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의 아제르바이잔 방문에 동행했을 당시 수도인 바쿠에서 한국어가 유창한 현지 대학생들과 조우한 적이 있다. 바쿠 국립대 학생들이라고 소개한 이들은 대화 도중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학을 배우면서 한국을 동경하게됐다”고 말해 기자를 감동시켰다. 문화교류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한 경험이었다. 바쿠 국립대에 개설된 한국어와 한국학 과목은 KF(Korea Foundation·한국국제교류재단)가 파견한 한국 객원교수가 담당한다. KF는 한국어·한국학 진흥, 문화예술교류, 인적교류 및 지한파 육성 활동 등을 통해 정부의 외교활동을 지원하는 외교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한국의 친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유현석 KF 이사장을 지난 19일 서울시 중구 KF문화센터 집무실에서 만났다.


 

 


―국제교류재단 대신 ‘KF’로 부르는 게 더 기억하기 쉬운 것 같다. KFC(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에서 C만 빼면 되니….

“다른 데서도 그런 말을 들었다. 두 번 들었으니 바꿔야겠다. 국제교류재단은 지자체마다 다 있다. 비슷한 게 너무 많아 국민들이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잘 모른다. 외교부는 할 수 없는, 해외 싱크탱크 지원이랄지,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이런 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예산 배정에서 밀리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의 대외원조 활동도 한국의 국격(國格) 향상에 도움이 되지만 한국어를 포함해 문화적으로 한국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는 일도 중요하다. ”

―KF와 코이카 예산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

“우리가 500억원 정도이고 코이카가 6600억원 정도다. 코이카는 올해 600억원 늘었다.”

―코이카의 10분의 1 수준인데 국회나 정부가 KF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 같다.

“솔직히 국제사회에서 정치적으로는 KF가 중요하다. 원조는 수혜국 입장에서 별 느낌이 없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중남미 어느 나라는 중국이 쏟아붓는 원조에 비해 소액에 불과한 우리의 원조를 그다지 감사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KF의 초청 대상 인사들은 1주일만 한국에 머물다가면 모두 한국의 팬이 된다. 아프리카 초청 인사는 대부분 대통령급 인사다. 그러면 그 나라 주재 한국대사는 일하기가 아주 편해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코이카의 원조 활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국제사회 지도층, 오피니언 리더를 움직이는 KF의 활동도 중요하니깐 어느 정도는 (예산 배정 등에서)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올 예산안 편성 때 좀 더 배정해달라고 요청하지 그랬나.

“예산은 예산당국의 논리가 있다. 중요하다고 설명하면 지금 중요하지 않은 예산이 어디 있느냐고 한다. 대통령 관심 사업이라고 해도 똑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다행히 지금 국회 상임위에 한국학 지원(15억원), 지자체 국제교류 역량강화 사업 예산(7억원)이 올라가 있다. 그런데 살아돌아올 확률이 높지 않아 걱정이다. 그동안 한국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지역에서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신청이 쇄도하고 있다. 한국학 지원 예산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예산이다.”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인가.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 지역이다. 이들 지역에서 한국 드라마, 한국 가수가 인기를 끌고 ‘한류(韓流)’ 열풍이 불면서 한국어과, 한국어 강좌를 개설해달라는 신청이 들어오고 있는데 예산 문제로 10개가 들어오면 1개도 해주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그런 나라들의 대학에 한국어 강좌 하나 개설하는 데 비용은 얼마나 소요되나.

“강좌를 열려면 일단 교수가 있어야 하는데 가장 싸게 보내는 게 객원교수를 보내는 방식이다. 그러면 1년에 6만달러 정도 필요하다. 우리가 5, 6년 계약해서 그 교수의 인건비를 지원하면 해당 학교에서 종신직으로 고용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최근 우리와 관계가 악화된 일본에도 공을 들이고 있나.



“일본은 주로 민간 차원에서 고위 인사, 학생 초청해서 하는 문화교류다. 정무적인 부분은 조금 어렵다.”

―내년은 한·일 국교 수립 50주년이다. 경색 국면을 풀어내기 위한 민간 차원의 노력이 요구된다.

“양국 국민으로 한·일합창단을 만들어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제3국에서 공연하기로 일본국제교류기금과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한·일합창단 프로그램 관련해서 우리는 외교부 승인을 받았는데 일본국제교류기금은 아직 일본 외무성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다.”

―양국 국민이 화합의 노래를 부르겠다는데 일본 정부가 안 해줄 이유가 있나.

“그렇죠. 그런데 아직까지 오케이 안해서 (일본국제교류기금 측에) 승인 못 받으면 다른 일본 파트너를 찾겠다고 얘기했다. 실제 한·중·일 3국이 함께하는 민간교류 프로그램이 여러 개 있는데 일본이 소극적이다. 한·중·일 예술인 공연도 지난해 일본이 참가하지 않아서 한·중 두 나라만 했다. 3국 미술전에도 일본은 잘 안 온다.”

―중국 쪽 민간교류는 어떤가.

