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9일

임기말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지지율이 55%를 기록했다.

6일(현지시간) CNN이 발표한 오바마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최고치였다. 무당파과 백인 응답자의 지지율이 지난해 조사 때보다 각각 14% 포인트, 15% 포인트 높아졌다. 임기말 대통령의 지지율이 상승하는 현상은 흔치 않다. 오바마가 집권 8년 동안 국민에게 보여준 통합과 경청의 리더십, 중산층 챙기기와 사회적 약자 보듬기, 스캔들 없는 청렴성, 가족 사랑 등이 만들어낸 성적표일 것이다.

 
오바마의 고공 지지율은 “힐러리 클린턴 집권은 ‘오바마 정부 3기’라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온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캠프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트럼프 캠프의 ‘오바마 3기’ 주장은 팩트에 근거한 것이다. 오바마는 재선 캠페인을 성공시킨 직후부터 클린턴을 후계자로 점찍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어쩌면 오바마는 클린턴이 2008년 민주당 경선 결과에 흔쾌히 승복했을 때부터, 아니면 집권 후 새 내각을 구성하면서 클린턴에게 국무장관직을 제안했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클린턴의 화끈한 경선 승복 결단은 2008년 대선 승리의 초석이 됐다.

44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는 경선 맞수를 새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오바마 당선인은 도리스 굿윈의 링컨 전기인 ‘팀 오브 라이벌’(Team of Rivals)을 숙독하며 집권 준비를 했다. 

그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팀 오브 라이벌’을 읽고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 시기에 소속 정당을 뛰어넘어 자신과 경쟁했거나 자신에게 반대했던 인사들을 내각에 포함시킨 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대통령으로서 역량있는 인재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자존심이나 과거의 원한 따위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오바마의 링컨 사랑은 힐러리에게는 행운이었다.

세계를 경영하는 제국인 미국에서 국무장관은 부통령 이상의 자리다. 클린턴이 대권을 준비하기에 안성맞춤의 자리다. 경선 승복에 대한 보답 차원의 인사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클린턴은 8년을 인내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2008년 승복 연설 그대로, 이번에는 더 쉽게 민주당 대선 후보 지위를 사실상 확정지었다. 민주당 경선에서 ‘샌더스 바람’이 거세게 불었지만 적어도 민주당 내부에서는 “이번에는 힐러리 차례”라는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됐다. 2008년 경선 당시 흑인 대통령을 만들어내기 위해 오랜 친구 힐러리에게 등을 돌렸던 흑인들이 이번에는 빚을 갚는 심정으로 클린턴을 밀었다. 

올해 민주당 경선에서 맞붙었던 클린턴과 샌더스 지지자들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과정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역할이 컸다. 오바마야말로 샌더스 지지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오바마는 8년전 클린턴에게 진 빚을 갚으려 했다. 그런 오바마가 임기말 재선 대통령치고는 괜찮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클린턴에게는 행운이다. 

미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라는 역사를 만들어냈던 오바마는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또 다른 페이지를 쓰고 있는 클린턴을 돕고 있다. 역사와 대화하길 좋아하는 오바마다운 프로젝트다. 

조남규 국제부장

2016년 10월27일

미국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대선후보는 시련의 정치인이었다.

