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출신 인사의 변호사 개업 문제가 법조계의 고질적 병폐로 지목돼온 ‘전관예우’ 관행과 맞물리면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총리 후보자인 안대희 전 대법관이 대형 로펌에서 거액의 수임료를 받았다는 이유로 낙마한 사실은 우리 사회가 전직 대법관의 돈벌이에 부정적이라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대법관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변호사 개업조차 막는 것은 헌법상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적 발상이란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한 하창우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만나 그의 반대 논리를 들어봤다. 변협이 최근 차한성 전 대법관의 변호사 개업신고서를 반려한 조치와 관련해법조계 안팎에서는 ‘지나치다’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그는 오히려 “대법관뿐만 아니라 헌법재판관, 검찰총장, 법무장관 등도 전관예우 적폐가 심하다고 판단되면 변호사 개업을 만류하겠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31일 서울 강남구 대한변협 회장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차한성 전 대법관은 ‘공익 활동을 하기 위해 변호사 개업 신고를 했는데 이를 철회하라는 변협의 취지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항변했다.



“공익 목적의 활동은 변호사 등록만으로 가능하다. 굳이 변호사 개업을 하겠다는 것은 사익을 취하기 위해 사건을 수임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전관예우’ 폐습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면 개업을 제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지난 30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의 전관예우 모습은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은 대법원 상고사건(2심 판결에 대한 불복신청으로 대법원에 제기)을 거의 독점한다. 일반 변호사에게서 상고사건을 의뢰받고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도장값’으로 수천만원을 받는다. 재작년까지 3000만원이었는데 작년에 5000만원까지 올랐다는 소리도 들린다.”

―아무리 대법관 출신 변호사라고 해도 도장값으로 3000만원이면 너무 많지 않나.

“지금은 대법관 출신들이 변호사 개업을 자제하다보니 그러지 않는 몇 사람이 상고사건을 독점한다. 그래서 도장값이 올라가는 것이다. 도장값 수천만원은 최종판결을 앞둔 소송 당사자인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다. 대부분은 주위에서 빌리거나 대출을 받아서 어렵게 마련한다. 최고 법관으로 재직하다 이런 식으로 돈을 버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다. 200만∼300만원의 월급을 받는 젊은 변호사들은 이런 사실 앞에서 절망하고 있다. 후배 법관들은 전직 대법관 도장이 찍힌 사건 앞에서 심리적 부담을 느낀다.”


 

 

―변호사 숫자가 늘면서 전관예우 논란이 더 증폭되고 있는 것 같다.



“로스쿨이생기고 변호사가 양산되면서 등록변호사가 2만명을 훌쩍 넘었다. 광복 이후 변호사가 1만명이 되는 데 100년이 걸렸는데, 2만명 되는 데 8년밖에 안 걸렸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5∼6년이면 3만명 된다. 공급과잉 문제가 심각하다. 지난해 변호사 배출 숫자에서 우리보다 인구가 많은 일본은 1810명인데 우리는 근 2500명이다.”

―변호사 수가 늘면 국민에게 더 많은 법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지 않나.

“그건 이상적인 말이다. 현실적으로는 재작년 로스쿨 출신 변호사시험 합격자 중에 아직 취업 못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수습 때 100만원 받고 일했던 변호사가 정식 채용이 안 돼서 계속 100만원을 받고 있는 경우도 있다.”

―고급 인력인데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제대로 활용할 방안은 없나.”

“지금은 국가소송을 변호사 자격 없는 공무원이 수행하고 있는데 이래서는 국가가 패소할 확률이 높다. 미국에서는 행정부 안에 변호사 일자리가 많다. 국가가 당사자인 소송은 변호사 자격 있는 사람이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행정부 공무원들이 반대한다. 자기네 밥그릇이니까. 노무현정부에서 가동됐던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행정부 내 법무담당관을 변호사 자격이 있는 자로 임명해야 한다는 법안을 발의한 적이 있다. 이 법안은 행정부 법무담당 공무원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해서 무산됐다.”

―변호사들이 너무 좋은 일자리만 찾아다니는 것 아닌가. 공익적 일자리도 있는데.

“실상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월 200만원 준다고 해도 달려올 변호사들이 많다. 실제 변협 관련 재단에는 월 200만원 받고 일하는 변호사가 있다. 지금은 그런 자리도 없다는 게 문제다. 얼마 전에 부산시에서 7급 계약직 변호사를 공채했다. 초창기엔 격이 떨어진다고 해서 7급엔 지원하지 말자는 움직임도 일부 있었지만 지금은 간다. 일자리가 없으니까.”


―행정부에서 변호사 직역을 확대하면 사법시험은 폐지해도 되나.



“사시와 로스쿨은 다른 문제다. 서민의 아들딸이 판검사도 되고 변호사도 될 수 있는 ‘희망의 사다리’를 남겨놔야 한다. 사시 존치는 서민 정책이다. (책상 서랍에서 편지 한묶음을 꺼내보이며) 고등학생들이 내게 보낸 편지들인데, 집안이 가난해서 로스쿨엔 갈 수 없지만 꼭 법조인이 되고 싶다는 내용이 담겨있다.(하 회장은 농부의 아들이다)”

―실력 없는 로스쿨 졸업생이 판사나 검사로 임용됐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인가.

“판검사 임용뿐만 아니라 일류 로펌에 들어간다든가, 사시 1차도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 로스쿨을 거쳐 판사가 된 케이스가 있다. 자격 미달자가 유명 로펌 ×××에 들어가 있고,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로스쿨 출신이 치르는 변호사 시험 합격자는 성적을 공개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로스쿨 출신을 법관으로 채용하고도 누굴 판사로 임용했는지 공개를 안 한다. 이러니 로스쿨 제도 자체의 공정성이 의심받는 것이다. 임용 즉시 공개해야 한다.”

―로스쿨 출신과 사시 출신 사이에 갈등이 심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서로가 상대 탓에 피해를 봤다고 생각한다. 사시 출신은 로스쿨 출신 때문에 자기 일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로스쿨 출신은 반대로 연수원 출신 때문에 제대로 대접을 못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변협이 ‘김영란법’(공직자의 금품수수 및 부정청탁 방지 등에 관한 법률)에 대해 헌법소원을 냈다.



“김영란법 자체는 환영한다. 검사가 벤츠를 받아도 처벌받지 않는 현실은 바꿔야 한다. 그런데 위헌적 요소가 있다. 왜 법 적용 대상에 언론인을 포함하나. 내가 대한변협 신문 발행인이고 변협 공보이사가 편집인이다. 우리처럼 정부 예산 한 푼도 받지 않는 민간 언론이 왜 김영란법의 적용 대상이 되어야 하나. 본래 김영란법은 공직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언론은 공공성이 강한 곳이어서 들어간 것 아닌가.

“그런 논리라면 언론 외에도 들어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시민단체도 들어가야 하고, 의료·법률·공기업도 다 포함해야 한다. 국회의원은 공무원인데 왜 빠졌나. 한마디로 과잉입법이다.”

―‘법관평가제’가 호평을 받고 있다. 어떤 식으로 운용하고 있나.

“사건 담당 변호사가 항목별로 재판장을 평가한다. 판사가 “늙으면 죽어야지”, 이런 발언을 하면 밑에다가 적게 돼 있다. 평가표를 모아서 점수를 매긴다. 지금은 인터넷, 모바일로도 평가한다. 베스트(best) 법관 10명씩 뽑아서 발표한다.”


―워스트(worst) 법관을 공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난해 그러려고 했는데 난리가 났다. 대신 법원이 자체적으로 법관 평가를 인사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3년 전 워스트 법관 한 명은 승진에서 탈락했고 사법연수원 성적이 좋아서 승진 대상이었는데 전보 조치된 사례도 있다. 법관 평가 이후 법정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검사도 사실상 견제받지 않는 권력인데 평가해야 하지 않나.

“사실은 검사 평가가 더 중요하다. 예전에는 검사가 피의자를 조사할 때 구타도 했다. 지금도 헌법에 보장된 피의자 변론권이 침해되고 있다. 인권 침해 요소가 있었는지, 회유·압박이 있었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올해가 영국 귀족들이 왕을 굴복시켜 승인 받은 ‘마그나카르타(대헌장)’ 제정 8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정확히 800년 되던 지난 2월23일 변협 회장에 취임했다. 소명으로 알고 검사 평가도 정착시키겠다.”

대담=조남규 사회부장, 정리=김민순 기자, 사진=이제원 기자

◆ 하창우 회장은

▲1954년 경남 남해 출생 ▲경남고, 서울대 법대 졸업 ▲사시 25회, 변호사 개업(1986) ▲서울지방변호사회 총무이사(1997), 대한변호사협회 공보이사(2001), 대검찰청 검찰개혁자문위원(2003), 법무부 법무행정혁신자문위원(2005), 방송위원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방송심의위원(2006), 서울지방변호사회장(2007),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저서 ‘하창우 변호사의 변호사 길라잡이’


검찰이 모처럼 제대로 된 칼을 빼들었다.

