야지’ 하는 생각은 없다. 대한민국 국민은 생계형 인간이 됐다. 국가공동체를 걱정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나라경제도 추격을 할 때가 있다. 그때는 국민들이 총력을 다해 달린다. 우리 경제는 박정희정부 때가 추격의 시기였다. 대통령 혼자 한 게 아니라 모든 국민이 같이 뛰었다. 그 시대에는 국가리더십이 강했다. 장발하면 깎이고 시위하면 감옥 가는 일도 있었지만 다음 세대에 영광된 조국을 물려주기 위해 현 세대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지금은 대통령이나 국민이나 그런 생각을 안 한다. 10년, 20년 내다보면서 다음 세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라가 정체기에 들어섰다는 얘기다.”

-어쩌다 정체에 빠진 나라가 됐나.

“1987년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면서 정치가 경제를 과도하게 압도하게 됐다. 모든 문제를 경제논리 대신 정치논리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사회 전 분야에 만연하게 됐다. 외환위기도 어느 면에서 보면 국가지배구조, 거버넌스의 문제였다. 외환위기가 터졌는데 1997년 봄부터 가을까지 엉거주춤한 상태로 흘러갔다. 마치 전쟁이 터졌는데 지휘관이 어쩔 줄 모르는 상황과 흡사했다. 기아자동차가 부도났을 때 기업의 은행 채무에 대해, 특히 외국 은행이 국내 은행에 빌려준 돈에 대해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준다는 말 한마디만 해줬으면 외환이 나가지 않았을 것이고 외환위기는 없었을 것이라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거버넌스가 없었다. 외환위기를 전후로 이런 느슨한 국가지배구조가 6번째 지속되고 있다. 5년 단임 대통령들은 위기에 대한 근본 처방을 내리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는 쪽에만 관심을 쏟는다. 불안하니까 자기 지역, 자기 파벌 중심으로 대통령을 민다. 그렇게 당선된 대통령은 자기 쪽 사람만 챙긴다. 그러다 보니 과잉 정치화, 과잉 이념화로 치닫는다. 이게 우리 경제를 망쳐왔다. 5년마다 새 정부가 들어와서 파괴를 일삼는다.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대체되듯 새것이 옛것을 밀어내는 슘페터식 ‘창조적 파괴’가 아니다. 새것은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기존 것을 없애는 소멸적 파괴다. 숲의 생태계를 복원하려면 새 나무를 심고 다 크면 잘라야 하는데 5년 단임 정부는 이미 심어진 나무부터 자른다. 이런 환경에서 관료는 굴종할 뿐 추종하지 않는다. 어차피 정권은 또 바뀌니깐. 기업인은 정치인의 눈치만 보면서 위험을 회피하려 한다. 그러니 투자가 일어나지 않는다. 강성해진 시민사회는 자기 몫을 더 크게 주장하고 나선다. 이런 정부와 관료, 기업, 시민사회가 적절히 영합하면서 만들어진 느슨한 국가지배구조는 문제해결 능력이 없다. 그래서 터진 게 외환위기다.”

 

-그래도 역대 정부는 보수든, 진보든 나름의 성장정책을 펴지 않았나.

“5년 단임 정부는 외발자전거를 타고 5년만 가려 했다. 어떤 정부는 노동, 어떤 정부는 자본에 치중했다. 노동과 자본, 둘 중 하나에 중심을 뒀을 뿐 이 둘을 연결하려고는 안 했다. 그러다 보니 경제주체 간 연결고리가 사라졌다. 정부와 기업, 가계를 잇는 피댓줄(벨트)이 끊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기를 올려도 헛바퀴가 돌게 된다. 우리나라는 제조업 구조를 오래 끌고 오면서 제조업의 생산성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정년 연장은 노동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그러면 자본의 한계효율을 높여야 하는데 기업이 신규투자를 꺼리면서 자본효율은 노동생산성보다 더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이렇게 가면 잠재성장률이 제로가 되고 그걸 메우기 위해 재정을 쏟아붓다 보면 재정파탄에 이른다. 경제생태계의 반란이다. 그때는 돈을 쏟아부어도 소용없다.”

