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당원들의 기억 속에 2000년 대선은 쓰라린 패배로 남아있다.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는 일반투표에서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를 54만여표 앞섰으나 정작 대선 승부를 좌우하는 선거인단 집계에서는 부시 후보가 5명 앞섰다.(부시 271명, 고어 266명) 연방대법원까지 개입하는 우여곡절 끝에 부시는 불과 537표 차로 고어를 누르고 플로리다 선거인단 25명을 차지하며 대선에서 승리했다. 플로리다가 고어에게 갔으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당시 진보 진영에서는 녹색당 후보로 출마한 랠프 네이더 책임론이 흘러나왔다. 진보 성향의 네이더가 고어 표를 잠식한 탓에 플로리다를 빼앗겼다는 비판이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 격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고어와 네이더의 지지층이 일부 겹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2000년 대선 승부는 네이더가 플로리다에서 얻은 9만7488표가 갈랐다고 볼 수 있다. 



 

올해 대선에서도 진보 진영에선 녹색당의 질 스타인 후보가, 보수 진영에선 자유당의 게리 존슨 후보가 각각 출마했다. 

민주, 공화 양당제가 정착된 미국 대선에서는 제3후보가 여간해선 판세를 좌우하기 힘들다. 역대 대선에서 제3후보들은 항상 있었지만 존재감이 미미했다.

 

 스타인과 존슨은 2012년 대선에서도 각각 녹색당, 자유당 후보로 나섰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올해 대선에서는 제3후보 변수가 중요해졌다.

미국 자유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 게리 존슨 전 뉴멕시코 주지사가 지난 5월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올랜도=AP연합뉴스

무엇보다 스타인이나 존슨 같은 제3후보의 득표 공간이 대폭 확장됐다. 역대 어느 대선보다 민주, 공화 후보를 싫어하는 유권자층이 두꺼워졌기 때문이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발표된 월스트리트저널(WSJ)·NBC의 조사에 따르면,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비호감도가 각각 55%, 60%에 달했다. 클린턴과 트럼프를 지지한 응답자 대부분이 두 후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상대 후보가 더 싫어서 어쩔 수 없이 클린턴이나 트럼프를 선택했다는 얘기다.

4자 구도의 지지율은 클린턴(39%), 트럼프(38%), 존슨(10%), 스타인(6%) 순으로 나타났다.

 

 

지지후보가 없다는 응답자(7%)에게 한번 더 물었더니 이들 중 존슨과 스타인을 택하겠다는 응답이 각각 31%, 17%에 달했다. 트럼프와 클린턴에게 표를 던지겠다는 응답은 12%, 8%에 불과했다. 본선전이 본격화하면 민주, 공화당 후보에게로 표가 결집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현재까지는 제3후보의 득표력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하나, 2012년 대선 당시 4% 포인트 미만 격차로 승부가 갈린 곳이 4개주 나왔는데 올해 대선에선 2000년 대선의 플로리다처럼 제3후보가 승부를 가르는 주들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커졌다. 


1992년부터 2012년까지 역대 6차례 대선을 돌아보면 민주당 후보는 펜실베이니아 등 18개 주와 워싱턴DC에서 연전연승했다. 그래서 이들 18개 주는 ‘민주당 장벽(Blue Wall)’으로 불렸다. 그런데 올해 대선에서는 트럼프 후보가 민주당 성향의 백인 노동자층을 흔들면서 민주당 장벽의 일각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민주당 아성이 경합주(Swing State)로 바뀐 것이다.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주가 특히 그렇다. 최근 6차례 대선 중 민주당이 5번 승리한 아이오와와 뉴햄프셔주, 4번 승리한 오하이오주 같은 민주당 우세주도 이번엔 경합주로 변했다. 의회 전문매체인 ‘더 힐’은 28일 이들 경합주에서 클린턴과 트럼프가 오차 범위 내 접전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재로선 제3후보가 클린턴과 트럼프 중 누구에게 치명타를 가할지 예단하기는 쉽지 않다. 진보 성향의 스타인 후보는 클린턴 후보와, 보수 성향의 존슨 후보는 트럼프 후보와 지지층이 일부 겹친다. 박빙 경합주에서 존슨이 선전하면 클린턴이, 반대로 스타인의 득표력이 커지면 트럼프가 웃을 것이다.



