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참배로 또다시 논란거리가 된 야스쿠니 신사의 전신은 도쿄 초혼사(招魂社)다. 초혼사는 히로히토 일왕(日王)의 할아버지인 메이지 일왕의 뜻에 따라 세워졌다.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일왕 중심의 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숨진 전몰자, 그중에서도 일왕 편에 섰던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추모 시설이다. 제국주의로 치닫던 일본은 메이지 일왕의 명령으로 도쿄 초혼사를 ‘나라를 태평하게 한다’는 뜻의 야스쿠니(靖國)로 개칭했다. 그런 뒤 청·일, 러·일 전쟁 전사자들이 야스쿠니 위령자 명부에 등재됐고 야스쿠니는 군국주의의 도구로 활용됐다. 일왕은 야스쿠니 신사의 주요 제전(祭典) 때마다 직접 참배했다. 야스쿠니는 패전 직후 국가 시설에서 종교 법인으로 격하됐으나 일왕은 꾸준히 야스쿠니를 찾았다.
 그런데 히로히토의 야스쿠니행은 1975년 11월21일 이후 돌연 중단됐다. 히로히토의 뒤를 이은 아키히토 일왕도 1989년 즉위 이후 지금껏 야스쿠니에 참배하지 않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


 아베 총리는 지난 26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뒤 “두 번 다시 전쟁의 참화로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일이 없는 시대를 만들겠다는 결의를 전하기 위해 참배했다”고 밝혔다. 총리 재임 시절 야스쿠니를 6차례나 참배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당시 “가족을 두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 모두에게 충심에서 추도를 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숭고한 이유에서 이뤄진 참배라면, 왜 일왕은 근 40년째 야스쿠니를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고이즈미나 아베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 바로 야스쿠니와 관련된 일왕의 마음이다. 일왕의 야스쿠니 참배가 돌연 중단된 이유를 놓고는 갑론을박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2006년 궁내청(일본 왕실 주무부처) 장관을 지낸 도미타 도모히코의 메모가 공개됐다. ‘도미타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히로히토의 독백이 기록돼 있다. “언젠가 A급(전범)이 합사되었다. …쓰쿠바는 신중하게 대처했다고 듣고 있지만, 마쓰다이라의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있다. 그 때문에 나는 그때 이후 참배하고 있지 않다.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 ‘쓰쿠바’는 1966년 A급 전범 14명의 제신명표를 수령하고서도 그들을 합사하지 않았던 쓰쿠바 후지마로 궁사(宮司), ‘마쓰다이라의 아들’은 1978년 10월 비밀리에 A급 전범 합사를 단행했던 마쓰다이라 나가요시 궁사다. 해군 장교 출신인 마쓰다이라는 “도쿄 전범 재판을 부인해야 일본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A급 전범 합사 과정에서 일왕이나 유족의 뜻도 묻지 않았다.(도요시타 나라히코의 ‘히로히토와 맥아더’)
 마쓰다이라는 일본 우익 진영의 영웅이 됐다. 우익 진영을 대변해온 일본 자민당 정권은 야스쿠니에 합사된 전범들을 ‘쇼와(昭和)의 순난자(殉難者)’(히로히토 시대의 애국자)로 미화시켰다. A급 전범 용의자를 외조부(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로 둔 아베 총리는 정치 초년병 때부터 그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아베의 야스쿠니 참배는 뼛속 깊이 각인된 우익 DNA의 발현인 셈이다.
 하지만 아베를 포함한 일본 우익이 야스쿠니를 부각시키면 시킬수록 일왕은 야스쿠니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종전 이후 일본 체제는 연합군최고사령부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과 히로히토 일왕 간 타협의 산물로,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 면제-일왕제 유지-평화헌법’이라는 토대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일본 우익은 전범들을 야스쿠니에 합사한 뒤 총리의 참배를 이끌어내며 군국주의 시대로 시곗바늘을 되돌리려 하고 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일왕의 전쟁 책임론이 부각되고 일왕을 전범 법정에 세웠어야 했다는 목소리들이 커진다. 일본 우익의 시대착오적 행태는 무엇보다 즉위 당시 “항상 국민의 행복을 염원하면서 일본국 헌법을 준수하고…우리나라가 한층 더 발전해 국제사회의 우호와 평화, 인류의 복지와 번영에 기여할 것을 간절히 희망”했던 아키히토 일왕의 뜻에 배치되는 것이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북한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처형 소식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의 처형 소식은 수많은 물음표를 남겼다. 북한 정권 내부에서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고모부인 장성택에 의해 실제 ‘궁정 쿠데타’가 모의됐던 것일까. 이제 김정은 체제는 더 공고해진 것일까. 김정은 국방위원장 사망 2주기를 하루 앞둔 16일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북한 내부 사정에 밝은 새누리당 조명철 의원(외교통일위)을 만났다. 평양 남산학교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복동생인 김평일과 함께 공부했던 조 의원은 김일성종합대(김대)를 나와 김대 경제학부 교수를 지냈다. 아버지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우리의 국회의원)과 내각 건설부장(장관)을 지낸 엘리트 관료였다. 조 의원은 “장성택 숙청은 김정일이 장성택에게 부여했던 권력을 확실하게 빼앗아 김씨 세습왕조 체제를 굳히려는 극단적 조치”라면서 “북한 주민 스스로 비보편적, 비인권적 폭압 정권을 제지해야겠다는 각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북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10일 모두가 반신반의할 때 장성택 처형을 예견했다.