“중국과는 활발하다. 고위급 포럼도 있고 초청사업도 많다. 중국은 매우 적극적이다. 교류 프로그램을 만들기만 하면 참여하겠다고 한다. 돈 걱정도 하지 말라고 한다. 이 기회(한·일관계가 소원한 계기)에 우리를 끌어안으려는 중국의 외교 공세가 느껴진다.”

―KF 입장에서 좀 조심스럽겠다. 외교부에서 말리는 일은 없나.

“그렇지는 않다. 교류는 좋은 것이다. 외교부도 정치색 들어가는 교류는 경계하지만 중국에서 요구하는 것은 대부분 인적교류다. 중국 내 혐한(嫌韓)감정 등 양국 간에는 오해가 많다. 중국은 인적교류를 많이 하려고 한다. 중국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일본은 굉장히 조심한다.”

―이러다가 한·중관계가 한·일관계보다 더 좋아지는 상황이 올 수 있겠다.

“민간 차원의 인적교류가 늘어난다고 해서 정무적으로 바로 연결될 것 같지는 않다. 외교부도 그렇고 저희 사업 방향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한·일관계는 굉장히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움직인다. 우리도 일본과의 사업을 강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번에 한·중·일 차세대 포럼이 중단된 지 6년 만에 살아났다. 3국의 45세 이하 국회의원, 언론인, 기업인, 문화계 인사, 시민사회 인사 등이 참석 대상이다. 이들이 3박4일씩 세 나라에 머물면서 교류하는데 12일 정도 하루종일 붙어다니면서 찜질방에도 가고 술도 먹고 하면서 어울리다 보면 정말 친구가 된다.”

―KF가 차세대 리더들에게 공을 들이고 있는 것 같다.

“차세대들은 사고가 열려 있고 한국에 대한 인상이 기본적으로 좋다. 올드 제네레이션은 한국 하면 가난, 전쟁, 독재를 떠올린다. 차세대들에겐 이런 게 없다.각국 의회 보좌관, 국무성 초급 관리 등을 초청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최근 KF가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 이어 브루킹스연구소에도 ‘코리아 체어(한국석좌연구직)’를 개설했다.

“미국은 한국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나라다. 앞으로 우드로윌슨센터와 미국외교협회(CFR) 등에도 한국센터를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이런 걸 만들려면 처음에 기금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300만달러 정도가 필요하다. 한국 기업들의 적극적 참여가 필요하다. 미국 싱크탱크 지원 관련 예산은 연간 7억원으로 일본의 10분 1 수준이다. 차세대 전문가 그룹은 중장기적으로 미국의 대(對)한반도 정책 및 미국 내 한국 관련 여론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므로 미국 내 지한 네트워크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차세대 한국정책전문가를 육성하는 싱크탱크 사업 강화가 시급하다.”

―현재 준비 중인 사업은.

“국내에는 150만에 이르는 국내거주 외국인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의 노력 여부에 따라 한국에 우호적 또는 적대적이 될 수 있다. 이들 국내거주 외국인에 대한 체계적, 통합적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정리=김청중 기자, 사진=남정탁 기자

◆ 유현석 이사장은… ▲1963년생 ▲서울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미 노스웨스턴대 정치학 박사 ▲중앙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국무조정실 정책평가위원, 외교통상부 자체평가위원,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올해 노벨평화상을 받은 파키스탄 소녀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2012년 10월9일 통학 버스 안에서 총에 맞았다. 이슬람의 악성 변종인 탈레반은 여자가 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말랄라의 얼굴에 총을 쐈다. 한때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장악했던 탈레반은 이슬람 근본주의로 포장된 야만의 세력이다. 화석화된 이슬람 율법을 강요한 탈레반은 주민에게서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자유, 공부할 수 있는 자유, 토론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았다. 말랄라는 저서에서 기회만 있었다면 자신에게 총을 쏜 두 남자에게 “왜 우리 여자들을, 당신의 누이와 딸을 학교에 보내야만 하는지 설명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반은 열다섯 살 소녀의 자유를 향한 열망을 향해 총을 쏜 것이다.

 



자유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말랄라 뒤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말랄라는 “아들이 태어나면 축포를 쏘고 딸이 태어나면 커튼 뒤에 숨기는 나라, 그저 요리를 하고 아이를 낳는 일이 여자의 평생 역할인 나라”에서 태어났다.(‘나는 말랄라’·문학동네) 여성 천시는 그가 속한 파슈툰족의 문화였다. 하지만 말랄라의 아버지는 달랐다. 말랄라가 태어나자 남자들의 이름만 적힌 족보에 말랄라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남 보란 듯이 딸의 이름은 아프가니스탄의 위대한 여걸 이름인 말랄라이를 따서 지었다. 주변의 손가락질과 탈레반의 위협을 무릅쓰고 딸을 학교에 보냈다. 아버지는 항상 “말랄라는 새처럼 자유롭게 살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여행을 좋아했던 동독의 물리학자 앙겔라 메르켈은 60세가 되면 미국에 가겠다는 소망을 품고 살았다. 구동독 정권 시절엔 연금 수령 개시 연령인 60세가 돼야 서방국으로 여행을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어린 시절 영화와 책을 통해 미국을 접하며 미국에 대한 그리움을 키웠다고 한다. 메르켈이 꿈꾼 것은 자유의 정신이었을 것이다.