-경제생태계를 복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한의학에서는 몸의 경혈을 따라 기가 움직인다고 한다. 그래서 머리가 아픈 환자의 손목에 침을 놓기도 한다. 순환체계를 통해 병을 고치는 것이다. 이처럼 경제생태계도 원활하게 순환해야 한다. 지금은 순환체계가 막혀 있다. 대표적으로 가계와 기업이 연결돼 있지 않다. 생태계가 자꾸만 침하하고 있다. 생태계 복원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개혁이다. 우리 경제를 압박하고 있는 과잉 정치화, 과잉 이념화의 덫을 제거해야 한다. 기득권의 거대한 담합구조를 제거해야 한다. 이 작업은 5년 단임 대통령 혼자 할 수 없다. 수십년 동안 형성된 기득권을 혁파하려면 이를 해체하는 데도 수십년이 걸린다. 정치가 길게 봐야 한다. 5년 단임 정부는 시계(視界)가 5년밖에 안 된다. 내일을 걱정하면서도 오늘이 급한 정부다. 이것이 앞서 말한 정체기의 현상이다. 신체를 보면 간과 신장이 독소를 걸러낸다. 사회에서는 언론과 지식사회가 그 역할을 한다. 언론과 지식사회가 그걸 제대로 못하고 있다.”

 

 

IMF 협상 타결되던 날 국가부도 위기에 놓인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과 구제금융 협상을 하고 있던 1997년 12월3일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싱가포르 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 강만수 재경원 차관(맨왼쪽)과 정덕구 재경원 제2차관보(맨오른쪽)의 마중을 받으며 입국하고 있다. 당시 정 2차관보는 IMF와의 실무협상을 주도했다. 협상은 캉드쉬 총재가 입국한 날 타결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어떤 정치개혁이 필요한가.

“내가 국회의원 2년만 하고 그만뒀다. 정파 이익을 위하여 이익담합 구조에 갇혀 있는 그들 앞에서 나는 항상 혼자였다. 내 외침은 크게 울렸으나 이를 귀담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의원직 사퇴 직후 니어재단을 창립했다. 정당정치에 가면 국회의원은 장기판의 졸이다. 의원은 헌법기관이 아닌 추종자일 뿐이다. 계파 이익을 우선하는 칡뿌리 민주주의를 국민 주권의 풀뿌리 민주주의로 전환해야 한다. 정당의 정책 생산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이런 정치개혁으로 체제를 잘 갖추면 4년 중임제든 의원내각제든 상관없다. 5년 단임제의 한계인 쇼터미즘(short-termism:단기적인 이익만 생각하는 주의)도 개선해야 한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국민의 생존 방정식도 달라졌다.

“정치도, 정부도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고 생각한 국민은 독자생존으로 갈 수밖에 없다. 각자도생이다. 생존 터전이 척박하기 때문이다. 국가공동체에 대한 부채의식이라든지,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 생존형 인간은 크게 변하는 것을 싫어한다. 힘 있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끼리, 힘없는 사람은 힘없는 사람끼리 모여서 담합 구조를 형성한다.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기득권 구조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구조 안에 편입되면 바보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 생존형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는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기 힘들다. 부모들의 과보호로 아이들이 나약해졌다. 내가 10년 고생해서 수백명 먹여살리는 사업가가 되겠다는 젊은이들이 없다. 부모들이 말린다. 모험심을 독려하는 사회 분위기, 가정 분위기가 사라졌다. 국민들이 물렁해졌다. 다음 세대가 우리 세대보다 못살 것이라는 일반적 견해에 동의한다. 사회생태계는 양극화, 단층화됐다. 부자끼리 모여서 같은 학교 보내고 같은 헬스클럽 다니면서 자기들끼리 소통한다.”

 

-문재인정부는 임기 동안 어떻게 해야 하나.

“문재인 대통령이 두발자전거를 타고 경제생태계의 숲을 쭉 돌아본 뒤 멀리 보고 페달을 밟았으면 좋겠다. 자본과 노동을 한 배에 태워야 한다. 외발자전거로는 멀리 갈 수 없다. 두발자전거를 타고 긴 호흡과 담대한 인내를 갖고 다음 정부에 무엇을 넘겨줄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잘못된 길을 너무 오래 걸어왔다. 그동안 정치가 해도 너무 했다.”

정리=이진경 기자

●정덕구 이사장은
고려대 상대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 매디슨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제10회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 재정경제원 대외경제국장, 기획관리실장, 제2차관보, IMF 협상 수석대표 등을 거쳐 재정경제부 차관, 산업자원부 장관을 역임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중국 베이징대와 런민대 초빙교수, 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저서로는 ‘거대 중국과의 대화’, ‘키움과 나눔을 넘어서’, ‘외환위기 징비록’, ‘한국을 보는 중국의 본심’, ‘기로에 선 북중관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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