 세계일보가 지난달 26일 포스코건설 비자금 조성 의혹을 단독 보도한 이후, 정부는 전광석화처럼 대응했다. 포스코 수사에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가 실렸다는 얘기도 들린다. 선친의 혼(魂)이 깃든 포항제철(포스코)이 역대 정권마다 복마전을 이뤄왔으니 뜬소문은 아닐 것이다. 언론은 집권 3년차에 접어든 정부가 다목적 포석으로 사정(司正) 정국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해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모두 이번 수사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김진태 검찰총장


 본질은 검찰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대기업 비리, 자원비리, 방산비리 수사가 대한민국 공동체를 좀먹는 ‘거악(巨惡)’과의 싸움이라는 점이다.
 포스코가 조성했다는 그 비자금이라는 것이 어떤 돈인지, 어떻게 쓰였는지, 국민은 이제 검찰 이상으로 잘 알고 있다. 전직 대통령부터 대기업 총수까지 연루됐던 그 숱한 비리 사건들을 지켜봤던 국민은 이제 비자금이라면 물릴 만큼 물렸다. 성실히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에게 수백억, 수천억에 달하는 비자금 보도는 애써 다잡아 놓은 마음 한 귀퉁이를 무너뜨린다. 이럴 때마다 왜 싱가포르가 부정부패 사범을 극형에 처하고 있는지 십분 공감하게 된다. 싱가포르 성공의 열쇠는 사회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예외없는 법치다. 바로 이 지점에 검찰의 존재 의의가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한민국 검찰은 그동안 국민의 편에 서서 정의를 구현해온 조직이란 믿음을 주지 못했다. 기자로서 오랫동안 검찰을 지켜본 경험에 비춰보면 대한민국 검사는 사명감이나 능력에서 다른 어떤 나라의 검사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왜 국민은 검찰을 경원시할까. 이웃 일본 검찰의 역사가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정치 권력과의 관계라면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의 검찰은 정치권력에 예속돼 있어야 정상이다. 그 나라에선 1954년 이른바 ‘조선(造船)의혹 사건’ 당시 정치인 법무상이 검찰총장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발동, 훗날 총리(한국의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실세 정치인에 대한 수사를 무력화시킨 일도 있었다. 그렇지만 일본 검찰은 1976년 정치권력의 압박을 이겨낸 끝에 현직 총리(다나카 가쿠에이)를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시키며 조선의혹 사건의 패배를 설욕했다. 일본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받기까지는 각고의 노력과 분투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 검사 중에도 권력을 좇는 해바라기형 인사들이 없지 않았지만 대다수 검사는 국민의 검찰로 남았다.
 일본 검찰이 사표(師表)로 삼고 있는 이토 시게키 전 검찰총장은 “검사는 소박한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서민이 무엇으로 고통받고, 무엇을 갈구하고 있는지 그것을 피부로 느낄 수 없으면 우수한 검사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쁜 놈, 그중에서도 숨겨진 거악은 절대로 발 뻗고 자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어록도 남겼다. 그는 ‘미스터 검찰’이란 명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여기까지 쓰다 보니 좀 지나쳤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 검찰이라고 왜 이토 같은 검사가 없었을까. 우리가 그런 인재를 끝까지 키워내지 못하고, 검찰 조직 스스로 그들을 지켜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김진태 검찰총장은 행운아다. 법조 출입 기자 시절인 1990년대 중반, 대검 중앙수사부 검사이던 김 총장이 수월 스님의 행적을 담아 펴낸 수필집 ‘달을 듣는 강물’을 읽었다. 그 책은 흔들리며 30대를 살아가던 기자에게 큰 울림을 줬다.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검사로 성장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최근 사회부로 복귀한 뒤에야 김 총장이 ‘고독한 칼잡이’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왠지 그와 어울리는 별칭 같다. 요즘 유행어를 빌리면, 나름 ‘에지(edge)’도 있다. 달을 듣는 강물처럼 살아간다면 좀 고독해져도 견딜 만하지 않을까. 김진태 검찰의 건투를 빈다.

조남규 사회부장

 

*사실 이 칼럼을 쓸 때만 해도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정치권 금품 로비 의혹을 폭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줄은 예상도 못했습니다. 세계일보 특종으로 시작된 검찰의 부패 수사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입니다. 특별수사는 시작은 알 수 있어도 끝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한국일보 정병진 논설고문이 '성완종 리스트' 수사와 관련해서 게재한 칼럼이 저의 칼럼과 일맥 상통하는 것 같아서 소개합니다.

 

한국일보 2015년 4월18일자

[정병진 칼럼] 아이 엠 쏘리, 나는 총리다

‘아이 엠 쏘리(I’m Sorry)’라는 컴퓨터게임을 새삼 기억한다. 1970년대 후반이었으니 당시 유행했던 ‘벽돌 깨기’나 ‘갤러그’ 수준이었다. 주인공이 미로와 같은 길을 돌아다니며 금괴를 훔쳐서 집에 쌓는 게임이다. 통나무 같은 장애물이 나타나면 피하거나 뛰어넘어야 하고, 철문이 가로막으면 주먹으로 쳐부수고 나가야 한다. 훔치는 금괴의 양에 따라 점수가 높아지고, 주인공의 집은 점점 더 화려해 진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 게임은 일제(日製)였는데,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까지 유행이 번졌다. 게임의 원래 제목은 ‘나는 총리다(私は總理)’였으나 국제적으로 유행하는 과정에서 총리의 일본 발음이 ‘쏘리(そうリ)’인 까닭에 ‘아이 엠 쏘리’로 바뀌었다고 했다. 당시 일본을 뒤집어 놓았던 ‘록히드 뇌물수수 사건’을 패러디 한 것이었다니, 일본 국민의 자괴와 분노를 짐작할 만하다. 일본 국민 전체가 국제사회를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했던 셈이다.

1976년 미국에서 록히드 항공사가 많은 국가의 유력한 권력자들에게 뇌물을 뿌렸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독일과 네덜란드 등 유럽국가 인사들도 포함돼 있었으나 일본에서 유난히 큰 사건으로 비화한 것은 뇌물을 받은 사람이 당대 최고의 권력자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英)였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사건이 폭로되었을 때 일본 총리는 미키 다케오(三木武夫)였지만, 일본정치의 특성 때문에 당시 국민들이 느끼는 실질적 최고 권력자는 다나카 전 총리였다. 다나카 전 총리는 구속됐다.

우리 표현으로 ‘현직 왕(王)총리’를 구속한 일본 검찰은 이후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강직하게 본분을 다하는 검찰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당시 검찰총장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한 마디의 말로써 검찰조직의 방패막이가 돼 주었고, 수사팀장 검사장은 “수사가 난관에 부딪힌다는 이유로 망설인다면 앞으로 20년 동안 우리 검찰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사건이 검찰의 손을 떠난 뒤 정치적 마무리가 흐지부지 됐던 것은 일본의 정치구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구속된 지 한달 만에 보석금을 내고 출소했으며 이후에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재판은 지지부진했고 판결은 미뤄졌다. 1993년 12월 그가 사망한 이후 상고심이 재개됐고, 14개월 뒤인 95년 2월에야 사망한 사람에게 수뢰혐의를 최종 인정했다. 하지만 ‘다나카-록히드 사건’은 법과 원칙을 지킨 일본 검찰의 위상과 ‘아이 엠 쏘리’라는 일본 국민의 각성과 사과를 전 세계에 남겼다.

당시 일본 검찰이 ‘왕총리’를 잡아들일 수 있었던 배경은 두 가지 정도로 알려져 있다. 우선 들끓었던 민심이었다. 국민 모두가 ‘국제적으로 창피하여 고개를 들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나는 총리다’ 패러디가 일본 열도를 휘저었던 이유다. 다른 하나는 당시 같은 당 소속의 미키 총리가 수뢰사건 수사를 완전히 방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건의 모든 증거와 증언들이 미국에 있었고, 길거리에서 승용차끼리 접촉해 돈을 주고받았다는 정황 정도가 애초 드러난 단서였다. 검찰로서는 ‘수사가 난관에 부딪혀 망설여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분명했다. 하지만 검찰은 ‘앞으로 20년 동안 잃게 될 국민의 신뢰’를 염려했기에 최고 권력에 대한 수사의 끈을 다잡아 갔다.

30여년 전 ‘다나카-록히드 사건’을 다시 들춰본 것은 지금의 상황에서 너무나 뚜렷한 데자뷰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국민들의 마음은 ‘창피해 죽겠다’는 자괴감을 넘어 ‘미워 죽겠다’는 증오감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같은 당에서도 수사 방치(?) 수준을 넘어 적극적인 협력도 아끼지 않을 태세다. 수사 대상도 일본 ‘왕총리’에 비하면 덜 껄끄럽고, 증거나 증언, 정황도 훨씬 풍부해 보인다. 현재 우리 검찰의 입장이 1970년대 일본 검찰의 입장보다 여러 면에서 여건이 좋다는 얘기다. 우리 검찰의 분발을 기대한다.

정병진 상임고문 bjjung@hk.co.kr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심훈, ‘그날이 오면’)
광복은 부활이었다. 자주 독립의 희망이 삼천리 방방곡곡에 흘러 넘쳤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냉전의 대리 전쟁터로 변했다. 아름다운 우리 강토는 쑥대밭이 됐다.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났다. 그렇게 70년이 속절없이 흘렀다. 광복의 기쁨에 더덩실 춤을 췄던, 전쟁과 분단의 세월을 온몸으로 견뎌낸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고 있다. 광복 70년의 의미와 교훈을 얻기 위해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만났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의 손자인 이종찬(79) 전 국정원장은 “해방 정국에서 백범 김구 선생과 우남 이승만 박사가 협력했다면 지금처럼 보혁 갈등이 심화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못내 아쉬워했다.

이 전 원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이 전 원장의 작은할아버지)의 끊임없는 설득 덕에 백범은 어느 정도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할 마음을 굳혔다”는 비사를 공개했다. 그는 “이시영 선생은 ‘내가 부통령직을 맡고 있지만 나이(80)가 너무 많다. 이제 당신이 하라’는 식으로 백범을 설득했다. 그러던 와중에 백범이 암살당했다. 안타까울 따름이다”고 말했다.