마치 ‘신의 한 수’가 작용한 듯이, 냉전의 얼음이 녹기 시작하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메르켈의 미국행 꿈은 24년이나 앞당겨 실현됐다. 독일이 통일을 이룬 뒤 메르켈은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최초의 동독 출신 총리가 됐다. 35년 동안 억압된 체제에서 살아온 메르켈에게 자유는 어떤 의미였을까. “자유는 내 평생 가장 행복한 경험이다. 자유만큼 나를 감탄시키고 격려하는 것은 아직 없다. 자유보다 더 강하게 나를 만족시키는 좋은 감정은 없다.” (‘위기의 시대 메르켈의 시대’·책담)
메르켈의 뒤에도 아버지가 있었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메르켈이 태어나자마자 동독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딸이 동독의 억압 체제 하에서 자유를 꿈꿀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는 언젠가 언론 인터뷰에서 “동독만으로도 이미 압박은 충분했다. 집에서만큼은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시대착오적인 3대 세습독재 체제와 이웃해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말랄라와 메르켈이 꿈꾼 자유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북한 내에도 수많은 메르켈과 말랄라가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며 살고 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수많은 탈북민들이 그 증인이다.

인간이 평생을 바쳐 완성해야 할 여러 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그 자신이라고 ‘자유론’의 저자인 존 스튜어드 밀은 역설했다. 자유가 없이는 개성의 완성이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지난 시절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했던 이유 중 하나도 그들이 우리의 자유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국회가 ‘북한 인권법’을 제정해 북한 내 인권 침해범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일본군 성노예(위안부) 강제동원 사실(史實)을 인정하고 피해 할머니들에게 사과해야 하는 이유도 매한가지다. ‘자유’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문명사회에 부여된 제1의 도덕적 책무이기 때문이다. 과거 군사독재정권까지도 ‘자유’의 기치를 내건 탓에 우리 사회에서 ‘자유’에 담긴 본래의 의미는 심하게 왜곡됐다. ‘자유’를 전면에 내세운 단체가 스스럼없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태를 보이는 곳이 자유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말랄라의 노벨상 수상이 자유의 가치와 한계를 성찰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영화 ‘명량’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불현듯 김종대(66·사진)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떠올랐다. 그는 1975년 봄 책방에서 노산 이은상 선생이 쓴 ‘충무공의 생애와 사상’을 접한 뒤 39년 동안 이순신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저서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를 쓰고 이순신 강연을 다니고 ‘이순신 스쿨’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사람들은 그를 ‘이순신 전도사’로 불렀다. 영화 ‘명량’의 흥행 돌풍에 그의 입은 귀밑까지 찢어졌으리라. 7일 부산에 살고 있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배우 최민식이 열연한 ‘명량’의 이순신이 그가 그린 이순신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자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명량’을 보면서 영화 속 이순신과 저서 속 이순신이 동일 인물처럼 느껴졌다.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원인이 역사적으로 규명이 안 됐다. 일본은 패배한 이유를 모른다. 이순신은 명량해전 전날 저녁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가르쳐 줬다고 썼다. 명량해전 승리 후에는 ‘이는 실로 천행이었다(此實天幸)’고만 했다. 나는 그 신인이 무슨 얘기를 했을까, 오래 고민했다. 이순신의 내면 세계를 추측해봤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다.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하려는 이순신의 정성이 지극해서, 하늘을 움직인 것 아닌가. 이순신은 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명량’을 만든 김한민 감독의 생각이 나와 같았다.”

―‘명량’ 제작 과정에 참여했나.

“헌법재판관 시절인 2년 전쯤 우연찮게 김 감독과 국밥집에서 만났다. 나의 이순신 강연을 들었던 김 감독의 형이 다리를 놨다. 명량해전을 소재로 한 영화 ‘명량, 회오리 바다’를 기획 중이라고 했다. 김 감독은 내 책을 읽고 확신을 가졌다고 했다. 김 감독과 나는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원인에 공감했다. 김 감독은 내가 지은 시(詩)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명량’을 찍었다고 한다.”

김 전 재판관의 저서 ‘이순신’은 이 시로 끝난다. ‘한산 바다 거북전선/적의 탐욕 응징했고/명량 바다 열두 전선/배달 불꽃 되살렸네/…/영웅으로 태어나서/성웅으로 돌아가니/거룩하다 님의 생애/죽었어도 살았도다!’ 김 감독은 최근 김 전 재판관의 저서를 소개하는 글에서 “12척 대 133척, 이 불가사의한 승리를 영화로 만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왔다. 이 책은 막연했던 영화 ‘명량’에 강한 확신을 주었다”고 썼다.

―‘명량’이 연일 관람객 동원 기록을 경신해가고 있다. 흐믓하겠다.

“김 감독을 도와서 ‘명량’을 명품으로 만들어서 10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다면 내가 백번, 이백번 강연해서 몇 만 명에게 이순신을 알리는 것보다 더 이순신을 국민에게 가깝게 맺어주는 것 아니겠나. 김 감독이 소중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명량’ 촬영 전에 지내는 고사(告祀)에도 참석했고 촬영 현장도 찾았다. 김 감독을 만난 뒤로는 이순신 강연에서 주로 명량해전을 주제로 삼았다. 강연 말미엔 김 감독 자랑과 영화 ‘명량’ 선전을 잊지 않았다.”

