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치러지는 미국 대선이 초반부터 이변을 연출하고 있다.

민주당의 경우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자마자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대세론이 무너졌다. 뉴햄프셔주 경선에서 클린턴을 큰 표차로 누른 샌더스 상원의원은 사실상 민주당원도 아니다. 민주당 경선에 참여하기 전까지 30년 넘게 무소속으로 정치를 해왔다. 클린턴이 누구인가. 남편인 빌 클린턴과 함께 지난 수십년 동안 미국 정치를 쥐락펴락해온 여걸이다. 퍼스트레이디와 연방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지낸 클린턴 전 장관이야말로 ‘워싱턴 정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공화당 경선에선 더 기이한 드라마가 상영되고 있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부동산 재벌(도널드 트럼프)이 현직 상원의원(테드 크루즈, 마르코 루비오)과 전직 주지사(젭 부시) 경력의 주자들을 2위 자리를 놓고 다투는 군소후보들로 만들어버렸다. 민주,공화당 공히 ‘워싱턴 정치’, ‘기성 정치’에 발을 담근 주자들은 고전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국민들이 그 만큼 정치권을 불신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버니 샌더스(왼쪽), 도널드 트럼프.

 

2008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도 ‘워싱턴 정치’가 도마 위에 올랐다. 초선 상원의원 임기 중에 대선 출마를 선언했던 버락 오바마 후보는 워싱턴 정치를 ‘변화(Change)’시켜 미국 사회에 ‘희망(Hope)’을 불어넣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고 외쳤고, 많은 국민들이 그 목소리에 공감했다. 그 결과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 2012년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는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오바마 집권 기간 워싱턴 정치는 변화했는가. 미국 국민들이 기성 정치의 반대편에 서있는 샌더스·트럼프에 환호하는 걸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워싱턴 정치는 언제부터인가 국민의 삶과 유리된 채 정쟁(政爭)을 일삼고 있다. 한 때 선진 민주주의의 표상이었던 미국 정치가 왜 이 지경이 됐을까. 미국 연방의사당을 감싸고 있던 타협과 관용의 문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정치의 난맥상이 한국 정치에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앞으로 풀어낼 이야기들은 이런 의문들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필자는 워싱턴타임스 교환기자와 조지타운대 방문연구원, 워싱턴특파원 시절 미국 정치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국회와 청와대, 총리실 등을 취재했다. 지금은 세계일보 국제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올해 미국에선 11월 대선이 예정돼 있다. 이를 계기로 미국 정치의 흥미로운 지점들을 들여다 보자는 것이 이 코너를 기획한 취지다.

첫번째 주제는 미국 정치의 고질(痼疾)이 돼가고 있는 정치 ‘양극화(polarization)’ 문제다.

미국의 시사주간 내셔널 저널이 1982년부터 30년 넘게 매년 내놓고 있는 'annual vote ratings'이란 통계가 있다.

말 그대로 미국 연방의원들의 투표 성향을 분석한 자료다. 미 상원의원 100명, 하원의원 435명이 1년 동안 투표한 기록을 토대로 누가 어느 정도 보수(진보)적인지를 상대적으로 계량화한 통계치다. 정치분석가인 빌 슈나이버가 1981년 고안했다는 이 평가 방식은 최근 들어 미국 정치의 ‘양극화(polarization)’가 부쩍 심화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가장 진보적인 공화당 의원과 가장 보수적인 민주당 의원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의원이 포진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그래픽은 미국 의회의 양극화 정도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워싱턴포스트

 

위 그래픽이 보여주듯이, 1982년 의회만 해도 가장 보수적인 민주당 의원과 가장 진보적인 공화당 의원 사이에는 344명의 의원이 포함돼 있었다. 중간 지대에 포진한 이들 의원은 정확한 개념은 아니지만 이른바 '중도파 의원'(물론 상대적 개념이다)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중간 지대 의원들의 숫자는 해가 갈수록 줄어들더니 2013년엔 4명으로 쪼그라들었다. 공화당 의원들은 더 보수화하고, 민주당 의원들은 더 진보화한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어떤 이들은 게리맨더링(특정 정당이나 특정 후보자에게 유리하도록 자의적으로 부자연스럽게 선거구를 정하는 일)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가령 보수적인 백인 거주 지역만을 묶어서 선거구를 만들면 그 선거구에서는 공화당 후보만 당선될 수 있게된다. 그러면 이 선거구에서는 공화당 후보 경선이 사실상 본선이나 다름없게된다.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는 누가 더 보수적이냐는 선명성 경쟁이 불가피해진다. 그렇게 당선된 의원이 의정 활동을 하면서 더 보수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 이 것만으로는 정치 양극화의 원인을 선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 주(州) 전체가 선거구(미국 상원의원은 주마다 2명)여서 게리맨더링이 개입할 수 없는 미국 상원에서도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워싱턴포스트

 

위 그래픽은 상원의 '중도파 의원'이 2012년부터는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미국 사회의 이념적 분열이 이전 보다 심화되고 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미국에선 양당 모두 공직 후보를 당원이나 주민들이 상향식으로 선출한다. 갈수록 보수적인 주에서는 보수 성향이 더 강한 후보를, 진보적인 주에서는 진보 성향이 짙은 후보를 선출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정치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추론이다. 실제 공화당은 1980년 레이건 정부를 출범시킨 이후 지속적으로 우경화하고 있다. 2016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공화당의 우경화는 확인된다. 전국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에 이어 2위에 랭크된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공화당 우파가 밀고 있는 후보다. 공화당 지도부를 비롯한 중도파가 밀고 있는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미국의 보수진영이 과거 보다 더 오른쪽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민주당이라고 다르지 않다. 민주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샌더스 의원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판을 흔들고 있는 상황이 상징하듯 미국의 진보 진영도 점점 더 왼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보수든, 진보든 화끈한 후보가 먹힌다.