이 전 원장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데다 임정 요인들이 중국에서 귀국했을 때 미국 유학파들을 중심으로 한민당이 조직돼 그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면서 “하지만 임시정부에게는 국민적 지지가 있었던 만큼 이를 바탕으로 한민당과 화합을 하는 것이 옳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데 백범은 다들 알다시피 외골수였다. 백범 입장에서는 귀국하자마자 ‘일제 때 해먹던 놈들이 또 해먹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백범과 한민당은 틀어졌다”면서 “백범은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 없이 우국충정만 있었다”고 말했다. 그 시점에 이시영의 설득으로 백범이 남한 단독정부에 참여하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암살당했다는 것이다. 김구를 임시정부 주석으로 추대한 이시영은 김구의 멘토 같은 존재다. 이 전 원장은 “김대중정부 시절 김 전 대통령과도 해방 정국에 대한 토론을 많이 했는데 김 전 대통령도 ‘당시의 정치인이었다면 백범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라고 권했을 것’이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이 전 원장과의 인터뷰는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우당기념관 접견실에서 진행됐다.

김대중정부의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79) 우당장학회 이사장은 광복을 중국 상하이에서 맞았다. 그의 조부인 이회영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직후인 1910년 12월 아들 이규학(李圭鶴·이 전 원장 부친) 등 가솔 60여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회영 일족은 만주 등을 거쳐 1919년 상하이로 거처를 옮겼고 1936년 4월29일 그곳에서 이 전 원장이 태어났다. 이 전 원장은 지금도 자신을 농담조로 ‘상하이방(上海幇)’이라고 부른다. 그는 상하이에서 광복의 소식을 들었다. 이 전 원장 가족은 46년 5월 꿈에 그리던 조국에 돌아왔다. “배가 상하이 부두를 지나 서해를 건너 제주 근방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산이란 것을 봤다. 그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 전 원장은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봤으며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정부의 주역으로 활동하며 현대사의 산 증인이 됐다.

―광복을 어떻게 맞았나.


“미국이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1945년 8월9일)한 다음 날이었다. 집에 돌아와 잠시 머물었던 아버님(이규학)을 누가 찾아왔다. 꼭 베트남의 호찌민처럼 빼빼 마른 사람이었다. 그분이 바로 정화암(鄭華岩) 선생이었다. 정 선생은 항일전선에서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많은 일본 고위간부와 친일파를 처단한 대담한 분이었다. 그러나 외모로는 가냘프기 짝이 없는 분이었다. 아버님과 정 선생은 골방에 들어앉아 무언가 숙의를 했다. 그때 이미 아버님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고문 끝에 청각을 거의 상실한 몸이었다. 그러므로 자연 필답으로 밀담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두어 시간의 대화가 끝난 후 정 선생은 바람처럼 훌쩍 떠났고, 아버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자! 이제 우리도 곧 고국에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정 선생은 이미 일본의 패망을 알고 아버님과 여러 가지 사후 문제를 논의한 것이었다. 내가 골방에 들어가 보니 재떨이에 종이를 태운 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정 선생이 아버님을 찾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후 며칠 안 되어 목 매도록 기다렸던 일본의 패망의 날이 왔다. 나의 부모님은 1910년에 중국에 망명한 이래 내내 객지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조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국이었다.”

 

1945년 11월5일 환국 길에 상하이를 찾은 임시정부 요인들. 당시 아홉살이던 이 전 원장(원 안) 뒤로 백범 김구
―광복 직후 상하이의 풍경은.


“일본군이 물러나니 제일 먼저 한인교민회가 조직됐다. 하지만 교민회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없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일단 돈이 없지 않나. 쫓겨 다니다 보니 인맥도 넓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에 붙어서 장사를 하고 심지어 아편을 팔던 사람들까지도 앞장서서 한인교민회를 만들어 돈을 내는 등 표변했다. 아버님은 ‘그 사람들끼리 노는 것’이라며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가족도 나름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만끽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집에 많이 몰려왔고 아버지의 즐거워하는 모습도 자주 보여 ‘이게 해방이구나’ 싶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광복군 선견대가 상하이에 들어왔다. 광복군 선견대는 기존 교민회를 인정하지 않았고 새로 교민회가 구성됐다. 여기에는 아버님도 참여했다.”

 

1974년 주영 대사관 참사관 시절, 부인 윤장순씨와 함께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 길에 상하이에 들렀다. 기억나는 일들을 얘기해 달라.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을 다시 찾았지만 국제 정세는 우리에게 즉각적인 귀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버님은 끊임없이 충칭의 임시정부와 통신을 하였지만 사후 정리할 것이 있으므로 귀국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뿐이었다. 1945년 10월이나 되어서 임시정부 요인 일행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배려로 그의 전용기편으로 상하이까지 왔다. 상하이에 있었던 일가들, 교포들은 밤을 새워서 태극기를 만들고 환영 준비에 바빴다. 상하이 비행장에서 우리는 임정요인 일행을 맞이했다. 나는 당시 백범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작은 할아버지인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유림 등 여러 선생들을 만났다. 임정 요인들이 상하이에 머물다가 마지막으로 작별하고 조국으로 돌아가시는 전날 저녁 가족들은 모두 모였다. 당시 김구 주석의 연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김 주석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대통령 나사복(羅斯福·루스벨트)이가 영국 수상 구길(球吉·처칠)이를 만나서 조선독립을 확약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젊은이들이 모두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김구 주석이 영어를 모르니깐 미국 대통령이나 영국의 수상 이름을 한국식으로 부른 것이 우습다는 것이었다.

 

1945년 11월5일 상하이 공항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을 마중나간 이종찬 전 국정원장(앞줄 오른쪽, 왼손에 태극기를 든 소년) 일가. 후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는 이시영 선생(앞줄, 중절모에 지팡이)이 아들과 조카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고 있다.
우당기념관 제공
김구 주석은 희망에 찬 말을 남겼다. ‘이제 여러분들이 조국에 돌아오면 옛날 조국이 아니라 민주적인 나라, 행복한 나라가 여러분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우레 같은 박수로 그분의 연설을 환영했었다. 김 주석의 주변에는 쟁쟁한 요인들이 모두 배석했었다. 30년간 임시정부를 지키신 이분들이야말로 장차 한국을 지도해 나가실 어른들이고, 모두가 하나같이 내 눈에는 바위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불과 5년 후에 대부분이 북한군에 의하여 납북되어 비명에 가실 줄이야….


 

1986년 국회 외무위원 시절 참석한 삼일절 행사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 이후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미국이 충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땐 비행기가 미군 비행기밖에 없었기 때문에 충칭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임시정부 자격으로 활동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라고 했다. 결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가 왜곡된 첫 번째 단서라고 볼 수 있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교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이 김포 비행장에서 고국 땅을 밟았을 때 환영객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1988년 이시영 부통령 동상 옆에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군은 연합군 자격으로 참전하지 않아 임시정부가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분석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광복군을 조직해서 대일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훈련하는 도중 원자폭탄으로 전쟁이 일찍 끝났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국내 진공작전을 펼칠 수 있었지만 그 전에 종전이 돼버렸다. 그래서 미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들어와서도 푸대접을 받았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우당기념관 집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중국 상하이에서 맞은 광복의 순간을 회고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해방 정국의 이승만 박사를 평가한다면.


“정치적 안목과 정보력에 있어서는 역대 대통령을 통틀어 이승만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정치고문인 미국의 로버트 올리버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국제정세를 파악했다. 올리버는 편지를 통해 소련, 북한의 동향을 상세히 알려줬다. 당시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진주하자마자 인민위원회를 조직해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정부를 세우지 않았다면서도 사실상 정부가 할 일을 한 셈이다. 이때 이승만은 ‘통일이 되기엔 이미 늦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주장한 ‘정읍 발언’도 이 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현재 이 박사가 정권 욕심 때문에 정읍 발언을 했다고 매도하는 말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시점에서 ‘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위에서 밀고 내려오겠구나’ 하는 경계심이 낳은 발언이라고 본다.”

―백범과 이승만이 화합했더라도 분단은 불가피하지 않았나.

“그렇다고 본다. 이미 소련이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세우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불가피했을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보혁 갈등은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았을까. 요즘 백범 노선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그의 노선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당시 백범이 시도한 남북협상은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공산주의 노선과는 이미 타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김일성이 백범을 이용하려 했다고 보는 게 맞다.”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와 함께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바로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승만은 ‘정부 수립 대통령’이지 건국 대통령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국회의장으로 직접 대한민국 국회 개회사를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리 민국은 기미년(1919년)부터 시작됐다. 민국 연호는 기미년으로부터 기산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지만 최근 나오는 ‘건국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임시정부부터 따진 게 아니지 않나. 따라서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를 한다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어떤 뜻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는지 모르고 주장하는 것이다. 국회 개회사뿐만 아니라 관보 등에서도 이승만은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봤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초 “친일파 주도로 이뤄진 대한민국 건국으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불의(不義)가 정의(正義)를 눌러온 역사”라고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그런 평가에 100% 동의하지 않는다. 김 전 대통령과는 이 주제로 놓고 토론을 많이 했는데 김 전 대통령도 ‘당시의 정치인이었다면 백범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라고 권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중국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오쩌둥(毛澤東)을 평가한 ‘공칠과삼(功七過三)’을 말하고 싶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초기의 이승만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인의 장막에 둘러싸이고 권력에 취하면서 말로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분명 공도 무시할 수 없다.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나는 박정희를 나쁘게 보지 않는다. 유신 등의 엄혹한 시절이 있었지만 공도 따져야 한다. 이후의 권력들도 마찬가지다. 권력뿐 아니다. 모든 역사 평가를 편협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파 인명사전이 4000명 이상을 친일파로 분류한 것은 과하다는 생각이다. 참고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친일파 명단은 7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친일파 기준의 적용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당시의 계급에 따라 선을 긋는 것은 역시 잘못된 일이다. 행적을 평가해서 친일파 여부를 가려야 한다. ”

―친일파의 범위를 너무 넓게 잡았다는 의미인가.