―‘명량’의 흥행 성공 저변엔 영화 외적인 뭔가 깔려 있는 것 같다.

“우리 국민이 이순신 같은 인물을 갈망하기 때문에 더 열광하는 것 같다. 자기의 명예, 심지어는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백성을 살리고 나라를 지켜내려는 지극한 나라 사랑과 위험하고 어려운 일일수록 솔선수범해 정성을 다하는 지도자 이순신의 무한책임의식이 국민의 마음에 울림을 만들어냈다고 본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 도망친 선장이나 GOP(일반전초) 총기난사 사건 당시 도망친 군 간부도 앞에 놓을 가치와 뒤에 놓아야 할 가치를 전도시켜 자기만 살고 보자 해서 도망간 게 아닐까. 전도된 가치를 바로잡을 약재로는 이순신 정신이 가장 큰 보약이라 생각된다.”

―영화 ‘명량’이 떴으니 책도 많이 팔릴 것 같다.

“출판사에서 신문에 광고를 내기 시작했다.(웃음) 지금까지 3만5000부 정도 팔렸는데 인세는 1원도 받지 않았다. 인세로는 ‘이순신 아카데미’도 운영하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이순신 독서감상문 행사도 개최한다.”

그 말을 듣고 책을 확인해보니 ‘수익금 전액은 충무공사상 선양기금으로 사용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부박한 질문을 던진 기자는 민망해졌다.

―‘이순신 아카데미’는 뭔가.

“누구나 이순신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만든 이순신 강좌다. 원래는 남녀노소 누구나 이순신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이순신 학교’를 만들 계획이었다. 세월호 참사나 군 총기·폭행 사건도 인성이 바로서야 해결되는 문제다. 교육부가 추진하면 힘을 받을 것 같아서 6년 전쯤 교육부에 문의했다. 서너 달 뒤에 ‘참 훌륭한 생각이다. 그 문제는 두고두고 연구하겠다’는 답신이 왔다. 지금도 연구 중인지 답신은 없다. 그러던 차에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순신은 자조정신을 강조했는데 내가 너무 정부에 의존하려 하지 않았나. 이순신이 저를 나무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선 손쉬운 일부터 해보자고 시작한 게 이순신 아카데미다.”

-영화 ‘명량’의 감상평을 말씀해주신다면.

“우선 재미있고 현실감있게 전투를 재현해 낸 작품으로 작품 자체로서 완성도가 높아 보인다. 제가 그 영화를 보며 주목한 것은 김한민감독이 명량해전의 조선 수군의 승리원인을 어떻게 그려내는가 였는데, 조선수군이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 장수 이순신은 어떻게 했는가 하는 것을 찾아가는 진지한 노력이 있었다고 보인다. 사실 명량승첩의 사실을 밝힐 객관적 사료가 없기 때문에 상당부분 상상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김감독의 추리는 전체적으로 훌륭했다고 본다. 나는 쓰러져가는 대장선을 백성들이 힘을 합쳐 바로 세우는 장면이 멋졌다.”

-어떤 계기로 이순신에게 매료가 됐나.

“특별한 이유는 없다. 군법무관시절 이순신을 주제로 강연준비를 하면서 운명적으로 빨려 들어갔다고나 할까요. 지금 와서보니 사회적 병리현상에 관심을 가져오던 중 그 병을 낫게 할 치료제를 이순신에게서 찾을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서 이순신 공부가 지속되었다고 생각된다.” 

-정치권을 비롯, 국가적 리더십이 국민의 불신을 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순신의 진면목이 더욱 빛나는 것 같다. 이순신의 삶이 이 시대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모든 지도자는 자신들의 사사로운 가치나 욕심앞에 항상 우리 모두에 대한 공공의 가치와 이익을 놓는, 즉 목숨바쳐 나라사랑하는 지도자, 맡은 바 정성을 다해 공적책임을 완수하는 지도자들이 많아져야 오늘날 이 국가사회가 아픔에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서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허점 찾기에 온갖 노력을 보았지만 단 한 군데 흠잡을 곳을 찾을 수 없었다”고 썼다. 세상에 흠이 없는 인간이 있을 수 있을까요. 문외한의 입장에서는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읽혔다.

“흠을 찾아내어 제가 과장된 표현을 한 점을 나무라 주시면 저도 영광이겠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이달 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을 계기로 조선의 17세기가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그 바탕엔 조선이 사대(事大)했던 명나라의 국력이 쇠하고 여진족의 후금(청나라)이 동북아 패권국으로 부상한 당시 정세가 중국의 굴기(堀起)로 미국의 동북아 패권이 도전받고 있는 작금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동북아 패권 지형도가 새로 그려질 때마다 우리가 생존의 기로에 서는 것은 대륙·해양 세력 사이에 낀 한반도의 지정학적 숙명이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의 저자인 명지대 한명기 교수가 서문에서 “병자호란은 ‘과거’가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일 수 있으며, 결코 오래된 미래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반추해야 할 ‘G2(미·중) 시대의 비망록’이다”라고 쓴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역사가 기록하고 있듯이, 17세기 조선의 국왕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후금은 '떠오르는 태양', 명나라는 '지는 해'로 봤기 때문이다. 반면 사대사상에 매몰된 조선 신료들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며 광해군에 맞섰다.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인조반정·1623년)한 조선은 친명 노선을 고수하다 끝내 대청(大淸)제국으로 강성해진 여진의 침략(병자호란·1636년)을 자초했다. 인조는 송파의 삼전도에서 오랑캐 수장이라고 멸시했던 청 태종 홍타이지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이다. 조선 백성은 인조나 조정 신료보다 더 참혹한 수난을 당했다. 청군은 철수할 때 조선 백성 수십만명을 끌고갔다.

