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세론’ 제동 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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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독주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는 과연 공화당 후보자리를 거머쥘 것인가.

적절한 시점에 다른 후보들의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은 상황이다. 그렇지만 트럼프라고 약점이 없지는 않다.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이 지난 5일(현지시간) 캔자스주 경선(당원대회)에서 트럼프 후보를 25% 포인트 차로 꺾은 의미는 작지 않다. 더블 스코어 승리였다.

크루즈는 텃밭이나 다름없는 텍사스 경선(크루즈는 텍사스 상원의원이다)에서도 트럼프를 눌렀지만 그 격차는 17.1% 포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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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언론들은 ‘트럼프 대세론’에 제동이 걸린 것은 공화당 주류의 트럼프 반대 캠페인이 주요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2008, 2012년 미국 대선에서 각각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던 존 매케인, 밋 롬니까지 트럼프 반대를 선언했으니 공화당 유권자들의 표심은 흔들렸을 것이다. 

유타대서 `트럼프 반대` 연설하는 밋 롬니(EPA=연합)
하지만 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같은 날 치러진 공화당 경선에서 크루즈는 켄터키, 루이지애나주에서는 트럼프에게 패했고, 메인주에서는 트럼프를 이겼지만 득표율 격차가 13.3% 포인트에 불과했다.

5일(현지시간) 미국 공화당의 대선후보 경선에서 2승을 거둔 테드 크루즈(왼쪽) 상원의원이 아이다호주 보이시의 한 유세장에서 지지자와 악수하고 있다.
보이시=AP연합
캔자스는 왜 크루즈를 압도적으로 지지했을까.

이 질문은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의 답변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우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캔자스의 정치권이 왜 우경화됐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대평원 지대에 위치한 캔자스는 20세기 초반에만 해도 농민조직의 힘이 강했던 진보의 땅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32대) 대통령의 먼 친척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공화당 대통령(26대)을 지낸 뒤 후임 대통령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자신이 정착시킨 혁신 노선을 버리고 보수로 기울자 캔자스주 오사와토미에서 지금 용어로 하면 ‘복지국가’를 뜻하는 ‘신국가주의’를 선포했다. 필자가 워싱턴 특파원 시절인 2011년 12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도 이 곳을 방문해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그때 이곳에서 그 연설을 한 이후 급진주의자, 사회주의자, 심지어 공산주의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그때 그가 주창했던 그 원칙때문에 미국은 지금 더욱 부강한 나라, 강력한 민주주의 나라가 되었다"고 역설했다. 지금도 캔자스에는 ‘래디컬 시티(급진적 도시)’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하지만 도시화, 산업화가 진척되면서 캔자스는 보수화했다. 인구는 줄어드는 가운데 소농은 몰락하고 대농장주만 살아남게되면 대체로 보수로 변한다. 농민이 줄면 농민 조직의 힘도 약화하기 때문이다. 이후 캔자스의 정치는 대체로 공화당이 주도했다. 캔자스는 노예제에 맞서 싸운 자유토지 농민들이 모여서 만든 주였고 민주당은 원래 노예제도를 옹호했던 당이었기 때문이다. 캔자스의 공화당은 대체로 ‘중도 실용’ 보수였다. 1996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된 밥 돌 전 상원의원은 캔자스가 낳은 대표적인 중도 보수 공화당원이다. 

2015년 워싱턴D.C.에서 열린 낙태반대 시위. 연합
그런데 1990년대 초반 캔자스의 정치 지형이 중도 보수에서 우익 보수로 확 바뀌게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낙태 반대 시위다.

전국에서 모인 낙태 반대 시위대는 캔자스주 위치토에 위치한 유명한 낙태 시술 병원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다.(이 병원에서 낙태 시술을 담당했던 조지 틸러 박사는 2009년 6월 위치토의 한 교회에서 낙태 반대론자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이 시위를 계기로 캔자스 주민들은 낙태를 둘러싸고 찬반 양론으로 분열했다. 대다수가 기독교인들인 캔자스 주민들이 대거 낙태 반대론에 가담하면서 이후 이뤄진 각종 선거에서 낙태에 찬성한 공화당 중도파와 민주당 의원들은 캔자스 정치권에서 거의 전원이 축출되고 말았다. 이제 캔자스에는 낙태 반대를 기치로 내건 공화당 우파만 남게됐다. 이 과정에서 ‘복음주의(evangelism)’로 대표되는 기독교 우파가 공화당 우파와 손을 잡았다. 기독교 우파는 학교에서 진화론을 수업하는 것에 반대하고, 학교에서 기도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낙태, 동성결혼에 격렬히 반대한다. 백인 우월주의가 강하고 소수인종이나 여성, 이민자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작은 정부론’을 신봉하고 신자유주의를 선호한다. 공화당 대선주자 중에는 테드 크루즈가 이런 공화당 우파의 대표 주자다.

지난 5일 실시된 캔자스주 공화당 당원대회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한 표씩 던진 정치 행사였다.

2위와의 격차가 문제였지 크루즈의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었다. 트럼프는 그동안 낙태옹호단체인 ‘가족계획연맹’의 활동을 지지했고 대선주자가 되고 다소 신중한 입장으로 돌아섰지만 과거에는 낙태 합법화를 지지한 전력도 있다.

미국 공화당 대선 경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5일(현지시간) 플로리다 올랜도의 한 대학 유세장에서 지지자가 건넨 그림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올랜도=AP연합
‘인종차별’ 언행을 서슴지 않는 트럼프(2회 ‘인종차별 트럼프의 정치적 스승’ 참고)에게는 불행하게도, 캔자스는 인종차별에 맞서 투쟁한 주였다.