 

미국 녹색당 대통령 후보 질 스타인

참고로 존슨의 자유당은 50개주 모두에서, 스타인의 녹색당은 50개주의 4분의3 정도에서만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릴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클린턴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충성도에 있어서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클린턴 지지자들보다 단단한 것으로 집계됐다. WSJ·NBC조사의 클린턴·트럼프 양자대결 상황에서 클린턴을 택한 응답자는 4자 구도에서 13%가 제3후보로 이동한 반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같은 상황에서 9%만 떨어져 나갔다. 

조남규 국제부장

 

필자는 이 글에 붙는 댓글을 꼼꼼이 읽는 편이다. 네티즌들이 궁금해하는 대목은 다음 글의 소재로 삼기도 한다. 다만, 이 글의 관점을 문제삼는 댓글은 대개는 무시한다. 필자는 미 공화당 대선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의 인종편향·여성 경시 행태나 ‘미국 우선주의’ 대외 정책을 비판하는 쪽에 서 있다. 트럼프는 그런 국수주의, 편가르기 전략으로 공화당 경선에서 재미를 봤다. 하지만 그런 자세로는 더 다양한 미국인의 지지가 필요한 본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본다. 설사 트럼프가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를 현실화시킨 반(反) 세계화 흐름 속에서 미국 대통령이 되는 행운을 잡는다해도 트럼프의 공약으로는 그가 약속한 ‘위대한 미국’은 절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이런 필자의 견해에 반대하는 네티즌들의 견해도 십분 존중한다. 더욱이 필자의 졸고에 댓글을 다는 성의를 보인 만큼 필자도 나름의 성의를 보이고 싶다. 그래서 이번 회에는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트럼프가 지금 클린턴 보다 지지율이 낮은 것은 100% 그의 책임이다.

트럼프가 지난 5월3일 사실상 공화당 대선후보 지위를 굳힌 뒤 그의 지지율은 껑충 뛰었다. 주요 정치이벤트 직후에 지지율이 오르는 이른바 ‘컨벤션 효과’ 덕분이다. 클린턴을 추월하는 조사도 나왔다. 이 때 민주당 대선경선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경선 맞수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에 의해 발목이 잡혀서 경선을 종결짓지 못하고 있었다.
 당내 도전자들을 모두 정리한 트럼프로서는 후방을 걱정하지 않고 진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통상적인 후보라면 경선 과정에서 제시했던 과격한 공약들-예컨대 무슬림 입국 금지나 불법 체류자 전원 추방,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 쌓기 등-을 순화시키거나, 최소한 그런 공약을 부각시키는 일은 삼갔을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달랐다. 멕시코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공화당 소속인 수사나 마르티네즈 멕시코주 주지사를 공격하고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과 각을 세웠다. 인디언 혈통설이 나도는 민주당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을 향해 ‘포카 혼타스’라는 인종차별 표현을 사용하며 비아냥댔다. 트럼프 관련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곤잘로 쿠리엘 연방판사를 겨냥해선 그가 히스패닉 혈통이라서 편파적일 것이라고 예단했다. 쿠리엘 판사는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로 멕시코 마약조직 소탕 과정에서 살해 위협까지 받은 인물이었는데도 트럼프의 인종 공격은 피해가지 못했다.
 

 트럼프는 또 올랜도 총격 테러가 발생하자 무슬림 입국 금지 공약을 다시 꺼내들었다. 트럼프의 쿠리엘 판사 비판이나 무슬림 입국 금지 주장과 관련해선 대다수 보수 유권자들도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트럼프가 자충수를 두고 있는 사이에 클린턴은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에 필요한 선거인단을 확보하면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트럼프가 후보 확정 이후 천금같은 50일을 쓸데없는 논란이나 불러일으키며 낭비하고 있는 사이에 클린턴은 트럼프를 가볍게 추월했다. 트럼프의 하락세는 기존 공화당 대선 후보들 보다 가파른 것이다. 아래는 대선을 200일∼100일 앞둔 시점의 공화당 대선 후보 지지율 추이다.

 

 

이제 트럼프에게는 반전의 기회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무엇보다 여성 후보인 클린턴이 여성 유권자의 호감을 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공략할 필요가 있다. 최근 실시된 월스트리트저널(WSJ)·NBC방송 조사에 따르면, 트럼프는 전문대졸 이하 학력의 백인 여성층에서 클린턴을 앞서고 있다. 대다수 백인 남성은 학력에 관계없이 클린턴을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가 백인 유권자층에서 클린턴에게 밀리는 곳은 전문대졸 이상의 고학력층이다. 트럼프는 이들을 우군으로 만들어야 한다.
 

