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16

“오늘의 코인(가상화폐), 최초의 그린 에너지 코인. 비트코인보다 400배 적은 에너지 소모…가장 저평가된 코인.”

지난해 말 사이버 보안업계의 거물인 존 맥아피 MGT캐피털 최고경영자가 이런 내용의 트윗을 날렸다. 그러자 몇 년째 바닥을 기던 해당 코인 가격이 급등했다. 이 코인을 오랫동안 채굴해온 지인은 뜻밖의 성탄절 선물을 받았다. 거액의 평가금액을 맛본 지인은 코인 불리기에 여념이 없다. 요즘엔 하락세여서 차익을 실현하는 게 어떠냐고 권해 봤지만 그는 더 큰 차익을 기대하면서 필자의 조언을 귓등으로 흘리고 있다.

가상화폐 열기가 뜨겁다. 가상화폐를 한몫 잡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해 나갈 미래 혁신기술로 보는 사람도 있다. 전자는 투기를 하고 후자는 투자를 한다. 어느 쪽이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버블이 생겨난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이나 18세기 미시시피사, 남해회사 버블이 그랬다. 당시 금융 중심지였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장에 신종 튤립이 나타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구근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 튤립은 번식시키기 힘들었다. 품귀현상이 가격을 천정부지로 끌어올렸다. 때마침 도입된 옵션 거래로 튤립 구근을 사고파는 권리가 매매되면서 거품이 더 커졌다. 미시시피사는 프랑스 식민 시절 북미대륙 미시시피 지역의 개발·교역권이 수익의 원천이었다. 주식으로 떼돈을 번 사람들이 속출하자 너도나도 주식거래소로 몰려갔다. 영국 남해회사는 스페인 식민지였던 남미의 무역독점권을 보유한 회사였지만 속은 껍데기였다. 스페인이 해상봉쇄에 나서면서 무역업 자체가 이뤄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남해회사는 새로운 투자자 자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배당하는 전형적인 폰지 사기로 한동안 주가를 끌어올렸다. 어느 시점에 사람들이 튤립 구근을 팔기 시작하자 시세는 폭락했다. 미시시피와 남미 지역 사업이 신통치 않다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은 미시시피사와 남해회사 주식을 투매했다. 거품이 터졌다.

가상화폐 버블은 이전 버블들과는 다를까. 넷스케이프 공동설립자인 마크 앤드리슨은 다르다고 단언한다. 그는 2014년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1975년이 PC의 해, 1993년 인터넷의 해였다면 2014년은 비트코인의 해”라면서 PC나 인터넷도 세상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대다수가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비트코인이 PC와 인터넷처럼 상용화된다면 비트코인은 살아남을 것이다. 이런 추정은 희귀한 튤립 구근이 관상용을 넘어서 수출 상품이 됐다면, 남해회사의 식민지 무역이 번성했다면, 미시시피 개발에 나섰던 사람들이 금광이라도 발견했다면 버블은 투자자나 투기꾼에게 이익이 됐을 것이라고 가정해 보는 이치와 같다.

새로운 기술은 버블을 만들어낸다. 버블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버블이 신기술 발전과정에서 동력을 제공하는 경우도 많다. 세계 기축통화라는 달러화에도 거품이 끼어 있다. 그 거품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불러오기도 했지만 달러화는 건재하다. 미국의 막강한 경제력, 국방력 등이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가상화폐 신봉자들은 가상화폐가 블록체인이라는 혁신기술을 동력으로 삼아서 더욱 번성해 나갈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달러 패권에 맞설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믿음이 가상화폐 버블을 지속시키고 있다. 다른 한편에선 “비트코인은 내재적 가치가 전혀 없는 자산이라는 점에서 신뢰가 사라지면 가치가 0으로 폭락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장 티롤 교수)고 경고한다. 미국이 달러화 패권을 지키기 위해 비트코인을 무력화시킬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우리 정부는 후자의 입장에서 가상화폐를 옥죄고 있지만 가상화폐 신봉자들은 물러설 기색이 전혀 없다. 디지털로 호흡하는 이들에게는 국경도 큰 의미가 없다. 이들은 정부가 뭐라 하든 가상화폐 리듬에 맞춰 춤을 출 것이다. 음악은 지속될 수도, 어느 순간 느닷없이 멈출 수도 있다. 그건 시장에서 결정된다. 결정권은 정부가 갖고 있지 않다. 정부가 좌지우지해서도 안 된다. 다만 가상화폐 시장에 참여한 사람들은 버블의 역사가 꾸준히 입증해온 한 가지 사실만은 명심해야 한다. 음악이 멈추면 잔치도 끝난다.