위에서도 설명했다시피 캔자스는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농장주에 맞서 싸운 자작농들이 모여 만든 주다. 1859년 10월16일 노예제 폐지를 위해 무장봉기에 나섰다가 교수형을 당한 존 브라운이 캔자스 출신이다.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를 존속시키려는 남부 연방군이 캔자스를 공격해 유린한 역사는 캔자스 주민들의 노예제 혐오를 한층 더 깊게 했다.

어느모로 보나 트럼프는 애초부터 캔자스의 선택을 받기 힘든 주자였다.

문제는 캔자스의 공화당원만 낙태 반대론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기독교 우파가 공화당 우파와 손잡기 시작한 시점부터 낙태 반대는 미 전역의 공화당원들이 공유하는 가치로 떠올랐다.

크루즈가 틈만 나면 낙태 문제를 쟁점화하고 있는 것은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낙태 문제는 트럼프의 ‘아킬레스 건’인 셈이다.

한국 정서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낙태 문제는 미국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다.

낙태 문제는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대표적인 문화 쟁점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낙태 시술과 관련, 찬성(pro-choice, 낙태를 여성의 선택, 권리에 관한 문제로 보는 관점) 아니면 반대(pro-life, 낙태를 태아 살인 행위로 보는 관점) 입장으로 양분돼 있다. 민주당 성향 유권자는 대체로 낙태를 찬성하고, 공화당 성향 유권자는 그 반대다. 

행진중인 낙태찬성단체들. AP=연합뉴스
미 연방대법원이 1973년 ‘로 대 웨드(Roe v. Wade)’ 소송에서 “임신 첫 3개월간 여성이 낙태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면서 낙태를 합법화하는 판결을 내린 뒤 보수 진영은 이 판결을 뒤집기 위해 사력을 다해왔다. 1980년대 들어 기독교 우파가 적극적으로 지원한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정권이 들어서고 보수 성향 대법관들이 다수를 차지한 것을 계기로 대법원은 낙태 요건을 까다롭게 하는 판결을 잇따라 내놨다. 낙태 시술 과정에서 공공병원이나 시설의 사용을 제한하고 18세 이하의 낙태시 보호자의 승인을 의무화하는 등.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낙태 합법화 판례를 뒤집고 낙태를 금지하는 판결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러자 보수성향 주들은 주 의회 차원에서 낙태를 어렵게하는 법안을 잇따라 제정하면서 대법원 판결을 무력화시키려했다. 미국 대법원이 지난 2일 심리를 개시한 텍사스주의 ‘낙태 제한 법안’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은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의 막바지인 올 6월쯤 최종 판결을 내릴 방침이다. 낙태 문제가 서서히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전의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트럼프 대항마’로 부상한 크루즈는 트럼프의 성채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 지점을 집중 공략할 것이다. 공화당 우파는 이미 상당수가 트럼프 쪽으로 기울었다. 트럼프가 소수 인종을 향해 막말을 해대든, 여성 비하 발언을 하든 그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낙태라면 사정이 다르다. 공화당 우파의 핵심 가치이기 때문이다.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전의 관전 포인트다.

조남규 국제부장

‘아웃 사이더’인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미국 공화당의 대선주자로 나서 공화당의 적자(嫡子) 후보들을 잇따라 격파하고 있다.

공화당 지지자들은 지금 공화당 노선이나 전통 따위는 무시한 채 하고싶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트럼프에 열광하고 있다.

 

트럼프를 밀어올리고 있는 주요 지지층은 중장년의 백인들이다. 그 중에서도 경기침체로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인들이 트럼프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들을 향해 불법 체류자들을 모두 추방하고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등의 화끈한 공약을 제시하며 불가사리처럼 몸집을 키우고 있다. 대통령이 되면 민주당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 이민개혁 조치를 전면 무효화하겠다고 약속하며 오바마 집권 8년이 만들어낸 비토층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흡수하고 있다. 트럼프가 기존 정치권을 공화당까지 싸잡아 패대기치자 워싱턴 정치에 신물이 난 정치 혐오세력까지 트럼프 지지자로 돌아서고 있다. 당내 경선에서는 이런 화끈한 후보가 열성 지지층의 선택을 받기 쉽다. 하지만 전체 국민이 참여하는 본선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유타대서 `트럼프 반대` 연설하는 밋 롬니(EPA=연합)
트럼프 비판 대열에 합류한 존 매케인(애리조나) 상원의원. AP=연합
트럼프로는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공화당 주류는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다. 급기야 각각 2008년, 2012년 미 대선의 공화당 후보였던 존 매케인, 밋 롬니까지 나서 트럼프 반대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적전(敵前) 분열도 이런 분열이 없다.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지만, 그 흐름은 반복된다(History Doesn’t Repeat Itself, But It Does Rhyme)”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말이다.

예전에도 트럼프 같은 공화당 대선 주자가 있었다. 1964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던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이다.

1964년 10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유세중인 배리 골드 워터. AP=연합
당시 공화당 주류는 미국 동북부를 기반으로 한 중도파 당원들이었다. 이들은 온건 보수 성향의 넬슨 올드리치 록펠러 뉴욕 주지사를 대선후보로 밀었다. 그는 미국의 대부호인 존 D. 록펠러의 손주다. 유력 가문 출신에 높은 인지도, 그리고 탄탄한 당내 기반. 누구나 공화당 대선후보는 록펠러라고 생각했다. 공화당은 1928년 허버트 후버부터 1960년 리처드 닉슨까지 모두 중도 성향 대선 후보를 내세웠다. 록펠러는 이런 공화당의 전통에도 부합하는 적임자였다.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캘리포니아주 경선이 끝날 때쯤 공화당 대선 후보는 골드워터로 사실상 결정됐다. 록펠러의 혼외 정사 의혹이 변수로 작용하긴 했지만 골드워터를 띄운 밑바닥 동력은 기존 정치권을 향한 백인들의 불만이었다. 백인들은 존 F. 케네디 민주당 행정부가 추진한 흑인차별 철폐 정책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케네디가 암살된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존슨 부통령은 케네디의 유산인 민권법을 완성시켰다. 공화당도 민권법 처리 과정에서 민주당 정부에 협조했다.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 직후 기내에서 대통령에 취임한 존슨 전 미국 대통령. AP=연합
그러자 골드워터가 백인들의 불만을 대변하고 나섰다. 그는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기 직전, ‘민권법’이 상원에 상정되자 반대표를 던졌다. 상원의원 100명 중 반대표를 던진 의원은 8명 뿐이었다. 흑인노예들이 수 세기에 걸친 투쟁 끝에 쟁취한 흑인들의 ‘권리장전’에 반대한 것이다. 골드워터가 민권법에 반대한 이유는 연방정부의 민권법 집행이 주 정부의 권한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결론은 엎어치나 메치나다. 흑인이 어떻게 백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느냐는 인식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었다. 이런 인식은 대다수 백인들의 속 마음이었다.

