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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최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일단을 내보인 외교안보 구상은 파격(破格)이었다.

한국 부분만 살펴봐도, 우리가 방위비 분담금을 올리지 않으면 주한 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고 협박했고, 북한의 위협 때문에 한국은 핵무장을 시도할 것이라면서 사실상 한국의 핵무장을 용인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대로 된 참모를 둔 정상적인 후보라면 ‘주한미군 철수’나 ‘한국 핵무장’ 같은 민감한 이슈를 그런 식으로 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는 자신의 발언이 도마 위에 오르자 슬그머니 핵무장 허용 발언은 거둬들이고 있다. 더욱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대외정책을 구상하고 있다는 트럼프이고 보면, 그의 발언을 진지하게 다룰 가치가 있을까, 회의도 든다.

하지만 문제는 트럼프가 대다수 미국인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미국의 한 유력 싱크탱크가 공개적으로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펴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자유의지주의(libertarian)’를 표방한다는 케이토 연구소였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자유의지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이념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자유시장 경제를 신봉한다. 미국 보수를 대표하는 공화당과 유사하지만 대외정책은 공화당과 크게 차별된다. 예컨대 이들은 미국의 대외 개입정책을 긍정하는 공화당과 달리 미국은 국제분쟁에 발을 담그지 말라고 주장한다.

론 폴 전 하원의원. 사진 = Getty Images

 

2008년 미 공화당 대선주자로 나섰던 론 폴 전 하원의원이 대표적 자유의지주의자다. 당시만 해도 론 폴의 목소리가 미약했지만 지금은 론 폴처럼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다.

공화당 유력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이런 기류에 올라탔다. 트럼프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쉽게 풀어보면 이런 식이다.

‘부자였던 미국이 다른 나라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미국 연방정부 부채가 19조 달러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한국과 일본, 독일, 중국은 부자가 됐다. 기존의 동맹 조약은 일방적이고 낡은 조약이다. 미국에 유리하게 고쳐야 한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이 아니다. 우리가 왜 우리 돈 써가면서 다른 나라를 지켜줘야 하나. 중국은 미국에서 번 돈으로 군사력 키워서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대통령이 되면 이런 상황을 바로잡아서 미국과 미국인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

위스콘신 유세 나선 도널드 트럼프 AP=연합

 

트럼프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해외주둔 미군은 미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한 세계전략 차원에서 배치된 것이지 주둔국에서 자원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가난한 나라’라는 말도 궤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먹고살기 힘들어진 대다수 미국인은 트럼프에 환호하고 있다. 트럼프가 그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포퓰리스트다.

트럼프가 미처 못한 말은 케이토 연구소의 더그 밴도 선임연구원이 대신해주고 있다.

“지금 펜타곤(미 국방부)은 세계적으로 부유한 나라들의 국방비를 떠안고 있다. 해마다 미국인들은 수천억 달러의 비용을 부담하고 있지만, 정작 미국은 덜 안전해지고 있다. 이들 부유한 나라는 국내총생산(GDP)의 1%를 비용으로 내야 한다. 군사적 대치상태에 있고 미국으로부터 핵우산을 제공받는 한국은 더 부담해야 한다. 1950년 6·25전쟁 때 만들어진 한·미동맹은 시대착오적이며 전적으로 일방적인 동맹이다. 한국은 수퍼파워인 미국에 의존하며 돈을 아끼고 있다”

외교라는 것이 본래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영국의 누군가 외교관을 ‘국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도록 외국에 파견되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정의했듯이,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가 국익에 부합한다면 언제든 철수할 것이다. 민주당 지미 카터 대통령이 1976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주한미군 철수 공약을 실행하려했다. 미국 의회와 미군 사령부가 카터를 설득하지 않았다면 사태는 주한미군을 일부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지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의 말을 듣다보면 얼핏 ‘고립주의’ 성향이 엿보인다.

원래 미국 대외정책에서 고립주의는 다른 나라와 동맹도 맺지않고 다른 나라들의 분쟁에도 개입하지 않는 정책이다. 미국은 건국 이후 한동안 고립주의로 일관했다. 1,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마지못해 참전한 것도 그런 전통 때문이었다. 그런 미국의 대외정책은 2차 대전을 거치면서 ‘국제주의(개입주의)’로 전환된다. 만약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2차대전 종전 이후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에 고립주의 정책으로 대응했다면 세계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트루먼은 터키와 그리스가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갈 위기에 처하자 미국이 공격받지 않는 한 중립을 지킨다는 전통적인 고립주의를 버리고 적극적인 개입주의를 채택했다. 트루먼은 미 의회에 터키와 그리스에 대한 원조 승인 법안을 요청하면서 “나는 자유민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역설했다. ‘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린 이 국제주의 원칙은 미국 대외정책 기조가 되었으며 향후 북대서양조약으로 구체화했다.