                                                                                                     <삼배구고두례>


병자호란으로 능욕당한 조선의 원혼들은 21세기 한반도에 “자강(自强)만이 살길”이라고 통곡한다. 광해군은 말했다.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급하다. 이런 때에는 안으로 자강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가 했던 것처럼 한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았다. 광해군은 성곽을 쌓고 장병을 기르는 데 써야 할 소중한 재원을 궁궐을 짓는 데 탕진했다. 신료들은 틈만 나면 광해군을 흔들었고 광해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정적(政敵)을 내치는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후금군에게 격파된 이후에도 조선은 단결하지 않았다. 쿠데타로 광해군을 내쫓은 서인(西人) 정권도 입으로만 전쟁을 외쳤다. 전쟁은 준비하지 않고 화친(和親)만을 반대했다. 후금이 쳐들어오자 임금(인조)은 수도를 버렸고 장졸은 창을 버렸다. 군 최고통수권자와 지도층이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자 조선은 유린됐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6·25전쟁 때도 그랬다. 17세기 조선의 집권 세력은 임진왜란의 교훈을 잊었고 6·25전쟁 당시 이승만정부는 병자호란의 교훈을 잊었다.

17세기 조선이 취한 대외 전략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광해군 집권(1608년) 당시 조선과 명나라는 동맹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함께 치른 혈맹 관계였다.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침략에 맞서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再造之恩·재조지은)를 저버려선 안 된다는 여론도 팽배했다. 아직 후금은 요동 지역도 평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금나라가 강성해질 때까지 화친조약을 거부하며 항전했던 고려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 더 실리적이지 않았을까. 물론 이런 가정은 부질없다. 인조반정을 전후한 시점에 여진은 더 이상 명나라와 조선이 맞설 수 없을 만큼 강한 제국이 돼 있었다. 그렇다면 인조와 서인 정권은 현실을 직시하고 광해군의 실용주의 노선을 계승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이 또한 부질없는 가정이다.

조선은 시대착오의 대명사인 돈키호테처럼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모험주의로 치달았다. 정작 싸워야 할 때는 싸우지 않고, 더 이상 싸움이 무의미할 정도로 대세가 기울었을 때는 허상의 명분에 사로잡혀 치욕의 역사, 수난의 역사를 기록해 간 17세기 조선은 격동의 동북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선명한 반면교사로 다가온다.

조남규 외교안보부장

 

*아래 글은 삼전도비 현장을 찾은 중앙일보 장세정 논설위원의 글. 중앙일보 2020년 6월8일자.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555m 롯데월드타워 옆 3.95m 삼전도비 '패권 싸움 흑역사'

 

지정학이 초래하는 구조적 비극은 언제든 되풀이될 위험이 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은 예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미·중 패권 경쟁이 과열되는 지금, 대륙 패권을 놓고 명·청이 다투던 400년 전 17세기 조선에 눈길이 쏠리는 이유다.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에서 교훈을 얻자는 '다크 히스토리(흑역사) 투어' 차원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관련된 두 유적지를 답사했다. 하나는 임진왜란(1592~1598) 당시 군대를 보내준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보답하겠다며 친명 사대주의 의리를 다짐한 만동묘(萬東廟)다. 다른 하나는 병자호란(1636~1637) 때 남한산성의 굴욕을 생생하게 기록한 삼전도비(三田渡碑)다.   

양난(兩亂)으로 불리는 두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 왕조는 건국 200년 만에 뿌리부터 크게 흔들려 당장 망해도 이상할 게 없는 지경이었다. 왜군과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힌 백성은 어육(魚肉)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명·청 교체기에 대외 전략 오판이 자초한 삼전도비와 만동묘는 동전의 양면이다.
  
 ①만동묘, 조선시대 친명 사대주의 상징
 지난 3일 충북 괴산의 만동묘를 찾아 나섰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로 2시간, 다시 차로 30분을 달렸더니 조선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은거하던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당도했다. 

