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3명 중 2명은 일생 동안 노력해도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낮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 우려스러운 대목은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자식 세대의 계층 상승 가능성에 대해서도 ‘낮다’고 한 점이다. 그렇게 답한 비율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본인과 자식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상류층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군에서는 본인 세대와 자식 세대의 계층이동 가능성을 모두 높게 봤다. 소득과 부의 양극화가 희망의 양극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사회는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2010년 6·25전쟁 발발 60년을 맞아 존 놀런 ‘스텝토 & 존슨’ 로펌 회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6·25전쟁 참전용사인 놀런 변호사는 6·25전쟁을 미국의 독립전쟁에 비유하면서 “미국이 독립전쟁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웠듯이, 한국전쟁도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이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는 발판이 됐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쟁이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전쟁 자체는 비극이었지만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충격이 신분과 계급의 장벽을 부숴버렸다.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출세할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 이런 신분 상승 욕구가 우리나라를 6·25전쟁이 남긴 폐허 위에서 중견 경제국으로 도약시킨 동력으로 작용했다.
경제학 교수 출신인 조윤제 주미 대사도 놀런 변호사와 유사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는 최근 내놓은 저서 ‘생존의 경제학’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정부 수립 이후, 특히 한국전쟁 이후 똑같은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면서 이는 한반도 수천년 역사상 초유의 경험이었다고 썼다. 과거 역사에서 소수 지배집단에만 열려있던 출세와 축재, 입신의 기회가 모든 국민에게 허용되면서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역동성을 갖게 됐고, 이는 기적 같은 경제성장 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는 개천에서 용이 나기 힘든 ‘닫힌 사회’로 변해갔다. 모두가 선망하는 양질의 일자리는 소수의 카르텔 속에서 유전되고 있다. 요즘 세간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채용비리 사건이 비단 금감원, 우리은행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발전 동력으로 작용했던 신분 상승 욕구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 곳곳에 기득권을 만들어냈다. 이제는 그 기득권이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기득권 수호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기득권자들의 유착 속에서 공정경쟁은 질식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좌절감과 열패감이 확산된다. 통계청의 2017년 사회조사 결과 그대로다.
문재인정부의 첫 번째 과제는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되살리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다시 6·25전쟁 직후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쟁에 버금가는 충격으로 우리 사회를 혁신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공정경쟁을 가로막는 온갖 종류의 반칙을 걷어내야 한다. 정부든, 기업이든, 노조든, 아니 그 무엇이든 이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기득권을 손봐야 한다. 불필요한 규제는 기득권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기업과 개인의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규제는 하루빨리 없애야 한다. 이미 경쟁력을 잃은 부문, 사라질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혈세를 퍼붓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그럴 돈이 있으면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데 한푼이라도 더 투입해야 한다.
사회의 역동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경제 생태계의 역동성도 커져야 한다. 그러려면 수출 기업의 국제경쟁력과 서비스 산업의 질을 높여야 한다. 과거엔 가계소득을 높여주면 소비가 늘고 국내 기업이 투자에 나서는 선순환이 이뤄졌으나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그 고리가 느슨해졌다. 국내외 소비자들은 더 싸고 더 질 좋은 제품을 손쉽게 찾아다닌다.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지 않으면 국내에서 풀린 돈이 투자로 이어지기는커녕 자산 거품을 만들어내기 십상이다. 경쟁력을 키우려면 기득권의 양보를 이끌어내야 한다. 독일을 회생시킨 슈뢰더 총리가 지지층의 반발을 무릅쓰면서 걸어간 길이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25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 집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가진 자리에서 “이번 정부가 표방한 창업부터 혁신성장, 일자리 창출, 소득주도 성장, 이런 맥락의 핵심에 모험자본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모험자본 활성화의 주체는 은행이나 보험회사가 아닌 벤처, 증권회사가 할 일”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아시아 자산운용허브’의 기치를 내걸었다. 노무현정부가 주창했던 ‘동북아 금융허브’를 발전적으로 계승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면밀한 투자 전략과 신뢰 구축을 통해 한국에서도 금융의 삼성전자가 출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이 25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 집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금융투자업이 문재인정부의 혁신성장을 추동하는 전진기지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금융투자업계는 뭘 원하는가.
“정부와 국회가 과감히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 그 하나가 기업금융 한도를 늘려주는 것이다. 현재 국회 정무위 전체회의에는 증권사의 기업금융 한도를 확대(증권사 자기자본 100%→200%)하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박근혜정부에서 발의돼 정무위 법안심사소위까지 통과했다. 그런데 문재인정부로 바뀌면서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 이 법안은 사실 문재인정부가 주창한 ‘생산적 금융’ 기조에 부합하는 것이다. 최종구 신임 금융위원장의 취임사 화두가 그것이다. 이제 금융이 가계대출 같은 비생산적 분야 대신 벤처, 중소기업처럼 새로운 성장동력,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곳에 돈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자본시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금융투자업계는 모험자본 활성화, 증권화를 통한 유동자금 흡수방안 등 다른 금융업권이 할 수 없는 생산적 금융분야를 고민하고 있다. 증권사의 기업금융 한도 확대도 그 일환이다. 그렇다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앞장서 도와줘야 하는 게 맞는데 오히려 여당의 동력을 못 받고 있는 현실이다.”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법안을 여당이 왜 반대하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현 정부 기조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빨리 하자고 해야 할 판인데 집권 여당에서 반대하니 황당하다. 증권사 기업금융 가운데 90%가 신용이 낮은 A등급 이하 기업용 대출이나 채권 인수다. 중견 기업 이하 기업에 대출이 나갔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정부가 원하는 것 아닌가. 증권회사는 대기업과 거래하는 은행과 경쟁할 수 없다. 은행과 우리는 노는 물이 다르다. 은행처럼 부동산 대출하기 위해 신용공여 한도를 늘려 달라는 것도 아니다. 기업 대출도 중소기업으로 제한하라고 하면 제한하겠다는 입장이다. 우리에게 새 정부를 도울 수 있는 ‘총알’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은행이나 보험업에 비해 금융투자업이 불합리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얘기해 왔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추석 연휴 이후에 그런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한 ‘증권사 균형발전 100대 과제’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제 증권사도 법인 지급결제, 외환거래 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보험은 10년 이상 보유하고 있으면 비과세인데 펀드와 주식은 안 된다. 이런 게 국내의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해외 금융투자업과의 관계에서 기울어진 운동장도 존재한다. 홍콩, 싱가포르, 런던에서는 증권사들이 다 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예 못하는 것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회사 간 합병 가격을 법에 명시하고 있는 규제다. 문제가 됐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건만 해도 기업은 법을 준수했지만 당시 합병비율이 사회적 통념에 맞지 않았다.”