골드워터는 6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미 공화당 전당대회장에서 다음과 같은 후보 수락문을 읽어내려갔다.

“자유를 지키기 위한 ‘극단주의’는 악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오히려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온건주의’야말로 미덕이 아니다.”

 

당내 온건파들은 골드워터를 대선후보로 인정하지 않았다. 공화당은 이제 온건 록펠러파와 강경 골드워터파로 쪼개졌다. 본선을 앞두고 자중지란에 빠진 것이다.

골드워터는 후보가 되고서도 기존 대선후보와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였다. 통상 대선 후보로 지명된 뒤에는 중도층이나 부동층인 ‘산토끼’를 잡기위한 전략을 구사하는데 골드워터는 당내 경선 때나 마찬가지로 골수 지지층인 ‘집토끼’만 바라보고 선거운동을 펼쳤다.

남북전쟁 이후 100년 동안 민주당을 지지했던 남부의 ‘딥 사우스’(Deep South.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앨라배마) 지역이 64년 대선에서 돌연 공화당 지지로 돌아선 것은 골드워터의 민권법 반대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모두 알고있듯이 공화당은 노예제 폐지의 기치 아래 다수의 정파들이 모여서 창당한 정당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새로 창당된 공화당에 합류해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남부가 미 연방에서 탈퇴하자 링컨의 공화당 정부는 전쟁도 불사했다. 그리고 남북 전쟁에서 승리한 뒤 노예제를 폐지했다. 흑인들의 투표권을 인정하는 등 흑인의 법적 권리를 강화하는 수정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렇지만 남부 주에서는 유무형의 흑인차별이 지속됐다. ‘KKK(쿠 클럭스 클랜)’로 대표되는 백인우월주의 단체들은 흑인들에 테러를 일삼았다.

미국 공화당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1일(현지시간) 워싱턴 연방의사당에서 백인 우월주의단체인 ‘KKK’연루 의혹을 산 대선 경선 주자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겨냥해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인종주의자 또는 인종주의 조직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최근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를 찍겠다고 선언한 바로 그 KKK단이다. 트럼프는 흑인과 히스패닉 등 소수인종을 향해 독설을 퍼부으면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환호를 이끌어내고 있다. 미국의 안보를 위해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원천 봉쇄하겠다고도 했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 사회가 오랜 시행착오 끝에 세워놓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란 원칙이 있다. 위키백과는 이를 ‘다민족국가인 미국 등에서, 정치적(Political)인 관점에서 차별·편견을 없애는 것이 올바르다(Correct)고 하는 의미에서 사용되게 된 용어’라고 설명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 정치권이 관행으로 정착시킨 이 원칙을 마음껏 조롱하고 있는 셈이다.

골드워터가 대선에서 승리한 주는 딥 사우스를 제외하면 그의 고향인 애리조나가 유일하다. 64년 대선을 계기로 링컨의 공화당을 원수로 생각했던 미국 남부는 서서히 공화당의 아성으로 변해간다.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실시되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고등학생 때는 골드워터 광팬이었다는 것. 클린턴은 64년 대선에서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골드워터 후보의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했다. 골드워터 지지를 접고 민주당으로 전향한 것은 대학생이 된 이후였다. ‘역사의 신(神)’이 골드워터 후예인 트럼프에 대적시키기 위해 클린턴의 정치 성향을 바꿔 놓은 것일까.

골드워터는 64년 대선 본선에서 민주당 린든 존슨 대통령과 맞붙었다.

존슨 대통령은 44개 주에서 승리하며 486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다. 골드워터가 승리한 주는 6개주(선거인단 52명)에 그쳤다. 일반 유권자 투표 수는 4312만9484(61.1%) 대 2717만8188(38.5%). 486 대 52. 미 대선 역사상 기록적인 참패였다.

 


올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는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출돼 골드워터의 전철을 답습할 것인가. 정치는 생물이라는데 그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적어도 공화당 주류는 트럼프가 민주당 클린턴과의 맞대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공화당 지지자들이 열광하는 대선 주자를 공화당이 대놓고 반대할 까닭이 없을테니 말이다.

봄 나들이에 겨울 옷을 입고 나온 젭 부시

정치명문 부시가(家)의 세번째 대통령을 꿈꿨던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그는 시대착오적인 돈키호테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친형인 조지 W. 부시(아들 부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2000년 대선의 매뉴얼을 들고 2016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그 매뉴얼이 효과를 봤다. 민주당에서 대세론을 형성해가던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맞수로는 젭 부시가 제격인 듯 했다. 그러자 선거자금이 쏟아져들어왔다. 그가 대선 출마를 선언할 당시 어느 후보도 그 보다 많은 선거자금을 확보하지 못했다. 청신호였다.