“통일교육원장 시절이던 지난해 통일부 연두업무보고 당시 대통령에게 ‘김정은 체제의 감시체계 사각지대가 친인척이다. 앞으로 김정은 친인척 가운데 분란의 소지가 있다’고 보고했다. 지금 (장성택 숙청) 상황이 당시 예견했던 그대로다. 북한 체제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은 친인척에게만 있다. 군부든 경찰이든 주민이든 다른 부문은 거미줄 같은 감시망에서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 장성택 실각 소식을 들었을 때 처형될 거란 감이 들었다.”

―장성택은 김정은의 고모부란 점에서 그의 처형은 충격적이었다.

“김정은 체제가 완성되려면 김정일 시대에 분배된 권력을 거둬들여서 이를 김정은 이름으로 재분배해야 한다. 그래야 김정은 체제가 명실상부해진다. 당 대표자 회의를 열고 당 정치국 회의를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걸 통해서 정치국 위원도 시키고 후보 위원도 시키면서 권력을 재분배한다. 권력을 거둬들일 때 리영호 군 총참모장처럼 친인척이 아닌 인사들은 쉽다. 그런데 친인척의 권력은 거둬들이는 게 만만치 않다. 장성택만 해도 당 행정부장도 하고 국가체육지도위원장도 했는데 그가 가진 권력은 김정일이 직접 준 것이다. 김정일의 친필지시가 있고 구두지시가 있다. 김정은은 김정일 유훈통치를 받들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장성택이 ‘이거 아버지가 이렇게 하라고 한 거야’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장성택을 사형까지 시킨 것은 대다수 전문가들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불경죄에 걸린 것이다. 기득권 재분배를 통해 김정은 체제를 가동시켜야 하는데 장성택만 권력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이는 김정은의 위상에 치명적이다. 김정은은 자기 권력을 위해서 장성택을 쳐냈다고 봐야 한다.”

―김정은의 고모인 김경희 당 비서는 김씨 집안의 어른 격이다. 장성택의 사형만은 막아보려 하지 않았을까.

“김경희가 장성택의 사형을 반대할 수 없는 두 가지를 내세우면 된다. 하나는 여자, 다른 하나는 반당·반혁명 혐의다. 반당·반혁명 혐의는 김경희의 아버지(김일성)와 오빠(김정일) 때부터 내려온 위업을 말살하는 죄목이다. 이런 죄명을 만들어서 김경희에게 알리면 김경희도 어쩔 수 없다. 친척을 치면 천륜을 어기는 꼴이 되니까 이혼부터 시켜놓고 쳤을 것이다.”

―군부 등 어떤 세력에 의해 김정은이 끌려갔다는 분석도 있다.