 

 


2012년 대선 당시 밋 롬니 공화당 대선후보는 고학력 백인 여성표에서 재선에 도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앞섰다. WSJ은 “펜실베이니아나 콜로라도 같은 경합주의 교외 지역에서 트럼프가 표를 얻으려면 고학력 백인 여성표를 가져와야 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건 트럼프가 고민해야 할 문제다. 다만, 폭스뉴스 앵커 메긴 켈리에 대해 “그의 눈에서 피가 나왔다. 다른 데서도 피가 나왔을 것”이라고 말한 것 같은 여성 비하 발언은 절대 금물이다. 

트럼프가 고학력 여성의 지지를 높일수 있다면 그건 그가 보다 정상적인 후보가 됐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최소한 2012년 대선 당시 롬니가 이긴 주들은 트럼프도 가져올 수 있다.  

 
 

 

롬니는 2012년 대선에서 206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다.

트럼프는 이제 206명에 +알파를 해야 한다.

WSJ은 트럼프가 롬니 승리주를 모두 차지한다는 전제 위에서 트럼프가 승리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을 제시했다.

그 하나가 플로리다 루트다.  플로리다 승리를 전제로 한 전략이다.
트럼프가 2012년 대선에서 오바마가 가져간 플로리다(선거인단 29명)를 빼앗아오면 대선 승리 전략을 활용하기가 한결 쉬워진다.

여기에 경합주인 오하이오(18), 아이오와(6), 뉴 햄프셔(4), 메인(4)을 보태면 트럼프가 확보한 선거인단은 267명이 된다. 이제 펜실베이니아(20), 미네소타(100, 위스콘신(10), 콜로라도(9), 미시간주(16) 가운데 하나만 가져오면 당선 조건인 선거인단 270명을 가볍게 넘길 수 있다.

그런데 플로리다의 인종별 구성은 트럼프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트럼프 반감이 강한 히스패닉이 30% 가깝게 되고, 흑인 비율도 15%를 넘는다. 10명 중 4명꼴로 트럼프를 싫어하는 히스패닉과 흑인이다.

또 다른 루트가 플로리다를 우회해서 가는 길이다. 플로리다 루트 보다는 좀 험한 코스가 되겠다.

트럼프는 플로리다 대신 아이오와, 메인, 뉴햄프셔에서 승리해야 한다. 트럼프 지지세가 강한 백인 노동자층이 다수 거주하는 오하이오와 펜실베이니아까지 가져오면 선거인단 258명을 확보할 수 있다. 트럼프는 이제 12명을 더 얻어와야 한다. 전통적으로 공화당 지지세가 강했던 버지니아(13)를 공략할만하다. 버지니아는 오바마가 등장하기 전만해도 공화당의 아성이었다. 트럼프가 공화당 단합만 이뤄낸다면 버지니아 승리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할 것이라고 누가 예상했나. 그 만큼 트럼프는 있을 법 하지않는 일을 성사시킨 비전통적 후보다. 본선에서도 그런 기적을 만들지 말란 법은 없다. 대신 트럼프가 좀 변해야 가능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조남규 국제부장

 

 

 

2001년 미국을 강타한 9·11 테러 이후 ‘테러’는 미국 대선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가 됐다.

9·11테러 이후 치러진 첫 선거인 2004년 대선이 특히 그랬다. 그해 재선에 도전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박빙 승부를 펼친 끝에 민주당 존 케리 후보를 꺾었다.

부시 대통령은 민주당 앨 고어 후보와 맞붙었던 2000년 대선에서는 과반 선거인단(271명)을 확보하며 승리했지만 일반 유권자 득표에서는 54만여표를 졌다.(연방제 국가인 미국의 대통령은 50개주와 워싱턴DC에서 선출하는 선거인단이 뽑는다. 각 주에 배정된 선거인단은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 1표라도 더 많이 얻은 후보가 독식한다. 전체 선거인단 538명의 과반인 270명 이상을 확보한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

첫 번째 재임 기간 내내 ‘반쪽 대통령’이란 조롱을 받아야 했던 부시는 4년 뒤 치러진 대선에서 선거인단은 물론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도 케리 후보를 301만여표 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 체면을 회복했다. 공화당 후보가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 민주당 후보를 누른 것은 1992년 대선 이후 처음이었다. 9·11 이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인 ‘테러와의 전쟁’은 부시 승리의 일등공신이었다.