사실 송시열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이 발탁한 인재였다. 하지만 최명길의 대척점에 있던 척화파 김상헌처럼 숭명배청(崇明排清) 노선을 걸었다.  
 병자호란 이후 1644년 명나라가 멸망했는데도 송시열은 화양구곡( 華陽九曲)의 명당자리에 만동묘를 짓도록 했다. 선조 때 터진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 만력제와 마지막 황제인 의종 숭정제의 위패를 송시열 사후인 1704년 만동묘에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경기도 가평 조종암(朝宗巖)에 선조가 남긴 만절필동(萬折必東) 네 글자를 송시열이 화양구곡의 첨성대 바위 절벽에 새겼고,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따서 만동묘라고 이름 붙였다. 만절필동은 황하 흐름이 수없이 꺾여도 결국 동쪽으로 간다는 뜻뿐 아니라 충신의 절개로 의미가 확장됐다.  
 만동묘로 올라가는 계단은 균형을 잡고 걷기 힘들 정도로 위태로웠다. 아래로부터 위를 향해 계단을 3칸, 5칸, 3칸, 5칸을 오른 뒤 맨 위에 황제를 상징하는 9칸 계단을 오르도록 배치했다. 임진왜란으로 망할 위기에 처했던 조선을 살려줬으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명나라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라는 의도가 숨어 있다. 
만동묘 유적을 몇 년 전에 답사한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전 한국정치사학회장)는 "계단 경사가 70도를 넘을 정도로 가파르고 계단 폭도 매우 좁다"며 "황제를 모신 사당이니 개처럼 기어서 올라가서 개처럼 기어서 내려오라는 무언의 압력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허영란 괴산군 문화해설사는 "계단이 하도 가팔라서 흥선대원군이 하인의 부축을 받고 올라가자 옆에 있던 문지기가 밀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고 전했다. 봉변당한 분풀이 차원인지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리면서 1865년 만동묘를 가장 먼저 철거했는데 이에 반발한 유림이 1875년 다시 세웠다.  
 명나라의 임진왜란 개입에 반감을 가졌던 일제는 1942년 만동묘를 불태우고 비석 건립 유래를 새긴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 글자를 정으로 모두 훼손하고 땅에 묻었다. 하지만 1983년 대홍수 때 비석이 다시 드러났고, 2004년 괴산 지역 유지에 의해 만동묘와 만동묘정비가 복원됐다.
 공교롭게도 만동묘의 존재를 널리 알린 것은 '친중 정권'이란 지적을 받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다. 2017년 12월 5일 당시 노영민 주중대사(현 대통령 비서실장)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인민대회당 방명록에 '만절필동(萬折必東) 공창미래(共創未來)'라는 글을 남겼다. 그의 본뜻은 우호 강조였겠지만 사대주의를 상징하는 용어 사용은 부적절했다. 더군다나 대사 부임 불과 8개월 전인 2017년 4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시진핑은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망언하지 않았던가.  
  
 ②삼전도비, 청나라에 항복한 굴욕 상징
지난 2일에는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와 함께 삼전도비를 찾아 나섰다. 김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남한산성'의 여운이 강렬했던 이유도 있지만, 굴욕의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석촌호수가 넓어 비석을 찾으려면 애를 좀 먹겠거니 생각했는데 뜻밖에 너무 쉽게 찾아냈다. 잠실 광역환승센터 2번 출구에서 석촌호수 공원 안으로 불과 20여m 걸어 들어가니 대한민국 사적 101호 '서울 삼전도비'가 눈앞에 들어왔다.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 새겨진 이 거대한 비석은 귀부(龜趺, 거북 모양의 받침)를 뺀 몸체 높이만 3.95m다. 32t 화강석을 충북 충주에서 캐낸 뒤 한강을 통해 배로 실어 날랐고 인부 400여명이 육지로 끌어서 옮겼다고 한다.
 명·청 교체기에 실리외교를 폈던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 세력들은 아무런 대비 없이 기울어가던 명나라를 섬기다 신흥 세력 후금(청)의 눈 밖에 난다. 김상헌의 척화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치열하게 대립했지만, 묘수를 찾지 못했고 끝내 굴욕적 군신 관계를 받아들여야 했다.  
 삼전도비 주변을 둘러보는 심정은 여러모로 불편했다. 병자호란이 터진 1636년 겨울 남한산성에서 약 50일간 농성하던 인조가 오랑캐로 여겼던 청 태종 앞에서 항복했다. 세 번 무릎 꿇고 아홉번 이마를 땅에 조아린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한 굴욕의 역사가 지금도 생생해 속이 불편했다.   