1992년 남편인 빌 클린턴의 대선 승리로 퍼스트레이디가 된 힐러리는 보수 진영의 표적이 됐다. 그럴 만도 했다. 힐러리는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백악관 웨스트윙에 퍼스트 레이디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때까지 퍼스트 레이디의 사무실은 백악관 이스트윙에 있었다. 남편을 내조하던 기존의 퍼스트레이디와 달리 힐러리는 빌 클린턴 정부의 의료개혁을 진두지휘하는 등 빌과 사실상 ‘공동 통치’를 했다. 여성과 동성애자 권익 보호에도 앞장섰다. 전통을 중시하는 공화당 의원들의 눈에 힐러리가 곱게 보였을 리 없다.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자 의회는 특별검사를 임명해 힐러리와 관련된 모든 의혹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믿고 의지했던 측근은 권총 자살을 했다. 언론과도 불화를 겪었다. 힐러리는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측근들과 똘똘 뭉쳐서 외부 공세에 맞섰다. 힐러리의 측근을 일컫는 ‘힐러리랜드’(Hillaryland)가 이때 생겨났다. 거의 전원이 여성이었다. 이들은 힐러리가 시련을 겪을 때마다 곁을 지켰다. 힐러리도 이들을 가족처럼 대했다. 힐러리랜드에 소속되면 클린턴 부부에게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미 언론은 힐러리가 측근들의 애경사를 직접 챙겼다고 전했다. 측근들은 충성심으로 보답했다. 법원 판결로 공개된 이메일에서 그들은 힐러리를 ‘보스’로 불렀다. 

힐러리가 2000년 상원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한 이래 그의 정치는 측근들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런 측근 정치는 힐러리가 2008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에게 패배한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된다. 의리로 뭉쳐 있던 힐러리 캠프는 능력있는 인재와 참신한 전략을 쉽게 수용하지 못했다. 인재와 전략은 오바마 캠프로 흘러 들어갔다. 힐러리는 이후 외부 인사에도 힐러리랜드의 문호를 일부 개방했다.  

힐러리의 최측근인 셰릴 밀스와 힐러리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후마 에버딘은 클린턴 정부 시절부터 힐러리랜드에 소속돼 있던 인사들이다. 밀스와 에버딘은 힐러리가 국무장관에 임명됐을 때 각각 비서실장과 비서실차장에 임명됐다. 힐러리와 에버딘의 관계를 놓고는 “빌조차도 힐러리와 접촉하려면 에버딘을 통해야 한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다.  

힐러리의 비밀주의 행태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힐러리는 국무장관 시절 개인 이메일을 통해 측근들과만 은밀히 소통했다. 그 과정에서 국가기밀로 분류된 정보들이 사적으로 유통됐다. 미국 사법당국이 힐러리를 기소했다면 올해 대선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 것이다. 2016년 대선 과정에서 힐러리를 괴롭혔던 ‘이메일 스캔들’은 비밀주의 행태가 낳은 예고된 참사였다.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대선후보는 대선 캠페인 기간에 힐러리의 측근 정치와 비밀주의 행태를 공격했다. 힐러리의 측근 중에는 컨설팅 회사를 차려놓고 세계 각국의 기업을 고객으로 두고 떼돈을 번 인사도 있었다. 보수 진영은 힐러리가 그 측근의 돈벌이를 도왔다는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힐러리가 비호감 후보가 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이메일 스캔들과 관련해선 힐러리가 직접 “실수였다”고 여러 차례 고개를 숙여야 했다. 비선(秘線) 측근에 과도하게 의존해온 박근혜 대통령도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공교롭게도 한·미 양국에서 대표적 여성 리더의 측근 정치가 도마 위에 올랐다.

조남규 국제부장

 

영국 심리학자인 피터 웨이슨(Peter Wason)이 제시한 ‘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이란 가설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이다.

미국 대선후보 1차 TV토론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는 웨이슨의 확증편향 가설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 보다 토론을 잘했다는 응답이 그 반대 응답 보다 두 배 이상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두 후보의 지지율 격차는 변화가 없었다. 토론을 지켜봤다는 응답자만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클린턴의 지지율이 다소 상승했으나 대세를 좌우할 정도는 아니었다. 