트럼프의 외교안보 기조는 이런 전통적인 고립주의와는 다르다. 동맹을 유지하거나 국제 분쟁에 개입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에 따른 금전적 부담을 최소화하겠다는 차원의 고립주의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는 데이비드 생거 뉴욕타임스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나는 ‘고립주의자’가 아니라 ‘미국 우선주의자’”라고 밝혔지만, 필자는 트럼프의 외교안보 구상이 정치학자 이삼성이 이름붙인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에 가깝다고 본다.

이삼성에 따르면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자는 미국의 대외개입 정책이 미국의 국익에는 별로 기여하지 않으면서 미국의 자원을 낭비하는 경향이 있다고 인식한다. 트럼프가 공화당 주류와 달리 조지 W 부시 공화당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자는 미국이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이 ‘세계 경찰’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반대한다. 트럼프도 “우리는 더 이상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이라크는 물론이고 우크라이나와 시리아 사태 등에 미국이 왜 개입해야하느냐고 반문한다. 미국의 개입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 만큼 그런 돈이 있으면 미국인들을 위해 쓰자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대외 개입에 소극적인 버락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의 입장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2008년 3월 미국 워싱턴D.C.의 백악관 앞에서 이라크전에 반대하는 시위집회가 열리고있다. EPA=연합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자는 국제 기구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트럼프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미·일동맹 등은 미국에 불리하게 체결된 조약이므로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미국은 NATO 회원국이나 일본이 공격받으면 자동적으로 미군을 보내 도와줘야하느냐고 트럼프는 반문한다. 유엔 등 국제기구를 우습게 보고 미국 마음대로 하겠다는 일방주의적 행태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비슷하다. 하지만 미군의 해외 파병은 극히 예외적이고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트럼프는 부시의 ‘근육 외교’와 대조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트럼프는 군사력 행사를 기피하는 비둘기로 보인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는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미군을 파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의 국익이 침해받으면 군사력 행사도 불사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적대감을 드러냈다. 트럼프는 1999년 북한의 핵 의혹이 불거지자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를 통해 북한이 계속 핵무기 개발에 나서면 선제 공격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미 북한은 트럼프가 공언했던 선제 타격의 조건을 충족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핵 위협을 고조시키고 있다. 북한 김정은에 대해서도 “중국이 그 인간(김정은)을 어떤 식으로든 사라지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암살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그 것(암살) 보다 더 나쁜 짓에 대해서도 들어봤다”고 답변할 정도로 충동적인 성향을 내보였다.

공화당 경선 후보들의 6차 TV토론 중의 트럼프(사진 가운데). AP=연합

 

우리에게 가장 큰 ‘트럼프 리스크’는 그가 예측 불가능한 인사라는 점이다. 그는 주요 외교안보 현안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동안 미국은 너무 속내를 보여왔다”면서 “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대방(상대국)이 알지 못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곤 한다. 좋게 말하면 전략적 모호성이다. 이런 태도가 때론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특정 국가와의 긴장 상황에서 이해 당사국들이 상대국의 의도를 오해하게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예측 불가능한 김정은이 핵을 흔들며 미국에 맞서고 있는 지금, 미국에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다면 한반도와 동북아의 긴장 수위는 급격히 상승할 것으로 관측된다. 설사 한반도에서 무슨 일이 터져도 한 푼을 아까워하는 트럼프 정부가 흔쾌히 지원할 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조남규 국제부장

워싱턴 특파원 시절 미국의 한 유력 싱크탱크가 공개적으로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펴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자유의지주의(libertarian)’를 표방한다는 케이토 연구소였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자유의지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이념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자유시장을 신봉한다. 미국 보수를 대표하는 공화당과 유사하지만 대외정책이나 사회정책은 차별된다. 이들은 미국의 대외 개입정책을 긍정하는 공화당과 달리 해외주둔 미군을 철수하라고 외치고 다닌다. 2008년 미 공화당 대선주자로 나섰던 론 폴 전 하원의원이 대표적 자유의지주의자다. 당시만 해도 론 폴의 목소리가 미약했지만 지금은 론 폴처럼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다.