“행동이 얼마나 악질적이었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의암 장지연 선생 같은 분까지 친일파에 포함하면 민족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무조건 친일 명단에 넣고 본다면 ‘독립운동가가 소수고 친일파가 많았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게다가 일본이 이것을 두고 ‘친일파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한국도 식민지배를 바랐다는 뜻이 아니냐’고 역논리를 펼 수도 있다.”

 

1992년 한·영의원친선협회 회장 시절 영국 찰스 왕세자로부터 훈장을 수여받는 장면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방식을 놓고 외교독립론, 무장투쟁론, 실력양성론이 충돌했다.


“세 가지 노선이 서로 이질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특히 외교독립, 무장투쟁 노선은 같이했어야 옳았다. 예를 들면 아일랜드 독립운동은 IRA(아일랜드공화국군)와 신페인당이 함께 움직였다. 신페인은 IRA의 정당조직으로 외교교섭과 무장투쟁을 병행했다. 무장 없이 외교만 하자는 것도 문제고, 외교로 무엇이 되겠나 하면서 경시하는 입장도 문제다. 그러다 보니 양쪽 노선 모두 아무 것도 안 됐다. 외교와 무장이라는 두 개의 바퀴를 만들어 같이 돌렸어야 했다. 실력 양성도 중요하다. 다만 실력 양성을 친일의 변론으로 삼는 것은 안 된다. 주체적으로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어야 한다. 실력 양성이 잘못하면 일제와 협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당시 셋 모두를 적절히 배합하는 리더십이 없었다는 점이 아쉽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소회는.

“올해는 광복회가 생긴 지 50년째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최근 광복회 50주년 행사가 열렸다. 광복 70주년인데 광복회 창설 50주년이라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그 20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나. 해방되고 3년 동안 미 군정의 통치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전쟁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광복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해야 할 인물들이 학살당하거나 끌려간 뒤 이름 없는 산하에 묻혔다. 이런 비극을 바로잡으려면 역사가 바로 서야 한다. 독립운동을 했던 위인들은 대부분 삼대가 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중에 나라가 다시 위기에 빠지면 누가 저항하려 하겠나. 광복회가 할 일은 이런 절망을 이겨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후손들에게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는 것이 먼저다. 친일파 후손들은 대한민국이 1948년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1919년 3·1 독립선언을 통해 최초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한다고 밝혔고 그 선언이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이 의지를 이어나가는 것을 광복회의 지상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6형제 가족 40여명 다함께 독립운동 위해 해외로 망명…‘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

 

“동서 역사상 국가가 망할 때 나라를 떠난 충신·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가족 40여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일제히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6형제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이관직은 ‘우당 이회영(사진) 실기(實記)’에서 우당 일가의 만주행을 극찬했다. 백사 이항복을 비롯해 영의정만 셋을 배출한 이회영 가문은 삼한갑족(三韓甲族)이었다. 나라가 멸망하고 이른바 권문세가 다수가 일제의 작위를 받고 친일파가 되었을 때 이회영 일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해외로 망명했다. 서양식으로 표현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다.

이회영 형제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사 비용을 위해 경작하던 위토까지 처분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달 초 덕수궁 중명전에서 열린 ‘우당 이회영과 6형제’ 전시회 특별강연에서 “우당 가문은 현재 명동 인근에 1만여평 토지를 보유했다. 굳이 계량해 보자면 오늘날 2조원은 넘는다”며 “그 외에도 개성, 양주 등 전국에 소유한 토지 266만여 평과 드러나지 않은 재산의 가치를 합하면 10조원에서 수백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모두 썼다. “우당 집의 밥을 얻어먹지 않은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우당의 6형제 중 다섯째 이시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복을 보지 못하고 중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대소가와 권속 6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넜지만 해방을 맞아 고국 땅을 밟은 이는 20명 남짓이었다.

 

대담=조남규 사회부장, 정리=이우중 기자

 

*아래는 조선일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가 2017년 8월31일자 조선일보에 '만주로 떠난 이회영 형제와 투사의 아내 이은숙'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글.  

[박종인의 땅의 歷史] 만주로 갔느니라… 목숨을 바쳤기에 떳떳했느니라

이은숙의 혼례

1908년 10월 20일 서울 명동 상동교회에서 열아홉 살 규수 이은숙이 마흔한 살 먹은 사내 이회영과 서양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첫 아내와 사별한 이회영은 두 번째 결혼이다. 평안도 암행어사와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넷째 아들이다. 2년 전 별세한 고관대작 가문에 출가했으니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비단옷 입고 살겠지, 라고 남들은 생각했다.

2년 뒤 이회영 집안은 물론 시아주버니 건영과 석영과 철영, 시동생 시영과 호영까지 여섯 형제 집안이 문중 땅 수백만 평을 일시에 다 팔고서 한꺼번에 만주로 떠났다. 식솔이 예순 명에 달했고 마차가 열 대가 넘었다. 1910년 경술년 12월 30일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고 넉 달이 지난 엄동설한 동지섣달이었다. 단순한 이사 혹은 이민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을 위한 집단 망명이었다.

경술국치와 집단망명

1910년 8월 29일 이름만 남아 있던 나라, 대한제국이 이름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많은 고관대작과 지식인은 일본에 빌붙어 권세를 얻었고, 또 많은 사람들은 투쟁을 택했다. 민영환처럼 1905년 을사늑약 때 자결한 사람도 있었고 매천 황현처럼 경술년 국치 때 자결한 사람도 있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한편에는 우당 이회영의 묘가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한편에는 우당 이회영의 묘가 있다. 아내 이은숙과 합장이라고 새겨져 있지만, 이회영의 유해는 없다. 허묘다. 이회영은 전재산을 털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인 여섯형제의 넷째다. /박종인 기자
'스스로 죽어서 일본을 이롭게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지식인들은 망명을 택했다. 을사늑약 때 거리에서 바위에 머리를 찧어 자살 미수에 그쳤던 이상설이 그랬고(백범일지), 경상도 안동의 지사 석주 이상룡이 그랬다. 이상룡은 궁궐 같은 99칸짜리 임청각을 버리고 온 가족이 만주로 떠났다. 이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총독부 요시찰 인물, 불령선인(不逞鮮人) 목록에 올랐다. '푸테이(不逞)'는 '고집 세고 반항하는 놈'이라는 뜻이다.

대신 '착한' 조선인에게는 상을 주었다. 합방에 공헌한 고관대작들에게는 귀족 작위와 돈을 내려주었다. 지역 양반들에게도 효자, 효부상을 듬뿍 내렸다. 온 나라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재인용). 고관대작 가문에 갑부였던 이회영 형제는, 망명을 택했다.

이회영 형제의 망명

'사람들은 우리를 공신의 후예라 한다. 괴변으로 한반도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명문 호족으로서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지 않고 구차히 생명을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왜적과 혈투하시던 조상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하니, 여러 형님과 아우님들은 따라주시기를 바라노라.' 형제들을 모아놓고 이회영이 이리 말했다.(이관직, 〈우당 이회영 실기〉) 이회영 형제는 조선 초 정승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다. 모두가 그를 따랐다.

우당 이회영(1867~1932).
우당 이회영(1867~1932).
먼 친척 백부인 이유원에게 양자로 간 둘째 이석영은 갑부였다. '양주 가오실에 별장이 있는데, 서울에서 거리가 80리였다. 80리 왕래하는 길이 모두 그의 밭두렁이라 다른 사람 땅은 단 한 평도 밟지 않고 다녔다.'(황현, 〈매천야록〉)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왕현종에 따르면 남양주 화도읍 가곡리에 있던 땅은 640정보, 192만 평에 달했다. 서울 명동에도 형제들 땅이 산재했다. 1960년대 한 조사에서 600억원에 이른다는 추정이 나온 적이 있다.

그 땅을 팔고, 못 판 땅은 버리고서 이 갑부 집안 6형제가 만주벌 북풍 속으로 떠난 것이다. 월남 이상재가 이렇게 말했다. "6형제 전 가족이 한마음으로 결의했으니, 동포의 모범이 되리라."(우당 이회영 실기)

처분하지 못한 명동 땅은 총독부 토지조사를 거쳐 남의 땅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주소로 경기도 경성부 황금정 2목 164번지 591평도 이 형제들 땅이었다. 현재 을지로 2가 164번지 부근이다. 서울 YWCA회관 북쪽이다. 회관 소공원에는 이회영의 흉상이 서 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독립운동에 조직과 자금은 필수다. 이회영 형제가 바로 그 일을 했다. 형제는 이듬해 4월 안동 선비 석주 이상룡과 함께 유하현 삼원보에 경학사를 설립했다. 밭을 갈아 생산을 하고(耕) 교육을 하며(學) 군사력을 키우는(武) 결사체였다. 사장은 이상룡, 내무부장은 이회영, 재무부장은 오랜 동지인 이동녕이 맡았다. 이상룡이 쓴 취지문은 이렇다. '한 삼태기 흙이 쌓여 태산을 이룬다. 힘을 축적해서 끝장에 대비할 것이다.'(우당 이회영 실기)

그리고 이듬해 여름, 이석영의 자금을 털어 구입한 인근 합니하 산속에 본격적인 독립운동 교육기관이 설립되니, 8년에 걸쳐 3500명에 이르는 항일투쟁 지도자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같은 만주 항일투쟁의 불꽃을 지핀 운동 기지였다. 교장은 셋째형 이철영이 맡았다. 3·1 운동 이후에는 해마다 입교를 원하는 조선 청년이 600명에 이르렀다. 3년 만에 자금이 바닥났다.