“김정은이 주도했다. 김정은 세력이 권력층 내부에 존재하지만 김정은을 끌고가는 세력은 아니다. 김정은에게 과잉충성하는 세력이다. 충성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사건이 극대화하고 폭주가 이뤄진다. 김정은은 그런 세력을 활용할 뿐이다.”

―장성택 판결문엔 자기 세력을 구축해서 ‘쿠데타’를 기도한 것으로 돼 있다.

“당 행정부 내에 자기사람 심어놓고 ‘소왕국’으로 만들어놨다고 했는데 그런 권력을 김정일이 줬다. 북한 체제를 지키기 위해, 특히 어려운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정일이 부여한 권력이다. 장성택은 이 기득권을 가지고 당이 자금 필요하면 자금 대고 물자 필요하면 물자 대고 사람 필요하면 사람 공급했다.”

―장성택이 사라지면 김정은 체제의 버팀목 하나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북한 체제는 장성택에 의해 돌아가는 게 아니다. 그 나름대로 독재 시스템이 체계화돼 있다. 상호감시하고 처벌하고 우상화하는 체계가 있다. 그 체계를 김정은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만들어 놨다. 그 안에 장성택의 작은 권력이 있는 것이다. 장성택이 있든 없든 북한 체제는 굴러간다. 장성택은 2인자나 후견인이라는 호칭보다는 조력자라는 호칭이 더 적합하다.”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장성택의 영향력이 김정일 시대에 비해 커진 것은 사실 아닌가.

“김정일이 (2008년 뇌졸중으로)쓰러졌다 회복된 후 친척 외에는 믿지 못하는 심리가 더 강했을 것이다. 그래서 둘러보니 피붙이라곤 김경희 하나밖에 없고, 그래서 김경희 남편인 장성택을 활용했다고 봐야 한다. 제 부친이 건설장관 할 때 장성택과 같이 일해서 상황을 잘 안다. 김정일은 장성택에게 기득권을 주면서도 항상 그를 감시했다. 보이지 않는 감시망이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김정일이 쓰러지고 난 뒤에 그 감시시스템이 대단히 느슨해졌다.”

―장성택 숙청 과정에서 김정은의 친형인 김정철이나 이복 누나인 김설송이 도왔다는 분석도 있다.

“장성택이 김정은의 이복 형인 김정남을 옹립하려했다는 보도도 봤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정상적인 나라에서나 가능한 상상이다. 거긴 그렇지 않다. 김정은에게도 이복 형제들이 있지만 이복은 절대 권력 가까이 두지 않는다. ‘곁가지’라고 해서 무조건 친다. 단지 칠 때 죽이지는 않는다. 패륜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그렇지 힘이 없어서 죽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현실에서 김정은이 장성택 치는 데 이복들을 활용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친형인 김정철도 마찬가지다.”

―장성택 숙청 사건을 계기로 북한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북한을 어떻게 봐야 하나.

“지금까지 우리가 겪은 북한의 역사가 있다. 여러 충격적 사건으로 점철돼 있다. 그런 사건과 과정을 통해 알게 된 역사를 여기서 한 번쯤은 크게 정리해야 한다. 첫째, 북한 정권은 김씨 왕조 세습체계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 비민주적 독재국가라는 사실이다. 무늬만 공화국이지 오직 ‘백두혈통’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김씨 왕조국가다. 두 번째, 북한 정권은 지금 체제를 천년 만년 이어가려 한다. 하지만 독재적, 비민주적, 비인권적 체제는 국제사회와의 마찰이 불가피하다. 이로 인한 체제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북한 정권은 핵과 미사일, 정치 수용소 같은 비정상적 수단들을 활용하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김정은 정권에 맞서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과거 이런 정권들을 상대로 역사가 어떻게 해왔느냐를 돌아봐야 한다. 세계는 인류 보편의 가치와 저촉되는 파시스트 정권에 맞서 싸워왔다. 평화적 수단을 쓰더라도 파시스트 정권이 강화되는 쪽으로 평화적 관리가 되면 안 된다. 평화적 수단들은 파시스트 정권이 강화되는 쪽으로 갈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총포 소리가 안 나서 평화적으로 보이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평화 공세 속에서 북한의 핵무기가 더 늘고 미사일 사거리는 늘어날 것이다. 그건 평화적 관리가 아니다. 미래의 평화를 지금 갖다 쓰는 것이고 미래의 더 큰 불행을 후대에 넘기는 것이다. 교류든 대화든 협력이든 원칙을 지키면서 북한이 변화하는 쪽으로 해나가야 한다.”