사실 삼전도비는 건립 과정과 건립 이후에도 수차례 수난을 겪었다. 청 태종은 비문을 조선이 직접 작성하도록 강요했고, 비석 크기를 문제 삼아 중간에 다시 제작하도록 했다.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의 관리들은 청나라에 머리 숙인 굴욕적 비문을 쓰지 않으려고 서로 떠넘겼다. 결국 문신 이경석이 쓴 비문에서 인조는 "내가 어리석고 미혹되어 하늘의 벌하심을 자초해 만백성이 어육이 됐으니 죄가 내 한 몸에 있다"고 했다.  
 청·일 전쟁에서 판세가 일본으로 기울자 고종은 사대주의를 상징해온 삼전도비를 아예 뽑아버리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1917년 일제가 다시 세웠고 해방 10주년이던 1955년 이승만 정부가 땅에 묻기도 했다. 
 이런 절절한 역사를 있는 그대로 설명해주는 유적 안내가 너무 부실했다. 부끄러운 역사라 감추고 싶었다면 근시안적 '역사맹(盲)'이다. 석촌호수에 놀러 나온 20대 젊은이들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배웠는데 유적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 어두운 역사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삼전도비 현장을 촬영하다 카메라 앵글에 삼전도비(3.95m)와 롯데월드타워(123층, 555m)가 동시에 들어와 깜짝 놀랐다. 무력으로 조선을 짓밟은 청나라의 강압으로 세운 삼전도비, 신중화주의로 무장한 중국에 의해 사드 보복을 당한 롯데가 세운 대한민국 최고층 빌딩. 인연인지 악연인지 그 둘이 지금 불과 100여m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서 있으니 이런 역사적 아이러니가 있을까.  
 삼전도비는 고증을 거쳐 2010년 4월 현재의 위치에 옮겨졌다. 2016년 7월 주한 미군의 사드 배치 방침이 발표되면서 중국의 사드 보복이 시작됐다. 롯데월드타워는 그해 12월 완공됐지만, 중국은 사드 기지 부지를 제공한 롯데를 부당하게 괴롭혔다. 군사 주권과 기업의 자율을 무시한 중국의 폭거였지만 한국 정부는 저자세다. 이 판국에 대통령은 "중국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 "한·중은 운명공동체"를 역설했으니 갸우뚱해진다.

신복룡 전 석좌교수는 "대한민국 최고층 빌딩을 배경으로 삼전도비를 바라보니 정보기술(IT) 최강의 나라가 아직도 소(小) 중화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갈라파고스 (거북) 증후군'에 빠져 있는 듯해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장은 "미·중 패권 경쟁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외교·안보가 까막눈이면 자칫 인조의 길로 갈 수도 있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해양세력과 연대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만동묘와 삼전도비가 우여곡절을 겪은 것처럼 한반도는 국제 질서 재편 때마다 시련과 능욕을 경험했다.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능력을 갖춘 나라가 됐다"(이수혁 주미대사)는 발언은 성급한 자만이다. 주요 11개국(G11) 가입을 거론하며 김칫국부터 마시지만, 망국의 그림자는 자만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태종과 세종 치세를 논하기에 앞서 선조·인조·고종의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역사의 거울에 지금의 우리를 차분하게 비춰봐야 한다.  

대담=조남규 외교안보부장

독일 통일은 ‘도둑처럼’ 오지 않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수십년 전부터 서독은 동독 주민들의 마음을 사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통일의 문이 열렸을 때 동독 주민들은 서독이 되길 원했다. 동독 주민은 자유선거로 의회와 정부를 구성한 뒤 의회에서 서독 기본법 아래 통일하기로 결단했다. 동독이 서독에 ‘합류(合流)’한 것이다. 독일은 통일 16년 만에 동독 출신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배출했다. 탈북민은 우리에게 ‘먼저 온 통일’이다. 통일을 앞당기고 북한 주민을 우리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이들이 탈북민이다. 탈북민 지원이 이들의 남한 정착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이유다. 올해로 설립 5년째를 맞은 ‘남북하나재단’(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은 탈북민 지원 정책의 중심 축이다. 정옥임 이사장 취임을 계기로 기존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에서 ‘남북하나재단’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정 이사장을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남북하나재단 이사장 집무실에서 만나 탈북민 얘기를 나눴다.



―지난달 말 기준 탈북민 숫자는 약 2만7000명에 이르렀다.

“과거 귀순용사가 넘어왔던 시절과 비교하면 많은 수이지만 통일되기 전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인 규모와 비교하면 굉장히 적은 숫자다. 아직 ‘유의미한’ 수치로 보기 어렵다. 그 것도 북한의 국경 통제가 강화되면서 2009년을 기점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다.”

―‘유의미한’ 수치라는 건 통일 과정을 촉발할 만한 숫자라는 것인가. 그런 의미의 ‘임계점’이라면 얼마만한 규모가 돼야 하나.

“재단의 법적 설립 근거에 보면 ‘통일 환경 조성’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이런 차원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추정하는 전략적 임계점 규모는 약 10만명이다. 지금은 함경북도 출신 탈북민이 70% 이상을 차지한다. 북한 심장부인 평양 출신 탈북민 수가 늘어나야 한다. 탈북민들이 남한에서 안착하고 그런 소식이 북한으로 흘러 들어가 북한 주민들에게 동기가 부여돼야 한다. 그 파장이 소위 평양특별시에 거주하는 250만명에게까지 전달되는 그 순간이 임계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내 탈북민의 생활은 안착됐나고 보나.

“아니다. 아직 시행착오가 많다. 탈북민 정착 지원 정책의 성패를 단언하기는 어려운 시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현실에 정직해져야 할 때다. 탈북민 다수가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고 기본적 의식주를 보장받지만 탈북민의 월평균 소득은 141만원에 불과하다. 우리 국민 월평균 소득은 221만원이다. 탈북민의 근속연수는 19개월인 데 비해 일반 국민은 67개월이다. 본인이 더 열심히 오랫동안 직장에 다녀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북한에서의 삶보다는 낫지 않겠나.