독립투쟁의 중심에서

신흥학교 설립 후 자금난에 빠진 이회영은 1913년 서울에서 돈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다 1918년 이회영은 왕실 시종 이교영을 통해 고종 망명을 기도한다. 일본의 귀족 작위를 거부했던 전 내부대신 민영달이 5만원을 댔다. 동생 이시영이 이 돈으로 북경에 고종 거처를 마련했다. 그런데 이듬해 1월 20일 고종이 급서했다. 식혜를 들이켜고 죽었다고 했다. 독살당했다는 말이 돌았다. 그날 왕실 당직자는 이완용이었다. 훗날 사학자 이증복은 조선 남작 작위를 받은 한창수와 시종관 한상학을 독살범으로 지목했다. 또 다른 친일파 윤덕영이라는 설도 있다.

3·1운동 직전 이회영은 중국으로 돌아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회영은 "자리다툼에 분규가 끝이 없을 것이니" 행정조직이 아닌 투쟁본부를 만들자고 했다. 동생 이시영은 재무총장으로 임정에 참여했고 이회영은 무장투쟁노선을 걸었다.

이후 북경 자금성 북쪽 이회영의 집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로 북적거리는 사랑방이 됐다. '그 당시 국내에서 마음을 품은 인물 즉 청년들은 북경에 오면 반드시 나의 부친을 뵙게 되고 대개 우리 집에 거주하게 됐다.'(이회영의 아들, 독립지사 이규창, 〈운명의 여신(餘燼, '남은 재'〉) 이규창이 기억하는 사람들을 적으면 그대로 한국 독립운동 인물사가 된다.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 노선사가 된다. 민족주의,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모든 노선이 이회영의 북경 거처를 거쳐 나뉘었다.(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간난과 고초, 죽음

이회영이 최후에 입고 있던 옷.
이회영이 최후에 입고 있던 옷.
백여 명의 대가족을 이끄는 모습은 만주 원주민들에게는 장관이었다. 중국 육필 마차가 거의 백 차가 되니 대부호의 이동이다. 부호의 호화로운 행렬쯤으로 짐작했으리라.(이규창, 〈운명의 여신〉)

대의를 좇는 남정네를 따라가니, 여자들 간난과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회영이 서울로 간 사이 이은숙은 마적 떼에게 총을 맞고 6개월 된 아들 규창은 얼굴을 화롯불에 크게 데였다. 그 몸으로 이은숙은 큰딸 규숙과 젖먹이를 안고 업고서 신흥학교 학생들 밥을 지었다. '죽을 쑤는 때면 상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이은숙, 〈서간도시종기〉)

가난을 피해, 대의를 좇아 대륙 곳곳으로 흩어진 형제들은 고단하게 살고 고단하게 죽었다. 자금을 책임졌던 이석영은 굶어 죽었다. 맏형 건영도 병사했다. 신흥학교장 셋째 철영도 병사했다. 여섯째 호영은 아들과 함께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 아들 대도 대부분 해방 전 중국에서 죽었다.

이회영의 두 딸 규숙과 현숙은 고아원에서 산 적도 있었다. 아들 규창은 함께 살던 단재 신채호가 준 옷을 뜯어 만든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1925년 아내 이은숙이 돈을 벌기 위해 혼자 조선으로 돌아갔다. 고무신 공장 급료와 옷 수선으로 번 돈을 보내면, 그 돈으로 가족들이 연명했다. 삶은 매우, 아주 매우 신산하였다. '귀한 집 부인들이 이 같은 고생은 듣지도 못했을 것이어늘, 그러나 여필종부의 본의를 지키는 것이다.'(서간도시종기) 그러나 그해 작별한 남편을 이은숙은 영영 보지 못한다.

이회영의 죽음

이회영은 백정기, 정화암 등과 의기투합해 남화연맹을 창설했다. 요인 암살이 주된 임무였다. 1932년 11월, 윤봉길 의사 의거 후 투쟁의 중심지로 다시 만주를 택한 이회영은 상해에서 대련 행 여객선에 올랐다. 그런데 대련 항구에서 이회영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11월 17일 일본 경찰은 심문 도중 이회영이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시신 인수를 위해 찾아간 딸 규숙은 혈흔이 낭자한 얼굴과 역시 혈흔이 묻은 옷을 보았다. 동지들은 이회영이 고문사했다고 확신했고, 이회영을 밀고한 사람이 있다고 확신했고, 찾아냈고, 처단했다.

이회영의 손자인 우당장학회 회장 이종찬(전 국정원장)이 말했다. "밀고자는, 우리 할아버지의 조카 이규서다." 이회영의 아들 규창은 이석영의 둘째 아들인 사촌형 규서를 동지들에게 고발했고, 동지들은 이규서와 공범 연충렬로부터 자백을 받고 처단했다. 이종찬이 말했다. "집안 어른들은 창피하니 함구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역사는 떳떳해야 한다. 그때 우리 우국지사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 속에 투쟁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증거니까."
형제 가운데 다섯째인 이시영만 살아남아 해방을 맞았다. 이시영은 1945년 11월 9일 다른 임정 요원들과 상해 비행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눈물을 닦았다. 노혁명가, 노투쟁가가 울었다. 1948년 이시영은 대한 민국 초대 부통령이 됐다가 6·25전쟁 와중인 1951년 사퇴했다. 이시영은 서울 수유동 애국순국선열묘역에 묻혀 있다. 서울 신교동에 우당기념관이 있다.1946년 귀국한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1966년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를 탈고했다. 첫 문장은 이러했다. '이영구의 과거나 현재는 모두가 몽환(夢幻)이라.' 이영구는 남편 이회영이 지어준 이름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31/2017083100013.html

[광복·분단 70년, 대한민국 다시 하나로] "통일은 새로운 기회… 다가올 70년도 희망의 시대 열 것"

문정인 연세대 교수, 윤덕민 국립외교원장 대담, 사회=조남규 외교안보부장

한반도 통일과 선진국 도약이라는 미완의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를 풀어내기 위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세계일보는 광복·분단 70년의 성취와 미완의 과제를 반추해보는 연중 시리즈를 시작한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온 각계 인사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광복·분단 70년이 남긴 질곡의 현장을 찾아 남북과 동서로 갈라진 7500만 겨레의 힘을 결집할 수 있는 교훈을 모색해 본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와 윤덕민 국립외교원장은 각각 진보와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학자다. 문 교수는 김대중·노무현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인 햇볕 정책과 동북아평화번영 정책 설계에 참여했고, 윤 원장은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의 대북 정책 수립에 깊숙이 관여했다.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대북정책과 동북아 전략, 한반도의 미래 비전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의 시각은 조금씩 엇갈렸지만 지난 70년이 성공의 역사였으며 통일이 한반도의 새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희망의 과정이라는 인식에서는 하나였다. 말미에 이르러서는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는 저출산 고령화, 청년 실업, 양극화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문 교수와 윤 원장은 통일을 ‘새로운 돌파구’와 ‘또 하나의 프런티어’(신 개척지)로 명명했다. 대담은 우리가 지난 70년을 성공했으니 다가올 70년도 성공할 것이라는 희망을 확인하면서 마무리됐다. 대담은 지난달 16일 세계일보 서울 광화문 사옥 인터뷰실에서 진행됐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윤덕민 국립외교원장, 문정인 연세대 교수, 세계일보 김민서 기자,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광복·분단 70년을 맞았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격동의 70년을 회고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하나.

문정인 교수(이하 문 교수):과거에 대한 성찰, 현재 위상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진단, 미래로 나아가야 할 방향 설정이 이뤄져야 한다. 6·25전쟁 이후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루고 민주화까지 이뤘다는 점은 분명한 성과다. 동남아와 중남미에 우리보다 훨씬 오래전에 독립을 이룬 국가도 있지만 우리만큼 출중하게 변모한 나라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분단된 한반도는 군사적 대립과 갈등관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미완의 과제를 안고 있다. 선진국 경제가 맞닥뜨린 저성장·고실업·저소비의 ‘뉴 노멀(New Normal)’은 우리도 비켜가기 어렵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부상에 따른 지정학적 역학관계 변동 등 도전이 간단치 않고 불확실성이 너무나 크다. 남북이 하나 된 한반도를 만들어 분단을 극복함으로써 미·중과 중·일 갈등 사이에서 통일 한반도가 중심축 역할을 수행하며 동북아 평화를 이끌어야 한다.

윤덕민 원장(이하 윤 원장):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누렸으나 분단이라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분단은 현재 진행형이다. 문 교수님이 지적했듯이 세계 최빈국이었던 우리가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뤄 세계 10위권의 경제국가로 부상했고 세계 7위의 무역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성과다. 보편적 가치인 민주화를 우리 스스로 힘으로 이뤄낸 점은 엄청난 성과다.

-성공의 70년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도 이승만 초대 대통령 평가 등 현대사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윤 원장: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당시의 국제정세를 보면 1948년은 이미 동서 냉전 시기였다. 당시 소련의 움직임을 보면 남북 분단은 불가피했다고 봐야 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분단시킨 장본인인 양 여기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전 대통령이 국제 환경 흐름을 제대로 읽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문 교수:이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는 있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분단을 초래한 최대 원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당시 상황에서는 최선이었다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다. 건국에 대해서는 분명한 국민적 합의를 지니고 있다. 상하이(上海) 임시정부가 있었다. 중국을 비롯해 국제사회가 당시 인정한 임시정부였다. 1948년이 대한민국이 주권국가로서 공표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상하이 임정의 전통을 부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남북관계는 정권교체에 따라 냉온탕을 오갔다. 김대중, 노무현정부의 남북정상회담 성과물인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이 계승되지 않은 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문 교수:윤 원장이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웃음)

윤 원장:승계된 점도 있다. (웃음) 10·4 선언은 합의된 내용 가운데 현실성이 없는 것도 많았다. 무조건 다 이행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대통령 선거 몇 달 앞두고 남북정상이 합의를 하면 다음 정부가 전부 다 이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정부 나름의 성격이 있고 시대의 요구가 있으므로 어느 정도의 변화나 조정은 필연적이다. 박근혜정부는 기본적으로 그간의 합의를 인정하고 있다. 박근혜정부의 대북 구상인 한반도신뢰프로세스 자체가 그렇다. 지금까지 남북한이 합의한 것을 잘 지키자는 것이고, 신뢰를 쌓아 남북관계를 풀어나가자는 정신이다.