―북한이 시스템으로 움직인다면 김정은 체제는 생존력이 강하다는 얘기인가.

“시스템은 공고할지 몰라도 사회 기반은 튼튼하지 못하다. 그 둘을 분리해야 된다. 시스템은 관리자의 시스템이다. 그러나 관리받는 주민, 사회 기반은 대단히 취약하다. 북한 주민은 생명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불만이 있어도 표출 못하고 배고파도 참고 억눌려도 참는다. 이런 기반은 대단히 취약하다. 이제 우리의 대북 정책은 북측의 상부구조가 아닌 북한 주민을 향해야 한다. 북한 주민들의 의식을 깨어나게 하고 그들의 굶주림을 해소시켜야 한다. 북한 주민 스스로 시대착오적인 폭압 정권을 제지해야겠다는 각성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들어야 한다.”

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사진=남제현 기자

■ 새누리당 조명철 의원 약력

▲1959년 평양 출생 ▲1983년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1992년 김일성종합대 경제학부 상급교원(교수) ▲1994년 귀순 ▲2009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개발협력센터소장 ▲2011년 통일교육원 원장 ▲2012년 19대 국회의원(비례대표)
머리가 백발이다. 얼굴은 야위었고 몸집은 왜소하다. 18대 의원 시절 탈북자 강제 북송을 저지하기 위해 10일 넘게 서울 종로구 효자동 중국대사관 앞에서 단식을 했던 2012년 겨울, 그때 그 모습이다. 박선영 사단법인 ‘물망초’ 이사장은 “나이 탓인지 다른 곳은 회복됐는데 얼굴은 단식 이후에도 좀체 회복되지 않는다”면서 웃었다. 북한이 월북했던 우리 국민 6명을 전격적으로 송환했던 지난 25일 동국대 교수 연구실로 박 이사장을 찾아갔다. 박 이사장은 국군포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이런 나라가 어디 있느냐”면서 목청을 높였다. 그는 2012년부터 국군포로와 탈북자를 돕는 단체 ‘물망초’를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다. 물망초는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꽃말을 가졌다. 한국 현대사의 희생자들인 국군포로와 탈북자들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취지로 그가 직접 지은 이름이다. 국군포로나 탈북자들에게 ‘역사의 조난자’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박 이사장이다.



―‘역사의 조난자’란 표현이 마음에 와 닿는다.

“18대 국회의원 시절 4년 내내 이 표현을 썼다. 교수 시절에도 그 말을 썼지만 전혀 전파가 안 됐는데 의원 되고 국회 대정부 질의 하면서 쓰니깐 사람들이 쓰기 시작했다. 국회의원 돼서 좋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국군포로나 탈북자뿐만이 아니라 아직 우리 곁에 오지 못한 사할린 한인들과 시베리아 동포들, 이런 분들도 모두 ‘역사의 조난자’들이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전쟁터로 나갔다가 붙잡힌 국군포로들이야말로 대표적인 역사의 조난자들이다. 역대 정부에서 이들은 철저히 잊혀진 존재였다.