공화당 유력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이런 기류에 올라탔다. 트럼프는 이렇게 말하면서 미국인을 홀리고 있다. ‘부자였던 미국이 다른 나라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그 사이에 한국과 일본, 독일, 중국은 부자가 됐다. 대통령이 되면 이런 상황을 바로잡아서 미국과 미국인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

트럼프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해외주둔 미군은 미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한 세계전략 차원에서 배치된 것이지 주둔국에서 자원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가난한 나라’라는 말도 궤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먹고살기 힘들어진 대다수 미국인은 트럼프에 환호하고 있다. 트럼프가 그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포퓰리스트다. 이런 트럼프에 공화당 유력 대선주자들이 주류든 비주류든 가릴 것 없이 하나 둘 나가떨어지고 있다. 공화당 지도부는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다. 트럼프를 대선후보로 내세우자니 당이 분열할 것 같고, 내치자니 공화당 유권자를 잃을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화당이 이런 군색한 처지에 몰린 것은 자업자득이다.

대공황 이후 최대 경제위기를 맞아 공화당은 국민에게 대안은 내놓지 못하고 반대만 일삼는 정치세력으로 비쳤다. 공화당은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부의 첫 번째 법안인 경기부양법안이 상정되자 소속 의원 전원이 반대표를 던졌다. 건강보험개혁이든, 이민개혁이든 오바마 정책이라면 덮어놓고 거부했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이 된 뒤 의회의 교착 상태는 더 심화했다.

미국 정치는 허구한 날 정쟁으로 일관했다. 그 여파로 미 연방정부가 폐쇄되는 사태가 빚어졌고 급기야 2011년에는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가 미 연방 정부의 신용등급을 강등시키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정치가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표류하는 동안 중산층, 서민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정치에 실망하고 삶에 지친 이들이 올 대선에서 공화당에서는 트럼프를, 민주당에서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띄우고 있다. 정쟁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국 정치인들에게 미국 주류 정치인들의 몰락은 훌륭한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조남규 국제부장 

‘트럼프만 아니면 누구나 괜찮다’(Anyone But Trump)… 공화당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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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공화당의 대선 후보선출 경선에서는 전당대회가 개최되기 수개월 전에 승자가 결정됐다. 그런데 올해 공화당 대선 경선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남아 있는 3명의 주자(도널드 트럼프 후보와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존 케이식 오하이오 주지사) 중 어느 누구도 대선 후보 지명에 필요한 대의원 과반 확보에 실패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선두를 달리는 트럼프 후보가 지금까지 확보한 대의원 수는 738명. 최소 과반인 ‘매직 넘버’(1237명)에 499명이 부족하다. 남은 대의원(848명)의 58.8% 가량을 확보해야 자력으로 대선 후보가 될 수 있다.

트럼프는 그럴 수 있을까. 트럼프가 현재의 지지율을 유지하면 가능하다. 뉴욕타임스의 예측 프로그램에서 트럼프의 향후 지지율을 42%로 설정하면, 아래와 같은 그래픽을 얻을 수 있다. 

트럼프가 남은 경선주 가운데 대의원 수가 많은 뉴욕(95명), 캘리포니아(172명)에서 이기면 매직 넘버 달성은 무난한 것으로 예측됐다. 

그런데 트럼프가 캘리포니아에서 지면 아래와 같은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전당대회는 대선 후보 지명을 축하하는 무대가 아니라 피튀기는 경선장으로 변하게된다. 이른바 ‘경선 전당대회(contested convention)’다.