“최근에 만난 탈북여성들이 중국에서 (불법체류하다) 붙잡히지만 않으면 한국보다 거기서 사는 게 더 편하다고 하더라. 여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거다. 탈북민은 그게 우리 사회의 탈북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 탓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번에 한번 제대로 살아보갔어’라는 마음으로 한국에 온 ‘장마당 아줌마’들도 많다. 눈빛이 반짝반짝거린다. 우리 민족은 6·25전쟁 통에도 열심히 노력해서 잘사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 북한 사람들에게도 이 유전자가 있고, 이 유전자를 되찾아 주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자본주의 방식으로 차등지원해야 한다는 말인가.

“잘하는 사람에게 더 많이 주는 차등 지원을 해야 한다. 그리고 탈북민이 북한 체제에 반대해서 오는 사람들이라는 정형화된 환상도 버려야 한다. 아직도 길 가다가 미군 보면 주먹 쥐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경제적 이유가 많다. 탈북민 대다수는 북한에 있는 가족과 일가 친척들에게 중국 브로커를 통해 송금을 한다. 사실 그 돈이 북한 장마당(시장) 활성화에 기여하는 부분이 크다. ”

―탈북민이 정착하면서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은 뭔가.

“탈북민 다수는 고등중학교 정도의 학력이 대부분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존하기 위한 자생력을 키우고 취업까지 해야 되는데 잘 안 된다. 대학교육까지는 특례 제도가 있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 취업과 창업에도 소수자 우대 정책이 있지만 여러 가지 변수가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국가가 100% 다 해줄 수가 없다. 그래서 탈북자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아주 크다.”

―재단에서 역점을 두고 있는 탈북민 지원 대책은 어떤 것들이 있나.

“현재 공공기관과 법률회사 등 10곳과 탈북민 정착을 돕기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착한(着韓) 협업’ 사업이다. 중견기업협회와는 ‘1사(社)1통(統)’ 사업을 펼치고 있다. 회사당 한 명의 탈북민을 채용해 통일에 대비한 전문기능인으로 양성하자는 취지다. 중견기업협회 소속 300개 기업에 300명을 취업시키는 것이 목표다.”

―탈북민 채용과 관련한 업체 반응은.

“우여곡절 끝에 3명이 취업했다. 처음엔 기업들이 실익이 없다는 얘기를 하더라. 사회적 공헌 의지가 강한 기업들이 있고, 통일에 기여한다는 측면이 공감대를 산 것 같다. 통일 과정에서 반드시 북한 재건이라는 큰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왕이면 먼저 여기 온 북한 주민들이 능력을 갖추면 역할을 수행하기가 낫지 않겠나.”

―겨우 3명밖에 못했나.

“겨우 3명이 아니라 정말 사연이 많았다. 공단인데도 연봉이 낮다면서 안 가겠다는 탈북민도 있고 은행 채용 면접에 아예 나타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게 불편한 진실이다. 우리의 잘못된 정착 지원 정책 탓도 있고 탈북민이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이 덜된 측면도 있다. 한 가지 희망은 나이가 어려서 한국에 올수록 가능성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탈북 대학생의 학업지원과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해 통일 엘리트를 육성하는 ‘메르켈 프로젝트’(북한 출신 지도자 육성 계획)가 중요하다. 법무법인 ‘율촌’의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은 한국 대학생들이 탈북민 자녀의 학업을 지도하도록 하는 봉사 프로그램이 좋은 사례다. 남과 북의 젊은이가 만나 서로의 성장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이들은 벌써 작은 통일을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탈북민의 다수가 여성이다.

“가임기 여성이 대부분이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많다.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데 아이 때문에 취업도 못한다. 직업훈련을 받으려고 해도 아이를 맡길 곳이 없다. 한국 여성처럼 애를 봐줄 친정엄마나 일가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려운 거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서·심리적 치료인데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다. 대부분 중국 등 제3국을 경유해 들어오는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인권 유린의 희생자들이다. 탈북여성 인권에 대해 우리 정부나 시민단체, 정치권에서 이제는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한다. 여성 문제이기 이전에 우리 민족의 문제이며, 모자보건의 문제이다. 중국에서 고생하다 만신창이가 돼서 대한민국에 들어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 너무 커진다.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우리가 북한과의 관계, 중국과의 마찰을 우려해 계속 눈 감고 귀 막아야 하는지, 같은 여성으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기관장으로서 굉장히 고뇌하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에선 ‘조용한 외교’가 우리 정부의 기조다.

“중국을 경유해서 한국으로 온 탈북여성은 중국에서 태어난 아이를 데려온다. 탈북할 때는 혼자였지만 살아남기 위해 중국 남자를 만난 경우가 태반이다. 중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비보호 청소년으로 분류돼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탈북 여성이 아이를 키워야 하는데 (정신적·물질적으로) 아이를 보살필 여력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 이 아이들은 대한민국에서 자랄 텐데, 커서 이 아이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미래와 관련된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정리=김민서 기자, 사진=이재문 기자

■정옥임 이사장은… 

▲서울 출생(54) ▲고려대 정경대, 대학원 석·박사 ▲미국 스탠퍼드대 박사후과정 객원연구원 ▲미국 후버연구소 객원 연구위원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선문대 국제학부 교수 ▲18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북한이탈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 ▲한양대 특임교수 ▲남북하나재단(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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