지난 12일(현지시간) 발생한 올랜도 총격사건으로 올해 대선에서도 테러 변수가 돌출됐다.

테러 변수는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과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 중 누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까.

정치학자들의 유권자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체로 테러 위협이 고조된 시기에는 ‘공화당 후보, 남성 후보, 국가안보 분야 경력이 있는 후보’가, 그리고 강경책을 제시하는 후보가 더 능력 있는 후보로 비쳐진다. 국내 선거에서 ‘북풍(北風)’ 변수가 불거지면 보수 정당이 유리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클릭하면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공화당 남성 후보’가 유리하다는 가설은 올랜도 테러 직후 실시된 로이터-입소스의 여론조사 결과와 일맥 상통한다.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후보를 묻는 질문에서 트럼프(45%)는 클린턴(41%)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국가안보 분야 경력에서는 클린턴이 트럼프를 압도한다. 클린턴은 200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국방위를 노렸다. 그리고 국방위에 공석이 생기자마자 그 자리를 꿰찼다. 그는 워낙 성실하기도 하지만 군사위 청문회는 반드시 챙기며 펜타곤(미 국방성)과 미군의 신뢰를 얻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클린턴은 민주당 내에서 매파로 통한다.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 개전 결의안에 주저없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 일로 2008년 민주당 대선경선에서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2005년 실시된 리더십 평가 조사에서 클린턴은 부시 대통령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케리 상원의원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지만 국무장관을 거친 이후엔 상황이 달라졌다. 상원 군사위와 국무장관 경력으로 ‘민주당 여성 후보’라는 취약점을 보강한 것이다. 클린턴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국무장관 제의를 수용한 것은 2016년 대선까지 내다본 절묘한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트럼프는 딱히 공화당 후보로 규정짓기도 힘든 ‘아웃 사이더’다. 대외정책과 관련해선 공화당의 ‘국제주의(개입주의)’ 기조를 반대하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대외정책을 담당했던 인사들은 공식적으로 트럼프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은 정치전문매체인 폴리티코에 “트럼프는 공화당원으로 보이지 않는다. 공화당 이슈들을 배우려 하지도 않는다”면서 “클린턴 전 장관이 후보가 되면 그에게 투표하겠다”고 말했다. 아미티지를 비롯한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 담당자들은 대다수가 트럼프 반대파가 됐다. 트럼프가 ‘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면서 부시 정부가 시작한 이라크 전쟁을 ‘외교 정책의 재앙’으로 매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시 집권기를 ‘실패’로 규정짓기도 했다. 참다못한 부시 전 대통령은 얼마 전 대변인을 통해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테러 변수는 전통적으로 공화당 후보에게 유리했지만 올해는 트럼프와 클린턴의 우열을 가리기 쉽지 않게 됐다.

트럼프는 올랜도 총격 범인이 아프가니스탄계 이민자 아들로 판명되자 ‘무슬림 입국 금지’ 공약을 다시 꺼내들었다. 트럼프의 반응은 9·11 테러 직후 무슬림 센터를 찾아가 “테러는 무슬림의 참 모습이 아니다”면서 단합과 연대의 메시지를 던진 당시 부시 대통령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는 무슬림이나 히스패닉을 희생양으로 삼는 트럼프의 편가르기 전략이 백인 노동자층을 결집시키는 효과를 냈다. 무려 1330만여명이 트럼프를 찍기 위해 투표장에 나왔다. 편가르기 전략이 먹힌 것이다. 사실상 본선이 시작된 이후에도 트럼프는 이런 경선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이 전략은 본선에서도 통할까.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은 45세 이상의 백인 노동자층으로 조사됐다. 본선에서는 이들의 비율이 낮아진다. 본선 승리를 위해서는 공화당 온건파는 물론이고 중도층과 무당파의 표도 필요하다. 특히 경합주(스윙 스테이트)에서는 중도층과 무당파의 향배가 중요하다.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한 오바마 대통령이 얻은 일반 유권자 표는 6600만 표(선거인단 332명)에 육박했다. 공화당 밋 롬니 후보는 약 6000만 표(선거인단 206명)를 얻고도 졌다. 산술적으로 트럼프가 본선에서 이기려면 경선에서 얻은 표에 5000만 표 이상을 보태야 한다. 트럼프 마니아만으론 이 숫자를 채울 수 없다. 히스패닉과 흑인의 트럼프 지지율은 역대 공화당 후보 중에서 최저치다. 트럼프는 전문대졸 이상의 백인 고학력층에서도 클린턴에게 밀리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무슬림 입국 금지 같은 트럼프의 과격한 공약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 공화당 지도부도 마찬가지다.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무슬림 입국 금지 공약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것은 여론에 따른 반응이다. CBS와 블룸버그뉴스이 조사 결과, 유권자의 5분의3 이상이 무슬림 입국 금지 공약에 반대했다.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가 공약을 순화해야 공화당 텐트가 넓어진다고 본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 과정에서 자신을 띄운 지지층이 돌아설 것을 염려할지도 모른다. 트럼프는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섰다. 하나는 기존 공약을 수정해서 외연을 넓혀나가는 전략이다. 다른 하나는 공약을 유지한 채 핵심 지지층의 투표율을 높이는 전략이다. 그는 어느 길로 걸어갈 것인가. 미국 대선의 주요 관전 포인트다.