-올가을엔 초대형 투자은행(IB)이 탄생한다.
“10월이면 초대형 IB 지정, 단기금융업 인가가 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증권회사 다 합쳐도 자기자본금이 48조원 정도에 불과하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110조원, 중국의 중신증권도 50조원에 달한다. 증권회사가 큰 프로젝트, 국제적인 인수금융 업무를 하려면 어느 정도 덩치가 있어야 한다. 자본금이 크고 덩치가 크면 위상도 신뢰수준도 올라가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KB금융이 전 계열사에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행사 지침)를 도입하기로 했다. 국민연금도 적극적이다.
“스튜어드십 코드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핵심은 국민연금이다. 일본 정부연금투자펀드(GPIF)는 우리의 국민연금 같은 조직이다. 운용액이 1500조원 규모다. GPIF가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면 정부 의도대로 연금을 사용한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이른바 ‘연금 사회주의’ 논란이다. 그래서 GPIF는 국내 주식투자를 전부 펀드 방식으로 아웃소싱한다. 현명한 방법이다.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다. 펀드 내 주식 의결권은 자산운용사가 행사한다. 일본처럼 하면 국민연금 이사장이나 기금운용본부장이 감옥 갈 일이 없다. 우리 국민연금도 의결권행사를 과감히 100% 아웃소싱할 필요가 있다.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의 행사자 대신 감독자가 되는 게 바람직하다.”
―노무현정부 당시만 해도 ‘동북아 금융허브’ 구상이 펼쳐지면서 자본시장이 들썩들썩했다. 지금은 흐지부지된 느낌이다.
“노무현정부가 추진했던 동북아 금융허브는 미국이나 영국, 홍콩처럼 외환, 파생, 상품시장 등 모든 금융업권을 아우르는 금융중심지가 되겠다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하지만 그 구상은 성과 없이 좌초됐고 오히려 주요 외국계 증권사가 철수하면서 금융허브로서 위상이 더 떨어졌다. 과거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보다 섬세하고 과감한 금융 허브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우리 펀드 시장이 1000조원을 넘어서는 시대가 됐다. 1500조원 국내총생산(GDP)에 육박하는 수치다. 전문사모운용사 100개가 새로 생겼다. 재야의 고수들이 운용사로 들어오면서 시장도 커지고 상품도 다양해졌다. 자산운용업은 상전벽해에 가까운 변화다. 펀드 백가쟁명의 시대에 진입했다. 이렇게 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시아권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자산운용업 시장이 될 것이다. 은행은 세계적으로 속지성이 강하지만 자산운용업은 속지성이 별로 없다. 누가 돈을 잘 운용하다고 하면 세계 어디에서도 찾게 된다. 일본도 저금리가 지속되니까 기관, 개인이 못 견디고 해외로 눈을 돌렸다. 우리도 그럴 것이다. 홍콩이 갈수록 중국화하고 있다. 중국이 패권국가화하면서 홍콩이 불안해한다. 홍콩에 들어가 있던 돈을 유치할 수 있다. 외국돈 1000조원 정도 들어와 있으면 외교안보 차원에서도 도움이 된다. 싱가포르 같은 작은 나라에도 수천조원 규모의 돈이 들어가 있다. 세계 최고의 IT 인프라, 홍콩이나 싱가포르보다 온화한 기후, 우수한 치안 등 우리 입지가 더 좋다.”
-감나무에서 저절로 감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글로벌 투자회사를 유치하려면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법인세율이나 개인소득세율을 경쟁국 수준으로 인하해야 한다. 투자자들의 근무여건도 중요하다. 자녀를 위한 국제학교, 배우자 취업기회 보장 같은 지원책이 필요하다.”
―취임 직후 ‘황영기가 전사하든 자본시장이 바뀌든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증권사에 대한 규제혁파는 처음 생각했던 것의 반도 다 못했다. 이유가 있다. 증권회사는 은행이 견제한다. 증권사 쪽에서 법인지급 결제, 외환업무 취급, 융자한도 증가 등도 현재 진행형이다. 취임 3년이 다 돼 가는데 아직도 그대로다.”
-코스피가 2007년 7월 2000선에 도달한 뒤 10년째 제자리 걸음이다. 코스피 3000, 5000선 시대는 꿈에 불과한가.
“북한 핵 문제와 정부의 경제정책 불확실성을 제외한다면 지금 증시 여건은 굉장히 좋다. 북핵 문제는 우리가 어쩔 수 없다. 경제정책의 불확실성은 정부가 인내심을 갖고 기업 경영 간섭에 신중해야 한다. 정부가 급하다 보니 기업들이 불안감을 토로한다. 경제정책에 불확실성이 있다 보니 기업은 투자와 고용에서 몸을 사린다. 삼성전자 착시효과를 없애고 나면 과연 기업들이 활발하게 재투자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기업인들을 만나 보면 걱정부터 한다. 주가도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기업실적과 지배구조개선을 통해서 코스피 3000선으로 갈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런데 4000, 5000선으로 가려면 신종 사업, 알리바바와 같은 기업이 우리나라에서도 나와야 할 것이다.”