현행 공화당 룰에 따르면, 전당대회 대의원들은 1차 투표에서 원칙적으로 각 주의 경선 결과대로 표를 던져야 한다. 예컨대 지난 22일(현지시간) 트럼프 후보가 승리한 애리조나주의 대의원 58명은 무조건 트럼프 후보를 찍어야 한다.(일부 예외도 있다) 1차 투표에서 과반 후보가 안나오면 2차 투표부터는 아무 후보에게나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는 대의원들이 늘어난다.(주마다 규정이 다르지만 대체로 3차 투표부터는 거의 모든 대의원이 자유롭게 후보를 선택할 수 있게된다) 이 때부터는 공화당 지도부나 주지사 등 유력 정치인들이 개입, 막후에서 중재에 나선다. 그래서 ‘중재 전당대회(brokered convention)’라고도 부른다.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지난 21일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트럼프와 크루즈의 격차가 크지 않으면 트럼프는 1위를 하고도 후보 자리를 크루즈에게 내줘야 하는 사태를 맞을 수 있다. 트럼프 본인도 언젠가 “협상이라면 나도 자신이 있지만 중재 전당대회는 전적으로 내가 불리하다. 나를 제외한 다른 주자들이 서로 친밀하기 때문이다”라면서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래선지 트럼프는 과거 자신이 1위를 하고도 공화당 후보가 되지 못하면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과연 트럼프다운 협박이다.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인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이 22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브뤼셀 테러와 관련,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로부터 미국을 방어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하지만 공화당 주류는 폭동이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얼마나 트럼프가 싫었으면 밋 롬니(2012년 공화당 대선후보)나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같은 공화당 주류 인사들이 그동안 상극(相剋)이었던 크루즈를 지지하고 나섰을까. 공화당 내부에서는 트럼프에게 당을 넘겨주느니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백악관 입성을 지켜보는 쪽을 택하겠다는 말도 나온다고 미 언론은 전하고 있다. 공화당 상·하원 의원 대다수는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가 되면 대선과 동시에 치러지는 상·하원 선거도 힘들어진다고 푸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공화당 대선 후보는 ‘트럼프만 아니면 누구나 괜찮다’(Anyone But Trump)는 기류다. 공화당 지도부는 전당대회 직전 열리는 전당대회 규정위원회에서 트럼프에게 불리하도록 전당대회 룰 자체를 바꿔버릴 수도 있다.


며칠 전 공개된 미국 폭스뉴스의 미 대선 가상 양자대결 여론조사 결과는 이런 반(反) 트럼프 정서에 기름을 부었다.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의 양자 대결에서 크루즈와 케이식은 각각 47% 대 44%, 51% 대 40%로 클린턴을 앞섰지만 트럼프는 49% 대 38%로 클린턴에게 밀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텃밭인 오하이오 1승으로 143명의 대의원을 확보한 게 전부인 케이식 주지사가 당 내의 경선 포기 종용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버티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겉으로는 “내가 빠지면 트럼프가 대선 후보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진짜 이유는 ‘중재 전당대회’로 가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온다고 굳건히 믿고 있기 때문이다. 공화당 전당대회 규정에 ‘최소 8개 주(미국령 포함)에서 1위를 하지 못한 주자는 대선후보로 지명될 수 없다’는 규정이 있긴하다. 이 규정을 그대로 적용하면 케이식은 컷오프 대상이다. 하지만 공화당은 전당대회에 앞서 이런 제한도 없앨 수 있다. 당이 하려고만 한다면 트럼프를 떨어뜨리기 위해 1차 투표부터 자유 투표 경선을 실시하도록 룰을 바꿀 수도 있다.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 존 케이식 오하이오 주지사가 지난 15일 오하이오 주 베레아에서 열린 경선승리 집회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자축하고 있다.
AP=연합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이 외쳤듯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의 시대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느냐고 묻는 독자가 있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게 정당의 운영 논리다. 공직선거 후보자를 어떻게 선출하느냐는 오롯이 정당의 권한이다. 국민참여 경선이든, 여론조사 경선이든 당이 그렇게 하자고 룰을 정하면 그렇게 가는 것이다. 컬리 호그랜드 공화당 전당대회 운영위원이 얼마 전에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일반인들은 국민이 대선후보를 선택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오해다. 대선후보는 당이 지명한다”

경선 1위 주자라고 해도 당의 정체성과 맞지 않으면 당이 그 주자를 버리고 다른 후보를 세울 수도 있다는 얘기다. 크루즈나 케이식처럼 후발 주자로 달리다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된 대표적 인물이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1860년 5월 공화당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시카고 전당대회가 열렸을 때 링컨은 최약체 후보로 평가됐다. 링컨의 경쟁자였던 윌리엄 헨리 슈어드와 새먼 P. 체이스는 주지사와 상원의원을 역임한 관록의 정치인이었고 에드워드 베이츠도 미주리의 원로 정치인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인물이었다. 도리스 컨스 굿윈은 저서 ‘Team Of Rivals’(권력의 조건,21세기북스)에서 “슈어드가 처음부터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며 선두를 달렸고 체이스와 베이츠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면서 “이를 잘 알고 있던 링컨은 그 누구도 공격하지 않는다는 전략을 세웠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1차 투표에서 슈어드에 이어 깜짝 2위에 오른 링컨은 2차 투표에서 슈어드를 간발의 차로 따라 붙었다. 결국 3차 투표까지 거친 끝에 링컨은 공화당 대선후보로 지명됐다. 어렵게 공화당 후보가 된 링컨은 그 해 대선에서 승리, 위대한 대통령의 반열에 올랐다.