“그렇다. 우리 정부도 국민도 차분하게 돌아봤으면 한다.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는 일본만 욕할 게 아니다. 우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나라는 국군포로 문제를 지금도 국방부 군비통제과에서 다루고 있다. 미국 국방부는 ‘포로 실종국’을 별도로 두고 있다. 우리로 치면 하나의 국(局)이다. 그들은 전쟁에 나갔다가 실종된 미군의 뼛조각 하나까지도 찾고 있다. 북·미 대화가 단절됐다고 하지만 북한에서는 아직도 미군 유해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국군포로가 군비통제과 업무라는 건 난센스다. 북한을 의식해서 그런 것인가. 두 차례나 이뤄진 남북정상회담 기간에도 국군포로 문제는 의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비겁한 거다. 북한을 왜 의식해야 하나. 이 부분부터가 이상하다. 전쟁 포로는 반드시 송환하도록 제네바 협약은 규정하고 있다. 북한이 국군포로를 송환하지 않는 것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다. 국제법 위반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 정부는 국군포로 문제를 남북문제로 접근하려 하는데 당장 유엔으로 가져가야 한다. 6·25전쟁 정전협정 당사자인 유엔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6·25전쟁 당시 국군포로로 끌려갔다가 북한에서 숨진 손동식씨 유해가 최근 중국을 거쳐 국내로 봉환됐다. 국군포로 규모는 파악이 되나.

“생존 중인 국군포로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도 북한의 국군포로들로부터 살려 달라는 편지가 저한테 오고 있다. 제3국으로 가 있는 사람들도 이렇게 편지를 보낸다. 자기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옛날 사진을 첨부해서 가족의 인적사항과 살던 집 주소까지 적어서 보내왔다. (그러면서 그는 노란색 보자기에 싸인 편지 뭉치들을 보여줬다) 한 500명 정도 된다. 지금도 이런 편지를 보내오는데 국군포로가 없다고 할 수 있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너무 화가 나서 이분들 얘기를 책으로 출간하기 위해 유력 출판사 8군데를 찾아갔는데 모두 난색을 표명했다. 그래서 직접 출판하려고 지난주에 도서출판 물망초를 등록했다.”

―상품성이 없어서 출판을 못하겠다는 것인가.

“진보진영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이 편지들을 다 읽어봤나.

“다 읽어보고 번호 매기고 분류했다. 눈물 없이는 못 읽는다. 이 편지를 읽고 나서 국방부에 국군포로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단 한 분도 모셔오지 못하는 한, 국방부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군대 가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얘기했다. 군대 안 가려고 어깨 빼고 무릎 망가뜨리는 젊은이들을 감옥에 보낼 자격도 없는 거다. 저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해 눈 감고 입 다물고 있으면서 극장 가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 보면서 기립박수 치는 게 말이 되나.”

―이 편지들이 북한에서 어떤 경로를 통해 전달되나.

“물망초에서 만든 물망초 학교가 있다. 거기 다니는 탈북학생들은 북한에 있는 사람들하고 거의 매일 통화한다. 우리가 방송에 나가면 그 다음날 바로 연락이 온다. 아버지를 모시고 갈 테니 도와달라는 자녀도 4명 있었고, 북한에서 나가고 싶다는 할아버지도 있다.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여주며) 내 휴대전화로 이렇게 (북한에서) 문자도 온다.” 

―우리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국군포로는 어느 정도인가.

“구체적 숫자는 없다. 정전협정 체결할 때 유엔군이 인민군측에 내밀었던 것이 8만2700여명이다. 이 가운데 81명이 돌아왔고 30분이 돌아가셔서 현재 51명이 한국에 남아있다. 81명 가운데 80%는 포로가 아니라 실종자 또는 전사자로 분류됐던 분들이다. 포로 숫자 자체도 정확한 게 없는 거다. 이런 나라가 어디 있나.”

―국군포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정부가 해야 한다. 내가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북한에 문제제기를 할 것도 없이 유엔에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국군포로를 아직 붙잡고 있는 현행범이라고 고발하면 된다. 이미 81명이 탈북해서 남한으로 넘어왔다. 살아있는 증인 51명이 있다.”

―한국에 돌아온 국군포로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84세 된 국군포로 할아버지 한 분은 휴지 주워서 한달 20만원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게 말이 되는 나라인가. 국방부에 얘기하면 거기서는 다들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가서 직접 봐야 한다. 정착금으로 3억∼4억원씩 줬다고 하는데 많은 돈이 아니다. 그분들에게 제공된 임대아파트 가격까지 다 쳐서 계산한 거다. 그분들 남한으로 오는 브로커 비용만 1억원이 든다. 일반인 탈북비용보다 훨씬 많다.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할아버지들을 총알 날아오는데 업고 뛰어와야 하니 당연히 비싸다. 민주화 유공자들에게는 몇 배 많은 돈이 지급되고 있지 않나.”

