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 공화당의 대선 경선이 시작되기 전에도 대선 주자들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정당 내 유력 인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선거자금을 모금하고 언론에 자주 노출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일련의 활동을 ‘보이지 않는 경선’(invisible primary)이라고 부른다. 경선을 앞두고 기초 공사를 하는 시점이다. 왜 ‘보이지 않는’ 경선일까. 그건 경선 전에 특정 후보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정당 유력 인사나 후원자, 로비스트들의 움직임들은 은밀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아이오와주 코커스(당원경선)를 시발로 민주, 공화당의 경선이 본격화하면 ‘보이지 않는 경선’의 성적표대로 순위가 매겨지곤 한다. 주요 정치인의 지지 선언도 중요하고 후원금 모금액도 중요하지만 미디어의 영향력을 과소 평가하면 안된다. 일반 유권자에게 어떤 정보가, 얼마나 자주 입력되느냐에 따라서 후보들의 지지율이 출렁거리게 된다. 미디어 노출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경선’의 핵심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달말 각각 민주, 공화당 대선후보로 공식 선출된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는 ‘보이지 않는 경선’에서 이미 1위를 차지한 후보였다. 특히 미디어 노출 빈도에서 트럼프는 압도적 우위를 보였다. 좀 과장되게 표현한다면 언론이 클린턴과 트럼프를 대선후보로 만든 셈이다. 

미디어가 선거에 미치는 영향은 기존에 밀실에서 결정되던 폐쇄적 후보 선출 방식이 경선 방식으로 바뀌면서 더욱 커졌다. 미디어는 유권자들의 생각과 화제를 좌우한다. 

  

선거에서는 무엇보다 인지도가 높아야 한다. 우선 누군지 알아야 좋아하든 싫어하든 선택이 가능하다. 인지도를 높이는 첩경은 언론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후보들은 신문이나 방송의 광고를 돈을 주고 산다. 그런데 트럼프는 단 한푼도 안들이고 수천만달러 어치의 광고 효과를 냈다. 쇼맨십과 튀는 공약을 통해서다. 트럼프가 지난해 공화당 대선경선 출마 선언을 했을 당시 지지율은 한자리수에 그쳤다. 공화당 유력 정치인 중 그 누구도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았다. 일반 공화당원 중에서도 트럼프의 출마는 가십거리로 비쳤다. 보통 이런 후보는 미디어가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자주 소개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트럼프는 뉴스를 좇는 미디어의 속성을 역이용했다. 정치인의 금기로 돼있는 인종차별, 성차별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뉴스거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언론이 자주 다루자 트럼프의 인지도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트럼프의 지지율도 상승했다. 지지율이 상승하자 언론은 이제 더 자주 트럼프를 다루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트럼프의 지지율이 상승하는 선순환이 이뤄졌다. 미디어는 시청율과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보도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트럼프를 띄우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미디어분석팀이 올초 미국 대선 경선이 시작될 때까지 1년 동안의 미디어 보도를 분석한 결과, 트럼프가 미디어 노출로 얻은 광고 효과는 무려 5500만 달러(약 614억원) 어치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에게 패배한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미디어의 과도한 트럼프 보도행태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미디어가 2억 달러에 달하는 광고 효과를 트럼프에게 안겨줬다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에 미디어는 트럼프를 비판하는 보도가 더 많았다고 반박하고 있지만, 실제 정치인은 자신을 비판하는 기사도 싫어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기사는 부음 기사 빼고는 다 좋아한다는 농담도 있다.  