미국 대통령선거 공화당후보 경선에 나섰던 전 플로리다 주지사 젭 부시가 20일(현지시각)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컬럼비아에서 열린 사우스캐롤라이나 공화당 프라이머리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
그런데 막상 경선이 시작되자 안개가 걷혔다. 부시는 거인으로 알고 돌진했지만 알고보니 풍차였다. 미국 국민들은 더 이상 그의 아버지(조지 H.W.부시)와 형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던 그 국민들이 아니었다.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다시 돌릴 수 없는 법이다. 부시 전 주지사는 아이오와와 뉴햄프셔,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돌며 ‘응답하라 2000’ 드라마를 상영했다. 드라마가 뜨지 않자 형(아들 부시)를 카메오로 출연시켰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대통령이었던 형을 금융위기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국민 앞에 내세운 장면은 한편의 블랙 코미디였다.

부시 전 주지사의 시대착오는 선거자금 모금 행태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미국 정치에서 선거자금 모금액은 후보의 경쟁력과 동일시된다. 50개주가 제각각인 미국 대선은 사실상 50개 나라를 돌며 선거를 치르는 것과 비슷한 부담을 후보들에게 안긴다. 일단 ‘실탄’이 풍부해야 한다. 돈이 없으면 제 아무리 훌륭한 후보라도 그 넓은 지역을 돌며 그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충분히 홍보할 수 없다. 미디어를 활용하든, 발로 뛰든 천문학적 단위의 돈이 들어간다. 선거자금 확보는 대권에 이르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젭 부시는 그 조건을 넘치게 충족시켰다. 정치 자금 추적 단체인 '오픈시크릿'이 집계한 아래 그래픽은 부시 전 주지사가 지난 20일(현지시간) 경선 포기를 선언할 때까지 모금한 선거자금 현황이다. 

                                                       OpenSecrets.org

그래픽의 윗쪽 막대선은 선거캠프 밖에서 모금한 자금이고 아랫쪽 막대선은 선거 캠프에서 자체적으로 모금한 자금이다. 외부 자금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외부의 누군가 돈을 모은 뒤 젭 부시를 위해 사용했다는 의미다. 그 사람들이 누구일까. 대부분이 월가의 대형 금융회사나 대기업, 아니면 보수 진영의 ‘큰 손’들이다. 이들은 젭 부시를 위해 돈을 모은 뒤 그를 홍보하는 광고 등에 수천만 달러를 쏟아부었다. 후보의 선거캠프 바깥에서 활동하는 정치활동단체들은 캠프 보다 훨씬 자유롭게 정치자금을 모을 수 있다. 이른바 ‘슈퍼 팩(Super PAC)’이라는 정치활동위원회는기업 등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무제한으로 기부받을 수 있다.

하지만 ‘공짜 점심은 없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유권자들이 분명히 알고 있다. 젭 부시에게는 안타깝게도, 많은 국민들은 정치권에 흘러든 뭉텅이 돈이 ‘워싱턴 정치’를 왜곡시켰다고 생각한다. 그 돈에 포획된 정치인들 탓에 자신들의 삶이 더 힘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미 의회가 2009년 뱅크오브아메리카(BOA)와 JP모간체이스, 골드만삭스, 씨티그룹, 웰스파고 등 대규모 월가 금융기업에게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국민들의 분노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보수, 진보가 따로 없었다.

한 쪽에선 국민의 세금으로 금융기관을 구제하지 말라는 항의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이 운동은 갓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의 복지 확대 등 ‘큰 정부’ 정책을 비판하면서 정치세력화하더니 2010년 중간선거 때는 공화당 내부 경선에서 ‘작은 정부’를 주창하는 강경파 후보들을 다수 당선시켰다. 지난해 존 베이너 하원의장의 사퇴를 압박했던 의원들이 바로 그 때 의회에 입성한 티 파티 그룹 의원들이다. 이런 흐름과는 정반대로 “금융위기 주범인 금융기관들은 도와주면서 주택담보 대출금을 갚지 못해 길거리에 나앉게 된 서민들은 왜 방치하느냐”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최근 ‘싸울 기회(The Fighting Chance)’라는 자서전을 펴낸 엘리자베스 워런이 이런 목소리들을 대변하면서 진보 진영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평범한 주부였던 워런을 연방 상원의원으로 만든 힘은 월가를 향한 국민의 분노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정황 속에서 젭 부시의 선거자금 모금 그래픽을 다시 들여다 보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후보,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왼쪽부터)이 아이오와주 유세장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아래 그래픽을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대선 주자들은 나름대로 소액 모금 방식을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듯한 흔적이 엿보인다. 물론 그들이 과거보다 청렴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국민들이 이익단체들의 로비 자금에 잔뜩 화가 나 있기 때문이다. 

                                                         OpenSecrets.org

위 그래픽에서 젭 부시나 비슷하게 선거자금을 모은 클린턴은 캠프 모금액이 더 많다. 클린턴은 2008년 대선에서 큰 손들이 기부한 거액 후원금에 의존하는 등 전통적인 방식으로 선거에 임했다가  기존의 틀을 깨고 나온 버락 오바마 후보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 오바마는 온라인을 통한 ‘풀뿌리 모금’ 방식 등 혁신적인 선거운동을 선보이며 젊은 층을 중심으로 ‘오바마 바람’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2008년 2월쯤 오바마 후보는 이미 100만 명이 넘는 소액 후원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와신상담 끝에 대권 재수에 나선 클린턴은 오바마를 벤치마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100달러 이내의 소액 후원 부문에선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에게 밀리고 있다. 