더 진보적인 민주당 의원과 더 보수적인 공화당 의원이 많아지면 의회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민주당 의원은 보수적인 모든 정책을 반대한다. 반대로 공화당 의원은 진보적인 모든 정책을 반대한다. 중간은 없다. 양당의 공통 분모는 제로에 수렴된다. 쟁점 법안은 여간해선 절충되지 않는다. 타협하면 배신자로 찍힌다. 협상론자인 공화당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그러다가 당내 우파 세력에 의해 사실상 축출됐다. 대통령, 부통령(상원의장)에 이어 미국 권력서열 3위인 하원의장도 그런 수모를 당하는 판인데 어느 의원이 총대를 메고 백악관이나 민주당 지도부와 협상할 수 있을까. 민주당 지도부도 당내 강경파에 휘둘리기는 마찬가지다. 민생과 직결된 법안도, 대외 신인도를 좌우하는 예산안도 제 때 처리되는 법이 없다. ‘식물 의회’가 따로 없다. 그래도 의원 수당과 활동비(세비)는 꼬박 꼬박 나온다. 식물 의회가 야기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다. 먹고살만하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미국 중산층과 서민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정치인을 바라보는 국민의 눈초리가 사나워질 수 밖에 없다. 샌더스와 트럼프를 띄우고 있는 것은 국민의 정치 불신이고 그 원천은 수십년 동안 서서히 진행돼온 정치의 ‘양극화’다.

대만의 차이잉원 총통시대 개막을 지켜보면서 대만이 향후 동북아 정세에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를 일으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이 당선인의 날갯짓이 한반도에 태풍을 몰아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다. 그는 뼛속까지 대만인이다. 대만에서 태어나 대만대학을 졸업했다. 자유민주주의 본산인 미국과 영국에서 수학했다. 이런 그가 대만과 중국은 별개의 국가라는 ‘대만독립’ 신봉자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그는 중국이 견지하는 ‘하나의 중국’의 대척점에 서 있다.

 

                                                                                                                                              대만 최초의 여성 총통이 된 차이잉원 


이번 총통 선거에서 대다수 대만인은 대만의 민주화와 독립을 선택했다. 차이를 지지한 대만을 향해 일본은 “기본적 가치관을 공유하는 소중한 친구”라며 러브콜을 보냈지만 한국은 그러지 못했다. “우리는 ‘하나의 중국’ 원칙 아래 대만과의 실질적 협력 지속 증진을 희망한다”는 중립적 입장을 냈을 뿐이다. 대만은 자유민주주의를 공유한 우방이지만 국익을 우선해야 하는 게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의 중국’ 원칙이 동북아 역내 안정을 떠받치고 있는 주요 기둥이라는 점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중국 베이징에서 마오쩌둥 국가주석과 세기의 회담을 갖고 이 원칙을 담은 ‘상하이 코뮈니케(미합중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중국은 대만을 중국의 1개 성(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미국은 “대만해협을 사이에 둔 모든 중국인이 중국은 단 하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과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것을 미국은 인식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그 입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문구로 응답했다.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사실상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한 셈이다. 상하이 코뮈니케는 미·중의 첨예한 이해를 절묘하게 절충한 느슨한 성명이다. 그렇지만 이 틀이 무너지면 미·중관계도 무너진다.
가끔 이 틀이 흔들거릴 때도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미·중 모두 절제하면서 상대의 의지력을 시험하는 상황은 피해 왔다. 하지만 ‘양측(미·중)은 어느 쪽도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헤게모니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코뮈니케의 또 다른 조항은 중국의 부상과 함께 그 일각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우리는 2013년 중국이 일방적으로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는 모습과 그 직후 미국이 B-52 폭격기 2대를 출격시켜 그 구역을 휘젓고 돌아오는 광경을 지켜봤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의 ‘아시아 중시(Pivot to Asia)’와 중국 시진핑 체제의 ‘일대일로(一帶一路·one belt one road)’ 사이에서,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경제협정(TPP)과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사이에서 한국은 부단히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미국은 원하지만 중국은 반대하는 양자택일의 현안은 비단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의 한반도 배치 문제만이 아니다.

북한의 4차 핵실험을 계기로 중국은 북한을 여전히 전략적 자산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미국이 전례 없는 강도로 중국을 압박하고 있지만 중국은 김정은 정권을 위태롭게 하는 조치는 꺼리고 있다. 북한의 1차 핵실험 직후 중국 학계 일각에서는 한때 북·중 우호조약을 폐기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진 적이 있지만 중국 정부는 반응하지 않았다. 중국 지도부는 소련이 북한과의 우호조약을 폐기한 이후 한반도 현안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린 사례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런 중국이 미국과 정면충돌하는 상황은 우리에게 득될 게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만의 정체성은 점점 더 강해질 전망이다. 자신을 대만인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조사도 나왔다. 대만에서 태어난 인구가 늘면 늘수록 그 경향은 더 가속화할 것이다. 차이 당선인이 역대 총통선거 사상 최대 표차로 승리한 것도 ‘딸기세대’로 불리는 젊은층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은 바 크다. 그래선지 대만 역사상 첫 여성 총통을 만들어낸 대만인들의 모습에선 자신감이 느껴진다. 그 자신감이 미·중의 충돌을 견인할까봐 조마조마하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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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앙일보 2021년 7월14일자 26면에 게재된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전 외교부 차관)의 기고글.

[김성한의 한반도평화워치] 한반도가 미·중 대결의 약한 고리 되지 않게 해야

미·중 전략경쟁의 최전선이 동남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로 북상 중이다. 중국의 유라시아 일대일로 구상(BRI)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IPS)이 겹치는 곳이 동남아의 육지와 바다다. 지난 수년간 동남아와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미·중 양국의 치열한 영향력 확대 경쟁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제 미·중 경쟁이 대만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 지역으로 퍼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12일 미국·한국·대만·네덜란드의 반도체 기업 최고경영자(CEO)들과의 화상 회의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흔들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미국 내 투자를 강조했다. 이틀 후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업체인 대만 TSMC는 중국의 대표적 슈퍼컴퓨터 회사인 피튬(Phythium)에 대한 반도체 공급 중단을 선언했다.