문 교수:10·4선언만 놓고 봐도 노태우정부 때부터 각 부처가 갖고 있는 사업을 모아서 만든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10·4 정상선언 후속 조치로서 남북총리가 45개 합의사항 만들면서 구체적인 사업결정 여부는 사안별로 추후 협의해 나가자는 합의를 했다. 어려운 것은 뒤로 미루고 쉬운 것부터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정부도, 이명박정부도 지속성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남북 문제 만큼은 정치 쟁점화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인도적 지원, 인프라 개발, 그리고 민족 동질성 회복 3가지를 핵심으로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구상은 사실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다. 박 대통령이 드레스덴 구상을 밝힐 때 “6·15와 10·4선언의 연속선상에서 이런 제안을 한다”는 대목이 들어갔다면 북한이 제도통일 또는 흡수통일 운운하지 않았을 것이다.

윤 원장:진보·보수의 대북정책이 마치 크게 다른 것처럼 비치지만 사실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을 예로 들면 그 원형은 노태우정부 때 만든 포용정책이다.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북한보다 경제력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랐을 때였음에도 흡수통일 정책이 아닌 포용정책을 표방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명박·박근혜정부에 이르기까지 북한을 흡수하겠다는 정책을 쓴 적이 없다. 북한 붕괴 가능성이 거론된 김영삼정부 시절에도 북한 붕괴 시나리오를 갖고 정책을 편 게 아니었다.

문 교수:동의하지 않는다. 예를 하나 들겠다. 과거 국가정보원에 대북 막후접촉을 담당하는 대북전략국이 있었는데 이명박정부 들어 와 폐지됐다. 대북침투와해 공작과 대공수사 기능만 강화됐다. 대한민국 헌법 자체가 평화통일을 지향하므로 북한을 압살하고 흡수하는 통일을 얘기를 할 수 없는 구조다. 그런데도 북한 붕괴론에 기초한 흡수통일론이 당시에 대세를 이뤘다.

윤 원장:이명박정부 시절 여러 번 정상회담을 시도하고 대북협상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만간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질 것 같다고 말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천안함 폭침 사건이 터졌고,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논의했는데 뒤통수를 맞았다. (북한이) 대화와 도발을 오가며 롤러코스터를 타는 상황이었다. 결국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김정은(국방위 제1위원장)으로의 후계 구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남북 관계를 북한이 정치적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윤덕민 원장(왼쪽)·문정인 교수

-박근혜정부는 원칙 자체를 중요시하는 지도력이다 보니 대북관계에서도 원칙에만 얽매여 있다는 지적도 있다.



윤 원장:여러 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국민 대다수는 남북관계가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과거처럼 우리가 불필요할 정도로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하는 것보다는 정상적 관계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적 바람이 있다고 본다.

문 교수:박근혜정부는 우리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나가지 않겠다는 것과 북한과의 협의는 공식 채널을 통해서만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런 것은 절차의 문제라고 본다. 대통령의 원칙은 국익 우선의 원칙이어야 한다. 윤 원장 같은 분이 대통령께 당국 간 공식 회담을 하되 비공식적으로 당국자 간 막후 접촉이나 물밑 접촉을 통해 사전에 조율하는 방안을 건의드렸으면 한다.

윤 원장: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을 계기로 젊은 층 가운데 북한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아진 것 같다. 이 문제를 매듭지으려면 북측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큰 틀에서 (천안함 폭침에 따른) 5·24 대북제재조치를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으나 장기적 관점에서 남북관계의 질적 발전을 생각한다면 5·24 조치는 문제의 원인이 된 점을 어느 정도 매듭을 지어야 더 탄탄한 남북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문 교수: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일단 천안함 건은 북한이 인정을 안 할 것이다. 따라서 북의 사과와 재발 방지를 전제 조건으로 한 남북관계 개선은 다분히 비현실적이다. 역지사지 입장에서 봐야 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결말이 날 것 같지 않다. 중국 얘기를 해보자. 지난 70년을 미국과 함께했다면 앞으로 70년은 중국과 같이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윤 원장: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가장 강력한 패권국가인 미국과의 동맹을 통해 운신의 공간을 만들고, 지역 내 안정과 균형을 만들어냄으로써 성공의 환경을 조성했다고 본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지역 내 균형이 깨질 때마다 대한민국은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의 부상은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으나 엄청난 도전이다. 두 개의 태양 아래 살 수 없으니 중국을 택해야 한다는 분도 있으나 과거 중화질서에 편입해 조공(朝貢)을 바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는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은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강력한 한 축이자 안전판으로 삼으면서 중국과도 전략적 협력 관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중층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면 된다. 중국이 너무 커져서 우리가 (미국과의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때가 올지, 안 올지 모르겠지만 내 생애에는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문 교수: 우리에게 가장 바람직한 관계 설정은 경제는 중국과, 안보는 미국과 손잡는 양면전략이다. 문제는 미·중 두 나라가 우리에게 자꾸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3년 12월 미국 조 바이든 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을 접견한 자리에서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하는 것은 좋은 베팅이 아니다”고 말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도 한국 방문 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을 권유했다. 윤 원장도 말했듯이 북한이라는 위협이 존재하는 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동맹이 갖는 함정이 있다. 동맹은 늘 공동의 위협과 공동의 적을 가정한다. 단기적으로는 한·미동맹에 의지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동맹처럼 편 가르기가 아닌 역내 국가가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일 관계로 넘어가 보자.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은 다 하는 것 같은데 묘수가 없다.

윤 원장: 일본의 젊은 세대가 성장하면 한·일 간에 감정으로 얽힌 역사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는데 오히려 (식민지 시절 가해와 피해의) 경험이 없는 세대들이 인구의 주류를 형성하는데도 해가 가면 갈수록 한·일관계가 악화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이 과거사 정립 문제이다. 얼마 전 폴란드를 다녀왔는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폴란드 사제단이 오히려 독일에 대해 폴란드를 용서해달라는 식으로 접근을 했다고 한다. 독일이 자각하고 손을 내미는 계기가 됐다. 독일 대통령이 무릎 꿇고 사죄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의는 과거의 불의를 기억하는 것보다 과거를 용서하는 데 있다”고 했다. 한·일 관계를 언급한 말은 아니었으나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말이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정부의 역사적 퇴행은 문제지만 우리가 일본을 용서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극우 보수와 일반인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 일본인이 일본 내 극우 정치인의 선동에 말려들지 않고 젊은 일본인들이 올바른 역사를 알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문 교수: 피해자의 용서와 가해자의 사과는 상호 작용을 해야 하는데 일본 정치를 움직이는 지도자들이 역사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문제다. 그런 상황에서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지역 내 중요한 협력 파트너다. 앞으로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시대다. 그들이 갈등을 해도, 협력을 해도, 한·일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일은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역사적 집단기억은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경험한) 세대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전수가 된다. 일본 국민 대다수는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일 양국에서 극우·민족주의적 시각을 가진 세력을 사회적으로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인식이라면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와 못 만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윤 원장: 그런 만남이 필요하지만 아베 정부의 퇴행적 역사 인식이 한·일 관계의 기초를 흔들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일본 정부가 진정성을 보여줘야 하고 그 시금석이랄 수 있는 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고 본다. 다른 문제와 달리 위안부 문제는 시간의 문제이다. 할머니들 연세가 모두 90세에 가까워 화해할 수 있는 시기가 몇 년 남지 않았다. 이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놓아야한다. 그 이후에는 아무리 화해하고 싶어도 화해할 수가 없게 된다. 위안부 문제를 잘 풀어나가는 것이 향후 새로운 한·일 관계를 형성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문 교수: 독도문제도 단순한 영토 문제가 아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한다고 독도가 일본 땅이 되는 게 아니다.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인정하고, 위안부 문제도 강제성이 없었다거나 (피해자가) 몇 명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해서 국제사회의 공분을 살게 아니라 아베 총리가 과감하게 진심으로 사과하면, 보상 문제는 기술적 문제이니 협의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정상회담 할 수 있다. 일본이 과거사 청산 문제를 정확히만 해결한다면 주변 국가가 일본의 정상 국가화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아베 총리의 대승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미래 비전을 얘기해보자. 우리 사회는 이념과 계층, 지역, 세대 갈등에 속박된 상태로 전진을 못하고 있다. 어떻게 갈등을 해소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나.

문 교수: 분단 상황이 지속하는 한 통일의 꿈을 실현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우리 정부가 합의에 의한 평화통일 원칙을 보다 분명히 해서 북한이 흡수통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통일준비위원회에서 준비 중인 통일헌장에 어떤 형태, 어떤 방식의 통일인지를 분명히 해둬야 한다. 박 대통령은 남남갈등을 극복하고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통일, 북한과 더불어 함께 준비하는 통일,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는 통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제 이를 실천해 나가면 된다.

윤 원장: 영화 ‘국제시장’을 보니 우리가 참 어려운 시기를 잘 견디고 열심히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 시절에는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있었다. ‘88만원 세대’로 일컬어지는 요즘 젊은 세대는 스타벅스에서 비싼 커피를 사 마시고 비싼 스마트폰을 쓰고 통신요금을 내면서도 저축은 못한다. 젊은 맞벌이 부부도 저축하는 대신 그 돈으로 비싼 취미 활동을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삶을 즐기며 사는 쪽을 선호하는 것 같다. 과거에는 금리가 괜찮아서 저축하면 집도 사고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보니 희망이 없다고 보는 것 같다.