클린턴은 철저한 사전 준비를 통해 트럼프를 궁지에 몬 것은 사실이다. 트럼프가 여성,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이미지를 더 부각시킨 것도 맞다. 말싸움에선 클린턴이 확실히 이겼다. 그렇다고 트럼프 지지자들이 마음을 바꾸지는 않는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 중에는 트럼프가 여성, 인종차별주의자라서 지지한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클린턴이 토론을 더 잘해서 클린턴을 더 미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앞으로도 두 번의 토론이 더 남아있지만 트럼프의 성품이나 인성 같은 자질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클린턴의 자질도 썩 좋은 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번 대선이 ‘비호감 후보’의 대결, 최선도 차선도 없으니 최악이 아닌 ‘차악(次惡)의 후보’라도 뽑자는 선거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트럼프가 다음 번 토론부터 더 공세적으로 나갈 수도 있고, 미 언론의 보도대로 빌 클린턴의 여자 문제를 거론할 수도 있겠지만 트럼프의 머릿 속에는 그를 공화당 후보로 만들어준 백인 노동자층을 단 한 명이라도 투표장으로 이끌어내겠다는 생각 뿐이다. 그렇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면 빌 클린턴의 여자 문제 뿐 아니라 힐러리 클린턴의 남자 문제도 꺼내들 위인이다. 

백인 투표율은 2004년 대선 때 67.2%를 기록한 뒤 하락 추세다. 2012년 대선에선 64.1%에 그쳤다. 2004년과 비교해서 백인 1000만명 정도가 투표장을 외면했다. 반면 투표장을 찾은 흑인과 히스패닉 유권자는 같은 기간 400만명 가량이 더 늘었다. 흑인 투표율은 2004년 60.0%에서 2012년 66.2%로, 히스패닉 투표율은 2004년 44.2%에서 2012년 47.3%로 상승했다.  

공화당은 백인의 투표율 하락, 소수 인종의 투표율 상승이 오바마 대통령의 2012년 재선 캠페인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본다. 2008년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이후 백인층의 오바마 비토 정서에 편승했던 공화당이 오바마 재선 이후 오바마 정부의 이민개혁 조치에 동조한 것도 해마다 유권자가 늘어나는 소수인종을 끌어안지 않고서는 대선 승리는 요원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30일(현지시간) 새벽 트위터에 비하 발언 논란의 당사자인 1996년 미스 유니버스 알리시아 마샤도(40)를 향해 '역겹다'며 섹스 비디어를 언급했다. 사진은 1996년 5월 17일 미스 유니버스를 수상한 베네수엘라 출신 마샤도(왼쪽)의 모습.
하지만 트럼프는 소수인종을 버리고 백인을 끌어안는 역발상의 캠페인을 펼쳤다. 트럼프의 전략은 통했다. 공화당 경선 투표장에는 백인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올해 공화당 경선에 참여한 유권자는 2012년 경선 보다 무려 1400만명이 더 많았다. 트럼프가 투표장으로 끌어낸 사람들이었다.  

트럼프의 발언은 솔직히 정상적인 사람의 귀에는 좀 거슬린다. 정치판을 잘 읽는 전문가들의 눈에는 선거를 망치려고 작정한 후보처럼 보인다. 트럼프는 1차 TV토론에서 여성 비하 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다음 날 미스 유니버스 출신 여성의 몸무게를 거론하면서 “최악의 미스 유니버스”라고 비난했다. 필자 같은 정상인들은 주변 여성에게 몸무게를 물어보는 것도 대단한 실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트럼프의 뇌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떤 카드를 버린다고 포커 게임에서 지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는 백인 노동자표를 손에 쥐고 클린턴을 누를 수 있는 패를 만들어가고 있다.

조남규 국제부장

 

미국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대선후보(이하 힐러리)는 미국인의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히 갈리는 정치인이다.  