중국은 아연실색했다. 이미 독립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던 대만 차이잉원(蔡英文) 민진당 정권이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서 중국을 제치고 미국 쪽에 서는 대가로, 바이든 행정부가 대만 독립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는 ‘은밀한 거래’를 우려했다. 중국은 “대만 독립은 곧 전쟁”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동시에 중국의 고도성장 기간 동안 반도체 생산에 연구와 투자를 게을리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4차 산업혁명에선 반도체가 핵심이고, 그중에서도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가 결정적이라고 한다. 군사력의 첨단 과학화와 스마트 국방혁신은 시스템 반도체 없이는 불가능하다.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부분은 중국이 한국에 뒤진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 세계 1위인 삼성전자는 중국의 10나노 수준보다 훨씬 앞선 7나노와 3나노급 반도체 생산 역량을 가지고 있다. 1980년대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 능력을 갖췄다가 한국에 선두 자리를 내준 일본도 미국 주도의 새로운 공급망 참여를 통해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반도체 원조이자 최고의 반도체 설계 회사(팹리스)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은 대만·한국·일본이 미국에 투자하게 함으로써 시스템 반도체 생산의 3개 분업 구조인 팹리스, 디자인 하우스, (위탁) 제작 모두를 미국 내에서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구상이다.
 
따라서 미·중 경쟁의 최전선이 동남아로부터 대만-한국-일본-미국으로 연결되는 반도체 공급망이 존재하는 동북아로 북상하고 있다. 미국은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미·중 전략경쟁이 격화될 경우 미국이 ‘대만 카드’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 ‘사실상 독립국’ 대우를 하는 쪽으로 갈 수 있다. 중국으로서는 반도체 공급망에서 배제당한 데다 대만 독립까지 허용하게 되면 시진핑 체제의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점령하진 않더라도 군사적 긴장을 극도로 고조시켜 대만의 독립 의지를 꺾고 새로운 반도체 공급망을 위협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제반 상황이 한반도의 안보와 연계될 가능성이다. 중국은 미국에 대해 사용할 카드가 많지 않기 때문에 북한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길 가능성이 높다. 북한을 대미 전략 구도 속에서 바라보는 중국이 미·중 전략경쟁의 격랑 속에서 ‘북한 카드’를 사용한다는 것은 북핵 문제에 대한 비협조 차원을 넘어 북한의 후원국(patron) 이상을 자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갈등이 한국·일본 등과 연결된 점을 이용해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킬 가능성이 있다. 중국에 밀착한 북한이 미국 쪽으로 급선회하는 조건으로 핵 보유를 인정받으려 할 수 있다. 미국에 중국과 북한 중에 자신을 택하라는 일종의 벼랑 끝 전술을 쓰는 것이다.
 
이렇듯 ‘중국-러시아-북한’ 대 ‘대만-한국-일본-미국’으로 연결되는 진영 싸움에서 한국이 국익을 지키려면 미·중 양측 모두로부터 가장 약한 고리로 인식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미 동맹을 명실공히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유지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지난 5월 21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미 동맹의 외연을 기후변화, 신기술, 동남아 개발, 우주 협력에까지 확대하기로 한 만큼 이를 실천해야 한다. 남북 대화를 위해 판문점 및 싱가포르 선언과 동맹의 외연 확대를 전술적으로 맞교환한 것이 아니라면 합의 사항을 신속히 실천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이를 한·미·일 안보 협력으로 연결해야 한다. 대만과 한반도에서 동시에 긴장이 고조되었을 경우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대만 문제보다 가볍게 다루지 않게 하려면 유엔사령부 후방 기지가 있는 일본의 입장과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대만해협 사태로 한국의 해상 수송로의 안전이 위협을 받게 되면 우리와 거의 유사한 해상 수송로를 사용하고 있는 일본과의 협력,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해상 수송로를 보호해주는 미국의 강한 리더십과 지지가 긴요하다. 따라서 다양한 위기 사태에 대비한 한·미·일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잘 관리해 나가야 한다. 미·중 ‘신냉전’을 얘기하지만 20세기 냉전과 달리 미·중 관계는 경제적으로 완전한 분리(decoupling)가 불가능한 관계다. 핵심 전략산업과 관련된 반도체와 배터리 등을 제외하곤 미·중 간 교역과 투자는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경제·문화는 물론 국제 보건이나 기후변화와 같이 미·중이 협력할 수 있는 분야에 한·중 관계를 접목해 나가는 능동적 외교를 전개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대만 정책은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상당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2017년 미국 군함의 대만 정박을 허용하는 법안 통과를 필두로 양국 공무원의 상호 교류를 허용하는 대만여행법(2018년 3월), 방위산업체 교류 허용(2018년), 대만동맹보호법(2020년 2월), 대만의 세계보건기구(WHO) 옵저버국 가입 승인법(2020년 3월), 대만보증법(2020년 12월) 등 일련의 대만 관련 법률을 제정하여 대만의 국제적 지위 격상을 위한 법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특히 대만보증법(Taiwan Assurance Act)은 기존 대만관계법(Taiwan Relations Act)의 한계(미·중 수교 당시의 대만 방위 능력 범위 내 무기 판매 허용)를 넘어 대만의 군사적 이익을 더 확실하게 보장하고 대만 문제에 미국이 더 관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의 대만 방문도 증가세다. 2020년 8월 엘릭스 에이자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이 1979년 단교 이후 첫 고위급 방문을 했고, 9월 키스 클라크 국무부 경제담당 차관의 방문이 있었다.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대만관계법 제정 42주년 행사를 위해 지난 4월 미 대표단(크리스 도드 전 상원의원,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 제임스 스타인버그 전 국무부 부장관 등)이 방문했다.
 
이에 앞서 3월 26일에는 미국과 대만 간에 해경(海警) 분야 양해각서가 체결되었다. 양측이 태스크포스(TF)를 조직해 해양 자원 보호, 불법 어로 제한 등 공동 목표와 관련한 협력을 진행함으로써 외국 선박에 대해 중국 해경의 무력 사용을 허용한 중국 해경법(2021년 2월)을 견제할 것으로 보인다.
 