 

1976년 공화당 전당대회도 유력 대선주자였던 제럴드 포드와 로널드 레이건이 모두 과반 대의원 확보에 실패, ‘경선 전당대회’로 치러졌다. 포드는 현직 대통령이었고 레이건 보다 더 많은 대의원을 확보했는데도 포드를 추대하지 않았다. 포드는 가까스로 레이건을 꺾고 후보가 됐지만 본선에서는 민주당 지미 카터 후보에게 패배했다.

포드의 사례를 보면 경선 1위 주자를 대선 후보로 내세운다고 해서 본선 승리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공화당 주류가 트럼프를 흔들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경선 1위가 트럼프의 대선 후보 지위를 보장하는 충분 조건은 아닌 셈이다.

조남규 국제부장

‘트럼프 대세론’ 제동 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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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독주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는 과연 공화당 후보자리를 거머쥘 것인가.

적절한 시점에 다른 후보들의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은 상황이다. 그렇지만 트럼프라고 약점이 없지는 않다.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이 지난 5일(현지시간) 캔자스주 경선(당원대회)에서 트럼프 후보를 25% 포인트 차로 꺾은 의미는 작지 않다. 더블 스코어 승리였다.

크루즈는 텃밭이나 다름없는 텍사스 경선(크루즈는 텍사스 상원의원이다)에서도 트럼프를 눌렀지만 그 격차는 17.1% 포인트였다.

클릭하면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다수 언론들은 ‘트럼프 대세론’에 제동이 걸린 것은 공화당 주류의 트럼프 반대 캠페인이 주요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2008, 2012년 미국 대선에서 각각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던 존 매케인, 밋 롬니까지 트럼프 반대를 선언했으니 공화당 유권자들의 표심은 흔들렸을 것이다. 

유타대서 `트럼프 반대` 연설하는 밋 롬니(EPA=연합)
하지만 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같은 날 치러진 공화당 경선에서 크루즈는 켄터키, 루이지애나주에서는 트럼프에게 패했고, 메인주에서는 트럼프를 이겼지만 득표율 격차가 13.3% 포인트에 불과했다.

5일(현지시간) 미국 공화당의 대선후보 경선에서 2승을 거둔 테드 크루즈(왼쪽) 상원의원이 아이다호주 보이시의 한 유세장에서 지지자와 악수하고 있다.
보이시=AP연합
캔자스는 왜 크루즈를 압도적으로 지지했을까.

이 질문은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의 답변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우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캔자스의 정치권이 왜 우경화됐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대평원 지대에 위치한 캔자스는 20세기 초반에만 해도 농민조직의 힘이 강했던 진보의 땅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32대) 대통령의 먼 친척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공화당 대통령(26대)을 지낸 뒤 후임 대통령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자신이 정착시킨 혁신 노선을 버리고 보수로 기울자 캔자스주 오사와토미에서 지금 용어로 하면 ‘복지국가’를 뜻하는 ‘신국가주의’를 선포했다. 필자가 워싱턴 특파원 시절인 2011년 12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도 이 곳을 방문해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그때 이곳에서 그 연설을 한 이후 급진주의자, 사회주의자, 심지어 공산주의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그때 그가 주창했던 그 원칙때문에 미국은 지금 더욱 부강한 나라, 강력한 민주주의 나라가 되었다"고 역설했다. 지금도 캔자스에는 ‘래디컬 시티(급진적 도시)’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하지만 도시화, 산업화가 진척되면서 캔자스는 보수화했다. 인구는 줄어드는 가운데 소농은 몰락하고 대농장주만 살아남게되면 대체로 보수로 변한다. 농민이 줄면 농민 조직의 힘도 약화하기 때문이다. 이후 캔자스의 정치는 대체로 공화당이 주도했다. 캔자스는 노예제에 맞서 싸운 자유토지 농민들이 모여서 만든 주였고 민주당은 원래 노예제도를 옹호했던 당이었기 때문이다. 캔자스의 공화당은 대체로 ‘중도 실용’ 보수였다. 1996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된 밥 돌 전 상원의원은 캔자스가 낳은 대표적인 중도 보수 공화당원이다. 