샌더스는 클린턴을 “월가와 다른 이익단체에 의존하는 후보”로 몰아붙이며 자신이야말로 평범한 미국인을 대표하는 후보라고 강조한다. 참다못한 클린턴은 최근 유세에서 “나는 75만명이 넘는 후원자를 갖고 있다. 대다수가 소액 기부자”라고 항변했지만 클린턴이 주류 정치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외부 모금이 많은 공화당의 마르코 루비오나 테드 크루즈도 나름대로 소액 후원금 모금에 힘을 쏟고있다. 그 것이 지지층을 넓히고 국민의 반감을 희석시킬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큰 손인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는 아예 자기 지갑에서 돈을 꺼내쓰고 있다. 거액의 로비자금과 그 돈으로 굴러가는 정치에 신물이 난 국민들은 자기 돈 써가면서 국민이 하고싶었던 얘기들을 거침없이 대변해주는 트럼프에게 환호할 수 밖에 없다. 선거자금 모금행태를 놓고 보면 젭 부시만 봄 나들이에 겨울 옷을 입고 나온 꼴이다.

조남규 국제부장

 

2016년 11월 치러지는 미국 대선이 초반부터 이변을 연출하고 있다.

민주당의 경우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자마자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대세론이 무너졌다. 뉴햄프셔주 경선에서 클린턴을 큰 표차로 누른 샌더스 상원의원은 사실상 민주당원도 아니다. 민주당 경선에 참여하기 전까지 30년 넘게 무소속으로 정치를 해왔다. 클린턴이 누구인가. 남편인 빌 클린턴과 함께 지난 수십년 동안 미국 정치를 쥐락펴락해온 여걸이다. 퍼스트레이디와 연방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지낸 클린턴 전 장관이야말로 ‘워싱턴 정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공화당 경선에선 더 기이한 드라마가 상영되고 있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부동산 재벌(도널드 트럼프)이 현직 상원의원(테드 크루즈, 마르코 루비오)과 전직 주지사(젭 부시) 경력의 주자들을 2위 자리를 놓고 다투는 군소후보들로 만들어버렸다. 민주,공화당 공히 ‘워싱턴 정치’, ‘기성 정치’에 발을 담근 주자들은 고전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국민들이 그 만큼 정치권을 불신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버니 샌더스(왼쪽), 도널드 트럼프.

 

2008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도 ‘워싱턴 정치’가 도마 위에 올랐다. 초선 상원의원 임기 중에 대선 출마를 선언했던 버락 오바마 후보는 워싱턴 정치를 ‘변화(Change)’시켜 미국 사회에 ‘희망(Hope)’을 불어넣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고 외쳤고, 많은 국민들이 그 목소리에 공감했다. 그 결과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 2012년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는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오바마 집권 기간 워싱턴 정치는 변화했는가. 미국 국민들이 기성 정치의 반대편에 서있는 샌더스·트럼프에 환호하는 걸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워싱턴 정치는 언제부터인가 국민의 삶과 유리된 채 정쟁(政爭)을 일삼고 있다. 한 때 선진 민주주의의 표상이었던 미국 정치가 왜 이 지경이 됐을까. 미국 연방의사당을 감싸고 있던 타협과 관용의 문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정치의 난맥상이 한국 정치에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앞으로 풀어낼 이야기들은 이런 의문들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필자는 워싱턴타임스 교환기자와 조지타운대 방문연구원, 워싱턴특파원 시절 미국 정치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국회와 청와대, 총리실 등을 취재했다. 지금은 세계일보 국제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올해 미국에선 11월 대선이 예정돼 있다. 이를 계기로 미국 정치의 흥미로운 지점들을 들여다 보자는 것이 이 코너를 기획한 취지다.

첫번째 주제는 미국 정치의 고질(痼疾)이 돼가고 있는 정치 ‘양극화(polarization)’ 문제다.

미국의 시사주간 내셔널 저널이 1982년부터 30년 넘게 매년 내놓고 있는 'annual vote ratings'이란 통계가 있다.

말 그대로 미국 연방의원들의 투표 성향을 분석한 자료다. 미 상원의원 100명, 하원의원 435명이 1년 동안 투표한 기록을 토대로 누가 어느 정도 보수(진보)적인지를 상대적으로 계량화한 통계치다. 정치분석가인 빌 슈나이버가 1981년 고안했다는 이 평가 방식은 최근 들어 미국 정치의 ‘양극화(polarization)’가 부쩍 심화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가장 진보적인 공화당 의원과 가장 보수적인 민주당 의원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의원이 포진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그래픽은 미국 의회의 양극화 정도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워싱턴포스트

 

위 그래픽이 보여주듯이, 1982년 의회만 해도 가장 보수적인 민주당 의원과 가장 진보적인 공화당 의원 사이에는 344명의 의원이 포함돼 있었다. 중간 지대에 포진한 이들 의원은 정확한 개념은 아니지만 이른바 '중도파 의원'(물론 상대적 개념이다)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중간 지대 의원들의 숫자는 해가 갈수록 줄어들더니 2013년엔 4명으로 쪼그라들었다. 공화당 의원들은 더 보수화하고, 민주당 의원들은 더 진보화한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어떤 이들은 게리맨더링(특정 정당이나 특정 후보자에게 유리하도록 자의적으로 부자연스럽게 선거구를 정하는 일)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가령 보수적인 백인 거주 지역만을 묶어서 선거구를 만들면 그 선거구에서는 공화당 후보만 당선될 수 있게된다. 그러면 이 선거구에서는 공화당 후보 경선이 사실상 본선이나 다름없게된다.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는 누가 더 보수적이냐는 선명성 경쟁이 불가피해진다. 그렇게 당선된 의원이 의정 활동을 하면서 더 보수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 이 것만으로는 정치 양극화의 원인을 선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 주(州) 전체가 선거구(미국 상원의원은 주마다 2명)여서 게리맨더링이 개입할 수 없는 미국 상원에서도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워싱턴포스트

 

위 그래픽은 상원의 '중도파 의원'이 2012년부터는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미국 사회의 이념적 분열이 이전 보다 심화되고 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미국에선 양당 모두 공직 후보를 당원이나 주민들이 상향식으로 선출한다. 갈수록 보수적인 주에서는 보수 성향이 더 강한 후보를, 진보적인 주에서는 진보 성향이 짙은 후보를 선출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정치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추론이다. 실제 공화당은 1980년 레이건 정부를 출범시킨 이후 지속적으로 우경화하고 있다. 2016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공화당의 우경화는 확인된다. 전국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에 이어 2위에 랭크된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공화당 우파가 밀고 있는 후보다. 공화당 지도부를 비롯한 중도파가 밀고 있는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미국의 보수진영이 과거 보다 더 오른쪽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민주당이라고 다르지 않다. 민주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샌더스 의원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판을 흔들고 있는 상황이 상징하듯 미국의 진보 진영도 점점 더 왼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보수든, 진보든 화끈한 후보가 먹힌다.