양국은 향후 대만해협은 물론 동중국해나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공세적 행태를 견제하기 위한 공동 대처의 수위를 높여갈 것이다. 이렇듯 미·중 전략경쟁이 격화하면서 미국은 대만의 국제적 지위와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중국에 대한 압박을 위한 ‘카드’가 아니라 미국·대만 관계를 정상화에 준하는 단계로까지 격상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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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복거일(사회평론가,소설가)씨가 2022년 11월7일자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

[다산칼럼] '운명공동체'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집권 연장에 성공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대만 점령이 중국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선언했다. 전체주의는 권력의 집중을 부르고 독재자는 민족주의적 열정을 부추겨 압제적 통치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므로, 예상하기 어려웠던 일은 아니다.
‘대만의 독립은 허용할 수 없다’던 입장에서 ‘대만을 무력을 써서라도 점령하겠다’는 입장으로 바뀐 것은 중대한 변화다. 이런 변화가 품은 함의들은 심각하다. 군사 전문가들은 중국의 대만 침공이 예상보다 훨씬 빠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런 상황은 우리의 안보를 근본적 수준에서 위협한다. 지금 동북아시아에선 자유주의 세력과 전체주의 세력 사이에 뚜렷한 전선이 자리 잡았다. 대만해협에서 한반도의 휴전선을 거쳐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소야해협에 이르는 이 전선의 남쪽엔 대만, 한국, 일본의 자유주의 세력이 있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다. 북쪽엔 중국, 북한, 러시아의 전체주의 세력이 있다. 당연히 대만에 대한 중국의 위협은 이 전선 전체에 미친다.

이 전선은 실은 중화민국이 대만에 정착한 1949년에 형성됐고, 한반도의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뀐 것 말고는 그대로 유지됐다. 한국전쟁을 겪고도 70년 넘게 전선이 유지됐다는 사실은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지형에 대해 여러 얘기를 들려준다.
그런 얘기 가운데 하나는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사이의 오랜 인연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화민국의 지속적 도움을 받아 활동한 것은 잘 알려졌다. 1949년 내전에서 진 중화민국이 대만에 정착한 뒤엔 두 나라는 실질적으로 ‘운명공동체’였다. 1949년의 진해회담에서 장개석 총통과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점을 확인했다.
1950년 1월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은 남한과 대만이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발표했다. 이런 ‘침입에의 초대’에 응해 북한군이 남침했다. 예상과 달리 트루먼 대통령은 주일미군을 한반도에 투입했고 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보냈다. 그는 한반도와 대만이 군사적으로 하나임을 인식한 것이었다.

실제로, 북한군 3분의 1은 중공군 출신이었다. 그들은 뿔뿔이 북한군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편입됐다. 북한군 5, 6, 7사단은 아예 중국에서 편성돼 뒤의 이름만 북한군 편제를 따랐다. 즉 중국은 대만의 중화민국과 한반도의 대한민국을 동시에 정복하려 했다. 한반도에 개입한 중공군이 끝내 대만을 공격하지 못한 것은 미군 7함대에 맞설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상황은 같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한반도도 무사할 수 없다. 중국은 북한으로 하여금 한반도에서 공격에 나서도록 할 것이다. 실은 중국의 대만 침공은 북한의 남한 공격으로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군의 공격으로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묶인 사이에 중국은 대만을 점령하려고 할 것이다.
두 나라 시민들이 인식하든 외면하든,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오래전부터 ‘운명공동체’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느 한쪽에 전쟁이 일어나면, 다른 쪽도 전쟁에 휩싸일 것이다. 이런 인식을 두 나라 시민들이 공유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북한이 우리를 공격해올 때 결정적 요소는 북한의 핵무기다. 우리가 핵무기를 갖지 못하는 한 미국이 약속한 핵우산은 주한미군을 한반도에 묶어 놓을 것이다. 동북아시아 주둔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서라도 한국이 북한의 핵무기에 독자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바람직하다.
지금 미국이 대만의 안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 사이의 군사력 격차는 점점 줄어든다. 특히 미국이 대만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중국의 능력은 빠르게 향상된다. 한국이 북한에 맞설 만한 핵전력을 갖추도록 하는 일은 대만의 방위에 실질적으로 기여한다.
미국의 전략과 외교 책임자들에게 한반도는 우선순위에서 유럽이나 중동에 밀린다. 그래서 미국 관료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늘 미봉책을 따른다. 그들과 협상해 우리의 핵전력을 갖추려면, 대만과 한반도가 긴밀히 연결되었으며 한국의 군사적 능력의 확충은 대만의 안보에 실질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을 먼저 일깨워줘야 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은 의료기관이 환자에게 의료비나 약제비 등을 적절하게 청구했는지를 평가하는 기관이다.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의료 행위는 2만개, 사용되는 약은 2만5000종에 달한다. 어떤 의료 행위가 적절한지, 의료비와 약값은 적정한지를 감시·감독하는 곳이어서 ‘의료계의 감독원’으로도 불린다. 심평원이 일을 잘 해야 국민의 의료비 부담이 가벼워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의료비 관리가 투명하게 이뤄지는 모범국으로 꼽힌다. 그런데도 일반 국민에게 의료비는 여전히 버거운 부담이다. 지난 22일 서울 서초구 심평원 서울지원 집무실에서 손명세 심평원장을 만나 국민의 의료비 부담 완화 방안 등을 물었다. 

손명세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이 지난 22일 서울 서초구 심평원 서울지원 집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국민의 의료비부담 경감 방안 등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사진=남제현 기자

 

―병원이나 제약업체에서는 심평원 직원들을 싫어할 것 같다.

“1977년 박정희정부가 북한과의 체제 경쟁 차원에서 국민 의료보험을 도입했다. 당시 다른 분야에서는 북한을 넘어섰는데 의료 부문에서는 북한보다 못하다는 얘기가 외국에서 나왔다. 병원 문턱이 높아서 아픈데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 얼마나 억울한가. 그래서 사회보장체계를 확대하는 차원에서 도입된 것이다. 당시도 반발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보건의료 분야는 시장실패 요인이 많다. 병원이나 제약업체 같은 공급자가 정보의 비대칭이 강한 재화(치료 행위, 치료 약 등)의 사용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를 교정할 시스템이 필요하다.”