조남규 국제부장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도널드 트럼프가 백인표 결집을 통한 대선 승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21일(현지시간) 공화당 전당대회 마지막 날 대선후보 수락 연설을 통해서다. 백인 표를 겨냥한 트럼프의 대선 전략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개최된 공화당 전당대회장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트럼프의 후보 수락 연설은 백인 표심을 겨냥하는 내용으로 일관했다.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전당대회 마지막 날인 21일(현지시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퀴큰론스 아레나’에서 대선후보 수락연설을 하고 있다.
클리블랜드=AP연합뉴스

불법 체류자 추방, 멕시코 국경 장벽 설치 공약 등은 히스패닉 유권자를 자극할 수 있는 것이지만 트럼프는 개의치 않았다. 백인 경관이 흑인에게 총격을 가한 사건과 이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흑인 저격범이 백인 경관들을 살해한 사건으로 흑백 인종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 트럼프는 ‘법과 질서’를 강조했다. 흑인 사회의 반발은 감수하겠다는 태도가 역력했다. 트럼프가 이러리라는 것은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마이크 펜스 인디애나 주지사를 지명할 때 예상됐다. 펜스 주지사는 여성이나 소수인종 배려와는 거리가 먼 대표적인 우파 정치인이다. 

미국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대선후보의 부통령 러닝메이트인 마이크 펜스 인디애나 주지사가 20일(현지시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행사에서 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클리블랜드=AP연합뉴스
일각에서는 트럼프가 백인 노동자층 결집에 주력했던 공화당 경선 전략을 본선용으로 수정할 것으로 기대했다. 본선은 보수 유권자들 위주로 참가하는 공화당 경선과는 다른 게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전당대회에서 백인 중심의 선거전략을 고수했을 뿐 아니라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펜스 주지사를 지명하면서 그 전략을 더 강화했다. 

올해 전당대회가 백인 일색의 잔치로 치러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미국 허핑턴포스트지는 흑인 대의원 비율이 전체 대의원 2472명 중 49명(약 2%)에 불과했다고 보도했다. 1964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도 흑인 대의원 비율이 1%에 그쳤다. 백인 우월주의자인 배리 골드워터가 1964년 공화당 대선후보였다.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지만, 그 흐름은 반복된다(History Doesn’t Repeat Itself, But It Does Rhyme)”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정확히 짚었다. <3화, ‘인종차별 트럼프의 정치적 스승 참고’>  

히스패닉과 흑인 유권자 표를 잃더라도 백인 표만 결집시키면 승산이 있다는 것이 트럼프의 셈법이다. 그러려면 백인 후보인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소수인종의 대표 주자로, 백인 경찰 등 공권력의 반대편으로, 백인 남성의 적으로 몰아갈 필요가 있다. 이 공식을 따른 공화당 전당대회는 꿈과 비전, 통합을 외쳐온 역대 공화당 전당대회와는 달리 민주당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실정과 미국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부각시키는 날선 발언으로 채워졌다. 연사들은 클린턴 비판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공화당 전성시대를 연 로널드 레이건이나 소수인종까지 포함한 ‘빅 텐트’ 전략을 구사한 조지 W 부시 후보 등과는 사뭇 다른 전략이다.

지난 회에 필자는 트럼프가 이번 대선을 ‘백인 대(對) 소수인종’의 대결구도로 몰아가면 트럼프의 승리는 확정적이라고 전망했다. <22화, ‘미국 인종 갈등, 대선판 흔든다’ 참고> 그 근거로 백인 유권자 비율은 2000년 78%에서 2012년 71%, 올해 69%(추산)로 감소 추세지만 아직은 백인이 절대 다수라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이 전망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백인 유권자가 기록적인 수준으로 결집해야 한다. 특히 트럼프가 클린턴에게 밀리는 백인 여성을 우군으로 만들어야 한다. <19화, ‘트럼프가 대선에서 이기려면’ 참고> 