조남규 경제부장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기성세대와 기득권층이 먼저 희생하고 양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우리 청년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11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소년 가장이 돼야 했던 김동연의 아픔이었다. 김 부총리는 청년을 살리고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높이려면 ‘사회보상체계’와 이를 결정하는 방식인 ‘거버넌스’(governance)를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세계일보 창간 29주년을 맞아 이뤄진 김 부총리와의 특별인터뷰는 지난 2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김 부총리는 규제개혁과 관련, “대부분의 규제는 그 규제로 인해서 형성된 기득권 세력이 있고, 그 규제를 풀려면 그들의 기득권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면서 “사회적 대타협은 아니더라도 ‘스몰딜’ 정도의 타협이 이뤄져야 가능한 일인데 이해당사자들만 모여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도 참여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 부총리가 거론한 국민 참여 공론화 방식으로는 신고리 5·6호기 원자력발전소 건설 때 쓰인 ‘공론조사’ 등이 거론된다. 그는 “올해는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과제를 몇 개라도 뽑아 공론화하고 싶다”면서 “작은 과제부터 하나씩 해결해 초기 추동력을 확보하고 더 큰 규제를 개혁하겠다”고 덧붙였다. 청년 일자리 문제와 관련, 김 부총리는 “기존 방식과 틀을 넘어 획기적인 발상으로 실효성 있는 특단의 대책을 만들겠다”면서 “정부가 할 수 있는 것과 민간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같이 하려고 생각 중이고, 올해는 민간에서 일자리가 더 많이 나오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3%로 잡았다.

“대내외 여건이 녹록지 않고 여러 위험 요인이 있지만 3% 성장을 달성하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 성장률보다 중요한 것은 질 높은 성장이다. 수출만 잘 되고 소비와 투자 등 내수가 빈약한 성장은 바람직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성장의 과실이 골고루 퍼져 양극화 문제 등을 극복해 우리 경제의 체질을 강화하는 것이다.”

 

 

― 올해는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를 달성하는 원년이 된다.

“구조개혁이 되지 않고 사회적 자본이 축적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갈 수 있는 국민소득 최대치가 3만달러대일 수도 있다. 4만달러 수준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제도와 시스템, 관행과 의식 등의 근본적인 혁신을 지속해야 한다. 올해 세계경제 전망이 낙관적인데 우리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이번 기회가 구조개혁의 적기’라는 인식하에 개혁에 나서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경제가 좋아지니 우리는 괜찮다’면서 편안한 길을 걷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미국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교수의 저서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는 우리에게 통찰력 있는 시사점을 던진다. 그는 경제위기의 원인을 양극화에 따른 중산층의 구매력 부족 등에서 찾으면서 고통스러운 구조개혁을 감내하지 않는다면 위기가 반복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리도 갈림길에 서 있다.”

― 우리는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하나.

“당연히 구조개혁을 하는 동시에 우리 경제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길로 가야 한다. 국제경제나 우리 경제 여건으로 봐서 올해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구조개혁하기 좋은 시기다. 지금까지 구조개혁이 어려웠던 것은 공고하게 짜여진 기득권 내지는 기득권 카르텔을 변화시키지 못해서다.”

 

 

―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킹핀’(king pin·볼링에서 스트라이크를 치기 위해 공략해야 하는 5번 핀)을 넘어뜨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 사회 문제를 볼링의 핀에 비유하면 이렇다. 맨 앞의 1번 핀을 ‘저성장’, 그 뒤의 2번 핀을 ‘청년 실업’, 그 옆의 3번 핀을 ‘저출산’이라고 가정해보자. 1번 핀을 넘어뜨려도 2번, 3번 핀이 쓰러지지 않는다. 고용 없는 성장시대에 성장률이 올라간다고 청년실업이 해결되거나 출산율이 올라가지 않는다. 우선 사회보상체계를 바꿔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사람과 투자를 혁신시키기 위해서는 사람과 돈의 흐름을 바꿔야 한다. 지금은 사람들이 명문대에 입학해서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 취직하려 한다. 보상이 크기 때문이다. 동시에 승자 독식구조, 가진자들만의 리그, 기득권 카르텔, 부와 사회적 지위의 대물림, 양극화 같은 기울어진 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 사회보상체계가 킹핀이고 보상체계를 결정하는 방식인 거버넌스가 또 다른 킹핀이다.”

― 노동시장 개혁은 역대 정부마다 실패로 끝났다. 어떤 복안을 갖고 있나.