박정희 대통령이 기업 근로자를 대상으로 의료보험을 도입하려하자 전경련은 근로자 의료보험료의 50%를 기업이 부담하면 경영이 어려워진다면서 반대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기업의 의료보험 지출을 세금에서 공제해주는 제도를 도입해 기업의 참여를 유도했다. 500인 이상 기업 1700개 업체에 근무하는 근로자 200여만명이 혜택을 받게됐다. 전두환 대통령은 의료보험을 중소기업으로 확대 도입햇고 노태우 대통령은 자영업자와 농어촌 주민을 대상으로 한 지역의료보험 제도를 실시했다. 기업 의료보험은 보험료 수입이 많아서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았지만 보험료 수입이 적은 지역 의료보험은 상대적으로 의료 서비스의 질이 낮았다. 그래서 두 의료보험의 통합론이 제기됐지만 기업 측에서 반대해 성사되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두 의료보험을 통합한 현행 건강보험제도를 도입했다. 부담 능력대로 보험료를 납부하고 혜택은 동일하게 받는 의료보험 제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4대 중증질환(암·심장·뇌혈관·희귀난치질환) 전액보장’ 공약을 내걸었다. 얼마나 이행됐나.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로 4대 중증질환 비급여(건강보험에서 보장하지 않는) 항목을 많이 급여로 끌어들여서 한때 62%까지 떨어졌던 건강보험 보장률을 최근 65%까지 3%포인트 정도 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국민이 비급여 항목 때문에 많은 돈을 의료비용으로 지출하고 있다. 국민 부담을 줄이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비급여 항목을 관리하고 보장률을 70%까지 올려나갈 계획이다. 최근 국회에서 의료법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비급여 진료비용의 항목과 기준, 금액에 관한 현황을 조사·분석하고 결과를 공개할 수 있게 됐다. 32개에 불과하던 공개 항목이 시력교정술인 라섹·라식과 치과술인 금니 등의 비급여 항목 등을 포함해 52개로 확대됐다.”

―병원에서 MRI(자기공명영상) 찍자고 하면 좀 부담스럽다. 그것도 가격이 병원마다 천차만별이다.

“MRI 비용을 병원별로 조사해서 공개하고 있다. 똑같은 MRI 진료지만 병원에 따라서 진료비가 2∼3배까지 차이가 난다. 이를 공개함으로써 환자가 보다 저렴한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면 자연스럽게 비급여 의료비가 감소하게 된다. 이를 통해 MRI에 지출하는 국민의 의료비는 절반까지 줄어들고 다른 비급여 항목의 진료비용도 점진적으로 적정화될 것으로 기대한다.”

―최근 의료인들의 DUR(Drug Utilization Review, 의약품 처방·조제 지원서비스) 점검이 의무화됐다. 국민에게 어떤 서비스가 가능한가.

“의료법·약사법이 지난 9일 개정돼 새해부터는 의사와 약사가 약을 처방하고 조제할 때 의약품 정보를 의무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모든 전문의약품에는 고유한 일련번호를 부여해서 유통단계마다 추적·관리하게 된다. 그러면 위조·불법 의약품을 차단할 수 있다. 이렇게 축적된 전 국민의 의약품 사용 데이터를 일반에 개방한다. 국민은 최근 3개월 동안 본인이 투약한 약품의 이력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국민의 건강관리와 의료서비스에 대한 알권리를 충족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의료기관이 환자의 의약품 복용 이력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어 중복처방 방지 등 진료의 질도 향상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보건의료자원 신고일원화가 새해부터 시행된다. 어느 정도의 비용 절감 효과가 있나.

“지금까지 보건의료 인력·시설 등 자원에 대한 신고·관리 체계가 의료법을 근거로 하는 지방자치단체와 국민건강보험법을 기반으로 하는 심평원 두 곳으로 이원화돼 있었다. 때문에 신고가 중첩되고 행정력이 낭비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이번에 국민건강보험법 시행규칙을 개정함에 따라 2016년 1월부터 의료기관과 약국 휴·폐업, 의료인 수 신고 등 13개 보건의료자원 신고업무에 대해 하나의 기관에 한 번만 신고하면 되도록 신고절차가 일원화된다. 내년 한 해 동안 중복신고로 인한 사회적 비용 24억원 정도가 절감될 것으로 기대한다.”

―올 상반기에 한국을 강타한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로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가 났다. 보건당국과 의료기관 등의 선제 조치가 아쉬웠던 대목이다.

“동의한다. 심평원 차원에서는 메르스 발병 지역인 중동 방문자들을 실시간으로 병원에 알려 메르스가 확산되지 않도록 기여했다. DUR 서비스를 통해 환자들에 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환자 정보를 병원에 알리는 조치를 메르스 사태 초기(5월20일 메르스 첫 번째 환자 확진)부터 시행하자고 건의했지만 초기에는 이뤄지지 못했다. 사태가 어느 정도 진행된 6월9일부터 체계가 갖춰지고 업무가 진행된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나중에는 메르스 감염자 발생 병원을 다녀간 사람들의 정보까지 다 병원에 제공했는데 메르스 사태 동안 심평원이 의료기관에 제공한 의료정보만 6만건에 달했다. 전자방역시스템에 따라 실시간으로 질병 감시가 이뤄진 것은 세계 보건의료 역사에 기록될 만한 값진 경험이었다.”

―환자 정보 관리는 다른 한편으로 개인 정보유출의 위험도 있는 양날의 칼 아닌가.

“그렇다. 그래서 심평원은 개인의 의료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보안강화 등 시스템 고도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보안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항상 기민하게 준비를 하기 때문에 심평원이 설립된 이래로 건강정보와 개인정보가 유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한의학계에서는 국민건강보험이 한의학 부문을 홀대하고 있다는 인식이 강하다.

“지금까지는 가루약인 한약재만 보험적용이 가능했는데 내년부터는 짜먹는약과 알약도 건강보험 적용을 받게 된다. 국민입장에서는 한약 복용이 보다 편리해진다. 한의약에 대해서는 최대한 급여항목을 열어주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현재 전 국민이 연간 의료비로 지출하는 비용이 한 해 104조원으로 추정된다. 이 중 급여항목으로 심평원이 구매한 보건의료 서비스가 62조원인데 한방의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2조2000억원에 불과하다. 비급여 항목 진료와 약값을 포함해도 여전히 미미한 상황이다. 최근 몇 가지 사안을 두고 양의와 한의가 갈등을 반복하고 있는데 한국의 전체적인 의료서비스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양측이 힘을 합치고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평원 원장으로서 꼭 해보고 싶은 일은 뭔가.