―정부의 실질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얘기인가.

“정부가 국군포로 요양원을 만들면 그분들 숙식이 해결된다. 얼마 전에 남재준 국정원장이 국군포로들을 만나줬다. 그 자리에서 남 원장은 ‘그동안 국가가 (국군포로 문제에) 너무 소홀했다. 대한민국이 그동안 비겁했다’고 사과했다. 그나마 정부 바뀌고 국가정보원장이 국군포로를 만나는 일이 성사됐다. 뭐가 상식이고 비상식인지 모르겠다.”

―국군포로 유해 송환할 때 정부 도움은 받았나.

“전혀 못 받았다. 외국에서 유해 들어오는 게 힘들지만 청춘을 국가에 저당 잡힌 사람들이다. 돈을 달라는 게 아니다. 이분들이 떳떳하게 귀국할수 있게 해달라는 거다. 그런데도 못 도와주겠다고 하더라.”

―한국에 유해 도착할 때 합당한 예우는 갖춰졌나.

“언론이 없다면 해주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건 안 된다고 얘기했다. 봉고차 안에서 유해에 태극기 덮어주겠다고 하더라. 정부가 국군포로 존재를 국민들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은 거다. 국군포로는 북한에서도 노예처럼 수용소 생활을 했고, 대한민국에 와서도 ‘통제 대상’이다. 오죽하면 국군포로가 군비통제과 소관이겠나. 국군포로는 한국에서도 포로다. 이 일 하면서 성질 많이 나빠졌다. 싸우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되더라.”

―지금도 국가가 도와주면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국군포로가 있나.

“오늘도 군비통제과 직원을 만나기로 한 이유가 지난번 국군포로 유해를 송환하고 나서 북한에서 연락이 온 분이 있다. 자기 생년월일과 주소 등을 보내왔는데 이분이 국군포로가 맞는지 확인해서 알려주기로 했다. 하물며 짐승도 죽을 때는 자기 고향 쪽에 머리를 두고 죽는다고 한다. 귀소본능은 누구한테나 있는 거다.”

―정부는 돈을 주고 국군포로 등을 송환해오는 ‘프라이카우프’(Freikauf·자유를 사다) 제도를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의원 시절 내내 주장했던 내용이다. 북한이 국군포로가 없다고 하면 없는 건가? 아직 국내에 51분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북한 입장도 있으니 송환 작업은 정부가 물밑에서 작업하는 게 낫지 않나. 독일도 물밑에서 해결하지 않았나.

“그렇지 않다. 독일은 공개적으로 했다. 정부에서 예산을 지원했고 독일 언론사가 중간에서 돈을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한국 언론들은 뭐하고 있나. 서독 언론은 베를린 장벽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단 하루도 기사를 쓰지 않은 날이 없었다. 우리 언론은 냄비처럼 쉽게 달아올랐다가 쉽게 식는다. 당시 동독 정치범 한명 데려오는 데 우리 돈으로 2000만원에서 시작해 5000만원까지 지급됐다. 그렇게 큰 돈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북한에 준 것을 생각하면 국군포로들을 다 데려오고도 남는다.”

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정리=김민서 기자

■ 박선영 사단법인 물망초 이사장 약력

▲1956년 출생 ▲1978년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 졸업 ▲1995년 서울대 대학원 법학박사 ▲1977∼1989년 MBC 보도국 기자 ▲2008∼2011년 자유선진당 대변인 ▲18대 의원 ▲2012년 사단법인 물망초 이사장 동국대 교수 재직

미국이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사실상 지원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대다수 한국인은 착잡한 심경으로 바라보고 있다.