힐러리가 2016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후 실시된 각종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그가 싫다고 답변했다. 지난 8월 말 실시된 워싱턴포스트·ABC방송 조사에서는 비호감률이 56%에 달했다. 호감률은 41%에 그쳤다. 트럼프에 대한 비호감률(63%)도 만만치 않았다. 유권자들에게 2016년 미 대선이 ‘덜 나쁜 후보’를 선택하는 선거가 됐다. 트럼프는 극단적인 인종,성 차별 행태로 미국인들, 특히 소수 인종과 여성 층의 반발을 샀다. 트럼프가 선거 전략 차원에서 그랬든, 원래 그런 성향이었든 트럼프가 미움받은 이유는 쉽게 이해가 된다. 힐러리는 그렇지 않다. 왜 비호감 후보가 됐는지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 힐러리가 싫다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거짓말쟁이라서, 비리 스캔들이 많아서, 너무 진보적이어서, 남편이 바람둥이여서···. 모두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정치인 힐러리의 역대 지지율 추이를 살펴보면 일관된 패턴이 발견된다. 힐러리가 정치적 야망(특히 대통령 꿈)을 드러낼 때마다 지지율이 하락했다. 힐러리의 지지율은 상원의원 재직 시절(2001년 1월∼2009년 1월)에는 상승 곡선을 그리다가 대선 출마설이 솔솔 피어오르는 시점부터 꺾이기 시작해서 2008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기간 내내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 해 경선에서 버락 오바마에게 패배한 뒤 힐러리의 지지율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힐러리의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시기는 오바마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으로 묵묵히 일할 때다. 장관 재직기간 지지율이 66%(갤럽)까지 치솟았다. 그런데 힐러리가 2013년 2월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다시 대선 출마 움직임을 보이자 그의 지지율은 50%대로 뚝 떨어졌다.


힐러리 지지율 추이
  

힐러리가 정치적 도전에 나설 때마다 지지율이 떨어지는 이유는 뭘까. 바로 ‘섹시즘’(Sexism)이다. 여성은 체질이나 성격, 능력 면에서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인식(또는 잠재 의식) 하에 이뤄지는 온갖 차별적 행태인 섹시즘 말이다. 건국 이후 미국의 대통령은 모두 남성이었다. 감히 그 자리에 여성이 도전한다니, 어떤 사람들은 힐러리의 대선 도전에 뺨이라도 얻어맞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힐러리가 정치를 시작하기 전에도 여론은 그녀가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려할 때마다 매를 들었다. 1993년 퍼스트 레이디 힐러리가 백악관 이스트 윙(퍼스트 레이디 집무공간) 대신 웨스트 윙(대통령 집무 공간)에 사무실을 마련했을 때, 건강 보험 개혁을 진두 지휘했을 때 힐러리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웨스트 윙에 자리잡은 퍼스트 레이디는 힐러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다 힐러리가 건강 보험 개혁 반발에 따른 1994년 중간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국정 일선에서 물러나 이스트 윙에 다소곳이 머무르자 힐러리의 인기가 높아졌다.  

미국 정치권에서 섹시즘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는’ 행위로 금기시된다. 그런데 트럼프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따위는 무시한 채 거침없는 성·인종 차별 행태로 여론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공화당의 핵심 기반인 백인 남성표를 결집해 결국 대선후보가 됐다. 힐러리가 민주당 후보가 되자 트럼프는 본선 선거운동 과정에서 중도파와 민주당 진영의 백인 남성들을 힐러리와 갈라놓기 위한 섹시즘을 구사했다. 트럼프가 폭스뉴스의 여성 앵커 메긴 켈리에게 가한 섹시즘은 압권이다. 트럼프는 2015년 8월 공화당 대선후보 첫 TV토론에서 그의 여성 비하 발언을 지적한 메긴을 ‘빔보’(bimbo·예쁘지만 머리가 빈 여자)로 비하했다. 그가 메긴을 겨냥해 “토론회를 진행하던 그녀의 눈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다른 어디에서도 피가 나오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여성들은 경악했지만 백인 남성들의 트럼프 지지는 더 견고해졌다. 트럼프가 올해 9·11 추모행사장에서 휘청거린 힐러리를 겨냥해 “(힐러리) 클린턴이 또 하루를 쉰다. 그녀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트윗을 올린 것도 섹시즘의 일종이었다. 이 트윗의 이면에는 여성은 남성보다 신체적으로 열등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힐러리는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도 섹시즘의 장벽을 넘어서야 했다. 올해 민주당 경선에서 백인 남성들은 힐러리 대신 버니 샌더스 후보를 밀었다. 샌더스가 힐러리 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힐러리가 여성이어서 그랬다. 흑인 오바마와 여성 힐러리가 겨뤘던 2008년 민주당 경선 때도 남성들은 ‘여성 대통령’ 대신 ‘흑인 대통령’을 선택했다.  