“궁극적으로 고용 유연성을 포함하는 노동시장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 시점에서 바로 유연성 얘기를 하면 못 갈 것이다. 고용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아서다. 유연성을 확보하려면 안정성이 전제돼야 한다. 그래서 고용 안정·유연(Securexibility:Security+Flexibility) 모델이다. 누군가 일시 실업상태가 됐다 하더라도 안정적인 일거리를 찾을 가능성과 기회가 제공돼야 한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너무 안정성이 떨어진다. 그러니 노동자가 그런 문제에 부딪히면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실업급여 지급수준을 높이고 지급 기간도 늘릴 필요가 있다. 그렇게 안정성을 일정 수준으로 높인 뒤 유연성도 같이 얘기해서 사회적 타협을 이뤄야 한다. 최근 사회적 대화를 위한 긍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사회적 합의 과정에서는 기득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먼저 손을 내밀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사회적 신뢰가 생긴다.”

 

― 규제 개혁도 해묵은 과제다.

“우버 같은 카풀앱을 하려면 택시기사가 반대한다. 편의점에서 비상약품 파는 것은 약사들이 반대한다. 의·약대 정원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례가 있다. 타협과정에서 가장 큰 이해당사자인 국민도 참여해야 하고 손해보는 당사자에 대해서는 합리적 보상책을 성의 있게 만들어야 한다. 호주에서는 우버 수익 일부로 택시업자에게 보상한다. 자유무역협정(FTA)할 때는 찬성하는 산업에서 생기는 이익이 반대하는 측에 어떤 형태로든 돌아갔다. 노동개혁이나 규제개혁도 그런 길로 갔으면 좋겠다.”

― 노동개혁, 규제개혁에 성공한 나라들은 사회적 타협을 정부가 주도했다. 독일 사민당 정부가 성공시킨 하르츠 개혁이 대표적이다.

“하르츠 개혁도 정부가 프로펠러 역할을 했지만 밀어붙이기보다는 수많은 대화와 타협을 했다. 독일은 대화와 타협이 일상화된 나라다. 우리도 정부가 중심 역할을 맡아서 끌고 나가야 하지만 노조와 사용자, 시민단체, 정치인 등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대화하고 타협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 최저임금 인상의 취지에 동감하지만 속도가 빠르다. 2020년 1만원까지 올리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은 조정돼야 하지 않나.

“최저임금 인상은 저임금 근로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양극화를 완화하는 조치다. 내수 활성화를 통해 지속적 성장을 이뤄낼 출발점이기도 하다. 물론 인상 속도는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서 신축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올해 최저임금 인상 효과와 일자리안정자금의 집행 등을 감안해서 신축적으로 하겠다.”

― 일자리안정자금 지원이 시장 원리에 배치되는 정책이라는 비판이 나온다.(일자리안정자금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경영 어려움을 지원하기 위해 30인 미만 고용사업주에게 월급 190만원 미만 근로자 1인당 월 13만원을 지원하는 제도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다. 그런데 소득분배 왜곡이 낳은 양극화 때문에 시장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보완이 필요하다. 그런 보완 조치는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이해해주면 좋겠다. 일자리안정자금 지원은 한시적으로 하려고 생각한다. 다만 올 한 해로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원 기간은 상황을 보아가며 판단할 것이다.”

 

― 강남 집값 상승, 과도한 수준인가.

“최근 서울 일부 지역 재건축, 고가아파트의 가격상승세는 정상적인 수준이라고 보기 어렵다. 고가주택, 재건축 아파트 중심의 상승, 전세 안고 집을 사는 ‘갭투자’ 증가, 전세가격 안정 등을 감안하면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수요가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보유세 인상 주장이 타당하다는 취지로 언급했다.

“보유세 인상은 조세형평성 측면이나 거래세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다는 조세정책적 차원에서 언급한 것이다. 앞으로 재정개혁특위를 통해 폭넓은 의견을 수렴해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겠다. 보유세 인상 과정에서 다주택자 등의 부동산 보유에 대한 조세부담의 형평성, 거래세와 보유세 비중, 부동산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겠다.”

대담=조남규 경제부장, 정리=이천종 기자, 사진=남제현 기자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충북 음성(1957년생) ●덕수상고 ●국제대 법학과, 서울대 행정학 석사, 미국 미시간대 정책학 박사 ●행정고시 26회 ●경제기획원 예산실, 경제기획국, 대외경제조정실 사무관 ●기획예산처 재정전략실 전략기획관, 산업재정기획단장, 재정전략실 재정정책기획관 ●대통령실 경제금융비서관, 국정과제비서관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기획재정부 2차관 ●국무조정실장 ●아주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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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 20년-한국 경제 현주소] “30년간 정치가 파괴한 경제생태계… 복원 위한 개혁 시급”