2012년 대선에서 백인 유권자는 59%가 밋 롬니 공화당 후보를 찍었다. 미국 의회전문매체인 ‘더힐’은 트럼프가 롬니 정도의 백인 표를 획득하고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비백인 유권자 지지가 30% 넘어야 한다고 예측했다. 소수인종에 우호적인 공약을 내세웠던 롬니가 얻은 비백인 유권자 표도 17% 정도였다. 소수인종의 트럼프 비토 분위기를 고려하면 이들에게서 30% 넘는 지지를 얻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트럼프로서는 백인 유권자를 더 결집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선은 트럼프 지지세가 강한 백인 유권자의 투표율, 특히 역대 대선에서 투표율이 낮았던 백인 노동자층의 투표율을 확 끌어올려야 한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생전 사진. AP = 연합
트럼프가 롬니 정도의 비백인 유권자 표를 획득한다고 가정하면(현재 여론조사에서는 17% 미만이다) 어떨까. 더힐은 트럼프가 백인 유권자 65% 이상의 표를 얻으면 대선에서 이길 것으로 관측했다. 지난 50년 동안 백인 유권자로부터 그 정도 수준의 압도적 지지를 얻은 후보는 1984년 공화당 후보로 재선에 도전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유일하다. 트럼프가 레이건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까.

조남규 국제부장

 

12일(현지시간) 흑인 저격범에 의해 피살된 백인 경찰관들의 추모식이 열린 미국 댈러스주의 모튼 H 메이어슨 심포니 센터에서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부부가 손을 잡고 미국의 통합을 촉구하고 있다. 왼쪽부터 로라 부시, 부시 전 대통령, 미셸 오바마, 오바마 대통령.
댈러스=AP연합뉴스
백인 경찰과 흑인 저격범의 총격 사건이 미국의 해묵은 인종 갈등을 촉발시키면서 미국 대선판이 출렁거리고 있다. 

미국 대선에서 인종 변수가 유난히 강하게 작동되는 때가 있다. 2008년 대선이 그랬다. 민주당이 흑인 후보(버락 오바마)를 내세우자 소수인종 유권자의 투표율이 높아졌다. 히스패닉·흑인 인구가 많은 플로리다주는 2000년, 2004년 대선에서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를 선택하며 부시를 재선 대통령으로 만들어줬지만 2008년엔 오바마 쪽으로 기울었다. 오바마는 플로리다를 비롯한 경합주를 거의 휩쓸며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소수인종의 힘이다.  

최근 들어 히스패닉 유권자 수가 늘어나면서 소수 인종의 대선 영향력은 더 커졌다. 히스패닉 유권자는 2008년 2000만명 정도였으나 올해는 273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특히 박빙 경합주인 플로리다와 네바다, 콜로라도주는 히스패닉 유권자의 비중이 커졌다.

 

 

노스캐롤라이나와 펜실베이니아, 버지니아주의 히스패닉 유권자도 5% 정도 된다. 5%는 미미한 것 같지만 박빙 승부에선 결정적이다. 노스캐롤라이나의 경우 5%면 20만표가 넘지만 2008년, 2012년 대선은 몇 만표 차이로 승부가 갈렸다. 

올해 대선은 ‘백인 우월주의’를 부추기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사실상 지명되면서 인종 변수가 도드라지고 있다. 트럼프는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 백인과 소수인종을 갈라치는 전략을 구사하며 백인표 결집에 나섰다. 히스패닉 불법체류자들을 모두 추방하고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은 백인 유권자들 사이에서 트럼프 팬덤 현상을 만들어냈다. ‘미국의 주인은 백인’이라고 생각하는 유권자들이 대거 쏟아져 나와 트럼프를 대선후보로 밀어올린 것이 ‘트럼프 현상’의 일면이다. 

트럼프는 동시에 히스패닉 벌집을 건드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히스패닉의 유권자 등록이 2012년 대선 때보다 대폭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올해 대선에서 히스패닉의 투표율이 높아질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히스패닉 유권자는 직전 대선 때 보다 민주당 성향이 더 강해졌다. 

 어쩌면 트럼프는 이번 대선을 ‘백인 대(對) 소수인종’의 대결구도로 몰아가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만 되면 트럼프의 승리는 확정적이기 때문이다. 

백인 유권자 비율은 2000년 78%에서 2012년 71%, 올해 69%(추산)로 감소 추세지만 아직은 백인이 절대 다수다. 