남성 정치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가 여성 정치인에게는 단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힐러리가 기침을 멈추지 않거나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삐끗해서 경호원의 부축을 받거나 어지럼증으로 휘청거리기라도 하면 그 때마다 미디어는 법석을 떨었다. 2015년 가을 샌더스가 탈장 수술을 받았지만 미디어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갤럽이 2014년 3월 미국인들에게 ‘왜 힐러리는 대통령감이 아니냐’고 물었다. ‘힐러리가 대통령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힐러리는 재선 대통령의 퍼스트 레이디 경험을 갖춘 재선 상원의원, 국무장관 출신이다. 남성 정치인이 이 정도의 경력이라면 자격 논란은 일지 않았을 것이다. 자격 시비는 공연한 주장이고 ‘여성 대통령을 원하지 않는다’는 두 번째 답변이 오히려 솔직한 답변일지도 모른다. 결국 힐러리가 Y염색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백악관에 재입성하는 모습을 보기 싫다’는 응답도 나왔다. 남편의 불륜도 힐러리 책임이라는 말이다. 부인의 불륜으로 추궁받은 남성 정치인은 없었다. 이런 게 섹시즘이다. 섹시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다. 섹시즘은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의 표현을 빌리면 ‘알려진 무지’(known unknowns)의 영역이다.  

앞서 나가는 힐러리가 왠지 불안해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조남규 국제부장

 

미국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대선후보(이하 힐러리)는 1947년 10월26일생이다.

한국 나이로는 70세(만 69세)이지만 생일 기준으로 계산하는 미국 나이로는 68세다. 대통령이 되기엔 나이가 좀 많은 편이지만 나이가 걸림돌이 될 정도는 아니다. 힐러리는 남편 빌 클린턴의 선거 캠페인을 물론이고 자신의 상원의원 선거, 국무장관직 수행,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정적(政敵)도 인정할만한 끈기와 집념을 보였다.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힐러리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은 국무장관 재임 말기인 2012년 겨울이다. 그해 12월 힐러리는 욕실에서 쓰러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부딪쳤다. 원인은 장염에 따른 탈수 증세. 이 달 11일 뉴욕에서 열린 9.11 테러 희생자 추모 행사장에서 사실상 졸도 상태에 이른 이유도 탈수 증세였다.(힐러리 주치의는 폐렴에 걸린 힐러리에게 항생제를 투여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힐러리는 2012년 추수감사절 연휴 전후로 중동과 동남아 등지를 순방하는 와중에 장염에 걸렸다. 결국 아랍에미리트를 포함한 중동 순방을 취소한 채 자택에서 쉬고 있는 동안 욕실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힐러리는 뇌진탕 진단을 받았다. 힐러리는 그 해 12월20일 미 하원과 상원에서 ‘벵가지 사건’(2012년 9월11일 리비아 무장괴한들의 테러로 리비아 벵가지에 있는 미국 영사관에서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대사 등 미국인 4명이 숨진 사건)과 관련해 증언할 예정이었다. 힐러리가 뇌진탕 후유증으로 증언 날짜를 미루자 보수 매체들은 일제히 힐러리가 증언을 회피하기 위해 ‘꾀병’을 부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 매체들이 최근엔 2012년 힐러리의 뇌진탕이 대통령직 수행을 위태롭게 할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는 공세를 펴고 있다. 이제 힐러리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자 ‘꾀병’이 ‘중병’으로 변한 셈이다. 동일한 팩트를 입맛대로 해석하다보면 이런 자가당착의 사례를 만들어낸다. 