(미국은 2013년 10월3일 도쿄에서 열린 미일 외교·국방장관 연석회의에서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일본 아베 신조 정권의 헌법 해석 변경 노력에 대해 '환영'과 '협력'의 뜻을 밝혔다)

집단적 자위권은 동맹국이 공격당했을 때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고 반격할 수 있는 국제법상의 권리이다. 미국 등 연합국이 1951년 2차대전 패전국 일본과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일본은 주권국가로서 유엔헌장 51조에 언급된 개별적 혹은 집단적 자위권을 소유하며…’라고 명문화돼 있다. 미국은 6·25전쟁을 계기로 일본을 동북아 안보전략의 요충 국가로 만들겠다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미국이 9·11테러 이후 세계적인 대테러 활동 과정에서 일본 자위대의 적극적인 집단방위 노력을 이끌어 내려 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일본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나 아베 총리 같은 우경화 성향의 지도자가 등장할 때마다 자위대 이지스함의 페르시아만 파견이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일본 헌법 개정 또는 헌법해석 변경 시도를 통해 맞장구쳤다.

그럼에도 지금껏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자제하고 있는 것은 국내 반전 여론 때문이다. 일본이 천황제를 지키기 위한 고육책의 일환으로 고안해낸 ‘평화헌법’도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억제해왔다. 일본 헌법 9조는 ‘일본인은 영원히 국가 주권으로서의 전쟁과 국제분쟁 해결 수단으로서의 군대 사용 또는 위협을 수행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 보수파들은 “일본 헌법이 집단적 자위권을 명백히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고 강변하고 있으며, 아베 정부도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다는 쪽으로 헌법 해석을 변경하려 하고 있다.

미국은 오랫동안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학수고대해왔다. 현행 평화헌법 체제에서는 미국 군함이 적국에 의해 공격을 받았을 때 일본 자위대는 원조 행위를 일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총리와 함께 미·일 밀월(蜜月)시대를 구가했던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는 미·일의 원활한 동맹 작전 수행을 위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요구했으며, 일본을 지금보다 강한 방위력을 갖춘 ‘보통국가’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세우기도했다. 최근 들어 일본이 미국의 동북아 미사일방어(MD) 체계에 깊숙이 편입되고 있는 현실은 그 결과물이다.

 

                                                   2013년 10월3일 도쿄에서 열린 미일 외교·국방장관 연석회의(2+2·미일안전보장협의위원회)



곤란하게 된 건 한국이다. 한·미 동맹을 한반도 안보의 주축으로 삼고 있는 우리는 미·일 동맹의 강화 기조를 반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더욱이 재정적자에 짓눌린 미국이 일본과 함께 동북아 안보 부담을 나눠 지려 하는 것을 반대할 처지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미·일의 외교·국방장관들이 만나 축배를 들고 있는 모습에는 왠지 거부감이 앞선다. 대다수 한국인의 감정이 그럴 것이다.

이런 막연한 거부감의 배경엔 100년 전 구한말의 집단 기억도 깔려 있을 것이다. 당시 제 힘으로 제 나라를 지킬 수 없게 된 조선은 미국을 상대로 한 생존외교에 사활을 걸었다가 배신당한 뼈아픈 경험이 있다.

고종은 조선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조·미조약의 ‘거중 조정’(good offices) 조항에 기대 일본의 조선 침략을 막아보려 했으나 당시 미국의 국익은 일본과 손잡는 것이었다. 영국에 이어 해양 패권국이 되고자 했던 미국에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최적의 파트너였다.

21세기의 미국은 조선에 냉담했던 100년 전의 미국이 아니다. 일본도 제국주의 시대로 회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일본과 손잡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은 태생적으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서 생존전략을 모색해온 반도국가의 지정학적 고충을 가중시키고 있다. 미국을 등에 업고 서슴없이 과거사·영토 도발을 자행하는 일본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잠재돼 있던 100년 전의 기억을 되살린다. 일본이 철저한 과거사 반성의 토대 위에서 ‘보통 문명국가’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미국이 한·일 역사갈등에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지속한다면 일본의 정상국가화도, 미국의 동북아 안보전략도 온전히 완성될 수 없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평양 중구역에 자리 잡은 연회장 ‘목란관’엔 대형 ‘해 사진’이 벽에 걸려 있다.