대담=조남규 경제부장 정리=신동주 기자 ranger@segye.com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 약력 ●서울대 무역학과, 런던 경제학스쿨(LSE) 석사●미국 뱅커스 트러스트 아시아담당 부사장●삼성투자신탁운용 대표●삼성증권 대표●우리금융회장 겸 우리은행장●KB금융지주 초대회장●차병원그룹 총괄부회장●법무법인 세종 고문●금융투자협회 공익이사
문재인정부가 추진 중인 ‘세일즈 앤드 리스백’(sales and lease back) 정책이 그럴 것 같다. 이 제도는 대출로 집을 샀다가 생계가 곤란해진 ‘하우스푸어’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정부가 이들의 주택을 매입한 뒤 월세나 전세로 재임대해서 하우스푸어의 주거비 부담을 덜어주자는 취지다. 새해 예산안에 1000억원을 잡아놨다. 국민의 세금이 민간주택 소유주에게 투입되는 것이다. 이는 공공재인 임대주택 건설이나 무주택자 지원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누구나 부동산에 투자(투기)할 때는 부지불식간에 ‘더 큰 바보 이론’(Greater Fool theory)에 따른다. 설사 자신이 바보처럼 실제 가치보다 비싼 값을 주고 집을 샀더라도 나중에 누군가 더 비싼 값에 사주길 바란다. 집값이 상승하는 국면에선 이 이론이 잘 적용된다. 금리 인상이나 실직 등으로 빚 부담이 커져도 ‘더 큰 바보’가 나타나서 곤란한 상황을 해소시켜 준다. 하지만 집값이 하락하는 시점에선 상투를 잡은 ‘마지막 바보’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투자에는 리스크가 따른다. 리스크가 없다면 누구나 빚을 내서라도 투자에 나설 것이다. 시장이 돌아가는 단순하지만 엄중한 원칙이다.
문재인정부의 세일즈 앤드 리스백 정책은 이 원칙에 배치된다. 정부가 투자 실패를 보상해 주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왜 정부가 ‘마지막 바보’ 역할을 맡느냐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더욱이 문재인정부가 이 정책에 투입하겠다는 주택도시기금은 무주택자의 주거복지에 써야 할 공적자금이다. 이 돈으로 주택 소유주를 지원하는 정책은 공정한가. 향후 금리 인상기에 하우스푸어가 더 늘어나면 한정된 예산을 누구에게 먼저 투입할 것인가. 매입가 책정도 쉽지 않은 일이다. 형평성 시비도 피할 수 없다. 정부도 이런 부담감 때문인지 하우스푸어 주택을 채권자인 시중은행이 직접 매입하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택 소유주의 책임을 정부가 떠맡겠다고 약속해 놓고 이제 그 책임을 애꿎은 시중은행에 떠넘기겠다는 발상이다. 원래대로 정부가 책임지든지 정책 자체를 폐기하는 게 옳다.
우리보다 앞서 하우스푸어 지원 논란을 겪은 미국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부는 집권 초인 2009년 2월 ‘주택소유안정화계획’(Homeowners Affordability and Stable Plan)을 발표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집값이 대출금 아래로 내려간 ‘깡통주택’ 소유주를 구제하는 조치였다. 집을 압류당할 처지에 놓인 수백만명이 구제 대상에 올랐다. 오바마 정부는 수백억 달러의 회생자금을 투입해 가계부채 일부를 조정해 줬다. ‘깡통주택’ 소유주 가운데는 투기꾼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대출의 덫에 걸린 실소유주였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불거지기 전만 해도 부동산 투자로 한몫 챙겼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너도나도 대출을 받아 집을 사던 시절이었다. 금융기관은 소득이 없거나 신용이 낮은 사람들에게까지 대출 상품을 팔았다. 이런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가 금융위기를 불렀다. 뱅크런이 일어나자 곳곳에서 은행들이 무너졌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자 깡통주택 소유주들은 길거리에 나앉게 됐다. 미 정부는 은행을 살리기 위해 천문학적 규모의 혈세를 투입했다.
그러자 한쪽에선 “국민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금융기관을 내가 낸 세금으로 구제하지 말라”는 항의가 빗발쳤다. 당시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였던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금융기관만 살리려는 재무부 관료들에 맞서 집을 차압당할 위기에 놓인 주택 소유주들도 구제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 반대쪽에선 “무책임하고 게으른 사람들을 세금으로 지원하지 말라”는 여론이 비등했다.
오바마 정부의 주택소유안정화계획은 선의에 바탕을 둔 것이었지만 누군가는 이 조치에 분개했다. CNBC의 편집장인 릭 샌텔리가 “정부가 무책임한 사람들의 빚을 대신 갚아주려 한다”면서 세금 낭비를 막기 위한 시민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안했다. 이로써 오바마 대통령을 임기 내내 괴롭힌 ‘티 파티’(Tea Party) 운동의 서막이 올랐다. 야당인 공화당은 티 파티 세력의 지원으로 이듬해 중간선거에서 압승했다. 명분도 실효성도 약한 정책 하나가 정권의 토대를 흔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취임 이후 ‘경쟁법의 목적은 경쟁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을 보호하는 것’(The antitrust laws were enacted for the protection of competition, not competitor)이라는 미국 경쟁법의 판례를 종종 인용하고 있다. 본래 취지는 소비자 후생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경쟁 당국은 가급적 시장의 거래 행위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지만 김 위원장은 그 반대의 주장을 펴기 위해 그 판례를 활용하고 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 25일 서울 중구 한국공정거래조정원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가맹, 유통, 하도급, 대리점 분야 등의 불공정 관행 개선책과 재벌개혁 방향을 밝히고 있다. 이재문 기자
김 위원장은 지난 25일 서울 중구 한국공정거래조정원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미국 경쟁법의 원리를 받아들인 공정거래법을 집행해야 하는 현실과 을의 눈물을 닦아달라는 여론의 사이에서 고민이 크다”고 말했다.
―취임 한 달이 지났다. ‘김상조 효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기대를 받고 있다.
“저와 공정위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크다는 점을 잘 알고 있고, 그만큼 부담감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공정위가 할 수 있었는데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과 함께 국민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한편으로는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과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지만, 매일 소임을 되새기고 있다.”