 

 

소수인종이 그동안 플로리다주 같은 경합주 선거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백인표가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갈렸기 때문이다. 소수인종 영향력은 사실상 백인표 분할에 따른 반사효과에 불과한 것이다. 최근 퓨리서치센터 조사에 따르면, 백인 유권자의 51%가 트럼프를, 42%가 민주당 대선후보 지위를 굳힌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다. 전체적으로는 2012년 대선(민주당 오바마, 공화당 밋 롬니) 당시 지지율과 비슷하다. 

하지만 저학력(고졸 이하·대체로 저소득 백인층과 겹친다) 백인층에서는 트럼프 지지세가 2012년 롬니 지지세보다 다소 강해졌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소수인종 유권자들의 클린턴 지지세도 2012년 오바마 지지세보다 조금 더 굳어졌다. 통계상으로는 최소한 ‘저학력 백인 대 소수인종’ 구도가 확인된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올해는 클린턴이 고학력 백인 여성층에서 트럼프를 압도하고 있다는 점이다.(클린턴 62%, 트럼프 31%) 2012년 대선에서 롬니는 고학력 백인 여성층 지지를 오바마와 절반씩 나눠가졌다. 하지만 흑백 갈등이 고조되면 고학력 백인 여성층의 클린턴 지지세가 흔들릴 수 있다. 인종별 투표율도 관건이다. 

조남규 국제부장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o Machiavelli)는 저서 '군주론'에서 지도자의 조건으로 ‘비르투’(virtu·역량)를 들었다. 

비르투를 갖춘 인물에게 포르투나(fortuna·행운)까지 따르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역량이 없는 인물은 설사 행운이 따라줘도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역량을 갖추고 행운까지 따른 인물이 시대정신과도 맞아떨어진다면? 그런 인물이 대선에서 승리할 것이다. 500년 전 마카이벨리의 통찰은 지금도 유효하다.

미국 대선에서도 각각 민주, 공화당 후보로 사실상 선정된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의 역량이 미국민의 시험대에 올라있다. 

CNN 주최 토론에 나선 힐러리
결과론적인 얘기이지만 주요 정당의 대선후보가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클린턴과 트럼프는 행운의 정치인이다. 한 사례만 들자면 민주당 경선 방식이 공정했다면 클린턴은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에게 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좋게도 경선 결과에 구속되지 않는 수백명의 특별한 대의원들(슈퍼 대의원, 대부분이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기성 정치인들이다)은 클린턴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이들은 2008년 민주당 대선경선 때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클린턴을 버리고 버락 오바마 후보를 지지했다. 경선 초반부터 슈퍼 대의원들이 클린턴에 쏠리면서 샌더스가 불러일으킨 변화의 바람은 고비마다 벽에 부닥쳤다. AP통신이 민주당 최대 지분을 가진 캘리포니아주 경선을 앞두고 클린턴의 대선 후보 지명 사실을 보도한 것은 샌더스에 치명타가 됐다. 그 때까지 입장을 유보했던 슈퍼 대의원들이 클린턴 지지를 선언하면서 샌더스의 숨통을 끊었다. 캘리포니아가 샌더스에게 넘어갔다면 클린턴의 본선 경쟁력이 크게 훼손됐을 것이다. 행운이다.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된 것도 운이 좋아서다. 샌더스 바람과 트럼프 돌풍의 진원지는 똑같지만 공화당의 대선경선주자들 중에는 민주당의 클린턴만한 중량급이 없었다. 경륜과 관록의 클린턴은 가까스로 버텨냈지만 공화당의 다른주자들은 트럼프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버렸다. 트럼프에게는 행운이다. 

정치인 역량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게 권력 의지다. 다른 자질은 대체 가능하지만 이건 누가 대신해줄수 없다. 수많은 명망가들이이 정작 선거전에서는 힘을 못쓰는 이유가 바로 권력 의지가 약해서다. 정치인이 비전을 실행하려면 권력을 잡아야 한다. 정당의 존재 목적이 정권 창출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국 대선 후보를 권력 의지라는 잣대로 평가할 때 힐러리 클린턴(이하 힐러리)은 A플러스급 정치인이다.