 외환위기 겪은 국민 ‘생계형 인간’ 전락 / 누구도 다음 세대 걱정하는 사람 없어 / 양극화 고착… 젊은이들도 모험 안해 / 5년 단임 정부, 큰 그림 없이 단기 처방 / 기업은 매 정권 몸사리느라 투자 꺼려 / 노동·자본 한 배 타야 경제생태계 복원

대담=조남규 경제부장
 

“다음 위기는 경제생태계의 반란에서 올 것이다.”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1987년 이후 30년 동안 정치가 경제를 크게 압도하고 5년 단임 대통령제의 병폐가 깊어지면서 한국 경제의 생태계가 파괴됐다”면서 “경제생태계의 건강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한국 사회의 병리 현상이 깊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 이사장은 20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협상 수석대표를 맡아 한국을 국가부도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는 IMF 외환위기 10년을 맞은 시점에 자신의 경험을 담은 ‘외환위기 징비록(懲毖錄)’을 출간해 IMF 위기의 부정적 유산(역동성 약화, 양극화 심화, 국가·사회의 문제 해결 능력 약화, 공동체주의 약화)으로 사회 전반의 생산성과 효율성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는 경고음을 울렸다. 환란 이후 출범한 진보정부(김대중, 노무현) 10년을 지켜본 뒤였다.


 

곧이어 보수정부(이명박, 박근혜) 10년이 이어졌지만 한국 경제의 병통은 더 심해졌다는 것이 정 이사장의 진단이다. 세계일보는 환란 20년 시리즈를 마감하면서 외환위기 수습 과정에서 ‘우리 경제의 배를 가르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는 특별한 경험을 했던’ 정 이사장을 만나 한국 경제가 처해 있는 현실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물었다. 인터뷰는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니어재단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이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니어재단 사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외환위기 20년을 맞은 한국 경제의 생태계 복원이 시급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외환위기 20년을 맞는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외환위기 20년이라고 하지만 지금 국민들의 마음에 ‘잘해봐야지’ 하는 생각은 없다. 대한민국 국민은 생계형 인간이 됐다. 국가공동체를 걱정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나라경제도 추격을 할 때가 있다. 그때는 국민들이 총력을 다해 달린다. 우리 경제는 박정희정부 때가 추격의 시기였다. 대통령 혼자 한 게 아니라 모든 국민이 같이 뛰었다. 그 시대에는 국가리더십이 강했다. 장발하면 깎이고 시위하면 감옥 가는 일도 있었지만 다음 세대에 영광된 조국을 물려주기 위해 현 세대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지금은 대통령이나 국민이나 그런 생각을 안 한다. 10년, 20년 내다보면서 다음 세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라가 정체기에 들어섰다는 얘기다.”

-어쩌다 정체에 빠진 나라가 됐나.

“1987년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면서 정치가 경제를 과도하게 압도하게 됐다. 모든 문제를 경제논리 대신 정치논리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사회 전 분야에 만연하게 됐다. 외환위기도 어느 면에서 보면 국가지배구조, 거버넌스의 문제였다. 외환위기가 터졌는데 1997년 봄부터 가을까지 엉거주춤한 상태로 흘러갔다. 마치 전쟁이 터졌는데 지휘관이 어쩔 줄 모르는 상황과 흡사했다. 기아자동차가 부도났을 때 기업의 은행 채무에 대해, 특히 외국 은행이 국내 은행에 빌려준 돈에 대해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준다는 말 한마디만 해줬으면 외환이 나가지 않았을 것이고 외환위기는 없었을 것이라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거버넌스가 없었다. 외환위기를 전후로 이런 느슨한 국가지배구조가 6번째 지속되고 있다. 5년 단임 대통령들은 위기에 대한 근본 처방을 내리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는 쪽에만 관심을 쏟는다. 불안하니까 자기 지역, 자기 파벌 중심으로 대통령을 민다. 그렇게 당선된 대통령은 자기 쪽 사람만 챙긴다. 그러다 보니 과잉 정치화, 과잉 이념화로 치닫는다. 이게 우리 경제를 망쳐왔다. 5년마다 새 정부가 들어와서 파괴를 일삼는다.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대체되듯 새것이 옛것을 밀어내는 슘페터식 ‘창조적 파괴’가 아니다. 새것은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기존 것을 없애는 소멸적 파괴다. 숲의 생태계를 복원하려면 새 나무를 심고 다 크면 잘라야 하는데 5년 단임 정부는 이미 심어진 나무부터 자른다. 이런 환경에서 관료는 굴종할 뿐 추종하지 않는다. 어차피 정권은 또 바뀌니깐. 기업인은 정치인의 눈치만 보면서 위험을 회피하려 한다. 그러니 투자가 일어나지 않는다. 강성해진 시민사회는 자기 몫을 더 크게 주장하고 나선다. 이런 정부와 관료, 기업, 시민사회가 적절히 영합하면서 만들어진 느슨한 국가지배구조는 문제해결 능력이 없다. 그래서 터진 게 외환위기다.”