―최근 가맹 분야 불공정관행 개선조치를 내놨다. 가맹본부와 가맹점주의 갑을 관계를 상생 관계로 바꾼다는 취지에 동감한다. 그런데 필수품목 마진 공개 등은 지나친 시장 개입이라는 지적도 있다.
“정보공개의 폭과 수준에 관해서는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필수품목이고, 어떤 가격으로 공급하느냐는 핵심적 영업비밀이다. 이 때문에 공개 방법에 대해 개별 공개가 어려운 부분은 업종별 공개, 일정한 범위 내 공개 등 다양한 형태로 조율할 계획이다. 프랜차이즈 사업이라는 게 기업 대 기업의 거래인데 공정위가 개입할 수 있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가맹점 종업원 임금이 변동되면 납품단가를 조정할 수 있도록 한 대목은 최저임금 인상을 염두에 둔 것인가.
“프랜차이즈는 관련자들이 공통의 이익을 나누는 상생의 모델이다. 가맹본부와 가맹점주가 갑을 관계인데 점주 측에는 고용의 문제가 있다. 공정위 차원에서는 갑의 을에 대한 횡포가 불공정 거래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을인 점주들도 고용하고 있는 종업원들과 이익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최저임금은 영세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에게 적용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최저임금 인상 부분을 가맹본부가 공유하는 방식으로 상생협력 모델을 유도하자는 취지다.”
―가맹본부와 점주의 상생을 위해서는 본부가 일정 기간 직영점을 운영한 뒤 가맹점을 모집하는 등 규제를 둬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고민한 부분이다. 사실 가맹본부가 시장에서 성공 가능성이 확인됐을 때 가맹점주를 모으는 방식이 맞다. 하지만 이미 4200개가 넘는 가맹본부가 만들어진 현실에서 그것을 법률적으로 정해놓는 것이 맞는 방식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문제다. 일단 계약서에 정보공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하고, 해결이 안 되면 구조적으로 제약을 가하는 식이 될 것이다. 가맹본부 4200개가 모두 똑같은 ‘갑’은 아니다. 가맹본부나 가맹점주가 (매출액 등에서) 별 차이 없는 곳도 많다. 그래서 50개 주요 가맹본부 먼저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이들 중에는 삼성전자보다 영업이익률이 높은 곳도 있다. 영업이익을 공유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곳들이다.”
―갑을 문제가 심각한 또 다른 분야는 하도급이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태반이 하도급 거래로 먹고산다.
“그렇다. 갑을 문제 4대 영역이 가맹·유통·하도급·대리점이다. 얘기한 순서대로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나라 하도급 분야는 원사업자가 1차 하도급 업체뿐 아니라 2, 3차 하도급업체까지 관여하는 사실상 ‘전속거래’ 형태를 보인다. 재벌계열 대기업과 1차 하도급 거래의 불공정 문제는 많이 개선됐다. 2, 3차 하도급으로 가면 갈수록 상황이 나빠진다. 임금은 대기업의 절반, 더욱이 비정규직은 3분의 1까지 떨어진다. 최근 공정위가 중견, 중소기업의 갑질에 과징금을 때리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을의 갑질’이다. 공정위가 고민하는 핵심이 2, 3차 하도급 거래 구조를 어떻게 공정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법적으로는 원사업자가 2, 3차 하도급업체에 개입할 수 없다. 특히 임금문제에 개입하면 노동관계법 위반이 된다. 그래서 법 제도 개선이 어디까지 가능한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대통령께서 이번에 14개 대기업을 만나 당부하고 싶은 게 이런 점이라고 본다. 상생 노력이 1차 하도급업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2, 3차 협력업체까지 내려갈 방안을 고민해달라는 것이다.”
―중소기업들이 공동사업을 할 때 공정거래법의 담합금지 규정에 대한 예외를 인정하고 하도급 불공정 거래 개선을 위해서는 하도급 정보 공개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알고 있다.
“중소기업들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강화해서 협상력과 경쟁력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스위스에서는 중소기업들이 회사를 만들어서 공동으로 구매, 판매를 한다. 우리도 중소기업이 협력사업을 할 때 담합 예외를 인정해주고 협력 네트워크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개별 기업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것은 공정위를 넘어서 범정부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공정위가 그런 노력을 주도하려고 한다. 하도급 기업 명단 등 관련 정보를 공개하는 문제는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다. 원사업자는 하도급 정보가 영업기밀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벽을 넘어야 한다.”
―하도급 정보 공개는 공정위 과제에서 빠져 있나.
“취임 이후 해야 할 일을 단기, 중기, 장기 과제로 나눴다. 하도급 거래 정보 공개는 중기 내지는 장기 분야가 될 것이다.”
―재벌개혁 관련해서 “시간이 얼마 없다”, “지배구조 개선은 사후적이고 시장접근적 방법이 좋겠다”고 말했다.
“소수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과 대·중소기업 간 힘의 불균형 문제 등을 해소해 한국 경제가 재도약하는 데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재벌개혁을 몰아치듯이 하지 않고 기업의 자발적 변화를 유도하겠다고 밝혔지만,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정부는 재벌개혁의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판단되면, 법령 개정을 통한 제도적 해결을 추진하는 등 민주주의 틀 내에서 가능한 모든 정책적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시장접근적 방법은 소액주주나 기관투자가 등 시장의 플레이어들이 기업 지배구조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취지다. 상법 개정(문재인 정부는 총수 일가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해 2018년까지 다중대표소송, 전자투표제,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과 스튜어드십 코드(주주권 행사 모범기준) 활성화를 추진하고 효과를 보면서 공정거래법 규제를 얼마나 강화해야 할지를 판단하겠다. 순환출자 해소나 금산분리 등은 법률 개정 사항이다.”