2000년 뉴욕주 상원의원 선거에 나서면서 자기 정치를 본격화했다. 힐러리는 선출직에 나서 당선된 첫번째 퍼스트 레이디다. 당시는 힐러리가 남편이자 미국 대통령인 빌 클린턴이 모니카 르윈스키라는 백악관 인턴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일이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빌과의 결혼생활을 지속할 지 여부를 놓고 고민하던 시점이었다.

그는 2003년 쓴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Living History)에서 이렇게 썼다.

“내 의사 결정(상원 선거 출마) 과정이 가져온 한 가지 소득은 빌과 내가 또 다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는 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둘 다 느긋해지기 시작했다. 빌은 나를 돕고 싶어했고, 나는 그의 전문 지식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 빌은 나의 수많은 걱정을 일일이 검토했고, 나의 승산을 신중하게 평가했다. 이제는 형세가 역전되어, 내가 언제나 빌을 위해 맡았던 역할을 빌이 맡고 있었다. 빌은 조언하고, 결정은 내가 내렸다. 내가 출마하면 처음으로 빌에게서 독립하여 내 책임 아래 선거를 치르게 될 것이다.” (웅진닷컴의 ‘살아있는 역사’, 김석희 옮김 인용)

힐러리는 빌과 이혼하는 대신 ‘정치적 동거’를 선택한 셈이다.

정치적 운명공동체인 빌과 힐러리

힐러리가 최근 대선 과정에서 보여준 각별한 부부애를 고려하면, 정치적 동거라는 표현이 좀 심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치 칼럼리스트인 크리스토퍼 앤더슨의 저서 ‘아메리칸 에비타’(American Evita)에는 이 보다 더 심한 표현이 등장한다. 앤더슨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인 클린턴 부부는 8년 간의 백악관 생활을 정리할 즈음에 이미 백악관 재입성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고 있다고 썼다. 클린턴 부부의 백악관 참모들은 그 계획을 ‘The Plan’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힐러리가 재선 대통령이 돼서 클린턴 부부가 8년 더 백악관의 주인이 된다는 구상이다. 힐러리는 미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 빌은 미 역사상 최초의 ‘퍼스트 젠틀맨’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클린턴 부부는 미 역사상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세운 재임 기간(4선에 성공했지만 4선 대통령 취임 직후 숨지는 바람에 12년 밖에 재임하지 못했다)을 넘어 16년을 부부가 번갈아가며 집권하게되면 역사적 기록을 세우게 된다. 앤더슨이 전하는 에피소드 하나. 2000년 대선에서 승리한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에게 백악관을 비워주기 전날 밤, 이삿짐을 꾸리던 빌은 참모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는 다시 돌아온다(We’ll be back)”고 말했다는 것이다.

‘The Plan’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앤더슨이 2004년에 힐러리의 대선 출마를 확신하면서 쓴 책에 나오는 얘기이니 전혀 낭설은 아닐 것이다. 힐러리의 2008년 대선 출마 과정을 짚어보면 앤더슨의 전망은 대부분 그대로 실현된다.

조남규 국제부장

 

미국 민주당원들의 기억 속에 2000년 대선은 쓰라린 패배로 남아있다.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는 일반투표에서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를 54만여표 앞섰으나 정작 대선 승부를 좌우하는 선거인단 집계에서는 부시 후보가 5명 앞섰다.(부시 271명, 고어 266명) 연방대법원까지 개입하는 우여곡절 끝에 부시는 불과 537표 차로 고어를 누르고 플로리다 선거인단 25명을 차지하며 대선에서 승리했다. 플로리다가 고어에게 갔으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당시 진보 진영에서는 녹색당 후보로 출마한 랠프 네이더 책임론이 흘러나왔다. 진보 성향의 네이더가 고어 표를 잠식한 탓에 플로리다를 빼앗겼다는 비판이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 격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고어와 네이더의 지지층이 일부 겹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2000년 대선 승부는 네이더가 플로리다에서 얻은 9만7488표가 갈랐다고 볼 수 있다. 