 

-그래도 역대 정부는 보수든, 진보든 나름의 성장정책을 펴지 않았나.

“5년 단임 정부는 외발자전거를 타고 5년만 가려 했다. 어떤 정부는 노동, 어떤 정부는 자본에 치중했다. 노동과 자본, 둘 중 하나에 중심을 뒀을 뿐 이 둘을 연결하려고는 안 했다. 그러다 보니 경제주체 간 연결고리가 사라졌다. 정부와 기업, 가계를 잇는 피댓줄(벨트)이 끊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기를 올려도 헛바퀴가 돌게 된다. 우리나라는 제조업 구조를 오래 끌고 오면서 제조업의 생산성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정년 연장은 노동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그러면 자본의 한계효율을 높여야 하는데 기업이 신규투자를 꺼리면서 자본효율은 노동생산성보다 더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이렇게 가면 잠재성장률이 제로가 되고 그걸 메우기 위해 재정을 쏟아붓다 보면 재정파탄에 이른다. 경제생태계의 반란이다. 그때는 돈을 쏟아부어도 소용없다.”

-경제생태계를 복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한의학에서는 몸의 경혈을 따라 기가 움직인다고 한다. 그래서 머리가 아픈 환자의 손목에 침을 놓기도 한다. 순환체계를 통해 병을 고치는 것이다. 이처럼 경제생태계도 원활하게 순환해야 한다. 지금은 순환체계가 막혀 있다. 대표적으로 가계와 기업이 연결돼 있지 않다. 생태계가 자꾸만 침하하고 있다. 생태계 복원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개혁이다. 우리 경제를 압박하고 있는 과잉 정치화, 과잉 이념화의 덫을 제거해야 한다. 기득권의 거대한 담합구조를 제거해야 한다. 이 작업은 5년 단임 대통령 혼자 할 수 없다. 수십년 동안 형성된 기득권을 혁파하려면 이를 해체하는 데도 수십년이 걸린다. 정치가 길게 봐야 한다. 5년 단임 정부는 시계(視界)가 5년밖에 안 된다. 내일을 걱정하면서도 오늘이 급한 정부다. 이것이 앞서 말한 정체기의 현상이다. 신체를 보면 간과 신장이 독소를 걸러낸다. 사회에서는 언론과 지식사회가 그 역할을 한다. 언론과 지식사회가 그걸 제대로 못하고 있다.”

 

 

IMF 협상 타결되던 날 국가부도 위기에 놓인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과 구제금융 협상을 하고 있던 1997년 12월3일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싱가포르 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 강만수 재경원 차관(맨왼쪽)과 정덕구 재경원 제2차관보(맨오른쪽)의 마중을 받으며 입국하고 있다. 당시 정 2차관보는 IMF와의 실무협상을 주도했다. 협상은 캉드쉬 총재가 입국한 날 타결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어떤 정치개혁이 필요한가.

“내가 국회의원 2년만 하고 그만뒀다. 정파 이익을 위하여 이익담합 구조에 갇혀 있는 그들 앞에서 나는 항상 혼자였다. 내 외침은 크게 울렸으나 이를 귀담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의원직 사퇴 직후 니어재단을 창립했다. 정당정치에 가면 국회의원은 장기판의 졸이다. 의원은 헌법기관이 아닌 추종자일 뿐이다. 계파 이익을 우선하는 칡뿌리 민주주의를 국민 주권의 풀뿌리 민주주의로 전환해야 한다. 정당의 정책 생산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이런 정치개혁으로 체제를 잘 갖추면 4년 중임제든 의원내각제든 상관없다. 5년 단임제의 한계인 쇼터미즘(short-termism:단기적인 이익만 생각하는 주의)도 개선해야 한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국민의 생존 방정식도 달라졌다.

“정치도, 정부도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고 생각한 국민은 독자생존으로 갈 수밖에 없다. 각자도생이다. 생존 터전이 척박하기 때문이다. 국가공동체에 대한 부채의식이라든지,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 생존형 인간은 크게 변하는 것을 싫어한다. 힘 있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끼리, 힘없는 사람은 힘없는 사람끼리 모여서 담합 구조를 형성한다.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기득권 구조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구조 안에 편입되면 바보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 생존형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는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기 힘들다. 부모들의 과보호로 아이들이 나약해졌다. 내가 10년 고생해서 수백명 먹여살리는 사업가가 되겠다는 젊은이들이 없다. 부모들이 말린다. 모험심을 독려하는 사회 분위기, 가정 분위기가 사라졌다. 국민들이 물렁해졌다. 다음 세대가 우리 세대보다 못살 것이라는 일반적 견해에 동의한다. 사회생태계는 양극화, 단층화됐다. 부자끼리 모여서 같은 학교 보내고 같은 헬스클럽 다니면서 자기들끼리 소통한다.”