힐러리의 뇌진탕은 ‘꾀병’이 아니었다. 그의 건강은 캠프 내에서도 우려하는 사항이었다. 올해 대선에서 힐러리가 건강 문제에 발목이 잡힐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국무장관 퇴임 직후 힐러리는 대선 출마가 어려울 것이란 평가가 나올 정도로 초췌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1일(현지시간) 미국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대선후보가 뉴욕 맨해턴의 9·11 테러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했다가 휘청거리며 쓰러지려 하자 수행원들이 클린턴을 부축해 밴 차량으로 데려가고 있다.(왼쪽 사진) 딸 첼시의 아파트로 이동해 잠시 휴식을 취한 클린턴 후보가 손을 흔들며 밖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뉴욕=AFP연합뉴스
그래서 힐러리가 기침을 할 때마다, 그의 다리가 휘청거릴 때마다 건강 이상설이 불거진다. 

대선 쟁점으로 떠오른 건강 문제는 판세를 뒤흔들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을 만한 병이 확인되지 않는 한 뇌진탕 후유증이나 졸도 정도의 건강 문제가 주요 변수가 되진 않는다. 힐러리는 수십년의 정치 역정 속에서 불굴의 투지와 집념으로 수많은 난관들을 돌파해왔다.

힐러리는 빌 클린턴 정부 초기 퍼스트 레이디로서 의료개혁을 진두지휘하다 의회와 이해 단체의 반발에 부닥쳐 좌절했다. 그 직후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대패했다. 민주당 내에서 힐러리 책임론이 일었다. 모니카 르윈스키로 대표되는 남편의 수많은 여성 편력은 한 남자의 아내로서 깊은 절망을 맛보게 했다. 2008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버락 오바마게 패배한 것은 오랜 정치적 동지들의 배신 속에서 이뤄진 실패이기에 더 참담했다. 지금도 힐러리는 절반 가량의 국민에게서 미움받는 대선후보다. 보수 진영의 공적(公敵) 1호다. 그는 여성이라서, 그 것도 진보적 성향의 여성이라서 더 미움받았다. 힐러리가 좌절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는 쓰러질 때마다 쓰러진 자리를 딛고 일어섰다. 

힐러리는 아버지 휴 로댐과 ‘절친’(연인 사이였다는 주장도 있다) 빈스 포스터의 장례식을 치른 직후 의료보험 개혁 법안 통과를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그 것은 역경에 부딪혔을 때마다 생각에 잠길 시간을 갖지 않기 위한 그만의 치료법이었다. 여성이 어떤 심정으로 남편의 불륜을 용서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단한 각오가 필요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편의 불륜이 중계방송된 힐러리의 경우에는 더 특별한 마음가짐이 필요했을 것이다. 힐러리는 빌을 용서했다. 이후 빌은 힐러리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헌신적으로 뛰었다. 초짜 상원의원(오바마)에게 역전패당하는 경험은 선거를 치러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 심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힐러리는 승리한 오바마의 장관으로 입각해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패장에게 손을 내민 오바마도 특별하지만 적장의 밑으로 들어가 그를 주군처럼 모신 힐러리도 대단하다. 올 대선후보 경선도 쉽지 않은 게임이었다. 그렇지만 힐러리는 불굴의 투지로 여성으로는 미 역사상 처음으로 유력 정당의 대선후보가 됐다. 이제 마지막 유리천장을 깨기 직전이다. 건강 문제로 쓰러지기엔 정신력이 강한 정치인이다. 정신은 육체를 이긴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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