금강산과 동해 위로 붉은 해가 떠 있는 사진이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 일행에게 “저게 해 뜨는 장면 같소, 아니면 지는 장면 같소?”라고 물은 뒤, “아침에 들어와서 보면 해뜰 때, 술 마시다 저녁에 해 질 때 보면 또 저 장면”이라고 자문자답했다는 바로 그 사진이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취재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했던 기자가 보기에도 목란관의 해 사진은 떠오르는 것인지, 지는 것인지 쉽게 분간하기 힘들었다. 남북경협의 상징이라는 개성공단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작금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는가를 놓고 온 나라가 두 패로 갈려 야단법석을 떨었을 때, 그 사진이 생각났다. 개성공단 해법이든, NLL 해법이든 정답은 하나일 수 없다. 보수와 진보, 중도가 각자의 해법을 들고 국민의 선택을 받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다. 그러라고 정치가 있는 것이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은 진보, 그중에서도 이른바 친노(친 노무현) 세력의 대북 해법이 가동된 시기였다. 노무현정부는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을 계승하면서도 안보 면에서는 더 과감한 구상을 실험했다. 그 핵심이 NLL 위에 ‘서해 평화수역’을 덮어씌우겠다는 구상이다. 노무현의 대북 접근법은 무모하고 안이했다. 김정일은 노무현의 서해 평화수역 구상을 NLL 무력화의 불쏘시개로 썼다. 노무현정부를 방패 삼아 미·일의 대북압박을 우회하면서 핵·미사일 능력을 한층 강화시켰다.

2007년 10월2일 저녁, 목란관을 무대로 연출됐던 한 편의 소극(笑劇)이 떠오른다.

당시 노 대통령이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식사를 하던 도중 만찬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김만복 국정원장과 김장수 국방장관(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이 북측 관계자들과 함께 일어나서 “위하여!”를 외치자 옆 테이블에서도 남북 인사들의 건배 릴레이가 이어졌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노 대통령은 갑자기 술잔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 연설 마이크가 있는 단상으로 걸어나갔다. 의전에 없던 돌발 상황이었다.

“오늘 저녁에 여러분이 각 테이블에서 건배하는 것을 보니 신명이 좀 나는 것 같습니다. 나머지 테이블은 따라 하자니 그렇고, 안 하자니 기분이 안 풀리는 것 같으니 다 같이 기분을 풉시다.” 노 대통령의 발언은 계속됐다. “남북한 간에 평화가 잘되고 경제도 잘되려면 빠뜨릴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하시고, 또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건강해야 합니다. 좀 전에 (제가) 건배사를 할 때 두 분의 건강에 대해 건배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만찬장이 술렁거렸다. 어느 한국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김정일의 만수무강을 빌어준 일이 있었던가. 노 대통령은 “신명난 김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영남 상임위원장, 두 분의 건강을 위해 건배합시다”면서 “위하여!”를 선창했다.

노 대통령은 그 다음날 오전 김정일과의 첫 정상회담을 마친 뒤 수행원들과 취재진이 기다리고 있던 대동강변의 옥류관으로 돌아와 예정에 없던 오찬사를 했다. “남측이 신뢰를 가지고 있어도 북측은 아직도 남측에 여러 가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 불신의 벽을 허물기 위해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우리는 개성공단을 ‘개혁과 개방의 표본’이라고 많이 얘기했는데, 우리의 관점에서 우리 편한 대로 얘기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북측이 보기에는 역지사지(易地思之)하지 않은, 그런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본인의 표현 그대로, 매사에 북한 입장에서 역지사지하자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었다고 전제하고 보면, 그가 김정일과의 정상회담 과정에서 “그것(NLL)이 국제법적인 근거도 없고 논리적 근거도 분명치 않은 것인데…”라거나 “남측에서는 이걸(NLL) 영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말한 사실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북핵과 관련해서 “북측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하고 싸워 왔고, 국제무대에 나가서 북측 입장을 변호해 왔다”고 한 발언도 자연스럽다. 국제사회의 제재와 중국의 냉랭한 태도로 의기소침해진 북한 정권이 유독 우리 정부에게만은 협박을 서슴지 않고 있는 이유도, 언젠가는 남한에서 ‘북한 입장에서 역지사지하는 정권’이 들어설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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