 

-문재인정부는 임기 동안 어떻게 해야 하나.

“문재인 대통령이 두발자전거를 타고 경제생태계의 숲을 쭉 돌아본 뒤 멀리 보고 페달을 밟았으면 좋겠다. 자본과 노동을 한 배에 태워야 한다. 외발자전거로는 멀리 갈 수 없다. 두발자전거를 타고 긴 호흡과 담대한 인내를 갖고 다음 정부에 무엇을 넘겨줄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잘못된 길을 너무 오래 걸어왔다. 그동안 정치가 해도 너무 했다.”

정리=이진경 기자

●정덕구 이사장은
고려대 상대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 매디슨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제10회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 재정경제원 대외경제국장, 기획관리실장, 제2차관보, IMF 협상 수석대표 등을 거쳐 재정경제부 차관, 산업자원부 장관을 역임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중국 베이징대와 런민대 초빙교수, 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저서로는 ‘거대 중국과의 대화’, ‘키움과 나눔을 넘어서’, ‘외환위기 징비록’, ‘한국을 보는 중국의 본심’, ‘기로에 선 북중관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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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2017년 사회조사’ 결과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한국인 3명 중 2명은 일생 동안 노력해도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낮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 우려스러운 대목은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자식 세대의 계층 상승 가능성에 대해서도 ‘낮다’고 한 점이다. 그렇게 답한 비율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본인과 자식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상류층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군에서는 본인 세대와 자식 세대의 계층이동 가능성을 모두 높게 봤다. 소득과 부의 양극화가 희망의 양극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사회는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2010년 6·25전쟁 발발 60년을 맞아 존 놀런 ‘스텝토 & 존슨’ 로펌 회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6·25전쟁 참전용사인 놀런 변호사는 6·25전쟁을 미국의 독립전쟁에 비유하면서 “미국이 독립전쟁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웠듯이, 한국전쟁도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이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는 발판이 됐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쟁이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전쟁 자체는 비극이었지만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충격이 신분과 계급의 장벽을 부숴버렸다.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출세할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 이런 신분 상승 욕구가 우리나라를 6·25전쟁이 남긴 폐허 위에서 중견 경제국으로 도약시킨 동력으로 작용했다.

경제학 교수 출신인 조윤제 주미 대사도 놀런 변호사와 유사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는 최근 내놓은 저서 ‘생존의 경제학’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정부 수립 이후, 특히 한국전쟁 이후 똑같은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면서 이는 한반도 수천년 역사상 초유의 경험이었다고 썼다. 과거 역사에서 소수 지배집단에만 열려있던 출세와 축재, 입신의 기회가 모든 국민에게 허용되면서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역동성을 갖게 됐고, 이는 기적 같은 경제성장 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는 개천에서 용이 나기 힘든 ‘닫힌 사회’로 변해갔다. 모두가 선망하는 양질의 일자리는 소수의 카르텔 속에서 유전되고 있다. 요즘 세간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채용비리 사건이 비단 금감원, 우리은행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발전 동력으로 작용했던 신분 상승 욕구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 곳곳에 기득권을 만들어냈다. 이제는 그 기득권이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기득권 수호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기득권자들의 유착 속에서 공정경쟁은 질식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좌절감과 열패감이 확산된다. 통계청의 2017년 사회조사 결과 그대로다.

문재인정부의 첫 번째 과제는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되살리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다시 6·25전쟁 직후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쟁에 버금가는 충격으로 우리 사회를 혁신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공정경쟁을 가로막는 온갖 종류의 반칙을 걷어내야 한다. 정부든, 기업이든, 노조든, 아니 그 무엇이든 이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기득권을 손봐야 한다. 불필요한 규제는 기득권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기업과 개인의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규제는 하루빨리 없애야 한다. 이미 경쟁력을 잃은 부문, 사라질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혈세를 퍼붓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그럴 돈이 있으면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데 한푼이라도 더 투입해야 한다.