―4대 그룹이 바람직한 기업 지배구조 모델을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일감몰아주기 규제 대상과 관련해서 상장사의 경우 30%로 해놨더니 29.9%로 만든 회사가 있다.(현행법상 오너 일가가 대기업 상장 계열사 지분을 30% 이상 갖고 있으면 일감몰아주기 규제 대상에 포함된다)”
―법 규정이 그렇다면 법을 지킨 것 아닌가.
“법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비난 가능성은 있다. 이제 대기업은 법을 지켰다는 것만으로 안 된다. 대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와 사회적 기대에 대해 돌아보고 스스로 고칠 수 있는 부분은 개선해달라는 뜻이다. 적어도 올해 말까지는 국민이 납득할 수준의 자발적 변화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자발적 선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법률 개정 압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고,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어느 정도 합의됐나.
"다중대표소송, 전자투표 거의 다 됐는데 집중투표제, 감사위원분리선출제는 아직 논의 중이다. 개인적으로는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분리선출제 가운데 하나만 하고,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감사위원분리선출제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책은 곧 정치다. 정책만 하는 입장에서는 당위와 효율을 따지지만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정치다. 여의도 정치 뿐 아니라 국민의 여론을 만들어가는 것도 정치다. 공감대를 모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최근에 신장섭 싱가포르대 교수같은 인사들은 기업의 가업 승계를 인정해주고 그 대신 해당 기업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이른바 정부와 기업의 대타협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대타협론자다. 그런 타협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타협은 주고 받는게 확인돼야 한다. 약속을 깼을 때 거기에 대한 엄정한 처벌이 보장됐을 때 대타협이 가능하다. 하지만 타협 주체 중에 일방이 약속을 깼을 때 어떤 패널티를 줄 것인지에 대한 담보가 안되면 타협이 이뤄질 수 없다. 대타협 주장의 선의를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런 주장을 펴는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나 신장섭 교수는 좀 더 자신의 말에 책임감을 가졌으면 한다. 좋은 말만 하면 안된다. 구체적 방법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노조를 사회적 대타협 안에 어떻게 가져올 수 있고, 재벌의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장하성 실장이 선의를 가졌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지만 실현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제가 고민하는 것은 사회적 대타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부분이다."
정리=안용성 기자 ysahn@segye.com
대담=조남규 경제부장
김상조 위원장은 ●1962년 경북 구미 ●서울 대일고 ●서울대 경제학과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 석·박사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부위원장 ●참여연대 재벌개혁감시단 단장, 경제개혁센터 소장 ●경제개혁연대 소장 ●한국금융연구센터 소장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대공황으로 시장이 무너지고 실업자가 속출하자 재정을 활용한 수요 창출을 치유책으로 제시했다. 이후 그의 유효수요 창출 이론은 경기 침체에 빠진 나라들의 단골 처방전으로 활용됐다. 국가가 재정이라는 마중물을 부어서 일자리를 만들어내면 새로운 수요가 창출돼서 침체에 빠진 경기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실제 단기적으로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는 있는 것으로 입증되자, 각국 정부는 수시로 케인스 처방전을 꺼내들고 있다.
문재인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J노믹스)도 그 뿌리는 케인스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 출범한 버락 오바마 미국 민주당 정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바마정부가 의회에 보낸 1호 법안이 경기부양법안이었다. 대량 실업으로 소비할 여력이 없는 국민 대신 정부가 돈을 풀어서 얼어붙은 시장에 온기가 돌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미국판 추가경정예산안이었다. 야당인 공화당은 “연방정부의 지출은 경제를 회생시킬 수 없고 증가 일로인 재정적자만 키운다”고 주장했지만, 오바마와 집권 민주당은 부양정책을 밀어붙여 집권 8년 동안 소방관과 경찰관, 교사 같은 공공 일자리를 늘렸다. 소득·자산 양극화 해소를 통한 중산층 복원, 내수 진작을 통한 경기 회복이 목표였다. 결과적으로 국가 부채는 늘었지만 경기는 살아났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10%에 육박했던 실업률은 지난달 16년 만에 최저치인 4.3%까지 떨어졌다.
조남규 경제부장
J노믹스도 그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세금으로 공공 일자리를 늘리는 일이야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문재인정부가 저성장 늪에 빠진 우리 경제를 퀀텀점프(대약진) 시키려면 구조개혁이라는 쓴 약을 피해선 안 된다. 미국의 경기 회복은 오바마의 재정투입에 기업가의 혁신이 뒷받침된 결과였다. 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성장 지체병에 걸려있던 영국과 독일은 구조개혁 수술을 통해 회생했다. 친노동자 정당인 독일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구조개혁법안 통과에 총리직을 거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슈뢰더와 사민당은 정치감각이 무뎌서 노동개혁을 밀어붙인 것이 아니다. 그 여파로 슈뢰더와 사민당은 정권을 내줘야 했지만 독일은 살아났다. 국익을 당리당략에 우선한 지도자의 리더십이 경제를 살려내고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이들 선진국의 구조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수십년 동안 촘촘히 구축해온 사회안전망이었다. 일자리 상실이 생존권을 위협하는 사회에서는 구조개혁의 진통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자산·소득 불평등이 심화된 사회에서는 이해 당사자들의 타협을 이끌어 내기가 더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주거, 보육 등 국민의 기본적 복지 수준을 높이고 불평등을 완화하겠다는 J노믹스의 지향점은 과녁을 제대로 겨냥한 것이다.
노무현정부의 ‘비전 2030’은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로드맵이었다. 이 로드맵이 폐기되지 않고 이명박정부로 계승됐다면 박근혜정부의 구조개혁은 성공 가능성이 더 높아졌을 것이다. 한국의 보수가 깊이 성찰해야 할 대목이다. 한국의 미래가 걸린 구조개혁 과업은 ‘비전2030’을 제시했던 정부의 계승자에게로 넘어갔다.