조남규 국제부장

 

“오늘 밤 자랑스러운 민주당원, 자랑스러운 미국인, 자랑스러운 힐러리 클린턴 지지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서게 돼 영광이다.”

2016년 7월26일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장. 민주당 대선경선에서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 맞서 끝까지 싸운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연설문의 첫 문장을 읽어내려가자 장내에서는 환호성과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당신이 힐러리에게 표를 던졌든, 아니면 나를 지지했든, 이제는 동일한 목적 아래 당 전체가 단합해야 할 때다” 더 큰 박수가 터져나왔고 대의원들은 ‘No Trump!’를 외쳤다. 샌더스 의원은 “힐러리 클린턴은 나의 후보이다. 그는 우리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전날 시작된 민주당 전당대회는 개최 직전까지만 해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 내에서는 클린턴 후보 지명에 불만을 품은 샌더스 지지자들이 전당대회 난동 사태를 촉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하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전당대회 사흘째, 샌더스는 클린턴에게 또 하나의 선물을 안겼다.

그 날 오전에 전당대회 대의원들은 클린턴과 샌더스를 대상으로 호명(roll call)투표를 실시했다. 롤 콜은 알파벳 순으로 각 주 대표가 나와, 대의원 투표 결과를 공개로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미 경선 과정에서 클린턴 후보가 과반 대의원을 확보했기 때문에 롤 콜은 클린턴을 민주당 후보로 지명하는 요식 절차에 불과했다. 샌더스는 이를 당의 단합을 위한 계기로 활용했다.

호명투표가 절반 넘게 진행됐을 때 샌더스는 자신의 지역구인 버몬트주 대의원들 앞에 섰다. “우리 당의 단합을 보여주고 대선 승리를 각오하는 다짐의 일환으로 우리가 한 목소리로 힐러리 클린턴이 우리의 후보이고 우리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자”고 말했다. 그러자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런 뒤 샌더스는 전당대회 호명투표를 중단하고 박수로 오바마를 지명하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은 통과됐고 대의원들은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대의원들은 ‘힐러리’를 연호했다. 전당대회 의장은 호명 투표 중단을 선언했다. 클린턴과 샌더스의 오랜 싸움이 비로소 종지부를 찍었다. 샌더스가 양 진영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씻김굿을 해준 셈이었다.

2008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버락 오바마(오른쪽)는 민주당 경선 맞수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새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임명하면서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상은 다음달 25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되는 민주당 전당대회 상황을 필자가 가상해서 그려본 모습이다.

소설을 쓴 것은 아니고 2008년 8월 콜로라도 덴버에서 열렸던 민주당 전당대회의 실제 상황을 토대로 등장 인물만 바꿔서 재구성한 것이다. 버락 오바마를 힐러리 클린턴으로, 힐러리 클린턴을 버니 샌더스로 바꿨다.

올해 민주당 대선경선도 치열했지만 2008년 민주당 경선에서도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과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죽기살기로 싸웠다.