사회의 역동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경제 생태계의 역동성도 커져야 한다. 그러려면 수출 기업의 국제경쟁력과 서비스 산업의 질을 높여야 한다. 과거엔 가계소득을 높여주면 소비가 늘고 국내 기업이 투자에 나서는 선순환이 이뤄졌으나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그 고리가 느슨해졌다. 국내외 소비자들은 더 싸고 더 질 좋은 제품을 손쉽게 찾아다닌다.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지 않으면 국내에서 풀린 돈이 투자로 이어지기는커녕 자산 거품을 만들어내기 십상이다. 경쟁력을 키우려면 기득권의 양보를 이끌어내야 한다. 독일을 회생시킨 슈뢰더 총리가 지지층의 반발을 무릅쓰면서 걸어간 길이다.

조남규 경제부장

“금융투자업이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 성공을 도울 수 있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25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 집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가진 자리에서 “이번 정부가 표방한 창업부터 혁신성장, 일자리 창출, 소득주도 성장, 이런 맥락의 핵심에 모험자본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모험자본 활성화의 주체는 은행이나 보험회사가 아닌 벤처, 증권회사가 할 일”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아시아 자산운용허브’의 기치를 내걸었다. 노무현정부가 주창했던 ‘동북아 금융허브’를 발전적으로 계승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면밀한 투자 전략과 신뢰 구축을 통해 한국에서도 금융의 삼성전자가 출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이 25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 집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금융투자업이 문재인정부의 혁신성장을 추동하는 전진기지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금융투자업계는 뭘 원하는가. 

“정부와 국회가 과감히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 그 하나가 기업금융 한도를 늘려주는 것이다. 현재 국회 정무위 전체회의에는 증권사의 기업금융 한도를 확대(증권사 자기자본 100%→200%)하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박근혜정부에서 발의돼 정무위 법안심사소위까지 통과했다. 그런데 문재인정부로 바뀌면서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 이 법안은 사실 문재인정부가 주창한 ‘생산적 금융’ 기조에 부합하는 것이다. 최종구 신임 금융위원장의 취임사 화두가 그것이다. 이제 금융이 가계대출 같은 비생산적 분야 대신 벤처, 중소기업처럼 새로운 성장동력,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곳에 돈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자본시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금융투자업계는 모험자본 활성화, 증권화를 통한 유동자금 흡수방안 등 다른 금융업권이 할 수 없는 생산적 금융분야를 고민하고 있다. 증권사의 기업금융 한도 확대도 그 일환이다. 그렇다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앞장서 도와줘야 하는 게 맞는데 오히려 여당의 동력을 못 받고 있는 현실이다.”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법안을 여당이 왜 반대하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현 정부 기조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빨리 하자고 해야 할 판인데 집권 여당에서 반대하니 황당하다. 증권사 기업금융 가운데 90%가 신용이 낮은 A등급 이하 기업용 대출이나 채권 인수다. 중견 기업 이하 기업에 대출이 나갔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정부가 원하는 것 아닌가. 증권회사는 대기업과 거래하는 은행과 경쟁할 수 없다. 은행과 우리는 노는 물이 다르다. 은행처럼 부동산 대출하기 위해 신용공여 한도를 늘려 달라는 것도 아니다. 기업 대출도 중소기업으로 제한하라고 하면 제한하겠다는 입장이다. 우리에게 새 정부를 도울 수 있는 ‘총알’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은행이나 보험업에 비해 금융투자업이 불합리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얘기해 왔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추석 연휴 이후에 그런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한 ‘증권사 균형발전 100대 과제’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제 증권사도 법인 지급결제, 외환거래 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보험은 10년 이상 보유하고 있으면 비과세인데 펀드와 주식은 안 된다. 이런 게 국내의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해외 금융투자업과의 관계에서 기울어진 운동장도 존재한다. 홍콩, 싱가포르, 런던에서는 증권사들이 다 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예 못하는 것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회사 간 합병 가격을 법에 명시하고 있는 규제다. 문제가 됐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건만 해도 기업은 법을 준수했지만 당시 합병비율이 사회적 통념에 맞지 않았다.” 

-올가을엔 초대형 투자은행(IB)이 탄생한다.  

“10월이면 초대형 IB 지정, 단기금융업 인가가 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증권회사 다 합쳐도 자기자본금이 48조원 정도에 불과하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110조원, 중국의 중신증권도 50조원에 달한다. 증권회사가 큰 프로젝트, 국제적인 인수금융 업무를 하려면 어느 정도 덩치가 있어야 한다. 자본금이 크고 덩치가 크면 위상도 신뢰수준도 올라가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KB금융이 전 계열사에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행사 지침)를 도입하기로 했다. 국민연금도 적극적이다.  