한국만 보면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눈을 세계로 돌리면 중국과 인도 등에서 구매력을 갖춘 중산층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은퇴를 앞둔 베이비붐 세대가 퇴장하면 대한민국은 심각한 노동인력 부족 상태가 될 것이다. 하루빨리 정년을 연장하고 경험 있는 인력의 재활용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통일이 또 하나의 새로운 기회일 수 있다는 점도 적극 알려야 한다. 우리 인구의 90% 이상은 분단 이후 태어났다. 앞으로 20∼30년만 지나면 분단을 기억하는 사람도 더는 없다는 얘기다. 앞으로의 70년은 통일을 새로운 기회로 여는 희망의 시대로 만들어야 한다.

문 교수: 세계화 시대에 맞물려서 저출산 고령화니 양극화니 여러 문제점이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 담론이 부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중국과 인도도 얼마든지 진출이 가능하다. 통일이 되면 남북한 통합 인구가 약 1억명 수준으로 커지고 출산율도 증가할 수 있다.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야 한다. 지도자의 비전 제시와 사회적 담론 형성이 그래서 중요하다.

윤 원장: 전쟁까지 겪은 최빈국이 지금 이렇게까지 성장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기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모욕적인 말도 들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민주화를 이뤄내는 저력을 보였다. 자부심을 갖고 젊은 세대가 새로운 희망을 가져야 한다.

문 교수: 중동·아프리카·남미 지역의 경우 독립을 이루고 성장하면서 종파·인종 간 갈등을 겪었지만 우리는 종교갈등과 인종갈등이 없는 유일한 나라다. 상당히 동질성이 강한 사회이므로 좋은 지도자가 나와 희망의 메시지를 준다면 얼마든지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다. 지난 70년이 성공의 역사였듯이 앞으로의 70년도 성공할 수 있다. 

정리=김민서 기자, 사진=허정호 기자

■ 문정인 교수는…

●1951년 제주도 제주 출생 ●미국 메릴랜드대 정치학 박사 ●1차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대통령 자문 동북아시대위원장(장관급)·제2차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장(현)·대통령직속 통일준비위원(현)

■ 윤덕민 원장은…


●1959년 서울 출생 ●일본 게이오대 법학박사 ●남북 고위급 회담 특별 자문위원·외교안보연구원 교수·대통령 외교안보자문위원·국립외교원(옛 외교안보연구원) 안보통일연구부장 ●국립외교원장(현)


 

 



 

엘 캐피턴(El Capitan).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며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거대한 바위산입니다.

 미국 조지타운대 방문 연구원 시절인 2005년 여름, 요세미티를 찾았을 때 정말 큰 바위산이라는 느낌을 받았을 뿐인데, 세계 최대의 화강암 바위라고 합니다. 전 세계 암벽등반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란 사실도 뒤늦게 알게됐습니다. 2015년 1월14일(현지시간) 미국의 암벽 등반가 토미 콜드웰과 케빈 조거슨이 세계 최초로 엘 캐피턴의 '새벽 直壁(Dawn Wall)'을 맨손으로 오르는데 성공했다는 기사를 접하면서,제가 요세미티를 찾은 날에도 저 암벽에 사람들이 매달려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벽 직벽을 맨손으로 올라가고 있는 토미 콜드웰과 케빈 조거슨.     AP=연합뉴스

 

세계일보 유태영 기자가 외신을 참고해서 쓴 기사에 따르면 해발 2300m인 엘 캐피턴은 독특한 모양의 직벽으로 전 세계 등반가들의 도전 대상이었고 그 중에서도 '새벽 직벽'은 그동안 아무도 맨손 등반에 성공하지 못해 엘 캐피턴의 난공불락 루트로 불렸다는군요. 사고로 왼손 검지를 잃은 콜드웰이 이 루트를 맨손으로 정복했다고 해서 지구촌은 감탄의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조거슨은 무려 18일이 소요된 등반 도중 손가락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상처가 아물 때까지 이틀 간 쉬었다가 다시 기어올라 끝내 정상을 밟고야 말았답니다.

 조거슨은 "우리가 느리지만 확신을 갖고 이 일을 해낸 것 처럼 모두가 언젠가는 각자의 '새벽 직벽'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미국 사람들은 참 똑같은 말도 멋있게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정치인도 그렇고, 일반인도 그렇고. 어려서부터 말하기 훈련을 해와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우리 보다 인생을 대하는 자세가 좀 더 진지해서 그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좀 더 주체적이고, 좀 더 사려깊고, 좀 더 희생적이고...솔직히 우리 사회에는 대통령부터 '부자되시라'고 외치고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무슨 신주단지처럼 여기고,다른 삶의 조건들은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는데(그렇다고 제가 경제적 조건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무슨 문제든 '정도의 문제'입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는 품격있는 삶은 고사하고 격조있는 말도 여간해선 듣기힘들지 않을까, 뭐 그런 객소리를 해봅니다.  

 여튼 을미년 새해를 맞은 세계인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겨주는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잠시 나의 '새벽 직벽'은 뭘까, 라는 상념에 젖어들기도 했습니다.

요세미티 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걸어서 들어서면 엘 캐피턴을 지나자마자 멀리서 폭포가 보입니다. 걸어가면 갈수록 그 폭포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와서 끝내는 폭포 물방울이 내 몸에 튀길 정도가 됩니다. 바로 요세미티 폭포입니다. 이 폭포는 북한의 대포동미사일처럼 3단인데 위부터 아래로 Upper Fall, Lower Fall, Cascade Fall로 부릅니다. 총 길이가 739m로 미국에서는 가장 높고, 세계적으로도 다섯번째로 높은 폭포라는군요. 

 

 

 

 

 

 

 

 

 

 

 

 

 

 

아래는 요세미티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Glacier point'에 서서 오른 쪽으로 Nevada Fall과 Vernal Fall을 바라본 정경입니다. 예전에는 이 곳까지 말을 타고 다녔지만 지금은 자동차로 글레이셔 포이트 턱밑까지 편하게 올라올 수 있습니다.

 

 

 

셔틀버스는 다니지 않고 겨울철엔 도로가 폐쇄되기 때문에 시점과 이동 수단을 면밀히 고려해서 오셔야 합니다. Nevada, Vernal Fall은 빙하가 녹으면서 생긴 것이라는군요. 안내판을 보면 빙하가 아래 쪽으로 흘러내리면서 그 때 무른 지반은 빙하에 패여서 쓸려내려가고 단단한 부분만 남았는데 그 강도의 차이로 협곡도 생기고 폭포도 생겼다는 설명이 죽 적혀있습니다. 그런 거 몰라도 확 트인 전망을 즐기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Glacier point에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요세미티 달력 사진에 나오는 바위가 우뚝 서 있습니다. 'Half Dome'이라는 명칭 그대로 돔을 절반으로 잘라놓은 모습입니다. 이 곳 역시 암벽 등반자들의 성지 같은 곳입니다. 

 

 

 

아까 봤던 폭포들과 Half Dome이 보이게 카메라 앵글을 잡으면 아래와 같은 예술 작품이 찍혀나옵니다. 저는 사진 문외한이지만 대충 눌러도 이런 멋진 장면이 포착됩니다.

 

 

 

 



 

내려오는 길에 '이제 언제 이 곳에 다시 오랴'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뒤돌아서 눈에 넣은 Half Dome. 

 

 

 

 

 

 

 

 

物我一體

 


저를 넣어서 찍어봤는데 아무래도 저 같은 인간 따위는 없애버리고 자연의 모습만 담은 사진이 훨씬 자연()스럽군요.;; 

 

 

 

 

아래는 미 요세미티 엘캐피탄 자유등반 성공 소식을 다룬 조선일보 2015년 1월24일자 기사입니다.

오직 손과 발, 육체의 힘으로 '불가능의 벽'을 타고 오르다

지난 1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거벽(big wall) '엘캐피탄(El Capitan)'에 전 세계 시선이 쏠렸다. 꼭대기에 오른 두 산사나이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서로 부둥켜안았다. 등반가 토미 콜드웰(37)과 케빈 조르게슨(31)이 19일간의 사투(死鬪) 끝에 지구 상에서 가장 어려운 루트로 꼽히는 높이 914m의 '여명의 벽(돈월·Dawn Wall)'을 거쳐 앨캐피탄 정상에 오른 순간이었다.

외신들은 찬사를 쏟아냈다. 뉴욕타임스는 "불가능을 좇다, 그리고 정상에 서다"라고 했고, 내셔널지오그래픽은 "(그들이) 역사를 만들었다"고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두 사람을 향해 "당신들은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줬다"고 했다.

엘캐피탄은 요세미티 계곡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다. 최고 높이는 1000여m로 단일 암벽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북한산 인수봉 암벽이 150m라는 걸 생각하면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엘캐피탄은 꼭대기 높이가 해발 2307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에베레스트(8848m)의 4분의 1을 간신히 넘는 정도다. 두 등반가가 땅에 내려오는 데도 2~3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AP통신은 "두 사람은 많은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돈월 루트를 자유등반으로 오른 첫 번째 사람이 됐다"고 평가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른 것도 아니고, 그것도 19일에 걸쳐 정상을 밟은 것인데 세계는 왜 이들의 등반에 열광하는 것일까.