더 진보적인 민주당 의원과 더 보수적인 공화당 의원이 많아지면 의회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민주당 의원은 보수적인 모든 정책을 반대한다. 반대로 공화당 의원은 진보적인 모든 정책을 반대한다. 중간은 없다. 양당의 공통 분모는 제로에 수렴된다. 쟁점 법안은 여간해선 절충되지 않는다. 타협하면 배신자로 찍힌다. 협상론자인 공화당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그러다가 당내 우파 세력에 의해 사실상 축출됐다. 대통령, 부통령(상원의장)에 이어 미국 권력서열 3위인 하원의장도 그런 수모를 당하는 판인데 어느 의원이 총대를 메고 백악관이나 민주당 지도부와 협상할 수 있을까. 민주당 지도부도 당내 강경파에 휘둘리기는 마찬가지다. 민생과 직결된 법안도, 대외 신인도를 좌우하는 예산안도 제 때 처리되는 법이 없다. ‘식물 의회’가 따로 없다. 그래도 의원 수당과 활동비(세비)는 꼬박 꼬박 나온다. 식물 의회가 야기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다. 먹고살만하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미국 중산층과 서민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정치인을 바라보는 국민의 눈초리가 사나워질 수 밖에 없다. 샌더스와 트럼프를 띄우고 있는 것은 국민의 정치 불신이고 그 원천은 수십년 동안 서서히 진행돼온 정치의 ‘양극화’다.

대만의 차이잉원 총통시대 개막을 지켜보면서 대만이 향후 동북아 정세에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를 일으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이 당선인의 날갯짓이 한반도에 태풍을 몰아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다. 그는 뼛속까지 대만인이다. 대만에서 태어나 대만대학을 졸업했다. 자유민주주의 본산인 미국과 영국에서 수학했다. 이런 그가 대만과 중국은 별개의 국가라는 ‘대만독립’ 신봉자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그는 중국이 견지하는 ‘하나의 중국’의 대척점에 서 있다.

 

                                                                                                                                              대만 최초의 여성 총통이 된 차이잉원 


이번 총통 선거에서 대다수 대만인은 대만의 민주화와 독립을 선택했다. 차이를 지지한 대만을 향해 일본은 “기본적 가치관을 공유하는 소중한 친구”라며 러브콜을 보냈지만 한국은 그러지 못했다. “우리는 ‘하나의 중국’ 원칙 아래 대만과의 실질적 협력 지속 증진을 희망한다”는 중립적 입장을 냈을 뿐이다. 대만은 자유민주주의를 공유한 우방이지만 국익을 우선해야 하는 게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의 중국’ 원칙이 동북아 역내 안정을 떠받치고 있는 주요 기둥이라는 점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중국 베이징에서 마오쩌둥 국가주석과 세기의 회담을 갖고 이 원칙을 담은 ‘상하이 코뮈니케(미합중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중국은 대만을 중국의 1개 성(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미국은 “대만해협을 사이에 둔 모든 중국인이 중국은 단 하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과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것을 미국은 인식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그 입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문구로 응답했다.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사실상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한 셈이다. 상하이 코뮈니케는 미·중의 첨예한 이해를 절묘하게 절충한 느슨한 성명이다. 그렇지만 이 틀이 무너지면 미·중관계도 무너진다.
가끔 이 틀이 흔들거릴 때도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미·중 모두 절제하면서 상대의 의지력을 시험하는 상황은 피해 왔다. 하지만 ‘양측(미·중)은 어느 쪽도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헤게모니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코뮈니케의 또 다른 조항은 중국의 부상과 함께 그 일각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우리는 2013년 중국이 일방적으로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는 모습과 그 직후 미국이 B-52 폭격기 2대를 출격시켜 그 구역을 휘젓고 돌아오는 광경을 지켜봤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의 ‘아시아 중시(Pivot to Asia)’와 중국 시진핑 체제의 ‘일대일로(一帶一路·one belt one road)’ 사이에서,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경제협정(TPP)과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사이에서 한국은 부단히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미국은 원하지만 중국은 반대하는 양자택일의 현안은 비단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의 한반도 배치 문제만이 아니다.

북한의 4차 핵실험을 계기로 중국은 북한을 여전히 전략적 자산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미국이 전례 없는 강도로 중국을 압박하고 있지만 중국은 김정은 정권을 위태롭게 하는 조치는 꺼리고 있다. 북한의 1차 핵실험 직후 중국 학계 일각에서는 한때 북·중 우호조약을 폐기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진 적이 있지만 중국 정부는 반응하지 않았다. 중국 지도부는 소련이 북한과의 우호조약을 폐기한 이후 한반도 현안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린 사례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런 중국이 미국과 정면충돌하는 상황은 우리에게 득될 게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만의 정체성은 점점 더 강해질 전망이다. 자신을 대만인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조사도 나왔다. 대만에서 태어난 인구가 늘면 늘수록 그 경향은 더 가속화할 것이다. 차이 당선인이 역대 총통선거 사상 최대 표차로 승리한 것도 ‘딸기세대’로 불리는 젊은층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은 바 크다. 그래선지 대만 역사상 첫 여성 총통을 만들어낸 대만인들의 모습에선 자신감이 느껴진다. 그 자신감이 미·중의 충돌을 견인할까봐 조마조마하다.