“올해는 세계에서 기후변화협약이 주목을 받았지만 그 다음 국제사회가 주목해야 할 의제는 ‘보편적인 의료 보장’이 될 것이다. 유엔이 지속가능개발목표의 실천 방안 중 하나로 보편적 건강보장을 꼽은 적이 있는데 가까운 미래에 국제적인 의제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한다. 이런 세계적인 흐름에 맞춰 심평원은 다음달 14∼15일 서울 JW 메리어트 호텔에서 ‘보편적 건강보장을 위한 국제회의’를 개최해 국가 간의 보건의료 경험을 공유하고, 보편적인 건강보장을 달성할 협력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WHO(세계보건기구)와 월드뱅크, 록펠러재단 관계자들도 참석할 예정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나라의 뛰어난 보건의료시스템을 알릴 계획이다. 한국의 보건의료시스템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고 수출길이 열리면 우리나라 의료인과 의약품, 치료재료도 함께 해외로 나갈 수 있다. 우리의 의료 인프라를 수출하게 되면 ICT(정보통신기술) 회사도 함께 수출될 수 있고 우리의 시스템이 외국에 깔리면 계속해서 용역비 등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재임 기간뿐 아니라 퇴임 이후에도 이 분야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보고 싶다.”

대담=조남규 사회부장
정리=이재호 기자

손원장은…

●1954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의대, 연세대학교 보건학 석사, 박사

●세계의료법학회 부회장

●WHO(세계보건기구) 집행이사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원장

●한국보건행정학회 회장,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 원장

●제8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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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올 들어 가짜 백수오 사태로 홍역을 치렀다. 대다수 국민이 한두 가지씩은 챙겨먹고 있는 건강기능식품이 도마에 오르면서 식약처의 존재감이 크게 부각됐다. 건강기능식품뿐만 아니라 떡볶이, 순대에서 의약품에 이르기까지 식약처와 국민의 삶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취임 6개월을 맞은 김승희 식약처장을 지난 22일 서울 목동에 위치한 서울지방식약청 집무실에서 만나 먹거리 안전 문제 등을 물었다.

―가짜 백수오 사태 파장이 컸다. “이엽우피소가 인체에 해롭지 않다”고 발언해서 논란이 됐는데.

“인삼과 도라지를 생각하면 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까지 백수오라고 속고 먹은 사람은 인체에 무해하니 안심해도 좋다. 가짜인 이엽우피소를 속아서 먹으면 안 되니 먹지 말라는 의도였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이엽우피소는 별 용도가 없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가 식품원료로 허용하지 않았다. 수요가 있고 기능이 있어서 개발자가 어떤 용도로 사용하겠다고 신고를 하면 검사를 하는데, 그런 요청이 있기 전에 식약처가 선제적으로 조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부가 이엽우피소를 실험으로 규명해 주면 앞으로 백수오하고 혼합해서 써도 된다는 걸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한 의원이 ‘정부가 안전하다고 하는데 안전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데이터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해서 결국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가짜 백수오 사태의 재발 방지 대책은 어떻게 세우고 있나.

“백수오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원점에서 건강기능식품 관리체계의 전면 개편 방안을 마련했다. 원료 인증 단계에서 5년마다 재평가하고 이상사례 급증 시 재평가한다. 사용금지 원료를 사용할 경우 처벌을 두 배로 강화해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으로 강화할 예정이다. 자가품질검사도 부적합이 나오면 바로 식약처에 보고토록 한다. 유통 소비단계의 경우에도 허위과대광고를 하면 최고 1000만원 이하의 포상금을 지급하는 ‘국민 포상제’ 도입을 추진 중이다. 또 소비자가 이상 제품에 대한 검사를 요청할 수 있는 ‘소비자 행정조사 요청제도’를 도입한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등 신종 감염병에 대한 우려가 높다. 10년 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발병했을 때는 백신 도입이 늦어져 혼란이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한 대책이 있나.

“물류-교통의 발달로 전 세계가 하나의 생활권이 되면서 바이러스로 인한 신종 감염병이 국제적인 문제로 부상했고, 변종바이러스의 출현 때문에 미래에 출현할 감염병을 사전에 예측하기가 어려워졌다. 식약처는 감염병 예방을 위한 백신 개발과 자체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국내에서 생산이 가능한 ‘백신자급화’를 추진하고 있다. 매년 초 제약회사의 백신 개발계획을 조사하고 연도별 개발지원 계획을 수립해 백신의 개발부터 허가까지 맞춤형 컨설팅을 실시할 계획이다. 또한 감염병이 유행하는 국가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신속하고 안정적으로 의약품을 공급하기 위해 국내 품목허가를 받지 않은 의약품을 수입하거나 국내에서 자체 제작할 수 있게 하는 ‘의약품 안정공급지원 특벌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일부 시민사회에서는 안정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법률의 대상이 되는 약품은 적절한 치료제가 없어 생명을 위협받는 희귀·난치성 환자들을 위한 용도로 한정된다. 희귀·난치성 환자를 대상으로 긴급히 도입된 의약품도 추후 임상시험을 통해 안정성을 계속 점검할 계획이다.”

―중국 ‘투유유 중국전통의학연구원’ 교수가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아 중의학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도 전통의학이 있고 서양의학도 최신 기술과 접목해 눈부신 발전을 이뤘는데 왜 아직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못할까.

“기초가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뚝심 있게 연구해야 하는데 ‘빨리빨리 문화’가 강하다 보니 연구 성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것 같다. 제약분야는 많은 시간과 투자가 필요한데 중간에 ‘뻥튀기’ 결과만 바라다보니 좋은 연구가 이뤄지기 어렵다. 1990년대 말에도 유전자 치료제라고 해서 줄기세포에 유전자 넣는 기술이 거품처럼 커졌다. 그런데 당시에 미국 학회에 참석해 보니 이미 수백편의 논문이 있더라. 당시 우리나라는 논문이 10편도 채 안 됐다. 의학분야 연구는 많은 연구 중에 하나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운좋게 걸리는 게 아니다.”

―담뱃값 인상효과가 줄어들면서 금연 열기가 주춤하고 있다. 담배 관리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나.