조남규 경제부장
*아래는 조선일보 강경희 논설위원이 2017년 9월 방한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총리를 인터뷰한 내용.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유럽의 병자'라 불리던 독일에서 노동 및 연금·복지 개혁을 감행해 경제 회생의 발판을 만든 인물이다. 인기 없고 고통스러운 개혁을 추진한 대가로 슈뢰더는 2005년 총선에서 패배하고 정계를 떠났다. 지난 8일 방한한 슈뢰더 전 총리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노조와 기업 다 개혁에 반발했다. 하지만 실업률이 극적으로 낮아지고 사회보장제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지금의 결과를 보면 '어젠다 2010' 개혁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우리가 결정했던 그 길이 옳았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 500만명이 넘던 독일 실업자는 현재 절반으로 줄었다. 실업률은 독일 통일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세계 각국에 포퓰리즘이 확산되는 추세에 대해 슈뢰더는 "실업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근원이라면 정치인들이 이 불안을 진지하게 성찰해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잃어버린 일자리를 새로운 일자리로 대체할 방안을 강구하고, 평생 교육의 기회를 넓혀 재취업 기회도 적극 열어줘야 한다"고 했다.
중도 좌파 정당인 사민당 출신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가 집권하던 당시(1998~2005년) 독일 경제는 마이너스 또는 제로 성장이 이어졌다. 독일 통일의 반짝 호황은 사라지고 막대한 통일 비용, 500만명에 달하는 실업자, 연금·실업수당·건강보험의 누적된 복지 부담이 경제를 짓눌렀다. 슈뢰더 전 총리는 2003년 '혁신, 성장, 일, 지속 가능성'이라는 표제의 '어젠다 2010' 개혁안을 발표했다. 50년간 손보지 않은 복지에 메스를 가하고 경직된 노동시장을 개혁하는 정책이었다. 해고를 쉽게 하고, 32개월이던 실업수당 지급 기간을 12개월로 줄이고, 연금 수령 시기도 늦췄다. 노조는 슈뢰더를 '사회 부적응 자폭꾼'이라 공격하며 연일 시위를 벌이고 거세게 반발했다. 그럼에도 개혁을 밀고 나갔다.
―사민당의 전통 지지층이 노동자 계층인데 지지 기반을 무너뜨릴 노동 개혁을 한 이유가 뭔가.
"독일 실업자가 500만명에 육박했다. 사회 안전망도 위협받았다. 연금·실업수당·건강보험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사회보장제도는 재정이 감당할 수준이어야 하고 미래에도 지속 가능해야 한다. 재정은 교육과 R&D(연구·개발)에도 투입돼야 하는 돈이다.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타파해서 더 유연하게 만들고, 사회보장 중에서도 특히 연금과 실업수당을 개혁해야 한다고 봤다. 네덜란드처럼 노·사·정 대타협을 시도했지만 독일에서는 노사가 절대 타협할 수 없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그래서 정부 주도 개혁에 나섰다. 시대를 앞서가지 못하면 시대에 잡아먹힌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개혁에 노조와 기업 다 반발했다. 노조는 개혁이 과하다 했고, 기업은 개혁이 부족하다 했다. 오늘날 결과가 증명하듯 우리가 결정했던 그 길이 옳았다. 독일은 개혁으로 유럽 내 다른 어떤 국가와도 큰 차이를 갖는 위치에 올라가 있다."
―집권당 내에서도 반대가 있지 않았나. 노조는 어떻게 설득했나.
"독일 의회는 절반만 넘으면 된다. 집권당은 어떤 개혁 법안도 가능하다. 당시 적녹 연정(사민당과 녹색당의 연립정부)이었는데 연정 파트너라고 무조건 '예스'는 아니다. 녹색당도, 사민당 내부도 설득해야 했다. 사민당 지역별 콘퍼런스를 비롯해 수많은 회합에서 '어젠다 2010'을 몇 시간씩 설명했다. 노조도 설득했지만 노조 간부들은 이념적으로 교조화되어 설득이 쉽지 않았다. 나를 향해 격렬한 시위도 벌였다. 노조와의 대화에서 '이 개혁은 결국 관철될 것이다. 이것으로 상황 끝(더 이상 토론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말한 적 있다. 그 후로 내 별명이 '상황 끝 총리(Basta Kanzler·바스타 칸츨러)'가 됐다. 긍정적 성과가 나타나면서 노조 시위도 줄었지만 그렇다고 노조가 '총리 말이 옳았다'고 대놓고 인정하진 않는다."
―어려운 개혁에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가.
"여론조사를 해보자. '우리나라에 개혁이 필요하다'고 90%가 응답한다. 막상 개혁으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오면 90%가 반대로 돌아선다. 독일이나 한국처럼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한 민주사회에서 국민에게 개혁과 변화의 필요성을 설득하기란 매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개혁 결정은 오늘 내려야 하는데, 효과는 최소한 2~3년 지나서 나온다는 점이다. 이 사이에 선거가 있으면 집권당이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다. 국민은 당장 드러나는 부정적 측면만 보지 앞으로의 긍정적 효과는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치 지도자라면 반드시 국익을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어떤 정치인도 선거에 패하고 싶지는 않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정치 지도자란 어떠해야 하는가. 국가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기 직책을 잃어버릴 위험 부담도 감내하고 개혁을 추진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총선 패배로 개혁을 후회하지 않았나.
"안타깝게도 내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부터 개혁 효과가 나타났다. 후임자 메르켈 총리는 내가 한 개혁의 긍정적 과실을 수확한 셈이다. 메르켈 총리도 이 점을 인정했다. 실업률이 극적으로 낮아지고 사회보장제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지금을 보면 '어젠다 2010'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정치인으로서 차세대가 미래에 평가내릴 것을 생각한다면 개혁의 성과를 알기에 후회한 적은 없었다."
―당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제3의 길' '신(新)중도'를 선언했다. 왜 좌파 정당의 노선 변화를 시도했나.
"유럽 중도 좌파 정당들은 '분배를 통한 정의 실현'에 역점을 뒀다. 토니 블레어와 나는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판단했다. 경제가 성장해야 그에 기초해 분배도 할 수 있다고 봤다. 독일 사민당과 달리 프랑스 사회당은 좌파 성향이 더 강했고 그런 변화가 없었다. 사회당 출신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은 노조와 국민의 반발을 살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개혁을 못했다. 그 실수를 만회하고자 지금 마크롱 대통령이 개혁을 추진한다. 개혁 여부가 오늘날 독일과 프랑스 경제의 차이를 가져왔다."