클린턴은 그 해 6월7일 오바마 지지를 공식 선언했으나 클린턴 지지자들은 경선 과정에서 쌓인 앙금을 쉽게 풀지 못했다. 일부 지지자들은 ‘클린턴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하라’는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그 해 8월25일 콜로라도 덴버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하루 전날 오바마는 부통령 러닝 메이트로 조 바이든 상원의원을 선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클린턴 지지자들의 실망감은 컸다. 민주당 지도부가 전당대회 난동 사태를 걱정했을 정도다. 공연한 걱정이었다. 전당대회는 축제의 장이 됐다.

워싱턴포스트 정치전문기자인 댄 볼츠는 저서 ‘THE BATTLE FOR AMERICA 2008’에서 당시 정황을 전하면서 힐러리 클린턴과 남편인 빌 클린턴 덕분에 민주당이 내분을 종식시키고 일치단결해서 본선 경기에 임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오바마는 클린턴에게 빚을 졌다. 

클린턴과 비슷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
클린턴 유튜브 캡처

클린턴은 이제 2008년과는 정반대의 상황에 놓여있다. 그는 경선 맞수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그 지지자들을 우군화해야 한다. 8년 전의 클린턴처럼 샌더스도 할 수 있을까. 샌더스 의원은 지난 9일 오바마 대통령과의 회동 직후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다면 재앙이다. 유권자들이 여성과 소수집단을 모욕하는 사람을 지지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면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고, 조만간 클린턴 전 장관을 만나 협력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상의 클린턴 지지 선언이지만 아직은 2%가 부족하다. 샌더스의 지지자들을 클린턴 쪽으로 돌려세우기 위해서는 필자가 전개한 가상의 시나리오대로 민주당 전당대회가 흘러가야 한다. 사전 각본도 좋아야 하고 샌더스의 연기력도 좋아야 한다.

클린턴과 샌더스 지지자들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과정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오바마야말로 샌더스 지지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다. 진보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오바마는 여전히 80%가 넘는 지지를 받고 있다. 오바마는 8년전 클린턴에게 진 빚을 갚으려 한다. 그런 오바마가 임기말 재선 대통령치고는 괜찮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클린턴에게 행운이다. 

오바마의 클린턴 지원 유세(미국은 한국과 달리 대통령의 선거 지원 운동이 가능하다)는 특히 위스콘신과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같은 경합주 싸움에서 도움이 될 것으로 미 언론은 분석한다. 오바마는 두 번의 대선에서 이들 주를 석권했다. 오바마라면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인 백인 노동자층을 분열시키고, 중도·무당파층을 끌어올 수 있다.

클린턴은 조만간 샌더스와 만날 것이다. 그 자리에서는 민주당 강령을 보다 진보화하는 문제가 최우선 의제가 될 것이다. 이미 샌더스는 경선 과정에서 클린턴을 통상과 월가 개혁 문제에서 좀 더 진보적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샌더스는 이제 시간당 최저임금 인상 등과 같은 경제 이슈와 정당 민주화 부문에서 클린턴의 양보를 요구하고 있다. 클린턴과 샌더스를 중재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도 오바마다. 미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는 ‘첫 여성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킹 메이커’를 자처하고 나섰다. 역사와 대화하길 좋아하는 오바마다운 빅 프로젝트다.

조남규 국제부장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 미국 하원의장이 끝내 무릎을 꿇었다.

2일(현지시간) 공화당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하겠다’고 밝혔다. 라이언 의장은 트럼프가 후보 지명을 확정지은 이후에도 트럼프의 주요 공약들이 공화당 강령과 배치된다면서 지지 입장을 유보해왔다. 그 사이 트럼프의 생각이 바뀐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라이언도 “여전히 그와 나 사이에는 이견이 존재하지만 이견 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왜 라이언은 트럼프를 지지했을까? 그는 “트럼프가 보수주의 아젠다를 입법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밝혔지만, 그 말을 누가 믿을까. 라이언의 희망 사항일 것이다. 

<<폴 라이언 하원의장>>
공화당 전당대회 의장이기도 한 라이언이 달리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우선 당을 살려야 하는 처지에서 불가피한 선택을 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어쨌든 공화당 옥새를 쥐고 있는 라이언이 사실상 투항하면서 공화당은 이제 ‘트럼프의 정당’이 됐다. ‘아웃 사이더’ 트럼프가 공화당을 접수한 것이다. 적어도 대선이 치러지는 오는 11월8일까지는 그렇다.

이제 라이언과 트럼프는 한 배를 타게됐다. 그런데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미워한다는 점을 제외하곤 공통점이 많지 않다. 어떤 지점에선 정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이민개혁이다.