“니코틴이 함유되지 않은 금연초·전자담배 등을 관리하고 있다. 금연초 등은 니코틴이 들어 있지 않지만 담배 기능을 할 수 있는 성분이 들어 있는데 이것이 몸에 해로운지 아닌지를 검사해 안전관리를 하는 것이다. 예컨대 궐련형 금연초도 담배처럼 불을 붙여 태우게 되는데, 연기 안에 유해물질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를 성분 분석해서 기준치를 넘으면 팔지 못하도록 한다. 지금까지는 니코틴이 들어 있는 담배에 대해서는 성분 분석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앞으로는 성분도 분석할 계획이다. 안철수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발의한 ‘담배 유해성 관리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서 이뤄질 텐데 3000여 가지 물질로 이뤄진 담배의 성분을 분석해서 유해성분 등을 대중에 공개하는 것이 골자다. 다만 이를 담뱃갑에 표시할지는 민감한 문제여서 추후 협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수능환’, ‘물범탕’ 등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효능이 확인되지 않은 건강식품이 범람하고 있다. 제재할 계획은 없나.

“조사하고 있다. 시중 건강원과 한의원에서 수능환, 물범탕을 수거해 스테로이드 같은 의약품 성분이나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 있는지 검사 중이다. 의약품 성분이 확인되면 즉시 행정처분과 회수폐기 조치를 할 예정이다. 또 관련 제품의 광고부분도 의약품으로 오인할 수 있도록 허위과대했는지 조사 중이다. 건강식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주로 소상공인이다 보니 무조건 처벌하기보다는 지도·계몽을 하라는 목소리가 많은데 형량을 높이면 상당부분 정화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식품위생법 조항이 구체적이지 않고 주먹구구식이라는 지적이 있다.

“단체급식을 하는 곳이 늘고 있고, 전국에 음식점이 80만개에 달할 정도로 외식산업도 규모가 커져 이를 관리할 수 있는 ‘식품 조리·판매에 관한 법률(가칭)’을 따로 떼어 제정할 계획을 갖고 있다. 가공식품 제조회사의 생산단계나 유통단계에 대해서는 좀 더 관리를 엄격하게 하고, 음식점의 위생관리는 또 다른 측면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궁극적인 법 제정 취지는 음식점 위생관리 역량 강화다. 축산물위생관리법에 있는 축산물 가공식품의 관리업무를 식품위생법으로 이관하고, 식품위생법의 생산단계 안전관리와 농·수산물 품질관리법의 생산단계 안전관리를 통합해 ‘농·수산물 안전관리법(가칭)’을 제정할 계획이다.”

―외식문화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위생관리는 후진국 수준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식중독에 의한 사회·경제적 손실비용이 2조8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집단급식의 증가와 외식산업의 발전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음식점 위생관리가 중요해지고 있는데 식약처는 음식점의 위생수준을 평가해 우수한 업소에 등급을 부여하는 ‘위생등급제’를 시행함으로써 위생을 향상하고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장하려고 하고 있다. 전문가가 음식점의 위생수준을 현장평가하고 위생수준이 우수한 업소를 3개 등급으로 표시해 기술지원, 간판제공, 시설·설비 개보수 융자지원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할 계획이다. 2017년은 관광특구 내 음식점 3만5000개 업소를 대상으로 하고, 2018년에는 모범음식점 1만9000여곳을 음식점 위생등급제 참여를 유도할 예정이다. 미국 등 해외에서 위생등급제를 도입하고 식중독이 10∼30%가 줄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 국내에서도 식중독이 감소하면 2800억원의 사회적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김승희 처장은

●1954년 서울 출생

●경기여고, 서울대 약학과, 서울대 약리학 석사, 노트르담대 대학원 생화학 박사

●식품의약품안전청 생물의약품국 국장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 원장

●식품의약품안전처 차장


정리=이재호, 사진=이재문 기자
대담=조남규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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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명 경찰청장은 세월호 사태 와중에 중도 퇴진한 이성한 전 청장의 후임으로 취임했다.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변사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경찰, 이 전 청장은 그 책임을 지고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옷을 벗었다. 강 청장은 추락한 경찰의 위상을 바로 세우겠다는 각오로 1년을 달려왔다. 오는 25일 취임 1년이 되는 강 청장은 지난 14일 서울 서대문 경찰청 청사 집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민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응답하는 것이 경찰의 존재 이유”라고 역설했다. 그는 “경찰청장으로서 법이 부여한 임기 2년 동안 아무런 과오 없이 국민과 경찰을 위해 노력하는 게 최선의 목표일 뿐 그 외에는 어떠한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면서 “반드시 실천할 테니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오는 25일 취임 1주년을 맞는 강신명 경찰청장이 14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이 기본으로 돌아가야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어떤 일을 해왔나.

“취임하자마자 ‘112 청장’을 자임했다. 국민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응답하는 것이 경찰의 존재 이유다. 국민의 입장에서 평생 한두 번 112 신고하는데 얼마나 절박하고 심각한 상황이었겠느냐. 그 순간에 경찰이 달려와서 위기에서 구해준다면 국민은 세금이 아깝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무법과 무질서의 상징인 조직폭력배 소탕에도 주력했다. 법이 통하지 않는 폭력배가 있다면 법치국가라 할 수 없고 경찰의 존재 이유도 없다. 112 잘하고 조폭 제압 잘하는 게 기초 치안이라고 생각한다. ‘양은이파’ 같은 범죄단체만 조폭이 아니다. 국민은 술 먹고 행패를 부리거나 노점상으로부터 자릿세를 갈취하는 깡패도 조폭이라고 본다. 폭력배는 잡초와 같아서 주기적으로 뽑아내야 한다. 오는 9월부터는 동네 건달까지 단속 대상을 확대할 생각이다.”

-‘거악의 퇴치’처럼 좀 거창한 각오일 줄 알았는데 굉장히 미시적이다.

“신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일 중요한 방법은 기초 치안을 다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임기 중에 반드시 이 목표를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이건 기본이다. 임기 2년 차에는 ‘생활 법치’에 더 주력할 생각이다. 생활 법치의 핵심 축은 교통질서와 집회질서다. 재임 중 사회적 파장이 컸던 사건도 모두 해결했다. 행정적인 미제사건은 있을 수 있지만 경찰청장이 생각하는 미제사건은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시화호 토막살해 사건이나 안산 인질 살해 사건, 잠원동 새마을금고 사건, 용산 아파트 쇠구슬 테러 같은 주요 사건의 범인은 모두 잡았다.”