―한국 정부는 독일을 모델로 탈원전을 추진한다. 당시 탈원전을 추진하면서 짓던 원전도 공사 중단한 적 있나.
"그건 없었다. 우리는 원전 건설을 신규로 허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에너지 대기업들과 토론을 통해 어떤 시점에 탈원전을 할 것인지 합의를 이룬 뒤 법안을 마련했다. 기업들은 40년이 필요하다고 했고, 연정 파트너 녹색당은 25년을 주장했다. 그 중간쯤인 2032년에 원전을 통한 마지막 전력 생산을 하기로 합의했다. 탈원전을 몇년 내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누구도 단언 못한다. 독일은 그 정도면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고 봤기에 시한을 그리 정한 것이다. 메르켈 정부에서 탈원전 법안을 무효화했다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재추진했다. 그런데 2032년이 아니라 2022년으로 앞당겼다. 이 결정은 잘못됐다고 본다. 너무 촉박하다. 탈원전 시한을 정할 때는 대체 에너지원이 충분히 마련돼야 한다. 우리는 신재생 에너지에 엄청나게 투자했다. 독일은 햇빛이 많지 않아 태양광은 충분치 않았고 풍력에서 특히 세계적으로 앞서나가게 됐다."
―에너지 기업과 합의는 누가 끌어냈나.
"내가 직접 몇년에 걸쳐 토론했다. 기업과 합의는 2002년 성사됐다. 정부가 연방 하원의 다수석을 차지하고 있어 법안을 그냥 통과시켜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탈원전은 정부 의지뿐 아니라 에너지 기업도 합의하는 것이 중요하고 적절한 에너지 대안이 있어야만 합의도 이뤄질 수 있다. 이해 당사자를 참여시켜 합의를 이루는 것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과정도 힘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는 바로 이런 일 하라고 있는 존재다. 우리가 하는 일이 시대 흐름에 맞고 진정한 의지가 있다면 협상에 드는 시간과 노력은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아래는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2017년 9월15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 내용.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한국 경제가 재도약하려면 고용의 안정성과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맞교환하는 '사회적 대타협'이 절실하다는 소신을 밝혔다.
김 부총리는 지난 1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가진 본지와 인터뷰에서 "(저성장에 빠진) 우리 경제의 도약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사회적 대타협"이라며 "고용 안정성과 유연성을 같이 확보하는 '한국형 고용 안정·유연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최저임금 대폭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성과연봉제 폐지 같은 친(親)노동 정책이 쏟아지는 가운데, 경제부총리가 노동시장 구조 변화라는 새 화두를 던진 것이다.
다만 김 부총리는 고용 안전망 강화를 선결 과제로 제시했다. 그는 "(고용 안전망이 취약한 상태에서는) 일자리를 잃을 경우 곧바로 절벽으로 떨어진다. 고용의 안정성이 어느 정도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논의조차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 우리나라 실업급여는 직전 평균 임금(월급)의 최대 50%를 최장 8개월간 받을 수 있다. 반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들은 평균적으로 실직 전 월급의 65%를 최장 15개월간 지급하고 있다.
집값 안정 대책으로 거론되는 보유세 인상과 관련, 김 부총리는 "현재로는 검토하고 있지 않지만, 초과다 부동산 보유자에 대한 과세나 보유세·거래세 비중 조정 같은 이슈는 곧 구성될 조세개혁특별위원회에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부총리는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 "내년 상황을 보면서 인상 속도와 폭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지 결정하겠다. 그때는 (2020년까지 최저시급을 1만원으로 인상한다는) 공약에 '문자 그대로(literally)' 구속받지 않고 신축적으로 하겠다"고 답했다.
*아래는 한국경제 주용석 기자가 박승 전 총재를 인터뷰해 2017년 9월25일자에 보도한 기사.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81)는 지난해 10월 문재인 대통령의 싱크탱크이던 ‘국민성장’에 합류하면서 자신을 ‘중도 실용주의자’라고 했다. 그는 지금도 좌우를 넘나든다. 과거 보수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를 질타하고 새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을 지지하면서도 진보 정부가 꺼리는 노동개혁과 규제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식이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을 놓고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지난 21일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박 전 총재를 만났다.
▷지금 우리 경제를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만 해도 연 4~5% 성장했는데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선 연 2~3%대로 주저앉았습니다. 성장 환경이 달라졌는데 보수 정부에서 수출 주도, 대기업 주도로 성장하는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 모델을 그대로 쓰면서 경제의 역동성이 떨어졌습니다. 지금은 낙수효과 엔진이 고장났습니다. 수출은 과거처럼 우리 경제를 끌고 갈 힘이 없습니다. 대기업이 국내 투자도 잘 안 하고 설령 투자를 해도 고용이 거의 안 늘어요.”
▷그래서 소득 주도 성장을 지지하는 건가요.
“소득 주도 성장은 수요 측면의 성장 엔진입니다. 소득재분배 정책을 통해 민간 소비를 늘려주는 겁니다. 과거처럼 선(先)성장, 후(後)복지가 아니라 성장·복지 병행 정책으로 가는 거예요. 이것이 소득 주도 성장의 핵심인데, 이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좋은 물건을 싸게 생산해서 국제 경쟁력을 갖추는 공급 측면의 성장 엔진이 필요한데, 그걸 위해선 생산성 혁신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노동개혁, 규제개혁을 해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의 지지 기반이 노동계인데, 노동개혁이 잘 될까요.