절벽이 하늘에 매달렸다. 이 절벽을 오르던 사람도 덩달아 그 아래 매달렸다. 암벽이 그곳에 있는 한 인간의 도전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진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그야말로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타고 오르는 한 등반가의 모습이다.
절벽이 하늘에 매달렸다. 이 절벽을 오르던 사람도 덩달아 그 아래 매달렸다. 암벽이 그곳에 있는 한 인간의 도전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진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그야말로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타고 오르는 한 등반가의 모습이다. / 코르비스 토픽 이미지
자유등반… 오직 손과 발로 등정

자유등반은 장비를 이용하지 않고 자신의 신체 능력으로 등반하는 것이다. 손끝 힘만으로 몸을 끌어올릴 정도의 탁월한 신체적 능력과 수백m 공중에 매달려서도 추락에 대한 공포를 이기고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정도로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정신적·육체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행위인 것이다. 콜드웰은 한 인터뷰에서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손끝이 상하고 피가 난 상황에 대해 "손끝에 피부가 얼마나 남았는지가 이번 등반의 성패를 좌우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엘캐피탄은 1958년 미국의 저명한 암벽등반가 워렌 하딩이 처음 올랐다. 하딩은 사람의 코처럼 생겼다고 해서 '노즈(The Nose)'라고 불리는 루트를 개척해 47일 만에 엘캐피탄 꼭대기에 섰다. 이후 많은 사람이 다양한 루트를 개발하면서 이 거벽에 올랐다. 뉴욕타임스는 "현재 엘캐피탄 정상에 오르는 루트는 100여 개에 달한다"고 했다. 1970년 돈월 루트를 개척한 것도 하딩이다. 하지만 그의 등반 방식은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알피니스트닷컴에 따르면 하딩은 당시 27일에 걸쳐 등정하면서 암벽에 328개의 구멍을 냈다. 그 구멍에 볼트 등을 박아넣은 뒤 로프를 연결해 등반에 이용했다. 자연을 훼손하는 '인공등반' 방식이었다.

이번에 콜드웰과 조르게슨이 격찬을 받은 것은 하딩이 인공등반으로 올랐던 그 루트를 45년 만에 오로지 손과 발만 사용하는 '자유등반'으로 등정했기 때문이다. 자유등반도 암벽에 오를 때는 바위틈 등에 안전장비를 설치하고 몸에 로프를 연결한다. 하지만 이는 추락을 대비하는 것으로, 등반할 때는 장비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는다.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은 "암벽등반은 장비의 도움을 받느냐 안 받느냐에 따라 인공등반과 자유등반으로 나뉜다"면서 "장비 도움을 받아야 오를 수 있었던 곳을 순전히 인간 육체의 힘으로만 등정한다는 것은 가장 극적이고 위대한 휴먼 드라마"라고 했다.

암벽 자유등반 바람은 1970년대 말부터 불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오영훈 월간산 편집위원은 "가볍고 친환경적인 등산 장비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자연을 훼손하지 말고 등반하자는 '깨끗한 등반(클린 클라이밍)'이 붐을 일으켰고, 이어 인간 힘만으로 오르자는 자유등반이 큰 흐름을 형성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인공 장비를 이용해서라도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중요했지만 점점 '자연 보존과 인간의 힘만으로'라는 가치가 부각된 것이다.

엘캐피탄의 경우 1979년 첫 자유등반이 이뤄졌고, 주요 루트 중에서는 '살라테월'이 1988년, 가장 유명한 '노즈' 루트는 1993년 자유등반에 길을 터줬다. 알피니스트닷컴은 "앨캐피탄 주요 루트 중 자유등반이 이뤄진 곳은 이번 돈월을 포함해 모두 14개가 됐다"고 밝혔다.

지난 14일 토미 콜드웰(오른쪽)과 동료 케빈 조르게슨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거벽 ‘엘캐피탄’에서 지구 상에서 가장 어려운 자유등반 루트로 알려진 ‘여명의 벽’을 통해 정상에 오르고 있다. 두 사람은 인공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손과 발로만 등정을 하는 ‘자유등반’으로 이 암벽의 꼭대기에 섰다.
지난 14일 토미 콜드웰(오른쪽)과 동료 케빈 조르게슨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거벽 ‘엘캐피탄’에서 지구 상에서 가장 어려운 자유등반 루트로 알려진 ‘여명의 벽’을 통해 정상에 오르고 있다. 두 사람은 인공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손과 발로만 등정을 하는 ‘자유등반’으로 이 암벽의 꼭대기에 섰다. / AP 뉴시스
손가락 한 마디로 턱걸이… "그들은 거미다"

'난도(難度) 등급 5.14d.'

콜드웰 등의 등반이 전 세계 등반가들을 감탄하게 한 건 무엇보다 이 등반의 '난도'였다. 이용대 교장은 "그 사람들이 오른 암벽의 난도가 5.14d라는 걸 알고 정말 깜짝 놀랐다. 그들은 거의 거미 수준"이라고 했다. 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 소속 최석문씨는 "지금까지 엘캐피탄 등정 주요 루트 중에서 가장 높았던 난도는 5.14a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5.14d라는 난도는 이번에 처음 들었다"고 했다.

도대체 난도가 5.14d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 등반 난이도를 매기는 체계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영국과 독일에서 만들어졌다. 이후 전 세계에 10여개 이상의 난이도 등급 체계가 등장했다. 미국에선 자유등반 난이도 등급을 매길 때 '요세미티 소수점 체계'라는 걸 사용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 체계는 1~5급까지 난이도 등급을 매기는데, 1~4급까지는 일반인도 무리 없이 오를 수 있는 수준이고 5급은 본격적인 암벽등반이 시작되는 영역이다.

전문가들은 "5.14 난도를 이겨내려면 손가락 끝으로 절벽을 오를 정도가 돼야 한다"고 했다. 손정준 '손정준스포츠클라이밍연구소' 소장은 "난도 5.12는 열 손가락의 두 마디를 이용해 턱걸이 10개를 하는 수준이고, 5.13는 열 손가락의 한 마디로 턱걸이를 하는 수준이며, 5.14는 한 손가락으로 그것도 딱 한 마디만 걸어서 턱걸이를 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이런 능력이 필요한 것은 실제 등반 도중 손톱 정도의 작은 돌기를 한 손으로 잡고 올라야 하는 때가 반드시 생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각 난이도 등급은 다시 a·b·c·d 4등급으로 세분화되는데 d로 갈수록 난도가 더 높다.

현재 지구 상에 존재하는 가장 어려운 난도는 5.15b이다. 한 전문가는 "이 난도는 땅에서 20~30m 정도의 낮은 암벽에 매겨졌을 뿐 높은 산에서 진행되는 자유등반 영역에선 존재하지 않는다"며 "자유등반 세계에선 5.14d가 최고의 난도인 셈"이라고 했다.

국내 암벽 중에선 난도가 5.14 이상은 없다. 전북 고창에 있는 선운산 투구바위가 난도 5.14a 정도지만 이 바위는 15m에 불과해 자유등반에 포함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대표적인 암벽 중 설악산 적벽은 정상으로 가는 3개 루트 중 가장 난도가 높은 것이 5.13c 정도이고, 높이가 200m인 울산바위도 난도는 5.12c 정도이다. 손 소장은 "이렇게 난도가 낮은데도 울산바위와 적벽을 오른 사람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그는 2000년 태국에서 국내 등반가로서는 처음으로 5.14b의 암벽 등반을 경험했다. 그는 "그 등반을 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아직 다음 난도인 5.14c 등반엔 성공한 적이 없다. 그만큼 난도를 높이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보통 난이도 등급은 그 암벽 등반을 끝난 사람이 매긴다. 직접 암벽에 오르지 않고는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여명의 벽 등반의 경우도 콜드웰이 "전체 30구간 중에서 난도가 5.13 구간이 12개, 5.14 구간이 6개였다. 특히 난도 5.14d 구간도 두 곳이나 있었다"고 밝히면서 난도가 밝혀진 것이다. 한 등반 전문가는 "어려운 루트라고 해도 5.14 난도를 가진 구간은 한 개 정도가 대부분인데 여명의 벽은 그 어렵다는 구간이 여러 개나 된다는 게 정말 대단한 것"이라며 "앞으로 이곳을 다시 오르는 사람이 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토미 콜드웰이 몇 년 전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엘캐피탄’ 암벽에서 등반을 하는 모습.
토미 콜드웰이 몇 년 전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엘캐피탄’ 암벽에서 등반을 하는 모습. / 레베카 콜드웰 블로그
불가능이라던 영역을 향한 도전

히말라야 산맥같이 만년설이 덮인 고산을 오르는 것과 달리 암벽등반은 단순히 높이를 추구하지 않는다. 인간의 육체적 능력을 시험하는 다양한 한계에 도전한다. 스포츠클라이밍처럼 지상에서 수십m 정도 이내에서 이뤄지기도 하지만 자유등반이라고 할 땐 보통 높이 수백m 암벽에서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등정이 여러 날 걸릴 땐 도중에 식사도 하고 공중 텐트 같은 걸 걸어놓고 잠도 잔다. 커피나 가볍게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럴 땐 단단한 고정물에 공중 텐트 등을 걸어놓아야 한다. 대소변도 공중에서 해결해야 한다.

전문 등반가들은 "자유등반이 어려운 것은 허공에 매달린 것 같은 원초적 두려움과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손정준 소장은 "땅 부근에서 5.14급의 고난도 등반을 탁월하게 했던 사람도 막상 100~200m 이상 높은 곳에 가서는 난도가 5.12 정도인데도 발을 내딛지 못한다"며 "추락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고 추락 방지 장비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져야만 자유등반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자유등반이 진보할 수 있었던 데는 과학기술의 발전도 큰 역할을 했다. 가볍고 바위틈에 쉽게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장비들이 개발되면서 등반가들이 갖고 올라가야 할 장비 무게가 크게 줄었고, 신체의 특정 부위를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장비도 등장했다.

자유등반을 100m 달리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달리기 선수가 0.01초를 단축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하듯 자유등반가는 인간의 한계라고 여겨졌던 영역에 끊임없이 도전장을 내밀기 때문이다. 이용대 교장은 "산이 있고, 암벽이 있는 한 그곳을 자신의 힘만으로 오르겠다는 인간의 도전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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