-평소 시위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재임 기간 시위 문화가 개선됐다고 평가하나.

“시위 문화는 그 나라의 법질서 수준에 비례한다. 일부 과격세력의 시위가 남아 있긴 하지만 이제 폭력시위의 시대는 저물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예전에는 서울역에서 모인 시위대가 남대문 쪽으로 행진하면서 차를 막고 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렀다. 지금은 1000명씩 끊어서 신호에 맞춰서 행진해달라고 요청하면 그렇게 한다. 전교조 시위대가 제일 잘 지킨다. 물론 ‘우리가 왜 경찰 말을 들어야 하느냐’면서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단체도 있지만 일부에 불과하다.”

-집회·시위 현장에서 발생하는 소음 문제도 종종 논란 거리가 되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소음기준을 5db(데시벨)씩 하향 조정했는데 10분간 내는 소음의 평균을 단속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러다 보니 5분 동안 120db 넘는 소음을 내다가 나머지 5분 동안 소음을 뚝 떨어뜨리면 단속 기준을 넘지 않는다. 이를 다른 나라처럼 일정 기준을 넘지 못하도록 바꿀 필요가 있다. 집회·시위도 법 테두리 내의 기본권 행사는 보호받아야 한다. 하지만, 국민 생활에 불편을 초래하는 교통체증과 소음은 엄격하게 관리하고 경찰관 폭행 등 불법행위는 반드시 사법조치해 준법 시위 문화가 확립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겠다.”

-올 초 경찰 승진시험에서 만점을 받고도 승진에서 탈락한 사례가 속출해 논란이 일었다. 100점 맞고도 떨어지면 당사자는 억울하지 않겠나.

“개인적으로는 경찰 조직을 망친 게 승진 시험이라고 생각한다. 승진자 절반을 시험으로 뽑다 보니 승진시험이 치러지는 1월이 다가오면 경찰이 전부 공부만 한다. 국민들은 승진 시험 공부하는 경찰을 이해 못한다. 누구는 빵 씹어먹으며 잠복근무하는데 누구는 두어 달 공부하고 승진해서 상사로 복귀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경찰 내부의 사기가 저하된다. 경찰이 모두 공부만 하고 있으면 소는 누가 키우나. 솔직히 취임 초반엔 경찰 승진시험 자체를 없애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이 제도가 70년된 것이라서 당장 없애면 충격이 너무 클 것 같아서 시험은 쉽게 내고 근무평정을 많이 반영하는 식으로 개선했다. 앞으로 근무평정의 변별력을 높이고 객관화해서 일을 열심히 한 경찰이 인정받고 승진할 수 있는 조직으로 만들겠다.”


-지난 1년을 돌아봤을 때 아쉽다는 느낌이 드는 대목은 없나.


“경찰 조직 내부의 사기 진작 부분이다. 지난 1년간 신뢰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면서 지나치게 업무 중심으로 드라이브를 걸었다. 당근은 없이 채찍만 휘두른 셈이다. 이제 현장 경찰관의 사기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대다수 경찰이 기대하고 있는 것이 근속승진 제도다. 순경은 5년, 경장은 6년, 경사는 7년6개월의 근속연수를 채우면 승진 대상자의 20%에 한해 승진할 수 있다. 일반 공무원은 1급에서 9급까지 9단계인데 경찰은 치안정감에서 순경까지 10단계다. 일반 공무원보다 1단계가 더 많다. 그러다 보니 근속승진에 걸리는 시간도 일반 공무원보다 더 길다. 그 기간을 단축시키는 것이 1차적인 목표다. 두 번째는 경찰 공무원을 공안직에 포함시키고 싶다. 같은 공안 업무를 하는 검찰이나 법무부 공무원은 공안직이지만, 경찰은 일반직 공무원으로 분류된다. 공안직이 일반직에 비해 급여가 다소 많다. 공안직 분류가 어렵다면, 경찰의 치안활동수당을 기본급여에 포함해 정근수당이나 퇴직금 등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노무현정부 시절 추진됐다가 무산된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는 박근혜정부의 국정과제이기도 하다. 강 청장의 생각은 무엇인가.

“수사권 조정 문제는 현 정부의 국정과제 중의 하나로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국무조정실 주관으로 계속 협의가 진행 중이다. 합리적인 수사권 조정방안은 경찰이 1차 수사를 담당하고, 검찰은 2차 수사권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국적으로는 수사와 기소가 분리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 경찰은 현실적으로 94%의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법적으로는 수사권이 없는 조직이다. 이런 경찰 조직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국민들은 아무 권한이 없는 경찰에게 수사를 받고 그다음에 권한이 있는 검사에게서 검증받는 시스템인 것이다. 일본 경찰은 경감 이상 간부가 부분적인 영장 청구권까지 갖고 있다.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기 전 단계까지라도 경찰이 수사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사건 중에서 민생 수사만이라도 경찰에 맡겨달라는 것이 우리 경찰의 바람이다. 교통사고나 단순절도 같은 사건까지 검찰이 지휘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검찰은 수사권을 경찰에 넘겨주지 못하는 근거로 경찰의 수사 능력 부족을 거론하고 있다. 경찰의 비리 가능성도 이유로 든다.


“비리는 비리로 접근해야지 비리 있는 조직이니까 자율적으로 수사하면 안 된다는 논리는 합리적이지 않다고 본다. 인원 대비 비리 비율은 검찰 수사관이 경찰보다 더 높다. 자질론으로 얘기하면 우리에게도 경찰대, 변호사 출신 자원이 있다. 다만 수사권 조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찰 수사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은 재임 기간에 수사권 조정이 이뤄지도록 소신을 갖고 추진하겠다.”

대담=조남규 사회부장, 정리=박세준 기자

◆ 강신명 경찰청장은… ▲경남 합천(1964년) ▲대구 청구고 ▲경찰대(2기) ▲서울 송파경찰서장 ▲안전행정부 치안정책관 ▲경찰청 수사·정보국장 ▲경북지방경찰청장 ▲청와대 사회안전비서관 ▲서울지방경찰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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