조남규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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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앙일보 2021년 7월14일자 26면에 게재된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전 외교부 차관)의 기고글.

[김성한의 한반도평화워치] 한반도가 미·중 대결의 약한 고리 되지 않게 해야

미·중 전략경쟁의 최전선이 동남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로 북상 중이다. 중국의 유라시아 일대일로 구상(BRI)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IPS)이 겹치는 곳이 동남아의 육지와 바다다. 지난 수년간 동남아와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미·중 양국의 치열한 영향력 확대 경쟁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제 미·중 경쟁이 대만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 지역으로 퍼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12일 미국·한국·대만·네덜란드의 반도체 기업 최고경영자(CEO)들과의 화상 회의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흔들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미국 내 투자를 강조했다. 이틀 후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업체인 대만 TSMC는 중국의 대표적 슈퍼컴퓨터 회사인 피튬(Phythium)에 대한 반도체 공급 중단을 선언했다.

중국은 아연실색했다. 이미 독립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던 대만 차이잉원(蔡英文) 민진당 정권이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서 중국을 제치고 미국 쪽에 서는 대가로, 바이든 행정부가 대만 독립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는 ‘은밀한 거래’를 우려했다. 중국은 “대만 독립은 곧 전쟁”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동시에 중국의 고도성장 기간 동안 반도체 생산에 연구와 투자를 게을리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4차 산업혁명에선 반도체가 핵심이고, 그중에서도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가 결정적이라고 한다. 군사력의 첨단 과학화와 스마트 국방혁신은 시스템 반도체 없이는 불가능하다.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부분은 중국이 한국에 뒤진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 세계 1위인 삼성전자는 중국의 10나노 수준보다 훨씬 앞선 7나노와 3나노급 반도체 생산 역량을 가지고 있다. 1980년대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 능력을 갖췄다가 한국에 선두 자리를 내준 일본도 미국 주도의 새로운 공급망 참여를 통해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반도체 원조이자 최고의 반도체 설계 회사(팹리스)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은 대만·한국·일본이 미국에 투자하게 함으로써 시스템 반도체 생산의 3개 분업 구조인 팹리스, 디자인 하우스, (위탁) 제작 모두를 미국 내에서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구상이다.
 
따라서 미·중 경쟁의 최전선이 동남아로부터 대만-한국-일본-미국으로 연결되는 반도체 공급망이 존재하는 동북아로 북상하고 있다. 미국은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미·중 전략경쟁이 격화될 경우 미국이 ‘대만 카드’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 ‘사실상 독립국’ 대우를 하는 쪽으로 갈 수 있다. 중국으로서는 반도체 공급망에서 배제당한 데다 대만 독립까지 허용하게 되면 시진핑 체제의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점령하진 않더라도 군사적 긴장을 극도로 고조시켜 대만의 독립 의지를 꺾고 새로운 반도체 공급망을 위협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제반 상황이 한반도의 안보와 연계될 가능성이다. 중국은 미국에 대해 사용할 카드가 많지 않기 때문에 북한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길 가능성이 높다. 북한을 대미 전략 구도 속에서 바라보는 중국이 미·중 전략경쟁의 격랑 속에서 ‘북한 카드’를 사용한다는 것은 북핵 문제에 대한 비협조 차원을 넘어 북한의 후원국(patron) 이상을 자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갈등이 한국·일본 등과 연결된 점을 이용해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킬 가능성이 있다. 중국에 밀착한 북한이 미국 쪽으로 급선회하는 조건으로 핵 보유를 인정받으려 할 수 있다. 미국에 중국과 북한 중에 자신을 택하라는 일종의 벼랑 끝 전술을 쓰는 것이다.
 
이렇듯 ‘중국-러시아-북한’ 대 ‘대만-한국-일본-미국’으로 연결되는 진영 싸움에서 한국이 국익을 지키려면 미·중 양측 모두로부터 가장 약한 고리로 인식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미 동맹을 명실공히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유지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지난 5월 21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미 동맹의 외연을 기후변화, 신기술, 동남아 개발, 우주 협력에까지 확대하기로 한 만큼 이를 실천해야 한다. 남북 대화를 위해 판문점 및 싱가포르 선언과 동맹의 외연 확대를 전술적으로 맞교환한 것이 아니라면 합의 사항을 신속히 실천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이를 한·미·일 안보 협력으로 연결해야 한다. 대만과 한반도에서 동시에 긴장이 고조되었을 경우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대만 문제보다 가볍게 다루지 않게 하려면 유엔사령부 후방 기지가 있는 일본의 입장과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대만해협 사태로 한국의 해상 수송로의 안전이 위협을 받게 되면 우리와 거의 유사한 해상 수송로를 사용하고 있는 일본과의 협력,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해상 수송로를 보호해주는 미국의 강한 리더십과 지지가 긴요하다. 따라서 다양한 위기 사태에 대비한 한·미·일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잘 관리해 나가야 한다. 미·중 ‘신냉전’을 얘기하지만 20세기 냉전과 달리 미·중 관계는 경제적으로 완전한 분리(decoupling)가 불가능한 관계다. 핵심 전략산업과 관련된 반도체와 배터리 등을 제외하곤 미·중 간 교역과 투자는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경제·문화는 물론 국제 보건이나 기후변화와 같이 미·중이 협력할 수 있는 분야에 한·중 관계를 접목해 나가는 능동적 외교를 전개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대만 정책은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상당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2017년 미국 군함의 대만 정박을 허용하는 법안 통과를 필두로 양국 공무원의 상호 교류를 허용하는 대만여행법(2018년 3월), 방위산업체 교류 허용(2018년), 대만동맹보호법(2020년 2월), 대만의 세계보건기구(WHO) 옵저버국 가입 승인법(2020년 3월), 대만보증법(2020년 12월) 등 일련의 대만 관련 법률을 제정하여 대만의 국제적 지위 격상을 위한 법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특히 대만보증법(Taiwan Assurance Act)은 기존 대만관계법(Taiwan Relations Act)의 한계(미·중 수교 당시의 대만 방위 능력 범위 내 무기 판매 허용)를 넘어 대만의 군사적 이익을 더 확실하게 보장하고 대만 문제에 미국이 더 관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의 대만 방문도 증가세다. 2020년 8월 엘릭스 에이자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이 1979년 단교 이후 첫 고위급 방문을 했고, 9월 키스 클라크 국무부 경제담당 차관의 방문이 있었다.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대만관계법 제정 42주년 행사를 위해 지난 4월 미 대표단(크리스 도드 전 상원의원,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 제임스 스타인버그 전 국무부 부장관 등)이 방문했다.
 