“스튜어드십 코드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핵심은 국민연금이다. 일본 정부연금투자펀드(GPIF)는 우리의 국민연금 같은 조직이다. 운용액이 1500조원 규모다. GPIF가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면 정부 의도대로 연금을 사용한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이른바 ‘연금 사회주의’ 논란이다. 그래서 GPIF는 국내 주식투자를 전부 펀드 방식으로 아웃소싱한다. 현명한 방법이다.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다. 펀드 내 주식 의결권은 자산운용사가 행사한다. 일본처럼 하면 국민연금 이사장이나 기금운용본부장이 감옥 갈 일이 없다. 우리 국민연금도 의결권행사를 과감히 100% 아웃소싱할 필요가 있다.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의 행사자 대신 감독자가 되는 게 바람직하다.” 

―노무현정부 당시만 해도 ‘동북아 금융허브’ 구상이 펼쳐지면서 자본시장이 들썩들썩했다. 지금은 흐지부지된 느낌이다.  

“노무현정부가 추진했던 동북아 금융허브는 미국이나 영국, 홍콩처럼 외환, 파생, 상품시장 등 모든 금융업권을 아우르는 금융중심지가 되겠다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하지만 그 구상은 성과 없이 좌초됐고 오히려 주요 외국계 증권사가 철수하면서 금융허브로서 위상이 더 떨어졌다. 과거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보다 섬세하고 과감한 금융 허브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우리 펀드 시장이 1000조원을 넘어서는 시대가 됐다. 1500조원 국내총생산(GDP)에 육박하는 수치다. 전문사모운용사 100개가 새로 생겼다. 재야의 고수들이 운용사로 들어오면서 시장도 커지고 상품도 다양해졌다. 자산운용업은 상전벽해에 가까운 변화다. 펀드 백가쟁명의 시대에 진입했다. 이렇게 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시아권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자산운용업 시장이 될 것이다. 은행은 세계적으로 속지성이 강하지만 자산운용업은 속지성이 별로 없다. 누가 돈을 잘 운용하다고 하면 세계 어디에서도 찾게 된다. 일본도 저금리가 지속되니까 기관, 개인이 못 견디고 해외로 눈을 돌렸다. 우리도 그럴 것이다. 홍콩이 갈수록 중국화하고 있다. 중국이 패권국가화하면서 홍콩이 불안해한다. 홍콩에 들어가 있던 돈을 유치할 수 있다. 외국돈 1000조원 정도 들어와 있으면 외교안보 차원에서도 도움이 된다. 싱가포르 같은 작은 나라에도 수천조원 규모의 돈이 들어가 있다. 세계 최고의 IT 인프라, 홍콩이나 싱가포르보다 온화한 기후, 우수한 치안 등 우리 입지가 더 좋다.”  

 


-감나무에서 저절로 감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글로벌 투자회사를 유치하려면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법인세율이나 개인소득세율을 경쟁국 수준으로 인하해야 한다. 투자자들의 근무여건도 중요하다. 자녀를 위한 국제학교, 배우자 취업기회 보장 같은 지원책이 필요하다.”  

―취임 직후 ‘황영기가 전사하든 자본시장이 바뀌든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증권사에 대한 규제혁파는 처음 생각했던 것의 반도 다 못했다. 이유가 있다. 증권회사는 은행이 견제한다. 증권사 쪽에서 법인지급 결제, 외환업무 취급, 융자한도 증가 등도 현재 진행형이다. 취임 3년이 다 돼 가는데 아직도 그대로다.” 

 


-코스피가 2007년 7월 2000선에 도달한 뒤 10년째 제자리 걸음이다. 코스피 3000, 5000선 시대는 꿈에 불과한가. 

“북한 핵 문제와 정부의 경제정책 불확실성을 제외한다면 지금 증시 여건은 굉장히 좋다. 북핵 문제는 우리가 어쩔 수 없다. 경제정책의 불확실성은 정부가 인내심을 갖고 기업 경영 간섭에 신중해야 한다. 정부가 급하다 보니 기업들이 불안감을 토로한다. 경제정책에 불확실성이 있다 보니 기업은 투자와 고용에서 몸을 사린다. 삼성전자 착시효과를 없애고 나면 과연 기업들이 활발하게 재투자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기업인들을 만나 보면 걱정부터 한다. 주가도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기업실적과 지배구조개선을 통해서 코스피 3000선으로 갈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런데 4000, 5000선으로 가려면 신종 사업, 알리바바와 같은 기업이 우리나라에서도 나와야 할 것이다.” 

대담=조남규 경제부장 
정리=신동주 기자 ranger@segye.com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 약력 
 
●서울대 무역학과, 런던 경제학스쿨(LSE) 석사●미국 뱅커스 트러스트 아시아담당 부사장●삼성투자신탁운용 대표●삼성증권 대표●우리금융회장 겸 우리은행장●KB금융지주 초대회장●차병원그룹 총괄부회장●법무법인 세종 고문●금융투자협회 공익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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