 

올해 대선에서도 진보 진영에선 녹색당의 질 스타인 후보가, 보수 진영에선 자유당의 게리 존슨 후보가 각각 출마했다. 

민주, 공화 양당제가 정착된 미국 대선에서는 제3후보가 여간해선 판세를 좌우하기 힘들다. 역대 대선에서 제3후보들은 항상 있었지만 존재감이 미미했다.

 

 스타인과 존슨은 2012년 대선에서도 각각 녹색당, 자유당 후보로 나섰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올해 대선에서는 제3후보 변수가 중요해졌다.

미국 자유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 게리 존슨 전 뉴멕시코 주지사가 지난 5월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올랜도=AP연합뉴스

무엇보다 스타인이나 존슨 같은 제3후보의 득표 공간이 대폭 확장됐다. 역대 어느 대선보다 민주, 공화 후보를 싫어하는 유권자층이 두꺼워졌기 때문이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발표된 월스트리트저널(WSJ)·NBC의 조사에 따르면,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비호감도가 각각 55%, 60%에 달했다. 클린턴과 트럼프를 지지한 응답자 대부분이 두 후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상대 후보가 더 싫어서 어쩔 수 없이 클린턴이나 트럼프를 선택했다는 얘기다.

4자 구도의 지지율은 클린턴(39%), 트럼프(38%), 존슨(10%), 스타인(6%) 순으로 나타났다.

 

 

지지후보가 없다는 응답자(7%)에게 한번 더 물었더니 이들 중 존슨과 스타인을 택하겠다는 응답이 각각 31%, 17%에 달했다. 트럼프와 클린턴에게 표를 던지겠다는 응답은 12%, 8%에 불과했다. 본선전이 본격화하면 민주, 공화당 후보에게로 표가 결집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현재까지는 제3후보의 득표력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하나, 2012년 대선 당시 4% 포인트 미만 격차로 승부가 갈린 곳이 4개주 나왔는데 올해 대선에선 2000년 대선의 플로리다처럼 제3후보가 승부를 가르는 주들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커졌다. 


1992년부터 2012년까지 역대 6차례 대선을 돌아보면 민주당 후보는 펜실베이니아 등 18개 주와 워싱턴DC에서 연전연승했다. 그래서 이들 18개 주는 ‘민주당 장벽(Blue Wall)’으로 불렸다. 그런데 올해 대선에서는 트럼프 후보가 민주당 성향의 백인 노동자층을 흔들면서 민주당 장벽의 일각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민주당 아성이 경합주(Swing State)로 바뀐 것이다.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주가 특히 그렇다. 최근 6차례 대선 중 민주당이 5번 승리한 아이오와와 뉴햄프셔주, 4번 승리한 오하이오주 같은 민주당 우세주도 이번엔 경합주로 변했다. 의회 전문매체인 ‘더 힐’은 28일 이들 경합주에서 클린턴과 트럼프가 오차 범위 내 접전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재로선 제3후보가 클린턴과 트럼프 중 누구에게 치명타를 가할지 예단하기는 쉽지 않다. 진보 성향의 스타인 후보는 클린턴 후보와, 보수 성향의 존슨 후보는 트럼프 후보와 지지층이 일부 겹친다. 박빙 경합주에서 존슨이 선전하면 클린턴이, 반대로 스타인의 득표력이 커지면 트럼프가 웃을 것이다.



 

미국 녹색당 대통령 후보 질 스타인

참고로 존슨의 자유당은 50개주 모두에서, 스타인의 녹색당은 50개주의 4분의3 정도에서만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릴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클린턴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충성도에 있어서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클린턴 지지자들보다 단단한 것으로 집계됐다. WSJ·NBC조사의 클린턴·트럼프 양자대결 상황에서 클린턴을 택한 응답자는 4자 구도에서 13%가 제3후보로 이동한 반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같은 상황에서 9%만 떨어져 나갔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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