이민개혁은 민주당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전유물로 인식되고 있지만 이를 맨먼저 추진했던 대통령은 공화당 조지 W 부시 행정부였다. ‘돌아온 탕자’ 부시 대통령은 거듭난 기독교인이 된 이후 ‘다문화주의’를 신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앵글로 색슨 백인만의 세상을 만들려했던 공화당 우파와는 달랐다. 부시의 이런 관용 정책은 증가세인 히스패닉 표를 따진 정치적 선택이기도 했다. 제수씨(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부인)가 히스패닉이라는 가정사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2007년 부시는 민주당과 손잡고 초당적 이민개혁 법안을 마련했으나 공화당 내부 반발에 밀려 실패하고 말았다.(흥미롭게도 민주당 대선주자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이 법안에는 반대했다. 클린턴 후보가 올해 민주당 경선 TV토론에서 이를 공격 소재로 삼았다.)

2008년 대선에서 히스패닉 표심이 압도적으로 오바마 후보와 민주당 쪽으로 쏠리는 것을 목격한 공화당은 서서히 이민개혁을 수용하는 쪽으로 이동해갔다. 그런데 2010년 중간선거에서 반(反) 이민개혁 성향의 ‘티 파티(보수적 우파 대중운동)’ 계열 의원들이 공화당 예비경선에서 후보가 되고 대거 당선되면서 당내 기류가 확 변했다. 급기야는 오바마 대통령의 불체자 사면 등 이민개혁에 동조하는 공화당 의원들은 배신자로 몰리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그 대표적 희생양이 공화당 넘버 투였던 에릭 캔터 하원 원내대표다. 캔터는 존 베이너 하원의장 다음 서열의 거물이었으나 이민 개혁파로 찍혀서 2014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당내 예비경선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티 파티 세력이 경선 과정에서 캔터를 낙마시키기 위해 정치 신인인 경제학 교수 출신 후보를 밀었기 때문이다. 라이언은 이민개혁의 경우 캔터의 계보를 잇는 정치인이다. 대통령이 되면 1000만명이 넘는 불법 체류자를 몽땅 추방하겠다는 트럼프와 무슨 대화가 잘 됐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미국 노인이나 저소득층은 연방정부와 주 정부 차원에서 의료 혜택이 주어진다. 노인 의료보험은 메디케어, 저소득층 의료보험은 메디케어로 부른다. 고령화 사회, 소득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이 분야에 들어가는 예산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이 돈은 의무지출 예산이어서 매년 연례행사처럼 이뤄지는 백악관과 의회의 연방정부 예산 공방의 단골 소재가 된다. 공화당은 메디케어 수령 나이나 수령자의 부담을 더 높이는 쪽으로 메디케어 시스템을 개혁하자고 주장한다. 각 주의 메디케이드 예산도 대상자와 보장 대상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줄여나가자는 게 공화당의 입장이다. 이런 주장의 논리적 근거를 마련한 사람이 다름아닌 라이언이다. 예산 전문가인 그는 하원 예산위원장 시절 ‘미국의 미래를 위한 로드맵’(A Roadmap for America’ Future)을 통해 연방예산을 21세기 중반까지 균형예산으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그 핵심 방안 중 하나가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개혁이었다. 그는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변화 없이는 미국 예산 문제 통제 불가능하다”면서 “의료보험은 사회적 이슈라기 보다는 경제적 이슈”라고 주장했다. 반면 트럼프는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면서 메디케어는 손도 대지 말자고 한다. 메이케이드나 사회보장연금도 마찬가지다.

대외정책을 놓고도 공화당의 전통적인 ‘국제주의(개입주의)’를 지지하는 라이언과 ‘America First’를 외치며 미국 국익을 우선시하는 트럼프와는 서로 헌혈을 해줄 수 없는 혈액형이다. 자유무역을 놓고도 두 사람은 이견을 보이고 있다. <13회, ‘자유무역에 관한 트럼프의 거짓말’ 참고> 오바마 행정부 시절 공화당이 오바마표 법안을 거의 모두 비토하면서도 흔쾌히 찬성표를 던진 것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롯한 각종 FTA 비준안이었다. 그런 정당의 사실상의 대선후보가 FTA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 작금의 공화당의 어이없는 현실이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웃픈 표정의 라이언이 떠오른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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