2015년 워싱턴D.C.에서 열린 낙태반대 시위. 연합
그런데 1990년대 초반 캔자스의 정치 지형이 중도 보수에서 우익 보수로 확 바뀌게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낙태 반대 시위다.

전국에서 모인 낙태 반대 시위대는 캔자스주 위치토에 위치한 유명한 낙태 시술 병원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다.(이 병원에서 낙태 시술을 담당했던 조지 틸러 박사는 2009년 6월 위치토의 한 교회에서 낙태 반대론자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이 시위를 계기로 캔자스 주민들은 낙태를 둘러싸고 찬반 양론으로 분열했다. 대다수가 기독교인들인 캔자스 주민들이 대거 낙태 반대론에 가담하면서 이후 이뤄진 각종 선거에서 낙태에 찬성한 공화당 중도파와 민주당 의원들은 캔자스 정치권에서 거의 전원이 축출되고 말았다. 이제 캔자스에는 낙태 반대를 기치로 내건 공화당 우파만 남게됐다. 이 과정에서 ‘복음주의(evangelism)’로 대표되는 기독교 우파가 공화당 우파와 손을 잡았다. 기독교 우파는 학교에서 진화론을 수업하는 것에 반대하고, 학교에서 기도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낙태, 동성결혼에 격렬히 반대한다. 백인 우월주의가 강하고 소수인종이나 여성, 이민자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작은 정부론’을 신봉하고 신자유주의를 선호한다. 공화당 대선주자 중에는 테드 크루즈가 이런 공화당 우파의 대표 주자다.

지난 5일 실시된 캔자스주 공화당 당원대회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한 표씩 던진 정치 행사였다.

2위와의 격차가 문제였지 크루즈의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었다. 트럼프는 그동안 낙태옹호단체인 ‘가족계획연맹’의 활동을 지지했고 대선주자가 되고 다소 신중한 입장으로 돌아섰지만 과거에는 낙태 합법화를 지지한 전력도 있다.

미국 공화당 대선 경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5일(현지시간) 플로리다 올랜도의 한 대학 유세장에서 지지자가 건넨 그림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올랜도=AP연합
‘인종차별’ 언행을 서슴지 않는 트럼프(2회 ‘인종차별 트럼프의 정치적 스승’ 참고)에게는 불행하게도, 캔자스는 인종차별에 맞서 투쟁한 주였다.

위에서도 설명했다시피 캔자스는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농장주에 맞서 싸운 자작농들이 모여 만든 주다. 1859년 10월16일 노예제 폐지를 위해 무장봉기에 나섰다가 교수형을 당한 존 브라운이 캔자스 출신이다.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를 존속시키려는 남부 연방군이 캔자스를 공격해 유린한 역사는 캔자스 주민들의 노예제 혐오를 한층 더 깊게 했다.

어느모로 보나 트럼프는 애초부터 캔자스의 선택을 받기 힘든 주자였다.

문제는 캔자스의 공화당원만 낙태 반대론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기독교 우파가 공화당 우파와 손잡기 시작한 시점부터 낙태 반대는 미 전역의 공화당원들이 공유하는 가치로 떠올랐다.

크루즈가 틈만 나면 낙태 문제를 쟁점화하고 있는 것은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낙태 문제는 트럼프의 ‘아킬레스 건’인 셈이다.

한국 정서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낙태 문제는 미국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다.

낙태 문제는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대표적인 문화 쟁점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낙태 시술과 관련, 찬성(pro-choice, 낙태를 여성의 선택, 권리에 관한 문제로 보는 관점) 아니면 반대(pro-life, 낙태를 태아 살인 행위로 보는 관점) 입장으로 양분돼 있다. 민주당 성향 유권자는 대체로 낙태를 찬성하고, 공화당 성향 유권자는 그 반대다. 