이에 앞서 3월 26일에는 미국과 대만 간에 해경(海警) 분야 양해각서가 체결되었다. 양측이 태스크포스(TF)를 조직해 해양 자원 보호, 불법 어로 제한 등 공동 목표와 관련한 협력을 진행함으로써 외국 선박에 대해 중국 해경의 무력 사용을 허용한 중국 해경법(2021년 2월)을 견제할 것으로 보인다.
 
양국은 향후 대만해협은 물론 동중국해나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공세적 행태를 견제하기 위한 공동 대처의 수위를 높여갈 것이다. 이렇듯 미·중 전략경쟁이 격화하면서 미국은 대만의 국제적 지위와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중국에 대한 압박을 위한 ‘카드’가 아니라 미국·대만 관계를 정상화에 준하는 단계로까지 격상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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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복거일(사회평론가,소설가)씨가 2022년 11월7일자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

[다산칼럼] '운명공동체'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집권 연장에 성공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대만 점령이 중국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선언했다. 전체주의는 권력의 집중을 부르고 독재자는 민족주의적 열정을 부추겨 압제적 통치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므로, 예상하기 어려웠던 일은 아니다.
‘대만의 독립은 허용할 수 없다’던 입장에서 ‘대만을 무력을 써서라도 점령하겠다’는 입장으로 바뀐 것은 중대한 변화다. 이런 변화가 품은 함의들은 심각하다. 군사 전문가들은 중국의 대만 침공이 예상보다 훨씬 빠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런 상황은 우리의 안보를 근본적 수준에서 위협한다. 지금 동북아시아에선 자유주의 세력과 전체주의 세력 사이에 뚜렷한 전선이 자리 잡았다. 대만해협에서 한반도의 휴전선을 거쳐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소야해협에 이르는 이 전선의 남쪽엔 대만, 한국, 일본의 자유주의 세력이 있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다. 북쪽엔 중국, 북한, 러시아의 전체주의 세력이 있다. 당연히 대만에 대한 중국의 위협은 이 전선 전체에 미친다.

이 전선은 실은 중화민국이 대만에 정착한 1949년에 형성됐고, 한반도의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뀐 것 말고는 그대로 유지됐다. 한국전쟁을 겪고도 70년 넘게 전선이 유지됐다는 사실은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지형에 대해 여러 얘기를 들려준다.
그런 얘기 가운데 하나는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사이의 오랜 인연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화민국의 지속적 도움을 받아 활동한 것은 잘 알려졌다. 1949년 내전에서 진 중화민국이 대만에 정착한 뒤엔 두 나라는 실질적으로 ‘운명공동체’였다. 1949년의 진해회담에서 장개석 총통과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점을 확인했다.
1950년 1월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은 남한과 대만이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발표했다. 이런 ‘침입에의 초대’에 응해 북한군이 남침했다. 예상과 달리 트루먼 대통령은 주일미군을 한반도에 투입했고 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보냈다. 그는 한반도와 대만이 군사적으로 하나임을 인식한 것이었다.

실제로, 북한군 3분의 1은 중공군 출신이었다. 그들은 뿔뿔이 북한군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편입됐다. 북한군 5, 6, 7사단은 아예 중국에서 편성돼 뒤의 이름만 북한군 편제를 따랐다. 즉 중국은 대만의 중화민국과 한반도의 대한민국을 동시에 정복하려 했다. 한반도에 개입한 중공군이 끝내 대만을 공격하지 못한 것은 미군 7함대에 맞설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상황은 같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한반도도 무사할 수 없다. 중국은 북한으로 하여금 한반도에서 공격에 나서도록 할 것이다. 실은 중국의 대만 침공은 북한의 남한 공격으로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군의 공격으로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묶인 사이에 중국은 대만을 점령하려고 할 것이다.
두 나라 시민들이 인식하든 외면하든,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오래전부터 ‘운명공동체’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느 한쪽에 전쟁이 일어나면, 다른 쪽도 전쟁에 휩싸일 것이다. 이런 인식을 두 나라 시민들이 공유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북한이 우리를 공격해올 때 결정적 요소는 북한의 핵무기다. 우리가 핵무기를 갖지 못하는 한 미국이 약속한 핵우산은 주한미군을 한반도에 묶어 놓을 것이다. 동북아시아 주둔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서라도 한국이 북한의 핵무기에 독자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바람직하다.
지금 미국이 대만의 안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 사이의 군사력 격차는 점점 줄어든다. 특히 미국이 대만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중국의 능력은 빠르게 향상된다. 한국이 북한에 맞설 만한 핵전력을 갖추도록 하는 일은 대만의 방위에 실질적으로 기여한다.
미국의 전략과 외교 책임자들에게 한반도는 우선순위에서 유럽이나 중동에 밀린다. 그래서 미국 관료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늘 미봉책을 따른다. 그들과 협상해 우리의 핵전력을 갖추려면, 대만과 한반도가 긴밀히 연결되었으며 한국의 군사적 능력의 확충은 대만의 안보에 실질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을 먼저 일깨워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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