박승 전 총재가 대학생 시절 쓴 일기를 보여주고 있다. 박 전 총재는 자신의 일기를 모두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노동개혁을 안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선 후) 문 대통령에게 노동개혁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
▷노동개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한국은 노조가 꼭 필요한 영세 사업장에는 노조가 없고, 노조가 없어도 되는 고임금 사업장에는 강성노조가 있어서 노동 기득권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부가 노동 여건을 개선하고 복지를 늘려야 하지만 동시에 노조도 산업 평화를 위해 불합리한 투쟁을 자제해야 합니다. 파업 없는 노사 관계를 위해 노사분규 중재기구를 둬 파업 전에 반드시 이 기구를 거치도록 하고 중재기구의 반대에도 파업하려면 조합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도록 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저는) 갖고 있습니다.”
▷규제개혁도 속도가 더딥니다.
“서비스 규제 개혁안은 여야가 다 좋다고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문제 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걸 빼고라도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려면 규제개혁이 절대 필요합니다. 드론도, 빅데이터도, 인터넷뱅크도 규제가 풀려야 제대로 작동을 할 텐데 참 답답해요.”
▷‘2020년까지 시간당 최저임금 1만원’ 정책은 어떻게 보십니까.
“최저임금이 최저생계비도 보장 못 하는 현실에서 최저임금을 올리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기업이나 산업, 영세 사업장이 견뎌낼 수 있는 범위를 감안해야 합니다. 무리하게 목표를 정해서 ‘언제까지 1만원까지 올려야 한다’고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인상률이 적당할까요.
“아무 계산 없이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할 순 없지만 최저임금을 올리고 정부가 (인상분 일부를) 보전해주는 건 잘못이라고 봐요. 정부가 보전해준다는 건 비정상입니다. 그 돈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모를까, 결국 세금으로 주는 건데 지속가능한 것도 아니고요. 정부가 보전해주지 않아도 되는 범위만큼만 올려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정부가 복지를 확대하면서 ‘서민 증세는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복지 공약을 하면서 마치 증세는 없는 것처럼 하는 건 잘못입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국민에게 복지를 주는 것만 약속할 게 아니라 고통 감내도 동시에 요구해야 합니다. 증세를 안 하면 결국 재정적자를 키우거나 복지를 후퇴시킬 수밖에 없어요. 정부는 ‘5년간 이러이러한 복지를 주겠다. 대신 세금은 얼마를, 어떻게 걷겠다’는 로드맵을 내놔야 합니다.”
▷증세는 어떻게 하는 게 바람직합니까.
“중장기적으로 볼 때 법인세, 소득세, 종합부동산세, 그러고도 모자라면 부가가치세 순으로 해야 한다고 봅니다. 소득세는 고소득자가 더 부담하더라도 적어도 중산층 이상은 올려야 한다고 봅니다. 법인세도 그렇습니다.”
▷법인세는 세계적으로 내리는 추세입니다.
“다른 나라는 법인세가 높기 때문에 낮추는 겁니다. 미국은 법인세 최고세율이 30%가 넘습니다. 우리는 법인세 명목세율이 22%지만 실효세율은 (각종 비과세·감면 때문에) 10%대 중반 아닙니까. 지금 기업들이 쌓아둔 현금성 자산만 200조원입니다. 법인세 인상은 단순히 복지 재원 문제가 아니라 정부가 세금을 걷어서 기업이 안 하는 고용과 투자를 대신 하고 일자리를 늘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부동산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는 해방 이후 지난 정부까지 모두 부동산을 경기 부양 수단으로 봤습니다. 그 결과 지난 50년간 물가가 30배 정도 올랐는데 땅값은 3000배 뛰었습니다. 최근에도 경제성장률보다 집값 상승률이 훨씬 더 높았습니다. 그 결과는 ‘빈곤화 성장’입니다. 경제는 성장했는데 삶의 질은 갈수록 후퇴하는 거예요. 부동산 가격 상승은 양극화의 근본 원인이고 (생산) 원가를 상승시켜 경쟁력을 약화시키죠. 그래서 부동산 경기 부양은 일시적으로 남고, 영원히 밑지는 정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동산을 경기 부양 수단이 아니라 국민생활 안정 수단으로 봐야 합니다. 부동산을 재산 형성 수단에서 제거하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지금 부동산 값을 떨어뜨리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제 주장은 ‘장기적으로 부동산 값을 현상 유지하면서 가계 소득을 계속 올려주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합부동산세를 강조하는 겁니다. 한국은 보유세가 낮습니다. 집값 대비 보유세가 미국이 1.5%, 일본이 1%인데 한국은 0.15%입니다. 보유세를 올리고 거래세는 낮춰야 합니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양적완화를 끝내려 하고 있습니다. 한은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국 정책금리가 2년쯤 뒤에는 연 3% 수준으로 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장 금리를 안 올린다고 해도 내년부터는 달라질 겁니다. 우리 경제 성장이 정상화될 때 적정금리는 연 3% 내외라고 봅니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대학 교수, 청와대 경제수석, 장관, 한은 총재를 모두 지낸 흔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다. 2012년 대선과 올해 대선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도왔다. 이번 대선에선 문 후보의 개인 싱크탱크이던 ‘국민성장’의 자문위원장을 맡았다. 화려한 이력과 달리 그는 ‘흙수저’다. 논밭에서 일하고 땔감을 해가며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 시절에도 농사를 짓다가 시험 때만 서울로 올라가 공부한 적이 많았다. 그는 인터뷰에서도 “어릴 적 논에서 일할 때 농민들의 땀 냄새, 흙냄새, 푸른 모 냄새가 어우러진 냄새가 내 코에 입력돼 70년이 지나서도 머리에 남아 있다”고 했다. 그 냄새를 떠올리며 자신의 호를 ‘푸른 벼’라는 의미의 청도(靑稻)로 지었다. 한은에서 첫 사회생활을 했으며 교수, 장관 등을 거쳐 2002년 김대중 정부 말기부터 2006년 노무현 정부 중반까지 한은 총재를 지냈다.
△1936년 전북 김제 △이리공고,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 박사 △중앙대 정경대 경제학과 교수 △청와대 경제수석(1988년) △건설부 장관(1988~1989년) △한국경제학회장(1999~2000년) △한은 총재(2002~2006년) △‘국민성장’ 자문위원장(2016~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