행진중인 낙태찬성단체들. AP=연합뉴스
미 연방대법원이 1973년 ‘로 대 웨드(Roe v. Wade)’ 소송에서 “임신 첫 3개월간 여성이 낙태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면서 낙태를 합법화하는 판결을 내린 뒤 보수 진영은 이 판결을 뒤집기 위해 사력을 다해왔다. 1980년대 들어 기독교 우파가 적극적으로 지원한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정권이 들어서고 보수 성향 대법관들이 다수를 차지한 것을 계기로 대법원은 낙태 요건을 까다롭게 하는 판결을 잇따라 내놨다. 낙태 시술 과정에서 공공병원이나 시설의 사용을 제한하고 18세 이하의 낙태시 보호자의 승인을 의무화하는 등.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낙태 합법화 판례를 뒤집고 낙태를 금지하는 판결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러자 보수성향 주들은 주 의회 차원에서 낙태를 어렵게하는 법안을 잇따라 제정하면서 대법원 판결을 무력화시키려했다. 미국 대법원이 지난 2일 심리를 개시한 텍사스주의 ‘낙태 제한 법안’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은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의 막바지인 올 6월쯤 최종 판결을 내릴 방침이다. 낙태 문제가 서서히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전의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트럼프 대항마’로 부상한 크루즈는 트럼프의 성채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 지점을 집중 공략할 것이다. 공화당 우파는 이미 상당수가 트럼프 쪽으로 기울었다. 트럼프가 소수 인종을 향해 막말을 해대든, 여성 비하 발언을 하든 그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낙태라면 사정이 다르다. 공화당 우파의 핵심 가치이기 때문이다.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전의 관전 포인트다.

조남규 국제부장

‘아웃 사이더’인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미국 공화당의 대선주자로 나서 공화당의 적자(嫡子) 후보들을 잇따라 격파하고 있다.

공화당 지지자들은 지금 공화당 노선이나 전통 따위는 무시한 채 하고싶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트럼프에 열광하고 있다.

 

트럼프를 밀어올리고 있는 주요 지지층은 중장년의 백인들이다. 그 중에서도 경기침체로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인들이 트럼프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들을 향해 불법 체류자들을 모두 추방하고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등의 화끈한 공약을 제시하며 불가사리처럼 몸집을 키우고 있다. 대통령이 되면 민주당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 이민개혁 조치를 전면 무효화하겠다고 약속하며 오바마 집권 8년이 만들어낸 비토층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흡수하고 있다. 트럼프가 기존 정치권을 공화당까지 싸잡아 패대기치자 워싱턴 정치에 신물이 난 정치 혐오세력까지 트럼프 지지자로 돌아서고 있다. 당내 경선에서는 이런 화끈한 후보가 열성 지지층의 선택을 받기 쉽다. 하지만 전체 국민이 참여하는 본선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유타대서 `트럼프 반대` 연설하는 밋 롬니(EPA=연합)
트럼프 비판 대열에 합류한 존 매케인(애리조나) 상원의원. AP=연합
트럼프로는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공화당 주류는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다. 급기야 각각 2008년, 2012년 미 대선의 공화당 후보였던 존 매케인, 밋 롬니까지 나서 트럼프 반대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적전(敵前) 분열도 이런 분열이 없다.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지만, 그 흐름은 반복된다(History Doesn’t Repeat Itself, But It Does Rhyme)”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말이다.

예전에도 트럼프 같은 공화당 대선 주자가 있었다. 1964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던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이다.

1964년 10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유세중인 배리 골드 워터. AP=연합
당시 공화당 주류는 미국 동북부를 기반으로 한 중도파 당원들이었다. 이들은 온건 보수 성향의 넬슨 올드리치 록펠러 뉴욕 주지사를 대선후보로 밀었다. 그는 미국의 대부호인 존 D. 록펠러의 손주다. 유력 가문 출신에 높은 인지도, 그리고 탄탄한 당내 기반. 누구나 공화당 대선후보는 록펠러라고 생각했다. 공화당은 1928년 허버트 후버부터 1960년 리처드 닉슨까지 모두 중도 성향 대선 후보를 내세웠다. 록펠러는 이런 공화당의 전통에도 부합하는 적임자였다.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캘리포니아주 경선이 끝날 때쯤 공화당 대선 후보는 골드워터로 사실상 결정됐다. 록펠러의 혼외 정사 의혹이 변수로 작용하긴 했지만 골드워터를 띄운 밑바닥 동력은 기존 정치권을 향한 백인들의 불만이었다. 백인들은 존 F. 케네디 민주당 행정부가 추진한 흑인차별 철폐 정책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케네디가 암살된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존슨 부통령은 케네디의 유산인 민권법을 완성시켰다. 공화당도 민권법 처리 과정에서 민주당 정부에 협조했다.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 직후 기내에서 대통령에 취임한 존슨 전 미국 대통령. AP=연합
그러자 골드워터가 백인들의 불만을 대변하고 나섰다. 그는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기 직전, ‘민권법’이 상원에 상정되자 반대표를 던졌다. 상원의원 100명 중 반대표를 던진 의원은 8명 뿐이었다. 흑인노예들이 수 세기에 걸친 투쟁 끝에 쟁취한 흑인들의 ‘권리장전’에 반대한 것이다. 골드워터가 민권법에 반대한 이유는 연방정부의 민권법 집행이 주 정부의 권한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결론은 엎어치나 메치나다. 흑인이 어떻게 백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느냐는 인식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었다. 이런 인식은 대다수 백인들의 속 마음이었다.

골드워터는 6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미 공화당 전당대회장에서 다음과 같은 후보 수락문을 읽어내려갔다.

“자유를 지키기 위한 ‘극단주의’는 악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오히려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온건주의’야말로 미덕이 아니다.”

 

당내 온건파들은 골드워터를 대선후보로 인정하지 않았다. 공화당은 이제 온건 록펠러파와 강경 골드워터파로 쪼개졌다. 본선을 앞두고 자중지란에 빠진 것이다.

골드워터는 후보가 되고서도 기존 대선후보와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였다. 통상 대선 후보로 지명된 뒤에는 중도층이나 부동층인 ‘산토끼’를 잡기위한 전략을 구사하는데 골드워터는 당내 경선 때나 마찬가지로 골수 지지층인 ‘집토끼’만 바라보고 선거운동을 펼쳤다.

남북전쟁 이후 100년 동안 민주당을 지지했던 남부의 ‘딥 사우스’(Deep South.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앨라배마) 지역이 64년 대선에서 돌연 공화당 지지로 돌아선 것은 골드워터의 민권법 반대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모두 알고있듯이 공화당은 노예제 폐지의 기치 아래 다수의 정파들이 모여서 창당한 정당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새로 창당된 공화당에 합류해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남부가 미 연방에서 탈퇴하자 링컨의 공화당 정부는 전쟁도 불사했다. 그리고 남북 전쟁에서 승리한 뒤 노예제를 폐지했다. 흑인들의 투표권을 인정하는 등 흑인의 법적 권리를 강화하는 수정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렇지만 남부 주에서는 유무형의 흑인차별이 지속됐다. ‘KKK(쿠 클럭스 클랜)’로 대표되는 백인우월주의 단체들은 흑인들에 테러를 일삼았다.

미국 공화당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1일(현지시간) 워싱턴 연방의사당에서 백인 우월주의단체인 ‘KKK’연루 의혹을 산 대선 경선 주자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겨냥해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인종주의자 또는 인종주의 조직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최근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를 찍겠다고 선언한 바로 그 KKK단이다. 트럼프는 흑인과 히스패닉 등 소수인종을 향해 독설을 퍼부으면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환호를 이끌어내고 있다. 미국의 안보를 위해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원천 봉쇄하겠다고도 했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 사회가 오랜 시행착오 끝에 세워놓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란 원칙이 있다. 위키백과는 이를 ‘다민족국가인 미국 등에서, 정치적(Political)인 관점에서 차별·편견을 없애는 것이 올바르다(Correct)고 하는 의미에서 사용되게 된 용어’라고 설명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 정치권이 관행으로 정착시킨 이 원칙을 마음껏 조롱하고 있는 셈이다.

골드워터가 대선에서 승리한 주는 딥 사우스를 제외하면 그의 고향인 애리조나가 유일하다. 64년 대선을 계기로 링컨의 공화당을 원수로 생각했던 미국 남부는 서서히 공화당의 아성으로 변해간다.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실시되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고등학생 때는 골드워터 광팬이었다는 것. 클린턴은 64년 대선에서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골드워터 후보의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했다. 골드워터 지지를 접고 민주당으로 전향한 것은 대학생이 된 이후였다. ‘역사의 신(神)’이 골드워터 후예인 트럼프에 대적시키기 위해 클린턴의 정치 성향을 바꿔 놓은 것일까.

골드워터는 64년 대선 본선에서 민주당 린든 존슨 대통령과 맞붙었다.

존슨 대통령은 44개 주에서 승리하며 486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다. 골드워터가 승리한 주는 6개주(선거인단 52명)에 그쳤다. 일반 유권자 투표 수는 4312만9484(61.1%) 대 2717만8188(38.5%). 486 대 52. 미 대선 역사상 기록적인 참패였다.

 


올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는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출돼 골드워터의 전철을 답습할 것인가. 정치는 생물이라는데 그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적어도 공화당 주류는 트럼프가 민주당 클린턴과의 맞대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공화당 지지자들이 열광하는 대선 주자를 공화당이 대놓고 반대할 까닭이 없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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